마리나 라스코바
'''마리나 미하일로브나 라스코바(Марина Михайловна Раскова : 1912~1943)'''
수 천명의 젊은 소련 여성들을 비행사의 꿈으로 인도해준 마리나 라스코바도 처음부터 비행기를 몰겠다는 꿈은 없었고, "말리니나"라는 아명으로 불리던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어했다. 그녀는 모스크바의 중산층 가정에서 1912년 3월 28일에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교사였고 아버지 미하일 D. 말리닌(Михаил Дмитриевич Малинин)은 성악 교수였는데, 1919년에 오토바이 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앓다가 사망했다. 이러한 가정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소녀 니나는 연기와 노래 레슨을 계속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를 잃은 심리적인 충격과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성악 공부를 계속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편모 슬하에서 금전적으로 궁핍해지고 몸까지 병약했던 그녀는 결국 음악 공부를 중단하고 다른 꿈을 찾게 만들었다. 니나가 새로 찾아낸 목표는 화학 공부였다.
1929년에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말리니나는 염색 공장에 들어가 화학 기사로서 취업했다. 곧 그녀는 세르게이 라스코프(Сергея Ивановича Расков)라는 기술자와 결혼했으며, 그후로 그녀의 성은 라스코바로 바뀌었다. 이듬해에 둘 사이에서 딸 타냐가 태어났지만, 마리나는 그의 남편과 6년만인 1935년에 이혼하기에 이른다.
아직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던 1931년에 라스코바는 공장을 떠나 소련 공군이 운영하는 주콥스키 항공연구소(Военно-воздушная инженерная академия имени Н. Е. Жуковского)에 견습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녀가 하늘과 대한 동경을 품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로, 점점 비행에 매료되어갔다. 그녀는 이 연구소에서 물리학과 수학, 기계 정비, 전파이론, 항법 등을 공부했다. 마침내 1934년에 라스코바는 레닌그라드 공군 과학연구소(Ленинградский институт инженеров гражданского воздушного флота)의 연수 과정을 마치고 항법사로서 등록되었는데, 이것은 소련 여성으로서는 처음이었다.
1938년 9월 24일과 25일, 마리나 라스코바는 "로드나(Родина)"라고 이름붙여진 시제 쌍발 폭격기 투폴레프 DB-2(АНТ-37)를 이용한 장거리 비행에 항법사 자격으로 동참했다. 발렌티나 S. 그리조두보바(Валентина Степановна Гризодубова : 1909~1993)[1] 와 폴리나 D. 오시펜코(Полина Денисовна Осипенко : 1907~1939) 세 여성들은 모스크바에서 소련령 극동의 보스토크 - Беспосадочный перелёт Москва — Дальний Восток - 까지 비행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폭격기에 실린 연료가 목적지까지 도달하기에 충분하지 못했는데, 이는 이륙 전에 지상에서 엔진을 테스트한 다음 정비사들이 테스트에 쓴 만큼 가솔린을 채우는 것을 잊어버린 실수 때문이었다. 라스코바는 자신이 탑승한 비행기에서 낙하산으로 탈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장 그리조두보바는 이 불시착 과정에서 승무원들이 죽을수도 있다는 사실때문에 매우 두려워했다. 라스코바는 고도 2,300 m에서 뛰어내려 무사히 지상에 착지했지만, 두 동료들과 합류할 때까지 10일간이나 황야를 해메야만 했다. 대규모 구조 작전이 감행되어 세 승무원들은 겨우 구출되었고, 폭격기는 추락해 늪에 빠져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이 비행으로 세 여성들은 6,450 km의 비행 기록을 수립했고, 1938년 11월 2일에 금성 훈장과 레닌훈장을 수여받았다. 1940년에 정식으로 모스크바 공산당에 입당한 라스코바는 정부 기관을 돌며 순회 강연을 했으며, 프룬제 군사대학에서 공부하며 고위급 장교로 진급할 길도 열렸다.
이듬해 6월에 독소전이 터졌지만 소령 계급장을 단 라스코바는 여성이었던 탓에 전투에 참가하라는 명령은 받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인민국방위원회(НКВД)에 참여하여 여성 비행사들을 모집했다. 그녀의 유명세와 인기에 힘입어 라스코바 소령은 상부의 허가를 받아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비행연대를 편성할 수 있었다. 이 연대는 최종적으로 전투 비행이 승인되었고, 라스코바 자신이 그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녀의 호소에 소련 각지에서 구름떼처럼 모여든 소녀들 중에서 1,000여명의 여성 지원자들이 선발되었고, 그녀들은 볼가 강에 위치한 엥겔스 기지에서 맹훈련을 받았다. 제46폭격기 비행연대(46-й гвардейский ночной бомбардировочный авиационный полк)로 이름 붙여진 그 여성 부대는 의외로 규모가 커서 3개 부대로 나뉘어 있었는데 라스코바는 그중 제587급강하 폭격기연대(587-го бомбардировочного)[2] 를 직접 지휘했다. 그들은 새롭게 만들어진 페트리야코프 Pe-2 쌍발 폭격기의 조종과 탑승 훈련을 받았다.
그러던 1943년 1월 4일, 마리나 라스코바 연대장은 Pe-2 폭격기에 크룰레프 V. 이바노비치(Круглев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와 예로피예프 N. 니콜라예비치(Ерофеев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2명의 부하들을 태우고 강풍과 눈보라까지 몰아치는 악천후를 무릅쓰고 이륙을 감행했지만 결국 스탈린그라드 부근의 들판에 추락하고 말았고, 탑승자는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 화장된 그녀의 유해는 모스크바의 크렘린 벽 묘지에 매장되었다.
1. 출생과 소녀 시절
수 천명의 젊은 소련 여성들을 비행사의 꿈으로 인도해준 마리나 라스코바도 처음부터 비행기를 몰겠다는 꿈은 없었고, "말리니나"라는 아명으로 불리던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오페라 가수가 되고 싶어했다. 그녀는 모스크바의 중산층 가정에서 1912년 3월 28일에 태어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교사였고 아버지 미하일 D. 말리닌(Михаил Дмитриевич Малинин)은 성악 교수였는데, 1919년에 오토바이 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원에서 앓다가 사망했다. 이러한 가정의 비극에도 불구하고 소녀 니나는 연기와 노래 레슨을 계속 받았다. 하지만 아버지를 잃은 심리적인 충격과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성악 공부를 계속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편모 슬하에서 금전적으로 궁핍해지고 몸까지 병약했던 그녀는 결국 음악 공부를 중단하고 다른 꿈을 찾게 만들었다. 니나가 새로 찾아낸 목표는 화학 공부였다.
2. 사회인으로 첫발
1929년에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말리니나는 염색 공장에 들어가 화학 기사로서 취업했다. 곧 그녀는 세르게이 라스코프(Сергея Ивановича Расков)라는 기술자와 결혼했으며, 그후로 그녀의 성은 라스코바로 바뀌었다. 이듬해에 둘 사이에서 딸 타냐가 태어났지만, 마리나는 그의 남편과 6년만인 1935년에 이혼하기에 이른다.
아직 결혼 생활을 유지하고 있던 1931년에 라스코바는 공장을 떠나 소련 공군이 운영하는 주콥스키 항공연구소(Военно-воздушная инженерная академия имени Н. Е. Жуковского)에 견습생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녀가 하늘과 대한 동경을 품게 된 것은 바로 이때부터로, 점점 비행에 매료되어갔다. 그녀는 이 연구소에서 물리학과 수학, 기계 정비, 전파이론, 항법 등을 공부했다. 마침내 1934년에 라스코바는 레닌그라드 공군 과학연구소(Ленинградский институт инженеров гражданского воздушного флота)의 연수 과정을 마치고 항법사로서 등록되었는데, 이것은 소련 여성으로서는 처음이었다.
3. 장거리 비행에 도전
1938년 9월 24일과 25일, 마리나 라스코바는 "로드나(Родина)"라고 이름붙여진 시제 쌍발 폭격기 투폴레프 DB-2(АНТ-37)를 이용한 장거리 비행에 항법사 자격으로 동참했다. 발렌티나 S. 그리조두보바(Валентина Степановна Гризодубова : 1909~1993)[1] 와 폴리나 D. 오시펜코(Полина Денисовна Осипенко : 1907~1939) 세 여성들은 모스크바에서 소련령 극동의 보스토크 - Беспосадочный перелёт Москва — Дальний Восток - 까지 비행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폭격기에 실린 연료가 목적지까지 도달하기에 충분하지 못했는데, 이는 이륙 전에 지상에서 엔진을 테스트한 다음 정비사들이 테스트에 쓴 만큼 가솔린을 채우는 것을 잊어버린 실수 때문이었다. 라스코바는 자신이 탑승한 비행기에서 낙하산으로 탈출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기장 그리조두보바는 이 불시착 과정에서 승무원들이 죽을수도 있다는 사실때문에 매우 두려워했다. 라스코바는 고도 2,300 m에서 뛰어내려 무사히 지상에 착지했지만, 두 동료들과 합류할 때까지 10일간이나 황야를 해메야만 했다. 대규모 구조 작전이 감행되어 세 승무원들은 겨우 구출되었고, 폭격기는 추락해 늪에 빠져 있는 채로 발견되었다.
이 비행으로 세 여성들은 6,450 km의 비행 기록을 수립했고, 1938년 11월 2일에 금성 훈장과 레닌훈장을 수여받았다. 1940년에 정식으로 모스크바 공산당에 입당한 라스코바는 정부 기관을 돌며 순회 강연을 했으며, 프룬제 군사대학에서 공부하며 고위급 장교로 진급할 길도 열렸다.
4. 대조국 전쟁
이듬해 6월에 독소전이 터졌지만 소령 계급장을 단 라스코바는 여성이었던 탓에 전투에 참가하라는 명령은 받지 못했다. 대신 그녀는 인민국방위원회(НКВД)에 참여하여 여성 비행사들을 모집했다. 그녀의 유명세와 인기에 힘입어 라스코바 소령은 상부의 허가를 받아 전원 여성으로 구성된 비행연대를 편성할 수 있었다. 이 연대는 최종적으로 전투 비행이 승인되었고, 라스코바 자신이 그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녀의 호소에 소련 각지에서 구름떼처럼 모여든 소녀들 중에서 1,000여명의 여성 지원자들이 선발되었고, 그녀들은 볼가 강에 위치한 엥겔스 기지에서 맹훈련을 받았다. 제46폭격기 비행연대(46-й гвардейский ночной бомбардировочный авиационный полк)로 이름 붙여진 그 여성 부대는 의외로 규모가 커서 3개 부대로 나뉘어 있었는데 라스코바는 그중 제587급강하 폭격기연대(587-го бомбардировочного)[2] 를 직접 지휘했다. 그들은 새롭게 만들어진 페트리야코프 Pe-2 쌍발 폭격기의 조종과 탑승 훈련을 받았다.
그러던 1943년 1월 4일, 마리나 라스코바 연대장은 Pe-2 폭격기에 크룰레프 V. 이바노비치(Круглев Владимир Иванович)와 예로피예프 N. 니콜라예비치(Ерофеев Николай Николаевич), 2명의 부하들을 태우고 강풍과 눈보라까지 몰아치는 악천후를 무릅쓰고 이륙을 감행했지만 결국 스탈린그라드 부근의 들판에 추락하고 말았고, 탑승자는 모두 사망하고 말았다. 화장된 그녀의 유해는 모스크바의 크렘린 벽 묘지에 매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