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린(당나라)

 



馬璘
721년 ~ 777년 1월 26일
당나라 기주 부풍(扶風)[1] 사람으로 당시 당의 중흥명장이었다. 자는 인걸(仁傑)이다.
1. 생애와 죽음
2. 자녀


1. 생애와 죽음


마린의 증조부는 신풍현령, 조부 마정회는 우위위장군, 아버지 마성은 우사어솔부병조참군으로 모두 군인 출신이었다. 마린은 비록 학문에 약했으나 무예에 능숙하여 그도 군인으로 종사했다. 당현종 개원 연간 안서절도부에서 일하다가 기이한 공적으로 금오위장군으로 발탁되었다. 숙종 지덕 연간 안사의 난으로 전세가 위급해지자 마린은 군사 3천을 이끌고 봉상에 주둔했다. 당숙종은 그 공로를 사 당시 반란군 진압 책임자였던 하동절도사 이광필과 함께 다니도록 했다. 안사의 난 동안 사조의의 군대를 개발살내어 당 조정에서는 마린을 태상경으로 봉했다.
763년, 복고회은토번, 당항, 회흘 등 여러 이민족을 이끌어들여 장안을 침공하자 마린이 직접 나서서 반란군을 토벌하고 장안을 탈환했다. 섬주로 피난갔던 당대종은 마린을 어사중승으로 승진시켰다. 765년, 다시 복고회은이 토번과 함께 경주· 빈녕 등을 약탈하자 마린이 이충신, 이광진, 학정옥, 낙봉선, 이일월, 이포옥 등과 함께 대응하여 적을 깨뜨렸다. 이 공으로 부풍군왕에 봉해졌다.
766년, 곽영예의 반란을 진압해 빈주자사를 겸하였고, 대력 연간 빈녕절도사에 임명되었다. 768년, 토번이 다시 당의 변경 영무와 빈주를 공격하자 마린이 직접 나가 2만 여명을 무찔러 크게 승리했다. 이후 당 조정에서는 토번군을 지속적으로 방어하는 사령관에 적합하다고 생각되어 마린을 빈주에서 경주로 옮기고 경원절도로 삼았다. 마린은 효율적으로 적을 방비하기 위해 빈녕을 분할하고 삭방군에 속하도록 했다. 772년, 토번이 내지에 재침하자 번장 혼감과 함께 반원에서 적을 기다렸다가 기습해 토번군을 격파시켰다. 그런데, 이듬해인 773년에 또다시 토번이 당의 변경을 공격해 당군을 이록에서 무너뜨렸다. 이에 마린은 명장 곽자의와 함께 연합하여 적을 박살냈다.
774년, 경원절도사로 재임하고 있던 마린은 장안에 내조하여 당 조정으로부터 상서좌복야 · 지성사로 봉해졌다. 777년 1월 26일, 어느때와 다름없이 군영을 관리하다가 갑자기 숨지고 말았다. 그의 일생 56년. 사도를 추증하고 시호를 무라고 했다. 마린은 곽자의나 이광필과 다르게 재력이나 권력을 배척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전쟁에서 승리하고 오면 그의 상응하는 하사품을 받았으며, 돈이 많아서 집을 보수하는데에 쓰기도 했다. 당덕종은 마린의 사치가 심하다고 생각하여 마린 사후 마린의 대저택을 몰수해 국유화시켰다. 마린의 자식들은 예의와 행실이 바르지 않았고, 맨날 백수처럼 놀아서 곧이어 재산을 다 탕진했다.

2. 자녀


사자:마간, 행광록소경, 상주국, 사자금어대
아들:마호, 검교상서주객원외랑, 상주국, 사자금어대
아들:마오, 조청랑, 행하남부참군
아들:마희, 조청랑, 행태상사봉예랑
아들:마서, 홍문관명경

[1] 지금의 섬서 성 부풍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