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고회은
僕固懷恩
(? ~ 765)
'''안사의 난을 진압하는데에 큰 공을 세운 1등 공신'''
'''토사구팽으로 생을 마감한 비운의 명장'''
1. 개요
복고회은은 튀르크계 부족인 철륵 9성 중 복고부 사람으로,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가장 밑바닥에서 가장 위로 올라선''' 인물이다. 가장 많은 전란에 몸소 참여했고, 여러 방면에서 활약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망산에서의 패전처럼 잘못이 없는 것도 아니나, '''공이 과보다 훨씬 더 큰 인물'''이라 아니할 수 없다.
또한, 그는 여태까지의 전역에서 충용스러운 모습 또한 보여주었다. 안사의 난 기간동안 '''그의 일족 중 당을 위해 목숨을 바친 자가 46명이며, 그 중에는 군율을 세우기 위해 자기 손으로 처형한 그의 친아들도 있다.''' 회흘을 회유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정략결혼시키기도 하는 등 그는 자신의 친자식들 또한 당을 위해 희생했던, 충심을 따지면 남에게 결코 뒤지지 않는 인물이였다. 생전에 금미도독, 상서좌복야, 상서령, 하북 부원수, 선우진북도호, 삭방절도사 등을 겸하였다.
2. 안사의 난 동안
755년, 안록산이 반란을 일으키자 부족을 이끌고 곽자의를 따라다녔다. 고수암과 설충의를 격파하고 사사명을 패배시켜 세상에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756년 당숙종이 영무에서 즉위할 때 곽자의를 따라 즉위식에 참석하기도 했다. 동라 부족(안록산의 휘하 부족) 일파를 공격해 세력을 꺾기도 하였다. 이 해에 당 조정은 위기를 극복하고자 비록 북방 오랑캐이지만, 빈왕 이수례의 아들 돈황왕 승심과 복고회은을 화친사로 위구르 제국에 파견하여 원군을 요청하였다. 그러자 카를륵 카간은 자신의 딸을 승심과 정략적으로 혼인하게 하였고, 당 공주의 하가를 요청하였다. 복고회은은 위구르의 사신 엽호제득과 함께 당에 입조하여 양국의 군사적 지원에 대한 합의를 성공시켰다. 위구르의 지원으로 양경을 탈환하고 하북을 평정하자 이에 758년, 숙종은 자신의 어린 딸인 영국공주을 비가궐가한에게 시집보냈다. 더불어 비가궐가한이 자신의 아들과 혼인을 요청하자 숙종은 복고회은의 딸과 혼인하도록 하였으며 회흘을 공식적으로 책봉하여 당과 회흘의 긴밀한 관계가 발전되었다. 이처럼 복고회은의 출신과 당을 돕고자 했던 의지 덕분에 당은 일시적이나마 대연의 세력을 제압할 수 있었다. 갈륵가한을 뒤이어 모우가한이 즉위하자 복고회은의 딸이 가한의 가돈이 되었다. 모우가한이 복고회은과 그의 어머니를 만나보고자 하였으나 복고회은은 당의 신료들에게 의심을 받을까 걱정되어 한참 응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 사실을 안 숙종이 허락하여 이들은 태원에서 만났고, 이를 기회로 위구르 제국군이 섬주에 들어와 사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하북을 평정하였다.
3. 안사의 난 이후
하북이 모두 수복되자 당 조정은 복고회은에게 명하여 위구르 제국군의 귀환을 담당하도록 부탁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복고회은이 위구르와 결탁하여 조정을 배신하여 변경의 우환이 될 것이라고 주장하는 신하들이 나타났다. 마수는 임무를 마치고 복귀하면서 이포옥에게 "복고회은은 공로를 세운 것을 믿고 교만하고 방자하며 그 아들인 복고창은 용감한 짓을 좋아하고 가벼운데, 지금 안으로 네 명의 장수[1] 를 세워놓고 밖으로는 회흘과 왕래하니, 반드시 하동과 택로를 넘볼 뜻을 가지고 있다."며 경고했으며, 하동절도사 신운경 또한 복고회은이 회흘을 전송하기 위해 태원으로 왔을때 문을 열어주지 않기도 했다. 이에 복고회은은 불만을 가지고, 또한 토사구팽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가지게 되었으며, '''복고회은의 난이 일어나는 하나의 큰 원인이 된다.''' 이후 낙봉선이 대종에게 복고회은이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태에 이르자 복고회은은 대종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을 변호하였다. 대종은 이에 배준경을 파견해 복고회은을 타이르고 그의 거취를 살펴보았다. 복고회은은 눈물을 쏟아내며 그의 발을 안고 서럽게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일단 그렇게 끝나는 듯 했지만, 10월에 토번이 장안을 침략하여 상황은 더더욱 늪으로 치달았다. '''바로 복고회은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었던 것.''' 물론 이광필도 움직이지 않았으며 이것은 환관 정원진의 실책 때문이었다. 각지의 변경 장수들이 토번의 침공 사실을 알렸지만 정원진은 그때마다 황제에게 보고를 올리지 않았다. 다행스럽게도 곽자의와 마린 등이 일을 도모하여 토번군을 쫓아내어 위기는 일단락되었다. 한편, 검교형부상서 안진경이 삭방에 들어가 복고회은을 찾았다. 대종이 허락하지 않자 유세하였다. 그는 복고회은을 곽자의로 대체할 수 있다면서 그의 근왕하지 않은 것을 비판하였다. 이것은 이포진의 생각도 같았다.
4. 복고회은의 난(764~765)
거진 7년여를 끌어온 안사의 난을 진압하는 데 가장 큰 공로자를 꼽으라면 '''곽자의, 이광필, 복고회은'''이라는 데 대부분 동감할 것이다. 실제로 당대에도 이 셋이 '''최고의 공로자'''라는데에는 이견이 없었다. 그러나, 그중 한명인 복고회은은 사사명의 수급이 장안에 내걸린지 1년만에 스스로 반란 주동자가 되어 대규모 전란을 일으키고 마니 실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4.1. 최고의 공로자 복고회은
당 조정에서는 물론 그를 후대하였다. 안사의 난을 거치면서 곽자의, 이광필과 함께 군왕직에 오른 세 인물 중 하나(대녕군왕)이자, 당당한 최고의 관직인 중서령직까지 거머쥔다.[2] 그의 여러 아들 중 가장 활약이 컸던 복고창 또한 어사대부에 절도사까지 올라갔다. 그만큼 그의 공로와 대접은 컸다.
4.2. 복고회은과 조정의 갈등
그러나, 이런 최고의 공로자였던 복고회은은, 전란이 끝나면서 토사구팽의 위기의식을 갖기 시작한다. 이때문에 그는 항복해온 절도사들의 후원자가 되면서 그들을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였는데, 이것이 오히려 '''복고회은에 대한 경계심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거기다 회흘이 심한 횡포를 부리면서 복고회은에 대한 잠재적인 불만이 쌓여갔고, 이를 느낀 복고회은은 더더욱 불안감에 휩싸인다.
이런 상호 불신이 극대화된 것은 역시 토번의 장안 침략 사건. 이때에 움직이지 않으면서 복고회은에 대한 의심은 거의 '''사실의 영역'''에 도달했다. 당대종 자신은 복고회은과 같이 싸운 전우이기도 하고 '''워낙에 당대종이 호구스러운 인물인지라''' 많이 봐주고 설득하고 나중에도 용서해주려 했지만 주변 상황 자체가 복고회은을 반란으로 몰고 갔고, 복고회은 자신도 조정을 끝까지 신뢰하지 않게 되면서 결국 멈출수 없게 된다.
시작은 하동절도사 신운경과의 갈등이였다. 회흘이 돌아갈때 마중나온 복고회은에게 태원의 성문을 열어주지 않은데 분노한 복고회은은 조정에 표문을 올려 신운경의 처벌을 요구함과 동시에 군을 전진배치시켜 신운경을 압박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낙봉선을 보내 화해시키려 했으나 신운경이 낙봉선을 후하게 대접하는 등의 로비를 행한데다 복고회은이 자신을 억류하려 한다고 오해한 낙봉선이 복고회은의 반란 의혹은 사실이라며 표문을 올려 갈등은 심화된다. 물론 복고회은도 이에 반박해 신운경과 낙봉선이 자신을 무고한다며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조서를 보낸다. 갈피를 못잡은 조정에서는 양측이 화해하라는 내용의 조서를 보내나, 이는 복고회은으로 하여금 더더욱 분노하게 했다. 이에 복고회은은 다시한번 표문을 올려 자신을 변호한다.
이에 조정에서는 배준경을 사신으로 파견해 복고회은으로 하여금 조정에 올라와 스스로를 변호하라고 하였으나 복고회은은 스스로 '''내진처럼 될까 두렵다'''고 하면서 이를 거부했고, 이후 토번의 장안 침략때 움직이지 않는다.
4.3. 복고회은의 난
764년 1월 말, 복고회은은 결국 반란을 일으킨다. 자신과 그 아들, 복고창이 이끄는 삭방군을 움직여 태원을 공격한 것. 그러나 신운경은 진작부터 복고회은에 대비하고 있었고 시작부터 패배를 맛본다. 거기에 당 조정에서 1월 20일 곽자의에게 관내·하동 부원수·하중절도사직을 충임해 진압을 명하면서 말 그대로 순식간에 그 세가 약화된다. 곽자의의 복귀 소식을 들은 삭방군의 병사들은 "무슨 면목으로 분양왕(곽자의)를 볼 것인가."고 말하며 사기가 추락하고 대규모 이탈자가 생겨났다고 한다.
복고회은은 사기가 떨어진 삭방군을 이끌고 재차 태원을 공략하나 결국 실패하고, 물러나서 유차를 공격하나 이 또한 실패한다. 거기다 그의 아들이였던 삭방행영절도사 복고창까지 부하들에게 살해당하자 결국 300기의 기병만을 이끌고 북쪽으로 이탈, 영무에 위치한 삭방진의 처소를 지키고 있던 혼석지를 살해하고 영무를 장악한다. 남겨진 병사들이 곽자의에게 모두 귀부했던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나, 영무를 점거한 복고회은은 재기를 시도한다.
4.4. 회흘과의 동맹, 토번의 참패
복고회은의 반란 시도는 결국 곽자의에 의해 실패했다. 그러나, 복고회은은 포기하지 않고 회흘과 토번이라는 강대한 세력을 끌어들여 역전을 노렸으며, 복고회은의 요청에 따라 두 세력은 764년 8월, 765년 9월의 두차례에 걸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개입한다. 그러나 '''복고회은 자신이 765년 병사'''해 버린다.
복고회은이 병사하면서 전쟁은 복고회은에 의한 내전에서 당, 토번, 회흘의 삼국이 각축전을 벌이는 국제전으로 변모한다. 당은 토번 단독의 공세는 막아낼 수 있었으나 회흘이 토번과 손을 잡자 밀려서 위기에 처한다. 그러나 곽자의가 단독으로 들어가 회흘과 역으로 동맹을 맺어버리는 위업을 달성하면서 상황은 역전, 결국 토번은 회흘과 당의 협공에 의해 대패해 버리면서 전쟁은 마무리된다. 자세한 것은 곽자의 문서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