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신이
'''ﻣَﺎ سٍ ىِ'''
'''馬新貽'''
(1821.11.3~1870.8.22)
1. 개요
태평천국 운동 당시에 활약했던 녹영의 고위 장수이다.
2. 유년기
1821년 산동성 허쩌에서 후이족으로 태어난 마신이는 1847년 26세의 나이로 과거에 합격했고 진사가 됐다. 이 때 같이 합격한 동기들 중 1명이 이홍장.
3. 암살
마신이는 강서성, 안휘성, 강소성의 군정과 민정을 총괄하는 양강총독으로 1868년에 임명된다. 이 지역은 겨우 얼마전에 태평천국의 난과 염군의 난이 끝난 지역이자 난징을 관할로 두고 있으며 화중지방의 무역을 담당하는 남양통상대신의 자리도 겸해야 했기에 지방 장관직인 총독들 중 최고위직이었다. 전임자 증국번의 상군 세력을 경계한 청 조정에서 일부러 무슬림이라 뒷배가 없는 마신이를 임명해 상군 세력을 견제하려 한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2년 후인 1870년 8월 22일(동치9년 음력 7월 26일) 마신이는 한족인 장문상에 의해 암살되었다. 마신이가 남경교장에서 병사들의 훈련을 검열한 후 처소로 돌아 가는 중에 장문상이 청나라 병사 옷을 입고 갑자기 나와 인사를 한 후 찌른 것. 또 다른 말로는 훈련 참관 중 마신이의 동향 사람인 왕함진이 갑자기 그의 곁으로 와 돈을 빌려달라고 간청했는데 그 순간 장문상이 등장해 찔렀다고 한다. 확실한 것은 청나라의 지방 장관들 중 최고위직의 마신이가 대낮에 많은 사람들 앞에서 찔렸다는 것. 장문상이 갑자기 옆구리를 찔렀기에 마신이는 치명상을 입었고 다음날 죽고만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우선, 범인 장문상은 범행 후 도망칠 생각도 없이 마신이가 쓰러지는걸 본 후 순순히 체포 당했다는 것이다. 거기에 사건의 구체적인 발단 또한 확실치 않았다.
장문상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신상과 범행 이유는 다음과 같았다.
장문상은 당시 46세이며 하남성 여양 사람이다. 한 때는 태평천국의 이세현 휘하 병사였다. 범행 이유는 3가지가 있다
1. 장문상이 태평천국군에서 나와 고향으로 갔는데 아내와 집 재산이 오병섭이라는 자에게 넘어가 있었다. 따라서 당시 절강성 순무인 마신이에게 신고했지만 마신이는 사건 해결을 거부했고 고향인 영파의 관아에 항소해 겨우 아내와 재산을 찾을 수 있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재산 일부를 오병섭한테 떼였고 홧김에 한 대 친 아내는 분노에 자살해 버린 것. 이 일을 겪은 후 마신이가 자신의 인생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2. 장문상의 친구 중 해적이 있었는데 해적 토벌에 나선 마신이에게 죽었다.
3. 장문상이 생업을 위해 연 전당포를 마신이가 금지시켰다.
위의 결과가 증국번이 취조하여 얻은 결론이었다.
하지만 청나라 조정이 의사 결정을 미루고 더욱 조사를 하는동안 대중들 사이에서 장문상, 마신이 간의 야사가 퍼지고 증국번의 상군 계열이 마신이를 죽였다는 소문이 돌게 된다.[1]
결과론적으로 사건은 해적이 장문상을 사주해 죽인 것으로 나왔고 1871년 4월, 장문상은 능지형을 당한다. 어찌나 큰 사건이었던지 청말 4대 기안의 첫번째로 꼽힌다.
4. 미디어
장철 감독의 1973년작 영화 자마(刺馬), 진가신 감독의 영화 명장이 마신이 암살사건을 다루고 있다.
[1] 굽시니스트의 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에서도 이홍장이 증국번의 복권을 위해 암살을 사주한 것으로 암시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