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말 4대 기안

 


1. 개요
2. 배경
3. 자마안(刺馬案)
4. 여항안(餘杭案)
5. 양월루안(楊月樓案)
6. 태원안(太原案)
7. 번외
7.1. 통주안(通州案)
7.2. 회안안(淮安案)


1. 개요


清末四大奇案
청나라 말엽인 서태후의 통치기간인 동치제, 광서제 무렵에 터져나온 4가지 기이한 사건들을 말한다. 자마안(刺馬案), 여항안(餘杭案), 양월루안(楊月樓案), 태원안(太原案)을 가리키는데 사람에 따라서 태원안을 빼고 그 대신 통주안(通州案)과 회안안(淮安案)을 넣는 경우도 있다. 이 모든 사건이 청나라 전국을 뒤흔들었고, 드라마틱한 전개로 인해 사건 후부터 꾸준히 연극, 영화, 드라마로 제작되는 등 미디어화가 이루어졌다.

2. 배경


청나라 말기는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 야욕과 함께 사회풍토도 영향을 받기 시작한데다, 가경제 이후로 만성적인 병폐에 시달려 곪아터지려는 세기말 그 자체였다. 더구나 도광제의 죽음 이후 황제인 함풍제의 무능을 넘어 동치제광서제 시대가 오면서 서태후가 국정을 단단히 장악하여

3. 자마안(刺馬案)


동치9년 7월 26일(양력 1870년 8월 22일) 묘시 무렵 양강총독 마신이(馬新貽)가 장문상(張汶祥)에 의해 총독부 입구 부근에서 칼에 찔려 죽음을 당한 사건이다. 마신이가 암살된 사건이라 자마안이라 불린다.
범인인 장문상은 도망칠 여유가 있었음에도 도망치지 않고 순순히 포박되어 심문을 받았는데 강녕장군 괴옥(魁玉)과 마신이의 심복이었던 원보경(袁保慶)[1]은 장문상을 고문해서라도 배후를 밝혀내려 했으나 금릉으로 사건을 조사차 찾아온 장지동(張之洞)의 아우 장지만(張之萬)이 고문을 하면 범인이 불기 전에 죽는다면서 반대했다. 이에 괴옥은 조정에 상소문을 올린다.
상소를 받은 서태후는 일이 해결되기는커녕 수렁에 빠졌다는 사실에 크게 노해 형부상서 정돈근(鄭敦謹)과 증국번을 불러 양강총독 겸 흠차대신으로 임명하여 금릉으로 파견하여 사건을 조사, 해결토록 지시했지만, 총독으로 임명되어 먼저 파견된 증국번은 사건 해결에 적극적이기는 커녕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다.[2] 나중에 정돈근이 금릉으로 도착하자 그제서야 장문상을 심문하기 시작한다.
장문상의 자술에 의하면 그는 하남성 여양현 태생으로 46세이며 한때 해적, 태평천국, 염군(捻軍) 소속이었던 인물이며, 이시현의 휘하에 있다가 스스로 떠나 자신의 거처였던 영파에 돌아오니 오영섭이라는 자가 자신의 부인, 재산을 빼앗아 살고 있는 것을 보고 마신이에게 이를 해결해 줄 것을 청하나 거절당해 상고하여 겨우 부인을 되돌려받지만 재산은 되돌려받지 못했다.
이에 화가 나 아내를 추궁했고 결국 아내가 홧김에 자살해 버리자 원한을 품게 되었다. 게다가 해적 시절 가장 친한 옛친구가 마신이에게 죽임을 당한 적이 있었으며 마지막 생계수단으로 개업한 전당포 사업을 못하게 강제집행해 버려 결국 이 세 가지 사건이 동기가 되어 울분이 폭발해 마신이를 살해할 마음을 먹고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다.
이에 증국번과 정돈근은 원한에 의한 살인 정도로 생각하고 조정에 결론을 내 줄 것을 요청하지만, 더 자세히 조사하라는 명령만 내려올 뿐 해결하려는 결정은 미루어졌다. 이런 실정이라 세간에는 장문상과 마신이가 의형제간이었다느니, 여자 문제로 다투다 칼부림이 난 것이라느니, 심지어 장문상의 의형인 도적 조이호에게 미인인 아내가 있었는데 이 여자와 마신이가 사통을 하고 아예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조이호를 살해하자 배신감을 느낀 그가 사건을 일으켰다는 등의 야사가 난무했다. 심지어 태평천국군의 포로가 된 마신이를 장문상과 조이호가 구해주고 관군에 투항하여 토벌대가 되었다가 마신이가 조이호의 아내를 빼앗고 그를 살해하자 장문상이 마신이를 살해하게 되었다는 썰도 난무했으니 이 이야기가 얼마나 유명했는지 짐작이 갈 만하다.
더욱 심각한 것은 소문이 커져서 비대해진 상군을 조정에서 통제하고자 마신이를 양강총독에 임명해 파견했고[3] 거기다 금릉을 수복하면서 태평천국군의 금은 등 보물을 상군이 약탈, 횡령했다는 이야기도 돌아서 서태후의 비밀 임무를 받고서 이를 조사하다가 증국번 등 상군의 핵심 인물들이 장문상을 사주해 살해했다는 루머와,[4] 심지어 마신이가 회족 출신이라는 점 때문에 감숙성 일대에 발발했던 회족 봉기에 동조했다는 설이나 국가에서 지원받은 예산을 횡령했다는 혐의 등 '''정치적인 루머'''까지 대놓고 퍼졌다.[5][6]
결국 이에 불안해하던 증국번에게 마침 조정의 공문이 하달되었다. 장문상이 개인적인 원한을 해결하기 위해 해적의 도움을 받아 조정 대관을 살해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는 반역죄에 해당하니 장문상을 극형에 처하라는 공문이었다. 이에 따라 장문상은 이듬해 4월 말 무렵 금릉에서 능지형을 선고받고 마신이의 제단 앞에서 살점과 내장이 도려졌으며, 머리와 심장, 살점은 마신이의 진혼제를 위한 제물로 바쳐지는 것으로 끝났다.
장문상이 처형된 뒤 정돈근은 북경으로 돌아가지 않고 증국번에게 받은 은자 등을 모두 반납해 병을 핑계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한 뒤 안휘에서 헤어졌으며, 이후 두번 다시 벼슬에 오르지 않았다.
워낙에 유명한 사건인데다 경위부터 결말까지 수많은 호사가들의 소문에 살이 덧붙여진데다 당시의 복잡하고 지엽적이던 정치적 상황에 맞물려 수많은 음모론이 성행하게 되었고, 살인자가 극형에 처해진 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루머는 끊이지 않아서 청나라 말 중국인들의 뇌리에 강하게 기억되는 사건이며, 지금도 청말 사대 기안중 으뜸으로 언급되는 사건이다.
그런만큼 미디어화도 매우 적극적이고 현재에도 중화권에서 매우 유명한 미디어 소재이며, 수많은 가설들을 짜맞추어 정리해 스토리화 하기에도 좋은 환경이라 그런 듯하다. 대표적으로 장철 감독의 자마가 바로 이 사건을 주제로 한 영화이며, 진가신 감독 영화 명장도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포학례 감독의 만전천심은 배경이 원나라이지만 줄거리는 이 사건의 경과와 매우 흡사하다. 그외에도 수많은 영화, 드라마의 소재가 되었다.

4. 여항안(餘杭案)


피해자였던 두 남녀의 이름을 따 양내무여소백채안(楊乃武與小白菜案), 이를 해석하면 양내무와 소백채 사건이라고 한다. 절강성 여항현에서 일어났으므로 여항안이라 불리는데, 일반적으로 양내무와 소백채 사건으로 더 유명하다. 이 사건은 '''전근대 사법체계의 한계'''[7]와 한 마을에서 벌어진 재판이 '''중앙정부의 정쟁'''으로까지 번지는 나비효과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양내무는 여항현의 유지로 집안 대대로 양잠업을 하며 생계를 꾸려 온 중상류층 집안이었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강직하기로 유명했는데 일생에 결혼을 세번 한다. 첫째는 오씨(吳氏)이며, 둘째는 대양첨씨(大楊詹氏)[8], 셋째는 소양첨씨(小楊詹氏)이다. 오씨는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사했고 대양첨씨는 출산 도중에 사망했고 마지막으로 맞이한 아내가 바로 대양첨씨의 여동생이었으며 사건당시의 아내로 남편을 구하기 위해 고생하게 된다.
소백채는 별명으로 본명이 필생고(畢生姑)인데 스토리화가 되면서 필수고(畢秀姑)로 개명되었다. 왜 이런 별명이 붙었느냐면 상당한 미인으로 정평이 나 있었던데다 항상 초록색 상의에 하얀색 하의를 입고 다녀서 사람들이 그녀를 소백채라는 애칭을 붙여주었고 이것이 굳어졌기 때문이다. 남편은 갈품련(葛品連)으로 부모가 소백채와의 이웃이라 결혼적령기가 되자 결혼하였고 가업인 두부를 만들어 파는 일을 하였다.
양내무가 집을 하나 새로 지어 가지고 있었는데 갈품련과 소백채 신혼부부를 맞이해 방 하나를 세놓아 이들을 살게 해주었다. 갈품련이 일 때문에 집에 잘 찾아오지 않다보니 소백채가 자주 양내무의 신세를 졌다. 거기다 그녀는 불심이 깊어 불경을 읽기를 원했는데, 수재였던 그가 기꺼이 글을 가르쳐 줬고, 심지어 한 가족 수준으로 생활하였다. 이때는 양내무도 부인이 멀쩡히 살아있을 때라 사람들도 그다지 의심하지 않았다.[9]
그런데 동치11년(1872년) 가을에 양내무의 부인이 아이를 낳다가 죽고 말았다. 그 후에도 소백채와의 만남은 계속 이어졌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이 둘이서 간통한다는 루머가 퍼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양내무와 소백채와의 관계도 조금씩 금이 가는데, 방세 문제로 인해 결국 이사를 가게 되고 양내무는 전 부인의 여동생인 첨채봉(詹彩鳳)과 결혼했으며 이듬해인 동치12년(1873년) 8월 향시에 합격하여 거인이 된다.
같은 해인 10월경에 갈품련이 갑자기 병으로 몸져 누웠으며, 여러 차례 구토했다. 그는 전염병에 걸린 것으로 믿고 소백채를 시켜 약방에서 약 한첩을 타오도록 하여 그것을 복용했지만 병이 악화되었고 다음날 새벽에 죽었는데 입과 코에서 피가 쏟아졌다. 시신을 거둔 갈품련의 계모가 며느리인 소백채가 '''독약을 먹여 아들을 살해'''했다 지레짐작하고 이를 고발하여 사건이 시작되었다.
당시 여항 지현인 유석동(劉錫彤)은 수재였던 진죽산(陳竹山)과 친한 사이였는데[10], 그가 갈품련의 죽음에는 양내무와 소백채가 관계가 있다는 항간에 떠돌던 소문들을 곧이곧대로 그에게 찔러댔다.[11] 그 말을 들은 유석동은 무릎을 치면서 검시결과가 오자마자[12] 소백채를 붙잡아 심문했다. 이 심문이라는 게 독약을 구하여 남편을 살해한 경위만을 집요하게 따졌으니 당연히 소백채는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유석동은 자기에게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해 고문을 가해 결국 혹독한 고문을 못이긴 그녀는 양내무와 간통을 했고 남편을 살해했다는 억지 자백을 하게 된다.[13]
소백채가 억지 자백을 함으로서 양내무도 끌려와 심문을 받았으나 자신의 결백함만을 주장할뿐 심문에는 조금도 답하지 않는다. 게다가 유석동이 얻어낸 자백인 5일에 약을 양내무로부터 받았다는 것을 반박하기 위해 처가에 도움을 받아 그날 집을 떠나 제사를 드리고 다음날 6일 귀가했다는 알리바이를 대었다. 이렇게 되자 유석동도 그를 고문해야 했는데 거인신분이라 고문을 가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항주지사에게 양내무의 거짓 악행을 알린 뒤 거인신분을 박탈할 것을 탄원하는 글을 보내었다. 항주지사 진로(陳魯)가 절강순무사 양창준(楊昌濬)을 통해 조정에 상소를 올린 뒤 동치제는 성지를 내려 양내무의 신분을 박탈하고, 그가 범행을 저지른 근거를 엄중히 조사할 것을 명했다.
이에따라 유석동은 항주부로 재판을 넘겼고, 양내무의 알리바이만 쏙 빼놓고 상고하였고 자기와 면식이 있는 약방 주인 하나를 억지로 매수해 양내무가 독약인 비상을 쥐약 명목으로 구매했다는 거짓 증언을 하도록 사주했다. 그리고 이와 덧붙여 양내무와 소백채는 항주부에서 혹독한 고문에 시달리고 결국 인사불성 상태에서 억지 자백을 하고, 거짓 증거가 어우러져 판결이 나오게 되었다. 남편을 살해한 소백채는 능지형으로, 간통 뿐만 아니라 살해까지 사주한 양내무는 참입결(斬立決), 즉 즉결 참수형을 선고하여 사건을 마무리지은 뒤 진로는 절강안무사 괴하손(蒯賀蓀)에게 보고해 하루빨리 사형 집행을 허가해 주십사 하고 요청했다.
그런데 괴하손이 이 사건의 경위를 미심쩍어하여 거인신분인 양내무가 어찌 그런 천인공노할 범죄를 자행했는가에 대해 의문을 품고 최초로 사건을 맡은 유석동에게 찾아가서 사정을 듣자 유석동은 천연덕스럽게 통곡하면서 저를 믿지 않으십니까 하고 연기를 하자 그에 홀딱 넘어가버려 결국 괴하손은 자신이 무혐의로 정리할 수 있었던 사건을 양창준에게 맡기게 되었다. 한편 양내무는 옥중에서, 부인인 첨채봉은 친정집의 도움을 얻어 항주의 각 아문에 그의 억울함을 탄원하는 탄원서를 써서 보냈지만 묵살되었다.
이듬해인 동치12년(1873년) 양내무의 누나 양숙영(楊淑英)은 당시 형부시랑 하동선(夏同善)의 집에 의탁해 그의 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는데 마침 사건을 듣고 이를 탄원하여 재심할 것을 요청하여 재심이 이루어졌지만,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에 의해 재판이 진행되었으니 결과는 같았다. 양내무의 부인인 첨채봉은 계속해서 진실을 알리기 위해 일상생활도 포기하고 항주 일대를 분주히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퍼지자 절강성에서는 이 사건이 한창 화제였다. 이 화제에 관심을 보인 사람이 하나 있었는데 청나라 당시에 유명한 어용상인이었던 호설암(胡雪巖)[14]이 그녀의 사연을 듣고 첨채봉을 통해 억울함을 푸는 경비로 쓰라고 은자 3천냥의 거금을 기꺼이 내주었고, 한편 북경의 하동선은 양숙영에게 이 사건을 해결해 달라는 애원을 듣고 중앙 고위 인사들에게 사건을 적극 해명하기 시작했으며 마침 첨채봉도 호설암의 자금을 얻어 북경으로 상경한 후 상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사건은 당대 거물급 권신이었던 옹동화(翁同龢)[15]에게 알려졌고, 그는 마침내 서태후에게 상소하여 진실을 가려줄 것을 요청했다. 서태후는 이 사건을 신중히 심리할 것을 명령하여 양창준을 통해 재심하게 되는데 감찰사인 왕흔(王昕)도 곁들여서 고문을 쓰지 말 것을 명했다. 그래서 독약을 구했다는 증거는 조작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내긴 했어도 '''양창준의 체면을 위해''' 간통살인이라는 결론은 뒤집지 않았다. 또 사건이 결론이 나지 않자 호서란(胡瑞瀾)을 흠차대신으로 임명해 사건을 심리하게 되지만, 호서란은 재판경험이 없는데다가 양창준과는 동향관계일 뿐만 아니라 양창준과 유석동의 뇌물까지 받아먹은 상태라서 판결을 번복하는 건 불가능이나 다름없었다. 그리하여 호서란 역시 지독한 고문을 다시 가해 결국 원심을 확정하지만, 감찰어사인 변보천(邊寶泉)이 호서란이 뇌물수수를 했다는 증거를 잡아 북경의 옹동화에게 보고했다.
사건이 시간을 끌면서 이제 영향력이 전국에 미치는 지경에 이르렀고 특히 사건이 일어난 절강 일대는 사건에 대한 갑론을박이 다반사로 일어났다. 당대 최고의 화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정도. 절강 지방관들도 계속 심리를 하지만 동치제가 사망하고 그 뒤 과거 시험이 실시되는 바람에 재판도 다시 연기되었다. 한편 동치13년(1874년) 양숙영과 첨채봉도 자신을 지지하는 절강성 출신 관원 30여명의 서류를 모아 도찰원에 꾸준히 심사하도록 노력했고 하동선과 왕흔에 의해 드디어 형부에서 재판 과정이 고문으로 점철되어 있고 검시 자체도 허술하다는 점을 밝혀냈지만, 양내무와 소백채의 억울함을 해결할 결정적인 증거가 절실했다. 그래야만 기존 심판 결과를 뒤집을 수 있었으니까.
이 지루한 사건을 옹동화는 하동선, 변보천, 왕흔 등과 함께 꾸준히 사건을 북경에서 심사해 최종 판결을 내릴 것을 꾸준히 11차례나 상소하여 결국 이것이 받아들여져 형부의 주관으로 북경에서 사건을 심리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윽고 광서2년(1876년) 양내무와 소백채는 피고 신분으로 북경으로 호송되어 왔고 추가로 사망한 갈품련의 무덤을 파내 영구를 꺼내서 증거물로 함께 가져오게 된다. 마침내 형부상서 상춘영(桑春榮)과 형부에서 60년경력의 근속을 자랑하는 중국, 아니 세계 최고수준의 검시관을 대동하여 북경 조양문 해회사(海會寺)라는 절에서 갈품련의 영구를 개봉하여 유골을 조사하게 된다. 당시 최고의 화제가 되던 사건이라 해회사와 그 주변 일대는 구경꾼들로 미어터져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유골을 검사하자 유골의 색상이 황백색을 띄고 있었으므로, 독살이라면 유골이 검어야 하지만 그렇지 않았으므로 결국 독살이 아닌 전염병에 의한 사망, 즉 자연사로 결론이 내려져 기존의 판결이 모조리 뒤집어져, 이듬해 2월 형부에서 주관하는 최종 재판에서 양내무와 소백채 이 두 사람에게 드디어 무혐의가 선고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무려 4년이라는 시간을 끌어 온 것인데다 중요한 두 사람의 명예회복은 끝까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양내무는 여항으로 돌아와 신보의 주필로 잠깐 지내다가 가업인 양잠업을 하며 조용히 여생을 보내지만, 고문 후유증으로 절름발이가 되어버렸고 거인 신분을 되찾지 못했다. 신해혁명이 일어난 이후인 1914년에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소백채는 고문 후유증으로 미모를 잃었으며 친정집은 풍비박산이 나고 시댁에게 살인자라고 고발당하는 바람에 가족까지 잃었으므로 결국 의지할 사람이 없어 출가하여 여승이 되어 여생을 보냈고 1930년 향년 75세로 입적한다. 법명은 혜정(慧定)이었다.
재판 경위부터가 답정너나 다름없던 데다가, 일이 커지면서 중앙정부 고관들의 진영논리로까지 번져나가는 바람에 사실상 두 남녀의 억울한 누명이 정치적 문제로까지 번져나갔던 사례로 사건이 해결되자 당초 재판을 했던 유석동, 양창준 등은 모조리 삭탈관직 처분되어 유배되었다. 이는 사실 상군에 대한 조정의 견제 목적도 있는 정치적인 일이었지만 양창준 등의 경우 처벌 1년만에 복직하였다.[16] 변보천이 고발했던 이들의 뇌물수수 혐의도 자연히 뭍혀졌다. 그리고 신보라는 영국계 자본으로 설립된 중국 최초의 신문으로 적극 사건을 중점 보도하여 언론의 힘으로도 사건의 억울함을 알리는데 한 몫 거들었다.
이 사건은 중국에서 가장 유명한 누명 재판 사건으로 비참한 사연이 담긴 주제를 다루고 있는데다 정치적인 암투가 배배꼬인 실타래처럼 도사리고 있었던 사연이라서 미디어화하기 딱 좋은 환경인지 자마안처럼 예로부터 훌륭한 소재가 되어왔고 지금도 중화권에서 매우 인기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여담으로 문화대혁명 당시 여항현(현재의 저장성 항저우시 위항구)에 있던 양내무와 소백채의 묘소[17]홍위병들에 의해 변을 당해 훼손되었다.

5. 양월루안(楊月樓案)


1872년 북경의 유명한 경극 배우였던 양월루(楊月樓)가 상해에서 순회공연중 위아보(韋阿寶)라는 광동성 거상의 딸과 서로 사랑에 빠져 결국 도피하게 된 사건이다. 둘은 서로 진심으로 사랑하는 관계였지만 신분 차이 때문에 결혼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18] 그리하여 둘이 마음이 맞아, 당시 상해에 유행하던 보쌈으로 맺어져 사랑의 도피를 하게 된다.
위아보가 돌아오지 않자 가족들은 결국 관청에 신고하고, 상해 지현 섭정권(葉廷眷)은 위씨 일가와 동향이어서 사건을 엄중히 심리해 결국 양월루와 위아보를 잡아와 양월루에게는 유형을, 위아보는 태형을 당한 뒤 집에서 쫓겨났으며 보쌈 행위를 묵인해준 위아보의 어머니 왕씨는 수십일간 차꼬로 결박당한 채 관청 앞에서 조리돌림을 당했다. 이후 왕씨는 풀려난 뒤 얼마 못 가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1875년이 되자 서태후가 40세 생일잔치 기념으로 전국에 대사면령을 내림으로서 양월루는 북경으로 돌아와 배우 생활을 재개하여 위아보의 소식을 찾았으나 결국 찾지 못했다고 한다.[19]
당시 부모가 점찍은 사람에게만 결혼할 수 있는 당시 관습과 어우러져 비록 사랑했다 할지라도 납치혼이 정당한가에 대한 논란이 끊이지 않았던 사건이다.

6. 태원안(太原案)


태원의 부호 장백만이 두 딸이 있었는데 차녀 옥주를 조문황이라는 사람에게 맺어주려다가 요씨 성을 쓰는 부자에게 결혼시켜 일어난 사건이다.

7. 번외


태원안 대신 사람에 따라 언급되는 사건들이다.

7.1. 통주안(通州案)



7.2. 회안안(淮安案)


지방관리의 부정을 감사하는 일을 하던 이육창(李毓昌)이 산양 지현 왕신한(王伸漢)이 그를 뇌물로 회유하려다 거부당하여 불안감을 느끼고 이육창의 하인들을 매수하여 그에게 독을 탄 차를 먹이고 살해를 사주하고, 끈으로 그의 목을 졸라서 자살로 위장하려 한 사건이다.
[1] 원세개의 양부이다.[2] 당시 그는 건륭제 시기의 유명한 문관이었던 기효람(紀曉嵐)의 괴기소설이었던 열미초당필기(閱微草堂筆記)를 읽고 필사하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한마디로 직무유기. 그가 왜 이런 직무유기를 자행했는지에 대해서는 후술할 사건에 배후라는 음모론이 있거나 지방에서 벌어진 일이긴 해도 엄청 커다란 사건인데다 자신이 이끌었던 상군에서 일어난 사건이라 공정한 사건해결을 위해서는 북경에서 파견된 형부상서 정돈근의 도움이 있어야 정치적으로도 뒤탈이 없어서였다는 설이 유력하다. 게다가 정돈근은 도광제 시절부터 벼슬살이를 한 만큼 출세가 매우 더뎠지만 성실하고 강직하며 공정한 재판관으로 전국에 명성이 자자했던 인물이기도 하다.[3] 이는 그가 나이에 비해 매우 빠른 출세를 했기 때문에 호사가들의 이야깃거리가 되는 원인이기도 하다. 게다가 마신이는 이홍장과 같은 정미년(1847년) 회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다. 그것도 향시에 합격해 거인을 딴 지 '''1년''' 만에![4] 굽시니스트본격 한중일 세계사 만화에서는 이홍장이 증국번 양강총독 복귀를 위해 암살을 사주한 것으로 묘사한다.[5] 증국번도 이런 루머를 다 알고 있었고 그저 찻집의 차박사들이 입에 침이 발려가면서 이야기하는 이야기꾼 수준의 뜬소문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았으나 소문이 퍼지면 퍼질수록 점점 흥미 위주의 정치성이 짙어져 갔고 이에 따라 위기감도 커지게 되었다.[6] 거기다 증국번은 태평천국 잔당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포로로 잡은 이수성에게 상군을 이끌고 칼끝을 돌려 청나라 조정을 칠 것을 종용받기까지 했다. 이런 경험 때문에 자신이 역적으로 몰리지 않을까 상당히 전전긍긍했던 것은 사실이다.[7] 당장에 포청천 등 공안문학이 실제 사건이 아닌 실존인물만 따 온 가공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인기를 끌었는지 생각해보자. 전근대 사법체계가 이상적으로공명정대하게 실시되었으면 포청천이 그만한 찬양을 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8] 왜 이렇게 부르냐면 전통적으로 이름을 대놓고 부르는 것은 하대하는 행위였기 때문리다. 청나라 당시에 기혼 여성을 일컬을 때 남편의 성씨를 앞에 붙이고 뒤에는 자기 고유의 성씨, 다시말해 친정집의 성씨를 붙이는 식이었다. 예를 들어 장씨 남편을 가진 이씨 여자의 경우 장이씨(張李氏)라 불리는 식.[9] 당시 사람들이 양내무와 소백채의 만남을 양이 풀을 뜯는다(羊喫白菜)라고 일컬었다.[10] 당시 유석동은 70세가 넘어 노환에 시달렸는데, 약간의 의학 지식이 있었던 진죽산이 그를 여러번 치료해 주어 나이차가 큼에도 불구하고 매우 가까웠다.[11] 게다가 지현인 유석동은 양내무에게 원한을 적지않이 품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양내무의 강직한 성격 때문이었다. 유석동이 부패하고 직무를 태만히 한다는 점을 들어 풍자, 비판하는 시를 써 왔고 이에따라 그를 고깝게 여기고 있는만큼 이 사건을 기회로 삼아 그를 끝장내려고 한 것이다.[12] 이 검시 과정도 가관이었다. 당시 검시관이 시체의 목에 독 검사용으로 쓰이는 은제 바늘을 찔렀는데 '''검게 변하지 않았다.''' 이는 의심하던 비소중독이 아니라는 확실한 물증이었다. 게다가 당시 청나라 검시 규정상 바늘로 독살 여부를 검사하기 직전 비눗물로 여러차례 세척한 뒤에 써야 한다는 것인데 이 과정을 싸그리 무시했다.[13] 심지어 당시 신문인 신보(申報)에 의하면 '''붉게 달아오른 인두로 유두를 찌르고, 녹인 쇳물을 등에 붓는''' 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그녀가 받은 고문을 묘사했다. 물론 레토릭적인 서술이지만 그래도 그녀가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는 점은 엄연한 진실이다.[14] 좌종당을 통해 권력도 얻고 커다란 부도 얻었는데 상인출신으로 과거시험 없이 삼품이 넘는 벼슬을 얻어 붉은 모자를 받았기 때문에 홍정상인(紅頂商人)이라 일컫던 당대 최고의 상인으로 손꼽히던 인물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이 사건을 심판한 사람들은 전부 좌종당의 심복으로 출세한 상군계 파벌들이었는데 좌종당의 강력한 서포터였던 그가 사건의 억울함을 깨닫고 당시 판결에 동조하지 않고 첨채봉 등 양내무 일가에게 기꺼이 자금 지원을 흔쾌히 해 준 점이 재미있다.[15] 함풍제 6년 진사시에서 장원급제한 이후로 고위직을 전전하였고, 광서제에게 글을 가르치는 자리까지 맡았다. 사건 당시에는 형부상서에서 군기대신으로 승진한 상태였다.[16] 그러나 양창준 등 복직했던 이들은 양내무와 소백채 편을 들었던 사람들에 의해 악평을 달고 살아야 했다. 대표적으로 사건 후 권력을 잡았던 순친왕 혁현은 양창준 등 당시 사건으로 유배, 삭탈관직 처분 후 사면복권된 이들을 대놓고 업신여겼다.[17] 양내무는 서문 근처의 묘지에, 소백채는 동문에 돌탑 밑에 다비가 안치되었다.[18] 대청률에 따르면 연예인, 즉 경극 배우나 풍물패등 유랑 극단은 우리나라의 남사당패 등과 동급의 대우를 받았다. 돈을 많이 번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는 춤과 노래가 생계수단이므로 기녀만큼이나 천민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19] 양월루는 이후 혼인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나, 1890년 죽기 전 아들 양소루를 남겼으며, 양소루는 20세기초 중국 경극계에서 이름을 떨치고 제자들도 많이 남겨 지금까지 그 유파가 이어지고 있으나 패왕별희에는 등장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