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쓰카와 사건

 


[image]
松川事件 (まつかわじけん)
1. 개요
2. 수사와 재판
3. 진범 논란


1. 개요


일본에서 일어난 열차 탈선 사고.
후쿠시마현일본국유철도(국철) 도호쿠 본선마츠카와역카나야가와역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으로 1949년 8월 17일 오후 3시 9분(서머타임이 시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실제로는 2시 9분), 아오모리역을 출발해 우에노역으로 가고 있던 기관차가 마츠카와를 통과하던 중 갑자기 탈선해 기관차에 타고 있던 승무원 3명이 사망했다.

2. 수사와 재판


현장을 조사한 결과 열차가 전복한 지점 근처에서 철로를 잇는 이음매의 볼트와 너트가 헐렁해져 있었고 레일을 침목위에 고정하는 침목고정용 정도 상당수가 뽑혀져 있어서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열차를 탈선시키기 위해 레일에 손을 댔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경찰은 추적 끝에 당시의 대량 해고 사태에 반발하던 마쓰카와 소재 도시바사의 공장 노조원과 일본국유철도의 노조원, 일본 공산당이 사건의 배후라고 밝히며 20명을 체포 기소했다. 그러나 체포된 이들은 자신들의 무고함을 주장했고 일본의 좌파 성향 지식인, 작가들도 이들의 무고함을 주장하며 구명운동을 벌였다.
1950년 12월 6일에 벌어진 후쿠시마 지방재판소의 판결은 체포된 20명 전원을 유죄로 판결하고 5명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나 피고들이 이에 불복해 항소하였고 1953년 센다이시 고등재판소는 17명 유죄, 3명 무죄, 사형 4명으로 판결했다. 하지만 재판 진행과정에서 피고 측 인물들의 잘못이 없음을 증명하는 증거들이 제출되었고 좌파 성향의 작가 히로츠 카즈오(廣津和郞.1891.12.5∼1968.9.21)는 한 잡지에 이들의 무죄를 주장하는 글을 발표하기도 했다.[1]
그런 가운데, 검찰이 피고인들의 무죄를 입증할 만한 결정적 단서인 스와 메모를 숨기고 있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사건은 급반전되었다. 1959년 8월 10일, 일본 최고재판소는 스와 메모를 통해 피고인들이 사건을 모의하지 않았다고 판단하여 2심 판결을 파기하고 센다이 고등재판소에 사건을 되돌려 보냈다. 그리고 1961년 8월 8일, 센다이 고등재판소의 파기환송심은 피고인 전원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 측은 상고하였으나 1963년 9월 12일, 최고재판소는 검찰의 재상고를 기각하여 피고인들의 무죄가 확정되었다.
애당초 일본 경찰이나 검찰이 단지 노동운동에 관여하거나 좌파 성향을 가진 노조원, 공산당원들을 범인으로 무리하게 상정하고 몰아붙인 결과로 정작 중요한 사건의 진범은 밝혀지지 않은 채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3. 진범 논란


사건 당시부터, 그리고 지금까지도 마쓰카와 사건에 대해서는 GHQ(연합군최고사령부)나 경찰이 일본의 좌파노동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벌인 자작극 내지는 음모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런 가운데 1970년, 아사히신문의 주간지에서 나카야마 진지로(馬賊一代의 저자이다)라는 인물이 자신이 마스카와 사건의 현장에 있었고 사건의 진범이라고 고백해 파장을 일으켰다. 나카야마 진지로는 구 일본군의 특무기관원을 지내다가 전후에는 캐논 기관(GHQ 내의 참모 제2부 소속의 비밀 첩보기관)의 조직원으로 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져서 마쓰카와 사건에 캐논 기관이 관여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게 되었다. 물론 나카야마 진지로란 인물이 이야기가 신빙성에 의심이 가는 부분도 많았기 때문에 그의 고백에도 신빙성을 의심받고 있다.
그러나 나카야마 진지로의 이야기가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일련의 사건이 GHQ와 일본 정부의 좌파 숙청(레드 퍼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심은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
실제로 이런 의혹을 가지게 하는 데에는 마쓰카와 사건을 목격한 유일한 목격자가 있었기 때문인데, 현지에 살던 사이토라는 남자는 미군으로 보이는 12명의 남자들이 철로에서 볼트를 뽑는 광경을 목격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사이토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아라. 한 마디라도 꺼낸다면 넌 군법회의에 회부된다"라는 협박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며칠 뒤에 사이토는 어떤 남자로부터 후쿠시마의 CIC(미군방첩대)에 출두하라는 식의 말을 듣고 겁이 나서 동생이 사는 요코하마로 이사했지만 이듬해인 1950년 1월 12일에 행방불명되어 40일 후에 익사체로 발견되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이 더 있었는데 시모야마 사건, 미타카 사건 등이 그것들로 마쓰카와 사건과 함께 일본국유철도 3대 미스터리 사건으로 불린다. 또한 마쓰카와 사건은 엉뚱한 또 다른 사건을 부르게 되었는데 도쿄대 포포로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1] 변호사도 아니면서 왜 그렇게까지 열심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신은 다른 사람이 발을 밟힌 걸 보고 아프겠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라고 반문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