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군 점령하 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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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연합군 최고 사령부'''(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 SCAP) 또는 '''GHQ'''(General Headquarters)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 제국의 항복 이후 1945년 9월 2일 부터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된 1952년 4월 28일까지 7년 동안 일본에 주둔한 연합군 사령부를 말한다.[9]천황과 정부는 연합국 최고사령관에 '''종속'''된다. (1945년 8월[8]
)연합국 최고사령관은 일본 정부를 통하지 않고 '''어떠한 조치든 직접 시행할 수 있다'''. (1947년 6월)
정식명칭은 'Supreme Commander for the Allied Powers'이며 'SCAP'이라는 약자를 사용하나, 일본에서는 이렇게 말하면 전혀 모르는 사람이 대다수로, 대신에 'GHQ'로 지칭하는 경향이 있다[10] . 'GHQ(General Headquarters)'의 사전적인 의미는 다른 특정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그냥 '총사령부'로, 본래 미 육군의 본토 주둔 병력 지휘와 교육, 훈련, 병참 등의 업무를 맡는 사령부로, 밴드 오브 브라더스로 유명한 육군 제101공수사단의 제506공수연대도 101사단 편성 전에는 GHQ 직할 연대였다.
원자폭탄 투하로 인해 버텨낼 수 없었던 일본 제국의 무조건 항복으로 미국은 일본 몰락 작전을 취소하고 일본 점령과 통치를 위한 미군의 신속한 전개를 목적으로 블랙리스트 작전[11] 을 발동했다. 아시아-태평양 전선의 최전선 곳곳에 있던 미 육군과 미 해병대의 사단들은 신속하고 재빠르게 일본 본토로 공수 및 상륙한다. 오키나와 섬에 머물던 미 육군 제11공수사단[12] 이 수백대의 수송기에 분승하여 가장 먼저 일본 경내의 아츠기 비행장으로 공수되었고 바로 다음에 제1기병사단이 전개, 도쿄에 배치된다.
그 뒤로 미 해병대의 제6사단의 제4해병연대가 요코스카의 일본 해군기지에 상륙하여 기지 주변을 접수하고 제5상륙군단(미 해병대의 제2,5 해병사단)은 규슈에 상륙하여 점령군으로 배치된다.[13] 그 뒤로 1945년 연말까지 태평양 전쟁에서 활약했던 미군 사단 20개 이상, 미군 총 50만 명 이상이 후속 부대로 상륙하여 일본 곳곳에 배치되어 일본제국 경찰/일본군의 무장해제를 전격 집행하고 점령군 임무를 수행했다. 또한 영국군을 비롯해 호주군, 뉴질랜드군, 인도군 등 영연방 군대들도 시코쿠와 주코쿠 지역을 점령군으로서 통치했다. 한때 최대 4만 명까지 달했던 영연방군은 1951년에 모두 철수하고 미군만 남았다. 미군도 전후 군축으로 매년마다 부대들이 순차적으로 미국으로 복귀함에 따라 6.25 전쟁 발발 시점에 주일미군의 규모는 8만 5천 명 수준이었다.[14]
일본에서 이 시기의 역사에서 농반진반으로 저 국제 기구를 말할 때 ジーエッチキュー 幕府(GHQ 막부)라고 한다. 맥 쇼군과 점령군 사령부(GHQ)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데, 명목상 천황의 조정에 대응되는 일본 정부는 존재했지만[15] GHQ의 명령은 일본국 헌법과 법률 위에 존재했기 때문에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 일본 정부의 내각총리대신은 GHQ의 일개 과장보다도 권한이 없는 존재였다.
예를 들어 이런 일도 있었다. 토지 개혁과 재벌 해체를 규정한 법률안이 일본 의회(중의원)에서 말싸움만 하다가 연말과 함께 폐기되자 '당장 법안을 성립시켜라.'는 명령이 GHQ에서 내려왔다. 이 '명령'을 전달받은 여야의 국회의원들은 '''일본 국회의사당의 시계를 몇 분 앞으로 돌리고서는 연말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라고 우기면서''' 날치기로 법안을 통과시켰다. GHQ는 임시국회 소집 같은 절차를 시행할 기간도 주지 않은 셈이다.[16] 일본 입장에서는 을사조약 수준의 굴욕이라고 할 수 있지만 아예 국가가 통째로 사라져버리지 않은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할 사고를 친 전적이 있는지라 불평 한 마디 못 할 상황이 되어버린 것.
통치기간은 짧았지만 현대 일본에 미친 영향은 어마어마했다. 현대 일본의 근간이 되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같은 많은 분야들은 바로 이 미군정 시기에 확립된 것으로, 오늘날에도 큰 틀에선 벗어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비민주국가였던 일본에 현대적인 대의민주주의가 사실상 최초로 정착되고, 일본이 패전을 딛고 경제대국으로 비상한 것 또한 GHQ의 각종 개혁이 큰 효과를 발휘했다.
2. 연합군 군정의 정책들
여하간 이런 강력한 GHQ의 통제에 따라 일본 제국 시절의 전범들이 대부분 처벌되고 협력자들이 공직에서 추방되었다. 각종 극우단체 및 일본군과[17] 거대 재벌들이 해체되었다. 일본군의 육군성과 해군성은 완전히 폐지되지는 않고, 각각 제1복원성, 제2복원성으로 이름이 바뀌어 해외에 주둔해 있던 일본군 병력들의 귀국과 무장 해제 업무를 GHQ 감독하에 수행했다.[18]
또 화족 제도가 폐지되고 천황의 직계를 제외한 나머지 황족들은 모두 신적강하(황적이탈)되어 자격없는 무일푼 평민이 됐다. 또 토지개혁이 실시되어 지주를 중심으로 한 지배계층 역시 해체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에 언론 자유와[19] 민주주의적 선거제도, 지방분권화가 도입되는 등 미국식 민주주의와 자유주의(3S정책 포함)가 일본에 뿌리 내릴 수 있었다. 더해서 미군정 시절에 제정된 헌법이 개정되어 일본국 헌법으로 정착되었으며 노조활동이 인정되고 일본 제국 시절 각종 탄압의 도구로 쓰이던 치안유지법과 특별고등경찰 역시 전면폐지되었다.
그 외 의료 개혁이 실시되어 의약분업 정책이 취해젔고 교육제도 역시 일변하여 국가신토 폐지, 교육칙어 폐지, 천황 신격화 금지, 각종 군국주의적 교육을 엄히 금지하고 미국식 6 · 3 · 3 · 4 제도가 확립되었다. 미군은 또한 일본을 무장해제하여 전차란 전차는 죄다 소각했다. GHQ 통치 초기를 다룬 2012년작 영화 엠퍼러의 작중 묘사에 따르면 도쿄만에서 비무장의 구 일본군들이 미군의 감독하에 온갖 병기들을 바다로 수장시키는 작업을 했다.[20] 또한 6.25 전쟁의 발발로 미군을 지원하여 동해상의 기뢰 소해 작업에 동원되기도 했다.
이렇게 막강한 존재였지만 GHQ는 전쟁을 일으키는 데 암묵적, 묵시적으로 최종 승인하고 전쟁 책임이 있던 일본 황실을 폐지하지는 않았고, 천황이 일본 국민에 대해 가지는 상징성을 인정했다. 이런 점에서 GHQ는 20세기에 만들어진, 미국이 일본을 지배하는 막부에 비유된다.[21] 게다가 군대를 기반으로 한 정권이라는 점에서도 막부와 일맥상통한다. 그러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의 비준으로 일본은 공식적으로 국권(주권)을 회복하였고, GHQ도 주일미군 사령부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른다.
3. 군정청
4. 점령지 반환
- 중화민국 - 만주, 내몽골, 동부 해안, 타이완 섬
- 소련 - 쿠릴 열도, 남사할린
- 미국 - 괌, 팔라우, 미크로네시아, 마셜 제도, 북마리아나 제도
- 영국 - 홍콩,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버마, 브루나이, 인도 동부, 나우루
- 프랑스 제4공화국 - 라오스, 캄보디아
- 포르투갈 제2공화국 - 동티모르
- 네덜란드 - 서뉴기니 북부
- 호주 - 파푸아뉴기니 북부
4.1. 독립
5. 실책
일본국유철도 3대 미스터리 사건과 관련이 있었다고도 한다. 미군정, 그러니까 미국 군사 정부로 45년 종전 이후 우익 세력의 견제를 위해 사회주의자들을 용납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사회주의자들을 제재했다.[25] 그런데 2차대전 이후 사회 혼란 방지를 위해 레드 퍼지(Red Purge. 빨갱이 숙청)[26] 라고 해서 공직추방 및 공민권 제한을 실시했다.[27] 그 결과 좌익 관련자들도 공직과 사회 각층에서 추방 또는 활동이 제한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이나 진보적 인사들은 이 사건으로 기세가 왕창 꺾인 반면, 전범들은 6.25 전쟁 이후 매카시즘이 강성하게 되자 이 틈을 타서 각종 이권에 개입했다.[28] 이 민권 제한조치를 영구적 추방으로 안 사람들은 황당하게 자기 자식들을 자기 자리에 앉히는 등 수많은 음모를 꾸몄다. 결국 구 일본 제국에 있던 일본군 출신들 및 관료들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후 일본국이 성립되자, 죗값을 달게 받기는커녕 정부 요직과 사회 각층에 다시 복귀하게 된다.
6. 창작물에서
6.1. 장갑악귀 무라마사의 GHQ
정식명칭은 '국제연맹 야마토 진주군 사령부(国際連盟 大和進駐軍司令部)', 영문 약칭은 현실의 연합군 군정과 동일한 GHQ. 정식명칭이 상기한 것과 같으므로 굳이 한자식으로 약칭을 적는다면 현실과는 달리 연합군 군정이 아닌 연맹군 군정 정도로 적히게 될 듯 싶어 보이지만, 작중에서는 그렇게는 잘 부르지 않는다.
모티브가 위에서 설명한 현실의 연합군 군정이고 실제로 하는 일도 현실의 연합군 군정과 비슷하지만 이 세계관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불완전하게 종결되었기에[29] 로쿠하라 막부와 이런저런 알력다툼이 심하다. 겉으로는 그저 일본에 주둔하고만 있을 뿐 로쿠하라 막부에게 일본의 통치를 완전히 떠넘기고 있는 모양새이지만, 속으로는 가능하다면 로쿠하라 막부를 제거하고 일본을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는 중.
물론 전면전이 일어나면 거의 무조건적으로 GHQ가 이긴다고 보면 되지만 명분 때문에...
덧붙여 현실의 연합군 군정은 미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지만, 장갑악귀 무라마사 세계관의 GHQ는 영국을 중심으로 하고 있는 것이 특징. 병력의 상당수가 북아메리카 대륙으로부터 파병된 병력이긴 하지만, 일단 소속은 영국이다. 어째서냐 하면 장갑악귀 무라마사 세계관에서는 미국이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지 못해 20세기 중반의 시점에서도 아직 식민지 상태이고, 더불어 벨 에포크 시대 이래로의 대영제국의 치세가 19세기를 넘어서 20세기 중반 무렵까지도 계속되어서 현실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영국이 대신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군을 주도했던 것도 현실에서와는 달리 이 세계관에서는 영국이었다.
6.2. 길티 크라운의 GHQ
로스트 크리스마스란 재앙으로 무정부 상태의 혼란에 빠진 일본에 국제사회의 원조를 기반으로 성립된다. 정부를 대신해서 일본을 통치하는 기관이며 국방도 담당한다. 미군이 아닌 유엔 산하의 다국적 기구로 등장한다.
로스트 크리스마스 사건 당시 일본국내에 주류하게 된 다국적군이 그 뒤 일본정부에게서 행정권을 위임받게 되고, 그것을 계기로 유엔의 의결을 거쳐 발족된 것이 일본 잠정 통치 조직 = GHQ이다. 일본 경찰 조직과 지방 자치 단체는 유지되고 있지만 국가 차원의 정책 입안은 GHQ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일본에 주류했던 현실의 연합군 군정과는 달리 이쪽은 설정상 정식명칭이 그냥 GHQ다.
GHQ 조직 자체는 별로 문제는 아닌데 그 산하에 있는 군부대인 '''안티보디즈'''[30] 가 상당히 또라이 같은 조직으로 그려진다. 딱히 못된 짓 할 이유도 없는데 방역한답시고 민간인을 학살시키는 쓸데없이 잔인한 조직으로 그려진다. GHQ의 경우는 고증오류이긴 하지만, 지대공 미사일을 지대함 미사일로 사용하고 감시카메라도 안 쓰는 호구 같은 모습을 보인다.
작품이 진행될수록 GHQ와 안티보디즈는 별개가 되어가며, 나중에는 반란까지 일으킨다. 작품 후반에는 주인공 측과 연합하기도 한다.
이름 덕분에 우익 논란이 있었지만 그런 작품은 아니었다.
6.3. 기타
- 동방 프로젝트에 나오는 카미시라사와 케이네의 루나틱 보스전 2번째 스펠 카드 '야부(野符) GHQ Crisis'
- PULLTOP의 에로게 아득히 우러러본, 아름다운에서도 GHQ가 언급된다. 주로 언급되는 루트는 분교편의 아이자와 미사키 루트.[31]
- 소형 밀리터리 전문업체(1/2400, 1/285 등)
7. 여담
그레고리 펙 주연의 1977년 영화 맥아더와 2012년 작품인 영화 엠퍼러를 보면 일본에 진주한 미군의 모습과 군정 시기의 일본 모습을 잠시나마 구경할 수 있다.
일본의 몇몇 극우파들은 GHQ가 반일세뇌를 자행했다고 주장한다.
이 기간 동안의 무능했던 일본 국회에 대한 이미지 때문인지, GHQ 통치가 끝난 후 약 2년 뒤에 개봉한 고지라(1954)의 극중에서 고지라가 일본 국회의사당을 파괴하는 장면이 나왔을 때 많은 관객들이 환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1] 군정기 마지막으로 쓰인 국호로 '''미군이 제작・공포에 참여'''한 '일본국 헌법'에 의해 성립되었고, 오늘날에도 쓰이고 있다. '일본 제국'은 정치학적으로는 미군이 진주한 1945년 9월 2일, 법적으로는 일본국 헌법이 공포된 1946년 11월 3일에 소멸하였다.[2] 1949년 문부성 국어심의회에서《당용한자자체표》를 발행하며 신자체 한자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3] 점령 초기 일장기는 제한적으로만 게양이 허용되었다. 1947년 5월 2일 더글러스 맥아더가 일장기를 전면 허가하기 이전, 제한적으로 사용될 때는 국제법상 깃발을 달아야 하는 일본적 상선에 이 깃발을 게양하도록 승인하였다.[4] 1947년 5월 2일 더글러스 맥아더에 의해 전면 허용되었다. 단, 일장기가 성문법적으로 국기로 지정된 것은 일본국이 성립한 뒤 한참 지난 1999년 들어서였다. [5] 일본 황실은 더글라스 맥아더 등 GHQ 수뇌부의 전략적 판단 및 시데하라 기주로 내각의 간절한 요구에 따라 그 조직과 지위를 유지하는 것으로 합의되었으며, 쇼와 덴노는 극동군사재판에 기소되지 않았다. ("The Diplomatic History of Postwar Japan", Makoto Iokibe. 1999 참조.)[6] 부속 도서의 경우,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체결되기 전까지는 그 지위와 범위가 불분명했다.[7]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본래 1933년 농림중앙금고 사옥으로 건축되었고 1938년에는 다이이치 생명보험 회사가 입주하였으며, 지금도 농림중앙금고 및 다이이치 생명보험의 공동 소유이다. 오늘날까지도 증축을 거치면서 남아 있어 보존되고 있는 건물인데, 지금은 'DN Tower 21'이라고 부른다. 참고로 저 다이이치 생명관 앞의 강처럼 보이는 것은 고쿄의 해자다. 일본 정부에 대한 통제도 강화할 겸 천황의 거주처인 고쿄의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을 선택했기 때문.[8] 역으로 해석하면 주권이 없을 뿐 천황과 정부가 형식상으로는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그러나 대한제국 조정이 기유각서 이후 없는 것이나 다름없게 되었으되 경술국치 이전까지는 형식상으로 존재한 것과 똑같이, 그냥 꼭두각시 신세가 된 것.[9] 1947년 6월부터 현대가 시작된다. 법적으로 일본제국이 끝난 시기기 때문.[10] 요시다 시게루 내각총리대신은 이것을 'Go Home Quickly(얼른 집(미국)으로 돌아가)'라는 농담을 했는데, 지금은 방과 후 클럽(동아리)활동 같은 걸 하지 않고 바로 집으로 가는 학생들(이른바 '귀가부' 혹은 '귀택부')을 일컬어 'GHQ'라 부르기도 한다.[11] 이 작전은 오키나와 전투가 끝날 45년 6월에 미군 합동참모본부에서 작성한 것으로 일본이 갑작스럽게 항복했다는 가정 하에 일본과 남한에 미군을 배치하는 것에 대한 기본적인 틀이 담긴 내용이었다. 실제로 일본이 항복하고 세부적인 내용은 약간 변형이 되어 시행되었다. 여담으로 남한에 배치된 미 육군 제24군단의 전개에 대한 작전은 "베이커-포티"(블랙리스트 포티)라는 코드네임이었다.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후 동아시아 지역에, 정확히는 아직 소련군이 도달하지 않은 지역에 영향력을 발휘하려 했던 미국의 정책으로 일본 본토뿐만이 아니라 남한과 중국 북부에도 미군이 배치된다.[12] 종전후 1949년 5월까지 혼슈 북부와 홋카이도 지역에 주둔하다 남한 미 군정 종료로 한국에서 철수해온 제7보병사단과 교체되어 미국 본토로 철수후 훈련부대로 재편됨[13] 제3상륙군단(1,6해병사단)은 중국 북부(베이징과 텐진 그 수도권, 산동성)에 상륙하여 47년까지 점령군으로 지내고 미국 본토로 귀국했다.[14] 결정적으로 맥아더와 GHQ는 일본 정부를 통한 간접 통치와 천황을 처벌하지 않고 살려둠으로서 부담을 덜고 주둔군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년 6월 시점에서 미군 4개 사단(제1기병, 제7/24/25보병)이 여전히 주둔했는데 모두 한국전쟁에 참전하고 이로 인한 공백을 메우기 위해 경찰예비대(훗날 자위대)가 창설되는 계기가 되었다.[15] 미국은 원래 독일처럼 일본 정부도 해산시키고 직접 통치를 실시할 계획이었고 이를 위한 다수의 군정부대(역할은 민사여단과 비슷)도 준비했으나 일본 정부를 통한 간접통치로 방향이 바뀌면서 정부 조직도 냅두고(물론 전범흔적이 있는 기관들은 죄다 해체후 새로 창설했다.) 각료들도 전범이 아니면 현직에 유지시키면서 일본 직접 통치를 위해 준비한 군정부대들이 남한으로 전개되었다.[16] 이 '시계 돌리기' 기술은 2009년 멕시코 국회에서도 선을 보였다. 관련 기사[17] 1차대전 직후 베르사유 조약에서도 독일군 규모를 엄격히 축소시켰어도 독일 군대의 존재(병력 상한선 10만 명 허용)는 엄연히 인정되었지만, 독일의 항복 직후 체결된 포츠담 의정서에선 나치 독일군과 일본군 해체, 이들 국가의 비무장화 및 기타 필요한 조치를 명시했다.[18] 다만 일본 해군이 영해에 깔아두었던 수많은 기뢰를 제거하기 위해 해군의 소해부대만큼은 그대로 남겨두었는데, 여기에 소속된 인원이 '''그대로 해상자위대에 흡수되었다.'''[19] 물론 반미적인 보도는 엄격히 검열되었다.[20] 바닷물의 염분성분이 무기를 빠르게 녹슬게 만들기 때문에 설령 다시 인양해도 무기로서의 기능이 상실된 고철에 불과하다.[21] 먼나라 이웃나라 일본의 역사 편에서 이 점을 제대로 표현했다. 내용은 더글러스 맥아더는 일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직접 지배를 하지 않고 천황은 유지하되 배후에서 과거 막부와 동급의 위상을 가진 기구를 통해 일본을 지배하겠다는 내용. 그리고 결과적으로 볼 때 그렇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22] 원래 프랑스에 반환되었지만 공산게릴라였던 베트남독립동맹이 디엔비엔푸 전투에서의 승리와 1954년 7월 같은 공산세력이었던 소련의 항의, 그리고 베트남에 영향권을 뻗치고자 했던 미국의 압박에 따라 완전독립이 되었다.[23] 남부 베트남도 프랑스의 지배를 받게 될 예정이었으나 구시대적 발상인 제국주의를 뿌리뽑고 새로운 반공자유진영 구축을 원했던 미국에 의해 남부 베트남에 대한 독립선거가 실시되고 1955년 베트남공화국이 설립되었다.[24] 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처음에 원래 주인이었던 네덜란드에 반환되었었고 4만의 네덜란드 병력이 다시 인도네시아에 들어갔다. 무기가 빈약했던 인도네시아 독립군들은 밀리기 시작했으나 기존의 제국주의를 뿌리뽑고 새로운 자유진영의 구축과 영향권확대를 위해 미국이 2차대전으로 인해 황폐화된 네덜란드에 경제원조를 안한다고 협박하면서 네덜란드는 결국 철수하게 된다.[25] 이미 1947년 트루먼 독트린으로 냉전이 시작되고, GHQ도 1948년부터 이른바 역코스라 불리는 점령정책의 전환이 시작되었다.[26] 전범들의 공직추방과 레드 퍼지는 다르다. 레드 퍼지는 어디까지나 좌익계 인물들을 공직 등에서 추방한 것을 말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정부와 군부의 제국주의-군국주의적 노선에 대해 일본 국내에서 최대의 저항세력이 일본 공산당을 중심으로 한 좌파 그룹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범 공직추방과 레드 퍼지는 그 방향에 있어서 오히려 정 반대였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 즉, 종전 직후 미쳐 날뛰었던 일본 내 우익(극우)의 전쟁책임을 물은 것이 전범 공직추방이라면 우익의 거물들이 전범혐의로 공직에서 대거 추방당하고, 전쟁 당시 일본정부가 자행했던 좌익 탄압이 중지되면서 세력을 팽창하기 시작한 사회주의-공산주의 세력을 숙청하여 연합군 군정이 일본을 통제하기 용이하도록 하기 위해 시행된 것이 레드 퍼지다.[27] 이른바 일본의 밤과 안개. 동명의 소설도 나와 있다.[28] 한국전쟁 반대한 사람도 체포되기도 했다.# [29] 일본 패망이 가까워 올 즈음에 군부에서 쿠데타가 일어나 로쿠하라 막부가 성립. 그 뒤에 평화조약 체결. 쉽게 말해서 완전히 녹아웃된 게 아니라 여력이 남아 있다.[30] 항체들이라는 뜻으로, 바이러스 재난으로 혼란에 빠진 나라에 주둔한 부대의 이름으로 걸맞는다.[31] 이 게임의 배경이 되는 오우카 여학원과 관련이 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