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공산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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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 공산당'''은 일본의 좌파 성향의 공산주의 정당이다.
좌파 노선이지만 타국의 공산당과는 달리 독자 노선을 추구한다. 현재 당 대표(위원장)는 시이 가즈오이다. 현존하는 정당으로만 한정하자면 일본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정당으로[12] , 1922년 7월 15일 창당되었기에 역사가 102년에 이른다. 그 55년 체제로 등장한 자민당도 공산당보다 33년 4개월이나 더 늦은 1955년 11월 15일에서야 창당되었다.
2. 상세
2020년 기준 일본 의회에서 중의원 12석, 참의원 13석을 보유하고 있는 제3야당으로, 입헌민주당, 사회민주당과 함께 원내에서 반 아베, 호헌 세력을 대표하고 있다. 즉, 일본의 주요 혁신[13] 계열 정당.
일본에서 현재 활동하는 정당 가운데 가장 역사가 오래된 정당이다. 다름아닌 일본 제국 시절부터 활동했는데, 그 긴 역사만큼 일본 정치사에서 잦은 탄압을 받기도 했다. 설립하기 전부터 관련자가 체포되거나 억압을 받기도 했으며, 군부 출신이 아닌 총리가 집권하고 있을 때도 무슨 사건이 터지기만 하면 매카시즘마냥 제일 먼저 공격받았다. 심지어 이는 일본 제국이 망한 이후 수립된 전후 체제에서도 비슷했다.
상기되어 있는 당기는 하나로 합쳐진 4개의 적기로 '''민주주의 혁명·민주 통일 전선·국제 통일 전선·일본 공산당 건설'''을 상징하고 벼와 톱니바퀴는 농민과 노동자를 상징한다.
2.1. 풀뿌리 민주주의
일본 공산당의 특징은 중앙정계보다 지방선거에서 영향력이 강하다는 점이다. 2010년대 후반 기준 일본 공산당은 여러 지자체장을 '지원'하고 있는데 그 숫자만 총 63명에 달하며, 그 중 일본 공산당 출신 시정촌장은 6명이다. 또한 공산당 소속 기초의원 의석수는 공명당(약 2,700석), 자유민주당(약 2,100석)에 이어서 제3당를 차지하며, 이는 혁신 진영의 중심이랄 수 있는 정당인 입헌민주당보다 2배 정도 많은 것이다. 도도부현 광역의원 의석수도 자유민주당, 공명당에 이어 3번째로 많다.
이런 공산당의 지자체장 지원에 대해서는 설명이 필요하다. 55년 체제의 성립 이후 반세기 가까이 일본 자민당이 장기집권하면서 그 부작용으로 흔히 말하는 정경관 유착이 일어나고, 이에 일본 특유의 좋게 말해 독립적인(나쁘게 말하면 폐쇄적인) 지역 사회 분위기가 맞물려 지방의 유지나 토호가 이 유착 구조의 말단 구조로 포섭되면서 그 반작용으로 일어난 현상이다. 지역의 유력자들이 느슨하지만 강력한 정경관 유착체의 힘을 등에 업게 되자 이들의 부패나 부조리, 모순을 비판하는 시민 사회 운동가들 역시 이에 상응하는 후원세력이 필요하게 되었고, 이 역할을 한 것이 (자유법조단이나 일부 부라쿠민 운동단체 등과 긴밀한 관계였던) 일본 공산당이었다.[14] 이러한 협력관계로 인하여 일본 공산당은 지방정계에서 직접적인 당세(예를 들어 일본 공산당 출신 시정촌장)에 비해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덕분에 노동조합을 세력 기반으로 삼았던 일본사회당이 전성기에는 일본 공산당보다 훨씬 큰 세력을 자랑했으나 정치구도의 변화 이후 순식간에 몰락한 데 비해, 일본 공산당은 세력의 부침은 있어도 기반 붕괴는 겪지 않고 있다. 민주노동당 이래 한국 사회주의 계열 좌파정당들이 노동조합을 세력 기반으로 삼아 대다수의 의석을 비례대표에 의존하여 일본 공산당과는 반대로 중앙정계에 주로 기반을 두고 있다는 것과도 비교점이 있을 것이다.
이를 방증하듯이 2020년 사민당의 분열로 진보 헤게모니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했다.
3. 성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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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정당이 우경화를 외치고 있을 때, 여기는 반대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16] , 원전 폐쇄, 자위대의 국방군 전환 반대, 간접세 증세 반대''' 등을 주장하고 있다. 심지어 당의 강령 중엔 2004년까지 천황제 폐지, 자위대의 해산이 공식적으로 존재했을 정도였으나, 이러한 정책에 대하여 여론이 시큰둥하자 2004년 당 대회에서 두 존재를 인정했다.[17] 다만 천황제의 존치 여부는 향후 대중의 뜻에 따라 결정하기로 했으며, 자위대는 점진적인 군축 및 평화헌법 9조 수정에 의한 군대 전환을 방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좌: 민족 성별 연령에 따른 차별 반대, 동일 노동에는 동일 임금으로
우: '''조선 대만 만주 식민지 반식민지 민족의 완전 독립'''
일본 공산당 선전물
그 외 일본에서 대표적으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반대하는 정당으로 현재 유럽 여러 국가의 공산당과 비슷한 정치, 경제적 포지션으로, 예전부터 차량 유세 등에서 자본의 위험성을 강조해 왔다. 일본 공산당 내 반전주의자들이 있다보니 가끔씩 자위대에 대한 부정적인 발언이 나오기도 한다. 대표적인 예가 후지노 야스후미 전 공산당 정책위원장의 "방위비는 살인 예산"이 있다.
참고로 일본 공산당은 마오이즘을 신봉하는 일본 공산당(마오이즘)과는 별개의 정당이다. 그 정당은 1966년에 일본 공산당으로부터 제명당한 후쿠다 마사요시가 창설한 정당으로 자신들이 진짜 정통 공산당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의 제명 사유는 중국 정부의 지령을 받으며 별도의 활동을 벌인 것이다. 하지만 2001년에 후쿠다가 노환으로 사망한 이후 거의 활동 중단 상태다.
한국에서는 서대문형무소역사관를 방문하여 둘러본 뒤 헌화하고,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을 방문하고, 일본에 약탈된 한국의 문화재를 반환하는데 힘쓰는 등의 모습을 보여왔다.# 애초 일본 공산당은 일본 제국 시절에도 당 기관지에서 일제의 중국 침략을 고발하는 기사를 쓰는 등 전쟁 반대, 식민지 처우개선 또는 독립을 꾸준히 호소해왔다.
부락민 해방동맹(部落解放同盟)과는 1965년부터 노선의 차이로 불편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반당 수정주의자, 우익 사민주의자라고 비판하고 있는데 부락민 차별 자체를 찬성하는 게 아니므로 이 점은 가려서 봐야 된다. 부락민 해방동맹은 사회당-사민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대신 부락민 해방동맹에서 갈라져 나온 전국부락해방운동연합회(全国部落解放運動連合会)가 일본 공산당과 가까이 하고 있다.[18]
주일미군 철수 및 미일동맹 해체를 통한 독자노선을 주장했으며, 2004년 강령개정 당시 목표를 사회주의 및 공산주의 사회 진전 및 주요 생산 수단의 소유 • 관리 • 운영을 사회 손으로 옮기는 생산 수단의 사회화로 명시하고 있다. 단 소련식 국유화와 통제 경제는 부정하고 있으며 시장경제를 통한 사회주의의 실현이 일본에 맞는 방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정부가 통제한다기보다는 사회 구성원의 참여라고 봐야 할듯.#[19] 물론 무장투쟁 노선은 이미 1950년대에 쓴 맛을 본 후 포기한지 오래다. 지금은 미일관계에 대해서 불평등에서 평등한 관계 즉, 동일한 직위의 국가 대 국가의 미일관계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20]
파칭코와 같은 카지노에 대해서도 상당히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2016년에 카지노 관련 법률이 의회에서 통과되었을 때도 정당 중 가장 크게 반발하기도 하였다. 또 부부별성 선택적 제도와 동성결혼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편이라 시민 결합 같은 파트너 제도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도 한다. 현재 입헌군주제 있는 일본에서만 쓰는 연호에 대해서 중국에서 유래한 만큼 서력에 맞춰야 한다는 성명을 내기도 했다.#
한편, 일본 공산당이 2015년 한일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을 환영하고 양국이 서로 화해하고 화합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입장을 표명했으니 한계가 있거나 우경화에 편승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공산당이 이런 입장을 낸건 한국 위안부 피해자들의 반발이 있기 전 일이었다. 또한 일본 공산당은 한국에 대한 금전적 보상과 사과를 '''일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봤을 때 자민당 집권 시기 내내 한국에게 보상하고 사과해야 된다는 공산당의 의견은 여당에게든 다른 야당에게든 철저히 무시당했다.[21] 그러다가 2015년이 되어서 보상이 이루어졌으므로 공산당 입장에선 '드디어 우리 당이 추구하던 강령이 이루어졌고, 한국과의 관계를 회복할 신호탄이 되었다.' 하면서 기뻐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민당 아베 내각은 위안부 합의에 대해 '이제 돈 주고 합의했으니까 다신 위안부 얘기 꺼내지도 마라.' 정도라면, 공산당은 '일본이 피해자들에게 금전적 보상을 하는 건 반드시 해야 할 일이다. 그러니까 사양 말고 받아주었으면 좋겠다.'인 것이다. 결국 자민당과 공산당이 위안부 합의를 바라보는 시각 차이 때문에 일어난 오해.
또한 노르웨이 적색당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정당임에도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적극 옹호하고 있다.[22]
3.1. 천황제에 대한 인식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 공산당은 패전 직후, 천황이 여전히 일본을 통치하던 '대일본제국헌법'이 있는 와중에 '''인민공화국 정부 수립'''을 발표했다. 자세한 것은 일본인민공화국 참고. 1961년 강령은 일본국헌법 중 천황 조항에 대해 '''민주주의 혁명 속에서 군주제를 폐지'''한다고 했다. 그러다 현실적인 상황을 고려한 2003년의 강령 개정을 계기로 현재 일본 공산당은 '''군주제도 공화제에도 속하지 않는 과도적인 상태'''라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 공산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일본제국 의회의 개회식의 형식을 그대로 계승했다는 이유 등으로 천황이 참석하는 국회 개회식에 오랜 기간 불참해왔으나, 2016년 1월 4일에 열린 2016년 첫 정기 국회에선 '''처음으로 개회식에 참석'''했다. 이 배경엔 아베 정권 이후 우경화된 일본 사회에서 그나마 당시 아키히토 덴노가 평화헌법을 직간접적으로 지지하는 발언을 많이 했기 때문에, 즉 천황보단 아베 정권의 우경화 정책과 싸우는 게 더 급선무인 연유도 있었을 듯.
그렇지만 나루히토 즉위식 불참을 선언하였다. 신화를 기반으로 한 즉위식이 정교 분리에 위배된다는 이유였다.# 자세한 것은 천황 항목 참고.
3.2. 대외 정책
공산당 홈페이지의 영토 분쟁 관련 입장을 보면 식민지 지배에 관해 한국에 대한 진심어린 사과가 우선되어야만 영토 분쟁 해결을 위한 테이블을 마련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했을 때 이를 규탄하는 결의안을 일본 국회에서 채택하자 사민당과 공산당만이 반대표를 던졌다. 다만 "일본이 독도를 1905년 1월에 편입시킨 것은 역사적 근거가 있으므로 독도는 원칙적으로는 일본 땅이나, 그때는 이미 일본이 제1차 한일 협약을 통해 한국의 외교권을 사실상 빼앗았으므로 한국은 이의 신청을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문제는 나중에 공동의 역사 연구를 통해 해결하자"는 입장이다. 1905년에 근대적 의미의 영토가 되기 이전까지는 양측 누구도 독도의 협소함과 기술적인 문제로 독도를 제대로 파악 하지 못했다는 전제가 일본정부의 주장과는 다른 점. 물론 접근법에 차이는 있으나 결국 과거사 문제를 해결 하고 나면 교섭을 통해 독도를 찾아와야 한다는 당론이다. 좌익이라고 해서 독도 문제를 포기해야 한다고 말하는 정치인은 일본에 없다. 한국정계에 과거사 해결보다 한일우호를 우선시하는 정치인은 가끔 있어도 독도 문제에 대해 양보해야 한다고 발언하는 정치인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23]
반대로 러시아와의 쿠릴 열도 분쟁에 있어서는 가장 강경한 입장을 취하는 정당이다. 일본 측에서 주장하는 이른바 북방 4개 도서 중 하보마이와 시코탄 두 개는 애시당초 쿠릴열도가 아니라 홋카이도의 부속 도서이므로 당연히 일본 땅이라는 입장이고, 나머지 쿠나시르와 이투르프 두 개의 섬뿐만 아니라, 쿠릴 열도 전체를 돌려받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건 홋카이도의 지역 정당인 신당대지(다이치)도 그렇다. 분위기가 이렇게 다른 이유는 독도와는 달리 상트페트르부르크 조약으로 주권국끼리 평화적으로 영토를 교환한 결과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국 공산당의 권위주의적 독재하고 인권탄압에 대해 강력히 비판한적이 있다.
3.2.1. 북한과의 관계
당명이 일본 '''공산당'''이다 보니 이름만 들어보면 한국에서는 북한과 깊은 연관이 있고 북한과 조총련을 지원해주는 악의 조직마냥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북한과의 관계는 당내외 정치적, 사회적 입장 때문에 교류는 '''전혀''' 없고 오히려 적대적인 노선을 취하고 있다. 북한 조선로동당과는 창당 때부터 요시프 브로즈 티토주의적 노선으로 창립 이념부터 차이가 있었고 친밀도만 보자면 일본 공산당보다는 일본사회당이 북한과 더 친밀했다. 그러나 의지하고 있던 일본사회당부터, 연대관계인 유럽지역 사회주의 정당이 북한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이들 때문에라도 아예 교류가 없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방북단을 보내기도 했지만 북한이 무슨 생각을 한 건지, 1968년에 '''일본 공산당 방북단이 묵고 있는 객실에 도청기를 숨겨놨다가''' 딱 걸렸다.[24] 이를 계기로 방북은 종결, 관계가 급격히 악화됐는데 1983년에 북한의 아웅산 테러 사건이 벌어지자 일본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일체의 교류를 단절한다고 알려졌다. 게다가 이후 북한이 마르크스 사회주의에서 주체사상 쪽으로 물꼬를 틀어버리면서 그나마의 끈도 사라진 셈이 되었다.
그 후 90년대 들어서 산케이 신문과 후지 TV 등 메이저 언론사가 북한의 일본인 납치에 일본 공산당이 관여되어 있다고 의혹을 제기하자, 일단은 북한과 교류가 단절됐다고 알려진 일본 공산당은 발칵 뒤집힌다. 이들은 언론에 정면으로 맞서는 한편, 그 동안 무시로 일관해왔던 북한에 대해서 어느 정도 비판적인 입장을 표출하기 시작한다. 특히 발사체가 일본 상공을 지나간 1998년 북한의 대포동 1호 발사 실험 사건 이후부터는 극도로 험악해져서 그 이후부터는 북한을 비판할 때 과격한 발언들이 속출한다. 그 후, 북한의 4차 핵실험 이후 역시나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서 강도 높은 비난과 국제 사회에 대한 제재를 조치할 것이라고 요구했다. 전문.
전반적으로 반북 정당은 맞다. 그렇지만 아베 신조 전 총리처럼 북풍몰이로 이용한다기보단 제재를 통해 대화의 장으로 이끌게 하자는 메시지가 더 강한 편이다.
3.2.2. 한국과의 관계
일제 강점기 때부터 독립 문제 등으로 많은 한국인들이 일본 공산당에 가입한 바 있었다. 조선공산당 일본총국과 협력 관계였으며, 독립 후 1950년대 초까지 재일 조선인들과 합쳐서 재일 조선인에 대한 권리 신장을 같이 투쟁하기도 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도 관심이 있어서 민주화운동가를 지원한 적 있고, 지금도 공산당 내에서 가끔 한국의 민주화 운동에 관한 연구모임을 가진다.
현대에 들어서는 재일 한국인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한 노력과 영주권자 외국인의 지방 참정권 부여 추진 등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리고 도시전설로 떠돌아다니던 731부대의 실체를 밝히는데 진력하여 대중적으로 알렸던 사람들이 바로 일본 공산당원이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포함한 일제 통치기의 전반적인 사과를 일본 내에서 꾸준히 주장해온 정당이라 상당히 개념잡힌 정당으로 인식되고 있다. 2019년 한일 무역 분쟁 계기로 일본 공산당의 한국 인식이 발굴되면서 대중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야마조에 타쿠 참의원의 연설 영상이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주류 언론들도 많이 주목하고 있는데 중앙일보(#1), 조선일보(#2), 연합뉴스(#3)가 시이 가즈오 대표를 인터뷰하기도 했고, 경향신문은 공산당이 '자민당에 강렬한 브레이크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고 평하기도 했으며, 한국일보는 '아베 정권의 독주를 막는 유일한 정당'이라 보도하기도 하는 등 여러 언론들이 당세에 비해선 제법 많이 보도하고 있는 편이다.
또한 2013년에는 사단법인 한국 영화감독조합 공동 부대표 정윤철이 '일본 공산당은 한국인들과 가장 친한 친구이며 강력한 연대 세력 일본 공산당만이 조선의 해방을 주장했다'고 기고하기도 하였다.
2017년 공영방송 총파업 중 MBC 김장겸 사장 퇴진과 관련해서 아카하타에서 기사로 보도하기도 했다. 또, 특성화고 학생들의 실태을 보도하는 등# 일제강점기부터 이어진 한국에 대한 관심이 이어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018년 4월 27일. 판문점 선언#s-5.3.1.2 당시에는 진심으로 환영한다며 긍정적인 입장을 밝혔다. 제헌절에도 주한 일본 대사관에서의 리셉션 행사에 참석했다. # 또, 일제강점기 시절 징병제의 대법원 판결에 대해서 개인 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고 강조했다. # 최승호 감독의 영화 공범자들을 예로 들면서 언론의 자유를 역설하기도 했다. #
게다가 일본의 대한 수출 규제 이후에 아베의 잘못이라는 주장하고 있으며, 화이트리스트 제외도 반대하고 있다. # 같이 불거진 아이치현에서 열린 표현의 부자유전(表現の不自由展)에 전시된 위안부 소녀상에 대한 전시 중단에 대해서 헌법 21조를 들어 격렬하게 반대하고 있다. 보통 장관들에게 하는 질의에서도 공산당 의원들에게 이러한 성향이 두드러지는편.
4. 지지 기반
전국적으로 큰 편차 없이 6~10%대 고정 득표율을 얻고 있다. 때문에 중의원 지역구 소선거구제에서는 고전하고 있다. 지역구에서 공산당 후보들이 중복 입후보를 하지 않기 때문에 단독으로 비례대표 후보들이 많이 당선된다. 그렇기 때문에 참의원에서는 1인 선거구가 있는 지역은 입헌민주당, 국민민주당, 사회민주당과의 연대를 통해 단일 후보를 선출한다.
상대적으로 선전하는 지역은 총선 기준으론 오키나와와 관서 지방인 교토, 오사카 등이 거론된다. 특히 교토는 민주당계 정당-자민당-사민당이 연합해서 공산당 후보와 대결을 하는 동네이다.[25] 다만 2010년대 들어 오사카는 지역 정당인 일본 유신회의 부상으로 과거보단 영향력이 줄어든 상태이다. 또 상기했듯 풀뿌리 민주주의로 인해 중앙 정계보다도 지방선거에서 더 영향력이 강한 편인데, 나가노현, 고치현, 미야기현, 홋카이도 등이 선전 지역 중 하나. 그렇기 때문에 시정촌에는 꼭 1석 정도는 지키고 있다. 그 외에는 주로 대도시 권역에서 지지도가 있는 편이다.
2010년대 중반 이후부턴 선명성과 투명성, 블랙기업 정책, 여성의 정치 참여 장려 등을 내세워 혁신 진영의 의제 선점과 선거 연대 등을 리드하고 있다는 인상도 주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장성에는 한계가 있어 제1야당에는 미치지 못하고 있다.
또한 급진적인 넷 좌익들 또한 주요 지지 세력 중 하나이다.
5. 역사
5.1. 과거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불어닥친 사회주의 바람에 따라 1922년 창당된 것이 시초이다. 이미 1921년에 준비가 이뤄졌고 창당을 시부야구에 있었던 사회주의 운동가 타카세 키요세(1901~1973)의 집에서 작게 이뤄졌다. 파벌은 일본 사회주의 동맹에서 나온 수요일회가 일본 공산당의 원류로 평가하고 있다.
당 강령은 당시로선 가장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군주제와 귀족원[26] 폐지''', '''18세 이상 모든 인간에게 보통 선거권 부여''', '''집회·결사·출판의 자유''', '''1일 8시간 노동 실시''', '''실업보험을 포함한 사회보장 및 최저임금제''', '''누진소득세에 따른 과세 실시''' 등 '''사회주의적 요소'''를 가미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식민지와의 분리'''까지 주장했었다. 때문인지 당시 적지 않은 수의 조선인들이 일본 공산당에 가담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들은 이 당시 정식 정당으로 등록이 되지 않았으며, 러시아 혁명 이후 공산화에 우려한 일본 제국은 이들을 탄압하고 1924년 조직을 해산하고 만다. 1926년에 재결성하고(물론 지하정당으로)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나가기도 한다. 그 중 야마모토 센지(山本宣治)가 사상 첫 ‘일본공산당 계열 의원’으로 의회에 입성하기도 했다.[27] 정복전쟁에 반대하였으며 1925년 '''치안유지법 제정'''을 기점으로 일본의 군국주의화가 가속화되자 이후 극심한 탄압을 당했다. 특히, 1931년 만주사변을 전후로 탄압이 심해져, 일본 공산주의자로 유명했던 사노 마나부 같은 인물조차 '전향'을 강요당하고 결국에는 전향할 수밖에 없을 정도였다.
그리고 일본의 패전 이후 1945년 GHQ 미군정 당국에 의해 치안유지법 폐지와 함께 합법화된 정당으로 다시 출발하였고, 개헌 정국에 헌법 개정안도 내면서 일본사회당과 같이 큰 활동을 했다. 그러나 동아시아 정세에서 중국 공산당이 국공내전에 승리하고, 1950년 5월 인민 광장 사건으로 공산당이 GHQ와 충돌한 후, 한국전쟁이 터지면서 1951년 2월에 열린 일본 공산당 제 4회 전국협의회(약칭 4전협)에서는 반미 무장 투쟁 방침을 결정하고,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둥식 유격전 전술을 받아들여 전국의 농촌에 '''해방구'''를 조직할 것을 지시했다. 같은 해 10월 일본공산당 제 5회 전국협의회(약칭 5전협)에서 농촌 지역의 게릴라전을 규정한 문서인 "일본 공산당의 당면 요구"가 채택되고, 시골에서는 산촌 공작대, 도시에서는 중핵자위대 등의 무장대를 만들어서 미군기지, 경찰서, 법원 등을 습격하고 경찰관을 살해하는 등 무장 투쟁과 마오이즘적 선전을 감행했다. 1952년에는 피의 메이데이 사건(일본 위키)으로 인해 사실상 일본 공산당이 폭력 혁명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여기에는 좀 복잡한 배경이 있다. 1950년 1월 6일 코민포름의 기관지에서 일본의 정세와 일본 공산당에 관한 비판 글이 실린다. 당시 일본공산당 의장 노사카 산조는 연합군을 "해방군"으로 평가했고 "점령 하의 평화 혁명론"이라는 노선을 취했다. 그러나 스탈린에 의해 코민포름의 기관지에서 일본 공산당의 이러한 노선을 비판하는 논문인 "일본의 정세에 대하여"가 실렸고, 일주일 뒤 일본공산당 정치국은 "'일본의 정세에 대하여'에 관한 소감"(『“日本の情勢について”に関する所感』)을 발표하고 반박한다. 그러나 중국 공산당까지 일본 공산당 비판에 나서자, 당 내부는 둘로 분열되게 되었다. "소감"에 동참하는 사람들은 "소감파"라고 불리게 되고, 중국 공산당과 코민포름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들은 "국제파"라고 불리게 된다. 국제파는 미야모토 켄지를 위시로 한 파벌이었다.[28]
그러나 이 시기에 레드 퍼지가 일어나게 되고, 많은 숫자의 공산당원과 공산당 간부들이 정치 활동 금지를 당하게 된다. 일본 공산당 간부들도 정당 등 규정법에 따라 검거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자, 노사카 산조와 토쿠다 큐이치 등의 지도부는 국내에서의 활동을 포기하고 중국으로 여행(사실상 망명)을 떠난다. 중국으로 건너간 일본공산당 간부들은 베이징에서 지도부를 만든 뒤[29] 중국에서 활동한다. 일본에는 정식 절차를 거치지 않고 중앙 위원회를 해체한 뒤, 토쿠다 큐이치가 '''임시 중앙 위원회'''를 지정해서 남겨 놓은 상태였다(...).[30] 이들은 소감파 중 잔류파들로서 당 지도부가 중국으로 이동하기 전에 초안을 잡아놓은 "일본 공산당의 당면 요구"를 5전협에서 그대로 올려서 무장 투쟁 노선을 확립하게 된다. 1951년부터 일본의 농촌에는 산발적인 산촌 공작대의 게릴라전이 펼쳐졌고, 도시에서는 중핵 자위대가 경찰서와 공공 기관에 화염병으로 불바다를 만드는 짓이 빈번하게 일어난다.
심지어 이 시기의 일본은 아직 군사 문화가 그대로 살아있던 수직적인 사회였다. 공산당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어서, 공산당에 젊은이들이 가입한 뒤, 선배가 소년이여 전사가 되어라라고 지시하면 그대로 산촌 공작대에 합류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딴 식으로 병력을 충원하니 뭐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게다가 '''소감파가 국제파들을 손 봐줄 목적으로 일부러 산촌 공작대로 보내는 일도 있었다.''' 심지어 산촌 공작대와 중핵 자위대는 목적도 상당히 달랐고(산촌공작대는 무장대와 대중 노선을 혼합, 중핵 자위대는 도시 폭동을 목적으로 한 폭력 혁명 노선) 명령, 지령 체계도 달랐다고 한다. 애초부터 싹수가 보였다. 게다가 산촌 공작대는 거의 효과가 없었다고 한다. 예외적으로 의료반을 파견하여 순회 진료를 하는 경우는 상당한 호응을 받았지만 봉건 지주를 공격하는 내용의 그림 연극등은 주민들로 하여금 '''저게 뭔 소리다냐''' 싶은 반응만 얻을 수 있었고, 신문이나 삐라는 지역 주민들이 입수하는 대로 경찰에 신고했다. 결국 산촌 공작대는 경찰 단속에 의해 소멸했고, 일부는 산에 그대로 남아 자활의 길을 모색했으나 당으로 부터는 아무런 지원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됐고, 자연스럽게 병마와 기근에 시달리다가 소멸했다.
이 시기에 재일 조선인들도 일본 공산당과 함께 미군정에 맞서 투쟁했는데, 이후 조총련이 창립되면서 재일 조선인들은 일본공산당 대신 (북한의 단일 체제당이던) 조선로동당을 추종하게 되었다. # # #
여하튼 이런 무장 투쟁 노선은 별 호응을 얻지 못한 채 1952년, 1953년 두 차례에 걸쳐 치러진 중의원 선거와 1953년에 치러진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공산당은 각각 '''1석'''만 얻는 참패를 당했으며 이런 참패의 영향으로 무장투쟁 노선은 사실상 폐기처분 되었다.[31] 1955년 즈음이 되면 베이징으로 피신했던 대부분의 간부들이 돌아오게 되고,[32] 소감파는 국제파와 화해하고 다시 당을 통일하게 된다.[33] 그리고 1955년 7월 일본 좌익/진보 운동의 역사에 큰 전환점이 된 일본 공산당 제6회 전국 협의회(약칭 6전협)가 열리게 된다. 일본공산당은 이때 '''무장투쟁 노선의 포기'''를 선언한다. 무장투쟁을 좌익 모험주의로 평가하고 정세 판단의 오류가 있었음을 스스로 시인한다. 게다가 일단 소감파와 국제파의 '''통일'''을 선언했지만, 결과적으로 중국공산당과 국제파가 제기한 문제를 소감파가 받아들였고, 이에 따라 무장투쟁을 했지만 이에 따른 피해는 아무도 책임을 지지 않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34] 당의 실권을 잡은 미야모토 켄지는 당의 통일을 우선으로 하여, 6전협의 방침에 따라 '''각 개별 당원의 행위는 불문에 부치도록''' 하였다. 결국 소감파계 당원도 새로이 주류가 된 미야모토 파로 흡수되어 갔고, 무장투쟁기의 불법투쟁 기록은 굳게 봉인되었다.[35] 기본적으로 이때의 무장 투쟁 노선 포기가 나중에 신좌익 운동에 영향을 끼쳤다는 후문이 있다. 실제로 당시 6전협에 충격을 받은 많은 당원들이 공산당 지도부에 불만을 품게 되었고, 당을 떠나는 일이 많았다.[36]
1953년의 참패에다 때마침 재통합한 일본사회당에게 밀려 군소야당으로 큰 세를 나타내지 못했다가, 1960년대 중반 자주노선을 표방하고 사회당이 지리멸렬한 틈을 타 사회당의 지지기반 일부를 뺐으면서 리즈시절을 맞게 되는데 이 무렵 공명당도 주요정당으로 부상하게 된다. 이 때를 즈음해 극좌단체 적군파가 결성되면서 일본의 도시게릴라 운동이 활발해지고 요도호 사건, 아사마 산장 사건 등의 테러를 일으키며 일본 사회를 충격과 공포에 빠뜨리는 사건이 일어난다. 일본의 신좌익과 적군파는 실제로 직접적으로 일본공산당과 관계가 없다. 신좌익이라는 말 자체가 구좌익인 일본공산당과 결별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들은 일본 공산당 중앙당사가 있던 요요기(代代木)의 이름을 따서 '''반요요기파'''라고 불렸다. 이와 다르게 일본 공산당은 합법정당으로서 꾸준히 제도권 안에서 활동하게 된다.[37]
반면 공산당은 지방선거에서 사회당과 연합전선을 짜며 연이은 승리를 거두었고[38] 중, 참의원 선거에서도 선전해 1972년 중의원 선거와 1979년 중의원 선거에서 대승하며 전성기를 이어왔다. 다만 1976년 중의원 선거에서 록히드 사건등의 호재에도 타 정당에게 의석을 빼앗기는 바람에 참패했다. 그래도 득표율은 소폭 감소에 그쳤다. 1979년 통일지방선거에서 패배했지만, 6개월 뒤에 펼쳐진 중의원 선거에서 사상최다 의석수를 기록했다. 이것이 이른바 1970년대의 "자-공" 시대이다.
그러나 1980년 일본사회당에서 공산당과 결별하기로 방침을 정하며 사실상 '''왕따'''로 전락하게 된다. 당시 사회당에서 정권교체 가능성이 높다 보고 연립정부 구상을 하고 있었는데 공명당, 민사당에서 사회당과 공산당과의 결별을 하지 않으면 연립정권을 구성할 수 없다고 결별을 요구했다. 이는 공명당, 민사당과 공산당의 사이가 '''매우 적대적이라''' 공산당과의 연대에 부정적이었던 사회당 우파의 세가 강해진 영향도 있었다. 공명당은 공산당과 지지층이 어느 정도 겹쳐 있는 데다가, 공산당의 데마때문에 이미지가 나빠진 적이 있어 공산당에 우호적일수 없는 입장이었다. 공명당의 지지모체인 창가학회와 공산당이 1974년에 신사협정을 맺은 적이 있었으나, 공명당이 반발하여 결국 사문화되었고, 둘의 사이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또한 민사당은 '''민주사회당'''이라는 당명과는 다르게 '''반공주의를 표방하던 정당'''이었기 때문에 [39][40] 도저히 사이가 좋을래야 좋을 수가 없었다.
사회당과의 결별에는 사회당의 친북 성향과, 일본 공산당이 방문단을 보냈더니 도청이나 하는 북한에 대한 배신감이 팽배한 일본 공산당과의 입장 차이도 있었다고 한다. 이렇게 되면서 1980년대 내내 선거에서 의석수가 계속 줄어들었고 특히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위기를 맞게 된다. 여기서 소련의 붕괴가 일본 공산당 의석수 저하와 직접 관계가 있는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 당시 일본 공산당의 의장 후와 테츠죠는 소련의 붕괴를 환영하는 성명서를 발표했었다.
1990년대 중반 일본 정치권이 혼미를 거듭하며 한동안 소외되었던 공산당은 중흥기를 맞았고, 이 시기에 사회당 지지층과 무당파 성향의 지지율이 높아져서 표를 받아 비례대표제 하에서 1996년 중의원 선거와 1998년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연달아 승리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2000년 중의원 선거에서 지역구 선거에서 전멸한 걸 시작으로 당세가 다시 쇠퇴하기 시작했고, 결정적으로 2003년 자유당이 민주당으로 합류한걸 계기로 양당제가 고착화되며, 지지기반 상당수가 일본 민주당으로 이동하면서 사실상 군소정당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안습. 그러나 최근 몇년에는 참의원, 중의원, 지방선거 등에서 민주당이 몰락하면서 기존에 민주당을 지지하던 진보성향의 유권자들이 공산당으로 결집, 꾸준히 의석수를 늘리고 있다.
5.2. 현재
90년대에는 당원이 계속 감소하다가 2천년대 후반엔 일본의 경제난 여파로 인해 청년 당원들이 급증하기도 했다. 아무래도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경향이 있는 20대를 주력 지지층으로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심지어 니코니코 동화 생방송에 일본공산당 소개 방송을 개설하기도 할 정도.
한편, 일본 공산당은 1960년대에 무장혁명노선을 포기하면서 마오이즘을 같이 버렸다. 이때 마오이즘을 따르는 마오이스트들도 같이 짤렸는데 그 짤려나온 사람들이 만든 정당이 일본공산당(좌파). 그런데도 아직 일본에서 일본 공산당은 마오이즘 신봉 연상, 60년대 폭력적 무장투쟁 연상, 그리고 적군파 등 테러 이미지 연상 등에서 모조리 벗어나진 못하고 있다.[41]
- 2013년 도쿄 도의회 선거
2013년 6월 23일 치러진 도쿄 도의회 선거에서 17석을 확보하여 민주당을 꺾고 도쿄 제1야당에 등극했다. 흥미롭게도 당선된 17명의 의원 중 11명이 여성인데, 이는 공산당이 여성 권익 향상을 위해 여성 후보를 가장 많이 낸 덕이다. 도쿄 도의회 선거가 대체로 일본 참의원이나 중의원 선거의 전초전으로 평가받는다는 점을 감안하면 공산당이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약진할 가능성도 있어보인다.
- 2013년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위에서의 예상과 같이 정말로 약진했다. 제23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대표에서 목표로 하던 5석을 획득하고, 선거구에서도 12년 만에 의석을 획득했다. 도쿄도(개선수 5)에서 3위, 오사카부(개선수 4)에서 4위, 교토부(개선수 2)에서 2위를 기록해 당선되었다. 특히 교토부에서는 창가학회 등에서 공산당을 떨어트리기 위해 막판에 민주당 후보에게 표를 몰아주었는 데도(...)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 그 결과 공산당의 일본 참의원 개선+비개선 의석은 총 11석으로, 향후 6년 간[42] 공산당 단독으로 법안 제출이 가능해졌다. 덧붙여서, 총 의석 수가 10석 이상이기 때문에, 당 대표가 총리를 상대로 1:1 토론을 하는 당수 토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2014년 제4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2014년 중의원 선거에서 보여준 모습은 진격의 공산당. 유신이 망하고 민주가 의석수를 10여석 정도 늘린 것 이외에는 의석변동이 거의 없었으나, 일본 공산당만은 혼자서 2배 이상의 의석을 확보하면서 2000년 이후 처음으로 20석 이상(21석)을 확보했다. 특히 이때 오키나와 출신의 전직 교직원 아카미네 세이켄이 오키나와현 제1구에서 당선됨으로써, 일본공산당은 제41회 이후로 18년만에 중의원 의석을 확보했다.
- 상당수 지역구에서 팀킬했다고 볼 수도 있지만 저 상황에서는 팀킬이라는 용어가 매우 적절하지 않다. 우선 정당이 선거에 후보자를 내는건 당연한 권리이고, 일본 공산당이 다른 일본의 야권 정당과는 성향이 다르다. 일본 공산당을 사회민주당과 함께 유이한 진보정당으로 볼 수 있으나, 사회민주당의 당세가 정말 심각하게 기울었다. 그리고 공산당이 모든 선거구에서 후보를 냄으로써 당세를 과시했는데 당세가 기울어가는 일본 민주당으로써는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었다. 즉, 일본 공산당은 정당으로써 당연한 권리인 선거에 출마할 권리를 행사한 것이고, 일본의 야권은 애초에 한 팀이 아니다. 무엇보다 일본의 제 1야당인 민주당의 정체성은 사실상 그냥 반자민당이다. 때문에 야당이라고 해서 하나로 뭉칠 근거나 힘 자체가 없었다는 것이다.
- 이번 선거에서 공산당이 타 야당과 차별화 된 점은 소위 블랙기업에 대한 대책을 주요 정책으로 어필했다는 것으로, 이것이 공산당이 약진한 이유가 아닌가 하는 분석도 있다. 그외에도 반 개헌 세력의 중심이 된 점도 있다. TV 아사히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큰 정부·작은 정부에 대한 각 당의 의견은 명확했으나 집단적 자위권에 대해서는 자민·공명·차세대의 찬성에 비해 민주당은 입장이 미묘했고, 유신회는 하시모토[43] 와 에다[44] 공동대표의 입장차, 사민·생활의 약소화에 비해 공산당은 명확한 반대와 명분 때문에 집단적 자위권 반대 운동의 중심이 된 것이라 하였다. 이런 식으로 아베 정권의 폭주에 가장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등 최근 일본 진보 세력, 반아베 세력의 표를 흡수하고 있다. 또한 보수적이고 가부장적인 측면이 강한 일본 사회에서 여성의 정치 활동 장려를 열심히 하고 있다. 실제로 여성 의원 비율이 다른 일본의 정당에 비하여 높고, 최근 그 비중을 더욱 늘려가고 있다. 실제 2015년 현재 일본 참의원+중의원 여성 의원의 수는 10명으로, 다른 정당들에 비해 그 비율이 월등히 높다. 이처럼 일본 공산당이 블랙기업 정책 마련, 선명성, 여성의 정치 참여 장려 등의 효과로 반등한 것을 정의당 등 한국의 진보 정당들도 본보기 삼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 2015년 통일 지방 선거
- 그리고 2015년 열린 일본 통일 지방 선거에서도 크게 약진하였다! 4월 12일 열린 전반전에서는 선거가 실시된 모든 41현 부 의회에서 의석을 획득했다. 교토부에서는 전체 60석 중 14석을 차지해 전체 2당, 제1야당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득표율은 24.52% 나가노현에서도 전체 58석 중 8석을 차지해 전체 2당, 제 1야당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득표율은 13.08% 고치현에서도 전체 37석 중 4석을 차지해 전체 2당, 제1야당의 지위를 획득하였다. 득표율은 13.98% 4월 26일 열린 후반전에서도 의석수를 크게 늘렸다.
- 10월 25일,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미야기 현에서 치뤄진 광역 의회 선거에서 전 의석보다 2배 증가한 8석을 차지하여 제2당이 되면서, 역시 약진하였다.
- 미야기 현은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은 후 지방 선거를 따로 치르고 있다.
- 2013년 이후 현재까지 약 3년간 일본 공산당이 각 선거마다 약진하는 사실을 분명하고 일본 공산당 '당 자체'에는 긍정적이다. 하지만 보다 크게 볼 때 일본의 현 야권이 다시 정권을 잡기 위해서는 일본 민주당 등 일본 공산당보다 오른쪽에 위치해 있고 더 대중적인 세력의 부활이 절실하다.[45] 공교롭게도 거대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아베 신조 현 총리가 안보법 개정 파동을 통해 일본의 야권에게 결집의 계기를 준 건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야권 연대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현재 다수임을 볼 때 심도 깊은 논의를 통해 야권 지지 성향 국민 혹은 중도층에게도 희망을 주는 전략이 필요할 듯.#
- 2015년 이후 집단적 자위권에 관한 법이 통과되면서 국민연합정부라는 만들어서 야권의 연대를 요구하고 있다. 알다시피 민주당과 이념, 성향에 안 맞고 사민당, 자유당과는 연대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게다가 대중적인 정당으로 만들기 위해 대표적인 예가 당의 핵심 강령인 미일안보조약 폐기 주장을 당분간 봉인과 천황이 참석하는 국회 개회식에 1947년 1회 이후 처음으로 참석했다는 것이다. 한편 일본 공산당이 가지는 당명과 당의 지향점에 대해서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지만 일단은 목표를 지켜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 2016년 3월에 일본 공산당이 폭력적 혁명을 일으킨다는 정치권발 악성 루머가 나왔는데 이에 대해 3월 22일에 국무회의에서 스즈키 타카코 중의원 의원이 정면으로 반박을 하였다. 앞에서 얘기하듯이 일본 공산당은 이미 1950년대 중반부터 폭력적 혁명을 포기하였으며 1961년 당 강령에 의회의 다수를 얻는 것이 혁명이라고 명시 이후 지금까지 유지해오고 있다.
5.3.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이러한 급격한 상승세를 바탕으로 일본 공산당은 2016년 7월 열리는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대표 득표율 15%, 약 850만표 득표'''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 정도 득표면 참의원 '''비례대표에서 8석'''정도를 획득할 수 있다.
지역구에서도 23대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오랜만에 획득했던 지역구 의석이었던 '''도쿄도'''(5명 선거구, 3위), '''오사카부'''(4명 선거구, 4위), '''교토부'''(2명 선거구, 2위) 3곳을 수성하고, 아쉽게 의석 획득에 실패했던 '''카나가와현'''(4명 선거구, 5위)[46] , '''아이치현'''(3명 선거구, 4위)[47] 에서 의석을 획득하는 것을 목표로 할 듯하다.
참고로 지난 통일 지방선거에서 '전체 2당(제 1야당)'으로 도약한 '''나가노현'''에선 2013년 참의원 선거에선 '''19.6%'''를 득표했지만 2인 선거구이기에 의석 확보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이는 통일지방선거에서 역시 '전체 2당(제 1야당)'으로 도약한 '''고치현'''에서도 마찬가지다.[48]
이런 가정이 현실화되면 개선의석 기준 10석을 넘는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어디까지나 현재로선 '''일본 공산당의 목표'''이다. 쉬운 목표는 아니나 최근의 상승세와 아베 내각 반대층의 표심을 어떻게 끌어오느냐가 관건이 될 것으로 보인다.
더군다나 2015년 9월 19일 안보법안이 통과가 되고나서 시이 가즈오 공산당 위원장[49] 은 '''폭동을 일으킨 사람에게는 반드시 역사의 심판이 내린다''' 라고 말할 정도로 가장 비판적이면서 그 전에도 아베 신조의 역사인식부터 시작해 꾸준히 반(反)아베에 대한 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앞으로 안보법안에 대한 실체 등 전반적인 활동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심지어는 선거연대는 물론이고 '''야당끼리 힘을 합쳐 반 아베 전쟁법 폐지를 위한 국민연합정부'''를 구성하자고 말하기도 하였다. 야당의 연립 정권 ‘국민 연합 정부’구상이 현실화 될 경우 당 강령에서 정한 미일 안보 조약 폐기를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상당히 전향적인 입장을 밝혔다. 그간의 일본 공산당의 선거전략을 생각해보면 인상적인 변화가 아닐수 없다. 2014년 중의원 선거에서 팀킬을 한다고 비판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비판이 적절한지는 위의 해당 선거 항목을 읽고 각자 판단해야 할 듯.
조선일보에서 일본 공산당의 시이 가즈오 위원장과 인터뷰한 기사에 따르면# 사민당, 생활당과는 이미 큰 틀에서 합의가 이뤄지고 있다고 한다. 다만 민주당과의 공조는 민주당 내부에 반대하는 목소리가 있어 쉽지만은 않은 듯하다.[50]
본격적인 선거 운동을 돌입하면서 홈페이지도 리뉴얼하면서 정책 공약이 공개되었는데 특히, 2015년 위안부 문제 협상 타결 논란 이후 일본 정부가 지속적으로 부정하는 것에 규탄하며 아베 정권과 극우단체간의 결탁, 야스쿠니 신사 참배 문제를 지목해왔다는 점이다. 헤이트 스피치 문제에서 적극적으로 해결하려는 의지가 있다. '영토 문제' 파트에 독도, 센카쿠 열도, 북방 영토를 함께 명시해 놓아서 독도의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센카쿠 근해에 침입한 중국 해군에 항의하고, 북방 영토는 즉시 반환을 요청한다는 입장이지만, 독도에 관해서는 강경한 영유권 주장을 하지 않고, 우선은 식민통치에 대한 반성을 하며, 그후에 한국 정부와 교섭해서 해결하겠다는 방침이다. 참의원 선거 정책 공약 영토문제에 대한 일본 공산당 위원장 시이 가즈오의 입장표명[51]
이번 선거의 최대 승부처인 32곳의 1인 선거구에서 야권 단일화를 이루어냈다. 공산당은 그 중 1개 선거구에 출마한다.[52] '''도쿄'''에선 야마조에 타쿠 후보가 당선은 확실하고 심지어 6명 중 3위를 노릴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카나가와현''' 에서도 당선 가능성이 매우 높게 여겨지고 있다. 다만 성지라고 할 수 있는 '''교토'''에서는 의석을 얻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높고 '''오사카'''에서는 의석을 얻을 가능성이 있으나 경쟁상대가 오사카 유신회라 힘든 승부를 벌이고 있다. 이외 의석 획득 가능성이 있는 선거구는 '''아이치, 홋카이도, 치바, 사이타마''' 선거구이다. 종합적으로 일본 공산당은 2013년 이후 계속된 상승세를 지속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의 예측으로는 '''선거구에선 1~8석, 비례대표에선 6~7석으로 총 7~15석을 얻을 것'''으로 예상되었고, '''아사히 신문'''의 예측 결과로는 '''최저 4석, 평균 8석, 최대 11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되었다.[53] 심지어 성향이 정반대인 '''산케이 신문'''의 예측 결과로도 '''최저 7석, 평균 10석, 최대 13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되었다!
5.4.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이후
아직 선거가 끝난 것이 아니다. 중앙정치의 중심인 도쿄가 남았기 때문이다. 호헌 4개 야당(민진, 공산, 사민, 생활당)은 2016년 7월 10일에 치러진 제24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처럼 야당 간 공조를 통해 단일 후보를 출마시킨다는 계획이다. 결국 2016년 7월 12일 민진당이 최종적으로 내세운 후보는 언론인 도리고에 슌타로이다. 다음 날, 우츠노미야 겐지 후보가 대국적인 관점에서 후보에서 사퇴하겠다고 밝힘에 따라 도리고에 슌타로가 야권 단일 후보로 출마하게 되었다.# 하지만 선거 결과 3위로 나왔다. #
아키히토의 생전 퇴위에 대해서 진보계열의 정당과 비슷하게 정치의 책임으로 생전 퇴위에 대해 진지한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발표했다.
2020년 올림픽 준비의 일환으로 철거될 쓰키지 시장을 도요스 시장으로 교체하려 하고 있지만 그 전에 도쿄가스 시설이었기 때문에 환경 기준에 크게 웃도는 유해 물질이 있어서 도쿄도의원단을 구성하여 토양 오염과 지하수 오염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졌는데, # 이미 대책을 세웠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심각한 것으로 드러났다. #
일본공산당 필두로 집단적 자위권인 안보법안 폐지(일본공산당 내에서는 '''전쟁법'''이라고 불린다.) 서명을 진행하고 있는데, 무려 '''1580만명'''이 서명했다. 2016년 하반기 정치권에서 부상하고 있는 쿠릴 열도 4개 섬 반환에 대해서 반환할 수 있지만 먼저 러일평화조약부터 체결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시이 가즈오 위원장은 10월 13일에 주일 한국대사관을 방문하였다. #
11월 4일. TPP를 강행 처리하자 '''날치기'''와 '''역사적 폭거'''라는 말을 쓸 정도로 거세게 반발했다.# 그리고 도널드 트럼프가 당선된 것에 대해 기성 세력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고 규정하는 반면 내심 TPP의 파기를 기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쓰키지 시장 이전에 관해서 도쿄 가스와 도호쿠 가스의 밀실협상으로 도요스 시장의 토양 오염 부담금을 줄이려고 한 것을 밝혔다.# 러-일 정상회담에서 쿠릴 열도 의제가 무산되자 쿠릴 열도에 대한 러시아의 주권을 인정해주는 것을 비난하기도 했다.
2017년 신년사는 창당 95주년 맞아 민공공투(야권 연대)가 더욱 단결되어야 하며, 일본국 헌법 시행 70주년 맞아 평화헌법 개정을 막아야 한다는 요지로 발표하였다. 1월에 전당대회를 개최한다. 제27차 전당대회에서 여당 연합 정권과의 연대, 아베 정권 타도, 중의원 선거와 도쿄 도의회 선거 승리 등 결의안을 냈다.# 2017년 도쿄 도의회 선거에서는 기존 17석을 넘은 19석을 획득하며 제1야당 민진당보다 4배에 가까운 의석수를 차지했다. 고로 민진당이 영 힘을 못쓰는 가운데 혁신 진영의 자존심을 그나마 지켜나아가는 중이라고 볼 수 있다.
5.5.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2017년 9월 28일 아베의 중의원 해산으로 치러지게 될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 민진-공산-자유-사민 야4당의 야권 공조가 점쳐졌으나, 민진당 내부에서 고이케 신당인 희망의 당과의 연대를 놓고 갈등이 빚어졌으며 급기야 당이 해체 수순을 밟기에 이른다. 자유당도 고이케와 연대 가능성을 내비쳤다. 그러나 공산당과 일본 내 보수진영과는 연대가 불가능한 상극이기에 야4당의 공조가 깨졌다. 결국 공산당은 사민당과만 선거 연대를 하기로 했다. 이후 민진당의 호헌,리버럴 성향의 의원들이 희망의 당에서 거부당하자 이에 반발한 에다노 유키오가 입헌민주당을 창당했다. 공산당은 이를 환영하면서 선거연대를 추진할것을 시사해 입헌-공산-사민의 신 야권공조 가능성이 있어보인다.
10월 3일에 입헌-공산-사민의 공동 투쟁을 선언했다. 입헌민주당의 1차 공천 후보를 발표함에 따라 일본 공산당 후보들이 야권 연대 차원에서 후보 등록을 취소하였다. 그러나 선거전에서 반아베 정당의 기치를 빼앗기면서 당 지지율이 입헌민주당 쪽으로 쏠린 추세로, 오히려 공산당 측이 손해를 입게 되었다.
선거 결과 12석으로 기존 21석에서 9석이나 줄어드는 피해를 입었다. 입헌민주당 후보가 출마한 지역구의 후보를 몽땅 내리는 등 반아베 호헌세력의 결집을 위해 희생한 결과라고도 할 수 있다. 다만 무의미한 희생은 아닌 것이 단순 계산으로 입헌민주당에게 뺏긴 9석을 유지했다고 가정했을 경우 입헌민주당의 의석이 46석으로 줄어드는데 이렇게 되면 제1야당이라는 상징성이 호헌야당인 입헌민주당에서 개헌야당인 희망의 당으로 넘어간다. 고이케 지사가 이끌던 희망의 당으로서는 그나마 유일한 버팀목 하나를 얻게 되는 셈이었고, 이렇게 되면 여론상으로도 개헌을 막기는 더 힘들어진다. 그리고 입헌민주당의 선전으로 이번 선거에서 호헌파의 전체 의석은 줄었으나 기세는 줄지 않았다. 이것이 공산당의 희생이 무의미하지 않는 이유이고 시이 가즈오 위원장이나 고이케 아키라 서기국장이 입헌민주당의 선전에 기쁘다고한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 희생이 쓰라리지만 오히려 정치적으로 득이 된 측면도 있다. 바로 공산당이 강조해오던 '야권 공투'의 주장에 힘이 실리게 된 것. 이번에 입헌민주당이 당선된 지역구 18곳 중 모든 지역에서 공산당은 후보를 내렸다. 여기에서 공산당이 후보를 냈으면 도쿄 1구, 6구, 18구, 가나가와 6구, 12구, 가고시마 1구의 6개구는 무조건 떨어진다. 현재 공산당 지지자 성향상 자민, 공명, 유신 3개 당에 표가 갈 일이 없다고 보면 되고 일반적으로 입헌민주당에 표가 가야한다고 봐야한다. 이 지역구들은 격차가 3% 이내이며 공산당은 일반적인 경우 8% 이상을 득표하기 때문에 공산당이 후보를 내면 무조건 떨어진다고 봐야한다. 반대로 도쿄 19구 같은 경우는 입헌민주당과 공산당이 동시에 후보를 낸 경우인데 이 지역구는 2.7% 격차로 자민당이 이겼다. 여기는 공산당이 7.4%를 득표했다. 2/3정도를 입헌민주당이 가져온다고 가정하면 당선자가 뒤집힌다. 이런 눈에 보이는 효과에 공산당은 이번 선거에 자발적으로 출혈을 감수했기 때문에 진정성을 인정 받아 이후에 있을 선거에 야권 공투를 주장했을 때 힘을 받게 될 공산이 크다고 볼 수 있다.[54]
일본 총무성이 발표한 2016년 정치자금 수입이 정당으로는 자민당에 이어 2위를 차지했다.#
2018년에 메이지 유신 150년 기념식을 '''전쟁의 침략 전쟁과 식민지 지배의 역사와 전후의 역사를 함께 해 150년을 통째로 긍정하는 입장에 서지 않는 것'''으로 불참했다. 자유당, 사회민주당도 불참했다. 게다가 교토부 오야마자키 정 정장선거에서 자민-입헌-국민-공명 추천 현직 정장을 이겼다. 다시 한번 교토가 텃밭이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오키나와 현에서는 사민-사회대중당과 함께 주민투표 실시 조례안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했다.
오키나와 현 이시가키 섬에서의 군사 기밀 작전에서 주민 보호 작전이 없다는 점에서 논란이 일어났다. 이 기밀문서는 공산당이 빡쳐서 일부러 공개했다는 것이다.#
5.6.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1월 말에 아베노믹스 관한 통계 조작 파문이 일어나면서 입헌민주당, 국민민주당과 함께 공세를 펼쳤다.
2019년 4월 7일에 있었던 통일지방선거에서 아이치현 의회 선거에서 2석 모두 잃어버렸지만, 기타 지방의회 선거에서 선전하면서 공산당의 위력을 보여주었다.
선거구에 13명 · 비례대표 26명으로 총 39명이 공천하였다.
최종적으로는 지지율을 유지하면서(1석은 줄어들었다.) 정당 투표에서는 호헌파에서 입헌민주당에 이어서 혁신정당 2인자로 굳혔다.
이후에 야당 연합 정권의 구상을 제안하였고, 레이와 신센구미와 협력을 가지기로 했다.
11월 말부터 불거진 벚꽃 스캔들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하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일본 공산당의 인지도를 높이려는 시도로 하고 있다. 공산당이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번도 정당 보조금을 받지 않았을 뿐더러 연립정부에도 참여한 적이 없기 때문. 공산당의 목적은 아베를 퇴진시킨 뒤 검찰 수사를 통해 아베 내각이 7년간 집권하면서 저지른 죄를 낱낱히 파헤치는 것이다. 그 때문에 지금 일본 정치권은 '''"일본 공산당이 죽느냐? 아베 내각이 죽느냐? 둘 중 하나는 무조건 죽어야 끝난다."''' 라는 분위기이다.
2020년 1월 14일 - 18일까지 제28차 당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중국 패권주의, 인권 침해 등으로 인해 중국에 대해 "사회주의를 위한 새로운 탐구가 시작됐다" 라는 당 강령을 삭제했다. #
5.7.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국민민주당의 입헌민주당 합당에 대해서 환영을 표하기도 했으며, 야권연대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스가 요시히데 총리 지명 투표에서도 에다노 유키오 입헌민주당 대표를 지지하기도 했다. 이는 1998년 이후 처음이다.
게다가 코로나19 경제적 어려움과 벚꽃스캔들로 인해 아베 신조 총리직 사퇴로 존재감을 부각하면서 젊은 층에서 입당선언이 다시 일어나고 있다.[55]
6. 여담
- 문장이 공산주의의 상징 중 하나인 낫과 망치가 아니다. 대신 전술한 바와 같이 노동자를 뜻하는 톱니바퀴와 농민을 뜻하는 벼이삭이다.
- 시이 가즈오 위원장이 쓴 <지금, 일본 공산당>이 2013년 5월에 한국에 번역되었다. 내부에서 바라보는 시각이라 어느 정도 가감의 여지는 있지만 일본 공산당이 해온 행적과 정책 방향을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 공산당 후원회원수는 무려 340만 명이라고 한다.#
- 2000년대 후반엔 일본의 경제난 때문에 노동자 문제에 관심을 가진 청년들이 매달 1,000명씩 폭발적으로 공산당에 입당했던 적도 있었다고 한다.#
- 1945년 일본 제국이 패망한 뒤에는 일본인민공화국을 세우려고 했었다. 천황 제도를 폐지하고 전쟁을 금지하는 공화국을 세우기 위해 "일본 인민 공화국 헌법 초안"을 발표했으나 GHQ로부터 무시되었다. 국수 민족주의적인 중국이나 북한과 같은 방향으로 가려 했던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이들은 일본 제국의 탄압을 호되게 받았기 때문에 오히려 소련과 동일한 노선이다. 한국에서도 광복 직후에 조선인민공화국을 세우려 했으나 일본인민공화국과 똑같이 미국으로부터 무시당해 실패했다. 만일 세워졌다면 일본 황실이 폐지되고 국가원수로 주석이나 대통령을 세웠을 것이다. 군사 관련에 대해서도 군대 그런 거 없이 국경경비대급의 준군사조직만 조직하여 "아시아의 코스타리카"로 만들었을 것이고, 과거사 청산을 확실히 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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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큰 키[56] 로도 유명한 방송인 타카미 놋포[57] 라는 사람이 일본 공산당의 열혈 지지자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일본의 우파 성향 기성세대들과 네티즌들이 충공깽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게 왜 충공깽인가 하면 현 기성 세대들과 넷 우익들이 어렸을 적 교육TV에서 했던 '데키루카나'라는 만들기 프로그램[58] 에서 자주 본 사람이었기 때문(...).
우리나라로 치면 김영만 같은 인물이 진보 정당을 지지하는 것과 비슷한 일. 다만,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타카미 놋포는 전쟁 세대(1934년생)로서 일본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 및 온갖 병크들을 직접 체감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김영만 같은 인물이 진보 정당을 지지하는 것과 비슷한 일. 다만, 이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인데, 타카미 놋포는 전쟁 세대(1934년생)로서 일본군이 저지른 전쟁 범죄 및 온갖 병크들을 직접 체감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 쿠로야나기 테츠코의 창가의 토토의 삽화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이와사키 치히로(1918~1974) 역시 1946년에 입당해 활동한 바 있다. 그뒤 3년후인 1949년에 일본 공산당 활동 중에 같은 당의 정치인 마츠모토 젠메이와 알고 지내게 되는데, 그 다음해에 젠메이와 재혼했다.
-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일본 공산당의 특성이 선거를 투쟁으로 간주하다 보니, 정치적 이념과 상관없이 가끔씩 자민당과 공동 전선을 꾸리기도 한다. 2010년대에 같은 간사이 지방이 텃밭인 일본 유신회에 대항하기 위해 자민당과 협력 관계를 맺고 자민당 후보를 지원하는 일이 있었다. [59] 공산당 소속의 지방 의원은 오키나와현을 제외하고 지방의회에서 여당으로 활동이 없다 보니 홋카이도 같은 경우에는 자민당과 같은 야당이라는 상황도 있다.
- 2018년 이후부터 지지율 저하, 당원 고령화 등 심각한 문제들이 외부에서 제기될 정도로 정체 현상이 발생하자 그동안 부정하던 일본 천황제를 옹호하는 입장으로 돌아서서 일본 국민들을 놀라게 만들었다. 실제로 2019년 제25회 일본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를 위한 정당간 토론에서 일본 정치인들이 갑자기 공산당의 입장 변화에 대해서 물어보는 장면도 나왔는 데 이때 현장에 있던 책임자가 밝힌 바에 의하면 현 황실은 매우 오랜 기간 동안 제국주의 청산에 적극적으로 노력했기에 우리들도 이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했다.
- Hearts of Iron IV에선 일본 공산당이 집권하는 포커스 트리가 있다. 근데 민주일본 트리에선 한국과 만주국이 독립하는데 공산당 트리에선 그대로 일본제국 영토라서 민주 트리 보다 내전을 치르기 힘들다. [60] 공산당이 내전에서 승리하면 천황제를 완전히 폐지하며[61] , 황족도 소련처럼 모두 숙청하고[62] 재벌을 국유화한다. 그 뒤 만주국으로 도주한 일제 잔당을 섬멸한 뒤 중점 선택지에 따라 마오쩌둥의 중국 공산당과 연합해 아시아 공산주의 연대를 구축하거나 코민테른에 가입할 수 있다.
- 아사히 신문과 도쿄대학에서 제4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직후 일본 유권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여론조사에서 일본 공산당이 '앞으로 절대로 투표하고 싶지 않은 정당' 부문에서 43%의 득표율로 압도적인 1위를 기록한 적이 있다. # 참고로 2위는 공명당. 당시 야당 중 중의원 최다 의석을 확보한 입헌민주당은 최하위인 걸 보면 상당수의 자민당 지자자들이 싫어하는 정당으로 당시 제1 야당이 아닌 공산당을 골랐다는 것이다.
# 그래서 당명을 바꾸자는 제안이 여러 번 나오기도 했지만, 전부 거절했다. 현재 일본 최고(最古)의 정당이라는 정통성도 있거니와 안 그래도 합법화 이래 여러 번 분열 위기가 일어났었는데 아예 당명을 바꾸는 수준의 대개혁을 했다간 다시한 번 분열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 일본 정계 가장 왼쪽에 위치한 정당의 딜레마.
게다가 2020년 교토시장 선거에서 현직 시장 지지단체들이 공산당의 시장은 No!라고 신문에 재개되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 아베 신조 총리도 공산당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
게다가 2020년 교토시장 선거에서 현직 시장 지지단체들이 공산당의 시장은 No!라고 신문에 재개되어 파문을 일으키기도 했다. # 아베 신조 총리도 공산당에 대해 부정적인 발언한 적이 있다는 점이다. #
- 좌익 정당이지만 40대 이하에서는 일본 공산당이 되려 보수적인 성향을 가진 당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 보수파 정당이 변혁을 주장하고, 연공서열제가 이미 뿌리박혀 있는 일본 사회의 특징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일본 공산당은 충분히 좌익적이지 않다는 말을 많이 듣는다. 공산당이라는 강경좌파스러운 당명과는 달리, 일본 공산당은 지속되는 고령화의 영향도 받고 있고, 대중화 작업을 거친 상태라 어떻게 보면 굉장히 온건하고 수정주의적인 성향이 있다. 근래 공산당이 주장하는 서민감세나 복지확대, 고용안정, 노동자 권익향상, 중소기업 지원 등은 사실 서구적인 기준으로는 중도좌파가 내세울 만한 정책이다. 오히려 월가 은행 해체까지 주장하는 미국 민주사회주의자들은 물론이고, 기본소득제 논의가 진행중인 한국 좌파들보다도 오른쪽에 가까운 스탠스다. 하지만 일본도 양극화가 심각한 나라다보니[63] 강경한 사회변혁이 필요하다는 목소리도 나올수 밖에 없어서 좌측에서도 비판을 받고 있는 것이다. 컬트 종교식 운영이라고 비아냥받는 레이와 신센구미가 의외의 돌풍을 보이는 것도 공산당의 이런 문제의 영향이라는 평가도 있다.
- 일본에서 반정부적 성향을 가진 스타로 꼽히는 코이즈미 쿄코가 여기에 당원 가입을 하고 참의원 선거를 준비중이라는 가짜 뉴스가 돌았었다.
- 정당 수입 (정부 보조금 제외) 중에서 자민당 이어서 2위를 차지했다.# 제1야당 입헌민주당과 비교해도 엄청난 차이를 보이고 있다.
6.1. 아카하타(赤旗)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 발행하는 일간 기관지. 자세한 내용은 아카하타 문서 참조.
오소마츠 군 / 오소마츠 상에 등장하는 하타보가 원래는 이 기관지에 연재되는 만화의 주인공이었다. 당연히 이때는 일장기가 아닌 붉은 깃발.
6.2. 카쿠산부(カクサン部)
카쿠산부
일본 공산당의 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만든 특설 사이트이자 캐릭터 시리즈. 카쿠산, 오텐토SUN, 포켄 스승 등의 아기자기한 캐릭터들이 그려져 있다.
아래 순서는 캐릭터 소개 페이지의 왼쪽부터.
- 시사: 오키나와 담당 부원. 공식 홈페이지에선 시이 씨와는 아무 관계도 아니라고 올라왔는데, '시사'는 장음 표기로 'しいさあ'라 표기하는 걸 이용한 말장난이다.
- 타와라 코메타로: 반TPP 담당 부원. 이른바 '온후한 덩치' 포지션이지만 TPP만은 참을 수가 없다고. 한국 농민들이 FTA에 대해 보인 반응을 생각하면 된다.
- 오텐토SUN: 탈원전(反原発) 담당 부원.
- 가마구짱: 절세[64] 담당 부원.
- 카쿠상: 부장. 본명은 '카쿠 산시로(賀来三四郞)'.
- 코소다테 이쿠코: 육아•교육 담당부원. 아이들이 10명(모두 연년생) 있으며 업은 아이는 막내 쥬난(十男). 이쿠코의 표정에 반응해 같은 표정을 짓는다고.
- 포켄 스승: 헌법 담당 부원. 일본어로 권법과 헌법이 같은 발음이라 무술가라는 설정이다.
- 고용의 요코(雇用のヨーコ)[65] : 고용 담당 부원. 수많은 직장을 전전한 수수께끼의 여성.
7. '''역대 선거 결과'''
7.1. 중의원 의원 총선거
7.2.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
8. 소속 의원
9. 둘러보기
[1] 합법화된 시기는 1945년 12월[2] 일본 공산당의 노선이 유럽공산주의와 유사하다는 말이 많고 실제로 유사점이 상당히 존재하나, 외교적으로는 일본 공산당 측은 유럽의 공산당들이 북대서양 조약기구에 협력하는 것을 비판하는 등 둘 사이에는 약간의 갭이 있다. 다만 내치에 있어서 실제 정책은 일본 공산당 측이 훨씬 더 온건하다.[A] A B C D E F 일본 공산당 강령[3] 정확히는 '일본 민족'의 주권을 회복하여 미국의 패권주의에 의해 벌어지는 전쟁에 협력하지 않고 평화헌법의 가치를 수호한다는 뜻이다. 일본 공산당은 영주권을 가지고 있는 일본 내 외국인에 대해 선거권 뿐만 아니라 피선거권도 부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등 다문화주의적인 성격도 있다. 또한 당 강령 6항에서 미일 관계가 대등ᆞ평등한 관계가 아닌 일본의 일방적인 대미 종속 상태에 있으며 일본 재계와 미국의 권력적 결합이 일본과 국민을 지배하는 중심 세력이라고 언급하고 있다.[4] 출처 : #[B] A B 당 강령 10항에서 "제국주의,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사회주의로 전진하는 것은 대국적으로는 역사의 불가피한 발전 방향이다."라는 언급이 있다. (帝国主義・資本主義を乗り越え、社会主義に前進することは、大局的には歴史の不可避的な発展方向である。)[5] 2006년 제3대 당의장인 후와 테즈조가 사임한 이후 공석이다.[6] 지역구 4석, 비례대표 9석[7] 지역구 1석, 비례대표 11석[8] 한국의 광역의회에 해당한다.[9] 한국의 기초의회에 해당한다.[10] 도쿄도 시부야구 센다가야[11] 언젠가 여당이 될 마음으로 크게 만들었다고 한다. [12] 해산된 정당들까지 포함한다면 1906년 사회당 및 그보다도 6년 더 오래된 입헌정우회, 이외에도 일부 정당들이 존재한 바 있다.[13] 한국에서 보통 보수/진보/중도로 진영을 구분하는데 비해, 일본은 보수/혁신으로 진영을 구분하는 경우가 많다.[14] 오쿠다 히데오의 소설 '꿈의 도시(無理)'에서도 자민당 소속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지역 유지들의 나눠먹기식 개발 계획에 반대하는 인물을 두고 '공산당과 관계가 있다'고 험담하는 것을 볼 수 있다.[15] 양쪽 선전물 첫머리에 있는 문구가 "★메이데이(노동절) 만세!"이다.[16] 카를 마르크스는 자본주의의 마지막 단계가 제국주의라고 봤고, 만국의 노동자가 단결해서 이것을 뒤집어야 했다고 봤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공산주의는 반제국주의 성향이 대단히 강하다. 후술되어있듯 식민지 시절엔 많은 조선인들이 공산당에 가입하기도 했고, 이때도 조선 독립이나 조선인들에 대한 처우 개선 등을 주장한 진보적인 의인들은 우익보단 좌익 계열 사람들이 압도적이었다. 후세 타츠지 선생이 대표적이다.[17] 기관지 아카하타 1면의 날짜부에는 서력과 함께 일본 연호를 병기하고 있다.[18] 간단히 말하자면 일본 공산당의 입장은 "부락민 차별 철폐운동 지지"이고 다만 주요 부락민 해방 운동 단체인 부락민해방동맹(部落解放同盟) 이라는 특정 단체와 단체 대 단체 입장에서 불편한 관계인 것. 사회운동사에 최소한의 지식이 있는 독자라면 두 단체가 서로를 '반당 수정주의자', '우익 사민주의자' 라고 공격한다는 점에서 이 둘이 원래 한 편이었다가 노선 갈등 문제로 갈라섰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애초에 노선갈등 자체가 같은 지향점을 가진 조직이나 개인끼리 그 수단에 대한 입장이 다를 때 벌어지는 것이고, 지향점부터 다르면 그건 노선갈등이 아니라 그냥 대립이다.[19] 강령 내용을 확인해보면 "지금 미국 제국주의는 세계의 평화와 안전, 나라의 주권과 독립에 가장 큰 위협이 되고 있다. 그 패권주의, 제국주의 정책과 행동은 미국과 다른 독점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사이에도 모순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다. 또한 경제의 '세계화'를 명목으로 세계 각국을 미국 중심의 경제 질서에 통합하려고 하면 경제적 패권주의도 세계 경제에 심각한 혼란을 가져오고 있다."[20] 이 때문에 야마조에 타쿠 참의원의 인터뷰에서 미일관계를 미국의 시다바리라고 표현하기도 했다.[21] 출처: 지금 일본 공산당 - 시이 가즈오 지음.[22] 1976년 임시 대회에서 채택 [23] 야마모토 타로도 과거 방송에 다케시마를 한국에 줘 버리라는 말을 했다가 나중에 '진짜로 줘버리라는게 아니라 되찾지도 못하면서 말만 번드르르 하게 할거면 관두라는 뜻'이라고 해명했다.[24] 21세기 시점에서도 그렇지만 일본 공산당은 창당 이후부터 일본 경찰과 공안조사청의 편집증에 가까운 감시에 단련이 된 사람들이라 도청이나 감시에 눈치가 빠르다.[25] 이에 대해 교토의 전통적인 수공업 노동자들이 열악한 노동 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노조를 결성하면서 공산당과 연대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26] 일본 참의원의 전신[27] 소속은 노동농민당이었다. 당시 합법 무산정당이었던 노농당은 제도권 내에서 가장 급진적인 정당이었다. 노농당 내에는 공산당 소속의 당원들이 잠입하여 활동하곤 했는데, 야마모토 센지는 이들의 추천을 받은 케이스였다. 참고로 노농당은 당 내에 반공주의와 공산주의가 뒤섞인 복잡한 상황이었다. 애석하게도 야마모토 센지는 3.15 사건도 잘 넘기는가 했더니 다음 해 우익 청년에게 암살당한다.[28] 좀 더 배경을 이야기 하자면, 애초부터 노사카 산조와 일본공산당 주류는 친 중국 공산당 성향이었다. 노사카 산조는 1940년대 중국 연안으로 가서 중국 공산당에 합류했고, 태평양 전쟁이 끝날때까지 팔로군과 함께 활동했었다. 그런데 중국공산당 마저 일본공산당을 비판하니 일본 공산당 지도부가 충공깽 상황에 빠질 수밖에.[29] 이를 북경 기관이라 부른다.[30] 이 당시의 역사는 일본 공산당 내에서도 정식 절차를 따르지 않은, 정식 기관에 의한 것이 아니므로 당과 무관하다고 밝히고 있다. 일종의 흑역사.[31] 심지어 이러한 일련의 폭력 투쟁은 파괴활동방지법(破壊活動防止法) 제정에 명분이 되기도 했다.[32] 토쿠다 큐이치는 이미 건강이 매우 안좋았고, 결국 1953년 베이징에서 병사한다. 1955년 베이징 기관의 간부들이 귀국할 때, 토쿠다의 유골을 가지고 돌아온다.[33] 여기에도 엎치락 뒤치락 하는 공산당 당내 갈등이 그대로 드러나는 일들이 많았다. 당시에는 1국 1당 원칙에 의해 국제적으로 하나로 단결하게 되어있었고, 코민포름에서 분파로 인정받으면 정통성을 잃게 되었다. 국제파는 코민포름에 의해 분파로 인정이 되어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정통성이 베이징으로 도피한 간부들에게 있었다. 결국 울며 겨자먹기로 소감파와 화해하는 모양새를 취하게 되었다.[34] 게다가 소감파가 중국에 나가있는 동안 국제파가 사실상 당권을 장악했다. 이후 소감파는 조금씩 쓸려 나가더니 국제파의 미야모토 켄지가 당권을 장악하였고, 서기장이 되었다.[35] 여기서 참 아이러니한 게, 애초부터 코민포름의 지시에 반대했던 것은 소감파였는데, 어째 국제파가 결국에는 이름에 걸맞지 않게 오히려 소감파의 당초 취지에 부합하는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36] 심지어 산촌 공작대에 참여한 당원들 중에는 자살하는 경우도 있었다. 급진적인 청년학생 당원들은 이후 다음해에 있던 흐루시쇼프의 스탈린 비판과 헝가리 봉기로 인해 공산당을 스탈린주의로 비판하는 경우가 많아진다. 이들은 결국 1958년에 공산주의자동맹을 만들게 된다.[37] 심지어 일본공산당 청년조직인 민청이 전학련, 전공투로부터 회색분자라고 짱돌을 맞고 다닐 정도였다![38] 대표적인 사례가 1967년부터 1979년까지 도쿄도지사로 재임한 미노베 료키치이다. "천황기관설"을 주장한 미노베 다쓰키치의 아들로, 1971년 평양을 방문해 김일성과 면담하기도 했다.[39] 칠레 피노체트의 군사 쿠데타를 '하늘의 계시'라고 하는 수준..[40] 한편 일본은 태평양전쟁 이전에 무산정당들이 제국의회에서 활동할 시절에도 반공주의적 사회주의자들이 상당수 활동하고 있었다. 무산정당들 중 노동농민당은 공산당에 친화적이었고, 당원들 중에 공산당원(당시에는 일본공산당이 지하정당이었다)들이 있었지만, 사회민중당이나 일본노농당에는 국제공산주의 노선에 반대한 사회주의자들이 꽤 있었다. 이들 중 우파가 패전 이후 민주사회당을 형성하게 된다. 정확하게는 1959년 참의원 선거에서 사회당이 개선의석의 1/3을차지하지못하는 부진을 보이자 일부계파가 탈퇴해서 민사당을 탈퇴한 것.[41] 산케이 신문을 비롯한 우익 언론의 프레이밍도 강력히 작용했지만, 심심하면 일본 공산당 내부에서 급진파들이 들고 일어나다가 짤리는 상황이 60년대까지 지속됐고, 공산당원 활동을 하다가 과격파로 전향하는 경우도 많았기 때문에 일반인들은 공산당에 거부감이 강해졌다.[42] 2016년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비례대표 3석 확보만 한다면..[43] 집단적 자위권 용인[44] 개별적 자위권으로 충분한 입장[45] 이 서술이 현재 일본 공산당이 팀킬을 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일본 공산당은 자기 역할을 나름 잘하고 있으며 오히려 일본 공산당 외 야권이 결집 혹은 혁신을 통해 자기 역할을 되찾아야 한다는 의미이다.[46] 불과 0.4%(16,000여 표)차로 의석을 얻지 못하였다.[47] 2.5%-76,000여표차로 의석을 얻지 못하였다.[48] 2013년 참의원 의원 통상선거에서 '''24.1%'''를 득표, 민주당을 제치고 2위를 기록했지만 1인 선거구라 의석확보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49] 아베 신조 총리와 동갑이고 정계입문 시기도 같으나 상당히 다른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50] 일본 정치에 좀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알 수 있겠지만 민주당이라고 해도 보수적, 중도적 태도를 가진 인사가 있고 그 때문인지 단결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편이다.[51] 2012년의 입장표명이지만, 2016년에도 재차 이 노선임을 밝혔다.[52] 나머지 15개 민진당, 16개 무소속 단일[53] 지역구는 도쿄, 카나가와현[54] 다른 예로는 야권 거물 오자와 이치로는 이번 선거에서 공산당의 지원을 얻어내는데 신경썼다. 오자와는 그의 선거구에서 33,600표 정도의 격차로 넉넉하게 이긴 편이지만, 문제는 여기에서 나온 지난번 공산당 득표수가 34,000표이다. 다시 말해서 공산당이 표 안 몰아주면 여기도 떨어졌다.(기사 링크)[55] 하토야마 유키오 전 총리도 야당이 무력하다는 혹평을 하던 와중에 공산당은 일을 열심히 했다는 언급하기도 했다.[56] '놋포'라는 말 자체가 '키다리'라는 뜻이다.[57] 高見のっぽ(위 사진). 본명은 타카미 요시아키(高見嘉明)이며, 구 예명은 타카미 에이(高見映)였으나, '데키루카나'에서 '놋포상'이라는 이름으로 유명해진 후 지금의 예명을 쓰고 있다.[58] 1970년부터 1990년까지 방영. 이후 2013년까지 후속작 격인 '만들며 놀자(つくってあそぼ)'가 뒤를 이었다.[59] 그러나 오사카부, 오사카시 자민당과 아베 신조는 아베와 중앙당 세력들의 친유신회 행보 및 유신회의 오사카도 구상 밀어붙이기, 극장 정치로 인하여 심각하게 사이가 나쁜 편이다.[60] 게임에서는 민주주의 중점을 타면 군국주의 시절과 다르다는 걸 대외적으로 표방할 겸 한국과 만주를 독립시킨다는 중점 설명이 있다. 공산주의 중점을 탈 때는 플레이어가 직접 조선을 독립시시켜야 하는데 괴뢰국으로 독립시키지 않으면 민주주의로 독립한다. 만주국도 정복한 뒤 괴뢰국으로 만들면 종주국인 공산 일본을 따라 공산국가가 된다.[61] 민주 루트에선 다시 히로히토를 천황으로 옹립하며 입헌군주제 국가가 된다.[62] 황족을 숙청하지 않으면 살아남은 황족들은 만주국으로 망명한다.[63] 지니 계수가 한국보다 조금 더 높다.[64] 여기서 절세는 '감세'와 비슷한 뉘앙스로 쓰였다. 35년 융자로 집을 장만한 탓에 정부의 '대책없는(ムダな)' 증세에 불만을 갖고 있기 때문.[65] 코요노 요코(こようのようこ). 한국으로 치면 '고용순' 같은 이름.[66] 원내 4당, 지지율 3당. 공명당의 약진 때문.[67] 소선거구 2 + 비례 24[68] 사민당을 꺾으며, 자민, 신진, 민주의 뒤를 이은 제4당[69] '''바로 전 선거와 득표율, 의석 수를 비교하면 대약진'''[70] 공명당을 꺾은 제3당[71] '''반등의 계기를 잡은 첫 전국 선거''', 유신회, 민나노당과 공동 3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