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왕

 

馬韓王[1]
1. 개요
2. 신라 박혁거세 시기의 마한왕
3. 백제 온조왕 시기의 마한왕
3.1. 의문
4. 기타
5. 관련 문서


1. 개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마한의 왕들. 마한왕이라는 점만 확인되고, 이 인물들이 마한의 어느 국가의 왕이나 이름인지도 알려지지 않았다.[2]
다만 이들 마한왕들에 대한 기록은 고고학적 성과와 일치하지 않아서 학계에서는 보다 후대에 있던 사건의 연대를 끌어올린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2. 신라 박혁거세 시기의 마한왕



'''시호'''
미상
'''성씨'''
미상[3]
''''''
미상
'''선대 국왕'''
준왕(準王)
'''생몰년도'''
? ~ 기원전 19년
'''재위년도'''
? ~ 기원전 19년

진·변한(辰·卞韓)은 우리의 속국인데 근년에 공물을 보내지 않으니 큰 나라를 섬기는 예의가 어찌 이와 같은가?

辰·卞二韓, 爲我屬囯, 比年不輸職𧴨, 事大之禮, 其若是乎.

기원전 20년, 박혁거세가 호공을 마한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마한왕은 호공을 꾸짖으며 공물을 받치지 않은 것을 책망하지만 호공은 낙랑, 변한, 왜 모두가 신라를 두려워한다고 답한다. 마한왕은 호공을 죽이려했지만 신하들이 말려서 호공을 살려보내게 된다. 이후 1년 뒤, 마한왕은 사망하는데 어떤 이가 마한을 정벌할 기회라고 박혁거세에게 아뢰지만, 박혁거세는 설득에 따르지 않고 조문을 보냈다고 한다.
일단 연대만 보면 사로국 같은 경우 진한 일대의 소국간 우열을 확고히 하여 간접 지배로 편제한 게 고고학적으로는 4세기로 풀이되지만, 그전부터도 사로국이 적어도 목지국처럼 명목상으로나마 진한 전체의 맹주였을 개연성은 매우 높다. 굳이 문제가 있다면 고고학적으로 볼 때, 박혁거세가 실존했을 개연성이 높은 시간대가 적어도 기원전 1세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한편 천안 청당동에 소재했던 마한 그리고 더 나아가 삼한 전체의 명목상 맹주국인 목지국이 서서히 쇠락하기 시작한 건 3세기 중반부터므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면 3세기 중반 이후일 가능성이 높다.

3. 백제 온조왕 시기의 마한왕



'''시호'''
미상
'''성씨'''
미상
''''''
미상
'''선대 국왕'''
2의 마한왕(馬韓王)
'''생몰년도'''
? ~ ?
'''재위년도'''
? ~ 기원후 9년 4월
2의 인물 이후에 즉위한 인물로 추정되며, 자세한 관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위 사례와 동일인물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일단 적어도 마한 목지국이 맹주 자리를 잃게 되는 건 고고학적으로는 3세기 중후반으로 해석되고 이 시기는 문헌상으로는 백제 고이왕~책계왕 때인데, 이렇게 되면 위 1과 또 다시 연대가 맞지 않게 된다.
일단 기록상으로는 기원후 6년 온조왕이 웅천에 목책을 세우자 마한의 영토를 침범한다고 하여 사신을 보내 온조를 꾸짖어서 웅천책을 헐게 만들었다.
하지만 백제는 약해지는 마한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고[4] 기원후 8년 약해지는 마한을 다른 나라가 먹으면 못먹으니만 못하다고 하면서 그해 11월 사냥을 핑계로 마한을 기습해 마한의 국읍(國邑)을 아울렀다고 한다.
기원후 9년 4월 마한의 원산성, 금현성 2성이 항복하면서 마한이 멸망했다고 기록했다.

3.1. 의문


삼국사기만 보면 마한은 기원후 1세기에 멸망했지만, 3세기 무렵 작성된 삼국지 위지동이전을 보면 마한, 진한, 변한의 78개 소국이 그대로 나와있고 백제와 신라 역시 이런 소국들 중 하나였다.
따라시 해당 기사의 마한 정벌은 온조왕이 일부 마한소국을 병합한 것을 과장한 것으로 파악하거나, 후대의 기록을 소급한 것으로 풀이된다. 백제의 마한 정복 기사는 책계왕 때 기사를 온조왕 때 기사로 소급한 것으로 보는 연구가 있는데[5] 고고학적으로도 3세기 중반부터 쇠락하지만 그 여력은 유지하던 목지국의 쇠퇴가 갑자기 3세기 후반, 즉 책계왕 재위기 때부터 낙차가 급격히 커지는 게 관찰된다. 웅천 목책을 허물게 한 건 책계왕 이전 백제 임금들 치세에 일어났고, 목지국 급습은 책계왕 때 이뤄졌다고 보면 큰 무리가 없다고 해석된다.
그러나 6세기에 백제가 마한을 완전 병합했다고 봤던 예전의 해석은 분명코 에러. 마한은 백제에게 국가 대 국가로 맞서다 영토를 잃고 병합당하던 관계가 아니었다. 백제는 목지국을 쓰러뜨린 3세기 후반 이후에도 명목상으론 마한의 일부였다. 다만 맹주국이 그 시기를 기점으로 목지국에서 백제국으로 바뀌었을 뿐.[6]

4. 기타


신찬성씨록에도 마한왕이 한 명 나온다. 이름은 신(信)이라고 하며, 후손으로는 수경(須敬)이 있어 그의 후예가 일본에 귀화했다고 전한다.

5. 관련 문서




[1] 또는 서한왕(西韓王)으로 등장한다. 이는 신라 기준으로 마한이 서쪽에 위치했기 때문.[2] 마한의 맹주노릇을 했던 목지국일 가능성이 있지만 확실치 않다.[3]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마한왕이 준왕의 후예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4] 이듬해 7년 한성 민가에서 소머리는 하나이나 몸뚱이가 둘인 송아지가 나와 이웃나라(=마한)을 합병할 징조라고 여겼다.[5] 충청남도문화연구원에서 발간한 백제사 시리즈 참조[6] 잘 모르는 사람들이 후기 마한국의 맹주로 잘못 오해하는 침미다례도, 실제로는 전라도 서남부 일대에나 그 세력을 미칠 뿐 그밖의 지역은 명목상으로도 통제를 못하던 군소 세력에 불과했다. 다만 전남의 다른 두 세력(남해안 세력, 광주를 중심으로 한 내륙 세력)과는 달리 그나마 백제와 어느 정도 보다 유리한 협상을 진행할 정도 실력은 있어 이름을 남겼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