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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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2. 기록과 역사
3. 왕사
4. 마한의 특징
4.1. 사회
4.2. 거주지
4.3. 의복
4.4. 성(城)
4.5. 풍습
4.6. 묘제
5. 마한 54국
6.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6.1. 기원
6.1.1. 삼한정통론 또는 마한정통론
6.2. 계승
6.2.1. 고구려 계승론
6.2.2. 백제 계승론
7. 관련 역사기록
7.1. 중국
7.1.1. 후한서 동이 열전
7.1.2. 삼국지 위서 오환 선비 동이전
8. 바깥고리
9. 같이보기
10. 둘러보기


1. 소개



마한()은 고대 한반도 삼한 중에서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영서지역에 위치했던 54개의 부족 국가 연맹체이다. 한반도 고대사 기록이 매우 부실해서[1] 위치나 영역에 대한 것들은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토대로 조사가 진행 중이다. 초기철기(한국식동검 시기)와 철기 시대를 거치면서 목지국 등을 중심으로 소국 연맹 형태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마한을 구성하는 소국 개수는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기록된 숫자가 54개이지만 실제로는 그 보다 더 많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르게 말하면 중국의 역사서에 기록될 정도로 세력이 큰 마한 국가가 54개나 된다는 뜻이다. 그리고 목록을 보면 당시 바다 건너 중국과 교류가 쉬운 서해남해에 인접한 지역 위주이다. 따라서 한반도 내륙에도 여러 성읍국가가 있었는데 기록에서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국립청주박물관은 2019년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충북 지역에서도 1~3세기 마한계 소국의 유적과 유물이 확인되었다면서 충북지역 소국들이 삼국지 기록에서 빠졌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마한의 구성국 중 하나였던 백제국이 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처음에는 안성천-아산만 일대의 소국들, 그 다음에는 금강 유역권 일대의 소국, 그 다음에는 섬진강 유역과 남해안 일대, 최후에는 전남 서남부 일대의 소국들이 독자적인 동력을 잃고 백제의 중앙집권체제에 완전히 합병되었다고 여겨진다.
그전에는 백제 온조왕 때 맹주국인 목지국(충남 천안)을 정벌해 경기도와 충청도를 제패하고, 4세기 중반 근초고왕 대에 신미국(침미다례)(전남 해남)을 정벌해 이로서 마한 전 지역을 완전히 병합해 직접통치를 시행한 것으로 추측하였으나, 최근 고고학 연구 결과 온조왕은커녕 훨씬 후인 3세기 중반, 즉 고이왕 시대가 되면서 목지국 세력이 약화되다가 책계왕 혹은 분서왕 시대가 되어야 그 세력이 크게 꺾이면서 경기도 지역을 제패하게 되고, 목지국의 저항 여력이 완전히 없어진 건 4세기초 비류왕 때였다고 나온다. 목지국의 저항 역량이 없어지기 전까진 충청도 북부에 그 영향력이 제대로 나타나지 못하는 건 목지국이 그렇게 순순히 영향력을 내놓지 않았을 큰 개연성을 암시한다. 근초고왕 시대에도 금강 유역권, 영산강 유역권, 섬진강 유역권(전라도 동부 지역)의 소국들은 여전히 목지국 때처럼 자체적인 국력을 보존하고 있었고, 오히려 영산강 유역권은 한성이 함락되는 475년 이후 더 큰 성장을 경험하는 게 확인되고 있다. 이후 백제 동성왕 대에 탐라에 대한 정벌 시도, 무령왕 대에 상차리, 하차리, 사타, 모루 네 현을 합병했다는 기록이 있다. 백제가 그 통치하는 전 지역을 일원적인 지배 체제로 편성하는 건 대체로 538년 사비 천도를 전후한 시기로 보인다.
이 부분에서 대중에게 퍼진 큰 오해는 마한 전체가 마치 제대로 된 하나의 고대국가로 백제와 맞서면서 영토를 점점 잃어가며 저항하다가 전남까지 밀렸다는 건데, 그러한 역사적 사실은 없다. 백제는 마한과 별개로 존속한 적이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도 없었다. 백제는 고구려계 유이민과 한강 토착 세력[2]이 융합한 백제국으로 시작했으며, 마한의 구성국 중 하나였던 백제국이 세력을 키워서 기존 종주국이었던 목지국을 타도한 후 목지국 대신 마한의 종주국이 된 것이었다. 다만, 백제는 기존의 연맹국가 단계였던 목지국 체제와 달리 고구려계 유이민의 선진문물을 기반으로 한 백제국이 그 구성국들을 직접 지배 체제로 편입시키겠다는 확고한 장기적인 목표 아래 고대국가로 성장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백제의 마한 소국들에 대한 영향력 확대는 시기별로 백제의 국력과 거리, 대외 상황, 그리고 각 소국의 자체 역량에 따라 다양한 스펙트럼으로 그때그때 달라졌던 것이지, 마한 전체가 하나의 국가로서 백제에게 차례차례 영토를 잃어가는 과정이 아니다.
한성백제, 웅진백제 시기의 소위 "잔여 마한 세력"이라고 잘못 이해되는 전라도 일대 소국들도 백제와 무관하지 않았으며 하나의 단일 고대국가도 아니었다. 근초고왕 시절부터 백제가 힘을 투사해오던 전북 군산 일대, 그리고 익산, 전주, 완주 지역은 웅진천도 무렵의 5세기 후반까지, 그 이후 6세기초까지 유지됐던 동진강 이남의 전북지역과 전남 영산강 지역, 남해안 지역, 섬진강 지역의 소국들은 저마다 조금씩 세력 규모나 문화가 차이가 있었다. 그리고 금동 위세품(금동관, 금동신발 등)이 전북, 전남 지역에서도 발견되고 서울 풍납토성에서 영산강토기가 출토된 것 등을 보면 직접 통치 시기가 아니라도 백제의 영향력이 보이고 있다. 한편 이 중에서 나름대로 세력이 강성했기에 영산강 세력이 자리한 전남 서남부는 오히려 남해안, 전남 동부보다도 약간 늦게 백제의 영향력 아래에 들어오게 되는데, 이 때문에 전남 서남부 영산강 유역은 마치 백제 유민 의식이 없었던 것처럼 오해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래봐야 전남 서남부 지역이 백제에 완전히 편입되는 시기는 다른 전라도 지역과 비교해볼 때는 30~50년 밖에 차이나지 않으며, 직접 지배 받은 시기만 지배 아래 있었다고 보는 것도 합리적인 견해는 아니다. 오히려 사비백제의 백제계 유물은 영산강 유역에서도 풍부하게 발굴되고 있는 형편이다. 백제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국가 정체성이 없었다고 보는 것도 사실과 다른 견해다.[3]
먼 훗날 영산강 일대의 호족들이 견훤후백제가 아닌 바다 건너에 있는 고려의 편에 서서 후삼국시대 내내 후백제의 배후를 노리는 형국이 되었으나, 이건 다른 부분에서 이유를 찾아야 한다. 견훤이 세력을 모으는 과정에서 전남 중동부 호족(순천의 박영규김총, 광주의 지훤 등으로 일부는 견훤과 인척이 된다.)들을 규합하게 되는데, 영산강 유역 호족들이 전남 내륙 지역 및 남해안 일대 호족들과 이해관계가 더 가까운 신라 군인 견훤의 대의에 냉소적이었을 개연성이 있다. 학계 일각에서는 왕건의 집안이 경기만 일대의 해양 호족인 점으로 볼때 영산강 일대의 해양 호족과 연관이 있었을 것으로 보고있다.# 나말여초 서남해 일대는 동아시아 문물교류의 중심지인 청해진의 근거지일 정도로 해상세력이 융성했던 곳으로 이 지역을 두고 왕건, 견훤이 얽혀 후삼국시대 내내 나주 공방전이 일어나며 고려와 후백제 사이의 후삼국통일 주도권 다툼으로 이어졌다. 이후에도 왕건은 2대 혜종을 낳은 장화왕후의 고장인 나주를 특별구역으로 편제해 특별기구인 나주도대행대를 설치하고 시중(국무총리급)을 파견할 정도로 중시했으며, 현종은 개경과 서경에서만 행하던 국제행사인 팔관회를 나주에서도 개최하게 하였다.#
2014년 5, 6세기에 조성된 경북 의성 지역 고분에서 전형적인 백제식 금동관모[4]가 출토되어 논란이 된적이 있는데, 이 지역은 진한 소국중 하나인 조문국이 있었던 지역으로서, 백제식 금동관모와 함께 '의성양식 토기'#(경북 북부지역인 의성,군위,상주,예천,안동,영주,봉화,청송 등지에서 출토되는 토기로 경주지역 토기와는 다르다.)와 규두대도,삼엽문 환두대도 등의 최상위 신분을 상징하는 유물도 출토되었다. 삼국사기에 ‘조문국은 서기 185년 신라의 전신인 사로국 벌휴왕에 의해 정벌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지역 사학자들은 당시 의성일대의 진한신라에 의한 ‘정벌’이나 ‘합병’이 아니라 상당 기간 독자적인 세력이나 정치체제를 유지했으며, 그 과정에서 신라뿐만이 아닌 백제와도 교류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중요한 자료라고 평가하였다.# 경북 고령지역을 중심으로 한 반파국(변한)은 6세기중반(562년) 신라에 병합되었다. 이후 후삼국 시대에는 경북 상주지역 호족인 아자개[5]​의 고려 귀부와 경북 의성지역 호족 홍술(洪術)의 고려 귀부가 있었으며​​ 경북 안동지역 호족들이 고려의 편에 서서 고려 개국공신(안동 삼태사)이 된 사례, 그리고 이후 고려시대에 있었던 신라부흥운동이 경주, 운문(경북 청도), 초전(울산)으로 남부지역에 편중된 것을 보면 호남지역과 마찬가지로 경북지역 전체가 그 맹주국의 강력한 지배가 미치는 체제에 속하진 않았으며, 당시는 중앙집권이니 지방자치니 뭐니 이전에 아예 각 소국이 나름의 자치력과 운동력을 보유했기에 당연한 현상으로 볼 수 있다.[6]
그러나 일단 여기서, 마한-백제와의 관계와 진한-신라의 관계는 몇 가지 비슷하지만 기본적 전제 조건은 크게 다름을 명심해야 한다. 이를테면 진한의 사로국은 마한의 목지국과 비슷한 존재였지만, 목지국과는 달리 그 휘하 소국에게 당하진 않았다. 진한으로 따지면 압독국이나 조문국 정도인 소국이 갑자기 세력을 키워서 그 상전인 사로국을 힘으로 무너뜨린 것인데, 물론 진한에선 사로국이 초장부터 기선을 잡아나가면서 착실하게 힘을 키워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지만, 목지국은 불행히도 낙랑-대방군과 보다 가깝다는 이점을 충분히 살려 한강-임진강 일대를 통합한 백제국에게 하극상을 당해 갑자기 쓰러지고 만 것이다. 일단 그래도 마한과 진한이 비슷한 점은 맹주국 휘하 소국들이 자체적인 외교력을 한번에 전부 잃진 않았음이며, 이는 다름아닌 목지국 아래 있던 백제국 또한 경험했던 현상이다. 마한의 영역은 단순비교 만으로도 진한의 세 배에 달했고, 문화권 또한 진한은 하나였으나 마한은 독자적인 수계만 따져도 무려 여섯 계였고 문화권도 그만큼이었으니, 통합의 과정은 비슷한 면도 있었지만 난이도나 전개 양상은 당연히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목지국이 능력이 모자라서 사로국과는 달리 마한을 통합하지 못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위에서 예로 드는 부장품만 봐도, 백제가 그 맹주국 지위를 분명히 한 4세기 전반의 단계에서마저 어떤 지역은 생활 양식은 백제와 같지만 묘제는 다른 지역, 묘제는 비슷해져도 생활 양식은 달랐던 지역, 혹은 무기나 위세품은 많이 출토되어도 금은 장신구는 크게 적은 지역 등등 그때그때 상황별로 중앙과의 관계가 다양한데, 이는 백제의 마한 통합이 매우 지난하고 어려운 과정이었음을 방증한다.
한편 전라남도 해남군 군곡리패총에서 마한 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사슴 뿔을 깎아 만든 투창기가 발견되었으며, 현재 국립광주박물관에 소장 중이다.#

2. 기록과 역사


삼국지》 위지 동이전과 《후한서》 동이 열전에 그 이름이 등장한다. 각각의 사서에 기록된 첫 문장은 이렇다.

馬韓在西。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城郭。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그 백성은 정착하여 농경을 하는데 누에 치는 법을 알고 면포(綿布)를 만든다. 각각 우두머리(長帥)가 있는데 큰 것은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고 성곽(城郭)이 없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韓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辰. 馬韓在西, 有五十四國, 其北與樂浪, 南與倭接.

한(韓)에는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진(弁辰)의 3 종(種)이 있다.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개 국이 있다. 북쪽으로 낙랑, 남쪽으로 왜(倭)와 접한다.

《후한서》 동이 열전

한국 사서에 최초로 등장하는 것은 《삼국사기》 백제 본기 온조왕 본기에서다.

二十五年 春二月 王宮井水暴溢 漢城人家馬生牛 一首二身 日者曰 井水暴溢者 大王勃興之兆也 牛一首二身者 大王幷鄰國之應也 王聞之喜 遂有幷呑辰馬之心

25년 봄 2월, 왕궁의 우물이 갑자기 넘쳤다. 한성의 민가에서 말이 소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이었다. 일관(日官)이 말하였다.

"우물이 갑자기 넘친 것은 대왕이 크게 일어날 징조이고, 소가 머리 하나에 몸이 둘인 것은 대왕이 이웃 나라를 합병할 징조입니다."

임금이 듣고 기뻐하며 드디어 진한과 마한을 합병할 마음을 가졌다.

서기 7년에, 온조가 진한마한을 병합할 계획을 가졌다는 기록이고, 이어 마한 통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幷 則脣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26년 가을 7월, 임금이 말하였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 사람과 아랫 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나라가 오래 갈 수 없으리라. 혹시 다른 나라에게 흡수되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격이 될 것이니 뉘우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후환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

겨울 10월, 임금이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병사를 내어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다음해인 서기 8년, 사냥을 간다는 핑계로 마한을 공략하였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는 대규모 공격을 감행했을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준비 기간만 3개월이 넘게 걸린듯 보이며, 원산성과 금현성은 이듬해 4월까지 함락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온조왕 대에 마한은 멸망했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로는 책계왕 시대에 벌어진 일을 소급해서 끌어다 집어넣은 걸로 이해된다.
그 후 재위 34년째인 16년에 마한 장수였던 주근(周勤)이 우곡성(牛谷城)에서 반란을 일으켜 왕이 병사 5천을 이끌고 이를 제압했다는 기록을 끝으로 한동안 등장하지 않는다.[7]
이후 100여년이 지나서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에 마한 세력의 이름이 등장한다.

十二月 王率馬韓穢貊一萬餘騎 進圍玄菟城 扶餘王遣子尉仇台 領兵二萬 與漢兵幷力拒戰 我軍大敗

12월, 임금이 마한(馬韓)예맥의 1만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나아가 현도성을 포위하였다. 부여 왕이 아들 위구태(尉仇台)를 보내 병사 2만 명을 거느리고, 한나라 병사와 힘을 합쳐 막고 싸우니 우리 군사가 크게 패하였다.

《삼국사기》권15 태조 대왕 69년

태조왕이 마한과 예맥의 병력 1만을 이끌고 현도성을 공격했다는 기사다. 《삼국사기》의 편찬자도 "마한은 온조왕이 밟아서 망했는데 지금 튀어나온 놈들은 뭐냐?"[8] 라며 의문을 제기했다. 김부식 등 삼국사기 편찬진도 고려시대 당시에 존재하던 여러 옛 기록을 모아서 삼국사기를 쓰고 있었지만, 애초에 이 옛 기록들이라는 것부터가 기전체 같은 체계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구성이었고 내용이 부실해서 앞뒤가 안 맞았던 것. 실제로 백제본기에서는 온조왕 대의 기사를 제외하곤 단 한 줄도 등장하지 않는데, 100여 년이 지나 고구려 본기에 뜬금없이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삼국사기는 어디까지나 삼국 시대가 끝난 후에도 수백 년은 지난 고려 시대에 쓰인 역사서라는 걸 항상 염두에 둬야만 한다. 이를테면 광개토대왕 비문에는 광개토대왕이 주몽의 17세손이라고 하였는데, 삼국사기에는 광개토대왕을 주몽의 12세손으로 기술하였다. 삼국사기보다는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 당시 기록을 신뢰하는 게 당연하다.
학계에서는 오랫동안 근초고왕 대에 마한을 완전히 멸망시켰다고 추정했으나, 여기에도 많은 논란이 있었다. 사실 근초고왕의 마한 경략에 대한 기록이 불분명하기 때문에 근초고왕이 실제 마한을 공격했는지조차도 불확실한 점이 있다. 다만 정황상 근초고왕 시절에 마한 지역의 대부분 내지는 상당 부분을 정복해 직할지로 삼았으리라 추정했을 뿐이다. 명확한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근초고왕의 마한정벌설은 2000년 무렵까지는 정설로 취급하였으나, 이후 문헌 연구 및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이러한 결론은 현재 부정되고 있다.
일단 근초고왕의 마한 정복설에 대해 문헌 사학자들의 잇따른 반론이 제기되었다. 기존의 문헌 사학자들은 일본서기 신공기(神功紀) “신공(神功) 49년(서기 369년) 목라근자(木羅斤資), 사사노궤(沙沙奴跪)가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비자발(比自㶱), 남가라(南加羅), 탁국(㖨國), 안라(安羅), 다라(多羅), 탁순(卓淳), 가라(加羅) 7국을 평정하고,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서 고해진(古奚津)에 이르러 남만 심미다례(沈彌多禮)를 도륙하고 백제에게 주었다”고 기록된 내용을 바탕으로 남만(南蠻)은 당시 왜(倭)의 입장에서 남쪽이 한반도일 수 없으니 백제 입장에서 남쪽으로 해석하여, 즉 주어를 왜(倭)에서 백제(百濟)로 바꿔서 해석하여 신공(神功) 49년(서기 369년) 백제 장군 목라근자가 남쪽에 위치한 마한을 정복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침미다례가 마한 전체를 뜻하는 용어로 쓰인 적이 없다는 점, 남쪽에는 마한뿐만 아니라 가야도 있으니 침미다례를 마한의 한 국가인 신미국(新彌國), 또는 가야의 한 국가로 보아야 한다는 점, 침미다례의 위치부터 제주도, 전남 해남, 경남 남해 등 여러 곳으로 비정된다는 점, 신공(神功) 49년이 서기 369년이 맞는지에 대한 논란, 고고학적 성과들과의 불일치 등을 들어 근초고왕 마한 완전 정복설은 부정되고 있다
다만, 백제의 영향력은 영산강 일대를 비롯한 전라남도 지역에 4세기 후반부터 침투하는 모습이 나타고 있어[9] 이를 근거로 문헌사학계에서는 5세기 경에 간접 지배는 실시되었다 보고 있다.
그 후 동성왕 시절의 탐라 지역에 대한 무력 시위 기록에 주목하여[10], 적어도 동성왕 시기에 이르러야 지배력 강화의 움직임이 있었다 본다. 또 일부 문헌사학자들은 일본서기에 성왕이 여러 나라를 정벌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것을 마한으로 해석하여 성왕 대에 마한을 정벌했다고 해석한다. 일단 현재 문헌사학계의 대세는 늦어도 6세기 중엽에 이르러서야 전남 지역 전체에 대한 직접 지배가 이뤄졌다고 보며, 무령왕이 상차리(上哆唎), 하차리(下哆唎), 사타(娑陀), 모루(牟婁) 네 현을 합병했다는 기록에 근거하여 이 지역들을 섬진강 유역이나 가야 일부 지역으로 해석하여 간접 통치 하에 있던 영산강 일대와 달리 별개의 독립 세력으로 있다가 무령왕 대에 섬진강 유역을 합병했다고 보기도 한다.
최근 전라남도 지역에서 발견된 여러 고고학적 성과들, 특히 전라남도 남해안과 내륙 지방에서 마한의 독자적인 고분 축조가 6세기까지 이어졌다는 사실 등은 남해안 소국들이 6세기 이후까지는 자신들의 문화를 유지했다는 주장에 결정적인 힘을 실어줬다. 남해안에서 발굴된 고분에 더해 특히 2015년과 2016년에는 전라남도 내륙 지역인 나주시와 화순군의 발굴 결과가 발표되었다. 나주 복암리 고분 발굴 결과 적어도 5세기까지 나주 지역에 마한의 독자 세력이 존재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11] 2016년에는 전라남도 내륙 지역인 화순군 회덕 고분군 발굴 결과가 새로 발표되었는데 6세기에 대규모의 독자적인 세력이 이 지역에 존재했으며, 이 세력은 백제, 왜, 대가야와 활발한 교류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기사 2018년 발표된 전라북도 정읍 지역의 고고학 연구 결과는 동진강 이남의 전라북도 지역에도 역시 6세기초까지 강력한 독자적 세력이 존재했으며, 이들 세력이 몰락한 것은 전라남도 소국 세력의 직접 지배 기반 해체와 거의 정확히 일치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동진강 이북의 익산, 전주, 완주 지역에도 오랫 동안 여러 소국들이 유지되었으나 웅진 천도 이후 몰락하게 된다. 이러한 고고학적 사실을 바탕으로 현재 고고학계[12]에서는 6세기까지 전라남도 지방에 독자적 소국 세력들이 여전히 온존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 [13]
한편 2000년대 들어 풍납토성 발굴로 온조왕 대에 이미 백제의 국력이 상당했지 않느냐는 추정이 나오면서, 온조왕 대의 마한 정벌도 사실로 보는 학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이는 풍납토성 항목에서도 볼수 있듯이 고고학 자료에 대한 오독에서 비롯된 것이며 풍납토성은 온조왕대에는 현재 발굴된 상태에 훨씬 못 미친다. 또한 이는 2010년대 이후 밝혀진 충청도와 전라남도 지역의 고고학적 성과들에 의해서 완전히 부정되고 있다.
해외와도 무역을 하였는데, 함평에서 일본 스에키 도기가 발견되기도 했다.#
위치나 영역에 대한 것들은 고고학적 발굴 조사를 토대로 조사가 진행 중이다. 청동기 시대를 거치면서 목지국을 중심으로 소국 연맹 형태를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3. 왕사


진, 변 두 한(韓)은 나의 속국이다. 근래 몇 년 동안 공물을 바치지 않으니 사대(事大)의 예가 어찌 이런가?

辰卞二韓爲我屬國. 比年不輸職貢 事大之禮 其若是乎

삼국사기 신라 본기에서 발췌. 신라의 성장을 견제하는 마한 왕의 발언이다.[14]

기록에 따르면, 기자의 후손으로 고조선의 왕인 준왕위만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쪽으로 갔다. 후한서에서는 준왕이 마한의 왕을 격파하고 한왕이 되어 삼한을 지배하였다고 기록했다. 준왕의 시호를 '무강왕(武康王)'이라 하는데 고려사 등에 금마군(익산)에서 도둑이 호강왕(=무강왕)의 무덤을 도굴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존재를 증거하기도 하나 무강왕은 백제 무왕일 가능성이 더 높다. 익산을 중심지로 한 왕이라는 점에서 더욱...
또한 행주 기씨,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이천 서씨는 그 후손을 자칭한다.
준왕 = 무강왕에서 이어지는 마한의 계보가 행주 기씨, 청주 한씨, 태원 선우씨 족보에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현대에는 후대의 부휘로 보아 청주 한씨 족보의 기록은 신뢰하지 않으며, 익산의 왕릉은 백제 무왕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참고로 삼한을 다스리는 진국(辰國)의 왕인 진왕(辰王)[15]은 항상 마한 목지국의 왕이 맡아 계승하도록 되어 있다고 한다.
문헌의 기록을 그대로 신뢰하였을 때 왕사를 표로 작성한다면 다음과 같다.

대수
왕호(王號)

재위 기간
비고
1(?)
준왕(準王)
,<한왕(韓王)>,
준(準)
기원전 194년(?) ~ ?
단군조선 마지막 국왕
.
.
.
?
?
,마한왕(馬韓王),
?
? ~ 기원전 19년
삼국사기 신라본기 박혁거세 조에 등장
?
?
,마한왕(馬韓王),
?
기원전 19년? ~ 기원후 8년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조에 등장

4. 마한의 특징



4.1. 사회


지도자는 있지만 읍촌을 다스리는 수준의 힘을 가진듯 보인다. 지도자를 신지(臣智), 그 다음 관직을 읍차(邑借)라고 하고 나머지 관직들은 위솔선 읍군(魏率善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장(伯長)이라고 한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우두머리는 있지만 읍락별로 있어서 서로 서로 제어하지 못한다" 고 되어있고, 《후한서》에는 "국읍에 각기 한명씩 두어 하늘의 신께 제사를 드리는 일을 하는 자를 천군이라고 한다."는 기록도 남아있어 제정이 분리되어 있는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마을의 중심에는 소도(蘇塗)라는 것을 세우는데 이는 큰 나무에 방울과 북을 매달고 귀신을 섬기는 곳을 뜻하며 이곳에 들어오면 사람들이 잡지를 못하게 되어 마한 사람들이 도둑질을 즐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인구수는 큰 나라는 1만여 호(戶), 작은 나라는 수천가(家)라고 하는데 이는 마한 뿐 아니라 진한변한도 마찬가지이다. 중국과 가까운 북쪽 사람들은 예의를 비교적 알았으나 남쪽에는 그렇지 못했고, 멀리 떨어진 곳에는 죄수들 처럼 노비들을 모아서 사는 군락지가 있었다.[16]
농사는 5월에 씨를 뿌려 10월에 수확한다는 기록이 나타나며, 5월 씨뿌리기 때와 10월 수확할 때, 두번에 걸쳐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고 밤낮을 안가리고 무리지어 음주가무를 즐긴다고 한다. 춤 모양은 탁무(鐸舞)와 비슷하다고 한다.

4.2. 거주지


"집은 초옥토실(草屋土室)[17]

의 형태를 띠는데, 그 안에 남녀나 나이가 많고 적음의 구별이 없이 지낸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토실을 만드는데, 마치 무덤의 모양과 같다. 출입문을 위쪽으로 향하게 하여 만든다."

《후한서》 동이 열전

이러한 기록은 마한인들이 기초적인 형태의 거주 시설에서 살았음을 알 수 있다. 공주시 탄천면 장선리에서 발견된 수혈주거지 유적을 위지 동이전에 나오는 초옥토실로 보기도 한다.

4.3. 의복


"영주(瓔珠)[18]

는 보물로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거나 목과 귀에 걸기도 하지만 금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중략) 상투를 트는데 그 모습이 경병(炅兵)과 같다. 베로 만든 두루마기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금은보화와 비단을 귀하게 여기지 않고 오직 영주를 귀하게 여겨 옷에 꿰매 장식하고 목과 귀에 건다. 대부분 괴두(魁頭)[19]

와 상투를 틀고 베로 만든 두루마기에 짚신을 신는다.

《후한서》 동이 열전

참고로 문신을 했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기록에는 약간의 차이가 보이는데 《삼국지》에는 "남자는 늘 문신(文身)을 한다."고 되어 있지만, 《후한서》에는 "남쪽에 왜(倭)와 가까이 있는 자들은 문신을 했다" 라고 되어 있다. 변한과 관련해서도 문신문화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 것을 볼 때, 변한과 마한을 구분없이 기록한 것으로 보여지기도 한다. 왜(아마도 일본의 선주민인 조몬인)와 한반도를 혼동한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고서기, 일본서기를 보면 문신은 일본인의 문화가 아니라 에조인, 즉 아이누인의 문화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중국의 문헌들과는 대조된다.
위의 기록처럼 마한시대 유적에서는 장신구로 구슬이 많이 출토되는데 유리, 수정, 호박, 마노, 천하석(天河石) 등 다양한 재료를 가공해서 만들었고, 형태도 다양해서 따옴표같이 생긴 곡옥(曲玉), 원통형 옥, 둥근 옥, 다면체 옥, 연주옥(連珠玉) 등 여러 형태의 구슬을 장신구로 사용했다.

4.4. 성(城)


후한서에는 "읍락에 섞어 사는데 성곽은 없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국지에는 "나라에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하면(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 諸年少勇健者)"이라는 기록이 남아있어서 아주 기초적인 토성 등의 형태의 성을 가지고 있을 가능성은 있다.
2000년 해남 옥녀봉에 위치한 옥녀봉 토성의 발굴 결과로 동신대학교 이정호 고고학과 교수가 주장하는 "옥녀봉 토성은 기원전 3세기경에 지어진 토성의 흔적이다" 라는 것이 확실하다면 기초적인 성곽을 가지고 있을 확률이 매우 크다.

4.5. 풍습


"나라에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하면 여러 건장한 젊은이가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줄을 꿰고 또 1장(丈) 정도 되는 나무를 매달고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며 힘을 다하여 이를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데 작업을 독려하며 또한 이를 강건함으로 여긴다."

《삼국지》 위지 동이전'''


"사람들은 씩씩하고 용맹한데 젊은이들이 건물을 지을 때 등가죽을 뚫어 줄을 꿰고 큰 나무를 매달고 힘있게 외치며 일하는 것을 강건함으로 여긴다."

《후한서》

등가죽에 줄을 꿰고 나무를 메고 다닌다는 이야기는 아마 "지게"를 뜻하는 듯 보인다.

4.6. 묘제


마한의 주 묘제는 매장주체부 주위에 도랑[20]을 두르는 주구토광묘(周溝土壙墓)인데, 그 형식은 크게 매장부를 먼저 만들고 그 주변에 눈썹 모양, 혹은 'ㄷ'형의 의 도랑을 두르는 청당동형[21] 주구토광묘와 무덤의 사방을 전부 도랑으로 두르고 도랑에서 파낸 흙으로 성토부를 만든 다음 그 위에 매장주체부를 만드는 관창리형[22] 주구토광묘로써 구분된다. 전자는 내륙지역에 분포하고, 주로 완만한 구릉의 경사면에 입지하고 있으며, 원저단경호(圓底短頸壺)심발형토기(深鉢形土器)를 부장하는 경우가 많다. 후자는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 서 해안지역에 분포하고, 대개 낮은 구릉이나 대지 위에서 군집을 이루며 성토부는 낮다. 한성백제 초기 단계에서 나타나는 묘제기도 하며, 이 묘제를 쓰는 집단이 고구려식 묘제를 쓰는 집단과 연합하여 백제국을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묘제나 부장 유물로 뵈선 중국 동해안 일대 오월 지역과 밀접한 교류 관계에 있었던 걸로도 해석된다. 관창리형은 4세기 이후 규모가 거대해지면서 영산강 유역을 중심으로 고총으로 발전한다.[23]

5. 마한 54국



위 지도는 천관우설과 정인보설을 적절히 혼합한 지도로, 현대까지 그나마 가장 정확한 것으로 인정받는다.
<colbgcolor=#4eae47><colcolor=#fafad2> (1)
<colbgcolor=#ffffff> 원양국(爰襄國)
<colbgcolor=#4eae47><colcolor=#fafad2> (2)
<colbgcolor=#ffffff> 모수국(牟水國)
<colbgcolor=#4eae47><colcolor=#fafad2> (3)
<colbgcolor=#ffffff> 상외국(桑外國)
<colbgcolor=#4eae47><colcolor=#fafad2> (4)
<colbgcolor=#ffffff> 소석색국(小石索國)
(5)
대석색국(大石索國)
(6)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7)
신분고국(臣濆沽國)
(8)
백제국(伯濟國)
(9)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10)
일화국(日華國)
(11)
고탄자국(古誕者國)
(12)
고리국(古離國)
(13)
노람국(怒藍國)
(14)
월지국(月支國)
(15)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16)
소위건국(素謂乾國)
(17)
고원국(古爰國)
(18,19)
막로비리국(莫盧卑離國)[24]
(20)
점리비국(占離卑國)
(21)
신흔국(臣釁國)
(22)
지침국(支侵國)
(23)
구로국(狗盧國)
(24)
비미국(卑彌國)
(25)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26)
고포국(古蒲國)
(27)
치리국국(致利鞠國)
(28)
염로국(冉路國)
(29)
아림국(兒林國)
(30)
사로국(駟盧國)
(31)
내비리국(內卑離國)
(32)
감해국(感奚國)
(33)
만로국(萬盧國)
(34)
벽비리국(辟卑離國)
(35)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36)
일리국(一離國)
(37)
불미국(不彌國)
(38)
지반국(支半國)
(39)
구소국(狗素國)
(40)
첩로국(捷盧國)
(41)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42)
신소도국(臣蘇塗國)
(43)
막로국(莫盧國)
(44)
고랍국(古臘國)
(45)
임소반국(臨素半國)
(46)
신운신국(臣雲新國)
(47)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48)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49)
일난국(一難國)
(50)
구해국(狗奚國)
(51)
불운국(不雲國)
(52)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53)
원지국(爰池國)
(54)
건마국(乾馬國)
(55)
초리국(楚離國)

아래는 최근까지의 학계 연구를 반영한 마한의 구성국 목록 및 추정되는 위치다. 마한의 역사는 아직까지는 추측뿐이라고 한다 이병도설과 천관우설, 정인보설 등등이 있다고 한다. 아래의 비정은 대개 천관우설을 따른 것인데, 물론 네이버 백과사전에 검색하면 나올 정도로 유명하고 비전문가들이 자주 인용하기는 하지만, 음상사(音相似) 이상의 근거가 마땅치 않기 때문에 대부분의 학자가 이를 확고한 사실이라고 주장하지는 않고 신중론을 취하고 있다. 그냥 지역사 집필을 맡으면 '옛날에 마한 무슨 나라가 있었는데 이 지역이라더라. 아마 유물 많이 나온 여기일 수도 있을 듯.' 하고 언급하는 정도이다.
아래 국가 중 비정이 확실하게 인정받는 것은 백제국(서울)과 벽비리국(김제) 정도이다. 그 외에 그나마 자주 인용되면서 지지를 받는 것은
  • 건마국(익산)의 위치
  • 일본서기 신공황후 49년조의 '비리·벽중·포미·지반'가 비리국·벽비리국·불미국·지반국에 대응된다는 주장
  • 국가명에 쓰인 '비리(卑離; 상고한어 발음은 /*pereːls/ 정도)'가 진한 지역의 '벌' 내지 '화(火; 당시 한국어 음이 벌(伐)에 대응했을 것으로 추정)'에 대응한다는 주장
  • 마찬가지로 국명에 쓰인 '모로'의 경우 후일 진, 변한권을 이어받은 국가들에서 보이는 '~모라'에 대응한다는 주장
정도이다. 그렇지 못한 국가는 대부분 근래의 논문에서 언급되지조차 않고(이 분야는 대개 고고학에 맡기고 끝난다), 문헌에서 유명한 목지국과 신분활국은 각각 안성천 남쪽 ~ 금강권과 경기도 일대에서 논문마다 위치가 곳곳으로 옮겨다니고 있다(...).
이들 나라 이름은 중국에서 기록한 것이므로 당연히 당시 중국 북방에서 통용되었던 상고한어 발음에 따라 표기되어 있다. 그렇기에 상고한어 발음 정보를 적극 활용하면 이들 나라의 위치 비정에 도움이 된다. 영문판 윅셔너리에 한자 1글자를 검색해 보면 그 글자의 상고한어 발음이 어떠한지 매우 자세히 나와 있으니 참고하면 좋다.
국가명
현재 추정 위치
소개
감해국(感奚國)
곰개
전라북도 익산시 함열
感의 상고한어 발음은 /*kɯːmʔ/ '금'이고, 奚의 상고한어 발음은 /*ɡeː/이다. 즉, 감해(感奚)가 고대에는 대략 '금게'에 가깝게 발음되었다. 그런데 전북 익산시 함열 근방에 곰개[熊浦]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 이곳으로 비정된다.
감해비리국(監奚卑離國)
곰개비리(곰개벌)
충청남도 홍성군 금마면

건마국(乾馬國)
전라북도 익산시 금마면, 왕궁면, 팔봉동, 삼기면 일대를 포함하는 지역
건마국은 마한 소국 가운데 형성 시기가 상대적으로 이르고, 인구가 1만 ∼ 2만 명에 이를 정도로 규모가 크며 지배집단의 성격도 토착성이 강한 것으로 추정된다. 마한 목지국이 백제국에 통합된 뒤 다른 마한 소국을 통솔하는 중심 세력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고랍국(古臘國)
고랍
전라북도 남원시
한원에서는 고즐국(古櫛國)이라고 한다. 이 소국의 위치는 한조에 기록된 순서로 보아 전라도 지방에 위치한 것은 분명하지만, 현재의 지명에 비정하기는 어렵다. 그런데 백제 때의 ‘고룡군(古龍郡)’이었던 전라북도 남원에 비정하는 견해도 있다. ‘고랍’과 ‘고룡’은 서로 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삼국사기』 지리지에 따르면 ‘남원소경(南原小京)’은 본래 백제의 ‘고룡군’이라고 하였다. 또한, 이 소국은 마한 연맹체의 일원으로서 맹주국과 결속 관계를 성립하면서도 토착적인 세력 기반을 그대로 유지한 채, 3세기쯤까지 독립적인 성장을 지속하다가 백제에 복속되었다.
고리국(古離國)
고리
경기도 여주시 또는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일대
그 크기가 수천 가로 작은 나라였을거라 여겨진다.
고비리국(古卑離國)
고비리(고벌)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으로 추정

고원국(古爰國)
경기도 또는 충청도 어딘가[25]

고탄자국(古誕者國)
불명[26]

고포국(古蒲國)
불명[27]

구로국(狗盧國)
충청남도 청양군

구사오단국(臼斯烏旦國)
전라남도 장성군 진원면

구소국(狗素國)
전라북도 정읍시 고부면 지방

구해국(狗奚國)
전라남도 강진군

내비리국(內卑離國)
대전광역시 유성구

노람국(怒藍國)
경기도 이천 장호원읍

대석삭국(大石索國)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강화도(추정)
3세기 이후 백제가 병합
막로국(莫盧國)
불명[28]
만로국(萬盧國)
충청남도 보령시 남포
남포면에 자리잡고 토성을 이루었는데, 남포 읍성의 전신이다. 백제 때부터 급속히 인류가 정착하여 남포, 주포 일대는 마을이 많이 형성되었다.
모로비리국(牟盧卑離國)
전라북도 고창군
4세기 무렵에야 백제가 병합, 2020년 3월 11일, 아산면 봉덕리와 고수면 예지리 경계의 작은 야산 태봉에서 마한시대 토성이 발견되었다.
훗날 백제는 이곳에 모량부리현을 설치했는데 신라 경덕왕이 고창현으로 개명했다. 모로비리를 머리벌, 마루벌, 즉, 높은 땅으로 보면, 높을 고(高)와 높을 창(敞)의 고창현, 고창군과도 일맥상통한다.
모수국(牟水國)
불명
3세기 이후 백제에 통합. 모수국은 광개토대왕릉비에 보이는 백제로부터 정복한 성 가운데 하나인 모수성(牟水城)에 해당되는데, 고구려 때의 ‘매홀군(買忽郡)’이었고, 통일신라 때의 ‘수성군(水城郡)’이었던 지금의 경기도 수원시 일대에 비정하기도 한다. ‘모수’의 ‘모’와 ‘매홀’의 ‘매’는 음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매(買)는 삼국사기 지리지에 ‘물(水)’의 표기로 되어 있다. ‘홀’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골’의 음전(音轉)으로 ‘고을’·‘성’을 뜻한다. 이와는 달리 고구려 때 ‘매성현(買省縣)’이었던 지금의 경기도 양주시으로 비정하기도 한다.[29] 이 소국은 마한 연맹체의 일원으로서 맹주국과 여러 가지 형태의 결속 관계를 성립한 채, 토착적인 세력 기반을 유지하면서 3세기 이후까지 개별적인 성장을 지속하다가 백제에 점령되었다.
목지국(目支國)
혹은 월지국(月支國)
충청남도 천안시
우두머리를 진왕(辰王)이라 하였는데, 이것은 진국(辰國)의 왕이라는 뜻이다.중국 사서(史書)에는 삼한 시대의 한강 이남 여러 부족 국가 진국으로 총칭하였다. 진국의 왕, 즉 진왕은 여러 부족 국가 중 세력이 가장 큰 자로서 부족 국가 연맹의 맹주(盟主)의 위치에 있었다.
백제국(伯濟國)
서울특별시, 한강 유역
부여고구려 이주민인 온조 집단이 건설한 속국으로, 한강 유역 일대에 위치하였다. 초기에는 목지국을 맹주로 하는 마한 연맹체의 구성원이었으나 미추홀(인천) 지역을 차지하면서 강력한 정치 집단으로 발전, 6세기 중반 이후에는 마한 전역을 통합하는 백제 왕국 건설의 기반을 마련했다.
벽비리국(辟卑離國)
전라북도 김제시
4세기 중엽 백제가 병합
불미국(不彌國)
전라남도 나주시
4세기 백제가 병합
불사분사국(不斯濆邪國)
불명[30]
불운국(不雲國)
전라남도 보성군 복내면
4세기 중엽을 전후로 백제가 병합
막로비리국(莫盧卑離國)
전라북도 군산시 회현면
3세기 이후 백제가 병합
비미국(卑彌國)
충청남도 서천군 비인면
사로국#s-2(駟盧國)
충남 홍성군, 청양군 일부 지역[31][32]

상외국(桑外國)
불명[33]
삼귀(三歸)·삼괴(三槐) 등으로 불렸다.
소석삭국(小石索國)
불명[34]
마한의 네 번째 소국으로, 다섯 번째의 대석삭국(大石索國)과 짝을 이룬다.
소위건국(素謂乾國)
충청남도 보령시
마한의 16번째 소국.
속로불사국(速盧不斯國)
불명[35]

신분활국(臣濆活國)
불명[36]
4세기 이후 백제에 편입
신소도국(臣蘇塗國)
충청남도 서산시, 태안군
그 국명으로 볼 때 이 신소도국은 마한의 종교적인 종주국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소도국의 중심지는 태안읍 동문리 백화산 기슭의 샘골(一名斜陽洞). 3세기 중후반경 백제국이 목지국에게 정면 도전하는 단계에서 백제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개연성이 크다. 그 후로도 한동안 백제가 대외적으로 마한을 자칭하고 마한의 체제를 계승하여 백제의 지배 하에서 소국 체제가 계속되었다.
신운신국(臣雲新國)
불명[37]

신흔국(臣釁國 또는 臣疊國)
불명[38]

아림국(兒林國)
충청남도 서천군
4세기 이후 백제에 편입
여래비리국(如來卑離國)
전라북도 익산시 여산면
염로국(冉路國)
충청남도 아산시

우휴모탁국(優休牟涿國)
불명[39]
3세기 이후 백제에 점령
원양국(爰襄國)
경기도 파주시 또는 황해도 금천군
3세기 후반 백제가 병합
원지국(爰池國)
전라남도 여수시 여천동
일난국(一難國)
전라남도 영암군
일리국(一離國)
전라도 어딘가[40]
일화국(日華國)
경기도 양평군 또는 서울 금천구 시흥 일대
4세기 중엽 이후 백제가 병합
임소반국(臨素半國)
전라북도 군산시 옥구읍
자리모로국(咨離牟盧國)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
3세기 이후 백제가 병합.
지반국(支半國)
전라북도 부안군 태인면
3세기 이후 백제가 병합
지침국(支侵國)
충청남도 예산군 대흥면
4세기 때 백제가 병합
첩로국(捷盧國)
전라북도 정읍시
초리국(楚離國)
전라남도 고흥군 남양면
3세기 무렵 백제가 병합
초산도비리국(楚山塗卑離國)
불명[41]
치리국국(致利鞠國)
불명[42]
3세기 무렵 백제가 병합. 인구 3만 정도의 소국

6. 역사귀속과 계승인식



6.1. 기원


初 朝鮮王準爲衛滿所破 乃將其餘衆數千人走入海 攻馬韓 破之 自立爲韓王.

당초 조선왕 준이 위만에 패했을 때 남은 무리 수천 명을 이끌고 바다로 달아나 마한을 공격하여 깨트리고 한왕이 되었다.

후한서 위지 동이 열전

고조선왕 준왕위만에게 쫓겨난후 남쪽으로 도망가 마한을 공격하여 왕위를 차지했다고 하는 중국의 기록이 있고 마한의 중심지였던 오늘날의 익산에는 준왕과 관련되었다고 전해지는 유적들이 있어 마한의 지배층은 고조선에서 침투했다고 보인다.

6.1.1. 삼한정통론 또는 마한정통론


삼한 정통론은 마한정통론이라고도 불린다. 이 이론은 조선후기 국학계열의 실학자들에 의해 발흥한 이론으로 기자조선위만조선으로 이어지지 않고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이론이다. 이유는 위만은 찬탈자로 유교적 사상에 근거하면 적통으로 볼 수없고 적통인 기준왕이 쫓겨 내려가 마한의 왕이 되었기 때문에 기자조선의 적통은 마한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때부터 족보들의 내용으로는 준왕의 씨족은 기씨(箕氏)에서 한(韓氏)로 바뀌었다는 내용들이 있다. 그래서 기자의 혈통과 유지는 마한, 더 넓게는 삼한으로 계승되었고 삼한은 한국사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이러한 사상은 현대적인 실증 사관은 아니고 조선시대의 관념론적 사관이라 할 수 있다.

6.2. 계승


현대에 마한은 기본적으로 백제로 계승된것으로 보나 과거에는 어디로 계승되는지 확실히 알지 못하여 고구려로 계승된다는 주장도 있었고 백제로 계승된다는 주장도 있었다. 또한 삼한이 한국사 국가와 민족을 통칭하게 되면서 마한은 한국 자체를 부르는 명칭으로도 굳어졌다.

高麗位頭大兄理大夫後部軍主高延壽·大兄前部軍主高惠真等, 幷馬韓酋長.

고구려 두위 대형 고연수, 고혜진은 변한, 마한 추장이다.

전당문, 태종황제, 645년

당나라에서는 투항한 고구려 장수인 고연수와 고혜진을 변한과 마한의 추장이라 하였다. 삼한 전체를 한국사 국가로 통칭한듯 보인다.

6.2.1. 고구려 계승론


崔致遠云 馬韓 麗也 辰韓 羅也 本紀 則羅先起甲子 麗後起甲申 而此云者 以王準言之耳 以此知東明之起 已竝馬韓而因之矣 故稱麗爲馬韓 今人或認金馬山 以馬韓爲百濟者 盖誤濫也 麗地自有邑山 故名馬韓也

최치원은 말하기를 "마한은 고구려이고, 진한은 신라다." 삼국사기 본기에 의하면 신라는 먼저 갑자년에 일어 났고, 고구려는 후에 갑신년에 일어 났다고 하였다. 여기에 말한 것은 조선왕인 준을 가리킨 것이다. 이것으로 알 수있는 것은 동명왕이 일어날 때에 마한까지 차지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래서 고구려를 마한이라고 한다. 지금 사람들은 혹 금마산이 있어 마한을 백제라고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말이다. 고구려 땅에는 원래 읍산이 있었기 때문에 이름을 마한이라 한 것이다.

삼국유사 마한전

최치원은 마한이 고구려로 계승되었다고 보았다.

최치원은, “마한이 고구려가 되고, 변한이 백제가 되었으며, 진한이 신라가 되었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사실이 그렇지 않다고 의심한다. 그러나 최치원은 당시의 사람인데, 어찌 이같은 어긋난 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성호사설 2권 삼한금마 中.

조선시대의 이익은 마한이 고구려로 계승된다는 최치원의 의견에 동조하였다.

6.2.2. 백제 계승론


권근(權近)이 말하기를, "삼한(三韓)에 대한 설(說)은 서로 다른 점이 있다. 그러나 조선왕 기준(箕準)이 위만(衛滿)의 난을 피하여 바다를 건너 남쪽으로 가서 개국(開國)하여 마한(馬韓)이라 불렀었는데, 백제(百濟) 온조(溫祚)가 즉위함에 이르러 드디어 그를 병합하였다. 지금 익주(益州)에는 고성(古城)이 있는데, 지금까지 사람들이 기준성(箕準城)이라고 부르고 있으므로 마한이 백제가 된 것은 의심할 것이 없다.(후략)"

동국통감 외기[43]

삼한기[44]

권근동국사략(東國史略)에서 최치원과는 다르게 고구려는 변한에서 계승되었고, 마한은 백제로 계승되었다고 주장하였다.

7. 관련 역사기록



7.1. 중국



7.1.1. 후한서 동이 열전


韓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辰。馬韓在西,有五十四國,其北與樂浪,南與倭接,辰韓在東,十有二國,其北與濊貊接。弁辰在辰韓之南,亦十有二國,其南亦與倭接。凡七十八國,伯濟是其一國焉。大者萬餘戶,小者數千家,各在山海間,地合方四千餘里,東西以海為限,皆古之辰國也。馬韓最大,共立其種為辰王,都目支國,盡王三韓之地。其諸國王先皆是馬韓種人焉。

한(韓)은 세 종족이 있으니, 첫번째는 마한(馬韓), 두번째는 진한(辰韓), 세번째는 변진(弁辰)이다. 마한(馬韓)은 서쪽에 있는데, 54개의 나라가 있으며, 그 북쪽은 낙랑(樂浪), 남쪽은 (倭)와 접하여 있다. 진한은 (마한의) 동쪽에 있는데, 12개 나라가 있으며, 그 북쪽은 예맥(濊貊)과 접하여 있다. 변진은 진한의 남쪽에 있는데, 역시 12개 나라가 있으며, 그 남쪽은 왜와 접해 있다. 모두 78개의 나라가 있다. 백제(伯濟)는 그 중에서 속해있는 한 나라이다. 큰 나라는 만 여호(萬餘戶), 작은 나라는 수천 가(家)로 이루어졌는데, 각기 산과 바다 사이에 있어서 전체 국토의 넓이가 사방 4천여리나 된다. 동쪽과 서쪽은 바다를 경계로 하니 모두 옛 진국(辰國)의 땅이다. 마한이 (삼한 중에서) 가장 강대하여 그 종족들이 함께 왕(王)을 세워 진왕(辰王)으로 삼아 목지국(目支國)에 도읍을 삼아서 전체 삼한 지역의 왕으로 군림하는데, (삼한의) 모든 국왕의 선대는 모두 마한 출신의 사람이다.

馬韓人知田蠶,作綿布。出大栗如梨。有長尾雞,尾長五尺。邑落雜居,亦無城郭。作土室,形如冢,開戶在上。不知跪拜。無長幼男女之別。不貴金寶錦罽,不知騎乘牛馬,唯重瓔珠,以綴衣為飾,及縣頸垂耳。大率皆魁頭露紒,布袍草履。其人壯勇,少年有築室作力者,輒以繩貫脊皮,縋以大木,歡呼為健。常以五月田竟祭鬼神,晝夜酒會,群聚歌舞,舞輒數十人相隨,蹋地為節。十月農功畢,亦復如之。諸國邑各以一人主祭天神,號為「天君」。又立蘇塗,建大木以縣鈴鼓,事鬼神。其南界近倭,亦有文身者。

마한 사람들은 농사와 양잠을 할 줄을 알며, 길쌈하여 베를 짠다. 큰 밤이 산출되는데 그 크기가 배만큼 크며, 꼬리가 긴 닭이 있는데 꼬리의 길이는 5척(尺)이나 된다. 읍락(邑落)에 거주하며 역시 성곽이 없다. 땅을 파서 움집을 만드니 그 모양이 마치 무덤같으며, 출입하는 문은 윗 부분에 있다. 무릎을 꿇고 절하는 줄을 알지 못하며, 어른과 어린이의 차례와 남녀(男女)의 분별하는 따위의 예가 없다. 금, 보화, 비단, 모직물 등을 귀하게 여기지 않으며 소와 말을 탈 줄을 모르고[45]

, 오직 구슬을 귀중히 여겨서 옷에 꿰메어 장식하기도 하고 목이나 귀에 달기도 한다. 그들은 대체로 머리를 틀어 묶고 상투를 드러내 놓으며, 베로 만든 도포를 입고 짚신을 신는다. 그 나라 사람들은 씩씩하고 용감하여 젊은이들 중 집을 짓는데에서 일하는 사람은 매번 밧줄로 등의 가죽을 꿰어 큰 나무를 매어 달고 소리를 지르는데 (이것을) 건장하다고 한다. 해마다 5월에는 농사일을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는데, 낮이나 밤이나 술자리를 베풀고 떼지어 노래부르며 춤춘다. 춤출 때에는 수십명이 서로 줄을 서서 땅을 밟으며 장단을 맞춘다. 10월에 농사의 추수를 끝내고는 또 다시 이와 같이 한다. 여러개 나라의 도읍에서는 각각 한 사람이 천신(天神)의 제사를 주재하는데 (그 사람을) 천군(天君)이라고 부른다. 또 소도(蘇塗)를 만들어 거기다가 큰 나무를 세우고서 방울과 북을 매달아 놓고 귀신을 섬긴다. (마한의) 남쪽 경계는 왜에 가까우므로 문신(文身)을 한 사람도 있다.


7.1.2. 삼국지 위서 오환 선비 동이전


韓在帶方之南,東西以海爲限,南與倭接,方可四千里。有三種,一曰馬韓,二曰辰韓,三曰弁韓。辰韓者,古之辰國也。馬韓在西。其民土著,種植,知蠶桑,作綿布。各有長帥,大者自名爲臣智,其次爲邑借,散在山海間,無城郭。有爰襄國、牟水國、桑外國、小石索國、大石索國、優休牟國、臣沽國、伯濟國、速盧不斯國、日華國、古誕者國、古離國、怒藍國、月支國、咨離牟盧國、素謂乾國、古爰國, 莫盧國、卑離國、占離卑國、臣國、支侵國、狗盧國、卑彌國, 監奚卑離國、古蒲國、致利鞠國、路國、兒林國 , 駟盧國、內卑離國、感奚國、萬盧國、卑離國 , 臼斯烏旦國、一離國、不彌國、支半國、狗素國、捷盧國、牟盧卑離國、臣蘇塗國、莫盧國、古臘國、臨素半國、臣雲新國、如來卑離國、楚山塗卑離國、一難國、狗奚國、不雲國、不斯邪國、爰池國、乾馬國、楚離國,凡五十餘國。大國萬餘家,小國數千家,總十餘萬戶。辰王治月支國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支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

한(韓)은 대방(帶方) 남쪽에 있고 동서간으로 바다에 막혀 있다. 남쪽으로 왜(倭)와 접하고 사방 4천리다.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세 종류가 있다. 진한(辰韓)은 예전의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서쪽에 있는데 그 백성은 정착하여 농경을 하는데 누에 치는 법을 알고 면포(綿布)를 만든다. 각각 우두머리(長帥)가 있는데 큰 것은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邑借)라 한다.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고 성곽(城郭)이 없다. 원양국, 모수국, 상외국, 소석색국, 대석색국, 우휴모탁국, 신분고국(臣沽國), 백제국(伯濟國), 속로부사국, 일화국, 고탄자국, 고리국, 노남국, 월지국(月支國), 자리모로국, 소위건국, 고원국, 막로국, 비리국, 점리비국, 신흔국, 지침국, 구로국, 비미국, 감해비리국, 고포국, 치리국국, 염로국, 아림국, 사로국, 내비리국, 감해국, 만로국, 피비리국, 구사오단국, 일리국, 불미국, 지반국, 구소국, 첩로국, 모로비리국, 신소도국, 막로국, 고랍국, 임소반국, 신운신국(臣雲新國), 여래비리국, 초산도비리국, 일난국, 구해국, 불운국, 불사분야국, 원지국, 건마국, 초리국 등 모두 50여 개 나라가 있다.

큰 나라는 만여 가(家),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 호(戶)수가 총 십여 만이다. 진왕(辰王)이 월지국(=목지국)을 다스리는데 신지(臣智)를 따로 우대하여 호칭하였고(加優呼) 신운국의 견지보(遣支報), 안야국의 축지분(踧支濆), 신리국의 아불례(兒不例), 구야국의 진지렴(秦支廉)이 그것이다. 그 관직으로는 위솔선 읍군(魏率善邑君), 귀의후(歸義侯), 중랑장(中郞將), 도위(都尉), 백장(伯長)이 있다.

侯準旣僭號稱王, 爲燕亡人衛滿所攻奪【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見周衰,燕自尊爲王,欲東略地,朝鮮侯亦自稱爲王,欲興兵逆擊燕以尊周室。其大夫禮諫之,乃止。使禮西說燕,燕止之,不攻。後子孫稍驕虐,燕乃遣將秦開攻其西方,取地二千餘里,至滿番汗爲界,朝鮮遂弱.及秦幷天下,使蒙恬築長城,到遼東。時朝鮮王否立,畏秦襲之,略服屬秦,不肯朝會。否死,其子準立。二十餘年而陳、項起,天下亂,燕、齊、趙民愁苦,稍稍亡往準,準乃置之於西方。及漢以盧爲燕王,朝鮮與燕界於浿水。及反,入匈奴,燕人衛滿亡命,爲胡服,東度浿水,詣準降,說準求居西界,(故)中國亡命爲朝鮮藩。準信寵之,拜爲博士,賜以圭,封之百里,令守西邊。滿誘亡黨,衆稍多,乃詐遣人告準,言漢兵十道至,求入宿衛,遂還攻準。準與滿戰,不敵也。】將其左右宮人走入海, 居韓地, 自號韓王.【魏略曰 其子及親留在國者,因冒姓韓氏。準王海中,不與朝鮮相往來。】其後絶滅, 今韓人猶有奉其祭祀者. 漢時屬樂浪郡, 四時朝謁【魏略曰 初,右渠未破時,朝鮮相歷谿卿以諫右渠不用,東之辰國,時民隨出居者二千餘戶,亦與朝鮮貢蕃不相往來。至王莽地皇時,廉斯爲辰韓右渠帥,聞樂浪土地美,人民饒樂,亡欲來降。出其邑落,見田中驅雀男子一人,其語非韓人。問之,男子曰:「我等漢人,名戶來,我等輩千五百人伐材木,爲韓所擊得,皆斷髮爲奴,積三年矣。」曰:「我當降漢樂浪,汝欲去不?」戶來曰:「可。」(辰)因將戶來(來)出詣含資縣,縣言郡,郡卽以爲譯,從芩中乘大船入辰韓,逆取戶來。降伴輩尙得千人,其五百人已死。時曉謂辰韓:「汝還五百人。若不者,樂浪當遣萬兵乘船來擊汝。」辰韓曰:「五百人已死,我當出贖直耳。」乃出辰韓萬五千人,弁韓布萬五千匹,收取直還。郡表功義,賜冠、田宅,子孫數世,至安帝延光四年時,故受復除。】

조선후 준(準)이 왕을 참칭한 후 연나라 망명인 위만(衛滿)에게 공격당해 왕위를 탈취당했다. 【위략에 이르기를 주나라가 쇠망하여 연나라가 왕을 자칭하고 동쪽 땅을 경략하려 하자, 옛날 기자(箕子)의 후손인 조선후(朝鮮侯) 또한 왕을 자칭하고는 군사를 일으켜 역으로 연나라를 공격함으로써 주 왕실을 받들려 했다. 대부(大夫) 예(禮)가 이를 간언하자 그만 두었다. 예를 보내 서쪽으로 연나라를 설득하자 연나라도 공격하지 않았다. 후에 자손들이 점점 교만하고 사나워지자 연나라는 장수 진개(秦開)를 보내 조선의 서쪽 지방을 공격하여 이천여리 땅을 탈취하고 만번한(滿番汗)에 이르러 이를 경계로 삼았고 조선은 마침내 쇠약해졌다. 진나라가 천하를 아우르자 몽염(蒙恬)을 보내 요동에 이르는 장성을 쌓게 했다. 그때 조선왕 부(否)가 즉위했는데 진나라의 습격을 두려워해 대략 진나라에 복속했으나 조회(朝會)하는 것은 거부했다. 부가 죽자 그 아들인 준(準)이 즉위했다. 20여 년 후 진승, 항량이 봉기하여 천하가 어지러워지자 연(燕), 제(齊), 조(趙)의 백성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했고 점점 준에게로 달아나 망명하자 준은 그들을 서쪽에 두었다. 한나라가 노관(盧綰)을 연왕(燕王)으로 임명했을 때 조선과 연은 패수(浿水)를 그 경계로 삼았다. 노관이 배반하여 흉노에 투항했을 때 연나라 사람 위만이 망명했는데 호복(胡服)[46]

을 입고 동쪽으로 패수를 건너 준에게 나아가 투항했고, 서쪽 경계에 거처하게 해달라고 준을 설득하여 중국의 망명인들을 수습하여 조선을 지키는 병풍이 되었다. 준은 위만을 믿고 총애하여 박사로 임명(博士)하고 규(圭)[47]를 하사하여 100리 땅을 봉하여 서쪽 변경을 지키도록 했다. 위만이 망명인들을 유인하여 그 무리가 점점 많아지자 사람을 보내 한나라 병사가 10갈래 길로 쳐들어왔다고 거짓으로 고하며 (수도로) 들어가 숙위할 것을 청했는데 마침내 군을 돌려 준을 공격했다. 준은 위만과 싸웠으나 감당하지 못했다.】 좌우 측근과 궁인들을 거느리고 바다로 들어가 한(韓)의 땅에 거처하게 되었고 스스로 한왕(韓王)이라 불렀다. 【위략에 이르기를 준의 아들과 부모는 조선에 머물렀는데 성을 바꿔 한씨(韓氏)라 했다. 준왕이 바다 가운데 있을 때 조선과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그 후 절멸(絶滅)했으나 지금 한인(韓人)들 중에는 여전히 그를 받들어 제사 지내는 자가 있다. 한나라 때 낙랑군에 속하게 되어 사시(四時)로 조알(朝謁)했다.【위략에 이르기를 당초 우거(右渠)가 격파되기 전,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간언했으나 수용하지 않자 동쪽의 진국(辰國)으로 갔는데 이때 따라 나온 자가 2천 여 호(戶)였고 또한 조선과 공번[48]

을 서로 왕래하지 않았다. 왕망 지황(地皇)[49] 에, 염사치(廉斯)가 진한(辰韓)의 우거수(右渠帥)가 되었는데 낙랑 토지가 비옥하고 인민들이 풍요하다는 말을 듣고 망명하여 투항하고자 했다. 그 읍락을 나왔다가 밭 가운데에서 참새를 쫓고 있는 남자 한 명을 보았는데 그 말이 한인(韓人)이 아니었다. 그에게 묻자 그 남자가 말했다, "저는 한인(漢人)이고 이름은 호래(戶來)입니다. 저희 일행 천 오백 명이 벌목하다 한인(韓所)에게 사로잡혀 머리를 깎이고 노비가 된지 3년 째입니다." 염사치가 말했다, "나는 한나라 낙랑에 투항하려 하는데 너도 함께 가겠는가?" 호래가 말했다, "그렇습니다." 염사치가 호래를 데리고 함자현(含資縣)에 도착하니 현(縣)에서는 이를 군(郡)에 보고했다. 군에서는 즉시 염사치를 통역으로 삼아 금중(芩中)에서 큰 배를 타고 진한으로 들어갔는데 호래도 함께 따라갔다. 항복한 동료 천 명을 되찾았으나 5백 명은 이미 죽은 뒤였다. 염사치가 깨우쳐 말했다, "5백 명을 돌려보내시오. 만일 그러지 않으면 낙랑이 마땅히 군사 만 명을 배에 태워 보내 당신들을 공격할 것이오." 진한 사람이 말했다, " 5백 명이 이미 죽었으니 다른 것으로 속죄하겠소" 이에 진한에서 만 오천 명, 변한에서 포(布) 만 오천 필이 나오자 염사치가 이를 거둬 돌아왔다. 군에서 염사치의 공의(功義)를 표창하여 관책[50]을 하사하고 자손 수 대에 걸쳐 안제(安帝) 연광(延光) 4년(125년)에 이르기까지 과역을 면제받았다(復除)】

桓、靈之末,韓濊彊盛,郡縣不能制,民多流入韓國。建安中,公孫康分屯有縣以南荒地爲帶方郡,遣公孫模、張敞等收集遺民,興兵伐韓濊,舊民稍出,是後倭韓遂屬帶方。景初中,明帝密遣帶方太守劉昕、樂浪太守鮮于嗣越海定二郡,諸韓國臣智加賜邑君印綬,其次與邑長。其俗好衣,下戶詣郡朝謁,皆假衣,自服印綬衣千有餘人。部從事吳林以樂浪本統韓國,分割辰韓八國以與樂浪,吏譯轉有異同,臣智激韓忿,攻帶方郡崎離營。時太守弓遵、樂浪太守劉茂興兵伐之,遵戰死,二郡遂滅韓。其俗少綱紀,國邑雖有主帥,邑落雜居,不能善相制御。無拜之禮。居處作草屋土室,形如,其戶在上,擧家共在中,無長幼男女之別. 其葬有槨無棺,不知乘牛馬,牛馬盡於送死。以瓔珠爲財寶,或以綴衣爲飾,或以縣頸垂耳,不以金銀錦繡爲珍。其人性彊勇,魁頭露紒 如炅兵,衣布袍,足履革。其國中有所爲及官家使築城郭,諸年少勇健者,皆鑿脊皮,以大繩貫之,又以丈許木之,通日呼作力,不以爲痛,以勸作,且以爲健。常以五月下種訖,祭鬼神,群聚歌舞,飮酒晝夜無休。其舞,數十人俱起相隨,踏地低,手足相應,節奏有似鐸舞.十月農功畢,亦復如之。信鬼神,國邑各立一人主祭天神,名之天君。又諸國各有別邑。名之爲蘇塗。立大木,縣鈴鼓,事鬼神。諸亡逃至其中,皆不還之,好作賊。其立蘇塗之義,有似浮屠,而所行善惡有異。其北方近郡諸國差曉禮俗,其遠處直如囚徒奴婢相聚。無他珍寶。禽獸草木略與中國同。出大栗,大如梨。又出細尾鷄,其尾皆長五尺餘。其男子時時有文身。又有州胡在馬韓之西海中大島上,其人差短小,言語不與韓同,皆頭如鮮卑,但衣韋,好養牛及猪。其衣有上無下,略如裸勢。乘船往來,市買韓中。

환제, 영제 말에 한(韓), 예(濊)가 강성하여 군현이 이를 제압하지 못하자 백성들 다수가 한국(韓國)으로 유입(流入)했다. 건안(建安)[51]

중, 공손강이 둔유현(屯有縣)을 나눠 남쪽 거친 땅에 대방군(帶方郡)을 설치하고, 공손모(公孫模), 장창(張敞) 등을 파견해 유민(遺民)을 수습하여 병사와 더불어 한, 예를 토벌하니 예전 백성들이 점점 (한, 예로부터) 나오게 되었고 이때부터 왜(倭), 한(韓)은 대방군에 속하게 되었다. 경초(景初)[52] 중에 명제는 은밀히 대방 태수 유흔(劉昕), 낙랑 태수 선우사(鮮于嗣)를 보내 바다를 건너 2군을 평정하고 여러 한국(韓國)의 신지(臣智)들에게 읍군(邑君)의 인수(印綬)[53]를, (신지의) 아래 군장들에게는 읍장(邑長)을 가사(加賜)했다. 그 풍속이 의책(衣을 좋아하는데 하호(下戶)들도 군으로 나아가 조알하여 모두 의책을 빌리니 스스로 인수와 의책을 갖춘 자가 천 여 명이나 되었다.

(유주) 부종사(部從事) 오림(吳林)이 본래 낙랑이 한국(韓國)을 통치했다 하여 진한 8국을 분할하여 낙랑에 붙이려 했는데 관리가 통역하여 전하는 과정에 잘못이 있어 신지가 격분하여 한(韓)이 대방군 기리영(崎離營)을 공격했다. 이때 (대방) 태수 궁준(弓遵)과 낙랑 태수 유무(劉茂)가 군을 일으켜 토벌했는데 궁준이 전사했으나 2군(낙랑, 대방)이 마침내 한을 토멸했다. 그 풍속에 기강이 부족해 국읍(國邑)에 비록 우두머리(主帥)가 있으나 읍락에 잡거(雜居)하여 서로 제어하지 못하고 궤배(拜)[54]

의 예법이 없다. 초옥토실(草屋土室)을 만들어 거처하는데, 그 형태가 무덤과 같고 문을 위로 내는데 모든 가족이 그 안에 함께 거주하여 장유(長幼)나 남녀의 구별이 없다. 장례를 치를 때 곽(槨)은 있으나 관(棺)은 없다. 우마(牛馬)를 탈 줄 모르고 장례를 치를 때 우마를 함께 묻는다. 영주(瓔珠)를 보물로 여겨 옷에 꿰매어 장식하거나 목과 귀에 걸기도 하지만 금은과 비단은 보배로 여기지 않는다.

그 인성(人性)이 강용(彊勇)하고 상투를 트는데 그 모습이 경병(炅兵)과 같다. 베로 만든 두루마기(布袍)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나라에 일이 있거나 관가에서 성곽을 쌓게 하면 여러 건장한 젊은이가 모두 등가죽을 뚫어 큰 줄을 꿰고 또 1장(丈) 정도 되는 나무를 매달고[55]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며 힘을 다하여 이를 고통으로 여기지 않는데 작업을 독려하며 또한 이를 강건함으로 여긴다. 항상 5월이 되어 씨 뿌리기를 끝내면 귀신에게 제사 지내고 무리지어 모여 음주, 가무하는데 밤낮으로 그침이 없다. 그들의 춤은 수십 명이 함께 일어나 서로 따르며 땅을 얕게 또는 높게 밟고 손발로 서로 호응하며 가락이 있는데 탁무(鐸舞)와 유사하다. 10월에 농사일이 끝나면 또한 이와 같이 한다. 귀신을 믿어 국읍에 각각 한 명을 세워 천신에 대한 제사를 주관하게 하니 그를 천군(天君)이라 한다. 또 여러 나라에 각각 별읍(別邑)을 두고 이를 소도(蘇塗)라 한다. 큰 나무를 세우고 방울과 북을 매달아 귀신을 섬긴다. 여러 도망자가 여기에 이르면 모두 돌려보내지 않으니 도적질을 좋아하게 되었다. 소도를 세운 뜻은 부도(浮屠)[56]과 비슷한 점이 있으나 선, 악을 행하는 점에서 다른 점이 있다.

그 북쪽에 군(郡)과 가까운 여러 나라들은 다소 예속(禮俗)에 밝았으나 멀리 떨어진 곳에선 죄수처럼 노비가 서로 모여 산다. 다른 보물은 없다. 짐승, 초목은 중국과 같다. 큰 밤(大栗)이 산출되는데 크기가 배(梨)만 하고, 또 꼬리가 가느다란 닭(細尾鷄)이 있는데 그 꼬리 길이가 5척 남짓 된다. 남자는 늘 문신(文身)을 한다. 또 주호(州胡)가 마한의 서쪽 바다 가운데 큰 섬에 있는데 그 사람들은 다소 몸집이 작고 언어가 한(韓)과 다르다. 모두 선비족처럼 머리를 깎고 가죽 옷을 입는데 소와 돼지 기르기를 좋아한다. 그 옷은 윗도리는 있으나 아랫도리가 없으니 대략 알몸과 같다. 배를 타고 왕래하며 한(韓)과 교역한다.


8. 바깥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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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한 중에서는 그나마 나은 편에 속한다. 중국 기록이 그나마 자세하고, 삼한 중 가장 영향력이 세고 컸기 때문. 변한은 거의 기록이 없는 편에 속한다. 마한이 백제, 진한이 신라로 정리되어 발전했는데 변한은 하나의 뚜렷한 도시를 중심으로 재편되지 못한 채 여전히 여러 나라로 나뉜 체제 가야로 이어졌다 이후 자체 기록이 거의 없이 멸망한 것 때문인 것도 있다. 하지만 진한이나 변한의 소국들이 신라의 기록을 토대로 작성된 삼국사기나, 삼국시대 후기의 사실이 자세하게 기록된 부분이 많은 일본서기 덕에 그 위치비정이 비교적 수월하고 고고학적 자료도 풍부하게 나오는데 비해 마한의 소국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내용이 워낙 부실하고 백제 초기의 자료가 제대로 남은 것이 없으며, 고고학적 발굴성과가 상대적으로 미비해 비정이 거의 불가능한 걸 생각하면 마냥 그렇지만도 않다.[2] 고고학적으로는 경기-충청-전라 서해안 일대의 분구묘 묘제를 쓰는 해양 세력이다. 다만 이들이 목지국을 비롯한 그전까지의 여타 다른 마한 주도 세력과는 계통이 같다고 보기 어렵기에, '마한'이라고 하는 건 바르지 않다. 그들 또한 마한 목지국의 영향력 아래 있던 세력이었음은 같지만 그렇게 따지면 임진강의 고구려 혹은 예족 게열도 마한으로 봐야 한다.[3] 군사력으로 멸망 직후 반란을 죄다 일으켜야 유민의식이 있다는 건 그 어느 학계에서도 받아들여지지 않는 해석이다. 반란 자체가 유민 의식의 강렬한 흔적인 것과 이것은 전혀 별도다.[4] 백제식 금동관은 경기 화성, 충남 천안,서산,공주, 전북 익산, 전남 고흥에서 출토되었으며, 수도지역이 아닌 지방에서만 출토되는 점으로 보아 지방세력 포섭을 위한 하사품으로 추정된다.#백제 중앙세력은 금동관이 아닌 오라관(검은 비단모자)를 쓰고 금제,은제 장식을 부착하는 방식이었다.[5] 견훤의 부친이었지만 견훤과의 마찰로 결국 고려에 귀부.[6] 후백제왕 견훤이 경북 상주 출신이었다는 것도 시사하는 점이 있다. 삼국사기에는 경북 상주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삼국유사에는 광주 북촌(현 광주광역시) 출신으로 기록되어 있기는 하다.[7] 이건 책계왕 혹은 비류왕 때 일로 이해된다.[8] 원문은 【마한은 백제 온조왕 27년에 멸망하였는데, 지금 고구려 왕과 함께 군사 행동을 한 것은 아마도 멸망한 후 다시 일어난 것인가?(馬韓以百濟溫祚王二十七年 滅 今與麗王行兵者 盖滅而復興者歟)】[9] 최성락,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와 백제에 의한 통합과정」, 『지방사와 지방문화』20-1, 2017 및 『영산강유역 고대사회의 형성과정 연구』, 주류성, 2018[10] 탐라를 정벌하러 가는 과정에 무진주에서 탐라의 항복을 받았다는 내용이라 직접 통치까지는 아니라도 전남 지역이 이미 백제의 지배력은 미치고 있는 지역으로 보기도 한다[11] 단, 이들이 백제의 영향력 하 있던 반독립세력인지 완전히 별개의 세력인지는 논란거리다.[12] 어디까지나 고고학계의 의견이지 문헌사학계는 의견이 또 다르다.[13] 다만 오해하면 안 되는게, 나주 일대 소국 세력과 정읍-광주 축선의 전남 중동부 내륙 세력, 남해안 일대 세력은 각기 계통과 세력권이 조금씩 다르다는 것이다. 전남 전체와 전북 일대에 마치 독자적이고 단일한 마한 세력이 백제와는 별도로 존재한 걸로 오해하는 의견이 있는데, 문헌 사학은 물론이고 고고학적으로도 지지받을 수는 없는 의견이다.[14] 이 발언을 한 마한 왕이 누군지는 모른다.[15] 후한서의 기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목지국만을 통솔한다고 기술되어 있다.[16] 다만 이 서술은 걸러서 볼 필요가 있는 게, 후한서나 삼국지 등의 기록은 중국의 관점에서 작성되어 있다. 게다가 위 서술은 마한 소국들이 중국과의 거리에 비례하여 중국에 대한 관심도가 얼마나 높았느냐를 나타내는 서술에 가깝다. 당장 중국 명나라에서 자신들과 지리상으로 가까웠던 조선과 멀었던 일본을 각기 어떻게 평가했는지를 생각해보자.[17] 땅을 파고 그 위에 나무로 뼈대를 세우고 널빤지나 풀로 지붕을 이은 귀틀집을 가리킨다. 땅을 파지 않고 집을 짓는 경우도 있다. 이는 곧 "고대인의 움막을"과 같은 원뿔 모양의 집이다.[18] 구슬로 꿰매어 줄줄히 연결한 목걸이를 말한다.[19] 괴두(魁頭)는 과두(科頭)와 비슷한데, 머리카락을 얽어 둘러 상투를 만들었으므로 이와 같이 불렀다. 紒의 발음은 計[20] 도랑이라고는 하나 경사면에 입지하고 있고, 담수의 흔적이 발견되지 않아 흙을 채취하고 묘역을 구분하는 용도로써 사용되었을 것이라 추정된다.[21] 천안시 동남구 청당동에서 발견되었다하여 청당동형이라 명명.[22] 보령시 주교면 관창리에서 발견되었다하여 관창리형이라 명명.[23] 출처: 한국고고학회, 『한국 고고학 강의』 (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충북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COP 고고학사전 '주구토광묘' 문서 [24] "한원"에서 둘을 합쳐 막로비리국이라고 했다. 막로국이라는 이름은 43번이 이미 쓰고 있고 -비리는 -벌을 뜻하는 일반적 명칭이므로 둘을 합쳐서 본 한원 쪽을 더 신뢰하는 편.[25] 충청남도 당진시로 추정[26] 경기도 양평군 지역으로 추정[27] 충청남도 부여군으로 추정.[28] 그냥 막로국과 막로비리국 두 개가 있었는데, 하나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일대, 다른 하나는 전남 영광 또는 광양 일대로 추정된다.[29] 이외에도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또는 인천이란 설이 있다.[30] 전라북도 전주시 또는 전라남도 순천시 낙안면으로 추정.[31] 진한에도 사로국(신라의 전신)이 있었다.[32] 다른 충청남도의 마한계 소국과는 달리 4세기 전반 즈음 보다 일찍 백제에게 타멸된 소국으로 추정된다. 백제가 여간하면 현지 지배층을 온존하면서 회유하고 포섭하는 방식을 사용했지만, 교통이나 군사적으로 의미가 큰 거점이거나 목지국처럼 그 상징성이 큰 국(國)일 경우 상당히 무리한 수단을 동원해서 현지 지배층을 해체해버리고 직접 지배를 하였는데 홍성의 사로국이 바로 그런 경우였다.[33] 경기도 삭녕 일대로 추정하기도 한다.[34] 인천광역시 강화군의 교동도로 추정된다.[35] 경기도 김포시 또는 개성시 일대로 추정[36] 경기도 가평군 또는 경기도 김포시로 추정.[37] 전라남도 해남군으로 추정. 침미다례국으로 추정된다.[38] 충청남도 아산시 온양동 혹은 대전광역시 유성구 진잠동으로 추정.[39] 경기도 부천시 일원 혹은 강원도 춘천시로 추정[40] 전북 익산시 낭산면 일대로 추정[41] 전라남도 담양군 또는 전라남도 진도군 군내면으로 추정[42] 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 혹은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으로 추정.[43] 外記[44] 동국통감은 동국사략 등의 역사서를 집대성한 책이다.[45] 그러나 전라남도 광주 신창동의 마한 유적지에서 말이 끄는 수레에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바퀴통과 바퀴살, 바퀴축 등의 부속품이 대거 출토되면서 마한인들이 소와 말을 탈줄 모른다는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판명이 났다. 또한 광주 신창동의 마한 유적지에서 기원전 1세기 무렵에 만들어진 비단 조각이 발견되었다.광주 신창동은 고대사 타임캡슐[46] 오랑캐옷.[47] 천자가 하사하여 제후의 권위를 상징하는 홀(笏)을 말한다.[48] 貢蕃-朝貢蕃客, 조공을 바치고 사신이 오고 감.[49] CE 20년 ~ 23년[50] 밭과 집(田宅)[51] 196년 ~ 220년[52] 237년 ~ 239년[53] 관원이 착용하는 사슴가죽 끈[54] 무릎꿇고 엎드려 절함.[55] 지게로 추정된다.[56] 사리를 안치한 불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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