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조왕

 



'''백제 초대 국왕'''
'''始祖 溫祚王 | 시조 온조왕'''
[image]
국학원 역사 문화 공원 내에 있는 온조대왕 동상.
'''시호'''
온조왕(溫祚王)
'''성씨'''
해(解)[1] /고(高)[2] /부여(扶餘)
''''''
온조(溫祚)[3] / 은조(殷祚)[4] / 은조(恩祖)[5] / 음태귀수(陰太貴首)(?)[6]
'''왕자'''
다루(多婁)
'''부왕'''
동명성왕(東明聖王) 혹은 우태(優台)
'''모후'''
소서노(召西奴)
'''생몰년도'''
음력
? ~ 28년 2월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18년
~ 서기 28년 2월 (약 46년)
1. 개요
2. 출생
2.4.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구태와의 관계
3. 백제 건국
4. 치정
4.1. 외정
4.2. 내정
5. 가계도
6. 삼국사기 기록
7. 기타
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clearfix]

1. 개요


마한이 점점 약해지니 상하의 마음이 떠나간다. 그 세력이 오래가지 못할 것인데 만일 타인이 취하면 순망치한의 격이라 후회해도 늦는다. '''차라리 먼저 취하여 후환을 없애는 것이 낫다.'''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幷 則脣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마한을 합병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하며. 삼국사기 온조왕 본기에서 발췌

680년을 지속한 백제 왕조의 건국 군주이자 초대 혹은 2대[7] 임금이자 건길지. 고대 삼국의 시조 중 유일하게 탄생 설화나 전설이 내려 오지 않으며 왕자로서 편하게 살 수 있었던 고구려를 떠나 자신의 힘으로[8] 자신의 나라를 건설한 자수성가형 인물이다. 고구려고주몽, 신라박혁거세, 금관가야수로왕, 반파국뇌질주일 등의 건국 이야기와는 달리 신비적 요소도 전혀 전해지지 않는 점도 중요하다.[9]
아래 서술된 내용들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기록을 토대로 한 것이다. 만일 이 기록들이 모두 사실이라면 건국하자마자 중앙 집권을 이루고 삼한 중 가장 강했던 마한까지 정복한 대단한 인물이겠으나 고고학이나 삼국지 등 외국 사료와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아 학계에서는 내용을 모두 사실로 보는 학자는 드문 편이다. 다른 고대 국가들의 건국이 신화적으로 윤색되었듯[10] 백제의 건국도 비록 신화 형태는 아니지만 다른 고대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고대 백제인의 과장이 더해졌다고 보면 된다.[11] 대체로 사실이라고 인정되는 것은 마한과의 외교 관계 기사 등 소수이다.

2. 출생



2.1. 삼국사기&삼국유사


온조왕의 출생에 대해서 삼국사기의 백제 본기에서는 여러 전승을 한꺼번에 전하고 있다. 1번째는 졸본부여 왕의 차녀가 고주몽결혼하여 낳은 차남이다. 2번째는 북부여해부루의 서손인 우태졸본 사람인 연타발의 딸 소서노와 결혼하여 낳은 둘째 아들이라는 것인데 이후 우태는 먼저 죽고 소서노는 과부로 살다가 주몽과 재혼한다.
1번째 전승의 경우 온조왕은 고구려 계통에 주몽의 3남으로 위로는 이복 형인 유리와 친형 비류가 있다는 얘기이며 이에 따르면 백제 왕가는 고구려 왕가의 방계가 된다. 2번째 전승은 부여 왕가와 친연 관계가 있을 뿐 고구려 왕가와 친연 관계가 없으며 주몽은 어머니 소서노의 재혼으로 잠깐 온조의 새아버지였다가 곧 헤어진 사람이 된다.
삼국유사에서도 『고전기(古典記) 』라는 사서를 인용하는데 여기서는 주몽의 셋째라고 기록되어 있다.

『고전기(古典記)』에서는 이렇게 말하였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가 전한 홍가(鴻嘉) 3년 계묘(기원전 18)에 졸본부여에서 위례성에 이르러서는 수도를 정하고 왕이라 칭하였다. 14년 병진(기원전 5)에 한산(漢山)【지금의 광주(廣州)이다.】으로 수도를 옮겨 389년을 지냈다.

『삼국유사』 제2권 기이 제2 남부여ㆍ전백제ㆍ북부여


2.2. 제왕운기


백제 시조 온조는 어머니와 형 은조(殷祚)와 함께 남으로 달아나 나라를 세워 은조가 왕위에 올랐으나 5개월 만에 죽었다.

여기서는 온조가 은조와 온조라는 두 인물로 나눠져 있고, 온조보다 먼저 왕위에 올랐으나 너무 일찍 죽어서 온조가 시조가 되었다고 나온다.

2.3. 해동고승전


해동고승전에서는 한국의 고대 사서인 기로기(耆老記)를 인용한 대목에서 백제의 건국이 등장하는데 이 기록에는 비류와 온조가 힘을 합쳐 나라를 세운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로기(耆老記)≫에 이르기를,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은 고구려 여자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아, 이름을 피류(避流)와 은조(恩祖)라 하였다. 두 사람은 뜻을 같이하여 남쪽으로 가서 한산에 이르러 나라를 세웠다.”

해동고승전 제1권 석마라난타##


2.4.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구태와의 관계


한편 외국 기록인 위서 백제전, 북사 백제전, 주서, 수서, 책부원귀 등에서는 구태라는 사람이 백제의 시조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위의 우태와 음이 통하는 듯해서 동일 인물로 보기도 한다. 일본 기록인 속일본기에서도 모두 부여 계승 의식은 확실히 하고 있지만 고구려에서 나왔음을 표방하는 사료는 없다. 다만 북사나 속일본기에서는 백제 왕가의 조상을 동명(東明=도모)이라 하고 있는데 현대 사학자들의 연구로는 삼국시대 당대 기록에서는 연남산 묘지명의 내용처럼 고구려 주몽(동명성왕)과 부여 동명왕이 엄격하게 구분된 별개의 인물로 보이고 주몽왕이 동명왕과 동일 인물이라고 인식하는 사료는 당대 기록에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이를 동일시한다는 점에서 삼국사기의 1번째 전승을 빨라도 백제 멸망 이후 백제 정부가 아닌 타자에 의한 기록이 백제본기에 삽입된 것이라고 보기도 한다.[12] 한편 고구려가 아니라 부여와의 연관성만 나타나는 2번째 전승은 백제가 고구려와 내내 사이가 나빴던 점, 성왕남부여라고 나라 이름을 바꾸었듯 고구려 계승 의식보다는 부여 계승 의식을 내세웠던 기록들과 아귀가 맞는다.
물론 이들 전승 모두가 반드시 맞다고 확신하기도 어려운데 애초에 삼국사기를 쓴 고려시대 사람 김부식도 1천년쯤 후대 사람이고 남아있는 기록들 중 뭐가 진짜인지 짐작이 안 되니까 여러 설을 같은 책에 한꺼번에 실었던 것이다. 게다가 백제 최초의 역사 기록이라는 근초고왕 당시 고흥서기도 온조왕 이후 몇백 년 뒤다. 서기가 최초의 역사 기록이라면 그 전에는 입에서 입으로 구전이었다거나 체계적이지 않은 기록만 있었다는 얘기인데 이런 식이면 충분히 전승이 꼬였을 수도 있을 것이다.

3. 백제 건국


고구려왕자였다는 전승을 따르자면 고구려에서 지내던 온조왕은 후에 부여를 떠나 고구려로 온 이복 형인 유리태자가 되자 친형 비류와 어머니 소서노를 모시고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부아악(負兒嶽)[13]에 올라 주위를 둘러보던 중 한강 이남의 땅이 나라를 세우기 좋다는 생각을 하고 하남 위례성에 터를 잡고 십제(十濟)를 건국했다.

...마침내 오간·마려 등 10명의 신하와 함께 남쪽 지방으로 떠났다. 백성 가운데 그들을 따르는 자가 많았다. 그는 한산에 도착하여 부아악에 올라가 거주할 만한 곳을 찾았다. 비류는 바닷가에 거주하기를 원하였다. 10명의 신하가 간하여 말했다.

"이곳 하남 땅만이 북쪽으로는 한수가 흐르고, 동쪽으로는 높은 산이 있으며, 남쪽으로는 비옥한 들이 보이고, 서쪽은 큰 바다로 막혀 있습니다. 이러한 천험의 요새는 다시 얻기 어렵습니다. 이곳에 도읍을 정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비류는 듣지 않고 백성들을 나누어 미추홀로 가서 터를 잡았다. 온조는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10명의 신하로 하여금 보좌하게 하고, 국호를 십제라고 하였다. 이때가 전한 성제 홍가 3년이었다. 비류는 미추홀의 토지가 습기가 많고, 물에 소금기가 있어 편히 살 수가 없다고 하여 위례성으로 돌아왔다. 그는 이곳 도읍이 안정되고 백성들이 태평한 것을 보고는 부끄러워 하며 후회하다가 죽었다. 그의 신하와 백성들이 모두 위례로 돌아왔다. 그 후 애초에 백성들이 즐거이 따라왔다고하여 국호를 백제로 바꾸었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시조 온조왕 조

하지만 위 기록에서 보이듯 친형 비류는 온조왕과 생각이 달랐다. 바닷가인 미추홀을 선택해 그곳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하지만 바다의 짠물 덕에 뭐 하나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고 포기한 비류[14]백성들을 데리고 온조왕의 십제로 들어가 한 많은 여생을 보내다가 죽었다고 한다. 형의 백성들을 받아들이고 세력을 키운 온조왕은 나라 이름을 십제에서 백제로 바꾸었다.[15]
온조왕이 나라를 세운 위례성에 대해서도 기록의 모순이 있다. 원년의 건국 기록에서는 하남 위례성을 도읍으로 삼았다고 하지만 뒤이어 14년의 기록에는 천도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 그래서 일각에서는 온조왕이 처음에는 한강 북쪽인 하북 위례성에 도읍을 정했다가 14년에 한강 남쪽으로 옮겼다고 주장한다. 하북 위례성의 후보지로는 서울세검정 일대나 중랑천 일대, 경기도 파주시임진강 일대를 꼽는다. 하남 위례성으로의 천도 시기도 고이왕 대, 비류왕 대로 보는 등 이설이 있다.

4. 치정


온조왕의 치정은 크게 낙랑말갈, 마한에 대한 외정과 백제 내부의 정비라는 내정으로 나뉜다.

4.1. 외정


  • 낙랑 : 초기에 온조왕은 북쪽 옛 고조선 땅에 자리잡고 있던 낙랑군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면서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이내 사이가 틀어져서 죽어라 싸우게 된다. 낙랑은 직접적인 공격 외에도 후술할 말갈을 사주해서 백제를 공격하게 유도하기도 했다. 온조왕 집권 당시에는 전한이 멸망하고 신나라가 들어서는 시기였기에, 온조왕 초기에 직접 백제를 공격하거나 말갈을 사주하여 백제를 공격한 나라는 신나라 왕망의 결정[16]으로 추정된다.
  • 말갈 : 백제본기 초반부의 말갈은 우리가 아는 여진족, 만주족으로 이어지는 퉁구스계 부족이 아니라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지역의 맥 세력과 그 주변 지역에 살던 영서 예 세력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들에 대해서는 위말갈 문서 참조. 아무튼 이들은 건국 초부터 백제와 밀고 밀리며 피 튀기게 싸웠다. 한때는 낙랑의 말에 따라 움직이기도 했다. 백제 초기 역사에서 신라와 더불어 백제와 가장 많이 박터지게 싸웠다고 기록된 세력이기도 하다.[17]
  • 마한 : 온조왕은 처음엔 마한에 우호적인 제스처를 취했다. 사신도 보내고 선물도 보내는 등.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마한에 저자세를 보이기도 했는데, 삼국사기에 따르면 온조왕 24년 가을 7월에 왕이 웅천(백제와 마한의 경계)에 목책을 쌓자 마한 왕이 사신을 보내 "왕이 애초에 강을 건너와 발 붙일 곳도 없었을 때 내가 동북쪽의 땅 1백 리를 주어서 살게 해줬는데 마땅히 이에 보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성과 연못을 크게 만들고 우리 강토를 침범하니 이것을 어찌 의리라고 할 수 있는가?"라고 항의하자,[18] 온조왕은 부끄러워하며 쌓았던 목책을 허물었다고 한다. 그 전에 낙랑 태수가 백제의 목책을 트집잡았을 땐 굽히지 않았던 것과 대조된다. 하지만 26년에[19] 마한을 병합할 계획을 세우고 같은 해 겨울 10월에 사냥 가는 척하면서 마한을 기습해 꿀꺽해버렸다. 마한의 원산과 금현 두 성이 끝까지 온조왕한테 개겼지만 결국엔 1년 뒤 함락되고[20] 두 성의 백성들을 한산 북쪽으로 이주시켰다고 한다. 그후에도 마한의 옛 장수였던 주근이 우곡성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가 토벌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사실들에는 주의가 필요하다. '''현재의 정설은 서기 3세기 중후반에 백제목지국을 타도하고 마한의 주도권을 탈취하고, 4세기 근초고왕 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마한의 영역이었던 부분들을 공격하여 경기, 충청 일대에 직접적인 지배를 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전라도 일대에는 상대적 우위를 한 번 더 확인시키는 데 그쳤으며, 웅진 천도 이후 만경강 유역까지 백제 세력이 확대, 무령왕 대인 6세기 초엽에 가서야 전남의 마한 잔여 세력이 소멸하여 옛 마한 휘하에 있던 세력권들이 백제에게 완전히 복속되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에는 온조왕 대에 마한의 맹주인 목지국을 꺾어 버리고 마한 일대를 다 병합한 것으로 쓰여 있지만, 실제로는 후대인 고이왕이나 근초고왕 대에 일어난 사건을 시조를 띄워주기 온조왕 대에 갖다 붙여놓은 기사로 추정된다. 마치 일본서기에서 삼한을 정벌했다는 시대상 말도 안되는 기술의 백제 버전인 것.
백제의 초기 왕대는 워낙 신비에 쌓여 있어서 실존 여부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개중에는 '온조'라는 이름 자체가 '백제'라는 한자의 고대 한국어 버전일 뿐이고, 온조는 가상 인물이었다고 보는 학자도 있고,[21] 후대의 비류왕이 백제의 실질적 시조이며 온조 설화는 후발 주자인 비류왕 집단이 온조 집단을 계승하려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라고 보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백제 초기에 낙랑, 말갈과 싸운 건 팩트에 가깝다고 보인다. 당대 한강 유역의 지배권은 한사군인 낙랑군이 강력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었고, 마한의 영향력은 상대적으로 약했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강 유역에 터를 잡고 '마한에 귀부한' 백제라는 나라의 등장은 낙랑한테 엄청난 정치적 위협이었다. '''마한은 한국의 역사에 포함되는 한국 땅이지만, 당시 낙랑군중국이라는 점을 절대 잊으면 안 된다'''. 중국이 영향을 미치고 있는 한강 유역에 터를 잡은 백제가 마한에 귀부하면서, 백제의 존재 자체가 당시 중국[22]에는 엄청난 정치적 위협거리로 떠오른 것이다. 자칫 백제 인근의 소규모 나라들까지 마한에 귀부할 수도 있으니까. 현대 중국으로 치면 영국 식민지 기간을 통해 중국과 완전히 다른 문화를 가지게 된 홍콩같은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낙랑은 자기네들의 역량이나 예맥 세력을 사주하기도 해서 백제를 시도 때도 없이 괴롭힌다. 수백년 뒤에 분서왕처럼 낙랑에서 보낸 자객에 암살당한 사태까지 있었으니... 313년 고구려 미천왕한사군을 공격하여 없애버리면서, 낙랑군과 대방군을 통하여 육로로 중국과 교류하고 싸우던 백제는 고구려의 위협을 피해 바다를 직접 건너 중국을 오가는 외교를 하게 된다.

4.2. 내정


재위 10년 장남 다루를 태자로 삼고 군사 업무를 맡겼다. 13년 행정구역을 개편했고 재위 14년에 농사를 장려하고 백성들을 위로했다. 38년째 되던 해에는 바로 전년도까지 자연 재해가 잇달아 발생해서 농사를 말아먹은 백성들이 많았기에 나라를 돌며 백성들을 직접 돌보고, 농사와 잠업을 권장했으며 부역에 동원하는 걸 자제시켰다고 한다. 또한 41년에는 위례성을 보수했다. 재위기간 내내 많은 성과 목책을 쌓아 주변세력의 침입에 대비했다.

5. 가계도


,(조부),………………………,(조모),
해모수왕──────────유화부인
…………………
………………,(부),...........................,(모),
……………'''0.동명성왕'''──────소서노
……………………………
…………………………'''1.온조왕'''───────────(왕후),(배우자),
........................................………………
.................................………………'''2.다루왕''',(아들),

6. 삼국사기 기록


'''《삼국사기》 시조 온조왕 본기'''
一年 백제가 건국되고 온조왕이 즉위하다
一年夏五月 동명왕의 사당을 세우다
二年春一月 말갈에 대한 방어 대책 마련을 지시하다
二年春三月 을음을 우보에 임명하다
三年秋九月 말갈을 크게 격파하다
三年冬十月 겨울에 우레가 일어나고 복숭아, 오얏꽃이 피다
四年 흉년이 들고 전염병이 돌다
四年秋八月 낙랑에 사신을 보내 우호 관계 맺다
五年冬十月 사냥하여 사슴을 잡다
六年秋七月 일식이 나타나다
八年春二月 말갈을 크게 격파하다
八年秋七月 백제와 낙랑의 우호 관계가 단절되다
十年秋九月 신기한 사슴을 잡아 마한에 보내다
十年冬十月 말갈이 북쪽 국경을 침입하다
十一年夏四月 말갈이 낙랑의 부탁을 받고 병산책을 공격하다
十一年秋七月 목책을 설치하여 낙랑으로 가는 통로를 차단하다
十三年春二月 호랑이가 성 안으로 들어오다
十三年 왕의 모후가 죽다
十三年夏五月 하남 위례성으로 천도를 계획하다
十三年秋七月 하남 위례성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다
十三年秋八月 마한에 사신을 보내 도읍 옮긴 사실을 알리다
十三年秋九月 성과 대궐을 쌓다
十四年春一月 도읍을 옮기다
十四年春二月 백성을 위로하고 농사를 장려하다
十四年秋七月 한강 서북방에 성을 쌓고 주민을 이주시키다
十五年春一月 궁궐을 새로 쌓다
十七年 낙랑이 침입하여 위례성을 불태우다
十七年夏四月 사당을 세우고 국모를 제사지내다
十八年冬十月 말갈을 격파하고 추장을 생포하여 마한에 보내다
十八年冬十一月 낙랑을 공격하기 위해 구곡까지 행차하다
二十年春二月 천지신명에게 제사지내다
二十二年秋八月 석두와 고목 2성을 쌓다
二十二年秋九月 말갈을 격파하다
二十四年秋七月 웅천책을 세우자 마한이 항의하다
二十五年春二月 한성의 민가에서 를 낳다
二十六年秋七月 마한 병합을 계획하다
二十六年冬十月 마한을 기습하여 합병하다
二十七年夏四月 마한을 멸망시키다
二十七年秋七月 대두 산성을 쌓다
二十八年春二月 다루를 태자에 임명하고 군사에 관한 일을 맡기다
二十八年夏四月 서리가 내리다
三十一年春一月 민가를 남부와 북부로 편성하다
三十一年夏四月 우박이 내리다
三十一年夏五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一年夏六月 지진이 일어나다
三十三年 큰 가뭄이 들고 백성들이 굶주려 도둑이 생기다
三十三年秋八月 동부와 서부를 설치하다
三十四年冬十月 마한 잔당의 반란을 진압하다
三十六年秋七月 탕정성을 축조하고 주민을 이주시키다
三十六年秋八月 원산과 금현의 두 성을 수리하고 고사부리성을 쌓다
三十七年春三月 달걀만한 우박이 내리다
三十七年夏四月 흉년이 들어 고구려로 도망간 사람이 많이 나타나다
三十八年春二月 지방을 순방하다
三十八年春三月 농업잠업을 권장하고 백성의 부역을 줄이다
三十八年冬十月 천지신명에 제사지내다
四十年秋九月 말갈이 술천성을 공격하다
四十年冬十一月 말갈이 부현성을 습격하다
四十一年春一月 북부의 해루를 우보로 임명하다
四十一年春二月 위례성을 수리하다
四十三年秋八月 아산벌에서 사냥하다
四十三年秋九月 기러기가 왕궁에 모여 들다
四十三年冬十月 남옥저 구파해 일행이 귀순하다
四十五年 큰 가뭄이 들어 초목이 마르다
四十五年冬十月 지진이 일어나서 백성의 가옥이 손상되다
四十六年春二月 온조왕이 죽다
'''무려 65줄. 백제의 모든 왕들 중 기록이 제일 많다.''' 백제 초기 왕들 중에서도 건국자임에도 불구하고, 기록이 상당히 많은 편이라 후세에 덧붙여졌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후대 왕들의 기록이 상당히 빈약한데 비해, 가장 오래된 건국 왕의 기록이 상당히 많고 아주 세밀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신빙성이 떨어지는 감이 있지 않아 없다.
비정상적으로 큰 강역을 이유로, 온조왕의 기록이 훗날 백제의 전성시대를 여는 근초고왕의 기록과 섞였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근초고왕 참조. 대체로 백제 기록이 고구려, 신라보다 부실한 편인데 유독 온조왕만큼은 비슷한 시대의 고구려, 신라 왕들과 비교해 봐도 아주 세세하고 사소한 내용이 많다.
덤으로 삼국사기에 기록된 왕 중에서 고구려 왕은 보장왕의 기록이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신라문무왕이다. 보장왕과 문무왕은 책이 각각 2권씩이나 되는 유이한 왕들이며 삼국사기엔 문무왕, 보장왕 순으로 기록이 많은 TOP 1, 2위.

7. 기타


  • 백제의 건국자로 구태라는 인물이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데, 이 사람과 온조왕의 관계에 대해 많은 궁금증이 남아 있다. 일설에는 "비류가 구태나 구태 아들 아니냐"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한다.
  • ‘온’은 고유어로 숫자 ‘백(100)’을 뜻하므로, 온조라는 이름 자체가 백제를 의미하고, 따라서 백제의 시조로 상상된 가공의 인물 아니겠느냐는 말도 있다. 백제를 포함한 삼국의 초기 왕계에 대한 불신론, 비류 혹은 구태 시조설, 백제 왕가 교체설, 왕가 계보 조작설, 마한 복속이 이때냐 고이왕이냐 근초고왕이냐 등 초기 백제 역사에 관한 설왕설래에서 써먹기 좋은 떡밥. 이 말이 사실이라면 온조왕 대의 풍부한 기사들은 후대 기사의 삽입이 되니까.
  • 조선시대에는 남한산성에 온조왕을 모신 숭렬전이 건립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도시로서 서울/강남의 역사에서도 중요한 인물이다. 서울이 본격적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게 온조왕 시대이기 때문이다. 한국 역사에 기록된 최초의 강남 신도시 개발사업이 바로 온조왕의 하남 위례성이다. 서울역사박물관에서도 온조왕의 백제 건국에 대해 꽤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 물론 현재의 강남수도권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생긴 결과물이기 때문에 개로왕 이후 거의 잊혀진 위례성과의 연속성은 떨어진다. 하지만 그럼에도 땅이 좋은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당장 강북은 명동 일대를 제외하면 강남3구보다 땅값이 낮다. 백제의 강남 개발 역시 과거 역사 상 중심지가 현재의 중심지가 된 사례이기도 하고, 또한 수도로서 서울의 정통성에 조선 왕조 말고도 또 하나의 큰 가점을 주는 요소이다. 그래서 서울시 향토 역사에서 한성백제시대를 매우 강조하고 서울시 홈페이지에서도 백제의 500년, 조선의 500년 도합 1,000년 수도였다는 역사성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1994년만 해도 서울 정도 600년 행사를 했을 정도로 조선 수도로서의 역사성만을 강조했는데, 이후 풍납토성을 비롯한 한성백제기 유물, 유적의 활발한 발굴 성과로 위례성이 현재의 서울로 거의 확정되면서 현재는 백제 수도로서의 서울 역사 또한 향토사에서 강조되고 있다.

8.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사극에서 2번 등장했다. 한 번은 주몽[23]에서, 다른 한 번은 근초고왕에서. 물론 둘 다 병풍이나 엑스트라 수준을 면하지는 못했다. 어차피 주인공도 아니었으니…
  • 온조왕의 백제 건국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인 미스터 온조와 온조도 있다. 이 두 뮤지컬은 서로 완전히 다른 뮤지컬이다.

[1] 삼국유사에서 온조왕을 소개하며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기사를 그대로 가지고 왔는데 이중 성씨를 부여로 삼았다는 것을 해씨로 삼았다고 바꿔놓았다. 삼국사기와는 다른 기록을 참고한 것인지 알수는 없다. 또한 동사강목에서는 본래의 성씨는 해씨였으나, 백제를 건국한 후 자신이 부여의 핏줄임에 의미를 두어 부여씨로 바꾸었다고 기록했다. 또다른 예상으로는 성와 씨가 엄밀히 구분되던 고대 중국의 성씨 문화를 받아들여서 성이 해고 씨가 부여일 경우도 있다. 일본측 기록에 보면 온조의 후손인 위덕왕이 고구려장수와 일기토를 벌였을때 고구려 왕과 성이 같다고 자기소개를 하며 싸움을 걸었다.[2] 고구려 시조설 추모를 따를 경우다. 동명왕에게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지만 이게 부여인지, 고구려인지 논란이 많다.[3] 삼국사기.[4] 제왕운기.[5] 해동고승전.[6] 신찬성씨록에 나오는 백제 측 인물인데 동명성왕의 아들이라고 한다.[7] 동명왕 혹은 동명성왕을 태조로 보던 당시 기준, 혹은 온조 앞에 형 은조가 먼저 왕에 올랐지만 5개월 후 죽어버려 온조가 이어받았다는 제왕운기의 기록을 따를 경우. 아래 출생 단락 참조.[8] 백제 건국 당시 온조 본인이 앞장서서 주도한 것은 맞으나 한 나라를 건국하는 것이 혼자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고구려의 지배 세력과 함께 힘을 합쳤다는 것이 현재로써는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실제로 고구려의 초기 무덤 양식과 백제의 초기 무덤 양식이 서로 흡사하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9] 백제의 건국 설화는 고조선의 건국 설화와 더불어 난생설화가 아니다.[10] 주몽이나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났다거나, 신의 혈통이라거나, 부여를 탈출할 때 거북이들이 징검다리가 되어 주었다는 기록은 신화지 말 그대로의 사실을 기록한 거라고 믿는 현대인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건국 기록이 좀 과장됐다고 해서 고구려나 신라란 나라의 실존 자체가 허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초기기록 완전부정 or 초기기록 완전신뢰 같은 모 아니면 도 식의 태도는 양쪽 다 문제가 있다.[11] 원래 삼국사기 초기 기사는 연대가 정확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부분이 많아 학자마다 기준은 조금씩 다르지만 대체로 인정받지 못한다. 이는 백제뿐 만 아니라 고구려와 신라도 마찬가지로 백제고이왕, 고구려태조왕, 신라내물왕 때의 기사부터 다른 기록이나 고고학과 교차검증이 가능해 비로소 100% 인정받는 상황이다. 다만 고이왕 앞은 전부 거짓이라 쓸모없다라고 보는 시각은 아니고 부분적으로는 사실이거나 사실이 오랜 세월 변형되었다고 보고 최대한 초기 기사도 활용해내려는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12] 강종훈,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사료 계통과 그 성격」에서는 이 전승이 통일신라 시기 김대문한산기 계통의 자료가 아닌가 짐작하기도 했다.[13] 부아악(負兒嶽)은 현재의 북한산 인수봉에 해당한다. 하지만 현재 북한산 인수봉은 전문 산악인도 올라가기 힘들어하는 고난도 코스에 해당해서 정말 인수봉에 올랐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다만 현대 한국에 전해지는 지명 중에 負兒嶽이라는 이름이 있는 곳은 북한산 인수봉이 맞기는 하다. 지형은 조금씩 바뀌는데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속담이 있는지라 무려 2천년 전에도 지형이 지금과 같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역사 시대와 현재 지형이 바뀐 것이 명확히 드러나는 예시가 원래 바다에 접해 있다가 내륙으로 들어간 감은사김해시 가야 유적들이 있다. 2010년대 들어서 지질학 연구가 진척되면서 북한산 인수봉 일대에 지진이 여러차례 있었다는 지질학적 증거가 발견되었다. 때문에 온조왕이 인수봉을 올라가던 2천년 전에는 지진이 별로 없어서 인수봉이 완만했다는 가설이 신빙성있게 제기되고 있다.[14] 일부 학자들은 이를 "온조로 대표되는 농업 세력과 비류로 대표되는 해양 세력이 갈등을 일으켰고 끝내 해양 세력이 농업 세력에 흡수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으로 판단하기도 한다. 사실 땅이 습기가 많고 물이 짜다는 등의 내용은 농사에 부적합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 뿐이다. 어디까지나 농업 세력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런 곳에 정착했으니 망할 수 밖에'였을뿐. 실제로 이보다 더 안습한 지역에 정착하여 크게 성공한 경우로 베네치아 공화국을 들 수 있다.[15] 십제가 미추홀의 비류 세력을 병합한 것은 온조왕 당대의 일로 보기도 하고 더 후대인 초고왕 대에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16] 왕망은 신나라 건국 이전부터 전한의 정계를 좌지우지하는 실권자였다. 전한의 애제 때부터 한나라는 왕망 1인 독재 체제였고 왕망은 한나라 황제들을 죽여대다가 결국 정안공 유영한테서 선양 쇼를 하여 신나라를 세운다. [17] 단 신라의 경우 현재는 신라라기 보다는 진한계 국가로 보기도 한다. 실제로 초기 신라의 영토는 백제와 국경을 맞닿을만큼 거대하지도 않았다.[18] 이 기록을 토대로 해서, 북쪽에서 내려온 온조왕이 한강 유역에 자리잡은 것도 빈 땅에 정착한 게 아니라 마한왕의 협조가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마치 위만고조선에 왔을 때 방패로 삼기 위해 받아주었던 것과 비슷하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서 백제가 마한의 여러 구성국 중 하나로 나오는 기록과도 합치한다.[19] 처음 마한 왕의 질책에 부끄러워하며 목책을 헐었다고 한 기록으로부터 2년이 지난 시점이다.[20] 참고로 두 성에 대해서는 나중에 더 나오는데 무령왕 때 고구려가 가불성과 원산성을 함락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며 성왕때 고구려가 금현성을 함락시켰다고 나온다[21] '온'이 100이고, '조'가 '제'와 통한다는 것. 다만 음운만으로 추정하는 것이 으레 그렇듯이, 다른 근거가 없는 상황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서는 곤란하다.[22] 온조의 백제 건국 당시 전한이 멸망하고 신나라가 세워지는 시기였다. 다루왕이 집권할 때 신나라가 멸망하고 경시제 현한 - 광무제 후한으로 이어진다.[23] 아역 배우 김석이 역할을 맡았다. 김석은 이전에 SBS의 서동요에서 무왕의 아역으로 나온 적도 있으니 어린 나이에 2번이나 백제 왕을 해본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