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시밀리안 폰 바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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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 제국의 정치인이자 왕족으로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직전에 의회다수파에 입각한 거국내각에 수상으로 취임, 연합국에 휴전과 강화를 제의함과 동시에 의회주의화를 실시하였다. 베를린에서 본격적인 혁명이 터지자 카이저의 퇴위를 선언한 인물로, '''사실상 독일 제국의 마지막 수상이다.'''
통칭 막스 폰 바덴(Max von Baden)으로 언급되는 인물이다.
2. 생애
2.1. 전반기
1867년에 바덴 대공국의 바덴바덴에서 바덴의 빌헬름 공[2] 의 아들로 태어났다.[3]
라이프치히 대학에서 법학과 관방학을 전공했으며, 대학을 졸업한 후에 그는 프로이센 왕국군 장교로 근무하다가, 1907년에 그의 삼촌이었던 바덴의 대공 프레데리크 1세가 죽자, 추정계승자 자리에 앉게 된다. 그리고 이 시기에 그는 바덴 대공국 의회의 상원의장을 맡게 되었는데, 이 때 그의 자유주의적 사상관이 탄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1911년에 소장으로 승진하고, 1914년 바덴 공국군 14군단의 작전참모를 맡게 되는데, 건강 문제와 그의 성향 문제로 인해 작전참모직을 사임하게 된다. 그리고 동년 10월에 독일 적십자사를 통해서, 포로의 처우개선에 진력을 다했고, 이 덕에 그는 민족주의의 마수에서 벗어난 뛰어난 지성으로서의 명성을 얻게 되는데, 이는 힌덴부르크 참모총장이 이끄는 육군최고사령부[4] 와 갈등을 빚게 된다.
그래도 명색이 바덴의 왕족인지라 자리를 주지 않기는 좀 그랬는지, 1917년부터 외무성의 군사 부문에서 자리를 맡아 일을 보았고, 이때 사민당 소속 제국의원이었던 에두아르트 다비트(Eduard David) 등 의회 세력과 교감하게 된다.
2.2. 수상 재임기
1918년 9월 29일에 협상국의 백일 전투로 인해 독일군이 전면적으로 붕괴하자,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어진 게오르크 폰 헤르틀링 내각은 총사퇴를 하게 되고, OHL의 루덴도르프와 힌덴부르크는 당장 강화 교섭을 시작해도 좋다는 카이저의 동의를 얻어냈다. 그에 따라 반 군부 세력이 장악한 제국의회는 헤르틀링의 후임으로 명망이 높던 막스 폰 바덴 공을 추천하게 되고, 그 추천은 받아들여져 결국 그는 거국내각의 수상에 취임하게 된다.
하지만 출생이 출생이기도 하고, 루덴도르프를 필두로 한 '''군부의 초 강경한 압박'''에 그는 전쟁이 계속되는 한 헌법 개정은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 대신 그는 협상국과의 종전 협정에 관심을 두었는데, 바로 이 때 당시 육군참모차장인 빌헬름 그뢰너가 카이저에게 퇴진 압박을 넣었고, 우드로 윌슨의 14개 조항에 바탕을 둔 휴전협정과 강화 교섭을 요청하는 각서를 윌슨 대통령에게 보냈다. 그리고 윌슨 행정부는 10월 8일에 회답을 보내는데, 독일이 우선 윌슨의 원칙을 실행하는 협상을 수락할 것과 협상국의 영토에서 독일군을 철수시키는 것에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10월 20일에 폰 바덴 내각은 다시 각서를 보내어, 윌슨이 독일의 자존심을 결코 모욕하지 않으리라 믿고 휴전협정과 군대 철수의 조건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에 동의했다.
윌슨은 협상국에 기꺼이 휴전협정을 제의하겠다고 밝혔지만, 그 조건은 독일이 다시는 전쟁 행위를 되풀이하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협상국은 2가지 조건을 붙여 휴전협정에 동의했다. 그 2가지 조건이란, 협상국은 윌슨의 14개 조항 가운데 2번째 조항(공해에서의 자유 항해권)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며, 민간인과 그들의 재산에 대한 손해 배상을 원한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기타 협상국(영국·프랑스 등)이 민주화된 독일이 아니면 절대로 협상을 진행시킬 수가 없다는 의견까지 타진했다.
물론 군부는 절대적으로 반대하고, 막스 폰 바덴 공도 이 조건에 탐탁찮은 반응을 보였는데, 이때 베를린에서 혁명이 터지고, 그에 호응하여 필리프 샤이데만 등의 의회 세력이, 바이마르에서 공화국을 선포함에 따라, 결국 버틸 힘이 없어진 폰 바덴 내각은 결국 카이저 빌헬름 2세의 황제 칭호와 프로이센 국왕의 칭호를 박탈했다.
그리고 그는 퇴진하여, 수상 자리를 사민당의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에게 넘겨주게 된다.[5]
2.3. 여생
수상 퇴임 뒤에는 정계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로 계속 교육 및 복지 개선에만 힘썼다. 1928년 바덴의 마지막 대공 프리드리히 2세가 자녀 없이 사망하자 바덴 대공가의 당주 자리를 이어받았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9년 바덴의 잘렘이란 도시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1남 1녀를 두었는데 딸 마리 알렉산드라는 1944년 연합군의 폭격으로 사망한다. 아들 베르톨트는 필립 마운트배튼의 매형(둘째 누나 테오도라 공주(1906~1969)의 남편)이며, 바덴 대공가는 그의 후손에 의해 이어지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