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리히 루덴도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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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리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루덴도르프
Erich Friedrich Wilhelm Ludendorff
1865년 4월 9일 ~ 1937년 12월 20일
독일 제국의 군인. 제1차 세계대전 중-후반부 독일 제국군의 실질적인 총지휘관이었다.
프로이센 왕국 포젠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인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거상은 아니었기 때문에 집안이 엄청나게 유복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기병대 대장이었고 어머니는 몰락 귀족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굉장히 머리가 좋았고 돋보이는 군사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장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유년 사관학교에서 2년 월반을 했고 항상 반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육군 장군으로서 대활약했다. 특히, 리에주 요새 공방전과 타넨베르크 전투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승리이자 영예였다.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승전을 거둔 이후 그는 독일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히덴부르크와 더불어, 동화 속 게오르크 형제급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이 전공을 바탕으로 독일 제국 군부의 실세로 군림했다. 타넨베르크에서 그와 함께 활약한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더불어 독일 제국 육군의 쌍두마차였다고 할만하다. 1916년에 상관 힌덴부르크가 육군 참모총장이 되자 루덴도르프는 참모차장겸 군수총감에 등극했다. 그러나 힌덴부르크는 이미 고령에 노쇠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세는 루덴도르프가 훨씬 강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군사에 무능한 카이저 빌헬름 2세와 상관 힌덴부르크가 고령이라 실무에 다소 뒤떨어졌기 때문에 공동결정권을 행사하여 이들을 제치고 사실상 독일군의 총지휘자가 되었다. 군수총감이었기 때문에 군수물자 생산을 명분으로 독일 경제를 통제하면서 기업과 국민생활 전반까지 관여하였다. 이 시기에는 사실상 독일제국의 독재자로써 전권을 휘둘렀다.
루덴도르프가 유능한 것과 별도로 독일군은 참모장교는 능력에 따라 진급하기는 하지만 군부 지휘관은 죄다 왕족을 썼기 때문에 상인 출신의 기병대장 아들인 루덴도르프가 왕족들에게 작전명령을 들으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어디까지나 군령은 최고사령관 카이저 빌헬름 명의로 나가고 육군참모총장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최고사령관의 권한에 의거하여 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 초 군 지휘관만 보더라도 군은 빌헬름 황제의 장자 빌헬름 황태자. 뷔르템베르크 왕국 국왕 빌헬름 2세. 바이에른 왕국 왕세자 루프레히트[1] , 빌헬름 2세의 사돈어른, 해군은 빌헬름 2세의 동생인 하인리히 황자[2] ...이런 식이었다.
독일군의 실질적 총지휘관이 된 이후에 1918년 4차례 대공세로 독일을 승리로 이끌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 때의 상황을 보면 독일은 군수품 생산은 최고조에 달했지만 경제력은 거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라서 오래 지탱하기 어려웠고, 한계 상황인 것은 영국과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지만 미국이 참전한 이상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물량이 전선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 분명했다. 즉 이 시기에는 몇 달 후면 독일이 필연적으로 패배하게 되기 때문에 그 전에 어떻게든 승리를 얻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공세를 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든 물자와 인력을 쥐어짠 1918년의 루덴도르프 공세가 실패하면서 독일 제국은 한계에 봉착하였고, 곧바로 연합군의 백일 전투에 전선이 무너지면서 패전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카이저 빌헬름 2세와 군부 인사 500여명의 전범 체포가 조약에서 거론되자 책임을 회피할 목적으로 스웨덴으로 망명하는데 여기서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배후중상설을 언급했고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 막스 베버와 인터뷰를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혼란이 찾아오고, 아돌프 히틀러의 세력이 커지자 다시 독일로 돌아와 나치당에 가입했으며,[3] 뮌헨 폭동 때에도 얼굴마담으로 참여 했다. 이때 히틀러 등과 같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시종일관 묵비권을 행사했고 히틀러는 이와 대비되게 장광설을 터뜨리며 일약 정치적 스타가 되었다. 루덴도르프는 체포 자체를 모욕적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후 젊은 여성과 재혼을 했는데 아내가 예수회, 프리메이슨, 국제 유대인 삼각 음모론을 철썩같이 믿는 약간 맛이 간 여자였다.
1925년 히틀러의 제안을 뜬금없이 받아들여 한 때 환상의 콤비였던 힌덴부르크와 대선 경쟁을 하기도 했다. 이때는 이미 히틀러와 사이가 거의 틀어지던 시기라 루덴도르프의 행적은 매우 의문이다. 히틀러는 어차피 미미한 지지율을 기록할것을 예상했고 루덴도르프를 감언이설로 추천했는데 루덴도르프는 그 제안을 승산이 있다고 받아들인 것... 이후 히틀러와 서로 욕하면서 갈라섰고 나치당도 탈퇴했다. 이때 한가하게 지내다가 장제스로부터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단장이 되어줄 것을 요청받으나 거절하고 대신 여러나라에서 군사고문을 지낸 바 있는 막스 바우어 대령을 추천해주었다. 막스 바우어는 단장직을 수락하여 1929년까지 재임하다가 1차 장계전쟁 중 병으로 사망했다.
1937년 12월 20일 간암으로 사망한다.
지휘관으로서는 유능했지만, 도덕성에 대해서는 크게 비판받는 인물이다. 능력은 100%인데 인성이 -120%라 욕먹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뛰어난 군인임과 동시에 독일 제국의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징고이스트(Jingoist)[4] 였다. 그의 지나치게 호전적이고 군국주의적 통치는 독일 제국의 패망에 일조했다. 그래서 종합적인 평가는 절대 좋지 못하다.
지휘관으로서는 독일 제국은 물론이고 당대 세계 최고라고 할만하다. 전설적인 탄넨베르크 회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로도 동부, 서부, 이탈리아에 이르는 3면 전선에서 밀리지 않고 싸운 실적이 이를 증명한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도 "어떤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군인으로서 유능함은 틀림없다"고 평가했다.[5] 다른 전문가들도 지휘관으로서 유능한 것은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비판할 점이 매우 많다. 그는 군부를 휘어잡아 황권을 무력화시키고 독일 제국을 군사독재 국가로 재편했다. 이는 황제와 정부에 충성해야 한다는 군인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독일의 패전이 확정된 상황에서 본인의 욕심 때문에 무리하게 전쟁을 지속시킨 것이었다. 그는 전후의 처신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을 받는다. 패전에 대한 본인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배후중상설을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의 정치 혼란과 극우화, 나치의 집권에 기여했다.
그런데 정작 그는 히틀러에게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훗날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자, "난 대통령께서 그런 악마를 총리로 임명한 것에 대해 크게 후회할 거라 믿소. 저 놈은 독일을 세상에 유례없는 파멸로 이끌 놈이오!" 라고 말했다.
현대 독일에서의 평가도 좋지 않다. 과거사 문제로 인해 현재의 독일인들은 군국주의나 제국주의, 전쟁에 관련있는 것은 싫어하기 때문이다. 전쟁광이자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화신인 루덴도르프가 비판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총력전 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이다. 1935년에 저술한 《총력전론(Der Totale Krieg)》이란 저서의 제목에서 총력전 이라는 단어를 처음 썼다.
원더우먼(영화)에서 메인 빌런으로 나온다. 히틀러 정도의 네임드 인물이 아니라면 실존 인물을 빌런으로 내세우는 것을 자제하는[6] 히어로 장르에서는 특이한 설정. 다만 실제 루덴도르프와는 생김새가 전혀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에리히 루덴도르프(DC 확장 유니버스) 참조.
에리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루덴도르프
Erich Friedrich Wilhelm Ludendorff
1865년 4월 9일 ~ 1937년 12월 20일
1. 개요
독일 제국의 군인. 제1차 세계대전 중-후반부 독일 제국군의 실질적인 총지휘관이었다.
2. 생애
프로이센 왕국 포젠에서 태어났다. 그는 상인 가문 출신이었다. 그러나 거상은 아니었기 때문에 집안이 엄청나게 유복한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는 기병대 대장이었고 어머니는 몰락 귀족이었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굉장히 머리가 좋았고 돋보이는 군사적 재능을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일찍이 장교의 길을 걸었다. 그는 유년 사관학교에서 2년 월반을 했고 항상 반에서 1등을 차지했다.
그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육군 장군으로서 대활약했다. 특히, 리에주 요새 공방전과 타넨베르크 전투는 그의 생애에서 가장 큰 승리이자 영예였다. 타넨베르크 전투에서 승전을 거둔 이후 그는 독일의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그는 히덴부르크와 더불어, 동화 속 게오르크 형제급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그는 이 전공을 바탕으로 독일 제국 군부의 실세로 군림했다. 타넨베르크에서 그와 함께 활약한 파울 폰 힌덴부르크와 더불어 독일 제국 육군의 쌍두마차였다고 할만하다. 1916년에 상관 힌덴부르크가 육군 참모총장이 되자 루덴도르프는 참모차장겸 군수총감에 등극했다. 그러나 힌덴부르크는 이미 고령에 노쇠해가고 있었기 때문에 실질적인 권세는 루덴도르프가 훨씬 강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군사에 무능한 카이저 빌헬름 2세와 상관 힌덴부르크가 고령이라 실무에 다소 뒤떨어졌기 때문에 공동결정권을 행사하여 이들을 제치고 사실상 독일군의 총지휘자가 되었다. 군수총감이었기 때문에 군수물자 생산을 명분으로 독일 경제를 통제하면서 기업과 국민생활 전반까지 관여하였다. 이 시기에는 사실상 독일제국의 독재자로써 전권을 휘둘렀다.
루덴도르프가 유능한 것과 별도로 독일군은 참모장교는 능력에 따라 진급하기는 하지만 군부 지휘관은 죄다 왕족을 썼기 때문에 상인 출신의 기병대장 아들인 루덴도르프가 왕족들에게 작전명령을 들으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어디까지나 군령은 최고사령관 카이저 빌헬름 명의로 나가고 육군참모총장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최고사령관의 권한에 의거하여 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전쟁 초 군 지휘관만 보더라도 군은 빌헬름 황제의 장자 빌헬름 황태자. 뷔르템베르크 왕국 국왕 빌헬름 2세. 바이에른 왕국 왕세자 루프레히트[1] , 빌헬름 2세의 사돈어른, 해군은 빌헬름 2세의 동생인 하인리히 황자[2] ...이런 식이었다.
독일군의 실질적 총지휘관이 된 이후에 1918년 4차례 대공세로 독일을 승리로 이끌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 때의 상황을 보면 독일은 군수품 생산은 최고조에 달했지만 경제력은 거의 한계에 다다른 상태라서 오래 지탱하기 어려웠고, 한계 상황인 것은 영국과 프랑스도 마찬가지였지만 미국이 참전한 이상 시간이 지나면 엄청난 물량이 전선으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할 것이 분명했다. 즉 이 시기에는 몇 달 후면 독일이 필연적으로 패배하게 되기 때문에 그 전에 어떻게든 승리를 얻기 위해 무리를 해서라도 공세를 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든 물자와 인력을 쥐어짠 1918년의 루덴도르프 공세가 실패하면서 독일 제국은 한계에 봉착하였고, 곧바로 연합군의 백일 전투에 전선이 무너지면서 패전하였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카이저 빌헬름 2세와 군부 인사 500여명의 전범 체포가 조약에서 거론되자 책임을 회피할 목적으로 스웨덴으로 망명하는데 여기서 미국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배후중상설을 언급했고 다시 독일로 돌아와서 막스 베버와 인터뷰를 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혼란이 찾아오고, 아돌프 히틀러의 세력이 커지자 다시 독일로 돌아와 나치당에 가입했으며,[3] 뮌헨 폭동 때에도 얼굴마담으로 참여 했다. 이때 히틀러 등과 같이 체포되어 재판을 받았는데 시종일관 묵비권을 행사했고 히틀러는 이와 대비되게 장광설을 터뜨리며 일약 정치적 스타가 되었다. 루덴도르프는 체포 자체를 모욕적으로 여겼다고 한다. 그후 젊은 여성과 재혼을 했는데 아내가 예수회, 프리메이슨, 국제 유대인 삼각 음모론을 철썩같이 믿는 약간 맛이 간 여자였다.
1925년 히틀러의 제안을 뜬금없이 받아들여 한 때 환상의 콤비였던 힌덴부르크와 대선 경쟁을 하기도 했다. 이때는 이미 히틀러와 사이가 거의 틀어지던 시기라 루덴도르프의 행적은 매우 의문이다. 히틀러는 어차피 미미한 지지율을 기록할것을 예상했고 루덴도르프를 감언이설로 추천했는데 루덴도르프는 그 제안을 승산이 있다고 받아들인 것... 이후 히틀러와 서로 욕하면서 갈라섰고 나치당도 탈퇴했다. 이때 한가하게 지내다가 장제스로부터 주중 독일 군사고문단 단장이 되어줄 것을 요청받으나 거절하고 대신 여러나라에서 군사고문을 지낸 바 있는 막스 바우어 대령을 추천해주었다. 막스 바우어는 단장직을 수락하여 1929년까지 재임하다가 1차 장계전쟁 중 병으로 사망했다.
1937년 12월 20일 간암으로 사망한다.
3. 평가
지휘관으로서는 유능했지만, 도덕성에 대해서는 크게 비판받는 인물이다. 능력은 100%인데 인성이 -120%라 욕먹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뛰어난 군인임과 동시에 독일 제국의 군국주의를 대표하는 징고이스트(Jingoist)[4] 였다. 그의 지나치게 호전적이고 군국주의적 통치는 독일 제국의 패망에 일조했다. 그래서 종합적인 평가는 절대 좋지 못하다.
지휘관으로서는 독일 제국은 물론이고 당대 세계 최고라고 할만하다. 전설적인 탄넨베르크 회전을 승리로 이끌었고, 이후로도 동부, 서부, 이탈리아에 이르는 3면 전선에서 밀리지 않고 싸운 실적이 이를 증명한다. 버나드 로 몽고메리도 "어떤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군인으로서 유능함은 틀림없다"고 평가했다.[5] 다른 전문가들도 지휘관으로서 유능한 것은 부정하지 못한다.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비판할 점이 매우 많다. 그는 군부를 휘어잡아 황권을 무력화시키고 독일 제국을 군사독재 국가로 재편했다. 이는 황제와 정부에 충성해야 한다는 군인의 의무를 저버린 것이었다. 그리고 이는, 독일의 패전이 확정된 상황에서 본인의 욕심 때문에 무리하게 전쟁을 지속시킨 것이었다. 그는 전후의 처신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을 받는다. 패전에 대한 본인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배후중상설을 꺼내들었기 때문이다. 이는 독일의 정치 혼란과 극우화, 나치의 집권에 기여했다.
그런데 정작 그는 히틀러에게는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훗날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히틀러를 총리로 임명하자, "난 대통령께서 그런 악마를 총리로 임명한 것에 대해 크게 후회할 거라 믿소. 저 놈은 독일을 세상에 유례없는 파멸로 이끌 놈이오!" 라고 말했다.
현대 독일에서의 평가도 좋지 않다. 과거사 문제로 인해 현재의 독일인들은 군국주의나 제국주의, 전쟁에 관련있는 것은 싫어하기 때문이다. 전쟁광이자 프로이센 군국주의의 화신인 루덴도르프가 비판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4. 기타
총력전 이라는 말을 처음으로 쓴 사람이다. 1935년에 저술한 《총력전론(Der Totale Krieg)》이란 저서의 제목에서 총력전 이라는 단어를 처음 썼다.
원더우먼(영화)에서 메인 빌런으로 나온다. 히틀러 정도의 네임드 인물이 아니라면 실존 인물을 빌런으로 내세우는 것을 자제하는[6] 히어로 장르에서는 특이한 설정. 다만 실제 루덴도르프와는 생김새가 전혀 다르다. 자세한 내용은 에리히 루덴도르프(DC 확장 유니버스) 참조.
[1] 1869~1955. 6군 사령관 역임. 1916년 원수 진급. 왕족 출신 군지휘관이나 군사적 능력은 뛰어났다. 히틀러 집권 시기 나치에 반대하여 1939년 이탈리아 왕국으로 추방되고 가족들은 헝가리 왕국으로 도주하였다. 그러나 1944년 헝가리의 추축국 탈퇴를 막고자 침공한 독일군에 의해 가족들은 체포되어 1945년 4월 다하우 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같은 달 미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이 수용기간 중 건강이 악화된 안토니아 왕세자비는 얼마 뒤 사망했다.[2] 1868~1929. 독일 동방함대 사령관 역임. 최종 계급 해군원수. 동방함대 사령관 당시 대한제국을 방문하였다. 이 때 군악대도 함께 방문했는데 군악대의 모습을 보고 감명 받은 고종황제는 프로이센식으로 군악대를 창설했다. 군악대를 보고 감명받은 고종과 반대로 하인리히 황자는 대한제국군의 궁술 시범을 보고 감명 받았고 한 대 쏴보기도 했다고.[3] 이 시기에 괴벨스는 자신의 웅변에 루덴도르프가 맞장구를 쳐주자 기뻐하며 이를 일기에 적기도 했다.[4] 무책임한 대외강경파나 주전파를 경멸조로 칭하는 말.[5] 몽고메리가 주는 평가치고 매우 높은 것이다. 그는 타국 장수들을 저평가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16세기 말 ~ 17세기 초 최고의 군인으로 꼽힌 사부아 공자 외젠더러 자신이 존 처칠보다 못한 것을 알았던 인물이라고 칭찬했다(...).[6] 빌런들은 보통 히어로에게 처단되기 마련인데, 그러면 히어로 장르가 아니라 대체역사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