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드리히 에베르트

 



'''독일 제국 9대 수상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Friedrich Ebert'''
'''이름'''
'''Friedrich Ebert'''
프리드리히 에베르트[1]
'''출생'''
1871년 2월 4일 /
독일 제국 바덴 대공국 하이델베르크
'''사망'''
1925년 2월 28일 (만 54세 24일) /
바이마르 공화국 베를린
'''약력'''
바이마르 공화국 초대 대통령
1919년 2월 11일 ~ 1925년 2월 28일
(만 6년 17일)
'''출신정당'''

1. 개요
2. 생애
2.1. 초창기
2.2. 대통령 재임
2.3. 사망
3. 여담

[clearfix]

1. 개요


독일 사회민주당 소속의 정치인. 바이마르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된다.

2. 생애



2.1. 초창기


독일 사회민주당 당수를 지내는 도중인 1914년 오스트리아 황태자의 암살사건을 계기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다. 정부와 군부에 대해 공격적이지 않은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당시 전세상 제1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패전이 거의 확실해지자[2] 여러 세력들에 의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난 독일 11월 혁명의 과정에서 막시밀리안 폰 바덴의 뒤를 이어 독일 제국의 총리가 되었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빌헬름 2세가 망명하면서 바이마르 공화국이 들어선다.
사실 에베르트는 공화국의 선포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는 바덴 전 총리가 섭정을 맡아 제정을 이어가며 입헌군주제를 채택하는 쪽을 선호했으나 내각 각료이자 정치 동지인 필리프 샤이데만이 멋대로 공화정을 선포하자 여론이 그쪽으로 쏠린다. 에베르트는 샤이데만에게 "자네는 공화국을 선포할 권한이 없네. 독일이 공화국이 되든 그 무엇이 되든 국민의회가 결정하네!"라며 거세게 질책하지만 대세는 공화정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후 국민의회에 의해 대통령에 선출된다. 다만 직선제로는 선출된 적이 없는데, 독일의 첫 직선제 대선은 그의 후임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시절 처음 열린다.

2.2. 대통령 재임


바이마르 공화국은 수립 직후부터 계속 혼란을 겪었다. 제1차 세계 대전 패배 이후 연합국들은 막대한 배상금을 독일에 요구했고 우여곡절 끝에 민주화가 되었지만 국민의 여론은 공화국을 정식 정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쪽이었기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독일인은 자국 영토가 유린당하지 않은 채 패배를 맞이한 것을 믿고 싶어하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배후중상설이란 음모론이 횡행했다. 또한 군주정이 무너지자마자 항복을 수락한 공화국과 민주주의 정치인들을 "외세와 손잡고 베르사유 조약으로 조국을 배신한 세력"이라며 증오했다.[3]거기에 배상금을 찍어내면서 금보유량이 바닥나면서 초인플레이션이 발생한다. 렌텐마르크 참조. 여기저기서 몰아세우는 상황이 되자 사회민주당은 제대로 된 지도력을 발휘하지 못하고 계속된 혼란이 이어졌다. 그것은 어느 정권도 2년 이상 집권하지 못한 것에서 드러난다.
그래도 초기 리더십은 아주 최악만은 아니었다. 프리드리히 에베르트는 쿠데타를 막아내고 흑적황 연정을 85%의 지지로 출범시켰으며, 화폐개혁으로 전후 벌어진 하이퍼 인플레이션을 잠재웠다(1923년). 또 같은 해 프랑스가 석탄 인도를 거부한 데 대한 보복으로 루르지역점거하자 총파업으로 맞서는 등 성과를 보이기도 했다. 또한 미국의 배상금감축 제안에 도움을 보았다.
그러나 에베르트는 흑-적-황 연정의 큰 공신이기도 하지만 정작 1920년 총선에서는 베르사유 조약의 영향으로 인하여 표를 대거 잃었고, 이후에는 보수적 외교정책을 지지하면서 오히려 자기 당인 사회민주당을 디스하는 바람에 흑-적-황 연정을 붕괴시키기까지 했다는 평을 받는다. 이 삽질 덕에 사회민주당은 여당으로 오랫동안 복귀하지 못했고 독일 정치의 불안정성은 결국 나치의 출범에 기여했다.


2.3. 사망


1925년 2월 28일 사망하였다. 임기를 매우 적게 남겨둔 상태였다. 후임 대통령으로는 결선 투표를 거쳐 파울 폰 힌덴부르크가 선출되어 뒤를 이었다.

3. 여담


프리드리히 에베르트의 사망 직후 독일 사회민주당싱크 탱크인 프리드리히 에베르트 재단을 세우고 100여개의 국가에 지부를 설치하여 민주주의 증진과 국제평화를 위한 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1994년부터 세계각지에서 인권 증진을 위해 탁월한 공헌을 한 개인이나 단체에게 상패와 상금 2만 유로를 주는 에베르트 인권상을 수여하고 있다. 2017년에는 박근혜 퇴진 운동에 참여한 '대한민국 촛불시민'이 수상자로 선정되었다. 특정 단체나 개인이 아닌 한 나라의 국민을 대상으로 수여한 일은 이번이 처음인데 세월호 참사 생존자인 장애진이 국민 대표로 시상식에 참석하여 수상을 받았다.

[1] 흔히 에버트라고 알려져 있는데 국립국어원 표기 규정 제3장 제1절 제1항에 따르면 에베르트다.[2] 여담이지만 에베르트 본인도 두 아들을 1차 대전에서 잃었다.[3] 특히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살아남은 제2 제국의 기득권층은 바이마르 공화국 체제에 대해 비협조적이었으며 민주주의 체제가 외세에 의해 '강요'된 것으로 여겼기에 이에 회의적이었고 군주제로 복귀하거나 군국주의 체제로 대체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