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1세
1. 개요
러시아 제국 로마노프 왕조의 11대 황제이자, 폴란드 입헌왕국의 국왕이다.
대대적인 반동정치를 통해 러시아 제국을 "유럽의 헌병" 역할에 충실하게 한 차르. 프랑스 혁명의 여파로 퍼진 자유주의 운동에 대해 언론 탄압과 숙청으로 일관했다.
파벨 1세와 마리아 표도로브나의 아들이며 알렉산드르 1세의 셋째 동생이다. 형이며 전임 차르인 알렉산드르 1세와 나이 차가 무려 19살이나 난다. 둘째 형과는 17세 차이가 나고 그 사이에 누나가 6명[2] 이다.
즉위 과정부터 우여곡절이 많았다.
2. 갑작스러운 즉위와 사회 혼란
형 알렉산드르 1세의 후계자는 둘째 형인 콘스탄틴 대공으로 황태제의 지위에 있었는데, 그가 조강지처[3] 와 이혼하고 귀천상혼을 하자 1820년경 형인 알렉산드르 1세가 법령으로 귀천상혼에서 태어난 후손들은 계승권을 인정치 않는 법령을 공표를 하지는 않았지만 미리 제정해두었다. 콘스탄틴 대공도 2번째 결혼을 나이가 거의 40살이 넘어서 했기 때문에 자식이 그때까지 없었는데다가 별로 제위에 미련이 없어서 상속권을 포기하게 된다. 이에 니콜라이가 형 알렉산드르 1세의 후계자가 된다.
문제는 '''니콜라이는 이런 사실을 몰랐다는 것...''' 알렉산드르 1세가 1825년 겨울에 급사하고 신하들은 공식적으로 황태제 지위에 있던 콘스탄틴을 옹립했지만 콘스탄틴 대공은 이를 거부했고 다음 순위인 니콜라이도 형을 뛰어넘고 황위를 물려받을 수 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이래서 3주동안 콘스탄틴 대공이 폴란드 총독으로 있던 바르샤바와 수도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왔다갔다 하는 빵셔틀이 펼쳐진다. 콘스탄틴 대공이 막내 동생 미하일 대공을 자신의 대리인으로 수도에 파견하여 니콜라이를 설득해 결국, 니콜라이가 새 황제가 된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즉위했는데 즉위식 때 군대 사열에서 콘스탄틴 대공에 충성을 바치던 일부 군인들이[4] 새 황제에 충성을 거부하고 이탈하며 단초가 된 데카브리스트의 난으로 곤욕을 겪게 된 이후 철저한 반동정치를 취하게 된다. 황제 중심의 독재체제를 확립시켰으며, 검열제도를 강화했다.
유럽의 기존 질서 유지에 철저한 역할을 담당해서 신성동맹을 유지시켰고 '유럽의 헌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1830년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나고 이로 인해 폴란드에서도 반란이 일어나자 이를 진압하고 폴란드가 어느 정도 지니고 있었던 자유와 자치권을 박탈하며 이전보다 더 심한 식민통치를 했다. 1848년 2월 혁명이 일어나자 프랑스와 외교관계를 단절하고 1849년 헝가리에서 합스부르크 왕가에 대항해 반란이 일어나자 합스부르크 왕가를 도와 이를 진압했다.
이렇게 재위 기간 동안 '유럽의 헌병'으로서 유럽의 기존 질서 유지를 주장하며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탄압하는데 적극적으로 나선 것과 달리 아이러니하게도 재위 초에 일어난 그리스 독립전쟁 때에는 그리스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 오스만 제국에 맞서 독립을 쟁취하려는 그리스 독립군을 도와 영국, 프랑스와 연합군을 결성하여 나바리노 해전에서 오스만 - 이집트 연합군을 격파하였고 이어 단독으로 오스만과 전쟁을 벌여 승리를 거둬 오스만이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게 만들면서 그리스가 오스만에게 독립을 쟁취하는 데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3. 몰락과 쓸쓸한 최후
하지만 유럽의 헌병이라 불리며 자유주의, 민족주의를 극도로 억압했던 그의 외교정책은 1853년 발발한 크림 전쟁으로 인해 무너지게 되었다. 비록 크림전쟁은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간의 전쟁이었으나 영국과 프랑스가 군대를 파병하여 오스만 제국을 원조했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도 외교적으로 압박을 가해왔던 것이다. 즉, 러시아의 지나칠 정도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억압과 영토 확장이 오히려 주변 유럽국가들에게 부담이 되어서 도리어 러시아가 유럽에서 고립당하게 된 것이다.
결국 크림 전쟁에서 영국과 프랑스에게 참패를 당하기 시작하자 군사적, 정치적 타격을 입은 채 실의에 빠져 살았다. 그러다 1855년 측근들의 만류를 무시하고 차가운 빗속에서[5] 크림 전선으로 나가는 군대를 사열하다가 폐렴으로 쓰러진 뒤 1주일 후에 생을 마감했다. 그나마 전쟁이 끝난 건 1856년이었는데 일부에서는 크림 전쟁의 계속된 패전에 절망하여 굴욕적인 전쟁 종전 협정에 서명하는 꼴을 보이기 싫어 음독자살을 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4. 니콜라이 2세와의 공통점
무엇보다 증손자 니콜라이와 처해진 운명이 닮았다.
- 알다시피 차르로서 받게 된 이름이 니콜라이라는 것.
- 황후가 러시아로 시집왔을 때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라는 이름으로 세례받았다는 것.
- 딸들의 이름 중 '올가'와 '마리야'가 있다는 것.[6]
- 즉위 전후로 죽을 위기를 겪었다는 것.
- 재위 말기에 큰 전쟁으로 정치적 입지가 극도로 좁혀졌던 것
- 니콜라이 1세의 재위 말기에는 크림 전쟁으로 자신이 이끌던 반동 정치가 파괴되고 국력이 많이 약해졌다.
- 니콜라이 2세의 재위 말기에는 순식간의 암살이 전세계급으로 번진 전쟁으로 개혁정책이 파멸되면서 러시아 혁명으로 폐위되었고, 이듬해 총살당했다.
5. 가족사
정말 불행하지 않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가족사가 불행했다.
- 할아버지: 표트르 3세(1728년 2월 21일 ~ 1762년 7월 17일)
- 할머니: 예카테리나 2세(1729년 5월 2일 ~ 1796년 11월 17일)
- 아버지: 파벨 1세(1754년 10월 1일 ~ 1801년 3월 23일)
- 어머니: 마리아 표도로브나(1759년 10월 25일 ~ 1828년 11월)
- 큰형: 알렉산드르 1세(1777년 12월 23일 ~ 1825년 12월 1일)
- 작은형: 콘스탄틴(1779년 4월 27일 ~ 1831년 6월 15일)
- 큰누나: 알렉산드라(1783년 8월 9일 ~ 1801년 3월 16일)[8]
- 누나: 엘레나(1784년 12월 13일 ~ 1803년 9월 24일)[9]
- 누나: 마리야(1786년 ~ 1859년)[10]
- 누나: 예카테리나(1788년 ~ 1819년)
- 누나: 올가(1792년 ~ 1795년)
- 누나: 안나(1795년 ~ 1865년)
- 니콜라이 1세(1796년 7월 6일 ~ 1855년 3월 1일)
-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1798년 7월 13일 ~ 1860년 11월 1일) - 프로이센 왕국 출신. 그녀의 작은오빠는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이다.
- 장남: 알렉산드르 2세(1818년 4월 29일 ~ 1881년 3월 13일)
- 장녀: 마리야(1819년 8월 18일 ~ 1876년 2월 21일)[11]
- 차녀: 올가(1822년 9월 11일 ~ 1892년 10월 30일)
- (3녀가 있었으나 1823년에 사산되었다.)
- 4녀: 알렉산드라(1825년 6월 24일 ~ 1844년 8월 10일)[12]
- 5녀: 옐리자베타(1826년 6월 7일 ~ 1829년경)
- 차남: 콘스탄틴(1827년 9월 21일 ~ 1892년 1월 25일)[13]
- 3남: 니콜라이(1831년 8월 8일 ~ 1891년 4월 25일)
- 4남: 미하일(1832년 10월 25일 ~ 1909년 12월 18일)
-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1798년 7월 13일 ~ 1860년 11월 1일) - 프로이센 왕국 출신. 그녀의 작은오빠는 프로이센의 빌헬름 1세이다.
6. 기타
그가 혁명군을 제압할 때 주모자인 릴레예프가 체포되어 사형을 언도받게 되었는데, 교수대의 밧줄이 끊어지면서 살아남게 되었다. 당시에는 그런 일이 벌어지면 하늘의 뜻이나 신의 은총이라 생각해서 사면하는 경우가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일어나면서 "이 정권은 제대로 할 줄 아는 게 없어서 밧줄도 못 만든단 말입니다!"라는 말을 한 것을 니콜라이 1세가 알게 되자 황제는 쓰던 사면장을 찢어버렸고, 두번째 교수형에 쓰인 밧줄은 멀쩡했다는 일화가 있다. 반대로 릴레예프와 달리 살아남은 사람이 표도르 도스토옙스키다. 다만 후자는 애초에 진짜로 처형을 집행할 의도가 없었던 것.
캅카스와의 전쟁에서 노흐치 여성 지휘관인 타이마스하를[14] 포로로 잡아 대면했을때 "그대를 풀어줄테니 군을 물러달라" 청하자 "차르 네가 바로 전쟁 자체다." 라는 패기 넘치는 대답을 듣고 풀어주었다.
[1] 상트페테르부르크 근교의 도시[2] 그중 1명은 3살에 죽었고, 2명은 난산으로 죽었고, 1명은 그 후유증으로 단명했다. 살아남은 2명도 시집간 이후 니콜라이를 본 적이 없이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참고로 이 누나들 중 하나는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에 시집을 갔는데 이 누나의 딸 즉 조카 중 하나는 자기 처남인 빌헬름 1세의 황후인 아우구스타이다.[3] 앨버트 공의 고모다. 참고로 이 결혼과 다른 고모인 코부르크의 공녀 빅토리아와 켄트와 스트래선 공작 에드워드 왕자(조지 3세의 4남)와의 결혼(빅토리아 공녀에게는 재혼. 참고로 이 결혼 생활은 채 3년을 가지 못했지만, 그동안 태어난 외동딸이 바로 빅토리아 여왕), 숙부인 레오폴드의 조지 4세의 딸과의 결혼과 훗날 벨기에 왕위 즉위(...) 덕에 작은 가문이었던 작센코부르크고타는 영국의 왕위까지 얻을 수 있었다.[4] 콘스탄틴 대공은 알렉산드르 1세 치하에서 군인으로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활약을 많이 했기 때문에 추종자들이 많았다. 그에 비하면 니콜라이는 나이 차이도 많이 나는 까마득한 풋내기...[5] 단순히 비만 온게 아니라 이때의 날씨가 영하 23도로 강추위까지 있는 겨울이었으며 니콜라이 1세는 그 혹한인 날씨에 '''외투도 입지 않고 사열한것이다.''' 이때문에 측근들이 경악했고 당시 황제의 주치의였던 만트는 자살행위라며 극구 만류했을 정도. 게다가 니콜라이 1세는 폐렴에 걸렸을때는 주치의 만트의 치료조차 거부하며 죽기를 원했다.[6] 그래서 이들은 미들네임으로 '니콜라이의 딸'이란 뜻의 '니콜라예브나'가 있다(올가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마리야 니콜라예브나 로마노바) 참고로 니콜라이 1세의 미들네임은 파블로비치, 니콜라이 2세의 미들네임은 알렉산드로비치이다.[7] 오스트리아의 요제프 대공-레오폴트 2세의 아들, 즉 프란츠 2세와 카를 루트비히의 동생이다. 참고로 이 양반의 사위가 그 콩고의 수탈자다.[8] 1801년 3월 9일 오스트리아에서 딸 알렉산드리네를 낳았으나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죽었고, 알렉산드라도 3월 16일에 출산의 여파로 죽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의 죽음 이후에 그녀의 남편[7] 은 새로 결혼했다.(…) 1주일 후에는 파벨 1세가 암살되었다.[9] 독일 메클렌부르크-슈베린의 대공세자에게 시집갔으나 딸 마리를 낳자마자 죽었다. 그녀의 남편도 아내의 죽음 이후 건강이 나빠지다가 1819년에 죽었다. 여담이지만 이 사람의 손자가 보불전쟁 당시 프로이센의 왕족 겸 명장(대십자 훈장을 받았다) 프리드리히 프란츠 메클렌부르크 대공이다. 거기다가 프리드리히 프란츠는 빌헬름 1세의 외조카이다. 참고로 프리드리히 프란츠의 막내 아들이 네덜란드 빌헬미나 여왕의 부군 헨드릭 대공이다. 게다가 프리드리히 프란츠의 손녀는 빌헬름 2세의 큰며느리(독일 황태자 빌헬름의 부인)와 덴마크 왕비다. 즉 후손은 괜찮게 둔 셈.[10] 이 사람의 딸이 작센바이마르의 아우구스타이니 빌헬름 1세의 장모다. 참고로 빌헬름 1세는 이 사람보다 11살 어린 1797년 생인데, 아우구스타는 1811년생이다. 이로 인해 아들인 프리드리히 3세는 니콜라이 1세와 외할머니의 동생인 동시에 고모부인 관계다 [11] 독일의 로이히텐베르크 공작 막시밀리안하고 결혼했는데 이 사람의 아버지는 외젠 드 보아르네로 나폴레옹 1세의 양아들이다! [12] 독일 소왕국인 헤센-카셀 출신의 남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알렉산드라는 결혼 직전 결핵에 걸리고 말았고, 1844년 아들 빌헬름을 낳고 건강이 악화되어 죽었다. 그 아들마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죽었다. 엄청난 미인이었고 니콜라이 1세와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가 정말 사랑했던 딸인데, 타지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니콜라이 부부는 한동안 실의에 빠졌다고 한다.[13] 엘리자베스 2세의 부군 필립 공의 증조부이다. 딸 올가가 그리스 왕국 요르요스 1세와 결혼하였고, 요르요스 1세의 4남 안드레아스 왕자의 막내이자 외아들이 필립 공.[14] 우락부락한 남자들로 구성된 뮤리드 부대의 대장을 맡은 여인으로 이 쪽도 만만찮은 여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