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마운트배튼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이름'''
필립 마운트배튼[1]
(Philip Mountbatten)
'''출생'''
1921년 6월 10일 (99세)
그리스 왕국 코르푸 몬 레포스
'''신장'''
183cm
'''배우자'''
엘리자베스 2세 (1947년 결혼)
'''자녀'''
찰스, , 앤드루, 에드워드
'''아버지'''
그리스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어머니'''
바텐베르크의 앨리스
'''형제'''
마르가리타, 테오도라, 체칠리아, 소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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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1927)
청년기 (1947)
1. 개요
2. 작위
3. 생애
3.1. 유년기
3.1.1. 망명생활
3.1.2. 영국행
3.1.3. 엘리자베스 공주와의 만남
3.2. 청년기 ~ 노년기
3.2.1. 해군 복무
3.2.2. 결혼과 가정
3.2.3. 영국의 국서
4. 가족 관계
5. 건강 문제
6. 실언 목록
7. 평가
8. 매체에서
9. 기타


1. 개요


영국국서(國壻)[2]. 엘리자베스 2세의 남편으로, 작위명은 '에든버러 공작(Duke of Edinburgh)', 통칭 '''필립 공(Prince Philip)'''으로 불린다.
  • 1921년 6월 10일 ~ (2024-03-28 03:36:41 현재 102세, 37547일)
  • 국왕의 배우자[3]: 1952년 2월 6일 ~ (2024-03-28 03:36:41 현재 72년째)
아내와 마찬가지로 90세 넘게 장수 중이며 현재 생존한 영국 왕실 구성원 가운데 아내인 엘리자베스 2세 여왕보다 나이가 많은 유일한 인물로 본인의 부모님과 누나들 보다 훨씬 장수하고 있다.

2. 작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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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
보통은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 전하(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로 지칭하며, 공식적인 칭호는 '에든버러 공작, 메리오너스 백작, 그리니치 남작, 가터 훈장의 기사, 시슬 훈장의 특별기사, 대영제국 훈장의 기사, 오더 오브 메리트 훈장의 회원, 오스트레일리아 훈장의 컴패니언, 뉴질랜드 훈장의 회원, 여왕 공로 훈장의 컴패니언, 파푸아뉴기니 로거후 훈장의 치프, 캐나다 훈장의 컴패니언, 캐나다 무공 훈장과 캐나다 군대 훈장의 커맨더, 여왕 폐하의 영광스런 추밀원과 캐나다 추밀원의 의장, 해군 최고 사령관이신 필립 공 전하[4]'이다.
  • 그리스덴마크의 필리포스 공자 전하 His Royal Highness Prince Philip of Greece and Denmark (1921년 6월 10일 ~ 1947년 3월 18일)
  • 필립 마운트배튼 대위 Lieutenant Philip Mountbatten (1947년 3월 18일 ~ 1947년 11월 19일)
  • 필립 마운트배튼 경 전하 His Royal Highness Sir Philip Mountbatten (1947년 11월 19일 ~ 1947년 11월 20일)
  • 에든버러 공작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Duke of Edinburgh (1947년 11월 20일 ~ 1957년 2월 22일)
    • 메리오너스 백작 Earl of Merioneth (1947년 11월 20일 ~ 현재)
    • 그리니치 남작 Baron Greenwich (1947년 11월 20일 ~ 현재)
  •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 전하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1957년 2월 22일 ~ 현재)

3. 생애



3.1. 유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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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6월 10일 그리스의 코르푸 섬에서 그리스덴마크의 왕자 안드레아스(1882년 ~ 1944년. 향년 62세)와 왕자비 바텐베르크의 공녀 앨리스의 늦둥이 고명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났을 당시에는 그리스의 왕자였기 때문에 이름이 영어인 필립 마운트배튼이 아니라 그리스어인 필리포스였고, 태어났을 당시 그리스 왕위계승 서열 2위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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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포스의 위로 마르가리타(1905~1981), 테오도라(1906~1969), 체칠리아(1911~1937), 소피아(1914~2001), 모두 4명의 누나가 있었는데 큰누나 마르가리타와 필리포스의 나이 차는 무려 16살이나 난다.[6]

3.1.1. 망명생활


1922년, 안드레아스 왕자의 큰형이자 필립의 큰아버지인 콘스탄티노스 1세가 퇴위하면서 안드레아스 일가에도 추방령이 내려지자,[7] 앨리스 왕자비는 자기 어머니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의 외가인 영국의 국왕 조지 5세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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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의 필리포스.
빅토리아 여왕의 손자인 조지 5세빅토리아 여왕의 외손녀이자 자신의 고종사촌 여동생 알릭스의 시가인 제정 러시아니콜라이 2세 일가족이 영국으로 망명 의사를 타진한 것에 대해 의회 눈치를 보면서 미온적으로 대처했다가 그들을 죽게 만든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 당시 큰 충격을 받았던 조지 5세는 이번에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그리스에서 철수하는 영국 군함에 이들을 몰래 승선하도록 해서 필리포스와 가족들은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8]
1923년, 필리포스와 가족들은 숙모 마리 보나파르트 공주의 도움으로 프랑스 파리 근교의 생클루드에 정착해 그녀가 내어준 집에서 생활한다. 이때 필리포스는 생후 18개월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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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 4살의 필리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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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6살의 필리포스.
프랑스에서 지내는 동안 안드레아스 일가는 왕족치고는 비교적 가난하게 지냈다. 부유한 친척들은 필리포스의 학비를 대줬고, 필리포스는 파리에 있는 미국식 신설학교 맥자넷 아메리칸 스쿨(MacJannet American School)에 재학한다. 그는 이 시절을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 이라고 회고했다. 1970년대까지 설립자 도널드 맥자넷과 연락을 주고받았을 정도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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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자넷 아메리칸 스쿨 시절의 필리포스. 급우들과 함께(가운데 금발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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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 즈음, 마지막 가족사진. 이 사진을 찍고 몇년 후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3.1.2. 영국행


1928년, 필립은 영국으로 건나가 외할머니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와 큰외삼촌 조지 마운트배튼 후작의 보살핌을 받으며 켄싱턴 궁전에서 지내게 되고, 햄프셔에 있는 침 스쿨에 재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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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 스쿨 시절의 필리포스 (뒷줄 맨 오른쪽).
필리포스가 영국에서 지내는 동안 누나들은 독일 왕족에게 시집을 갔고, 필리포스가 여덟살이 되던 1930년엔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가 조현병에 걸렸다는 진단이 내려졌다. 앨리스 왕자비는 스위스에 있는 정신병원에 입원하고, 그후 필리포스는 7년동안 어머니와 한번도 만나지 못한다. 아버지 안드레아스는 필리포스를 버리다시피 하고 모나코에서 정부와 함께 생활하며 카지노를 진전하는 생활을 했다.[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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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8살의 필리포스.
1933년, 필리포스는 과거 헤센 대공국이자 셋째 누나 체칠리아가 시집간 독일 헤센의 다름슈타트로 건너가 슐로스 슐레 살렘에 재학하며 헤센 대공저에서 체칠리아와 매형 게오르기 도나투스 가족과 함께 지낸후, 2년 후엔 다시 영국으로 돌아와 스코틀랜드의 고든스타운스 스쿨에 입학한다. 이때부터 작은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의 저택에서 외삼촌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된다. 루이의 아내이자 필립의 외숙모인 에드위나가 어마어마한 유산을 상속받은 상속녀인데다가 슬하 두 딸만 두어 필리포스를 아들로 여기며 친자식처럼 귀여워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부족함 없이 자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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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든스타운스 스쿨 시절의 필리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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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16살의 필리포스.
1937년에는 큰 비극이 벌어졌는데, 셋째 누나인 체칠리아의 가족들이 벨기에 오스텐더의 상공에서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하는 사고가 났다. 장례식은 체칠리아의 남편이자 필립의 매형인 게오르크 도나투스[10]의 고향인 다름슈타트에서 행하였고, 필립도 이 장례식에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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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헤센 대공가의 장례식에 참석한 필리포스(선두 왼쪽에서 두번째).[11]
해센 대공가의 장례식에서 근 7년만에 아들을 만난 어머니 앨리스 왕자비는 필리포스와 함께 다시 왕정이 들어선 그리스로 돌아가고 싶어했지만 이미 작은외삼촌 루이 마운트배튼이 필리포스를 자기 자식들과 함께 키우며 실질적으로 아버지 역할을 하고 있었고, 필리포스도 영국해군사관학교에 재학하며 해군으로 복무할 목표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영국에 남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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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 영국해군사관학교 시절의 필리포스.

3.1.3. 엘리자베스 공주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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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9년에는 필리포스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던 운명적 만남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 조지 6세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비가 두 딸 엘리자베스 공주마거릿 공주를 데리고 해군사관학교를 시찰하러 방문한 것이다. 당시 18세의 해군 생도였던 필리포스는 왕족이라는 이유로 학생 대표로 나가 국왕 일가를 안내하고, 공주들을 수행하는 역할을 맡았다. 이때 14세의 소녀 엘리자베스 공주는 필리포스에게 첫눈에 반하고 만다.

3.2. 청년기 ~ 노년기



3.2.1. 해군 복무


영국해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영국 해군에 입대해 제2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여러 해전에 참전해 훈장을 수여받았으며 계급도 중위, 대위, 소형선 부장 등을 거쳐 종전 후에는 그리니치 해군대학에서 강사로서 교편을 잡기도 했다.

3.2.2. 결혼과 가정


이후 7년 동안 둘은 편지를 주고 받으며 연정을 키웠다. 엘리자베스가 20살 성년이 되던 해에 둘은 결혼을 결심했지만, 그리스 왕족 출신인 필립은 재정적 기반도 없었고 누나들이 독일 옛 왕족, 귀족들과 결혼했다는 사실로 반대 여론이 컸다고 한다.[12][13]
결국 필립 공은 엘리자베스를 위해 그리스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고 영국인으로 귀화, 그 후 조지 6세로부터 결혼을 승낙받은 필립은 외삼촌 마운트배튼 백작의 권유에 따라 외가의 성인 바텐베르크를 영문식으로 바꾼 마운트배튼을 성씨로 삼고 이름을 그리스어 필리포스에서 영어인 '''"필립 마운트배튼'''"으로 개명했으며,[14] 그리스와 덴마크의 왕자 신분과 계승권[15]을 포기함과 동시에 종교동방정교회에서 성공회개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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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마거릿 공주, 엘리자베스 2세, 필립,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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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은 1947년 11월 20일 런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거행되었다. BBC가 촬영한 당시의 로열웨딩이 컬러 기록 영상으로 남아 있다. 결혼식을 마치고 다시 영국 해군에 복귀한 필립은 몰타에 배치되어 소령 진급 후 부장 직책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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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후 1년만에 얻은 아들인 찰스 왕세자를 안아보는 필립 마운트배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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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들과 함께.

3.2.3. 영국의 국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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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70주년 기념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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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전 이후 대내외적으로 산적한 문제를 해결하느라 골초가 된 조지 6세의 건강이 계속 악화되자 추밀원은 1951년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을 국왕 대리로 임명했고, 부부는 국왕 대리로서 영연방을 순방했다. 1952년 2월 6일 케냐에 체류하는 도중 조지 6세의 사망 소식을 접한 필립은 다른 수행원들을 물리친 후 직접 아내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었고, 이때부터 앨버트 공 사후 91년만에 등장한 여왕의 부군으로서 필립의 임기도 함께 시작되었다.
급히 귀국한 부부의 앞에 놓인 첫 번째 문제는, 왕가의 명칭 변경을 둘러싼 논란이었다. 필립의 삼촌인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은 "남편의 성씨를 따라 영국 왕가의 명칭을 윈저 왕가에서 마운트배튼 왕가로 바뀌는 것 아닌가"라고 말했지만, 조지 5세의 왕비이자 조지 6세의 어머니이며 엘리자베스 2세의 조모로서 아직 생존해 있던 메리 왕비는 "영국의 왕가는 앞으로 계속 윈저가 될 것"이라고 밝혔으며, 이는 원래부터 합의되어 있던 사항이라고 한다.[16] 필립은 이따금씩 '''"영국에서 자식에게 가문을 물려주지 못하는 남자는 나뿐"'''이라고 자조하고는 한다.[17] 하지만 오해하면 안 되는 게, 그와 여왕의 후손들은 마운트배튼윈저라는 성(surname)을 쓴다.[18] 다만 왕가의 이름(family name)은 계속 House of Windsor라고 부를 것이라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surname=family name이지만, 영국 왕가의 경우 앞으로 surname은 Mountbatten-Windsor, family name은 House of Windsor라고 하여 구분하겠다는 것이다.[19] 즉 성씨는 달라지더라도 왕가의 이름은 계속 Windsor로 고정된다는 뜻이다.[20]
아내 엘리자베스 2세와는 여전히 금슬이 좋은 편이다. 엘리자베스 2세가 전국민적인 사랑을 받은 데에는 남편 필립 공과의 모범적인 결혼생활도 한몫 했다. 외국에 알려진 것처럼 수십 년간 두 사람 사이에 잡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며, 필립 공이 바람둥이이며 대자로 삼은 수십 명의 아이들이 사실은 죄다 사생아라는 소문은 옛날부터 계속 돌았다. 다만 여왕이 남편의 바람기를 어느 정도 눈감아주었고, 필립 공 역시 바람을 피우더라도 아내에게 충실해야 한다는 본분을 잊지는 않았기 때문에 간간히 나오는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결혼 생활을 평탄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고. 여러모로 고전적인 유형의 부부라 할 수 있다.
필립 공은 여왕의 부군이라는 위치 때문에 항상 아내보다 한발 물러서 있어야만 하는 데다가 엘리자베스 2세가 국정을 혼자 살펴[21] 정치적으로 발언권을 가지는 일은 극히 드물다. 대신 여왕을 대리해 해외를 순방[22]하거나 각종 학술단체 또는 자선단체의 후원자를 맡는 등 민간 활동에서 다른 왕실 가족들과 함께 얼굴 마담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의전 서열상 영국군 최고 계급 보유자로, 영국 육군, 영국 해군, 영국 공군원수 계급을 보유하고 있고, 2011년에는 엘리자베스 2세로부터 해군 최고사령관(Lord High Admiral) 직위를 넘겨받았다. 옛날 빅토리아 여왕의 남편인 앨버트 공은 마운트배튼 경처럼 외국인이었지만 빅토리아 여왕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의회의 반대로 인해 해군 제독 계급을 수여받지 못했다. 반면 마운트배튼 경은 영국 해사 출신이고 이미 본국 왕정도 없어진 상태라 큰 논란이 없었던 듯하다.
현재 크리스티안 9세빅토리아 여왕의 후손 중 가장 장수했다. 이전까지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 중 가장 장수한 인물은 여왕의 손녀인 애슬론 백작부인 앨리스 공주(1883년 ~ 1981년, 97년 313일) [23]이었는데, 2019년 4월 19일부로 필립 공이 이 기록을 경신했다.
2020년 6월 10일 99세 생일을 맞이해 '''영국 역사상 현직 군주의 배우자로서 최고령이자 가장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24]
2021년 생일까지 생존한다면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 글로스터 공작 부인 앨리스 스캇에 이어 3번째로 100살이 되는 영국 왕실 인사가 된다.

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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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줄) 앤드루 왕자, 앤 공주, 에드워드 왕자, (앞줄) 찰스 왕세자, 엘리자베스 2세, 필립 공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에든버러 공작 필립 공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그리스덴마크의 안드레아스 왕자
(Prince Andrew
of Greece and Denmark)

요르요스 1세
(George I)
크리스티안 9세
(Christian IX)
헤센-카셀의 공녀 루이세
(Princess Louise of Hesse-Kassel)
러시아 제국의 여대공 올가 콘스탄티노브나
(Grand Duchess Olga Constantinova
of Russia)

러시아 제국의 대공 콘스탄틴 니콜라예비치
(Grand Duke Konstantin Nikolayevich
of Russia)
[25]
작센알텐부르크의 공녀 알렉산드라
(Princess Alexandra of Saxe-Altenburg)
바텐베르크의 공녀 앨리스
(Princess Alice of Battenburg)
바텐부르크의 공자 루트비히
(Prince Louis of Battenburg)
헤센 대공국의 공자 알렉산더
(Prince Alexander of Hesse and by Rhine)
바텐부르크의 공녀 줄리아
(Princess Julia of Battenburg)
헤센 대공국의 공녀 빅토리아
(Princess Victoria
of Hesse and by Rhine)

헤센 대공국 대공 루트비히 4세
(Louis IV, Grand Duke
of Hesse and by Rhine)

영국앨리스 공주
(Princess Alice
of the United Kingdom)
[26]
자녀
이름
출생
배우자/자녀
1남
찰스 왕세자
(Charles, Prince of Wales)
1948년 11월 14일

슬하 2남
카밀라 파커 볼스
1녀
프린세스 로열 앤
(Anne, Princess Royal)
1950년 8월 15일

슬하 1남 1녀
티머시 로렌스
2남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
(Prince Andrew, Duke of York)
1960년 2월 19일

슬하 2녀
3남
웨식스 백작 에드워드 왕자
(Prince Edward, Earl of Wessex)
1964년 3월 10일
소피 리스-존스
슬하 1남 1녀
엘리자베스 2세/가족관계 참조.
엘리자베스 2세와의 사이에서 찰스 왕세자, 앤 공주, 앤드루 왕자, 에드워드 왕자 등 3남 1녀를 두었다. 필립과 엘리자베스 2세는 영국 군주정 역사상 가장 오랫동안 해로하고 있는데, 정작 자식들은 막내아들 빼고 전부 이혼하는 바람에 왕실의 체면이 크게 손상되었다.
필립 본인도 그렇거니와 아내 엘리자베스 2세 역시 장수하고 있어서 2007년에는 결혼 60주년을 축하하는 행사가 있었고, 2011년에는 필립의 90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행사가 거행되었다. 생일 전날 BBC와 인터뷰한 필립은 '(여왕의 부군으로서)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도 아무도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며 '스스로 여왕의 남편의 교본을 만들어가며 지금에 이르렀다'고 고충을 토로했다.

5. 건강 문제


워낙 고령이다 보니 건강이 좋지 못하다는 뉴스가 간간이 나오곤 한다. 2011년 12월 23일에는 가슴 통증을 호소해 병원에 입원해서 관상동맥경화 수술을 받고 27일 퇴원했다. 2012년 6월 4일에는 전날 있었던 수상 퍼레이드에서 비가 오는 날씨에 2시간 동안 선 채로 참석한 후유증으로 급성 방광염 증세를 보여 런던 킹 에드워드 7세 병원에 입원했다가 9일 퇴원했다. 2013년 6월 6일, 복부 수술을 위해 런던클리닉에 입원했다.
2017년 8월 2일 버킹엄 궁에서 열리는 왕립 해병대 퍼레이드 행사 참석을 마지막으로, 공식적인 왕실 업무를 끝내고 은퇴하였다. 필립 공이 맡았던 업무들은 막내 아들인 에드워드 왕자에게 인계되었다.
2019년 1월 17일, 노퍽 주 샌드링엄 하우스 인근에서 본인이 운전하던 랜드로버 차량이 전복되는 교통사고를 당했으나 큰 부상 없이 멀쩡하다는 병원 진단이 나왔다.[27] 그러나 사고 이틀 뒤 안전벨트 없이 또 운전을 하는 모습이 목격되어 고령자의 운전 금지 논란이 벌어졌다. 결국 2월 9일 운전면허를 자발적으로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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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 공무에서 물러난 현재에도 여왕과 찍은 근황 사진들을 보면 거동도 크게 불편해보이진 않는 등 꽤 정정한 모습이다.
2021년 2월 16일. 에드워드 7세 병원에 입원했다고 밝혔다. 코로나19는 아니라고 한다.#

6. 실언 목록


한국엔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사실상 망언 제조기 수준으로 '''기행을 자주 벌여서''' 엘리자베스 2세를 당혹케 만드는 일을 자주 벌였다. 자기 딴에는 농담을 한답시고 주로 자신의 고정관념[28]이나 백인 중심의 인종차별+지역 비하 등으로 대표되는 실언을 자주 했다고 한다. 이런 고지식함 때문에 해외는 물론이고 영국과 왕실 내에서도 많은 비판을 받는다.
  • 1965년에는 수단을 방문해서 베풀어진 리셉션 자리에서 박사학위 소유자들을 소개받고 "이 나라의 유일한 박사들이 틀림없군요."라고 발언했다.
  • 같은 해인 1965년 에티오피아의 전통 미술품 전시회를 관람하고 나서 "마치 내 딸이 학교 미술시간에 그려갖고 온 것 같군."이라고 발언했다.
  • 1966년에는 자선기금 모금 차 미국을 방문했다가 마이애미의 한 사업가가 "내 풀장에 뛰어들면 10만 달러를 주겠다"고 제안하자 진짜로 옷을 벗고 수영장에 뛰어들었다.
  • 같은 해인 1966년 "영국 여자들은 요리를 못한다"고 주장했다.
  • 1967년 인터뷰에서 소련을 방문하고 싶냐는 질문에 "가고 싶지. 그 새끼들 때문에 내 가족 절반이 죽었어도 말이요." 라고 발언했다. 필립의 외조모인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러시아 제국 차르 니콜라이 2세의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자매지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립 공은 니콜라이 2세 차르 부부에게는 조카손자가 되고 그들의 자녀인 올가, 타티아나, 마리아, 아나스타시야, 알렉세이에게는 5촌 조카가 된다.
  • 1980년에는 "국민들은 항상 정부에 불평만 한다."라고 말했다. 당시 영국은 불경기였다.
  • 1982년에는 솔로몬 제도의 인구성장률이 5%란 말을 듣자 "당신들 다 미쳤군."이라고 외쳤다.
  • 1984년에는 케냐를 방문해선 현지 여성을 보고 "당신 여자 맞소?"라고 물어 구설수에 올랐다.
  • 1986년에는 중국에 머무르는 영국인들에게 "중국에 오래 머무르면 중국인들처럼 눈이 찢어진다."고 주장했다.
  • 1987년에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다시 태어난다면 바이러스가 되어 인구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발언을 했다.[29]
  • 1994년에는 케이맨 제도를 방문해서 "당신들은 모두 해적의 후손이야."라고 말했다.
  • 1995년에는 스코틀랜드운전학원 강사에게 "자네는 스코틀랜드인들이 음주단속에서 안걸리게 하려면[30] 얼만큼 술을 마시라 알려주나?" 라고 질문했다. 스코틀랜드스카치 위스키와 맥주, 포도주 생산량이 높아 영국 내에서도 유달리 영국의 다른 지방에 비해 일인당 주류 섭취량과 알코올 중독 환자 발생률이 높은 지역이다.
  • 1997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주차요원이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자 폭언을 퍼붓기도 했다.
  • 1998년에는 파푸아뉴기니에 다녀왔다는 영국 학생에게 "용케도 안 잡아먹혔구나."라고 말하기도 했다.
  • 1999년에 와이어 연결이 끊어진 퓨즈 박스를 보고 "이건 인도인이 만든 거야."라고 단정지었다. 같은 해 웨일즈에서 열린 락 콘서트에 참석해서 같이 공연을 보던 청각장애 어린이에게 "(이런걸 듣고 있으니) 귀가 안들릴만 하지."라고 말해 물의를 빚었다. 사태가 커지자 필립은 "내 어머니도 청각장애인이셨는데, 내가 그런 말을 할 리가 없다."라며 부인했다.[31]
  • 2001년에는 왕실에서 공연을 한 엘튼 존에게 "마이크 좀 끄고 노래를 부르라."라고 조롱했다. 다만 영국 팝 음악계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지금과 달리 당시의 엘튼은 마약 중독 치료 센터에서 퇴원한 지 10년밖에 안 되어 아직 약쟁이 이미지가 강한 상황에다 오래 전 게이 커밍아웃까지 했었기에 안티들에게 조롱을 받기도 했었다. 필립의 연령대와 보수성을 감안하면 약쟁이 + 게이를 안 좋게 봤을 가능성이 높다. 게다가 몇 년 전 사고사했던 다이애나 스펜서와 절친이었었기 때문에 다이애나를 고까워하는 왕실 어른들에게 썩 좋게 보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 2002년에는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는 12세 소년에게 "넌 살부터 빼야 한다."라고 조롱했다.
  • 2002년에는 호주 방문 도중에 여왕을 환영하기 위해 전통 무용을 공연하던 원주민들에게 "아직도 창을 서로에게 던져대냐?"라는 농담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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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발언이 행해진 당시의 모습으로, 엘리자베스 2세가 크게 당황하는 모습이 보인다. 엘리자베스 2세는 이와 같은 부군의 발언에 크게 곤욕을 치르곤 했다. 더불어 이 당시의 발언으로 인해 호주 정부가 곤란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호주 정부가 한때 원주민에 대한 인종차별적 정책을 추진했기 때문.
  • 2002년 <인디펜던트>[32] 편집장이 엘리자베스 2세 즉위 50주년을 축하하며 왕실의 초청을 받고 방문하자 "당신 부른 적 없어, 왜 온 거야?"라고 퉁명스럽게 맞이해 또 다시 구설수에 올랐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런던 시청 개관식에 참석하여 "관광객들 때문에 런던이 너무 시끄럽다. 관광업을 중지하여 교통체증을 바로잡자."라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방글라데시에 방문하여 유소년 클럽 회원들을 보고 "대체 무슨 마약을 했길래 몰골이 그러니?"라는 질문을 던졌다.[33]
  • 2013년 영국에 체류 중인 말랄라 유사프자이버킹엄 궁전을 방문하자 "영국에서는 부모가 애들이 집에만 있는 꼴이 보기 싫어 학교에 보낸단다."라는 농담을 해 구설수에 올랐다. 말랄라 유사프자이학교를 못가게 하는(여성의 교육을 억압하는) 탈레반 때문에 영국에 온 것이다.
  • 2015년 7월 10일, 장손인 윌리엄 왕세손과 막내아들인 에드워드 왕자와 함께 참석한 참전용사 모임에서 기념사진 촬영이 지연되자 심기가 불편한 모습을 보이다가
>Just take the fucking picture!(그 엿같은 사진 그냥 좀 찍어!)
라고 화를 냈다.
순간 에드워드 왕자는 아무 표정 없이 가만히 있었고, 윌리엄 왕세손은 웃음으로 넘기려 했다.
이런 일들이 너무나도 빈번하게 일어나자 영국의 역사가이자 언론인이었던 데이비드 스타키(David Starkey)는 필립의 기행을 "드라마의 빅터 멜드루(Victor Meldrew)같다"고 꼬집었다. 빅터 멜드루는 영국 BBC시트콤 "One Foot in the Grave"에 등장하는 괴팍한 노인캐릭터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무슨 노인네가 인성이 노구야동순재급이시네요"라고 깐 셈이다.
드라며 더 크라운에서는 이런 모습을 반영하여 필립 공이 종종 인종차별적인 농담을 던지는 장면이 묘사된다. 예를 들면 시즌 1 2화에서는 케냐의 다양한 부족장들을 만나는 자리에서 부족장들의 개오지 목걸이를 툭툭 쳐내며 가슴에 달린 훈장을 가르키며 "이건 어디서 훔쳐온 것이냐"고 묻거나, 전통 왕관을 가르키며 "모자 멋지다"고 말하는 등의 언동을 보여 엘리자베스 2세가 주의를 주는 모습이 나온다.

7. 평가


워낙 복잡한 시대를 겪은 인물인지라 사람들이 보는 시각과 기준에 따라 평가가 크게 달라지는 복합적인 인물이다. 잇다른 실언과 기행들에서 보듯 인격적으로 현대적인 의미에서 착한 사람이라고 정의하기는 어렵다. 오죽하면 영국 국민들이 필립에게 붙인 별명이 '웃기는 사람(funny man)'이다. 이런 면에서 필립은 인종주의나 신분의식 등 1920년대에 태어난 보수적인 남성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의 일면을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더군다나 필립은 유럽 왕실들 중에서도 제일이라고 할 수 있는 영국 왕실의 공주(The Princess),[34] 그것도 차기 여왕이 될 예정이자 왕세녀에 준하는 공주였던 아내 엘리자베스와 비교될 뿐이지 최상위계층이라 할 수 있는 왕족으로 엄연한 상류층 출신이다. 애초에 일개 귀족 수준 출신성분이었거나 통치가문 후손이 아니었으면 자기 장인어른이 결혼했을 때처럼 당장 말이 나왔을 것이다. 누나들이 전부 다 나치즘의 색이 짙은 독일 왕공족들에게 시집가서 그렇지 신분으로만 따지면 적어도 여왕의 남편이 되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사람이였던 것.[35][36] 이런 위치에서 평생을 살아온지라 동년배 기준으로도 더 보수적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가정적으로는 매우 자상한 편이라고 한다. 하지만 나머지 자녀들과 달리 장남인 찰스는 엄격한 필립을 좋아하지 않았다. 고든스턴(Gordonstoun)이란 스코틀랜드 시골 한가운데 있는 기숙학교[37]에 들어간 자신을 필립이 걱정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아버지가 그럴 리 없다며 딱 잘라 무시했다는 일화도 있다. 필립과 찰스 모두 시간이 많이 지나서야 사이가 좋아졌다. 맏며느리인 다이애나 스펜서가 찰스의 간통 때문에 고통을 호소해도 시어머니인 엘리자베스 2세가 원론적인 대답만 반복하고 방관하였던 반면 시아버지인 필립은 자신과 다이애나의 입장이 같다고 느껴서 당시 왕실 인사 중에서는 유일하다시피 다이애나의 하소연을 들어주고 슬픔을 달래주었다.
또한 동시에 엘리자베스 2세의 대관식을 BBC가 사상 최초로 TV 생중계를 하도록 한 점이나, 당시 왕실 어른들 중 드물게 자신의 처제인 마거릿 공주가 이혼 경력이 있는 피터 타운샌드 영국 공군 대령과 결혼하는 것에도 찬성하였으며[38], 자신의 손자인 해리 왕자가 이혼 경력이 있는 아프리카계 미국인 배우와 교제하는 것을 허용하고 둘 사이를 지원하는 등, 왕실과 관련된 파격적 변화를 주도한 인물이라는 면도 있다.
드라마 더 크라운 등 필립 공에 대해 다룬 매체들에 따르면, 어린 시절 그리스에서 쫓겨난 경험을 통해 "왕실이 스스로 변하지 않으면 더 이상 국민들이 왕실을 지지해주지 않을 것이고, 국민의 지지가 없는 왕실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깨달았다고 한다. 때문에 왕실의 풍습과 법도에 대해서는 이런 개혁적인 면모를 가지게 됐다고. 이러한 시선에 따르면, 결과적으로 필립 공은 조국에서 쫓겨난 것이 전화위복이 되어 영국 왕실을 개혁시킨 인물로 평가받게 된 셈이다. 어찌보면 정말 보수적인 인물이었다면 외부 접촉도 거의 하지 않고 살았을텐데, 나름 열린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농담을 해본다고 한 소리들이 대부분 구시대적 가치관에 기반한 것이라 물의를 일으켰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8. 매체에서


  • 다이애나 왕세자비의 사망을 다룬 <더 퀸>에서는 제임스 크롬웰이 필립 역을 맡았다. 전통을 중시하는 완고한 보수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며 여론의 질타에 꼬장꼬장하게 분통을 터트리곤 한다.
  • 엘리자베스 2세의 재위 기간을 주제로 한 영국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는 시즌 1~2 동안 맷 스미스가 시즌 3~4 동안 토비아스 멘지스가 필립 역을 맡았다. # 2016년 11월, The Crown이 넷플릭스에 떴는데 앞서 말한 막말 일화도 등장했다.[39] 상술한 복합적인 면모가 돋보이는 인물로 대중에 대한 왕실 모습의 공개, TV 녹화 등의 개방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동시에, 의혹 제기일 뿐이긴 하지만 해외 순방 중의 불륜행각이나 장남 찰스에게 가혹하게 구는 모습 등이 묘사된다.

9. 기타


  • 필립 공 본인은 만 2살도 안 되어 그리스를 떠났기 때문에 그리스어는 그리 잘하지 못하지만, 본인이 1992년에 밝힌 바에 따르면 어느 정도 알아듣기는 한다고 한다.
  • 그리스 왕국의 왕족으로 태어났지만, 외모의 어디를 뜯어봐도 그리스인의 외모가 아니라 평범한 서유럽계 외모다. 필리포스도 자신을 그리스인보다는 덴마크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필리포스의 조부이자 그리스 글뤽스부르크 왕조의 초대 왕인 요르요스 1세 국왕[40]은 본래 덴마크 왕국 크리스티안 9세의 차남 빌헬름이었기 때문이다. 거기다 어머니인 앨리스도 부모 모두 독일인이라 그리스인과 외모가 다르다.
  • 필립 공의 사촌누나인 그리스와 덴마크의 마리나 공주[41] 는 엘리자베스 2세의 작은 아버지이자 조지 5세의 4남인 켄트 공작 조지의 부인이다. 아름다운 외모로 켄트 공작가 사람들이 한 미모 하는데 큰 기여(?)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42] 동서지간이자 형님인 엘라자베스 보우스-라이언 왕대비를 왕족이 아닌 귀족출신이라고 무시해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한다.
  • 엘리자베스 2세빅토리아 여왕의 장남 에드워드 7세의 증손녀이고, 필립은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모드 메리 공주[43]의 증손자로, 둘 다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으로, 모계(영국 왕실) 기준으로는 8촌이다. 또 필립의 조부인 요르요스 1세는 덴마크 크리스티안 9세의 차남이고, 엘리자베스 2세의 증조모인 알렉산드라는 크리스티안 9세의 장녀로 부계(그리스 및 덴마크 왕실)로는 7촌관계이다. 덧붙이자면 필립은 역시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인 스페인 국왕 후안 카를로스 1세소피아 왕비 부부와도 친척관계이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빅토리아 여왕의 막내딸 베아트리스 공주의 증손자로, 필립과는 7촌이고(바텐베르크 가문으로는 7촌, 빅토리아 여왕을 기준으로는 8촌), 소피아 왕비는 필립의 큰아버지인 그리스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의 손녀이므로 필립과는 오촌의 비교적 가까운 친척 관계이다. 루마니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인 미하이 1세도 1921년생 동갑이지만 촌수로는 필립 공의 5촌 조카가 된다. 필립 공과 미하이 1세의 어머니인 엘레네 왕대비가 사촌이기 때문.
  • 1985년에 전두환 前 대통령이 필립 공이 당시 국제승마협회 회장자격으로 방한했을 때 체육훈장 청룡장을 수여했다. 이후 필립은 2004년 여왕의 초청으로 영국을 국빈방문한 노무현 前 대통령 환영만찬이 열리자 훈장을 이브닝 드레스에 패용한 채 참석했다.#[44] 훈장 수여를 보도한 당시의 대한뉴스 제1562호 - 대통령 동정
  • 러시아 혁명 와중에 처형당한 니콜라이 2세 일가의 유해가 1991년 공식 발굴되었을 때 신원 확인을 위한 DNA 검사 샘플로 필립의 DNA가 제출되어 화제를 모았다. 필립의 외조모인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가 니콜라이 2세의 아내 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와 자매지간이었기 때문에 모계 유전으로 전달되는 미토콘드리아의 특성상 알렉산드라 황후 본인 및 자녀인 올가, 타티아나, 마리아, 아나스타시야, 알렉세이와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의 외손자인 필립의 미토콘드리아가 일치할 수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후손들 가운데서 미토콘드리아가 모계로 유전된 사람으로서 DNA 검사 당시(그리고 지금도) 생존한 알렉산드라 황후와 가장 가까운 친척이 바로 필립이었다.[45]
  • 젊은 시절부터 운전하는 걸 좋아해서, 90이 넘은 나이까지 랜드로버를 운전했었으나 2019년에 교통사고를 내고도 다시 운전대를 잡은 사진이 포착되어 여론이 들끓자 거의 반 강제적으로 면허증을 반납했다. 아마 남은 여생 동안 운전을 할 일은 없을 듯.
  • 스웨덴의 왕비인 루이즈 마운트배튼의 조카이기도 하다. 루이즈 왕비가 조카며느리인 엘리자베스 2세에 대관식에 참석했는데 자신의 좌석에 "스웨덴 왕비"라고 적혀서 매우 쑥쓰러워 했다는 일화가 있다.
  • 어머니인 바텐베르크의 앨리스와 많이 닮았다. 젊었을 때 잘생겼다는 평가를 들었던 필립처럼 앨리스도 젊은 시절에 미인으로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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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시절의 앨리스
노년의 앨리스. 현재의 필립 공 얼굴이 보인다.
[1] 태어났을 때 이름은 그리스덴마크의 필리포스 왕자 (πρίγκιπας Φίλιππος της Ελλάδας και της Δανίας)[2] 여왕의 남편을 의미함.[3] 부군으로서의 공식적인 업무는 2017년 8월 2일부로 내려놓았다.[4] His Royal Highness The Prince Philip, Duke of Edinburgh, Earl of Merioneth, Baron Greenwich, Royal Knight of the Most Noble Order of the Garter, Extra Knight of the Most Ancient and Most Noble Order of the Thistle, Grand Master and First and Principal Knight Grand Cross of the Most Excellent Order of the British Empire, Member of the Order of Merit, Companion of the Order of Australia, Additional Member of the Order of New Zealand, Extra Companion of the Queen's Service Order, Royal Chief of the Order of Logohu, Extraordinary Companion of the Order of Canada, Extraordinary Commander of the Order of Military Merit, Canadian Forces Decoration, Lord of Her Majesty's Most Honourable Privy Council, Privy Councillor of the Queen's Privy Council for Canada, Personal Aide-de-Camp to Her Majesty, Lord High Admiral of the United Kingdom[5] 직계 왕자는 아니였지만 요르요스 1세의 장손이자 콘스탄티노스 1세의 조카였다.[6] 네 사람 모두 필리포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다. 셋째 누나인 체칠리아(세실) 공주는 결혼 후 헤센 대공가 비행기 추락사고로 요절하고 만다.[7] 두번째 퇴위였다. 필리포스가 태어나기 4년 전인 1917년에 콘스탄티노스 1세의 첫번째 퇴위로 안드레아스 일가는 망명생활을 했으나, 1920년에 콘스탄티노스 1세가 복귀함에 따라 잠시 그리스에 머물게 되었고 그 사이에 필리포스가 태어난 것. 하지만 그리스-터키 전쟁에 패하자 왕실의 인기는 땅에 떨어졌고 혁명파들은 국왕에게 망명생활을 요구했다. 정부는 전쟁의 책임을 물을 책임자를 찾고 있었고, 전쟁에 참여했던 안드레아스 왕자 역시 체포되었는데, 재판 후 그와 일가에게 추방령이 내려진 것이다.[8] 가족들은 어린 필리포스를 상자에 숨겨서 탈출했다고 한다.[9] 결국 1944년 말 모나코에서 사망. 필립 공의 차남 앤드루 왕자의 이름은 안드레아스 왕자에게서 딴 것이라고 한다.[10] 필립 본인과는 5촌 관계이기도 하다. 어머니 앨리스외사촌이다.[11] 넷플릭스에서 방영한 더 크라운에서 묘사한 장례식 장면. 영구차 바로 뒤를 따라가는 금발머리의 소년이 필립이다. 이 때가 하필 나치 독일 집권기라서 나치식으로 장례식을 행하는 장면을 묘사했다. 배경음악은 모차르트레퀴엠 중 '눈물의 날'(Lacrimosa).[12] 실제로 엘리자베스 2세와 필립 공의 결혼식에 참석한 귀족들과 왕족들이 필립 공을 향해 "배신자", "거짓말쟁이" 등 뒷담화를 했다고 한다.[13] 엘리자베스 2세의 전기 드라마인 더 크라운에서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윈스턴 처칠'''이 엘리자베스의 결혼식에서 '''"신랑 쪽 가족들이 왜 다 안 왔는지 알아? 전부 나치하고 결혼했거든. 골수 나치하고!"'''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시즌 2의 1화에서도 마거릿 로즈가 엘리자베스 2세에게 '''"뭐? 그럼 형부의 나치 누나들이 계속 와서 괴롭혀?"'''라고 말한다.[14] 필립의 외할머니 헤센의 공녀 빅토리아제정 러시아알렉산드라 표도로브나 황후의 친언니로 이들의 어머니가 대영제국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 앨리스 모드 메리였고, 외할아버지인 바텐베르크의 공자 루이는 헤센 대공국의 공자 알렉산더가 율리아 하우케와 귀천상혼하여 태어난 아들이었다. 바텐베르크 가문은 제1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영문식 성인 마운트배튼으로 바꾸었는데, 이 때문에 필립이 개명할때 외가의 성을 쓰게 되어 필립 마운트배튼이 된 것이다.[15] 살리카법을 폐지하는 대신 왕위 계승 범위가 축소된 1953년 덴마크 개헌 이전에는 그리스 남성 왕족에게도 덴마크 왕위계승권이 있었다. 앞서 설명했듯 요르요스 1세가 크리스티안 9세의 아들이었기 때문. 이때는 역시 크리스티안 9세의 후손(크리스티안 9세의 장남 프레데리크 8세의 차남 호콘 7세의 후손)인 노르웨이 남성 왕족들도 덴마크 왕위계승권이 있었다.[16] 흔히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이 마운트배튼 왕가가 될거라고 설레발을 치자 메리 왕비가 격노해서 윈저로 고정시켰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는 잘못 퍼진 정보고, 실제로는 루이 마운트배튼 백작이 이게 맞지 않을까 정도로 인터뷰한 뒤 메리 왕비가 제대로 된 사실을 알린 것 뿐이다. 자세한 건 루이 마운트배튼 문서 참조.[17] 그렇지만 결혼으로 인해 외가의 성을 쓰고 있기 때문에 원칙대로 부계혈통의 성씨를 쓴다면 글뤽스부르크를 써야 한다. 글뤽스부르크는 덴마크 왕실 및 노르웨이 왕실의 성씨다. 필립은 원래 그리스 왕족인데, 그리스 왕실(초대 오톤 국왕 제외. 여기는 비텔스바흐 왕가)이 덴마크 왕실의 분가이기 때문에 부계혈통으로 치면 덴마크 왕실과도 친척이다. 필립의 조부인 그리스 요르요스 1세는 덴마크 크리스티안 9세의 차남이었다. 단, 1953년 덴마크 개헌으로 프레데릭 8세의 장남인 크리스티안 10세의 후손에게만 왕위 계승권이 한정되면서 이에 해당되지 않는 그리스 왕실 등의 덴마크 왕위 계승권은 없어졌다.[18] 서양에서도 대게 아버지의 성을 물려 주지만 왕족·귀족의 경우 친척에게 양자로 입적되거나, 데릴사위로 결혼을 하여 가문이 합쳐지는 경우에는 자신의 본성과 입양된 가문의 성을 같이 쓴다. 대표적인 예시가 마리아 테레지아프란츠 1세.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1세, 그리고 마리아 테레지아의 여동생과 프란츠의 남동생이 각 가문 구성원의 전부라서, 형제자매들이 서로 결혼해 겹사돈이 되고 가문 자체가 합쳐져 버렸다.[19] 영국 왕실의 공식 설명.#[20] 마운트배튼윈저 성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손녀 루이즈 앨리스 엘리자베스 메리이다. 아버지 에드워드 왕자백작 작위를 받았기 때문에(에드워드 왕자는 필립 공의 에든버러 공작의 작위를 물려받기로 되어 있다고 한다), 루이즈는 '전하 (Her Royal Highness)', '공주 (Princess)' 경칭을 받지 못했고 성도 쓰고 있다. '전하 (The Royal Highness)'를 받은 왕족은 보통 성을 쓰지 않고, 써야 할 상황이면 영지 이름을 사용한다. ex) 윌리엄 웨일즈, 조지 케임브리지.[21] 조지 6세와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은 정부에서 보낸 서류를 상자에 넣은 다음 꺼내서 함께 들여다 보았는데, 엘리자베스 2세는 그 상자의 열쇠를 자기만 갖고 남편에게 주지 않았다.[22] 예를 들면 1956 멜버른 올림픽 개회식에서 엘리자베스 2세를 대신하여 개회선언을 했다. 한편 인도를 방문해선 영국 식민지 시절 학살자 추모비를 딴지걸다가 여왕이 인도를 나중에 방문할때 극우파들의 야유와 비웃음을 실컷 당하는데 기여했다.[23] 여왕의 막내 아들 레오폴드 왕자의 1남 1녀 중 장녀. 연년생 남동생이 바로 카를 에두아르트[24] 현직이 아닌 전체 군주로 한다면 최장수한 배우자는 필립의 선배(?)이자 장모인 엘리자베스 보우스라이언이다. 무려 101세까지 살았으며 필립이 2023년 생일을 넘어 생존한다면 이를 갱신할 수 있다.[25] 니콜라이 1세의 차남이다.[26] 빅토리아 여왕의 차녀이다.[27] 상대 차량은 기아차였고, 탑승자 2명 모두 가벼운 부상으로 끝났다.[28] 그와 같은 나이대의 비슷한 출신배경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비교적 흔하게 볼 수 있는 선입견들이긴 하다. 그렇다고 괜찮다는 건 아니지만.[29] 그런데 우습게도 자기 아들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에 걸렸다. 또한 영국의 코로나 19의 피해도 심각한 상황.[30] 정확히는 음주단속 적발로 인한 무효처리.[31] 필립의 어머니 바텐베르크의 공녀 앨리스는 선천적으로 난청이 있어 청각장애인이 되었으며, 5개국어를 하였다.[32] <인디펜던트>는 시론으로 왕실 폐지를 주장하는 언론이다. 가디언도 그렇다. 구독자들도 공화주의자가 많은 편.[33] 손주이자 영국 육군 장교 출신인 해리 왕자도 이런 기질을 물려받았는지, 샌드허스트에 있던 당시에 같은 교육생인 파키스탄군 소속 육군사관생도 아흐메드 라자 칸(Ahmed Raza Khan)에게 파키(Paki)라는 멸칭으로 불렀다가 욕을 먹자 전화를 해서 사과했다. 칸 본인이 나서서 "해리는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다"라고 변호해 줬지만 이래저래 영국 왕실은 욕을 잡쉈다. 다만 2018년에 해리 왕자가 아프리카계 미국인메건 마클과 열애 끝에 결혼했다는 점을 보면, 해리 왕자가 인종차별주의자는 아니라는 칸의 설명이 틀리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군복무 이전, 사춘기 시절에 어머니 다이애나 스펜서를 잃고 왕실의 중압감에 시달린 여파로 방황하던 때에 있었던 치기 어린 행위 정도로 보는 게 맞을 것 같다.[34] Princess란 작위 앞에 The가 붙는다는 건 왕자의 딸(종친)이 아닌 왕의 적녀라는 뜻이다. 왕자의 딸(왕의 친손녀)도 Princess 작위와 HRH(전하) 칭호는 가지고 있으나, 앞에 The를 붙이지 않고 부친의 영지 이름을 따서 ‘Princess of~ (~의 공녀)’라는 작위로 불린다. 이는 왕세자(Prince of Wales)의 딸도 마찬가지다. 사실 Princess니 뜻만 놓고 번안하자면 공주라고 봐야 맞겠지만, 우리나라에선 왕의 딸과 왕자의 딸이라는 서열 구분을 하기 위해 공녀라고 번안한다. 이는 대공의 딸도 같다. (ex.헤센의 공녀 알릭스)[35] 혈통을 따지면 필립은 빅토리아 여왕의 현손자이자 요르요스 1세의 친손자로서 친가와 외가가 모두 일국의 왕실이나 공실 출신이다. 게다가 외가쪽으로 가면 외할머니 빅토리아헤센 대공국의 공녀인데다, 외증조모는 영국의 앨리스 공주이며, 심지어 이모할머니가 러시아 제국의 알렉산드라 황후이고, 이모 루이즈가 스웨덴의 왕비라는 어마무시한 가족 관계를 자랑한다. 친가인 그리스 왕실이 몰락만 안했더라면 더 호강하고 살았을 것이다. 드라마 더 크라운에서도 어린 시절의 필립이 재학하던 고든스타운스 스쿨 학생들 중에서 필립이 가장 높은 신분이라는 묘사가 나오고, 다같이 협동하는 활동에서도 ‘그런 건 시종에게 시키지 뭐하러 사서 고생을 하냐’라는 필립의 태도에 불만을 가진 학생이 "어디 꽤나 행세하던 몰락한 백작(Earl)이라도 되나보지?"라며 비아냥거리자 "백작(Earl)이 아니라 왕자(Prince)다."라고 맞받아치는 등, 본인도 왕을 제외한 남성으로서 최고의 신분이라 할 수 있는 Prince 칭호를 가지고 있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 나온다. 또한 이 드라마에서 필립은 본인이 엘리자베스와 결혼할 땐 다들 귀천상혼도 그런 귀천상혼이 없다는 듯이 행동하더니 정작 처제인 마거릿 로즈가 평민인 왕실사진가 암스트롱-존스와 결혼할 때 왕실은 물론 국민들까지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자 ‘그래도 나는 할아버지가 왕, 아버지가 왕자였고 고조할머니는 빅토리아 여왕이였어! 그런데 그 평민에게는 다들 왜 그렇게 관대한거야?’라며 아내에게 불만을 표하는 장면이 있다.[36] 국서라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현재 필립은 무려 350억원 정도의 개인자산을 보유하고 있다. 더군다나 망명생활을 하던 어린 시절은 어디까지나 ‘왕족’ 기준에서 가난하게 살았을 뿐이지 그 당시 일반인 입장에선 상당한 양질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필립 또래의 일반인들은 학교는 커녕 여기저기 피난 가기에 바빴다. 이 당시 엘리자베스 2세가 동생 마거릿 공주와 함께 힘든 생활을 하고 있는 또래 아이들을 위로하는 차원으로 라디오 스피치를 진행했을 정도였다.[37] 이 학교는 필립의 모교인데 매우 억압적인 교칙으로 유명한 학교라 찰스는 이 시절을 수용소 생활이라 회고했다. 그래서 찰스는 자신의 아들들은 전부 이튼 칼리지로 진학시켰다.[38] 결국 성공회 교회의 반대와 내각의 반대, 그리고 법률상의 문제로 결혼을 하지는 못했다.[39] 당시엔 아직 공주였던 여왕이 공항에 도착하자 맞이하기 위해 나온 아프리카 부족장들의 복장이나 훈장 등을 가지고 조롱을 하고, 이에 엘리자베스 2세가 당황하며 제지하는 모습이 나온다.[40] 필리포스의 아버지 안드레아스는 그냥 왕자였다.[41] 요르요스 1세의 아들이자 필립 공에게는 큰아버지인 니콜라오스 왕자의 딸이다.[42] 특히, 켄트 공작과 마리나 공주의 장녀인 켄트의 공녀 알렉산드라가 마리나를 쏙 빼닮아 상당한 미녀였다. 더군다나 마리나의 두 아들들 역시 미인과 결혼했기 때문에 손주들도 하나같이 훈남 훈녀다.[43] 필립의 어머니인 앨리스의 외할머니.[44] 왼쪽 가슴의 흰색 훈장이 청룡장이다.[45] 필립 공의 외증조할머니 앨리스 모드 메리의 남아있는 후손들은 1녀 밀포드헤이븐 후작부인 빅토리아와 3녀 이레네 공녀의 자녀들밖에 없었는데, 이레네 공녀는 아들만 셋을 낳아 미토콘드리아 유전이 단절되었고, 빅토리아에겐 딸이 둘 있었으나 차녀 루이즈는 자녀가 없이 사망하였다. 장녀 앨리스는 1남 4녀를 낳았는데 그 중 4명의 딸은 모두 사망한 상태여서 마지막 남은 아들이었던 필립 공이 미토콘드리아를 대조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되었다. 만약 필립 공마저 없었더라면 필립 공의 조카이자 알렉산다르 1세의 차남 토미슬라브 왕자의 아내였던 마르가리타가 가장 가까운 친척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