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 튀르크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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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어 Der Große Türkenkrieg
터키어 Kutsal İttifak Savaşları
영어 The Great Turkish War
1. 개요
2. 배경: 오스만 제국의 위협
3. 전개
3.1. 개전: 제2차 빈 공방전 (1683년)
3.2. 모레아 전쟁
3.3. 러시아의 참전
3.4. 2차 모하치 전투 (1687년)
3.5. 제국의 역습 (1689 ~ 1690년)
3.6. 슬란카멘 전투 (1691년)
3.7. 아조프 함락 (1695년)
3.8. 젠타 전투 (1697년)
5. 영향
5.1. 오스만 제국의 쇠퇴
6. 관련 문서


1. 개요


16세기에 엄청난 영토 팽창으로 본격적인 전성기를 맞이한 오스만 칼리프[1] 제국은 17세기에 들어 비대해진 관료제와 부패한 예니체리 문제로 점차 쇠퇴의 기조를 보였다. 서유럽이 절대왕정 시기에 군대 개혁을 이룩해 나간 것에 반해 오스만 군대는 쉴레이만의 시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
한편 신성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 제국은 17세기 전반기에 지속된 30년 전쟁의 여파로 국토가 초토화되어 근대화되어 그 여파에서 간신히 회복해 나가고 있었다. 신성 로마 제국이 30년 전쟁 패배의 후유증으로 신음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승전국이 되어 막대한 전리품을 챙긴 이웃 프랑스는 루이 14세 치하에서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었기에 비록 17세기 오스만 제국이 정체되었다 하더라도 30년 전쟁으로 치명상을 입은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트리아에게는 여전히 만만치 않은 존재였다. 오스만의 군대는 여전히 이란사파비 왕조와도 대등히 싸웠고[2] 17세기 후반에 베네치아, 오스트리아, 폴란드, 러시아를 상대로 차례대로 선전했다. 이에 자신감을 찾은 오스만 제국은 메흐메트 4세 제위 시절, 재상 카라 무스타파 파샤의 지휘 하에 제2차 빈 공방전에 나섰다. (1683년) 하지만 실패로 끝나고 말았고, 오히려 오스트리아를 필두로 한 유럽 연합국에게 추격을 당하며 대 튀르크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참고로 영칭을 보면 알겠지만 對 튀르크 전쟁이 아니라 大 튀르크 전쟁이다.
다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오스만 제국이 '''일방적으로 밀리지만은 않았다'''. 당시 유럽에서 인정받던 4개 국가에게 협공 당하면서도 말이다. 특히 폴란드 전선에서는 오히려 반격에 성공하여 우크라이나 중북부까지 진격하였고, 비록 헝가리 방면에서는 속절없이 밀렸지만 그것은 예상치 못했던(당시 평화 조약 유효 기간이었다.) 러시아의 참전으로 정예군을 모하치로 파견하지 못한 핑계가 있다. 그리고 그 러시아의 침공도 1차, 2차까지는 막아 냈다. 다만 젠타 전투 이후 오스만 군대가 완전히 밀리며 결국 아조프는 함락되었다. 다만 10여년 후 일어남 5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아조프를 회복한다. 베네치아에게 빼앗긴 모레아도 20년 후 되찾는다.
그런데 기독교 연합국 쪽도 튀르크와의 전쟁에만 전념한 것은 아니었는데, 오스만 제국의 동맹인 루이 14세가 대 튀르크 전쟁을 틈타 신성 로마 제국의 뒤통수를 갈기며 9년 전쟁을 일으키는 바람에 신성 로마 제국과 스페인은 발칸 반도와 라인강에서 동시에 두 전쟁을 수행해야만 했다. 이번에도 오스만의 오랜 동맹국인 프랑스가 큰 역할을 한 것이다.
전쟁은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귀결되었다. 여담으로 이 전쟁에서 체결된 신성 동맹은 러시아가 서유럽 국가들과 동맹을 맺은 첫번째 전쟁으로, 루스 차르국이 유럽 사회에 편입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차르는 그 유명한 표트르 대제. 다만 러시아는 1700년에 와서야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맺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아조프를 획득하였다. 또한, 당시 오스트리아 군에서 활약한 장군 중에서는 사부아 공자 외젠이 있었다.

2. 배경: 오스만 제국의 위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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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83년: 영토 상으론 거대한 오스만 제국 '''
쉴레이만 대제 시기에 모하치 전투제1차 빈 공방전, 프레베자 해전 등으로 유럽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오스만 제국은 몰타 공방전과 레판토 해전으로 잠깐 성장세가 멈추는 듯 했지만 재차 정복 활동을 개시하였다. 재건된 오스만 해군은 프랑스 해군을 격파하고 유럽 각지[3]에 상륙, 약탈과 납치를 자행하여 스페인부터 스웨덴까지 여러 나라의 공분을 샀다.
게다가 16세기 유럽의 패권국이던 스페인 제국도 네덜란드 독립전쟁, 잉글랜드와의 전쟁, 30년 전쟁, 프랑스와의 전쟁, 포르투갈 독립 전쟁을 겪으며 쇠퇴했고, 프랑스는 프롱드의 난으로 바빴던데다 16세기부터 오스만의 동맹이자 주요 무역 상대였다. 이러한 국제 정세에 호응하듯, 17세기 전반에 내각이 부패로 얼룩지며 쇠퇴하던 오스만 제국은 쾨프륄뤼 가문이 재상직을 독점하면서 군대가 개혁되고 관료들의 기강이 잡히면서 5차 오스만-베네치아 전쟁 (1645년 ~ 1669년)에서 24년간의 혈전 끝에 숙적 베네치아를 물리치고 크레타를 정복했다.
이후 4차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 (1663년 ~ 1664년)에서 현재의 슬로바키아 남부, 3차 오스만-폴란드[4] 전쟁 (1672년 - 1676년) 이후 포돌리아(우크라이나 중부)까지 점령하는 기염을 토하였다.[5]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폴란드를 협박하여 동부 우크라이나를 얻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패권을 넣고 벌인 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은 무승부로 끝났는데, 드네프르 강이 양국의 국경선이 되었고 드네프르 강 하류에 거주하는 카자크는 양국이 공동으로 관리하게 되었다.

3. 전개


오스트리아-베네치아-폴란드-러시아의 참전

3.1. 개전: 제2차 빈 공방전 (168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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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 무스타파 파샤의 지휘로 무려 15만에 달하는 오스만 대군이 빈을 두번째로 포위하였으나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군주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이끌고 온, 윙드 후사르를 필두로 한 군대에 무너지면서 함락에 임박하였는데도 철수하야만 했다.
여담으로 그해 9월 18일 6시에 이루어진 폴란드-독일 기병대의 돌진은 유럽 역사상 가장 큰 기병대 돌격이었다. 그중 후사르는 3천여명 이었다. 전투의 자세한 내막은 제2차 빈 공방전 문서 참고


3.2. 모레아 전쟁


15년 전 크레타의 상실을 기억하던 베네치아는 2차 빈 공방전에서 오스만 군대가 패배하였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신성 동맹에 가입하였고 함대를 출동시켰다. 베네치아 군은 15세기 중반에 베네치아 령이었던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모레아를 회복하였고 더 나아가 16세기까지 점유하던 에게 해의 섬들을 재정복, 동 지중해의 해상권을 한세기 반만에 회복하였다.
그 와중에 베네치아 군이 아테네의 오스만 수비군과 싸우며 튀르크 측의 화약고였던 파르테논 신전에 대포를 명중시켜 당시까지만 해도 고대 그리스 시대의 원형을 상당히 잘 유지하고 있던 2000년된 신전을 파괴하였다.

3.3. 러시아의 참전


한편, 오스만 제국은 대반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하지만 헝가리와 폴란드에 파견할 정예군을 파견할 준비가 끝났을 무렵, 러시아가 전쟁에 이익을 취할 목적으로 참전하였다는 소식이 콘스탄티니예에 닿았다. 3차 러시아-튀르크 전쟁 이후 바르치사라이 조약에서 드네프르 강을 국경으로 정하며 20년간의 평화를 약속한 바 있어 크림 방면은 안심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큰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유사시에 술탄 자리까지 배출할 수 있는 동맹국인 크림 칸국이 위험에 처한 것을 괄시할 수 없었던 조정은 정예군의 대부분을 아조프로 파견하였다. 오스만 반격 부대의 대부분이 동방으로 빠지면서 오스트리아 군대는 더욱 수월하게 헝가리를 정복하고 여세를 몰아 세르비아까지 진격하게 되었다.

3.4. 2차 모하치 전투 (168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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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모하치 전투의 배로 갚아주다'''
오스만 제국이 영구적으로 헝가리 상실, 오스트리아의 헝가리 지배 시작.
결정적으로 패배한 후 메흐메트 4세는 책임을 지고 하야하였다. 그리고 술탄으로 즉위한 그의 이복 동생 쉴레이만 2세는 인도의 무굴 제국에 도움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당시 무굴의 알람기르 1세 역시 마라타 동맹과의 데칸 전쟁을 치르느라 지원군을 파견하지 못하였다.

3.5. 제국의 역습 (1689 ~ 1690년)


쉴레이만 2세와 파즐 쾨프륄뤼
크림 전역에서 러시아를 관광시킨 오스만 정예군은 발칸 반도로 복귀하여 세르비아와 불가리아로 밀고 내려오는 오스트리아군을 상대하여 선전하였다.

3.6. 슬란카멘 전투 (1691년)


와지르(재상) 파즐 무스타파의 전사와 베오그라드 함락

3.7. 아조프 함락 (1695년)



3.8. 젠타 전투 (16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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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스만 제국의 전의를 완전히 꺾은 대회전 '''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합스부르크 군대에 대패.

4. 종전: 카를로비츠 조약



5. 영향



5.1. 오스만 제국의 쇠퇴


당장 헝가리를 한방에 잃어버리고 대유럽 전선이 베오그라드 라인까지 쭉 밀려 내려온 파급력이야 강했지만, 의외로 당시에는 이 전쟁이 작금의 세력 균형을 넘어서 장기적인 관점에서 오스만 제국의 국운, 나아가 크게 보면 동서양간의 군사적 경쟁력 자체의 격차를 쐐기박았다 할 만한 큰 의미는 없었다. 이후 18세기 후반까지 오스트리아, 러시아, 베네치아에서 1대1로 싸웠을 때 오스만 제국은 여전히 승리하거나 균형을 유지하는 모습을 보이며 (사부아 공자 외젠이 지휘한 1716년 - 1718년의 전쟁 제외) 아직은 강대국으로서의 국력이 건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베네치아에게 뺏긴 모레아, 러시아에게 뺏긴 아조프를 모두 15년도 안되어 회수하고 오스트리아에게 뺏긴 세르비아와 보스니아 일부도 1739년의 베오그라드 조약에서 회복하였다. 이후 대 오스만 전선 자체는 18세기 후반 예카테리나 대제 시절 알렉산드르 수보로프 장군이 이끄는 러시아 제국군이 크림 칸국을 합병하고 오스만령 카파를 점령하며 우크라이나 일대에서 오스만의 허리를 부러뜨리기 전까지 사바 강 - 다뉴브 강 - 카르파티아 산맥 - 드네스트르 강 - 우크라이나 선으로 안정화되었다.
오히려 이때 제대로 피를 본 건 처음에는 베오그라드를 넘어 세르비아 본토까지 해방시켜주겠다고 합스부르크 쪽에 약조 받았다가 협상 과정에서 거하게 뒤통수 맞고 갈 곳이 없어진 세르비아계 유민들이다. 이용은 실컷 해먹고 합스부르크 측에서 이들을 통수 치면서 '갈 곳 없으면 그나마 니들 고향이랑 가까운 곳에 정착하면서 오스만 제국 상대로 노략질도 하고 뭐 알아서 해라' 라는 식으로 던져 놓으면서 이들 중 적지 않은 수는 달마티아에 정착, 가톨릭으로 개종하며 현대인들도 익히 아는 먼 훗날의 거대한 개판 학살극의 단초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이 전쟁으로 중부 및 동부 유럽 진출의 교두보였던 헝가리를 영영 상실한 것은 오스만 제국에게 큰 짐이 되었다. 그리고 레판토 해전 때와는 달리 이 전쟁 이후 오스만 해군은 영영 복구되지 못하였다. 에게 해는 1770년의 체슈메 해전에서 지브롤터를 돌아온 러시아 제국의 발트 함대가 오스만 함대를 격파하며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게 된다. 그리고 오스만 제국은 18세기 말 ~ 19세기 초에는 거의 일방적으로 무너지며 '유럽의 환자'로 불리며 조롱당하는 신세로 전락했다.

6. 관련 문서



[1] 쉴레이만 1세의 아버지인 셀림 1세가 1517년, 맘루크 왕조 정복 시에 마지막 아바스 가문의 칼리파를 협박하여 얻어낸 칭호. 이로써 오스만 황제는 전 이슬람의 우두머리가 되었다.[2] 다만 3차 오스만-합스부르크 전쟁에서 에스테르곰을 함락하는 기염을 토했으나 아나톨리아에서의 반란으로 지트비토로크 조약을 맺었다. 따라서 합스부르크 황제는 오스만 황제와 동격이 되었으며, 오스만 제국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연공 납부가 중지되었다.[3] 북유럽 (영국, 아일랜드, 스웨덴, 심지어 아이슬란드까지..)[4] 대홍수 이후 쇠퇴하던 중이었다.[5] 다만 호틴 전투에서 호되게 패하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