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튀르크 전쟁

 

Russo-Turkish War
1. 개요
2. 제1차 전쟁 (1568-1570): 오스만 제국의 실질적 승리
3. 제2차 전쟁 (1571-1574): 루스 차르국 승리
4. 제3차 전쟁 (1676-1681): 무승부
5. 제4차 전쟁 (1686-1700): 루스 차르국과 신성동맹의 대승리
6. 제5차 전쟁 (1710-1711): 오스만 제국의 승리
7. 제6차 전쟁 (1735-1739): 무승부(실질적으로 러시아 우세인 상태에서 휴전) → 니시 조약
8. 제7차 전쟁 (1768-1774): 러시아 제국 승리 → 퀴췩카이나르자 조약
9. 제8차 전쟁 (1787-1792): 러시아 제국 승리 → 이야시 조약
10. 제9차 전쟁 (1806-1812): 러시아 제국 승리 → 부쿠레슈티 조약
11. 그리스 독립전쟁 (제10차, 1827-1829): 러시아 제국 승리 → 아드리아노플 조약
12. 크림 전쟁 (제11차, 제1차 동방전쟁, 1853-1856): 오스만 제국 승리
13. 제12차 전쟁 (제2차 동방전쟁, 1877-1878): 러시아 제국 승리 → 산 스테파노 조약, 베를린 회의
13.1. 50여만명의 무슬림에 대한 학살 자행
14. 제1차 세계대전 (제13차, 1914-1918)
15. 에필로그 - 소련-러시아 연방과 터키 공화국


1. 개요


러시아-튀르크 전쟁은 16세기부터 20세기 초에 걸친 기간 동안 러시아 제국오스만 제국 사이에 벌어진 도합 13차례의 크고 작은 전쟁들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처음부터 러시아가 오스만과 대등하게 싸운 것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러시아가 세계적인 강대국이지만 오스만의 전성기인 16세기까지만 해도 러시아는 고작 변방의 가난한 소국에 불과했다. 17세기 말에도 러시아는 오스만 변방의 타타르족들의 노략질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오스만 술탄에게 침략당하지 않으려고 공물을 바치는 약소국이었다.[1] 특히 오스만 제국과 그들의 신하국인 크림 칸국은 심심하면 러시아인을 2~3만 명씩이나 노예로 잡아가 오스만의 노예 공급처라 할 정도였다.[2]
하지만 표트르 대제 이후 급격한 서구화를 이룬 러시아의 군사력은 일취월장하여 18세기부터는 튀르크는 러시아의 호구가 된다. 서구화되어 강력해진 러시아는 전근대적 제도를 유지하다가 약체화 된 튀르크를 계속 털었고, 한때 오스만의 영토였던 캅카스, 흑해 연안 등의 넓은 영토는 모조리 러시아가 손에 넣었다.
점차 영국과 프랑스 같은 서유럽 국가들은 이렇게 러시아가 튀르크를 제물로 삼아 지나치게 팽창하는 것을 우려하여 기독교국인 러시아 대신 이슬람 국가인 튀르크를 도왔을 정도. 러시아는 동방 정교회 세계의 수호자를 자처하며, 옛 동로마와 정교회의 본산이었던 코스탄티니예를 얻는 것을 최종목표로 삼아 지속적으로 튀르크를 공략했다.
결과적으로 1차대전으로 러시아 제국이 망하고 소련이 들어서고, 오스만 제국이 망하고 터키 공화국이 건국되면서 이 두 제국의 악연은 끝나게 된다. 이후 국제사회에서 고립되었던 두 국가는 동병상련으로 냉전 때까지 그럭저럭 사이좋게 지냈다.
두 제국이 이렇게 오랫동안 충돌한 이유에는 종교 및 역사의 명분과 지리적 특성이 강하게 작용한다. 먼저 러시아는 정교회를 국교로 삼고 '제3의 로마'이자 동로마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였다. 그런데 오스만 투르크는 그 동로마 제국을 무너뜨리고 동로마의 수도이자 정교회의 성지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그대로 차지했으며, 오스만 역시 이에 따라 '제3의 로마'이자 동로마 제국의 후예를 자처했다. 이러한 명분의 충돌이 일어난 것. 그런 측면에서 러시아 입장에서는 이교도 오스만이 '힘으로 빼앗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탈환'하려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러시아는 대외 확장에 반드시 필요한 부동항을 갈망했는데, 러시아의 영토 중 가장 기후가 온난하고 항구 이용에 방해가 되지 않는 지역이 바로 흑해 연안이었다. 하지만 흑해는 막혀있는 바다이기 때문에 흑해 연안에서 대서양, 인도양 등 대양으로 진출하려면 오스만이 차지한 콘스탄티노폴리스와 보스포루스 해협을 반드시 확보해야 했다. 오스만 역시 러시아의 팽창을 저지하고 유럽과 아시아에 걸친 영토를 유지하려면 지리상의 요충지이자 수도였던 이곳을 반드시 지켜야 했기 때문에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2. 제1차 전쟁 (1568-1570): 오스만 제국의 실질적 승리


러시아 제국의 전신인 루스 차르국(1547-1570)과 오스만 제국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군사적으로는 오스만 제국이 패배했으나 러시아의 피해가 막심했기에 실질적으로는 승리하였다. 결국 러시아는 테레크 강[3] 연안의 요새를 자진철거하는 한편, 아스트라한에 무슬림 상인 내왕을 허용하여야 했다.

3. 제2차 전쟁 (1571-1574): 루스 차르국 승리


오스만 제국의 속국인 크림 칸국루스 차르국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러시아가 승리하여 크림 칸국의 주 민족이던 타타르 인들은 모스크바 일대에서의 영향력을 상실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의 손실도 엄청나서 수도인 모스크바크렘린성 바실리 성당을 제외한 모든 건물이 완전히 파괴되고 10만 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노예로 끌려가는 등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영문 위키백과에서는 러시아-크림 전쟁(Russo-Crimean Wars)으로, 다른 전쟁은 러시아-오스만 전쟁으로 다르게 묶어두었다. 그도 그럴 게 이 전쟁에서는 오스만 제국이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4. 제3차 전쟁 (1676-1681): 무승부


루스 차르국과 오스만 제국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무승부로 끝났고 바흐치사라이[4] 조약을 통해 루시와 오스만 제국 간의 경계는 드네프르 강으로 확정되었다. 1683년의 제2차 빈 포위로 이어지는 대 전역 중 일부로 본다.

5. 제4차 전쟁 (1686-1700): 루스 차르국과 신성동맹의 대승리


2차 빈 포위의 실패 이후, 합스부르크 왕가의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신성로마제국, 폴란드-리투아니아, 베네치아 공화국 등 유럽의 여러 강대국들이 신성동맹으로 루스 차르국과 함께 오스만 제국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다. 오스만 제국이 크게 패하였다.
사실 '크게 패하였다' 정도가 아니라, 제국 역사상 유럽 지방에서 최대의 수모를 맛보았다고 하는 쪽이 더 가깝다. 이전까지 오스만은 유럽에서 수없이 많은 전쟁을 벌였고 패하기도 많이 패했지만, 이 전쟁에서만큼 영토를 크게 빼앗기고 영향력이 줄어든 적이 없었기 때문.
전후 처리를 위하여 카를로비츠[5] 조약을 체결하였고, 조약의 결과로 오스만 제국발칸 반도에 대한 종주권은 그대로 인정받았으나 영향력을 크게 상실하게 되어 쇠락의 계기가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트란실바니아, 헝가리(슬로바키아 포함), 몬테네그로 일대를 획득하였고, 폴란드-리투아니아는 포돌리아(우크라이나 서부와 몰도바 동북부 일대.)를, 베네치아 공화국은 아드리아 해 연안의 달마티아(오늘날의 크로아티아 해안지대) 지방과 그리스펠로폰네소스 반도를 획득하였다. 다만 베네치아에게 뺏긴 영토는 코앞의 영토였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나중에 다시 전쟁을 해서 그 일대를 탈환하였다.
러시아는 카를로비츠 조약에 참여하지는 않고 1700년에 '콘스탄티노플 조약'을 따로 체결하여 아조프를 획득하는데 성공한다.

6. 제5차 전쟁 (1710-1711): 오스만 제국의 승리


루스 차르국과 스웨덴 간의 대북방전쟁[6]의 일부로, 폴타바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한 스웨덴 왕 칼 12세가 오스만에 망명해 러시아를 칠 것을 종용함으로 인해 벌어졌다. 몰다비아의 프루트 강[7] 일대에서 주로 전투가 벌어졌다. 표트르 1세가 친정했으나 1711년 프루트 강 전투에서 오스만군에게 패배하였다. 러시아는 꽤 심각한 피해를 입어 표트르 1세마저 죽거나 사로잡힐 뻔했다.
그래서 이 전쟁은 오스만의 승리로 돌아갔다. 전후 처리를 위해 체결된 '프루트 조약'의 결과, 오스만 제국이 아조프의 영유권을 되찾고 몰다비아 일대의 러시아 요새들을 점거하였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군은 이 정도에서 만족하고 물러났기 때문에[8], 대북방전쟁 전체의 전황은 계속 러시아가 유리했고 결국 러시아는 1721년 뉘스타드 조약으로 스웨덴 제국을 해체하고 발트 해 진출에 성공했다.

7. 제6차 전쟁 (1735-1739): 무승부(실질적으로 러시아 우세인 상태에서 휴전) → 니시 조약


합스부르크 오스트리아와 연합한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전쟁 자체는 러시아에게 우세하게 흘러갔으나[9] 합스부르크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오스만이 베오그라드 조약에서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에게 전쟁을 중단하도록 압력을 넣을 것을 요구해 니시[10]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조약의 결과 러시아는 크림 칸국과 몰다비아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는 대신 아조프를 다시 할양받아 흑해에 다시 발을 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오스트리아 황제는 니시 조약을 주선한 대가로 오스만 제국 영토 내의 기독교도에 대한 보호자로 인정받았다. 이 전투 이후로는 오스만은 더이상 러시아를 이기지 못하기 시작했다.

8. 제7차 전쟁 (1768-1774): 러시아 제국 승리 → 퀴췩카이나르자 조약


우크라이나 남부와 크림 칸국의 문제를 두고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간에 벌어진 전쟁이다. 러시아가 크게 승리하여 퀴췩카이나르자 조약을 체결, 우크라이나 남부와 캅카스 북부, 체르케스 지방을 할양받았으며 오스만 제국의 속국으로 존속해온 크림 칸국을 완전독립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크림 칸국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하고, 1783년에 완전히 합병하였다. 오스만으로서는 최악의 굴욕을 당했다.

9. 제8차 전쟁 (1787-1792): 러시아 제국 승리 → 이야시 조약


크림 칸국의 문제에 대해 오스만 제국이 항의함으로써 시작된, 러시아 제국과 오스만 제국 간의 전쟁이다. 러시아가 또 크게 승리하였으며, 전후 처리를 위해 이아시[11]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의 결과 러시아가 흑해 연안의 에디시아 지방[12]을 할양받았으며,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 간의 흑해 인근 국경선이 드네프르 강에서 쿠반 강[13]으로 이동하였다. 그리고 크림 칸국의 병합을 오스만으로부터 공인받았다.

10. 제9차 전쟁 (1806-1812): 러시아 제국 승리 → 부쿠레슈티 조약


나폴레옹 전쟁기, 1805년 12월 아우스터리츠 전투에서 그야말로 쳐발린 러시아를 확실히 견제하기 위해 프랑스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부추김을 받은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사이에 벌어진 전쟁이다.
러시아가 승리하였으며, 전후 처리를 위해 부쿠레슈티 조약을 체결하였다. 조약의 결과 러시아는 베사라비아[14]를 할양받았으며 다뉴브 강에서의 무해통항권을 인정받았고, 그루지야 서부를 차지하게 되었다.

11. 그리스 독립전쟁 (제10차, 1827-1829): 러시아 제국 승리 → 아드리아노플 조약


그리스 독립전쟁의 일부로서 전쟁이 치러졌다. 러시아가 영국, 프랑스와 친그리스 동맹을 결성하여 오스만 제국과 벌인 전쟁이다. 나바리노 해전[15]에서 동맹국 함대가 대승을 거둔 이후 분노한 오스만이 러시아 상선의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과를 거부하자 이를 명분으로 러시아가 오스만에게 선전포고하였다. 발칸 반도와 캅카스 일대에서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대승을 거두었으며, 결국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였다.
전후 처리를 위해 1829년 9월 아드리아노플 조약을 체결하였으며 조약의 결과 오스만은 그리스의 독립, 혹은 자치를 보장하며 러시아는 아나파와 다뉴브 강 삼각주와 조지아의 포티, 아할치헤와 아할칼라키를 할양받고 일전에 러시아로 편입한 조지아 일대의 소국과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으로 얻은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일대의 영유를 인정받았다. 또한 러시아는 보스포루스 해협다르다넬스 해협의 무해 통항권과 오스만 제국 영내에서의 러시아인의 통상권을 획득하였다. 아울러 몰다비아왈라키아는 형식상 오스만의 속국으로 남되, 독립적인 행위를 할 수 있는 권리를 얻었으며 오스만과 왈라키아의 경계를 다뉴브 강으로 조정하여 오스만의 다뉴브 강 수운 독점을 사실상 폐지했다.[16] 마지막으로 막대한 전쟁배상금과 함께 오스만이 배상금을 완납할 때까지 러시아가 몰다비아와 왈라키아를 관리하며 세르비아에 대한 자치권이 보장되었다.
이 전쟁의 영향으로 그리스가 독립하고, 속주였던 이집트가 자치권을 획득하자[17] 오스만 제국 내에서 개혁하자는 여론이 형성되었고, 그 결과 탄지마트(은혜 개혁)를 단행하게 된다.

12. 크림 전쟁 (제11차, 제1차 동방전쟁, 1853-1856): 오스만 제국 승리


항목 참조. 초기에는 러시아가 우세했으나, 후에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한 영국, 프랑스 연합군한테 크게 패하여 오스만과 영국, 프랑스에 많은 것을 양보해야 했다. 오스만의 승리라고는 하지만 크림전쟁하면 사람들이 거의 영불연합군vs러시아로 인식하는 것에서 보이듯이 오스만은 도저히 러시아를 막아내지 못해 영국과 프랑스에게 살려주세요 의존하는 모습을 보이며 이젠 정말 국제 파워게임에서 그냥 먹잇감으로 전락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러시아도 이 전쟁을 통해 서유럽 열강에게 열세라는 것을 보여주었고 패배로 인해 황제권이 약화되고 만다.

13. '''제12차 전쟁''' (제2차 동방전쟁, 1877-1878): 러시아 제국 승리 → 산 스테파노 조약, 베를린 회의


러시아가 세르비아, 루마니아, 몬테네그로, 불가리아 독립군과 함께 오스만 제국과 벌인 전쟁이다. 19세기 중반 이후 확산된 범슬라브주의에 입각하여 촉발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적개심에 의해서 벌어졌다. 러시아 제국(諸國)이 크게 승리하여 각국이 영토를 확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때의 패배로 동유럽 영토를 사실상 전부 상실하고 만다.
최초 전후 처리를 위해 1878년 3월에 산 스테파노 조약[18]을 통해 자신들의 영토를 크게 넓혔으나 러시아의 확장을 경계한 영국[19], 프랑스의 반발과 독일 제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조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베를린 조약을 통하여 전후 처리를 마무리하였다.
불가리아 공국은 독립은 하였으나 영토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여전히 오스만 제국의 종주권 아래에 있어야 했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루마니아는 독립국 인정은 되었으나 일부 할양받은 영토를 돌려주어야 했다. 한편 영국은 중재의 댓가로 키프로스의 관할권을 획득했으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 대한 사실상의 지배권을 획득한다. 오스만 제국은 동부 루멜리아와 마케도니아만을 반환받았다.

13.1. 50여만명의 무슬림에 대한 학살 자행


이 전쟁 시기에 불가리아에서는 러시아군에 의해, 전쟁 후에는 불가리아인에 의해 튀르크인, 포마크인, 외뤽 (튀르크계 유목민) 등등 무슬림에 대한 학살이 자행되었으며, 곳곳에서 강제개종 및 인종청소를 목적으로 한 강간이 자행되었다.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50여만명의 무슬림들이 학살되었으며, 학살과 약탈을 피해 거의 100만에 달하는 불가리아 튀르크인들이 이스탄불로 몰려들었으며, 이들은 오늘날 에디르네, 이즈미르를 중심으로 터키 서부지방에 주로 거주하는 불가리아계 튀르크인들의 조상이 되었다. 오늘날 불가리아에는 9% 정도의 튀르크계 무슬림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크르잘리를 중심으로 남부 불가리아에 모여서 거주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발칸 반도의 새로운 민족주의적 불안은 20년 뒤 발칸 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제1차 세계 대전/배경 항목도 참고.
더불어 이 학살이 돌고 돌아 아르메니아 대학살 또다른 원인이 되기도 한다. 여기서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오스만으로 돌아가야 했고, 학살에 대한 증오로 이어져 이 학살에 대한 것을 후손들에게 전해줘 아르메니아인들을 죽이지 않으면 우리가 학살당한다고 하여 학살을 벌이고 만다.

14. 제1차 세계대전 (제13차, 1914-1918)


항목 참조

15. 에필로그 - 소련-러시아 연방과 터키 공화국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두 국가는 각각 소비에트 연방과 터키 공화국으로 국체가 바뀌었다. 건국 초기엔 두 국가 모두 외교적으로 고립된 상태여서 비교적 우호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냉전에 들어서면서 터키는 NATO에 가입하고 친미-친서방 성향으로 바뀌며 소련과 대립했다. 냉전 초기에는 터키 해협 위기(Turkish Straits Crisis)라 하여 보스포루스 해협의 통행권 및 관할권을 두고 양국이 군사 충돌할 위기가 닥치기도 했다. 냉전 내내 터키는 대소 전선의 최전선에 있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러시아-터키 관계 문서를 참고할 것.


[1] 이 때문에 러시아에서는 이 당시의 역사는 웬만하면 언급하지 않으려 한다.[2] 그러다 보니 오스만의 백인 노예는 주로 러시아인과 동유럽인이었다. 서유럽은 워낙 강력해서 함부로 싸울 상대가 아니다보니 주로 서유럽의 벽촌을 공격해서 노예로 잡아갔다. 물론 이것도 오스만 제국이 서유럽한테 패한 이후로는 안하고 러시아와 동유럽을 주로 털어먹었다.[3] 북캅카스에 있는 강으로 카스피해로 흘러든다.[4]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세바스토폴 부근에 있는 도시로 크림 칸국의 수도였다.[5] 오늘날의 세르비아 스렘스키카를로브치.[6] 1700년부터 1721년 사이에 발트 해 연안에서 루스 차르국과 스웨덴이 벌인 전쟁.[7] 루마니아 내륙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발원하는 다뉴브 강의 지류로 오늘날에는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국경을 이룬다.[8] 그래서 당시 오스만군의 장군은 전쟁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노한 오스만 황제에게 죽었다...[9] 하지만 합스부르크와의 전쟁에서는 오스만이 승리하여 베오그라드 조약을 통해 자존심 회복을 좀 했다. 사실 이 전쟁은 두 나라가 오스만을 상대로 따로따로 벌인 별개의 전쟁이라 보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10] ниш/Niš, 니스라고도 한다. 오늘날의 세르비아 영토로 프랑스의 니스(Nice)가 아니다. 여담으로 니시 조약은 1922년에도 동명의 조약이 있다.[11] 오늘날의 루마니아에 있는 도시.[12] 오늘날의 몰도바 동남부 일대.[13] 러시아-조지아 국경지대에서 발원하여 흑해의 일부인 아조프 해로 흘러드는 강 [14] 오늘날의 몰도바.[15] 1827년 10월 20일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 남쪽 나바리노 만에서 벌어진 해전.[16] 왈라키아의 영토 중 투르누와 지우르지우, 브러일라 등 다뉴브 강 북쪽의 일부 지역이 오스만의 수중에 있었다. 오스만은 이 지역들에 항구와 동시에 강력한 요새를 건설하여 다뉴브 강의 수운을 독점하다시피 했다.[17] 당시 이집트의 총독이었던 메흐메드 알리가 오스만제국에 협력하는 대신 이집트의 자치권을 약속받았다.[18] 오늘날의 터키 이스탄불 부근의 지명.[19] 당시 수상은 디즈레일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