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빈 공방전
1. 개요
다시는 폴란드가 반복치 않을 실수다.
1683년 7월 17일부터 9월 12일까지, 약 60일 동안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빈 공방전을 일컫는 말. 포위전의 마지막 이틀인 9월 11일부터 12일간 벌어진 이틀간의 대규모 기병전을 따로 '빈 전투'라고 부르기도 한다. 폴란드의 기병대인 윙드 후사르가 활약한 전장으로도 유명하다.왔노라. 보았노라. '''하느님이 이기셨노라.'''(Veni. Vidi. Deus Vicit.)
의외로 국내에서는 인지도가 높지 않지만 도합 20만명 이상의 대군이 치른 대규모의 전쟁이며, 유럽사에 매우 큰 영향을 미친 중요한 전쟁이다. 인류 역사상 최대 규모의 기병전이 벌어진 전쟁이기도 하다. 포위전 격퇴 이후 오스트리아, 폴란드를 필두로 한 신성동맹의 반격이 개시되며 대 튀르크 전쟁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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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17세기 말의 동유럽 정세는 매우 불안해졌다. 1세기 전까지도 감히 맞설 자가 없던 신성 로마 제국은 30년 전쟁의 여파로 주변국의 정세를 살피는 처지가 되어 있었으며, 16~17세기 한때 맹위를 떨치던 스페인과 폴란드-리투아니아 역시 크게 약화되어 있었다. 스페인은 30년 전쟁 패배와 네덜란드 독립으로 세가 크게 꺾였고 폴란드는 대홍수를 거치며 몰락하던 상황이었다.
반면 영국, 프랑스, 스웨덴, 러시아가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고 있었다.[2] 오스만 제국 역시 쉴레이만 1세 사후 곧바로 균열의 조짐이 드러고 있었다. 1차 빈 공방전의 발단이 된 헝가리 왕국의 대부분은 아직 오스만 제국이 손에 쥐고 있었으나 점점 떨어져 나갈 기미가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 오스만의 실권자였던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전성기를 지나 내리막길을 걷는 제국을 부흥시킬 필요를 느꼈고, 또한 느슨해진 제국의 기강을 다잡고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할 필요성도 있었다. 그런 그에게 헝가리의 개신교도들이 오스트리아에 저항해 일으킨 반란은 호재였다.
반란을 일으킨 개신교도들이 오스트리아를 공격해 달라고 요청해 오자, 그 쉴레이만 1세도 어쩌지 못한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을 공격하는 것에 오스만의 수뇌부는 선뜻 내켜하지 않았지만, 호전적인 군주 메흐메트 4세는 이를 반겼다. 결국 오스만 제국은 무스타파 파샤의 명분론에 휩쓸려 합스부르크를 박살내고 헝가리를 완전히 손에 넣어 서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해 다시 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20년 전 빈을 목표로 오스트리아와 벌인 전쟁 중 센트고트하르드에서 패하는 바람에 빈 공격이 좌절된 상황에서 다시 한 번 빈을 목표로 하기 시작한 것이다.
3. 개전과 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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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83년 7월 14일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지휘하는 오스만의 15만 대군은[3] 마침내 다시 합스부르크 제국의 수도인 빈에 당도했다. 그러나 이번의 원정군은 1세기 전과는 그 양상이 달랐다. 당시 빈 성채를 무리하게 들이치려다 병력과 물자만 날려먹고 실패한 사실을 거울삼아, 이번엔 아예 '''성을 포위한 상태로 버텨서 말려죽이기로''' 계획을 세운 것이다. 그리하여 17일부터 포위가 시작되었다. 애초부터 장기전을 염두한 원정이었기에 준비한 물자도 병참도 과거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물론 병력과 화력 역시 1차 때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다. 당시 오스만 제국의 형편에 비추자면 심각한 갹출이었다.
대조적으로 당시 빈의 주둔군은 1만 1천여명, 자원병 5천여명으로 1세기 전보다 더 빈약했다. 비록 1세기 전에 비해 서유럽 전체의 국력이 향상되었다고는 하나, 중부 유럽을 통치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패권은 30년전쟁의 후유증으로 약화 국면에 있었다. 제국의 핵심인 오스트리아에 한정하자면 여전히 강성한 국력을 자랑했지만 그 오스트리아의 사방에 적국이 산재하여 어느 한쪽으로 힘을 편중시킬 수 없었다.[4] 그러나 파사우로 피난간 합스부르크의 레오폴트 1세는 빈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일념으로 성벽 주위의 주택들을 허물어 성벽을 넘어올 것을 대비해 화망을 집중시킬 공터를 만드는 등 철저하게 대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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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교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차 때처럼 격렬한 공방은 없었다. 오스만 군은 애초부터 빈을 말려죽일 심산이었기에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오래 버티는 길을 택했다. 장기간에 걸쳐 튼튼한 포위가 이어졌고 빈 내부의 시민들은 물자난으로 인해 온갖 고초를 겪었지만 그럼에도 필사적으로 저항하다보니 요새는 함락될 기미가 없었다. 빈의 주둔군은 1차 때처럼 자체적으로 적을 물리친다는 목표에 대해서는 체념했지만, 대신 외부로부터의 구원을 믿으며 끈질기게 항전했다. 하지만 8월에 들어서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져 요새벽 또한 무너지기 직전인 곳이 곳곳에 생겨나기 시작했다. 방어군과 시민들 사이에서 굶주림과 피로는 점차 커져만 갔다. 경계 임무 시 조는 자는 즉각 총살이라는 극약조치도 동원했지만 역부족이었다.
한편 외교력이 뛰어났던 레오폴트 1세의 노력으로, 좀 늦게 파견되기는 했지만 마침내 기독교 세계를 수호한다는 명목 하에 신성 동맹의 원군 7만 4천이 파견되었다. 7만의 구원군 중 대다수인 4만 7천은 독일 전역에서 모집된 병력이었고 나머지는 폴란드 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친정을 온 폴란드-리투아니아군 2만 7천이었다. 로렌 공작이 이끄는 구원군 중 일부가 빈 북서쪽 5km 지점까지 진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엔 도시의 심정은 절박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제국군은 15만에 달하는 오스만군의 포위망을 풀지 못했다.
9월, 구원군 본대가 빈 근처까지 도착했다는 소식에 다급해진 오스만군은 총공세를 퍼붓기 시작했다. 포격을 퍼붓고 갱도를 파는 등의 전술은 1차 때와 같았지만, 이번에는 화약의 성능이 좀 더 좋아져 있었다. 갱도에 화약을 매설하고 폭파시키자 빈의 요새벽도 무너지기 시작했다. 별모양 요새 중 뾰족한 부분인 라벨린의 요새벽이 무너져 폭 12m의 폭이 생겼고 오스만군은 이를 통해 요새 내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방어군은 사력을 다해 저항했으나 9월 8일, 결국 라벨린이 오스만군에게 점령당했고 방어군은 도시 성벽까지 무너질 것을 대비해 시가전으로 전환할 태세를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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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빈에게 남은 선택은 콘스탄티노폴리스처럼 도시에 오스만 제국의 월성기가 걸리는 것 뿐. 이렇게 빈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전철을 따라가나 싶었지만 함락 직전인 9월 12일, 폴란드군이 나타나 오스만군을 공격했다. 성을 함락시키느라 정신이 팔려있던 오스만군은 뜻밖의 적에게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패전했다. 적의 지원군은 예상하지 못하고 빈 공격에만 치중해 있었기 때문에 배후가 허술할 수밖에 없었고, 그 배후를 친 선봉이 하필이면 강력하기로 이름난 윙드 후사르였던 것도 컸다. 결국 오스만군은 이번에도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오스만군은 빈 수비군과 유럽 연합군의 병력을 압도했다. 하지만 장기간의 포위전으로 많이 지쳤던터라 병사들의 사기가 저하된데다 장비도 여전히 구식이었다.[5] 화력에서도 열세라 대포가 여전히 유럽 연합군보다 적었고 화기가 부족해 병사들에게 총을 충분히 지급하지 못해 활을 그대로 쓸 정도였다. 게다가 오스만군 내부도 총사령관인 무스타파 파샤가 독선적으로 일처리를 하다보니 장군들의 불만이 컸고 오스만군 휘하의 타타르인들은 강압적인 무스타파를 정말 싫어하여 제대로 협조하지도 않았다.[6] 한마디로 단합력도 최악이었던 것.
반면에 유럽 연합군은 단결이 잘 되어 있었고 사전에 정찰병을 계속 보내어 오스만군의 동향을 철저하게 분석하여 오스만군이 의외로 허술하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공격했으니 승리할 수밖에.
4. 후속전 대 튀르크 전쟁
이번에는 오스트리아도 1차 때처럼 적이 곱게 퇴각하도록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위기를 벗어난 레오폴트 1세는 재빨리 폴란드와 함께 오스만군 추격에 돌입하여 후속전인 대 튀르크 전쟁으로 이어졌다. 레오폴트 1세는 헝가리, 크로아티아, 베네치아, 만토바 등 합스부르크 제국 전역에서 군대를 소집하였다. 또 유럽 각국에 지원군을 요청하여 바이에른 선제후국과 작센 선제후국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국들이 참여하였고, 러시아까지 참여하게 된다. 또 스페인계 합스부르크 가문이 다스리는 스페인 왕국도 여기에 참여한다.[7] 다만 전쟁 좋아하기로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루이 14세의 프랑스는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는데, 한동안 관망하고 있다가 1688년 발칸 반도에서 튀르크와 싸우고 있는 오스트리아의 뒤통수를 갈기며 9년 전쟁을 일으키는 파렴치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결국 오스만은 퇴각하면서도 점령지를 단단히 다졌던 제1차 빈 공방전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퇴각하면서 추격해온 유럽 연합군한테 실컷 얻어맞아 점령지를 상당수 잃고 말았다. 헝가리는 1699년의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오스트리아에게 완전히 귀속되었다. 거기에 폴란드는 오스만에게 빼앗겼던 포돌리아, 베네치아는 펠로폰네소스, 러시아는 아조프를 이 조약을 통해 접수했다.
5. 영향
2차 빈 공방전을 기획했던 오스만 제국의 실권자 카라 무스타파 파샤는 패전 책임을 물어 처형당했다.[8] 그러나 그만한 국력을 각출하고도 실컷 얻어맞아 체면을 구긴 제국은 더 이상 이미지를 만회할 수 없었다. 전쟁을 통해 엄청난 인력과 물자를 상실한 것으로도 모자라 영토마저 축소되고, 사실상 만방에 종이 호랑이임을 알리는 꼴이 되고 말았다. 실제로 오스만 제국이 명백히 쇠퇴하고 있음이 유럽인들의 눈에도 분명해진 것이 바로 이 때부터다.
이후 오스만 제국은 강성해진 북쪽의 러시아 제국이 오스만의 영토를 노리고 침투해오면서 더는 동서로 신경을 돌릴 수 없게 되었다.
오스만을 다시 한번 막아낸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는, 그게 비록 폴란드의 구원 덕분이긴 하지만 아무튼 국위를 한층 떨치고 국내의 분란을 잠재울 수 있었다. 또한 헝가리를 완전히 합병할 수 있었다. 덕분에 신성 로마 제국의 수명도 1세기 이상 연장되었고,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된 뒤에도 오스트리아는 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여담인데 당시 오스만 제국군 전사자들이나 포로들이 가지고 있는 게 커피 원두였는데 오스트리아군들은 이걸 서로 가지려고 싸우다가 몇몇은 칼을 뽑아 싸우다가 서로 다치거나 죽는 일도 벌어졌다! 그만큼 당시 커피 원두는 비싸고 귀했던 물건이었다. 심지어 당시 프랑스가 오스트리아 지원을 외면하는 댓가로 오스만 측에게 받은 보답이 커피 원두였을 정도. 루이 14세가 커피 원두를 준다고 할때 무척 기뻐했다는 일도 있다. 물론 이웃 라이벌 오스트리아가 한방 먹어봐라는 계산도 있었겠지만. 어째든 이때 맛 좀 본 오스트리아에서 커피가 크게 유행하게 되고 이후 유럽 전체가 커피에 빠지게 된다. 유럽인들 입맛에 너무 써서 좀 레시피를 바꾼게 카푸치노이다.
비록 쇠퇴하기 시작했다고는 해도 오스만 제국은 2차 빈 공방전 이전까지는 여전히 악명을 떨치는 대상이었고, 쉽게 싸움을 걸기 힘든 제국이었다. 빈의 어머니들이 아이들을 재우면서 말을 듣지 않으면 '튀르크 악마들'이 와서 잡아먹는다고 겁을 주었다는 일화도 있다. 하지만 1683년의 2차 빈 공방전으로, 이러한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빈을 포위했던 오스만 세력이 어처구니없이 무너진 것은 유럽과 오스만 모두에게 충격을 가져오기에 충분한 대사건이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오스만과 합스부르크 & 유럽 제국 사이의 세력 균형에서 영구적인 반전의 기점이 되었다.
물론 오스만 제국은 여전히 적지 않은 세력을 갖추고 있었으므로 당장 바람 앞의 등불이 된 것은 아니다. 게다가 유럽의 군주들이 함께 힘을 합쳐서 오스만 제국을 압박하기보다는 자기들끼리의 싸움에 더 집중한 탓도 있어서, 오스만 제국은 이후에도 2세기 가까이 그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베네치아에게 뺏겼던 펠로폰네소스 반도는 전쟁으로 다시 되찾기도 하였다. 그러나 유럽에서 상대적으로 평화적인 분위기가 대두하고 러시아 제국의 남하가 본격화된 19세기 후반 이후 결국 세력 구도는 명백하게 오스만에서 유럽 쪽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는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현상유지정책의 영항이 컸다. 즉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면서 되도록 유럽에서는 전쟁을 벌이지 않으려 했고, 그게 어느 정도 먹혀든 것. 다만 빌헬름 2세는 비스마르크와 생각이 달라서 적극적인 확장정책을 추구했고, 그 결과는...
특히 2차 빈 공방전 이후 오스트리아군과 벌인 젠타 전투에서 대패함으로써 오스만은 더이상 유럽의 상대가 아님이 드러났다. 이런 세력구도는 뒤집히지 않은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의 터키와 유럽의 경제, 군사, 기술 차이는 넘사벽이다. 다른 이슬람 국가들도 유럽과의 차이가 넘사벽인것은 마찬가지. 그러다보니 터키는 유럽 연합 가입을 타진하는 등 자기들도 유럽 동네에 끼려고 은근히 눈웃음 치는 중. 다만 오스만 제국 자체는 영토가 줄어들기는 했어도 구국 영웅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등장으로 다른 열강들의 식민 지배를 받지 않고 터키 공화국이라는 신생국가로 탈바꿈한다. 물론 예전의 오스만 제국만큼 유럽을 두려워하게 할 정도가 아니지만.
이 전쟁은 14-17세기동안 중유럽의 최강국이었던 폴란드의 마지막 불꽃이기도 하였다. 오랫동안 폴란드는 이 때 도와 주었던 오스트리아가 나중에 자국을 찢어먹는 데에 한몫 했다고 소비에스키를 욕했지만, 폴란드의 친서방화가 강해지는 지금은 그래도 폴란드가 서구를 위해 크게 공헌한 것이 있다고 다시 소비에스키를 추앙하는 분위기이다.[9]
6.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6.1. 비엔나 전투 1683
이 사건을 배경으로 만든 영화 '비엔나 전투 1683'이 2013년 8월 8일 개봉되었다. 다만 영화에서는 2차 빈 포위를 '종교전쟁' 으로 규정했던 모양이지만, 위의 내용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종교' 적인 색채가 강한 전투는 아니었다는 게 문제. 당시 유럽인들은 '튀르크인' 을 두려워했지 '이슬람' 을 두려워한 건 아니었고, '기독교 세계를 수호하기 위해' 지원군을 보낸다는 식의 말은 기독교 유럽에서 이미 골백번도 넘게 나왔던 구호였다. 물론 종교적인 색채가 아주 없었던 건 아니지만, 지나치게 강조된 듯한 느낌. 또 개봉 이후 평점도 그리 높지 않다(2015년 7월 현재 네이버 영화평점이 4.14.). 사실 CG도 매우 엉성하고, 고증도 별로 좋지 않다. 해외 평가도 좋은 소재 갖다가 망쳐버렸다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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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반지의 제왕
영화판의 경우, 나팔산성 전투의 양상은 2차 빈 포위와 유사하게 돌아가는데, 압도적인 전력을 가진 오크군이 헬름협곡의 성을 포위했었고, 성벽을 화약으로 폭파하고 돌파했었지만, 후에 도착한 로한의 기병대가 언덕에서 돌진하면서 오크들의 패배로 돌아갔기 때문. 다만 원작 소설의 경우에는 로한 보병이 지원하러 온다. 또한 펠렌노르 평원의 전투에서 로한 기병대가 오크군을 격파하는 장면은 윙드 후사르 기병대의 공격을 모티브로 했다.
6.3. 워해머 판타지
워해머 판타지에서 카오스와의 대전쟁에서도 키슬레프 기병대와 제국 기병대의 연합군이 카오스의 군세의 허를 찌르는 것의 모티브가 되었다.
7. 이야깃거리
7.1. 크루아상의 전설
지금도 세계적으로 인기있는 초승달 모양의 빵인 크루아상은 바로 이 2차 빈 포위때 생겨났다고 한다. 그 유래에 대해서는 크게 2가지 설이 있다. 다만 정작 터키에서의 반응은 글쎄.. 터키 요리#s-2.1 항목 참조.
7.1.1. 1번째 설
2차 빈 공방전 당시 오스만 제국의 공성 전법 가운데, 성벽 아래로 갱도를 판 다음 화약을 매설하여 폭파하는 것이 있었다. 그리고 빈 공방전 당시에도 이 전법이 사용되었고 수비군은 이쪽에서도 갱도를 파내려간 다음 적의 갱도를 발견, 막아버리는 식으로 대응하고 있었는데, 때마침 지하실로 밀가루를 가지러 간 제빵사가 갱도를 파는 소리를 듣고 즉시 수비군에 알려 오스만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이 공로로 해당 제빵사는 영예로운 문장을 가게에 내걸 수 있게 되었다. 이에 제빵사는 자신의 업적(?)과 오스만군 축출의 영광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해 오스만 국기와 닮은 초승달 모양의 빵을 개발해 팔기 시작했다. 이 빵을 씹어먹으면서 오스만을 격퇴한 만족감을 느끼라는 것. 때마침 반오스만 정서가 강한 유럽인들에게 큰 호응을 얻으면서 이 빵은 메이저가 되었다.
7.1.2. 2번째 설
폴란드군과 오스만군의 교전 당시 쿨레지스키라는 폴란드인이 결정적인 공훈을 세웠다. 이에 오스트리아에서는 그에게 빈에 살 수 있는 영주권을 부여했고, 그는 이를 기념하고자 카페를 차려 역시 오스만을 상징하는 초승달 모양의 빵을 팔아 명물로 만들었다. 이것을 그 유명한 마리 앙투아네트가 오스트리아에서 프랑스로 시집갈 당시 프랑스 궁정에 전파시켰다고 한다.
7.2. 그 외
별자리 중 방패자리라는 별자리가 있는데, 이는 승리의 주역인 윙드 후사르를 이끌었던 폴란드 국왕 얀 3세 소비에스키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별자리이다.
이 포위전 이후 오스만 제국이 점차 쇠퇴하자 그 이전까지는 동방의 강대한 이교도 제국의 문화를 경탄 어린, 혹은 질시하는 태도로 바라보던 유럽인들의 시선이 점차 이국적이고 오리엔탈리즘적인 환상으로 바뀌어 가기 시작하면서 유럽에 본격적으로 튀르크리 열풍이 시작되었다. 공포의 대상에서 무서울것 없는 존재가 되자 문화 소비자들인 유럽인들이 안심하고 느긋하게 터키 문화를 소비하게 됐다.
[1] 빈 구원 후 100년도 못 되어서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분할에 가담하며 은혜를 원수로 갚았던 걸 농담으로 짚어낸 것.[2] 이 중 프랑스는 원래 강대국이었지만[3] 30만이라고 하지만 과장으로 보며 15만~17만으로 보고 있다.[4] 오스트리아의 제1적국은 오스만이 아니라 프랑스였다. 당시 프랑스 왕 루이 14세는 자연국경설을 내세우며 라인강 서안의 제국 영토를 집어삼키려 하고 있었고 스페인의 왕위도 노리는 등 합스부르크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있었다(당장 프랑스는 가톨릭 국가임에도 신교 제후들 편을 들어 30년 전쟁에 뛰어들었다. 합스부르크를 엿먹인다는 이유만으로.) 거기다 오스만과도 활발한 무역을 전개하며 접촉하고 있었고, 빈 공방전 당시 교황의 지원 요청도 무시했다.[5] 대포 사거리가 빈 수비군보다 떨어져서 빈 수비군의 포격에 오스만군이 큰 피해를 입을 정도였다.[6] 영화 비엔나에서도 타타르인들이 무스타파를 싫어하는게 티가 나서 그의 명령을 대놓고 거부한다.[7] 이거 보면 오스만 제국이 유럽을 얼마나 많이 도발했는지를 알 수 있다. 이 때 유럽 국가들은 서로 싸우고 견제했는데 오스만 제국 족치는 것에 단결을 할 정도이니. 그나마 우방에 가까웠던 프랑스는 족치는 데 참가를 안하고 바라보기만 했다.[8] 사실 실권자 무스타파는 하도 강압적으로 일처리를 하다보니 정적이 많았다. 그래서 정적들은 이를 빌미로 벌떼같이 달려들어 술탄에게 패전의 책임을 물어 처형하자고 했던 것이다.[9] 오스트리아는 폴란드를 분할시킨 세 나라들(프로이센, 오스트리아, 러시아) 중에서 폴란드와의 악연이 그나마 덜한 편이다. 프로이센과 러시아는 가톨릭을 믿는 폴란드인들과 달리 각각 루터교회와 정교회를 믿어서 자신들 치하의 폴란드인들을 탄압하면서 가톨릭 신앙까지 탄압한 반면, 오스트리아는 폴란드와 같은 가톨릭 국가인 관계로 적어도 종교적으로는 자신들 치하의 폴란드인들을 탄압한 적이 없고, 정치적으로도 독일, 러시아와는 달리 유화책을 썼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폴란드와 오스트리아의 사이가 좋다고 보기는 힘들며, 폴란드와의 관계가 괜찮은 독일어권 국가는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룩셈부르크 정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