쾨프륄뤼 가문

 

터키어: Köprülü ailesi
알바니아어: Familja Kypriljoti 또는 Qyprillinjtë
영어: Köprülü family
1. 개요
2. 역사
2.2. 개혁
3. 사드라잠 (대재상) 목록
4. 기타


1. 개요


17세기 후반 오스만 제국의 명문가. 쾨프룰루나 쾨프뤼뤼 등으로도 불린다. 쾨프륄뤼 가문은 본래 알바니아계로 가문 이름은 이 가문의 본관인 알바니아 지방의 '퀴프릴리우(Qyprilliu)' 마을에서 유래되었는데, 지금은 북마케도니아 중부에 위치해 있으며 '벨레스(Veles)'라고 불리고 있다.
황권이 막강하여 귀족 가문이 별로 득세하지 못하였던 오스만 제국 시기에 무려 6명의 대재상 (사드라잠)을 배출한, 제국 역사상 가장 두드러지는 가문이다. 쾨프륄뤼 가문 출신이 재상직을 독점하였던 1656 ~ 1683년의 시기를 '''쾨프륄뤼 시대'''[1]라고 부르며, 메흐메트 4세[2]의 치세와 거의 겹친다. 쾨프륄뤼 출신의 재상들은 17세기 전반에 일명 '여자 술탄 시대'[3]를 거치며 내부로 곪아가던 제국에 대한 여러 개혁을 실시하였다. 따라서 쉴레이만 1세 이후 정체되어 있던 오스만 제국의 중흥기라고도 평가된다.
가문이 배출한 두번째 재상인 파즐 아흐마트는 무려 15년간 (1661 ~ 1676년) 재상직을 맡으며 슬로바키아 남부와 크레타 정복 등 영토 확장을 주도하였다. 특히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을 격파하고 포돌리아 (우크라이나 중부)를 얻은 1672년은 오스만 제국의 영토가 가장 넓었을 시기이다. 하지만 쾨프륄뤼 시대의 개혁은 보수 세력의 반발을 제대로 극복하지는 못하여 임시 방편에 그치는 한계를 보였다. 이후 1683년의 제2차 빈 공방전에서 패배한 책임을 묻는다는 의미로 카라 무스타파 파샤가 처형당하면서 세력이 기울기 시작했고, 잠시나마 쾨프륄뤼 가문과 혈연이 없는 인물이 재상에 오르기도 했다. 그 뒤 대 튀르크 전쟁에서 5번째 재상 파즐 무스타파가 전사하기도 했고, 1710년부터 1711년까지 재임한 쾨프륄뤼자데 누만 파샤를 끝으로 더는 재상을 배출하지 못했다. 후손인 메흐메트 푸아트 쾨프륄리는 터키 공화국의 외무장관을 역임했으며 오늘날에는 터키와 미국에 이들의 후손들이 거주하고 있다.

2. 역사


17세기 중반 ~ 18세기 초반의 오스만 제국사는 동유럽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는데, 그 중심에 쾨프륄뤼 가문이 있었다.

2.1. 메흐메트 4세의 즉위


제국의 국정을 휘어 잡고 있던 태황태후 쾨셈 술탄과 메흐메트 4세의 모후 투르한 하티제 술탄 사이에서 권력다툼이 일어났고 쾨셈 술탄은 메흐메트 4세를 폐하고 메흐메트 4세의 이복 형제인 쉴레이만 황자[4]를 새 황제로 옹립하려는 정변을 계획하다가 1651년 투르한 술탄 측에게 살해 당한다.
투르한 술탄은 어린 아들을 보좌하는 섭정을 행하게 되었으나 자신에게 정치적 식견이 없음을 인지하고 국정을 쾨프륄리 메흐메트 파샤에게 넘긴 후 본인은 공공건축 사업에 몰두하게 된다.
술탄 메흐메트는 사냥에만 몰두하였고 모든 국정은 재상이 알아서 처리하게 되었다. 오스만 제국에게는 다행히도 쾨프륄뤼 메흐메트 파샤는 상당히 유능하고 정직하며, 야심찬 인물이었다.

2.2. 개혁


메흐메트 파샤는 공직자의 뇌물 수수를 강력히 금지하였고, 예니체리의 군기를 바로잡았다.

3. 사드라잠 (대재상) 목록


  • 1. 메흐메트 파샤 (1656 ~ 1661년)
  • 2. 파즐 아흐마트 (1661 ~ 1676년)
  • 3. 카라 무스타파 파샤 (1676 ~ 1683년)
  • 4. 파즐 무스타파 (1689 ~ 1691년)
  • 5. 후세인 파샤 (1697 ~ 1702년)
  • 6. 누만 파샤 (1710 ~ 1711년)

4. 기타


스타크래프트 시리즈의 배경이 되는 가상의 행성계 코프룰루 구역의 이름은 이 쾨프륄뤼 가문에서 따왔다.

[1] Köprülüler Dönemi[2] 오스만 역사상 쉴레이만 대제 다음으로 장기 재위한 황제이다.[3] Kadınlar Saltanatı. 휘렘 술탄(록셀라나), 미흐리마 술탄, 누르바누 술탄, 사피예 술탄, 쾨셈 술탄, 투르한 하티제 술탄으로 이어진 하렘의 태후와 황녀들의 국정 개입 시기.[4] 훗날의 쉴레이만 2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