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덕황후 장손씨

 


'''당나라의 황후
文德順聖皇后 | 문덕순성황후
'''
'''시호'''
문덕순성황후(文德順聖皇后)
''''''
장손(長孫)
'''출생'''
601년
'''사망'''
636년
'''재위'''
'''당나라의 황후'''
626년 ~ 636년
'''부군'''
태종
'''부친'''
장손성(長孫晟)
1. 개요
2. 생애
3. 외척에 대한 경계
4. 당 태종이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을 도움
5. 죽음
6. 죽음 이후
7. 당 태종과의 자녀관계
8. 이외의 자녀
9. 참고문헌
10.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11.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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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문덕순성황후 장손씨
(文德順聖皇后 長孫氏, 601년 ~ 636년)
당나라의 당태종 이세민의 황후이자 당고종 이치의 모후이다. 당대의 현명한 황후의 표본으로 일컬어진다.

2. 생애


그녀의 아버지는 수나라의 장군인 장손성(長孫晟)이었고, 어머니는 공무원인 고경덕(高敬德)의 딸인 고씨 부인이었다. 그녀는 공부를 좋아했고 바른 행실을 가졌다고 전해지는데 613년에 이연의 둘째 아들인 이세민과 결혼했다. 그 당시 이세민은 15세였고 장손황후는 12세였다.
617년, 이연이 수나라에 대항하여 반란을 일으키고 618년 황제에 오르자, 이세민은 진왕에 책봉되었다. 이에 그녀는 진왕비가 되었다. 곧 태자 이건성과 이세민은 서로 경쟁하게 되었고, 그녀는 시아버지인 당고조를 조심스럽게 모시면서 이건성과 이세민의 사이를 좋게 하려 했다고 전해진다.(두 형제는 결코 사이가 좋아지지 않았다.)[1]
이후 현무문의 변 이후 황태자비가 되었다가 태종이 황제가 되자 황후가 되었다. 황후로서의 그녀는 아주 훌륭했는데 한 가지 예로 황태자 이승건의 유모가 황궁에 물건이 부족하다고 더 많은 물건을 요구하자 그녀는 "황태자가 걱정해야 하는 것은 덕을 갖추지 못하는 것과 명예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물건이 적다고 왜 걱정하는가"라고 대답했다는 일화가 있다.
또한 그녀는 '''자신을 모시던 시녀들과 환관들에게 화를 거의 내지 않았다고도 전해진다.'''
그녀는 종종 역사 이야기를 하며 당 태종이 더 좋은 정치를 할 수 있도록 도왔다. 때때로 당 태종은 시녀들이나 환관들에게 이유 없이 화를 냈다. 그때 그녀는 화가 난 척을 하며 그들을 심문하고 감금했을 것이다. 그녀는 태종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을 것이고, 시녀들이나 환관들을 위해 변호를 하며 부당한 처벌을 하지 말 것을 빌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후궁들이나 시녀들이 병이 들 때마다 문병하고 자신의 물건을 그들의 치료를 위해 썼다고 전해진다.

3. 외척에 대한 경계


태종은 종종 황후에게 자신이 직면한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 물었지만 그녀는 항상 거절하며 자신이 할 일이 아니라고 했다. 어느 날, 이세민이 황후의 오라버니인 장손무기를 승상으로 삼으려 했을 때, 황후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 오라버니와 조카들이 권력을 가지길 바라지 않습니다. '''한나라의 여후(呂后)를 보십시오. 저는 황제 폐하께서 제 오라버니를 승상으로 삼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태종은 황후의 말을 듣지 않고 627년에 장손무기를 승상으로 삼았다. 그러나 장손무기는 타락하여 정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고 628년 봄에 당 태종은 장손무기를 승상 자리에서 물러나게 했다.

4. 당 태종이 간언을 받아들이는 것을 도움


또한 그녀에 대한 가장 유명한 일화로 당 태종에게는 위징(魏徵)이라는 승상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는 회의에서 돌아온 후 위징을 죽이고 싶다고 말했다. 황후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그는 "위징은 나를 항상 공식 석상에서 모욕하오!"라고 말했다. 황후는 침실로 물러나고 조복 차림으로 황제 곁에 왔다. 당 태종이 놀라서 무슨 일이냐고 하니 황후가 '''가장 어진 황제들은 충신의 말을 따른다고 했습니다. 위징은 폐하께서 어지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렇게 간언했던 것입니다. 어떻게 축하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했다. 당 태종의 분노는 누그러졌고 그는 위징을 벌하지 않았다.[2]

5. 죽음


그녀는 심한 천식에 시달렸었는데 634년부터 그녀의 병세는 심해졌고, 당 태종은 그녀를 낫게 하기 위해 의사를 부르는 것은 물론 불교와 도교 승려들까지 동원하며 사면령을 내렸다. 그녀는 당 태종이 불교와 도교에 찬성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고, 잦은 사면령을 부당하다고 여겼었고, 그 모든 것들을 거절했다. 죽음이 가까워지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장손씨 집안 사람들은 자질 덕이 아니라 저의 덕으로 높은 지위와 많은 녹을 누리니, 망하는 것 또한 쉬울 것입니다. 장손씨 집안을 지키시려면 그들에게 높은 지위를 내리지 마십시오. 생전에 저는 어느 누구에게도 도움을 주지 못했으니, 저의 죽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해치지 마십시오. 저의 무덤에 봉분을 쌓아 노동력과 자원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군자들을 가까이 하시고 소인들을 멀리 하십시오. 충언에 귀를 기울이시고 아첨을 멀리 하십시오. 부역을 줄이시고 사냥을 하지 마십시오. 만약 나라가 잘 다스려진다면 죽어도 저는 여한이 없습니다. 아들과 딸들을 부르지 마십시오. 그들이 슬퍼하는 모습을 보면 저 역시 슬퍼질 뿐입니다."

그녀는 결국 636년에 죽었다. 태종은 장손황후가 죽은 뒤 신하의 간언을 잘 듣지 않는 등 약간의 변동을 거치기도 했다.

6. 죽음 이후


황실은 그녀가 쓴 30권의 여칙(女則)을 편찬했다. 당 태종이 그것을 읽었을 때 그는 무척 슬퍼했다. 당 태종은 이렇게 말했다.

"황후가 쓴 이 책은 오래도록 본보기가 될 것이다. 내가 궁궐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더 이상 그녀의 충언을 들을 수가 없다. 나는 나를 도와준 사람을 잃었고, 무척 그리워한다."

당 태종은 649년에 사망한 후 문덕황후와 합장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죽은 뒤에는 당 태종은 새로운 황후를 들이지 않았다.

7. 당 태종과의 자녀관계


  • 장남 : 상산왕 폐태자 이승건(常山王 廢太子 李承乾)
  • 차남 : 위왕 이태(魏王 李泰)
  • 장녀 : 장락공주 이여질(長樂公主 李麗質)
  • 삼남 : 당나라 제3대 황제 고종 이치(高宗 李治)
  • 차녀 : 성양공주(城陽公主)
  • 삼녀 : 진양공주 이명달(晉陽公主 李明達) - 요절
  • 사녀 : 신성공주(新城公主)

8. 이외의 자녀


화번공주들이다.
  • 큰양녀 : 홍화공주(弘化公主)
- 토욕혼왕 낙갈발(諾曷鉢)에게 하가(下嫁)
  • 작은양녀 : 문성공주 이설안(文成公主 李雪雁)
- 토번 제1대 군주 송첸캄포에게 하가(下嫁)

9. 참고문헌


임사영, 류준형 옮김, 『황제들의 당제국사』, 푸른역사, 2016.

10. 대중매체에서의 등장


무미랑전기에서 배우 장정함이 문덕황후 역할을 맡았다. 정완언(무미랑전기)와 1인 2역.
자세한 내용은 문덕황후(무미랑전기)로.

11. 둘러보기





[1] 또한 고조의 여러 비빈들에 대해서는 겸손하고 순종하는 태도를 보여 진왕의 장점들을 역설하며 비빈들의 지지를 호소했다. 그녀의 활동으로 이세민이 일부 비빈들의 지지를 얻게 되었지만, 이 효과에 대해서는 그다지 큰 편은 아니었다. 임사영, <황제들의 당제국사>[2] 참고로 위징은 현무문의 변 당시 황태자이던 이건성 측 사람으로 태종과 싸웠던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