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호노세키 사건
美保関事件
1. 개요
1927년 미호노세키 등대 앞바다에서 발생한 일본 해군의 해양사고. 무리한 훈련과 과도한 개함우월주의가 원인이라 토모즈루 사건, 제4함대사건과 대비된다.
2. 경위
일본 해군은 1922년 워싱턴 군축조약에 따라 배수량을 제한받자, 이를 병력의 질로 메꾸려고 전 함대에 혹독한 훈련을 명령하였다. 당시 연합함대 사령장관 가토 히로하루(加藤寛治) 대장이 '''"훈련에는 제한이 없다."''' 하는 명령[1] 을 하달하자, 1926년 11월부터 해군 전체가 무리한 훈련에 시달렸다.[2]
그러던 중 1927년 8월 24일 시마네현 마쓰에시 미호노세키 등대 앞바다에서 대규모 야간 뇌격훈련을 실시하였다. 오자와 지사부로 중좌는 당시 상황을 보고 제 27ㆍ28구축대에 뭔가 큰일이 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훈련에 참가한 함대 편제를 재검토해달라고 가토 사령장관과 참모장 다카하시 산키치(高橋三吉) 소장에게 요청했으나 묵살당했다. 훈련은 계획대로 실행되었고 그의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훈련이 실시되자 소규모 함선사고들이 잇달아 일어나던 중, 센다이급 경순양함 2번함 진츠(神通)와 모미급 구축함 와라비(蕨), 센다이급 3번함 나카(那珂)와 모미급 구축함 아시(葦)가 훈련 도중 다중충돌을 일으키는 대형사고를 내고 말았다. 당시 현장에서 훈련하던 카코ㆍ후루타카ㆍ이세ㆍ키누ㆍ아부쿠마ㆍ유라ㆍ타츠타 등이 사고현장에서 수습에 나섰으며, 수상기와 호쇼의 함재기들도 사고에 휘말린 수병들을 구조하기 위해 분주하게 돌아다녔다.
진츠는 와라비와 충돌하여 대파되었으며, 구축함 와라비는 침몰하여 92명이 사망했는데, 희생자 중에는 함장 이가라시 메구미(五十嵐恵) 소좌(순직 후 중좌로 추서)도 있었다. 모미급 구축함 아시는 나카와 충돌하여 나카는 중파, 아시는 대파되어 28명이 사망했다.
3. 결과
사고함 진츠와 나카는 이 사고 때문에 마이즈루 항에서 수리, 개장되었다.
8월 26일, 사건은 해군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연합함대 사령장관 가토 히로하루는 기자들에게 자기 책임이 아니라고 해명하느라 바빴고, 쇼와 천황도 사건에 관한 소문을 듣고 사건경위 조사 겸 희생자 위문을 하라고 시종무관들을 파견했으며, 그달 30일에 해군대신 오카다 게이스케(岡田啓介)에게 보고를 받았다. 9월 1일 현장에서 합동장례가 실시되고 15일 침몰한 와라비는 연합함대에서 제적되었다.
10월 7일, 처분이 시작되었다. 해군성 법무국은 당시 진츠의 함장 미즈시로 케이지(水城圭次)[3] 대좌를 업무상 과실치사, 함선 상실 혐의로 기소하고 요코스카 진수부에서 재판하기로 결정하였으나, 미즈시로 대좌는 재판 전날인 12월 26일 자택에서 모든 책임을 내가 지고 죽겠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해군성은 미즈시로 대좌를 소장으로 추서하려고 했지만 유족들이 이를 거부했다.
당시 미국에 체제 중이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대좌도 이 사건을 전해 들었는데, 보좌관이 "굳이 자살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하고 말하자, "죽더라도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우리 무사도의 근본이다. 그런 생각이 마음 깊이 깔려 있는 사람이야말로 참군인이라네." 하며 나무라기도 했다.
사고책임이 있다고 기소된 제 27구축대의 사령과 함장들에도 근신처분을 받았지만, 미즈시로 대좌가 자살하자 처분이 말소되어 없던 일이 되었다. 사건의 원흉인 가토 히로하루 연합함대 사령장관과 다카하시 산키치 연합함대 참모장은 아무 처분도 받지 않았으며, 누구도 책임을 추궁하지 않았다.
[1] 이 발언 자체는 도고 헤이하치로가 러일전쟁 전 휴일 없이 훈련을 실시케 했을 때 한 훈시를 인용한 것이었다.[2] 그 유명한 월월화수목금금이라는 유행어와 군가가 이때 본격적으로 유행했을 정도.[3] 더군다나 희생자 중 이가라시 메구미 소좌는 해군대학 시절 교두였던 그에게 전술지도를 받은 적이 있었다. 은사가 제자를 본의 아니게 죽게 한 셈. 게다가 함포 사격전술 분야에서 제법 실력이 있었기에 소장으로 진급할 가능성이 높은 유망주였으나, 대좌로 진급한 시점에서 '''한쪽 귀의 청력을 상실한 상태였다.''' 이런 직업병이 사건의 원인이 아닐까 하는 주장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