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카다 게이스케

 



'''
일본 제국 제31대 내각총리대신
오카다 게이스케
岡田啓介 | Okada Keisuke
'''
<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출생'''
1868년 2월 14일
에치젠국 요시다군
(現 후쿠이현 후쿠이시)
'''사망'''
1952년 10월 17일 (향년 84세)
도쿄도
'''재임기간'''
제31대 내각총리대신
1934년 7월 8일 ~ 1936년 3월 9일[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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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230AE><colcolor=#c3c965> '''배우자'''
오카다 후사 (전처)
오카다 후미 (후처)
'''학력'''
해군대학교 (장교과 갑종2기)
'''정당'''

'''약력'''
제3대 해군수뢰학교장
초대 해군함정본부장
제16대 제1함대 사령장관
제7대 해군차관
제16대 연합함대 사령장관
제23대 요코스카 진수부 사령장관
제30·35대 해군대신
제7대 척무대신
제31대 내각총리대신
제37대 체신대신
'''군사 경력'''
'''임관'''
일본해군병학교 (15기)
'''복무'''
일본제국 해군
1890년 ~ 1933년
'''최종 계급'''
대장
'''참전'''
청일전쟁
러일전쟁
제1차 세계 대전

1. 개요
2. 생애
2.1. 출생 및 집권과정
2.2. 총리 취임
2.3. 2.26 사건(2.26 쿠데타)
2.4. 사태 이후와 사임
2.5. 퇴임 이후
3. 여담
4. 주요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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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해군 제독, 정치가, 31대 내각총리대신. 2.26 사건이라는 대형 사건을 겪었다.

2. 생애



2.1. 출생 및 집권과정


에치젠노쿠니 후쿠이(越前国 福井, 현재 후쿠이현) 출생. 아버지는 에치젠의 사무라이였으나, 집안 사정은 그리 좋지 못했다고 한다.
처음에는 육군을 희망해 독일어까지 공부하는 열의를 보였지만, 결국 친척의 권유로 해군병학교에 들어가 해군 장교가 된다. 청일전쟁러일전쟁에 차례로 참전했다. 1923년에 해군 차관, 그 다음 해인 1924년 연합함대 사령장관[2]이 되었다. 1927년 다나카 기이치 내각의 해군장관이 되어 처음 입각하고 이후 1932년 사이토 마코토 제독의 내각에서도 해군장관을 역임하는 등, 장교로서나 개인으로서나 아주 평범하고 무난한 인생을 살아왔다.

2.2. 총리 취임


31대 총리 취임 후
1934년, 사이토 마코토 총리가 사임하자 후임 총리로 낙점되었다. 해군 경력 외에는 경력이 전무한 그가 후임 총리로 발탁된 것은 그가 해군에서 원로 격으로 대우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이고, 당시 거칠어지고 있던 육군을 견제하기 위해 해군 출신의 인사가 필요했던 점도 있었다.
그의 평범한 인생답게 그의 내각도 아주 평범하게(...) 운영되었는데, 오로지 해군 근무만 해오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정치력이 약했고, 카리스마도 없었다. 게다가 당시 미노베 다쓰키치의 '''천황기관설'''이 대두되어 이 떡밥을 가지고 육군극우 세력들이 오카다 내각을 공격했는데, 이때 오카다 제독은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고 보좌관들의 의견을 좇아 스무스하게 넘어가는 데 치중했다. 의견을 제시해 다른 쪽으로부터 공격당하느니 두리뭉실하게 처신하자고 판단했던 것인데, 그다지 나쁜 판단은 아니었지만 오카다의 태도를 보고 그를 우습게 본 '''육군 황도파가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관동군이 폭주하여 기동사변을 일으켰다.

2.3. 2.26 사건(2.26 쿠데타)


2월 20일, 오카다는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거를 치뤘다. 당시 오카다 제독이 속한 입헌민정당이 대박을 치면서 내각이 상당히 안정화에 들어갔었는데, 불과 6일 만에 육군 황도파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완전히 쑥대밭이 된다.
습격은 2월 26일 새벽부터 이루어졌는데, 그 전부터 서로 접촉하던 육군 황도파 장교들이 부대의 휘하 장병들을 동원해 멋대로 도쿄를 봉쇄하고 총리 관저와 원로들의 저택을 습격하기 시작했다.
당시 원로들은 26일 전날 밤에 있었던 만찬 연회에 참석하는 바람에, 다들 술에 절어있었다고 한다(...). 황도파는 몇 개의 무리로 갈라져 아래 사람들을 죽이러 몰려갔다.
암살 목표
암살 여부
총리 오카다 게이스케
실패
내대신[3] 사이토 마코토
성공
대장대신 다카하시 고레키요
성공
교육총감 와타나베 죠타로
성공
시종장 스즈키 간타로
실패
원로 사이온지 긴모치
실패
원로 마키노 노부아키[4]
실패
사이토 마코토 제독, 와타나베 죠타로와 다카하시 고레키요는 자신의 집에서 살해당했으며, 시종장 스즈키 간타로 제독은 여러 군데 총을 맞았지만 황도파의 뒷처리가 미숙한 바람에 진압 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고, 사이온지 긴모치와 마키노 노부아키는 헌병이 집 앞을 지켜서 살아남았다.
한편, 총리 관저로 몰려간 황도파 무리는 거기서 피바다(...)를 연출했는데, 그야말로 '''거기서 보이는 사람은 닥치는 대로 베고 쏴죽인 덕분에''' 나중에는 목표였던 오카다 제독을 죽였는지도 알지 못했다(...). 당시 오카다 제독은 관저 시종들의 도움으로 벽장의 빨래 더미에 숨어서 위기를 넘겼다. 대신 그와 생김새가 비슷했던 매부[5] 마츠오 덴조가 오카다로 위장해서 황도파를 유인하다가 사살당했다.[6] 황도파는 자신들이 오카다 제독을 죽인 줄 알고 다음 날 자기네 멋대로 총리 관저에서 오카다 제독의 장례식을 치르게 했고, 오카다 제독은 여전히 빨래 더미 속에 숨어 있다가 그를 목격한 육군 헌병조장(상사)의 도움으로 시체로 위장해 이틀 만에 관저에서 탈출해 황거로 갔다.
순식간에 전직 총리 두 명(사이토, 다카하시)이 목숨을 잃었다. 사이온지는 살아남았으나 덕분에 늘그막에 고노에 후미마로가 뒤통수를 치고 군부가 깽판치는걸 모두 보고 죽게 되었고 스즈키 간타로도 태평양 전쟁 마지막을 지키게 된다.
물론 남겨진 오카다에게도 안습한 미래가 기다리고 있었으니..

2.4. 사태 이후와 사임


황거로 도망간 직후에도 오카다는 우유부단한 모습을 보여 또 대차게 까였다.(...) 일단 대장대신과 내대신의 죽음으로 국가 재무, 내각 조직, 궁정 조직이 죄다 무너진 상태였고, 또 자신의 매부가 자신을 대신해 죽는 꼴을 본 오카다 제독은 그 충격으로 공황장애에 빠져 내각을 제대로 수습하지도 못하는 상태였다.[7] 한편, 쇼와 덴노는 쿠데타 당일 소식을 접하고는 고토 후미오 내무대신에게 총리직 대행을 맡겼다가 오카다 제독이 살아 돌아오자 '''이틀 만에 고토 후미오를 잘라버리는''' 센스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자기 밥줄이 끊긴 고토 내무대신은 자신의 직책을 되찾(고 진짜 총리까지 되어보)겠답시고 오카다 제독을 탄핵하는 등, 쿠데타 상황은 그야말로 '''막장'''이었다.
당시 일본인들은 2.26 사건에 대해 '언젠가 일어날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고, 그 쿠데타의 희생양으로 린치당한 오카다 총리에게 처음에는 연민의 목소리를 냈었다. 하지만 오카다 제독이 멀쩡히 살아있고, 심지어 내각이 저런 막장짓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여론은 당연히 뒤집혔다 29일, 쿠데타가 진정되고 곧 황도파가 진압당하면서 사건은 종료되었고, 오카다 제독은 예상했던 수순대로 3월 8일 사임했다.

2.5. 퇴임 이후


2.26 쿠데타의 충격으로 한동안 요양하다가 중일전쟁이 터지자 내각의 정책 자문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중일전쟁에 대해서는 별 다른 이의제기없이 조언했으나, 태평양 전쟁에 대해서는 확실한 반대 입장을 내비쳤다.
패전 후까지 장수하여 1952년 사망했다. 향년 84세.

3. 여담


처복이 없었다. 결혼을 두 번 했는데 모두 오카다보다 먼저 죽었다. 그래서 후일 총리가 되었을 때 관저에 같이 데리고 들어간 사람이 위에 나오는 매부 마츠오 덴조. 마츠오를 총리 비서로 임명해 같이 데리고 관저로 들어간 것인데, 남자만 살아서 그런 것이었는지 몰라도 당시 관저에 공사(公事) 외에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았다고 한다.(...)

4. 주요경력


'''일본 역대 내각총리대신'''
[image]
30대

31대

32대
사이토 마코토

오카다 게이스케
(1934년 7월 28일 ~ 1936년 3월 9일)

히로타 고키
'''일본 역대 해군대신'''
[image]
29대

30대

31대
다카라베 다카시

오카다 게이스케
(1927년 4월 20일 ~ 1929년 7월 2일)

다카라베 다카시

29대

35대

36대
오스미 미네오

오카다 게이스케
(1932년 5월 26일 ~ 1933년 1월 9일)

오스미 미네오

[1] 1936년 2월 26일부터 28일까지 고토 후미오 당시 내무대신이 총리 임시 대리를 지냈다. 이유는 당연히 2.26 사건. 다행히 오카다 총리는 생명을 건지고 돌아왔으나 난리통에 총리가 행방불명되었으니 내무대신이 잠시 총리 직무를 대리해야 했다.[2] 전임 사령장관은 태평양 전쟁 말에 총리가 된 스즈키 간타로.[3] 내무대신과는 다른 직책이다.[4] 오쿠보 도시미치의 아들이자 요시다 시게루의 장인.[5] 오카다의 여동생과 결혼했다.[6] 마츠오 덴조는 오카다 제독과 의형제를 맺은 사이였다. 게다가 오카다 제독이 수상이 되기 전 두 번이나 아내를 잃어 수상이 될 때는 홀몸이었는데 이 때 수상 관저에서 같이 살면서 이리저리 도움을 주었던 각별한 사이였기에 저런 일이 가능했을 것이다. 사망 당시 그는 내각총리대신비서관 육군 대좌의 신분으로 군에서 근무하고 있었다.[7] 이런 오카다 제독을 보고, 당시 궁내성에서 비서관장으로 일했던 기도 고이치는 일기에 이렇게 적어놓았다. "마치 어린 아이할아버지를 달래는 듯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