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와 덴노

 




'''쇼와 덴노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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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와 천황
昭和天皇
'''
<colbgcolor=#AF001F><colcolor=#C0A73F> '''출생'''
1901년 4월 29일
도쿄시 아카사카구 토구고쇼
'''사망'''
1989년 1월 7일 (향년 87세)
도쿄도 치요다구 후키아게 어소
'''능묘'''
도쿄도 하치오지시 무사시노릉(武藏野陵)
'''재위'''
1926년 12월 25일 ~ 1989년 1월 7일
(62년 13일)
'''즉위'''
1928년 11월 10일 (교토고쇼)
'''장례'''
1989년 2월 24일 (도쿄 고쿄)
'''연호'''
(しょう((쇼와, 소화)
'''서명'''
[im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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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AF001F><colcolor=#C0A73F> ''''''
裕仁(ひろひと(히로히토)[34]
'''어칭호'''
迪宮(みちのみや(미치노미야)
'''부모'''
부황 다이쇼 덴노
모후 데이메이 황후
'''형제'''
4남 중 장남
'''배우자'''
고준 황후
'''자녀'''
2남 5녀
히가시쿠니 시게코
히사노미야 사치코
다카츠카사 카즈코
이케다 아츠코
쓰구노미야 아키히토
요시노미야 마사히토
시마즈 타카코
'''학력'''
동궁어학문소(東宮御學問所) 수료
'''신체'''
165cm[35], AB형
'''십이지'''
소띠 (신축년)
'''별자리'''
황소자리

1. 개요
2. 생애
2.1. 출생
2.2. 황태자 책봉
2.3. 유럽 순방
2.4. 섭정 시기
2.5. 즉위
2.7. 항복과 옥음방송
2.9. 상징적 존재가 되다
2.10. 말년
2.11. 사망
5. 가족 관계
5.1. 자녀들
5.2. 형제들
5.3. 가혹했던 고부관계
6. 기타
6.1. 한국과의 관계?
7. 매체에서
7.1. 영화
7.2. 게임
7.3. 드라마
7.4. 관련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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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국제 신의상 어떨지 싶지만 뭐 괜찮겠지. (国際信義上ドウカト思フガマア宜イ)

인도차이나 진격을 허용하는 쇼와 덴노의 반응, 1941년 6월 25일. 스기야마 메모 (杉山メモ) 상권 231쪽.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외, <천황의 쇼와사(天皇の昭和史)> 82쪽.[1]

황국이 총력을 기울여 승리를 결정지을 계기는 바로 오늘날에 있으니 공들은 기꺼이 백성들보다 앞장서서 분노를 새로이 하여 단결을 굳건히 하고 떨쳐 일어나서 적국의 야욕을 분쇄함으로써 황운을 무궁히 도울지어다.(皇國カ其ノ總力ヲ擧ケテ勝ヲ決スルノ機方ニ今日ニ在リ卿等宜シク衆ニ先ンシテ憤激ヲ新ニシ團結ヲ鞏クシ奮テ敵國ノ非望ヲ破碎シ以テ皇運ヲ無窮ニ扶翼スヘシ)"

제85회 제국의회 개원식 칙어(第85回帝国議会開院式の勅語), 1944년 9월 7일 [2]

'''쇼와 덴노'''는 일본의 제124대 천황이다.
다이쇼 덴노데이메이 황후맏아들이며 대일본제국 헌법#s-2.1.11상의 최고군통수권자로서 태평양 전쟁 개전을 결정한 전범이자 해외, 특히 아시아-태평양 국가들 입장에선 메이지 덴노와 함께 일본 역사상 최악의 군주다. 유년 시절 사용한 궁호는 미치노미야(迪宮)이며, 휘(이름)는 미치노미야[3] 히로히토(迪宮裕仁)이다. 재위 기간 동안 사용한 연호는 '쇼와 昭和(소화)'이다.
이 문서의 제목은 쇼와 덴노이긴 하지만, 연호로 불리는 메이지 덴노다이쇼 덴노와는 달리 이 문서에서 소개하는 인물은 연호인 '쇼와'가 아니라 이름인 '히로히토'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다. 천황이 살아있을 땐 이름으로 불리고 죽고 나서야 연호로 불리는데, 1989년 사망할 때까지 언론에서 '히로히토'라고 부르던 게 굳어져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허나 사망한 천황이므로, 연호로 불리는 이전 시대 천황과 명칭을 통일하기 위해 이 문서에서는 쇼와라고 부른다.
4월 29일생으로 이날이 전쟁 전에는 '천황의 생일'이라는 의미에서 천장절(天長節)[4]이라는 공휴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전후 식목일, 정확히는 '녹색의 날'로 바뀌었다가 2007년 자민당, 공명당, 민주당의 합의로 '쇼와의 날'으로 재개정되어서 일본 제국 당시 식민지였던 국가들에서 반발이 나오기도 했다. 여담이지만 윤봉길 의사가 1932년 중국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폭탄 의거를 일으킨 날도 바로 이 날이었다.

2. 생애



2.1. 출생


[image]
1902년, 1살때의 모습.
어렸을 때 칭호[5]는 '''미치노미야(迪宮)''' 였으며, 도장에 새겨진 인장명은 와카타케(若竹)였다. 신화 속 상상의 인물들을 제외한 '''역대 천황들 중에서 재위 기간(치세 64년)이 가장 길며, 가장 장수한 천황'''이다.[6] 역대 천황 중 유일하게 공식 석상에서도 안경을 써서 일본 황실의 전통이자 관습을 처음으로 깨버린 인물이기도 하다.
히로히토는 1901년(메이지 34년), 4월 29일 도쿄도 아카사카 구 아오야마[7]동궁어소(東宮御所)에서 메이지 덴노의 장손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훗날 다이쇼 덴노가 되는 요시히토 황태자, 어머니는 사다코 황태자비다. 오랫동안 정실이 아들을 낳지 못하고 측실 소생으로 계승되어 오던 일본 황실의 관습을 깨고, 정실 황후의 적장자(嫡長子)로서 대를 이었다. 사다코 황태자비는 이후로도 아들 3명을 더 낳았다. (차남 야스히토, 3남 노부히토, 4남 다카히토)
태어났을 때 키는 51cm였고, 몸무게는 약 3kg 정도였다. 히로히토는 태어난 지 70일밖에 되지 않았을 때 친부모의 품에서 떨어져, 추밀원의 고문이었던 카와무라 스미요시 백작에게 맡겨져서 누마즈(沼津) 저택에서 자랐다.[* 이는 일본 황실화족(귀족) 사회의 오랜 전통/관습이었다. 그러나 쇼와 덴노의 맏며느리 미치코 황태자비는 이 전통을 깨고, 2남 1녀 모두를 떨어뜨리지 않고 모두 자신의 품에서 직접 키웠다. (이것이 바로 '''나루쨩 헌법'''[ナルちゃん憲法이며, 현재 일본 엄마에게 좋은 양육방법으로 알려져 있다.)이후부터 [[일본 황실]]에서도 자녀들을 친부모의 곁에 두고 기르기 시작했다.] 1908년가쿠슈인 초등과에 입학한 히로히토는, 가쿠슈인 원장이던 노기 마레스케 육군대장의 밑에서 엄격한 황실 후계자교육을 철저히 받았다.[8]

2.2. 황태자 책봉


1912년 7월 30일에 할아버지 메이지 덴노가 사망하고 아버지 요시히토 황태자가 뒤를 이어 다이쇼 덴노로 즉위하자, 히로히토 친왕은 황태손(皇太孫)에서 '''황태자'''(皇太子)로 지위가 올라가게 되었다. 다이쇼 덴노의 즉위 후, 가쿠슈인 초등과에 재학 중이던 그는 황족신위령(皇族身位令)에 따라 육해군 소위로 가게 되었고 근위보병 제1연대에 배치되었다. 1914년 3월 히로히토는 가쿠슈인 초등과를 졸업했다. 같은 해에 할머니 쇼켄 황후가 사망했다. 1918년에는 방계 황족인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이 황태자비로 간택되었다. 1919년 만 18세가 되자, 히로히토는 성년식을 한 후 바로 황태자에 책봉되었다.
[image]
1924년, 히로히토 황태자와 나가코 황태자비.
사실 나가코 여왕은 "외가인 시마즈 가문에 색맹 형질이 있다"는 이유로 황태자비 결정이 취소될 뻔했으나, 결혼 당사자인 히로히토 황태자는 당시 "나가코 여왕이 좋다"며 감싸주었다고 한다. 덴노가 된 이후로도 나가코 황후와 금슬이 좋았다고.

2.3. 유럽 순방


다이쇼 덴노의 병이 날로 급속히 악화되고 있던 가운데,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히로히토를 유럽에 보낼 것을 제안하였다. 미래의 덴노가 될 히로히토가 견문을 넓히고, 유럽 국가들과도 우호적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이온지 긴모치, 하라 다카시 등 여러 인사들이 찬성을 표하였지만,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아버지 다이쇼 덴노가 병상에 누워 있는 와중에 아들인 히로히토가 해외여행을 가는 것은 불효(不孝)라는 주장도 있었고, 유럽에서 테러 등의 위험에 노출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히로히토의 어머니인 데이메이 황후도 아들의 안전을 걱정하며 유럽 방문 계획에 우려를 표하였다.[9] 원로들은 황후를 설득하려 애썼지만 실패했고, 결국 요양 중이었던 다이쇼 덴노를 직접 찾아가 허락을 받아낸다. 유럽으로 갈 수 있다는 말을 들은 히로히토는 진심으로 기뻐했다고 한다.
히로히토는 1921년 3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영국,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 여러 유럽 국가들을 차례로 순방했다. 특히 영국과는 1902년영일동맹을 맺은터라, 우호국의 국빈으로써 히로히토를 극진히 대접했으며 국왕인 조지 5세는 히로히토를 "나의 아들과도 같다"고 말할 정도로 매우 아껴주었다고 한다. 히로히토도 일본 안에서만 지내다가 처음 해외를 나와서 감회가 남달랐는지, 이 시기가 자신에게 가장 자유로웠고 즐거웠던 시기였다고 훗날 회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유럽 순방 전에는 다이쇼 덴노의 그늘 아래서 미온적으로나마 존재해 존재감이 없던 히로히토가 유럽 순방과 각국 유럽 정상들과 회담을 통해 세계적인 인기 황태자로 급부상하여 돌아온 것을 실감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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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영국을 방문한 히로히토와 영국 수상이던 로이드 조지[10]
당시 영상
같은 시기, 히로히토와 당시 영국의 국왕인 조지 5세.

2.4. 섭정 시기


6개월 간의 유럽 순방에서 귀국한 후, 1921년 11월에 섭정에 취임했고[11] 그때부터 '''셋쇼노미야(攝政宮)'''라고 칭해졌다. 어머니인 사다코 황후는 유약하여 신하들에게 곧잘 무시당하던 남편과 어린 장남을 대신해서 야마가타 아리토모같은 메이지 시기 때부터의 거물급 인사들과 힘겨루기를 했다. 그 때문에 히로히토의 치세는 1921년부터 1926년 아버지 다이쇼 덴노가 죽을 때까지의 5년도 포함되는 셈이다.
재위 중, 1923년 12월 27일에는 궁정 문밖에서 사회주의자 난바 다이스케(難波大助)로부터 저격을 당하는 '도라노몬 사건'이 발생하였다. 생명에 지장은 없었고, 난바 다이스케에게 저격을 받았을 당시에 히로히토는 자동차 안에 있었는데 "누가 총을 쏘나 보다" 하면서 태연했다고 한다. 난바 다이스케는 저격을 시도한 직후 붙잡혀서 주변에 있는 경찰이며 일본 국민들한테 무자비하게 구타, 폭행을 당하여 얼굴을 못 알아보게 만든 후에, 대역죄로 사형에 처해졌다. 난바 다이스케가 처형된 뒤 히로히토는 난바 다이스케의 가족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배려했다고 한다.
동년에 히로히토는 구니노미야 나가코 여왕과 결혼하려 했으나, 관동 대지진(관동대학살)의 영향으로 이듬해인 1924년에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2.5. 즉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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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12월 25일에 아버지 다이쇼 덴노가 오랜 숙환으로 끝내 사망하자 그는 일본 제124대 천황이 되었고 연호를 '''쇼와(昭和)'''로 바꿨다. 1928년 11월 교토고쇼[12]에서 즉위식을 올린 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국가 중대사에 깊이 관여했고, 특히 군사나 외교 정책에 관심이 많았다. 다이쇼 치세에서 실추되었던 황권을 손에 쥐기 위해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2.6. 이봉창 폭탄 투하 사건


나이 30살이었던 1932년에 조선인 이봉창으로부터 폭탄으로 암살 시도를 당했다. 하지만 폭탄 2개 중 하나는 잘못 던져져 말과 마부(근위병)에게만 부상을 입혔고, 하나는 불발이 되어 실패. 폭탄 투척 이후 일본제국 경찰들이 들이닥쳤을 때, 경찰들은 이봉창 의사가 던진 줄 모르고 이봉창 의사 앞에 있던 일본인을 구타했으나[13] 이에 죄책감을 느낀 이봉창 의사는 자수하여 현장에서 체포되었으며, 이후 사형에 처해졌다. 이때 침착한 어조로 "숨지 않을 테니 점잖게 다뤄라."고 말했다고. 조선에서는 '격렬하게 비난하는 어조'로나마 의거를 전할 수 있었으며, 특히 중국 언론에서는 대놓고 "아쉽게도 불발되었다"는 기사로 보도했다.[14]

2.7. 항복과 옥음방송


1933년 12월 23일에는 장남이자 훗날 천황이 되는 츠구노미야 아키히토 친왕이 태어났다. 이후 거듭되는 침략 전쟁에서 미국의 압도적 물량으로 인해, 일본은 결국 패전에 패전을 거듭한다. 그 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탄 2개가 떨어지고 나서 소련이 만주를 침공하자 항복을 결정하고 1945년 8월 15일, 포츠담 선언(일본의 무조건적인 항복)을 수락하는 라디오 항복연설을 했는데 이를 '''옥음방송'''이라고 한다. 사실 쇼와는 소련이나 스페인, 스위스 등을 통해 '''연합국과의 중재 강화를 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소련이 침공할 때까지. 연합국의 일본에 대한 무조건 항복 요구를 거부해왔던 것이다. 1945년 5월 8일 나치 독일이 무조건 항복하자. 스즈키 긴타로 내각에서는 더 이상의 희생을 막기 위해 연합국의 요구를 따라 쇼와 한테 무조건 항복을 진언했고, 쇼와 덴노와 내각이 항복하려 하자 군부는 궁성 사건을 일으켰으나 수포로 돌아간다.

2.8. 인간선언


항복 후에 더글라스 맥아더GHQ(연합군사령부)에 의해서 강요되어서 1946년 1월 1일에 인간선언을 발표하게 되었다. 인간선언 이후 천황은 더 이상 신격화(현인신, アラヒトカミ/인간의 탈을 쓴 살아있는 신의 존재)가 공식적으로 부정되었고, 한 명의 평범한 인간, 일반 집안 수준으로 격하되었으며, 정치 일선에서도 물러나게 되었다. 재산 역시 모두 궁내청에게 몰수당해 거리로 내몰려도 할 말이 없는 상황.[15] 다만 천황제의 존치를 결정한 마당에 히로히토 본인과 그 직계에 한정해 생활비를 일정 수준으로 주기로 해서 이때부터 일본 황실은 일본 의회에서 예산을 타서 쓰게 되었다. 그러나 예산을 타서 쓰게 되도 쓰이는 돈은 일일이 내각 산하의 궁내청에서 모두 일일히 감시하고 관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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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러스 맥아더와 히로히토.
그야말로 '''사진 한장으로 요약 가능한 태평양 전쟁의 결과.'''
위의 사진은 일본 언론이 알아서 보도하지 않았으나 미군정이 반드시 보도하도록 지시해 일본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정장 차림으로 꼿꼿하게 경직된 표정을 짓고 서있는 히로히토와 달리 맥아더는 정복도 입지 않은 일상적인 전투복 차림으로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 주머니에 손까지 찔러넣은 채 찍은 모습으로 '''누가 대장인지''' 깨닫게 해줘 사진을 보고 자살하는 사람까지 나올 정도였다. 애초에 맥아더는 미국의 수장인 대통령이 아닌 군 사령관인데 반해 히로히토는 일본의 최고존엄인 천황이다. 에드워드 베르가 쓴 책 <히로히토 - 신화의 뒷편>에 의거하면 이는 '''맥아더의 의도된 행동'''이었다고 한다.

2.9. 상징적 존재가 되다



1951년, 트루먼 대통령에게 경질당한 후 일본을 떠나 미국으로 향하는 맥아더 원수.
히로히토가 자동차를 타고 공항까지 '''배웅을 나오는''' 모습을 볼 수 있다.
1947년 제정된 일본국 헌법(일명 평화 헌법)에서 히로히토는 상징적인 존재로 전락했지만, 미군이 일본을 점령하고 있던 당시에 GHQ(연합군사령부)의 최고사령관이었던 맥아더 연합군최고사령관에 의해 독자적인 정치적 영향력은 유지될 수 있었다. 1952년 4월 28일샌프란시스코 조약으로 일본이 주권을 되찾자 그는 여러 신궁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며[16] 다시 활동을 재개했지만, 더 이상은 정치에 참여하지 않고 신 헌법(평화헌법)에도 나와있는 것처럼 '''일본국의 상징이자 일본 국민 통합의 상징인 천황'''으로 현재까지 남았다.
상징적으로 남기도 했지만, 재군비와 개헌의 필요성에 의욕을 보였다는 사실이 초대 궁내청 장관 다지마 마치지가 히로히토 천황과의 대화를 기록한 '배알기(拜謁記)'의 내용을 공개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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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말년


여하튼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후에도 히로히토는 천황이라는 공적 업무인 '공무(公務)'는 그냥 '''상징적'''인 수준으로만 수행했고, 대신 원래부터 관심이 많았던 생물학 연구에 관심을 쏟으며 이에 몰두했다. 1971년 아내 나가코 황후와 함께 전쟁 후 처음으로 제2차 세계 대전의 적국이었던 영국네덜란드를 방문하기도 했으며, 여러 정상들과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아시아계 대학생들이 천황 히로히토를 규탄하는 집회를 열기도 했다.

'''나는 옥좌에서 오랫동안 일하며 여러 가지 경험을 했다. 가장 인상에 남은 일은 황후와 같이 유럽 여행을 갔을 때이다. 또 미국 여행을 갈 예정이기도 하다. 1964 도쿄 올림픽과 오사카 만국박람회도 인상적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에 가장 후회스러웠던 일은 두말할 것 없이 제2차 세계 대전이다.'''

1975년 인터뷰 중에서 "제일 기억에 남는 일과 제일 후회스러운 일이 무엇이었냐"는 기자의 질문에 한 답변

1975년 10월에 히로히토 천황과 그의 아내 나가코 황후미국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공식 방문했다. 미국 방문을 앞두고 히로히토와 뉴스위크지의 기자 버나드 크리셔의 인터뷰가 있었는데, 버나드 크리셔는 "일본이 개전을 결단한 정책 결정 과정에도 폐하(陛下)가 가담하셨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했고 히로히토는 "전쟁을 끝낼 때 나는 스스로 결정을 내렸다. 하지만 전쟁 개시 때에는 내각의 결정이 있었고, 나는 헌법에 따라 일본 내각의 결정을 뒤집을 수 없었다"고 변명했다.약간의 변명을 해두자면, 이때는 말이 선거니 뭐니 하지만 군부가 폭주하던 시기였으며 해군과 육군의 대립으로 육군출신수상을 해군이 암살하거나 황도파의 쿠데타를 진압하고 통제파가 주류가 된지 얼마 되지도 않았으므로 히로히토는 그냥 될대로 되라라는 심정과 아무리 명치유신이후라지만 천황은 그저 권력자의 결정을 형식적으로 허락해주는 몇백년이 넘는 오랜관례에 따라 묵인했을 확률이 높다. 또한 9월 22일에 열린 기자회견에서도 "일본인들의 가치관은 변하지 않았다. 일본의 군부 지도자들이 일본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던 적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 내가 무슨 말을 한다면 아직도 살아 있는 그들을 욕하는 셈이 된다. 나는 그러고 싶지 않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기자회견을 마치고 몇 주일 후 히로히토 부부는 국빈 자격으로 미국 워싱턴 D.C.를 방문하여 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회담을 하였으며 제2차 세계 대전에 대한 깊은 슬픔의 뜻을 전하고, 미국 관광길에 올라 캘리포니아 주 애너하임의 디즈니랜드 을 찾았다.[17] 그리고 미국 디즈니에서 선물로 받은 시계가 있는데, 디즈니에서 일본 천황의 공식 방문을 기념하여 만든 특별 한정 기념품이었다. 히로히토는 이 시계를 받고 "디즈니 풍경이 아름답다." 며 마지막으로 크게 미소 지었고, 나중에 히로히토가 사망했을 때 그 시계를 무덤 속에 넣었다고 한다. 영국이나 네덜란드에서 규탄집회가 일어난 것과는 달리, 미국은 미소냉전으로 동맹관계를 맺은 터라 별다른 일 없이 미국 방문을 마칠 수 있었다.

2.11. 사망



이후 해외의 여러 정상들을 차례로 만나며 살던 히로히토는 1988년 9월 19일 피를 토하며 쓰러졌고 이후 입원해 투병하다 1989년(쇼와64년) 1월 7일 오전 6시 33분 십이지장에 생긴 암 때문에[18] 향년 87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1989년 2월 24일 무사시노능에 매장되었다. 히로히토의 후계자로 그의 장남이던 황태자 아키히토가 황위에 오르게 되었고 연호를 쇼와 덴노가 사망한 다음 날, 1989년 1월 8일 0시(자정) 정각에 헤이세이로 바꾸면서 '''헤이세이 시대(平成時代)'''가 막을 연 뒤, 쇼와 시대는 1989년 1월 7일을 끝으로 종료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히로히토의 병세는 일본 언론에 의해 전 세계에 공개되었는데, 1988년 9월 19일 토혈[19]해 수혈을 받았지만 이후 토혈과 하혈[20]이 반복되어 수혈도 반복되었다. 장에서 출혈이 멈추지 않았고 음식을 소화시키지 못해 수액으로 영양을 공급받을 수밖에 없었다. 24일에는 호흡곤란 증세를 보였고 10월 19일에는 각혈[21]해 수혈받았다. 11월 6일에는 최악의 토혈과 하혈을 일으켜 긴급수혈을 받았고 12월 5일에도 출혈을 했다. 12월 12일에는 혼수상태에 빠졌다.

NHK에서 히로히토 천황 사망 3분 후에 방송한 소식. 미야오 이와오 궁내청 차장이 사망 전인 오전 4시의 천황의 상태를 발표하는 내용과 긴급임시뉴스.

NHK에서 히로히토 천황이 사망한 지 1시간이 지난 후에 방송한 내용. 후지모리 쇼이치 궁내청 장관이 히로히토 천황이 사망한 것을 발표한 내용과 관련 임시뉴스. 천황이 사망한 것을 알릴 때는 "천황폐하 붕어"(天皇陛下 崩御)라는 글귀를 띄운 이후 차임음[22]을 2번 연달아서 겹치게 울린다. 위 2개의 동영상에서 나오는 궁내청 장관은 후지모리 쇼이치(藤森 正一). 해당 영상 후반에는 훗날 일본 총리를 역임하는 당시 내각관방장관 오부치 게이조(小渕 恵三)의 모습도 보인다.

히로히토 사망했을 때 당시 일본인들의 반응인데, 대체적으로 노년층은 아주 슬퍼하는 분위기지만, 젊은 층이나 중장년층들은 그럭저럭 무덤덤한 반응인 거 같다. 즉 제각각이라는 것이다.

쇼와 덴노의 '''장례식(大喪の礼/「御葬列」)''' 장면[23]

사망 당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KBS 9시 뉴스 보도) 히로히토 천황 사망 당일과 헤이세이 시대로 넘어가기 전날에 나온 한국의 보도로 당시 관방장관인 오부치 게이조가 '''헤이세이(平成)''' 연호를 처음으로 공개하는 장면도 나온다.[24]
사실 1988년 여름부터 히로히토 천황이 십이지장 종양으로 토혈하고 하혈하면서 점점 위독해지자 일본의 모든 행사와 콘서트, 일본 총리의 해외일정이 취소되고 전 일본이 숙연 및 '''자숙(自粛)'''해져야 한다는 전체 일본사회 분위기가 반강제적으로 형성되었다. 이 해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한 사이타마세이부 라이온스는 3년 연속 우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축하연 없이 위로회(慰労会)로 조용하게 묻혔다. '''안습'''이다. 1978년부터 매해 개최된 기린컵도 1990년까지 2년간 개최를 중단하기까지 했다. 또한 광고계에서는 '건강하세요', '멋진 인생', '드디어 그날이 온다' 등의 멘트가 사라졌다. 역시 천황의 심기를 '''해'''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언론에서는 이 분위기를 선도하여 모든 기사를 일본 황실의 동향파악에 집중하고 '''천황이 매일 어느 정도의 맥박을 유지하는지까지 일일이 기사화했다.'''
외신측 반응은 일본 언론들과 사뭇 많이 달랐다. 1988년 9월 21일자 영국 황색언론 <더 선>에서는 '''Hells waiting for this truely evil emperor(지옥이 이 정말로 사악한 황제를 기다리고 있다)'''고 보도했고, 10월 7일에 김재훈 한겨레사회연구소 이사가 신생 진보일간지 <한겨레신문> '더불어 생각하며' 칼럼에서도 "쇼와 본인이 죽기 전에 과거사에 진심으로 직접 사죄하라"고 촉구하였다.
일본 전역은 '자숙'이라는 명분으로 엄숙한 분위기를 유지했으며, 연일 천여 명의 사람들(대부분 노년층)이 천황이 머무는 고쿄에 몰려들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해를 넘겨서 오래 끌자, 천황의 사망 당일에는 일본에서는 일부 극우 노인들이 고쿄 앞에서 울어제낀 것을 제외하고는 차분했다. 오히려 '''정규방송이 안 나온다고''', 방송국마다 전화통에 불이 나도록 항의 전화가 빗발칠 정도였다고 한다. 정규방송이 빠지고 추모방송이 주구장창 나오다보니 생긴 일인데, 당연히 재미있을 리가 없으니 이런 반응이 나온 것. 그래서인지 비디오 대여점의 매출이 상승했다고 한다.[25] 아키히토 생전 퇴임 당시 이 시절을 기억하고 있는 사람들에게서, '쇼와 덴노 붕어 당시엔 엄숙주의가 너무 심해서 진이 빠졌다. 아키히토는 생전에 퇴임해서 즐길 수 있었다는 게 다행이다' 라는 의견이 나왔을 정도다.
이 시기의 웃긴 일화가 하나 있다. 언제 쇼와 덴노가 죽는가 가장 빨리 알아내기 위해 고쿄 근처에서 거의 노숙을 하던 한 기자가 있었는데, 그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야말로 노숙자 몰골이 되었다. 그런 꼴을 한 기자 옆을 지나던 한 어린이가 옆에 있던 어머니에게 "저 아저씨는 뭐야?"(あのおじさんは何?)라고 물으니, 어머니가 "공부 안 하면 저렇게 되는 거야."(勉強しなければああなるんだ。)라고 대답하는 걸 들었다고 한다.
쇼와 덴노는 죽기 직전에 일본의 몇몇 역사학자들과 한국, 중국아시아 국가들(심지어는 미국, 유럽 국가들도)로부터 전쟁 책임에 대한 사과를 남길 것을 정식으로 요구/항의 받았다.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쇼와 덴노 사후 담화에서 "일본 국민들을 전화(戰禍)에서 구해내기 위해 '종전'(終戦)이란 이름으로 결단있게 성단(聖断)을 내리셨다"는 식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지만, 담화문 내용에서 쇼와 덴노의 전쟁 책임이 언급되지 않아 침략피해자인 한국, 중국, 동남아시아 등등 전 세계에 파문이 일었다.
참고로 소설 13계단에 따르면, 쇼와 덴노가 위독해지자 전 교정기관의 사형 업무가 중지되었던 적이 있다. 쇼와 덴노가 사망한 뒤 특별사면이 이뤄질 것을 고려한 결정이었는데, 이 와중 최고재판소에서 사형 여부를 다투던 일부 사형수들은 상고를 취하하여 사형을 확정시켜 버렸다. 최고재판소에서 감형될 가능성보다 특사로 감형될 확률이 높다고 보고 도박수를 던진 것이다. 그 이유는 판결이 확정된 피고인만이 특별사면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26] 결국 특사가 내려지긴 했는데 대상은 생계형 사범 등 애매한 경우만이 해당되었고. 그 결과 사형수들은 스스로 자신의 명을 단축시켜 버리는 비극이 발생했다고 알려졌다. 그런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사형수의 사면은 사실상 전무했고, 감형도 1975년 이후로 전혀 없었으며 사형을 면한 경우는 모두 2심에서 정상참작사유 발생 등을 이유로 무기로 감형된 자들이었다.
그리고 죽은 시기가 1989년 초, 즉 해를 넘기고 겨우 1주일 지난 시점이라, ''쇼와 연호''(昭和64年)를 박은 달력들이 대거 폐기처분되고 ''헤이세이 연호''(平成元年)가 찍힌 달력들을 새로 발행하느라 일본 열도에서 종이 낭비가 극심해지고 재정 부담을 여러 곳에 안겨주기도 했다.
한편 쇼와 덴노의 둘째 손자 아야노미야 후미히토 친왕(礼宮文仁親王)은, 할아버지 쇼와 덴노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가쿠슈인 대학 1년 후배인 카와시마 키코와의 약혼 발표 기자회견을 했다. 후미히토 친왕은 24세, 키코는 23세였다. 당시 사진을 보면 약혼 발표라는 자리에 어울리지 않게 후미히토 친왕과 키코가 온통 검은 옷을 입고 있는데, 상중이었기 때문이다. 상중의 약혼 발표와 곧 이어진 결혼(1990.06.29.)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으나, 황실에 시집와서 잘 적응해 열심히 사는 키코 비의 모습 덕분에 비판 여론이 수그러들었다고 한다.
쇼와 덴노의 손녀인 노리노미야 사야코 공주(紀宮清子内親王)는 1969년 4월생으로, 1989년 4월에 만 20세 성년을 맞이했다. 당연히 원래대로라면 그녀를 위한 각종 축하행사가 치러져야 했으나, 할아버지의 죽음 때문에 이듬해로 미루어졌다.
사망당시 미국과 소련에서도 조문단을 파견했고 한국의 노태우 정부도 조문단을 파견했는데, 파견 과정에서 전민련준비위 등 재야 민주단체와 호국보훈단체들에게 비난을 받았다. 당시 야당들도 국내에 설치된 조문실에서 조문을 했는데 이 당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평화민주당 총재시절 야당 총재로서 주한일본대사관에서 조문했는데, 해당 사실은 친일파라고 박정희 전 대통령이 비난받던 시기에 극우파의 반론 자료 중 하나로 쓰이기도 했다. 다만 이 당시의 일본은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 및 소련을 이은 3위 경제 강국이어서 한국 정부는 물론 미국과 소련에서까지 조문단을 파견했었다는 점과, 그리고 전후 히로히토는 자기 목숨 부지를 위해서 미국의 눈치를 보느라 철저하게 반극우파적인 입장을 견지해 오히려 일본 극우의 재무장 움직임 등에 대해 불쾌한 입장을 보이며 극우를 누르고 있었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3. 전쟁 책임




4. 대외 관계




5. 가족 관계


다이쇼 덴노데이메이 황후의 4남 중 장남으로 출생, 아내 고준 황후와의 사이에서 2남 5녀를 낳았다. 히로히토는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는 무척 좋은 사람이었다고 전해진다.

5.1. 자녀들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의 자녀들은 장남 아키히토와 막내딸 시마즈 타카코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죽거나, 건강이 나쁘거나,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하거나, 일찍 과부가 되는 등 하나같이 불행한 삶을 살았다.
  •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照宮成子) 내친왕(1925.12.6-1961.7.23): 방계 황족 히가시쿠니노미야 모리히로(東久邇宮盛厚)[27] 왕과 결혼, 3남 2녀를 낳았다. 다이쇼 덴노가 생전에 본 유일한 손주이기도 하다. 패전 후 평민 신분으로 떨어졌고[28], 만 35세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 히로히토 덴노와 나가코 황후 내외는 큰 충격을 받았다.
  • 5녀 스가노미야 타카코(淸宮貴子) 내친왕(1939.3.2-): 어머니 나가코 황후의 외사촌 남동생[29]인, 옛 화족 시마즈 히사나가(島津久永)와 결혼하여 1남을 낳았다. 히로히토 덴노와 나가코 황후의 딸 5명 중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삶을 살아간 인물로, 바로 위의 언니 이케다 아츠코와는 정반대로 활달하고 화려하며 떠들썩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한다.

5.2. 형제들



5.3. 가혹했던 고부관계


아내 고준 황후는 일본 막장 드라마를 현실로 찍었다. 큰아들인 아키히토 황태자가 평민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려 할 때, 우익 단체까지 동원해가면서 엄청 반대했다. 미치코가 말이 평민이지 재벌가이자 아시아 최대 제분회사 닛신(日淸) 제분의 장녀에, 외가는 옛 화족(백작) 소에지마(副島) 가문이었으며, 가문뿐만 아니라 미치코 본인 역시 미모와 지성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당시 공부도 잘해서 명문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 학생이었다.
미치코가 황태자비가 된 후로, 나가코 황후는 '''악독한 시어머니의 교과서'''가 무엇인지 아주 제대로 보여주었다. 심지어 미치코 황태자비가 황후가 된 후로도, 나가코 태후와 그녀의 똘마니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미치코 황후는 시어머니 나가코 황태후에게 어찌나 시달렸는지, 1993년 10월 20일 만 59세 되던 해에 실어증으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나가코 태후는 그녀 자신이 사망하는 순간인 2000년까지, 40여년간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미치코 황후를 들들 볶았다.
그러나 그런 나가코 황후 역시 할 말이 있는 게, 사실 그녀 역시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데이메이 황후)에게 30여년간 호된 시집살이를 당했다고 한다. 군기잡기, 꼰대질을 당했던 사람이 당한 것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놀랄 일도 아니다. 사다코 태후의 시녀 다케야 츠네코(竹屋津根子)와 나가코 황후의 시녀 다케야 시게코(竹屋志計子)는 친자매였지만, 웃전들의 기싸움으로 인해 서로 눈치를 보며 대화조차 나누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사실 나가코 황후가 당한 게 더욱 심각할 정도였는데 이는 아래 후술.
평소에도 나가코 황후를 고깝게 보던 사다코 태후는 자신이 꾸짖고 싶으면 시녀에게 말을 대신 전해서 두 배로 긴장하게 했는데 한번은 다이쇼 덴노가 죽기 얼마 전 시절, 황태자 부부가 문병을 왔을 때였다. 나가코 황태자비는 그동안 어지간히 시달린 터라 시어머니 사다코 황후의 앞에서 너무 긴장하여, 장갑을 낀 채로 젖은 수건을 짜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때 사다코 황후는 "너는 무엇을 해도 서투르구나!!"라고 시종들도 있는 앞에서 나가코 황태자비를 꾸짖었다고 한다.[30] 나가코 황태자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시어머니의 꾸중을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사실 사다코 태후나가코 황후의 고부갈등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었다. 나가코 황후는 방계 황족 가문의 적녀이지만 사다코 태후는 화족, 그것도 서녀이다 보니 며느리보다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고, 이 탓에 심각한 열등감에 휩싸여 자신의 열등감을 나가코 황후를 괴롭히고 들볶으면서 해소시키려 했다는 설이 있다. 성격 차이도 있었다. 또한 아들만 4명을 낳은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와 달리 나가코 황후는 첫째부터 넷째까지 줄줄이 딸만 낳았는데, 이 역시 좋은 시집살이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고준 황후의 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히코 왕은 일본 육군 대장으로, 1928년 대만 시찰 도중에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의 의거로 상해를 입어 다음 해에 사망했다.

6. 기타


  • 근대 이후 대영제국빅토리아 여왕(1819~190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와 함께 80세 이상을 살고 60년 이상을 즉위한 세 군주 가운데 한 명이다. 재위기간은 프란츠 요제프 1세 68년(86세), 빅토리아 여왕 64년(82세), 쇼와 63년(88세). 하지만 앞의 두 인물보다 히로히토가 더 주목받는건 앞의 두 인물은 1848년 혁명 이후로는 불안정하지만 그럭저럭 평화로운 치세를 보냈지만, 히로히토는 어린 시절에 조국의 근대화를 보고 자라고 본인의 재위 초기에는 조국이 미국을 상대로 큰 전쟁을 벌이다 패전하였으며, 이때 위기를 겪었지만 1950년 이웃나라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조국의 경제 고도 성장은 물론, 눈에 띄게 변화된 사회상까지 보고 죽었던 것이다. 일본의 각 연대 별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덴노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사실 이보다 좀 더 앞선 시대에 1명 더 있는데, 청나라의 고종 건륭제(1711~1799)로, 무려 89세까지 60년을 재위했다. 게다가 이것도 본인은 감히 조부이자 성군인 성조 강희제보다 오래 재위할 수 없다는 논리로 자진 퇴위하여 나온 값이기 때문에 태상황제로서의 재위기간을 더하면 64년이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현대 인물 가운데는 태국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있었다. 89세에 70년간 재위했다. 조만간 근대 이후 최장수 군주(빌헬름 1세, 만 91세)를 경신할지도 모…를 뻔 했으나 2016년 10월 13일, 만 88세로 사망하면서 무산됐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국왕 역시 89세로 60년 기록을 넘겼으며, 2014년 부로 쇼와보다 장수한 군주가 되었다.
  • 왜인지는 몰라도 극단적으로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싫어하여, 의회가 열릴 때나 군대를 사열하는 꼭 참가해야만 하는 행사 이외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꺼렸다고 한다. 게다가 의전 절차에 따라서 어느 누구라도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자신의 신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고, 이러한 습관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이 할아버지 메이지 덴노처럼 히로히토 본인의 대인기피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엄격한 (구시대적이고 폐쇄적인) 황실 교육의 영향 탓이었는지는 원인불명이다.
  • 워낙에 귀하게 자란지라, 황태자 시절 영국을 방문했을 때 런던 지하철을 처음으로 타보게 되었다. 이때 차표를 역무원에게 건네주고 개찰구를 나가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그냥 차표를 소지한 채로 개찰구를 지나가려다 그가 황태자인지 모르는 역무원이 그를 제지하면서 실랑이가 있었다고 한다.[31] 그리고 실랑이를 벌이던 차표는, 일본으로 가져와서 현재 궁정기념관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또 한번은 아돌프 히틀러가 당시 최고의 차였던 메르세데스 벤츠 770K를 히로히토에게 선물로 주었지만, 정작 히로히토는 승차감이 나빠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 선천적으로 건강이 좀 좋지 않아서 할아버지인 메이지 덴노와 마찬가지로 걸어다닐 때 발을 질질 끄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며, 태어날 때부터 척추가 굽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근시가 심해서 고생을 많이 했고, 안경을 써야만 앞이 보였을 정도로 안경은 필수품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생활해야 했다. 그의 '대인기피증'은 여기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 황실 내부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에 진보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태어나지 않아 "후궁을 들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모두 거절했고,[32] 1933년 아키히토가 태어난 뒤에야 여론이 없어진다.
  • 1959년, 평민 출신의 쇼다 미치코가 아키히토 황태자와 결혼하여 일본 최초 평민 출신의 황태자비가 되었다. 히로히토가 찬성했기에 아키히토는 미치코와 혼인할 수 있었다. 당시 나가코 황후와 히로히토의 동생들 부부, 전 황족들과 궁내청이 그리 강경하게 반대했음에도 이들이 혼인한 것은 아키히토의 아버지 히로히토가 허락했기 때문이다. 당시 히로히토 덴노는 "황실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 며 아내 고준 황후처럼 그렇게 심하게 반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 일설에는 1945년 9월 27일, 더글러스 맥아더도쿄에 진주한 지 1달 동안 히로히토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없자 '제발이 저린 히로히토가 직접 출두'해 찍은 사진이 2장이며, 그중 히로히토가 90도로 허리를 꺾어 맥아더에게 굽신거리는 사진이 있으나 일본 측의 방해 공작으로 찾기 힘들어졌다는 떡밥이 있었다. 맥아더의 회고록이나 당시 함께 있었던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히로히토가 맥아더의 환영 인사에 '감사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여 답했다는데, 이 얘기가 전해지면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히로히토가 90도로 허리를 숙여가며 굽신거리는 사진이 찍혔다는 증언은 없었으며, 애초에 흔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맥아더는 히로히토를 엄연히 한 나라의 군주(살아있는 신)로 대해주며 그에 걸맞은 예의도 갖췄다고 한다. 위에 나와있는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사실은 맥아더 특유의 허리 편 자세 때문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오해를 불러 일으켰지만, 맥아더의 회고록을 보나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보나 맥아더는 분명히 히로히토에게 충분한 예의를 갖췄다.

6.1. 한국과의 관계?


- 고대 일본의 지배층과 지금 천황(天皇)과의 관계는 어떤가.

"하나 예를 들겠다. 1989년 지금의 아키히토 천황 즉위식 때, 제단 위로 올라가서 30분 정도 자신이 천황이 되었다고 신에게 보고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유독 그곳에만 카메라가 들어갈 수 없었다. 왜냐, 조선어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은', '~는' 등의 말이 들어간 문구를 읊었을 것이다."

- 보다 구체적인 사례가 있다면?

"있다. 전후 기마민족이동설로 일본역사계에 화두를 던진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선생이 쇼와 덴노(히로히토)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죄송합니다. 폐하에 대해 반도에서 왔다는 등 이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라고 말하자 쇼와 덴노는 ''' '아니야, 우리들조선 출신이야' '''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에가미 선생은 그것이 일생에 가장 충격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 그 이야기를 에가미 나미오 씨로부터 직접 들은 것인가?

"에가미 나미오 선생이 한국의 김용운 교수에게 직접 이야기했고, 김 교수로부터는 내가 직접 들었기 때문에 틀림 없다. 일본 황실이 한반도에서 왔다는 근거가 또 있다.

첫번째 '어머니'를 일본어로 오카-상(おかあさん)이라고 하는데, 황실에서는 '오모'라고 말한다. '오모'는 어머니가 아닌가. 2번째, 일본 황실에서 젓가락을 잘 쓰지 않고 숟가락을 쓴다. 마지막으로 일본인들의 기본적으로 앉는 자세인 정좌(正座)를 하지 않는다. 즉 무릎을 꿇지 않고 양반다리를 한다는 점이다."

출처: 일본 로열 패밀리는 백제 왕족! - 일본인을 통해 본 일본사회(3) -한일고대사 연구자 오다 노부오(宇田伸夫) 씨 (JP NEWS)

일본 고대사 연구가인 우다 노부오 씨가 2010년 JP NEWS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쇼와 덴노가 생전에 자신들의 뿌리가 조선(한반도)에 있다는 것을 에가미 나미오 씨에게 밝혔다고 한다. 에가미 나미오는 1948년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을 발표하여 일본의 최고학술상인 천왕상을 받고 그 이후로 나온 '한반도 도래인설'을 탄생시킨 역사학자다.
우다 노부오 씨가 언급하는 김용운 교수는 1927년 도쿄 태생의 수학자로, 작고하기 1년 전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위의 쇼와덴노와 에가미 나미오 간의 담화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다.

'''쇼와 덴노와 에가미 나미오의 천황가 근원 담화'''
영상에서의 담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천황님의 신성불가침이라고 하는 학설을 부정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미안하지만 저는 학자의 양심으로 제 업적과 연구결과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안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것을 들은 쇼와 천황은 빙긋이 웃으며 한 말이 "나도 학자입니다"...중략... "나도 학자로서의 양심이 있습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당신이 얘기하는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을 믿고 있습니다."

"내가 당신의 학설을 믿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일본의 일반 국민들은 떡을 먹을때는 떡을 쳐서 먹죠. 그런데 궁에서만은, 왕실에서는 시루떡을 먹어요. 그래서 우리는 시루토쿠를 먹습니다.' 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일본사람들은 밥을 먹은 뒤에는 차를 마시는데 궁에서는 숭늉을 먹습니다." 그것도 한국의 풍습이죠. "그 다음에는 일본 사람들은 마늘을 안 먹습니다. 뭐 약용으로나 먹지 보통 식사로는 식용으로는 안먹는데 우리는 마늘도 먹습니다. 나는 이 세가지 만으로도 내가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을 믿습니다. 하나도 나한테 미안할 것 없습니다."

아들인 아키히토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일례로 2001년 12월 23일, 68세의 생일을 맞아 열린 기자회견에서 직접 "나 자신으로서는 간무 덴노의 생모가 백제 무령왕의 자손이라고 '속일본기'에 기록돼 있어 한국과의 인연을 느끼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7. 매체에서



7.1.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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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7년작 <일본의 가장 긴 하루>에서는 마츠모토 하쿠오가 연기했는데 얼굴은 나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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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맥아더: 일본 침몰에 관한 불편한 해석>에서는 카타오카 타카타로가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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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게임


  • Paradox Interactive사의 2차세계대전을 다룬 게임인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는 고증에 맞게 일본 제국의 국가원수로 나온다. 최신작인 Hearts of Iron IV에서는 시작시 전사의 규칙, 쇼와 덴노, 천황의 재가 라는 트레잇을 붙이고 나온다. 전사의 규칙은 AI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전쟁 중 동맹을 부르거나 동맹의 부름에 응답하려는 경향을 낮추게 된다. 독소전쟁에서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은 점을 구현한 것이다. 천황의 재가는 중국과 중국 공산당, 각 군벌 정부를 공격하는데에 제한을 걸어 놓은 것으로 유저들이 꼼수로 시작하자마자 중국에 전쟁을 걸어 중일전쟁을 더 빨리 시작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걸린 제한이다. 쇼와 덴노는 안정도 60%를 제공하는 좋은 성능의 트레잇으로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로 일본의 이념을 교체할 시 국가 지도자가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기 때문에 성능이 크게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1.5 패치와 함께 웨이킹 더 타이거 DLC가 나오면서 민주주의 루트는 안정도 50%을 더해주는 국가정신으로 얻을수 있고, 공산주의 루트는 아예 죽이거나 만주국으로 추방시킨다.

7.3. 드라마



7.4. 관련 저서


  • 궁내청 저, 『쇼와천황실록』, 도쿄서적, 2015.
1990년부터 2014년까지 24년이라는 장대한 세월에 걸쳐, 궁내청이 편찬한 정식 역사서이다. 우리가 아는 실록처럼 히로히토의 전 생애(1901-1989)를 다루고 있으며, 총 61권에 1만 2천여 페이지라는 방대한 분량으로 이루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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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9월 9일, 처음 공개된 쇼와천황실록 판본의 모습
실록임에도 통상본으로도 출판되어 일반인들도 구해서 읽어볼 수 있다.[33] 이는 아마존 재팬에서 구매하거나, 국내에서는 알라딘 서점의 해외 원서 구매를 통해 구매가 가능하다. 다만, 전부 일본어 원문인 데다가 어려운 용어가 매우 많으므로, 상당한 역사 지식과 높은 일어 실력이 요구된다. 국가기관에서 편찬한 자료이므로, 그간 밝혀지지 않은 사료들도 쓰여졌으나, 기존에 있던 『쇼와사』를 대체할 정도로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진 정도는 아니라고 한다. 특히 쇼와 천황이 1978년 이후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왜 그만두게 되었는지, 미국의 오키나와 장기 점령을 희망했는지 등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가 많다.
  • 한도 가즈토시 저, 박현미 역, 『쇼와사』, 루비박스, 2010.
일본의 근현대사 권위자이자 양심있는 논객이라 불리는 한도 가즈토시가 쓴 쇼와 시대의 역사서이다. 책 구성은 태평양 전쟁의 종전을 기준으로, 1권(전전편,1926-1945)과 2권(전후편,1945-1989)으로 이루어져있다. 역사적 사건에 대해 대체로 중립적인 시각에서 바라보고 있다. 전후편은 1960-70년 대까지만 적혀있고 89년까지의 내용은 매우 간략화되어 있는 것이 다소 아쉽다.
  • 에드워드 베르 저, 유경찬 역, 『히로히토 : 신화의 저편』, 을유문화사, 2002.
마지막 황제로 유명한 프랑스 소설가, 기자 겸 정치가인 에드워드 베르가 쓴 책이다. 에드워드 베르는 이 책에 풍부한 사진 자료를 실었고, 히로히토가 군주로서 상당한 권한을 갖고 있었다고 지적하며 새로운 관점에서 그를 바라보았다. 다만 저자가 전문 역사가가 아닌지라 책에 상당한 오류가 보이는데, 대표적으로 일본 화족의 오등작 중 하나인 공작을 “Prince”로 번역했는지 공작이던 고노에 후미마로사이온지 긴모치를 왕자라고 서술한 것이다. 그런 점을 감안하여 볼 것.
  • 허버트 빅스 저, 오현숙 역, 『히로히토 평전- 근대 일본의 형성』, 삼인, 2010.
히토쓰바시대학 교수이자 현재 빙햄튼 대학 교수인 허버트 빅스가 쓴 히로히토의 평전이다. 이 책은 2001년 퓰리처상 논픽션 부문 수상작이며, 히로히토에게 강력하게 전쟁 책임을 물은 책으로 유명하다.
[1] [image][2] [image] 이미지 출처는 여기.[3] 한국어 '미친놈이야'와 발음과 어감이 비슷해서 일제 강점기 당시 조선에서 이를 이용한 언어유희를 많이 했다고 한다. 실제로 창씨개명 당시 어떤 학생이 휘까지 붙힌 '미치노미야 히로히토'로 개명하려다 경찰서로 끌려갔다고 한다. 이를 착안한 것인지 이준익 감독의 영화 박열에서 주인공 박열이 이 궁호를 빌미로 일본 교도관에게 천황을 욕보이면서 개기다가 엄청 쳐맞으며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 나오기도 했다.[4] 이 명칭은 꽤 유구한데 당나라 현종(712~756)이 자신의 생일을 '천장절'이라고 했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일본에서는 코닌 덴노(770~781) 시기에 이 명칭이 들어왔다.[5] 천황과 황태자의 자녀들에게 주어지는, "~노미야(ノ宮)"라는 식의 미야케(궁호). 차남 이하의 아들들은 성년이 되거나 또는 결혼하여 가장이 될 때, 칭호 대신 궁호를 새로 받는다. 딸들은 결혼하면 남편의 성씨를 따른다.[6] 그러나 그의 아들인 아키히토가 2021년 9월 12일까지 계속 생존해 있다면(특히 2021년 생일을 보낼 시) 아버지인 쇼와 덴노의 장수 기록을 경신하게 된다. 현재 아키히토의 건강상(좀 많은 지병을 가지고 있지만) 5년 이상은 더 살 것으로 보이니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 아키히토는 2021년 2월 기준 아버지와 같은 87세가 됐다.[7] 현재 위치는 도쿄도 미나토구[8] 동갑인 이방자 비도 히로히토와 같은 시기에 가쿠슈인에 다녔는데, 그녀 역시 노기 마레스케 장군이 대단히 엄격했다고 회고했다.[9] 계획을 제안한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데이메이 황후와 사이가 나빴던 점도 있다.[10] 왼쪽에서 두번째[11] 쉽게 말하자면 대리청정이다.[12] 교토고쇼에서 마지막으로 즉위한 쇼와 덴노를 끝으로, 교토어소에서는 이젠 즉위식을 거행하지 않는다. 교토어소에 있는 물건을 도쿄고쿄로 가져와 즉위식을 거행한다.[13] 이봉창 의사는 검문을 통과하기 위해 일본 헌병 장교의 명함을 도용했다. 그래서 의심하지 않은 것.[14] "한국인 이봉창이 일본 황제를 저격하였으나 불행하게도 맞지 않았다(韓人李奉昌 狙擊日皇 不幸不中)." 이 기사가 일제를 자극하게 되어, 결과적으로 이 보도는 1차 상하이 사변윤봉길 의사의 의거로 이어진다.[15] 참고로 같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치른 이탈리아 왕국의 사보이아 왕가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 움베르토 2세 부자는 아예 쫒겨나 입국 금지까지 당했다.[16] 다만 A급 전범들이 합사된 것에 대해서는 '이웃 국가들에게 크게 실례가 되는 행동이다', '이곳은 국가를 위하여 희생한 이들을 모셔놓는 곳이다. 헌데 저 자들이 이곳에 모셔질 자격이 있는가?'라며 지속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냈고, 그 뒤로 다시는 야스쿠니 신사에 접근도 하지 않았다. 과거 죄악을 반성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패전으로 인해 폐위와 심하면 목숨까지 날아가는 거 아닐까 두려워해야 했던 히로히토 입장에서는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을 듯. 그러나 천황의 공물이 없으면 야스쿠니 신사의 대제(大祭)를 진행할 수 없기 때문에 관례적으로 또 형식적으로 공물을 보내 전범을 제외하고 국가를 위해 희생한 유족에게 간접적으로 유감을 표명하기도 했다.[17] 그런데 이때 디즈니가 히로히토에게 손을 내밀었을 때 히로히토는 왜인지 손을 피했다고 하며, 이로 인해 디즈니가 당황했다고 한다. 보통 천황과 대화할 때는 직접 말도 못하고 중간에서 시종이 전해주면서 대화를 하는 식이라 악수도 당연히 할 수 없는데, 아마도 그런 예절이 몸에 배어서 무의식적으로 행동했을 수도 있다.[18] 궁내청은 히로히토의 병명을 생전에는 공개하지 않았고 사후에야 공개하였다. 투병 중에 아사히신문이 히로히토의 병명을 췌장암이라 보도했다가 항의를 받기도 했다.[19] 피를 토함[20] 항문에서 피를 흘림[21] 기침하면서 피를 토함[22] '''국가적인 재난'''이나 '''비상 사태''', 그 밖의 '''위기 상황'''이 발생하였을 경우에 쓰이는 차임음이다. NHK에서 비상 사태 또는 위기 상황으로 판단하고, 이 차임음을 울린 것으로 보인다.[23] 해당 영상의 14:08 부분을 보면 천황의 이 보이는데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관보다 비교가 안될 정도로 큰 걸 알 수 있다.(다른 영상 썸네일에서의 모습) 당시 썼던 관은 3중으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원체 한국을 포함한 동양권에서 왕의 장례를 할때 썼던 관은 재궁이라고 부르며 일반인들의 관들보다 크게 짰다.[24] 영상을 보면 한국과 일본의 방송 화질 차이를 느낄 수 있는데, 한국에서 녹화한 영상은 VHS 규격으로 녹화한 것이고 일본에서 녹화한 영상은 베타맥스 규격으로 녹화하였기에 화질 차이가 나는 것이다.[25] 1월 9일에 정상적인 방송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TV광고는 15일까지 자숙을 실시했었다. 쇼와 덴노 사망 당시 정상적인 프로그램을 방송하고 있던 방송국은 NHK 교육TV, NHK 라디오 제2방송뿐이었다.[26] 사면에는 일반사면과 특별사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일반사면같은 경우, 해당하는 범죄의 종류를 정하고 그 죄를 사면하는 경우이고, 특별사면은 '''이미 형이 확정된''' 특정한 '''범죄인'''에 대한 사면이기 때문에 형이 확정되지 않은 사람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의하여 범죄인이 아니게 되므로 사면 대상이 될 수 없다.[27] 어머니 나가코 황후의 숙부인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 왕의 장남. 즉 부모님의 사촌동생, 5촌 당숙과 결혼한 셈. 게다가 모리히로 왕은 데루노미야 시게코 공주의 증조할아버지 메이지 덴노의 외손자이기도 하다. [28] 신적강하[29] 큰언니인 히가시쿠니 시게코와 똑같이 친족인 5촌 당숙과 결혼[30] 장갑(오페라 글러브)에 대한 악몽은 며느리 미치코 황후와 손자며느리 키코 비에게도 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31] 게다가 유럽 순방 당시인 1921년은 일본에 지하철이 생기기 이전이었다. 일본 최초의 지하철인 긴자선은 히로히토가 덴노로 즉위한 이후인 1927년에 개통되었다.[32] 아버지인 다이쇼 덴노데이메이 황후와의 사이에서 아들이 넷이라 후궁이 필요가 없어서 들이지 않은 것이라, 그 시절까지는 "황후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후궁을 들인다"는 정서가 남아 있었다.[33] 통상본은 2015년부터 2019년까지 총 18권으로 나뉘어 출판되었다. 일본은 근대 이후인 메이지 시대부터 실록을 편찬했는데, 메이지 덴노의 실록인 <메이지천황기>와 다이쇼 덴노의 실록인 <다이쇼천황실록>은 시중에 따로 출판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