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고 헤이하치로
1. 개요
일본 제국의 해군 제독. 러일전쟁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한 쓰시마 해전에서 일본 해군을 승리로 이끈 지휘관이었다.
2. 상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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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7년 유럽 유학 당시 찍은 사진
규슈 가고시마현에서 태어났으며[2] 원래 어렸을 때 이름은 '쥬고로(仲五郎)'였으나, 성인이 되면서 '헤이하치로'로 이름을 바꿨다. 집안은 13세기부터 무사 집안이었으며, 이런 전통의 영향으로 도고 헤이하치로도 무예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웃 사람들에게서 '반항아'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반항이 잦았다.
도고 헤이하치로는 이후 자신의 능력을 더는 반항으로 낭비하지 않고 제대로 발휘하려고 대포를 다루는 기술을 배워서 사쓰마 지역의 다이묘인 시마즈 다다요시의 휘하 사무라이가 되었다. 사쓰에이 전쟁에도 사쓰마 번의 해안 포대 포술장으로서 참전했었던 전력이 있다. 그러던 중 1863년 어느 날, "앞으로 있을 외세의 침략에서 조국 일본을 수호하려면 먼저 막강한 해군력을 육성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메이지 유신 이후에 해군 사관으로 임관해 1871년부터 1878년까지 동료 11명과 함께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 이 8년간의 유학 생활에서 돌아온 1878년 7월에 중위, 12월에 대위, 그 다음해 12월에 소좌가 되는 등 빠르게 승진을 계속했다. 1894년 청일전쟁이 일어나자 순양함 '나니와'의 함장을 맡아 풍도 해전, 황해 해전, 웨이하이 전투 등에서 활약했다.
그 후 1904년 러일전쟁 때는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에 올라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 제국이 자랑하는 발트 함대를 함선의 성능과 진형, 그리고 러시아 함대의 약점을 정확히 찔러서 완전히 박살냄으로써 사기 측면에서 일본의 승리로 기울어 가던 전세를 완전히 굳혔고, 승전 이후 국가적 영웅으로 등극한다.
3. 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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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 사관 예복을 입고, 황태자 신분으로 육군 및 해군 대좌이던 시절의 히로히토와 함께 찍은 사진.
도고는 몇 안 되는 '''진짜 군인'''으로 많은 존경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뤼순 요새를 봉쇄하다가 전함 2척이 기뢰에 접촉하는 바람에 침몰되는 대참사 후에 함장들이 보고하러 와서 눈치만 살피자 오히려 따스하게 격려를 했다거나, 발트 함대 격파 이후에는 부상당하고 포로가 된 지노비 로제스트벤스키 제독에게 직접 문병을 가는 등, 부하나 패자에게 너그러웠다. 이런 고매한 인품과 행동으로 생전에 전 일본 국민으로부터 추앙받았다.
그러나 정작 퇴역 이후에는 지나치게 주변에서 추앙한 탓인지 여러 가지로 독선적인 인물이 되었고, 결국 1920년대와 1930년대의 불황기와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 체결 시기에 이르러서는 일본 해군의 체질 개선을 가로막은 원흉이 되고 말았다. 당장 12인치 포를 12문 탑재한 카와치급이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되지 못한 것은 적어도 주포 중 일부는 적함보다 강력한 것을 달아야 한다고 주장한 도고 헤이하치로의 실책이 컸다. 덕분에 카와치급은 12인치 45구경장과 12인치 50구경장 포를 혼용하는 바람에 일제사격과 협차같은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사용하는 함포사격술을 사용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영국에서 기술을 수입할 목적으로 공고급 순양전함을 도입하게 된다. 문제는 쓰시마 해전에서 드레드노트급 전함이 탄생하는 계기를 만들어낸 제독이 도고 헤이하치로라는 것이며, 따라서 동일인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실책이었다.
게다가 본인이 의도한 결과야 아니었겠지만, 해군 복제 개선을 막음으로서 일본 해군 장교들이 당시 미 해군 근무복을 참고해 만든, 목이 꽉 조여 시대에 뒤떨어지고 불편한 1종 군장(동근무복 겸 동정복)을 입고 싸우게 만든 장본인이기도 하다. 1920년대에 해군 장교 동계 피복을 당시의 영국 및 미국처럼 목이 트인 더블 버튼에 셔츠와 넥타이를 안에 착용하는 보다 국제표준에 가까운 것으로 바꾸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 도고에게 의견을 묻자 도고는 딱 잘라서 "이 옷은 쓰시마 해전 승리의 정수다."라는 말로 반대 의견을 밝혀 무산시켰다. 위 히로히토와 함께 찍은 사진 속에서 입은 동예복은 그나마 타국 해군의 피복과 유사한 형태다.
노기 장군 사후, 그의 뒤를 이어 히로히토의 황태자 전담 교사를 맡았는데, 히로히토는 노기 장군을 훌륭한 스승으로 여겼으나 도고 제독은 박하게 평했다고 한다.
장남 도고 효는 군대에 가지 않고[3] 관료로 살다가 1969년에 사망, 차남 도고 미노루 제독은 해군 장교가 되어 소장까지 진급, 태평양 전쟁을 겪고 1962년에 죽었다.
4. 가족
아버지: 도고 사네토모
어머니: 도고 마사코
첫째형: 도고 사네나가
누나: (요절)
둘째형: 도고 히로유키(요절)
셋째형: 오구라 소쿠로(양자)
남동생: 도고 사네타케
장남: 도고 효 - 손녀: 도고 료코
차남: 도고 미노루
장녀: 도고 야치요
차녀: 도고 치요코 = 사위: 소노다 미노루
5. 여담
- 성격은 좀 예민했는지 저 시기에 어느 신문기자가 가족 인터뷰를 할 때 부인이 "내가 부업을 좀 해서 살림에 보태야 했다"라고 웃으며 농담을 하자 난 내 가족 굶긴 적 없어!라면서 버럭 화를 내서 기자를 겁먹게 한 일화도 있다. 의외로 화날 땐 불같은 남자. 젊을 적 치기어림 때문일 가능성이 높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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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89세까지 장수를 누린[4] 어머니 도고 마사코 東郷益子.
- 일반적으로 과묵하고 위엄있는 인상이지만 한없이 가벼운 모습도 종종 보였다. 만년에 가쿠슈인에 초대되었을 때 강연 중에 학생들에게 "미래에 무엇이 되고 싶은가?"라고 한 질문에 "군인이 되고 싶다."고 대답한 학생에 "군인이 되면 죽는거야.", "정 되고 싶다면 육군 말고 해군에 넣어. 해군에 들어오면 죽지 않는다." 라고 발언하여 육군 대장이자 철혈장군으로 명성이 높았던 노기 마레스케를 격노케 한 전력이 있다. 그러나 나이로도 기수로도 선배인 도고를 깔 수 있을 리가… 게다가, 러일전쟁때 노기가 갈아먹은 일본육군을 세자면 노기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5]
- 쓰시마 해전 당시 도고 제독의 함대에서는 그의 전술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은 한명의 사관후보생이 있었다. 그가 바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당시 야마모토는 대포를 조작하던 도중 두 손가락을 잃었다고 한다. 사실 야마모토가 받은 감명은 어쩌면 전술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도고의 사후, 그의 이름을 딴 신사가 지어지자 "성가신 일(군축조약)을 해준 대가로 신이 되었으니, 가서 절을 해주면 뭔가 얻을 일이 있을 지도 모르겠다"며 비웃었다는 말이 있다. 야마모토는 그의 동료가 추방당한 일도 있고, 군축조약체결의 책임자가 도고였던 까닭에 감정이 대단히 좋지 않았다고 한다. 야마모토 사후 신사가 지어지려는 움직임을 지인들이 막아선 것도 그래서였다.
- 쓰시마 해전 당시 한 훈시인 "황국의 흥망은 이 일전에 달려있다. 각 인원은 한층 더 분발 노력하라"(皇国の興廃この一戦にあり。各員一層奮励努力せよ)는 그를 대표하는 명언이다.
- 쓰시마 해전이 벌어진 1904년에 창업한 어느 사케 양조회사는 이 승리를 기념해 회사 이름을 아예 '도고 주조'로 지었다.
- 쓰시마 해전 승리를 기념하는 연회가 황거에서 열렸을 때 일본에는 미 해군의 전함 오하이오[6] 가 정박 중이었다. 일본 측에서는 이 미 해군 장교들에게도 초청장을 보냈는데, 당시 선임 장교들은 자기들끼리 노느라 제의를 거절하고 미국해군사관학교를 갓 졸업한 장교후보생[7] 몇명을 보냈다. 도고는 이들을 환대했고 이들 중 한 장교후보생은 도고에 대한 빠심을 갖게 되어 평생 이 순간을 기억하게 된다. 그 인물은 바로 체스터 니미츠였다. 참고로 미카사 함의 보존을 강력 주장한 사람이 니미츠 제독이다.
- 핀란드에서는 '도고 맥주'가 판매되고 있다. "Amiraali[8] 맥주"라는 전 세계 명제독들의 초상이 레이블 된 맥주 중의 하나다. 어찌됐든 그 덕분에 일본에서 많이 수입해 간다고 한다.
- 영국 유학 당시 먹었던 비프 스튜의 맛을 못 잊어서 함선 조리장에게 비슷한 요리를 만든게 한 것이 전후 민간에 퍼져 니쿠쟈가(고기감자조림)로 변형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사실 웹상에 유독 괴상한 메뉴들이 떠돌아다녀서 그렇지, 영국 요리 중에는 생각보다 맛있거나, 전세계에 보편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요리들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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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묘지는 일본 도쿄의 명사들이 다수 안장되어 있는 다마레이엔(多磨霊園)에 있다. 바로 옆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진주만 공습을 지휘했으며 도고 제독을 존경했다고 알려진 야마모토 제독이 나란히 묻혀 있다. 좋은 의미로 유명한 이들만 있는 게 아니라서, 임팔 전투 패전의 원흉 무타구치 렌야 장군 등도 묻혀 있다.
- 동방의 호레이쇼 넬슨이란 별명을 쓰시마 해전의 대승을 전해들은 서양 기자들이 도고 헤이하치에게 붙였다고 한다.
- 쓰시마 해전에서의 승리 이후 기자들이 "당신은 일본의 넬슨 제독이다!"라고 도고를 칭찬하자 "어디 감히 넬슨 따위를 나와 비교하느냐!"며 화를 냈다고 한다. 이에 기자들이 "그렇다면 당신은 일본의 이순신이다!"라고 하자, 또 다시 화를 내며 "어디 감히 나 같은 자를 바다의 신 이순신에게 비교하느냐! 그건 이순신에 대한 모독이다!"라고 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순신 장군이 이만큼이나 대단한 장수였다.'는 의미로 한국에 많이 알려져 있는 일화인데, 정작 이 이야기의 원 출처인 '일조중 삼국 인민 연대의 역사와 이론(日・朝・中三国人民連帯の歴史と理論)'이라는 책은 전문 역사 서적도 아닐 뿐더러, 해당 발언의 1차 사료가 제시되어 있지 않기에 실제 여부도 불분명한 터무니없는 낭설이다.
실제로 도고가 '이순신은 나의 스승입니다'라고 말했다는 구절 역시 한국인 실업가 이영개에게 들은 이야기일뿐이며 한국인 실업가로 부터 들은 이야기이기에 신빙성이 제로에 수렴한다. 실제로 도고 제독이 이순신을 추앙했다는 일화들은 전부다 출처가 불분명 하며 전해들은걸 한국인이나 재일교포들이 옮겨 적은 "카더라"수준이다. 세계에서는 역사적 사실로 전혀 인정하지 않는 내용이며 반일 프로파간다에 의한 이순신 띄우기의 일환인 창작 정도로 보고 있다. 당연히 도고가 넬슨을 무시했다는 것도 허무맹랑한 소설이다. 사실 이영개는 일제가 세운 괴뢰국인 만주국의 관리로 일한 친일파였으며, 그가 도고가 이순신을 존경했다는 낭설을 한국에 퍼뜨린 이유는 한국인들의 반일 감정을 누그러뜨리기 위해서였다.
- 러시아 제국과 원수 지간이었던 오스만 제국은 러일전쟁에서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지켰지만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가 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오스만 제국 국민들이 크게 열광했고 도고 제독에 대한 인지도와 인기가 급상승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의 소설가이자 여성 운동가인 할리데 에딥은 자기 아들의 이름을 도고 헤이하치로에서 따 와 '토고(Togo)'라고 지었다.
6. 창작물에서
드라마 언덕 위의 구름에서는 와타리 테츠야가 연기했다.
도고 헤이하치로도 후손들의 모에화를 피하지 못했다. 일본에서 출간된, 《여체화!! 세계장군열전~20세기편~(にょたいか!!世界の将軍列伝~20世紀編~)》에서 도고 헤이하치로를 충격의 미소녀로 모에화했다. 링크
[훈사등] 욱일소수장[훈일등] 욱일대수장[1] 대한제국 최고 훈장[2] 그래서 가고시마시 기온노스에 기념 공원이 있다.[3] 딱히 징병을 기피한 건 아니고, 메이지 정부 시절엔 징병제 도입 초기라 징집 제외 대상이 매우 많았는데, 집안의 장남 역시 징병 대상에서 제외됐었다.[4] 1812~1901년으로 지금 시각으로 봐도 꽤나 장수한 편이다.[5] 그러나 노기 항목에도 일부 나와 있듯이 그 당시엔 누구라도 노기가 한 행동(포격 이후 기관총 진지로 보병 일제 돌격)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 러일 전쟁이 1차대전 당시의 참호전 고기분쇄기의 프리퀄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노기가 비판받아야 한다면 1차대전 당시 기술 부족으로 요새를 점령하기 위해 일제 포격 이후 일제 돌격이라는 선택지 밖에 쓸 수 없던 연합군, 추축군 장성 모두들이 다 비판받아야 한다.[6] 메인급 전함 3번함으로 이 이름은 나중에 페이퍼 플랜이 된 몬태나급의 2번함 (BB-67)로 계승된다[7] 이 신분은 준사관 계급에 상당하는 위치인데, 20세기 초까지 미국은 사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준사관으로 2년쯤 복무하다가 소위 임관시험을 통과해야 정식 장교 생활을 할 수 있게끔 했다. [8] 핀란드어로 '제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