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경산
朴景山
(1081 ~ 1158)
1. 개요
고려의 문신.
2. 생애
박인량의 셋째 아들로 문종 35년(1081)에 태어난다. 큰형 박경인과는 24년 터울이다. 선종 7년(1090) 아버지 덕에 음서로 장례령동정에 임명된다. 예종 원년(1106) 경령전판관에 오르고 이후 예부시 을과에 2등으로 급제한다. 관직이 여러 번 바뀌어 예빈주부 겸 직사관에 이른다.
예종 시기 보문각이 설치되는데 박경산은 대악령을 지내다 교감직을 맡는다. 인종 때는 중서주사에서 좌정언 지제고에 임명됐고 예부원외랑, 전중시어사 등을 역임한다. 인종 12년(1134) 8월 차(借)예부시랑으로 금나라에 가서 천청절(天淸節, 황제의 생일)을 축하한다. 귀국한 뒤에는 이부시랑 겸 태자우유덕으로 승진하고 이듬해 국자사업 충사관수찬관에 제배되며, 곧 국자좨주 지도성사에 오른다.
인종 21년(1143) 남성시를 주관한다. 당시 유행하는 문체가 벌레를 새기는(彫蟲)듯 했는데 박경산은 이에 분개해 당시 문체로 쓴 답안은 전부 물리쳐버렸다. 그 결과 선발된 황보존(皇甫存) 등 합격자들은 문장이 일반적인 격식에 구속받지 않아(疏放) 크게 될 기세가 있는 자들이었다. 수년 뒤 박경산의 문생 중 문장으로 과거에 합격하는 자가 끊이지 않았으며, 모두가 탄복해 '사람을 알아본다(知人)'고 일컫는다.
인종 24년(1146) 어려서부터 친하게 지낸 경렬공 한유충이 죽어 그 묘지명을 짓는다. 당시 관직은 태중대부 검교태자태사 행전중감 지상서도성사. 최종 관직은 금자광록대부 판위위사 어서검토관에 이르렀으며[1] , 의종 3년(1149) 은퇴한다. 은퇴 이후에는 서화를 연습하고 즐기며 유유자적하고, 간혹 불교 서적을 읽으며 즐거워한다. 의종 12년(1158) 2월 18일(음력) 78세의 나이에 병으로 자택에서 죽는다. 같은 해 겨울 개경 서북쪽의 강음현(江陰縣)에 장사된다.
3. 가족관계
- 부: 박인량
- 본인: 박경산
- 전처: 왕씨
- 아들: 박효지
- 아들: 박효진
- 딸
- 사위: 이원보
- 후처: 왕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