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서

 

蔭敍
1. 개요
2. 고려
3. 조선
4. 현대판 음서
5. 일본


1. 개요


고려조선에 있었던, 고위 관리의 친인척에게 아무 조건 없이 하급 관리직을 주는 관리 임명 제도. 음보(蔭補), 문음(門蔭), 음사(蔭仕), 음직(蔭職)이라고도 표기하며, 음덕(蔭德)으로도 표현한다. 음서로 선발된 관료는 음관(蔭官)으로 불렀다.
중국의 문벌귀족에게 구품관인법이 있다면 고려의 문벌귀족에게는 음서가 있었다. 귀족의 재산을 보장하는 '''공음전'''(功蔭田)과 함께 문벌귀족 형성의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2. 고려


공음전과 함께 고려를 말아먹게 한 대표적 폐단으로 꼽히는 제도로, 삼한공신의 자손들을 후대하라는 최승로의 시무28조를 시작으로, 성종 대에 당과 송의 음보제도를 들여와서 5품 이상의 관료들에게 관직을 주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5품 이상 고관들에게 주는, 관직의 세습을 합법적으로 보장해주는 제도였다. 대상 범위가 '''아들, 손자, 외손자, 사위에게까지 주어졌다.'''[1]
공음전과 함께 문벌귀족의 조건이 되는 특권으로서 부와 권력의 세습을 뒷받침해주는 제도였다. 공음전이 귀족의 수조권을 보장함으로서 귀족들의 경제적 기득권을 보장했다면 음서는 귀족 자제들의 관료 진출을 도움으로서 정치적 기득권을 보장해 주었다.
지금으로 치자면 아버지나 아버지의 친인척, 혹은 어머니의 친인척, 혹은 삼촌, 장인 등이 고위 공직자이면 '''태어날 때부터 놀고 먹어도 공무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고려 시대에는 음서를 받을 수 있는 친인척 관계가 매우 폭 넓었다. 더구나 귀족들은 계급내혼 관계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에 귀족의 자제라면 거의 누구나 저 넓은 음서 수여가 가능한 혈연 관계망 어디에선 가는 음서로 관직을 따낼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귀족들이 계급내혼을 하고 있던 것은 이처럼 음서의 범위가 광범위함에도 지배층이 과도하게 확대되지 않게 막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물론 고려 사람이 바보는 아니라 음서로 받는 관직은 대개 산직[2]일 뿐만 아니라 품계가 낮았기 때문에 이를 통해서 바로 고위 관직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음서가 주어지는 것은 대개 10대 초반이었다. 크게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한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승진하기에 이처럼 빠르게 품관직을 얻는다는 것은 이후 고위 관직을 얻을 기회가 많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이는 오직 과거로만 입사하는 신흥세력과의 차이를 크게 벌리는 요인이 되었다. 과거 급제자가 20대에 초직을 얻었던 반면 음서를 받은 귀족 자제들은 이미 10대부터 관직 경력을 쌓아왔기 때문에 이후 다시 과거에 급제할 경우 처음부터 과거로 입사한 이들보다 훨씬 유리하게 고위직으로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직을 주는 것과 요직에 배치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로, 음서로 관직을 제수받는다고 해도 자신의 실력을 증명하지 못하면 한직에서 관료 인생이 끝날 수밖에 없었다고 하니 일단 고위 관직에 무능한 놈이 들어가는 것은 힘들었던 모양이다. 오히려 정말 잘나가는 귀족들은 음서는 물론 과거까지 급제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실제로 도병마사나 추밀 등의 고위 구성원들의 출신 성분을 보면 과거(실력)+음서(신분)가 많았다.
또한 후대인 조선 만큼은 아니지만 음서로 관리가 된 자에게는 관직 임명의 제한이 어느 정도 있었다. 물론 고려는 조선만큼 필수 관직을 무조건 못 거치는 수준은 아니었지만, 과거 급제를 요구하는 관직 중에서 '''과거 시험 감독'''인 '''지공거'''가 고려 사회에서 높은 관직으로 나아가는 데 필수적인 '''인맥의 핵심'''이라 음서 출신 관리가 딱히 돋보이는 능력이 없었다면 요직에 진출하기 위해서 과거를 볼 필요가 있었다. 지공거는 당시의 과거 제도 특성상 시험의 당락을 좌우했기 때문에 학벌을 만들었을 정도로 중요한 요직이다. 실제로 현재 남아있는 고려 기록상 처음 과거 제도를 도입할 때의 지공거는 중국에서 과거를 보고 온 사람이 맡았고, 그 뒤의 지공거 임명자는 전원 과거 급제자였다. 당시에도 관직 특성상 과거 급제자도 아닌 사람에게 맡길 순 없었다고 생각한거 같다.
따라서 음서만으로는 아버지나 장인 어른이 누렸던 정도의 고위 관료까지 오르긴 힘들며, 만약 대대로 무능하다면 품계가 떨어지다 도태될 수밖에 없다. 조선 양반보단 그 떨어지는 속도가 느리니까 거기까지 떨어질 가능성도 낮긴 한데, 다른 나라들의 오직 혈통만 보는 귀족과는 달리 완전히 과거를 안 보고 혈통으로 무한하게 세습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나름대로 실력을 보여야 하는 것. 따라서 어떻게든 능력을 인정받을 기회를 찾으려 했고, 기회가 없었다면 음서 혜택을 받을 권리가 있음에도(혹은 음서로 오른 뒤에도) 스스로 공부를 해서 과거에 응시하는 일도 있었다. 물론 유능하다 쳐도 일부 기득권층 위주로 고착화되어 썩는 것은 피할 수 없었지만, 최소한 이 제도만으로 무능력자가 혈통만 믿고 날뛰는 상황은 잘 벌어지지 않는다. 신분을 믿고 치고 올라오려고 해도 어차피 주변 사람들도 대부분 자기랑 신분 면에서 꿀리지 않는다면 결국 그 안에서 의미 있는 건 실력 뿐이니까, 기득권층이 떼거지로 무능의 결정체가 되지 않는 이상 결국 개중에서는 유능한 자만 올라가는 것은 필연적이다. 물론 오래 고착되면 그런 말로를 맞을 수 있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실제로 음서로 출세한 뒤 권력의 정점에 올랐던 이인임 등을 보면 모두가 정치적, 군사적 역량을 충분히 갖고 있는 자들이었다. 즉 처음 벼슬은 그저 가문 덕으로 받았지만 본인의 능력을 확실하게 입증을 했기에(혹 능력이 없으면 능력을 갖추어야만 대우 받을 수 있었기에) 단순히 가문만 믿고 올라온 무능한 자로 간주할 수가 없다.
이 문단은 음서를 비판하는 서술과 변호하는 서술이 동시에 있는데, 실제 사학계도 그렇다. 현재 고려 사회의 성격에 대해 귀족 사회론과 관료 사회론이 대립하고 있는데 음서에 대해서도 자주 행해지던 문벌귀족들의 권력기반이다vs특수한 경우에만 허용한 것으로 관리에게 주는 일종의 포상이다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고 있다.[3]
그리고 고려의 음서가 고려를 말아먹긴 했어도 다른 지역이 고려보다 많이 나았다고 단정하기에도 무리수가 있다. 잘해봐야 과거 제도의 본고장 중국 정도? 그 외에는 관리 임용은 거의 대다수가 고대로부터 이어진 세습or추천(그 외엔 매관매직)이나 나중에 중국에서 배워 온 과거 제도가 정착하는 상황이었으니, 딱히 고려보다 나을 것도 없던 셈이다.

3. 조선


조선시대에도 음서제도는 계속 유지되었으나 고려시대에 비하면 상당히 깐깐한 조건을 유지하였다. 일단 명칭부터가 문음으로 바뀌었으며, 범위도 고려때에 비하면 상당히 축소되었다. 고려때는 5품 이상부터 남성 가족등이 참여할 수 있게 넓게 포괄했지만 조선은 일단 2품 이상의 관료 또는 실직 3품 관료의 아들, 조카, 손자, 사위, 동생에 한하여 음서를 누릴 수 있었으며, 과거에서 급제한 인재들을 우대하기 위해 승진할 수 있는 상한 품계를 두었고, 관품도 대거 낮춰서 음서로 받을 수 있는 관직은 별 실권도 없는 자리나 명예직을 내줄 정도로 차별하였다.
또한 조선에서는 음서 자격이 있다고 무조건 관직을 주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시험인 문음취재를 치뤄 합격해야 관직을 받을 수 있었다.[4] 문음을 통해 관직에 오르더라도 최소한 관직을 수행하는 데 있어 필요한 자질은 갖출 것을 요구한 셈이다. 문음취재에서 떨어진 사람도 꽤 많았다고 한다.
무엇보다도 음서로 임용된 경우에는 제도적으로 청요직에 나갈 수 없었는데, 조선시대에는 청요직을 거치지 못하면 고위관료로 승진할 가능성은 0%나 마찬가지였다.
제도적으로뿐만 아니라, 과거 출신자들의 견제와 멸시도 심했다고 한다. 고려시대의 음서는 당사자가 좀 쑥스럽기는 해도 꿀릴 건 없는 제도였던 반면에 조선시대에 음서로 관직에 진출하는 것은 상당히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보통은 문음으로 합격하더라도 이후 다시 과거에 응시할 수밖에 없었다.
대표적인 인물이 한명회로, 할아버지가 명나라에서 조선건국을 인정받아온 개국공신의 장손이였는데 과거합격을 못해서 음서로 개성의 말단직에서 일했다. 그러던 중 관리들 친목모임에 참여했다가 개국공신 가문 후계자임에도 음서로 관직에 들어왔기에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그리고 계유정난으로 '''사실상 조선의 2인자가 된 상황'''에서도 '''과거시험을 쳤다.'''
심지어 그 윤원형도 왕의 처남이라는 신분으로 음서를 통해 벼슬을 얻었지만, 과거시험에 급제한 뒤에야 제대로 된 벼슬길에 진출했다. 참고로 윤원형이 음서로 얻은 직책은 임금의 안부를 묻는 직책(...)이었다. 내관들이나 하는 직책을 왕의 처남이니 억지로 만들어 준 것.
면신례라고 하는 관료들의 신참의 군기잡기도 음서와 관련이 있다. 고려말 과거 급제자들은 음서 출신을 아니꼽게 여겨서 갈구는 것이 이어지면서 조선시대에는 신참 관료에게 엄청난 부담이 되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로 갈수록 집권세력의 족벌체계가 확고히 자리잡으면서 음서제도는 고려시절 못지않은 유력양반들의 관직 세습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래도 고려시대와는 달리 음서로 벼슬하면 아무리 잘해도 군수(종4품) 또는 목사(정3품)정도의 지방관료였다. 고려시대에는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전제가 붙긴 하지만 정1품도 가능했던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물론 실제로는 고려든 이때든 그 정도쯤 될 만큼 유능한 관리라면 거진 다 이미 과거에 합격한 인재일테니 벼슬 상한선이라는 개념은 후술하는 낙방도사 이후 같은 극히 드문 예외를 제외하면 사실 큰 의미가 없다. 대신 조선 후기에 이르면 과거시험 자체가 유명무실화되지만….
능력과는 별개로 벼슬 상한선이 작용한 극단적인 예인 영조 대의 좌의정 이후는 인조반정 공신 이시백의 5세손이었다.[5] 그런데 그는 노인이 되도록 30번이나 과거에 응시했지만 미역국만 먹었고, 그에 비해 동생인 이유는 그가 25살 때 이미 급제했다. 그래도 좋은 가문 덕분에 음서로 나주 목사를 지내고 있었음에도 과거에 합격하지 못했다는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 때문에 잠시 한양에 올라와 있을 때, 마침 동생의 생일잔치가 있었고 꼭 참석해 달라는 동생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참석하긴 했는데, 동생을 비롯한 동석하는 대감들은 거의 다 자신보다 품계가 높은 관료들이었다. 그 때문에 스스로 말석에 가 앉았지만 주인의 형이라 주위 사람들이 권해 상석에 앉았다.
이 때 동생이 한 점쟁이를 불러 점을 보게 했는데, 잘난척이 심하던 호조 판서가 한 명 한 명 언제 점을 보겠냐며 이 중에 누구가 가장 먼저 정승에 오르겠나 봐달라고 했더니 그 좌중에서 하필이면 나주 목사 이후를 지목했다. 이후는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열등감 때문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한 자신이 어떻게 정승이 되겠냐면서 화를 내고 나왔다. 그 날 밤, 형과 대면한 동생은 이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인데 마침 곧 과거가 있으니 응시해 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고, 응시하자 하필이면 평생 인연이 없던 과거에 덜컥 붙어 버렸다. 그의 나이 56세였으며, 동생이 과거에 합격한지 31년 만이었다. 당시 한양은 낙방도사가 드디어 급제했다고 떠들썩했다.
그리고 7년 후, 이후는 정말로 그 잔치에 동석했던 판서들보다도 먼저 우의정에 올랐다. 점쟁이의 점이 맞아떨어진 셈인데, 이후는 원래 능력만 따지자면 정승감이라는 평가를 받았으나 과거를 급제하지 못한 탓에 여지껏 승진이 멈춰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저 일화가 있던 시점의 이후가 지내던 관직인 나주 목사는 평안 감사, 과천 현감과 함께 조선시대 지방관 중 3대 요직이라, 명문가의 후예라는 배경만으로 올라갈 만한 만만한 관직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끝은 불행했으니, 이후는 얼마 뒤 좌의정 겸 세자시강원 책임자이자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부에 임명되었는데, 문제는 모셔야 할 세자가 바로...... 그 뒤 어느 세자의 평양원유 사건에 연루된 그는 세자와 영조 사이에 끼여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다가 결국 영중추부사 이천보, 우의정 민백상과 함께 음독자살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결국 과거 급제로 인해 그의 운명은 파란만장한 생으로 바뀌게 된 셈이다.

4. 현대판 음서


이 음서 제도라는 것이 국사를 배우다 만날 수 있는 주요 개념이다 보니 오늘날 와서도 어떤 제도를 비유적으로 말할 때, 주로 언론에서 '현대판 음서제도'라는 식으로 불리는 경우가 종종 있다. 뜻이 뜻이다 보니 '''금수저''' 표현과 자주 엮인다. 대체로 자신의 노력,능력과 상관없이 빽으로 대학/직장 등에 들어가는 케이스에 주로 쓰인다.
이런 소리를 자주 들으며 비판 받는 것으로 수시[6], 입학사정관제, 기여입학제, 특별전형[7], 5급 민간인특채, 로스쿨[8] 등이 있다. 물론 음서와는 달리 다른 목적으로 운용되거나 직원에 대한 혜택등의 이유로 도입된 경우이므로 취지를 잘 살리면 별 문제 없는 제도지만, 언제나 그렇듯이 제대로 안 돌아갈 경우에는 그야말로 현대판 음서가 된다.
시드노벨의 개와 공주에 나오는 가상의 국가 대한왕국에서는 아직까지 남아있는 듯 하다.
연예계에서 실력도 없으면서 연기를 하는 뮤지션들이나 특채로 선발된 코메디언들이 많이 듣는 말이 낙하산 인사다.
특히나 연예인들의 2세가 아버지의 후광으로 방송에 진출하는 사례가 늘고 있어서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다. 연예인 2세, 이쯤되면 금수저 넘어선 금핏줄 아예 그게 컨셉인 방송까지 나왔다.
정부기관중에서도 외교부에 이러한 음서가 많다.

5. 일본


蔭叙(음서)가 아니라 蔭位(おんい, 음위) 혹은 蔭階(おんかい, 음계)라고 한다. 물론 개념은 한국과 같다. 蔭位の意味・解説 蔭叙の意味・解説
그리고 일본의 외무성도 어찌된게 한국 외교부와 마찬가지로 직원들중 외교관의 자녀가 타 성청에 비해 많았었다.[9]

[1] 외가는 음서의 혜택을 볼 수 없었던 조선과 달리 외손이나 사위 등 외가도 친가와 똑같이 음서가 가능했던 점은 조선보다 고려시대가 여권이 더 높았다는 주장의 근거 중 하나로 곧잘 사용되고 있다.[2] 녹봉이 나오는 실직(實職)의 반대로 녹봉을 받지 못할 뿐 아니라 실권이 없었다.[3] 역사비평 편집위원회, '논쟁으로 읽는 한국사1', 역사비평사, 2009, p174-175[4] 현재 채용절차에 비유하면 서류 통과만 가능할뿐, 최종적으로 채용되기 위해서는 다른 일반전형 지원자들과 마찬가지로 GSAT와 같은 입사시험, 면접절차를 거쳐 합격해야 한다는 의미로 보면 된다.[5] 참고로 이시백의 아버지 이귀도 음서 덕에 인조반정 전에는 군수 직을 여러 번 역임했었다.[6] 정확히는 학생부종합전형, 최소한 교과내신전형과 논술 등 다른 전형에선 자격이 사실상 제한이 없는데다, 자신의 능력 유무가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교과내신인 경우는 비교내신이란 점에서 논쟁이 된다.[7] 단 장애인,서해5도 특별전형은 제외이다. 그 밖에도 특성화고 전형과 농어촌전형에도 음서란 표현을 쓰는일이 거의 없다. 물론 농어촌전형인 경우는 위장전입과 일부 읍/면의 동으로 승격 만류 등 문제점이 있긴 하다.[8] 한때 사법고시 부활론이 추진된 이유이기도 했다. 적어도 사법고시는 자신의 능력의 지분이 높았기 때문[9] 기본적으로 외교관들은 여러 나라들을 순환근무하므로, 외교관의 자녀는 외국어 능력 습득이 쉽다. 물론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기는 하지만, 비싼 돈 내고 유학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국가가 모든 비용을 지원하는 상황이다. 다만 운이 나빠서 자녀의 어린시절에 후진국이 걸리면 그닥 쓸모 없는 언어를 습득하게 되지만, 출산을 앞두었거나 자녀가 어리면 되도록 후진국으로 발령하지 않는 것이 관례이고 (후진국으로 가장 많이 가는 외교관들은 젊은 독신 남성이다) 개도국으로 가더라도 자소서와 면접 때 어필할 수 있는 큰 플러스 요인이 된다. 아무튼 이런 이유로 외교관 자녀들은 기본 2개국어를 하고 3개국어를 하는 사람들도 꽤 있다. 외교관의 자녀들이 외교관이 되는 비율이 높은 것도 이것이 한몫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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