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충

 

<colbgcolor=#FEDC89><colcolor=#670000> '''한유충
韓惟忠'''
'''시호'''
경열공(敬烈公)
'''성씨'''
한(韓)
'''이름'''
주(柱) → 유충(惟忠)
'''자'''
안석(安石)
'''생몰년도'''
음력
1080년 ~ 1146년 9월 17일
양력
1080년 ~ 1146년 10월 24일
1. 개요
2. 생애
2.1. 생애 초
2.2. 예종 시기
2.3. 인종 시기
2.4. 의종 시기
3. 평가
4. 가족관계
4.1. 조상
4.2. 자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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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려의 문신.

2. 생애



2.1. 생애 초


청주(淸州, 충청북도 청주시) 관내의 대흥군(大興郡, 충청남도 홍성군) 사람으로, 검교우복야 수상서호부시랑 어서검토관을 지낸 한원경(諱元卿)과 오원군태부인(五原郡太夫人) 이씨의 아들이다. 한유충의 어린 시절 이름은 한주(韓柱)였는데, 모친 이씨가 태몽으로 기둥()이 하늘을 뚫는 것을 보고 지은 것이다. 16세에 스승(外傅)으로부터 학문을 배워 21세에 이르러 사성시(司成試, 성균관시)에 합격한다. 그리고 숙종 9년(1104) 진사시의 복시에서 당시 태자였던 예종의 선발로 을과 제2인으로 급제한다.

2.2. 예종 시기


남경유수관 장서기에 임명됐다가 3년 임기를 채우고 개경으로 돌아온다. 한유충은 장서기 2년차에 남경에 행차한 예종의 눈에 들었는데, 곧 내시부에 속하게 되며 어서교감에 임명된다. 에 사신을 파견할 때 한유충은 도부서에 임명돼 8~9년간 재임한다. 예종 13년(1118) 에 갔다가 돌아와서는 우정언 지제고에 임명되고 또 다시 내시에 속한다. 그 이후에는 전중내급사로 태자(훗날의 인종)를 모셨으며 관직이 예부원외랑에 이른다.
한유충에 묘지명에는 병상에 누운 예종이 문하시중 김인존과 나눈 대화가 남아있다. 시중 김연(김인존)이 어소에 들어가(入內) 예종을 간병하는데 왕이 묻기를,

태자의 나이가 아직 어리니, 군국의 대사를 어루만지기에는 누가 의지할 만한가?[1]

그러자 김인존은

한주가 믿을 만합니다.[2]

라고 한다. 예종과 김인존이 나눈 대화가 묘지명의 작자에게까지 전해졌다기보다는, 둘이서 나눈 밀담까지 풀어내는, 사기로부터 전해오는 서술 방식의 일종일 것이다. 이 대화가 실제로 있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2.3. 인종 시기


예종이 죽고 어린 인종이 즉위했는데, 선왕의 유조에 따라 한유충은 권지우부승선에 임명된다.
인종 초 한유충은 왕의 장인 이자겸의 눈 밖에 난다. 이자겸의 전횡을 바로잡으려고 간언하며 직임에 충실했으나 이자겸이 죄를 무고한 끝에 남쪽 지방(또는 강남江南)으로 유배된다. 어느 날은 유배지에서 꿈을 꾸는데, 예종이 나타나서 자문[3]을 주고는 "그대는 전의 이름을 고쳐 유충이라고 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4]라고 말한다. 인종 4년(1126) 이자겸이 패한 뒤에는 인종 앞에 불려간다 직접 위로를 받는다. 한유충은 이 때 인종에게 예종이 나온 꿈 이야기를 했고, 인종은 신기하게 여기며 한주였던 이름을 한유충으로 고치도록 명한다.
한유충은 세 번째로 내시에 속해 상주문의 초안을 살핀다(草奏). 인종 10년(1132) 한유충의 사위 윤인첨[5]최자성이 주관한 과거에 급제했는데 시험이 취소될 위기에 처하자 정항과 함께 환관을 설득해 취소되지 않게끔 로비한다. 인종 11년(1133) 2월 윤언이와 함께 사은사로 송에 다녀와야 했는데 홍주에서 풍랑을 만나 그대로 돌아오고, 4월 추밀원부사에 임명된다. 인종 13년(1135) 10월에는 예부상서 동수국사에 오른다.
이 해 1월에 묘청의 난이 일어났다. 한유충은 상경(上京) 중군병마사(中軍兵馬使)로서 군사를 선발, 훈련시켰는데 원수 김부식과 갈등을 빚는다. 김부식은 서경을 진압할 때 바로 들어가지 않고 안북대도호부(평안남도 안주시)로 돌아갔는데, 재상 문공인과 최유, 한유충은 이에 인종에게 아뢰고 먼저 서경에 사람을 보내 항복을 권유한다. 그런데 김부식이 녹사 백녹진을 보내와서는 "서경의 반군들이 항복하려 한다."라거나, "윤첨 등에게는 스스로 뉘우칠 길을 열어 달라."라고 하니 그를 나무란다.
난이 진압되고 난 다음인 인종 14년(1136) 5월 한유충은 중군병마사에 의해 탄핵, 폄직된다. 그 이유는 "국가의 안위를 돌아보지 않고 모든 병사의 기동(機動)을 빈번히 막았다."[6]라는 것이었다. 한유충은 충주목사로 좌천됐으며, 이 때 정지상과 내통한 혐의로 보문각 직학사 윤언이도 함께 양주방어사로 좌천된다. 한유충은 충주에서 3년 임기를 채우고 돌아와 공부상서, 호부상서를 역임한다.
인종 20년(1142) 좌복야 추밀원사 판삼사사에 임명된다. 인종 22년(1144) 4월 지공거를 맡아 최유청과 진사시를 감독한다. 장원 급제자는 김부식의 아들 김돈중. 한유충은 처음에 김돈중에게 2등을 줬는데 인종이 김부식을 위해 순위를 바꿔준다. 같은 해 12월에 참지정사 판공부사 겸 태자소부에 임명된다. 인종 23년(1145) 8월에는 중서시랑평장사 판상서예부사 수국사 태자소보에 임명되나 개직(改職)하지 않았고, 12월에는 중서시랑 문하평장사 태자소사에 임명된다.

2.4. 의종 시기


묘지명에 따르면 1146년 봄, 의종이 즉위한 뒤에도 재상으로 굽힘 없이 강직해 여러 사람의 뜻을 거슬렀다고 한다. 결국 재상에서 파면되고 사공 좌복야 판비서성사 벼슬을 받는데 한유충은 출근을 거부한다. 의종은 나인(內人)을 보내 여러 번 설득하지만 한유충은 끝내 조정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이 해 가을에 67세의 나이로 절에서 죽는다. 의종은 비(批)를 내려 파직 이전의 평장사 등 관직을 복구하고 후한 조의품을 내렸으며, 시호를 내림과 함께 제사를 담당하는 관청에 공상(公相, 대신·재상)의 예에 따라 장사지낼 것을 명한다. 한유충의 오랜 친구 박경산이 같은 해에 그의 묘지명을 짓는다.

3. 평가


(한문준의) 아버지 유충은 근검하고 정직해 그 때에 중요한 인물로 여겨졌으며, 관직은 평장사에 이르렀다.[7]

『고려사』 권99, 한문준 열전

내(박경산)가 조정 선비들로부터 비밀리에 들은 소문에 따르면, 비록 공을 기뻐하지 않는 사람의 흉흉한 의논이 있었지만 감히 그(한유충)가 불법을 저질렀다고 책망할 수는 없었다. 이로써 공의 평생의 지조와 절개를 알 수 있다.[8]

「한유충묘지명」

본문의 생애 부분에도 여러 번 언급되지만, 당대의 중신이었던 이자겸, 김부식의 뜻을 거스를 정도로 강직했으니 조정 내에 적이 생기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다.

4. 가족관계



4.1. 조상


  • 조부: 한억
    • 부: 한원경
    • 모: 오원군태부인 이씨
      • 본인: 한유충
한유충의 모친 이씨는 이영간의 손녀로 이인효의 딸이다.

4.2. 자녀


  • 본인: 한유충
  • 처: 김씨
    • 아들
    • 아들: 한문유
    • 아들: 문혜
    • 아들: 한문준
    • 사위: 유광택
    • 사위: 윤인첨
    • 사위: 임극정
    • 사위: 이봉의
이부상서 문덕전학사 지제고 김상우의 딸과 사이에서 4남 4녀를 뒀다. 장남은 2세에 죽었고, 삼남은 대선(大選, 교종 승려 시험)에 붙어 영복사(永福寺)의 주지가 됐다.

[1] 太子年少, 若撫軍國大事則誰可倚賴?[2] 韓柱爲可.[3] 한유충묘지명 원문에서는 (한유충이) 조용히 고문을 받들었다(從容承顧問)고 한다.[4] 爾改前名爲惟忠可矣.[5] 고려사 열전에서는 윤영첨(尹英瞻)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유충묘지명에 따르면 사위는 윤인첨이고, 윤언이묘지명을 살펴도 이 해에 과거에 급제한 사람은 윤영첨이 맞다.[6] 不顧國家安危, 凡兵機動, 輒防遮[7] 父惟忠, 以勤儉正直, 見重於時, 官至平章事.[8] 予於朝廷士庶間聞之, 雖有於公不喜之人訩訩之論, 莫敢以不法之事誚之. 以此知公之生平志節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