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남기
1. 개요
1934년 2월 21일 ~ 2010년 3월?
북한의 관료, 정치가. 국가계획위원장, 노동당 계획재정부장을 맡은 테크노크라트였으나 2009년 화폐개혁의 실패의 희생양으로 총살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1934년 해주에서 출생했다. 김책공대를 졸업하고 50년대에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공대, 소련 레닌그라드 공대에 유학할 수 있을 정도의 수재였다. 귀국 후 1972년 5월 금속공업성 부상에 임명되었으며 1976년 5월 국가계획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경제지식과 숫자에 해박하여 김일성의 눈에 들었고, 1984년 6월 중앙위원회 제2경제사업부 부장, 당중앙위원회 위원, 중앙위원회 비서 등을 지냈으며 1984년 국가계획위원회 대표단장으로 소련을, 1985년에 정부경제대표단장 자격으로 오스트리아와 핀란드를 방문했다.
1985년 4월 김일성훈장을 받았으며 1986년 11월, 8기 대의원에 선출, 12월에 정무원 국가계획위원장 겸 최고인민회의 예산심의위원회 위원으로 승진했다. 1988년 10월, 중앙위원회 중공업부장에 임명되었으며, 11월 다시 비서에 임명되었다. 1990년 4월, 9기 대의원으로 선출되었으며 최고인민회의 예산심의원회 위원장에 선출, 1992년 4월 김일성 훈장을 받았다.
하지만 잘 나가던 그는 뜻밖의 일로 좌천된다. 김일성은 궁핍해지는 북한의 사정을 의식하여 경공업과 농업 증진 정책을 펼치기 시작하면서 딸인 김경희를 노동당 경공업부장으로 임명하고, 박남기에게 그녀를 보좌할 것을 지시했다. 하지만 박남기는 고지식한 성격으로 김경희에게 전혀 아첨하지 않아서 김경희의 미움을 샀으며, 김경희는 경공업 부문이 부진한 책임을 박남기에게 뒤집어씌웠다. 이 때문에 1993년 11월, 박남기는 비서에서 해임되어 평양시 행정경제위원장으로 좌천되었으며 예산심의위원에서도 해임되었다. 1994년 7월, 김일성이 사망하자 장의위원을 지냈으나 1996년 2월에는 평양시 행정경제위원장에서도 쫓겨나서 황해도 행정경제위원장으로 이임하게 된다.
하지만 1998년, 김정일이 조선로동당 총비서 겸 국방위원장에 취임하면서 그는 고난의 행군을 극복하기 위한 경제 전문가를 물색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박남기는 복직된다. 1998년 9월, 박남기는 9기 대의원으로 선출되는 한편 홍성남 내각에서 국가계획위원장에 복직되었다. 김정일은 그를 크게 신임하여 경제정책에 관련해선 무조건 박남기를 거쳐 보고하라고 지시할 정도였다. 홍성남 내각 밑에서 7.1 경제관리조치의 세부 시행계획의 입안을 담당하였다.
2002년 10월, 경제시찰단 단장에 임명되어 장성택, 박봉주 등을 데리고 남한을 방문하여 한갑수 농어업특위 위원장에게 김정일이 선물한 칠보산 송이버섯을 전달했으며 2003년 9월, 11기 대의원에 선출되는 한편 예산위원회 위원장에 임명되었다. 이때 국가계획위원장에 해임되어 김광린에게 자리를 물려주었다. 이후 김정일을 보좌하며 2004년 4월 김정일의 방중을 수행하였고, 2005년 3월 원자바오 총리의 초청으로 중국을 공식 방문하였다.
그가 다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박봉주 내각 때였다. 박봉주는 김정일의 신임을 바탕으로 전권을 부여받아 매우 급진적인 경제개혁을 주도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보수파와 김정일의 불만을 사게 된다. 이에 2005년 5월, 노동당은 박남기에게 박봉주의 급진개혁을 조정하는 임무를 맡기는 한편 7월에 노동당 계획재정부를 신설하여 박남기를 부장에 임명함으로 박봉주를 견제시켰다. 2006년, 박봉주는 김정일로부터 받은 권력을 빼앗기고 징계를 당했으며 2007년 육해운상 김영일(1944)에게 총리 자리를 물려주고 공장 지배인으로 좌천되었다. 박봉주가 제거된 후 박남기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시장경제를 제거하고 시장을 통제하기 위한 반개혁 조치를 주도하였다. 이때 박남기는 김정일의 현지지도 수행을 가장 자주 동행하는 핵심 측근 중 한 사람이었다. 2006년 1월 김정일의 방중을 수행하기도 했으며 2009년에만 무려 77차례나 김정일의 현지지도를 수행하였다.
2008년 6월 18일, 김정일은 6.18 담화를 발표하여 개혁 조치 철회를 공식화하였고, 8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져 반개혁도 잠시 주춤하였으나 그가 복귀한 후 다시 본격화되었다. 박남기는 2009년 4월 12기 대의원 겸 예산위원장에 선출되었으며, 2009년 11월, 화폐개혁의 단행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화폐개혁의 파급효과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으며, 북한은 2달도 못되어 조치를 되돌려야 했다. 이 과정에서 박남기는 최대의 희생양이 되었다. 그는 화폐개혁을 주도하였음은 물론이고, 당이 외화사업을 독접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 인민군을 적으로 돌렸는데, 이 때문에 그는 더욱 가혹한 공격을 당하게 되었다. 2010년 1월, 박남기는 1월 4일 희천발전소 건설장 현지지도를 수행과 김책제철연합소 종업원들의 새해 공동사설 관철 궐기모임 참석을 마지막으로 부장직에서 해임되었으며 이후 모든 동정에 대한 보도가 끊어졌다. 그는 3월에 총살된 것으로 알려진다.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직후 이미 2010년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던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리제강이 김정일의 지시로 정리해두었던 <혁명적 대오의 순결성을 강화해가시는 나날에>라는 유고가 출간되어 박남기의 숙청 비화를 밝혔다. 여기에 따르면 '''자본주의를 부활시키려 한 혐의'''로 처형당했다고. 2013년 장성택이 숙청된 후 2013년 12월 13일자 노동신문은 장성택의 죄목 중 하나로 "'''만고역적 박남기놈'''을 부추겨 수천억원의 우리 돈을 람발하면서 엄청난 경제적 혼란이 일어나게 하고 민심을 어지럽히도록 배후조종한" 죄를 추가하였다.
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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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자, 「북한의 집권엘리트(Centralized Power Elites)와 Post 김정일시대」 『통일정책연구』18(2) (2009.11)
- 박형중 외, 『김정일 시대 북한의 정치체제: 통치이데올로기, 권력엘리트, 권력구조의 지속성과 변화』(서울: 통일연구원, 2004)
- 박형중, 「김정일, 군과 당, 그리고 김정은- 시장확대와 시장억제 배후의 권력정치학」『Online Series』CO 10-12(2010.5)
- 북한연구소, 「[이달의 북한인물초점] 박남기(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北韓』371 (2002.12)
- 서석민, 「김정일 시대의 핵심엘리트 연구 -충원과 인적구성을 중심으로」 서강대학교 석사학위 논문(2007.1)
- 임수호 외, 『북한 경제개혁의 재평가와 전망: 선군경제노선과의 연관성을 중심으로』(세종: 대외경제정책연구원, 2015)
- 통일부 정세분석국 정치군사분석과, 『2014 북한 주요인사 인물정보』(서울: 통일부, 2014)
- 통일연구원, 『김정일 현지지도 동향: 1994~2011』(서울: 통일연구원, 2011)
- 홍민 외, 『북한 변화 실태 연구: 북한 시장화 종합 분석』(서울: 통일연구원,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