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2009년 화폐개혁

 


1. 개요
2. 역사
2.1. 화폐개혁 일지
3. 목적
3.1. 안정적 권력세습
3.2. 국가의 사회통제력 강화와 돈의 회수
4. 결과
5.1. 달러화(Dollarization)
5.2. 정권에 대한 신뢰도 약화
5.3. 장마당의 활성화
5.4. 기타
6. 만약에 화폐개혁을 제대로 실행했다면?
7. 이후


1. 개요


북한에서 2009년 11월 30일 오전 11시부터 기습적으로 자신들의 화폐인 북한 원에 대해 벌인 '화폐개혁'. 구체적인 내용은 11월 30일부터 12월 6일까지 구권 100원을 신권 1원으로 교환하는 것이다. "교환 자체"는 인플레이션을 막기 위한 수단으로써 전혀 문제가 없지만, "교환 가능한 금액을 세대당 10만원으로 한정"하고, 나머지 금액은 "은행에 맡겨야 하는" '''이상한''' 규칙이 북한 사회에 상당한 충격과 공황을 발생시켰다. 그리고 이 사건 덕에 북한 주민은 자기 나라 돈을 더더욱 믿지 못하게 되었다.
북한에서 은행에 돈은 맡긴다는 것은 곧 '''국가에 돈을 바치는 것''' 이라고 보면 된다.[1][2] 북한의 은행은 예금 인출을 '''영구적으로''' 제한하기 때문이다. 다만 2018년 이후 지금은 상황이 좀 변했다. 박봉주가 이끄는 경제개선조치 이래 북한의 은행도 제법 정상화가 이루어진 듯 한데, 예금의 인출은 물론이고 전자카드를 도입하고 다른 지역으로 외환 송금까지 가능해졌다고 한다. 이로 인해 북한 최초의 은행강도 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다만 이렇게 전자카드로 사용 가능하며 은행들이 비축한 돈들은 내화가 아닌 달러화임을 주의해야 한다.
북한 특권층들은 북한 화폐를 믿지 않아 이미 , 달러, 유로화, 위안(元)화 등으로 재산을 모아 왔으며, 돈주들도 위안화나 달러화로 거래를 해 큰 피해는 없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현금을 더 많이 가지고 있던 시장 장사꾼들이 피해를 입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곧 외환 거래가 금지되며 특히 중국으로부터의 수입은 사실상 중단되었다.
2000년대에 북한 내 노동자 1명당 보통 100만 원을 초과한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3] 주민들 입장에선 나름대로 노력해 모은 돈을 두 눈 멀쩡히 뜨고 빼앗기는 꼴이 된 셈이다. 그리고 북한 원이 휴지조각이 되는 일이 발생.
한편으론 김정은이 김정일의 후계자로 공표되는 과정에서 벌인 일이 이 화폐개혁이었는데 실행 이후 채 1년이 안 되어 북한 경제를 사실상 '''박살을 내고''' 끝나자 위기감을 느낀 김정은 측이 '''천안함 폭침'''을 계획했다는 말도 있었다.
도저히 '''개혁'''이라는 말을 붙이기가 민망한 개악(改惡)이다보니, 많은 연구자들이 "화폐교환"이라 부르고 있다.

2. 역사


북한은 지금까지 5번의 화폐개혁을 실시했다. 1992년 화폐개혁 당시에는 1명당 400원까지 [ 1 : 1 ]로 교환하면서 1가구당 2만원까지 은행에 맡기도록 했다.
하지만 북한 은행들은 간부나 연줄이 있는 사람들에게만 최대 4000원을 출금해 주었으며, 일반 주민들에게는 '''로동당의 귀중한 자금에 쓰인다는 말도 안되는 이유로''' 돈을 지급하지 않았으므로 이후 주민들은 은행을 전혀 신뢰하지 않아 '''아무도 은행을 이용하지 않았다.'''
이를 알아챈 조선로동당과 그 간부들은 주민들이 숨긴 돈을 제발로 은행으로 들어오게 함과 동시에, 은행에 내지 않은 돈을 전부 '''휴지조각으로''' 만들기 위해 화폐개혁이란 이름으로 로동당 자금 충당에 나선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목할 화폐개혁은 5차 화폐개혁, 즉 가장 유명한 2009년 화폐개혁이다. 5차 화폐개혁은 지금까지의 화폐개혁과는 규모가 다른 엄청난 피해를 남겼다. 종전의 화폐개혁 때는 북한의 계획경제와 사회주의 체제가 원활하게 운영되고 국가경제 역시 원활한 상태였다. 또, 당시에는 사회주의 국가로서 인민들에게 제공하는 서비스와 배급이 원활하게 제공되었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에게는 현금의 중요성이 없었다. 현금이 없어도 국가에서 배급이 나오고 생필품, 공산품이 지급되던 시대였으니 화폐개혁을 통한 인민들의 피해는 적은 편이었다.
그러나 2009년의 상황은 다르다. 1995년 고난의 행군을 기점으로 북한의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는 완전히 붕괴된 상태였다. 배급은 이미 끊겨 주민들은 자연스럽게 시장경제 체제를 이루고 살아가야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재산을 몽땅 회수하게 되니, 당장 내일 아침 밥 먹을 돈조차 없어진 것이다.

2.1. 화폐개혁 일지


  • 2009년
    • 11월 30일: 세대당 교환가능액수 10만원
    • 12월 1일: 세대당 교환가능액수 10만원, 이상 금액은 1/1000의 비율로 저금
    • 12월 3일: 세대당 교환가능액수 10만원 + 가족 1명당 5만원 추가 교환
    • 12월 7일: 신권의 유통 시작
    • 12월 8~9일: 재정일꾼회의 끝에 노동자 임금 400원대 검토
    • 12월 9일: 공산품의 시장 거래 금지, 시장 거래 품목들의 가격상한제 실시
    • 12월 11일: 장마당에서의 식량판매를 금지하고 국영상점에서만 식량을 판매하도록 함
    • 12월 중순: 김대장 하사금을 분배함(농민,광부에게 15,000원, 군관 월급 100% 인상)
    • 12월 말: 노동자 임금을 100배로 인상함
    • 12월 28일: 외화 사용을 전면 금지
  • 2010년
    • 1월 1일~11일: 장마당 전면 폐쇄, 상행위 전면 금지
    • 1월 20일: 재정경제부장 박남기 해임 조치
    • 1월 28일: 김영일 내각총리가 평양시내 인민반장들 앞에서 화폐개혁문제에 대한 사과를 함.[4]
    • 2월 1일: 전국적으로 시장 통제를 풀고 외화사용금지 해제
    • 3월 12일: 전 로동당 재정경제부장 박남기, 전 로동당 재정경제부부장 김태영 등 100명에 대한 총살이 강건군관학교에서 진행됨.
    • 3월 18일: 전 로동당 재정경제부장 박남기에게 경제개혁 실패의 책임을 물어 처형했다고 알려짐.

3. 목적



3.1. 안정적 권력세습


북한이 주요 국가정책을 결정할 때는 가장 중요하게 고려되는 요소가 사상/정치/군사적 요소, 특히 김일성-김정일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목적이 우선이다. 김정일 정권에게 가장 중요한 "과업"은 향후 3대 세습정권을 안정되게 유지되도록 하는 것이다. 북한은 2012년에 "강성대국 문패를 달겠다"고 선전해왔으며, 그 때가 되어서 세습의 성공 여부가 결정될 것이다. 그런 각도에서 2009년 4월의 "헌법 개정"에서 선군사상주체사상과 함께 북한의 지도사상으로 들어간 것이다.

3.2. 국가의 사회통제력 강화와 돈의 회수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의 계획경제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배급이 중단된 후 암시장에 의해서 주민들은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하지만 시장의 활성화는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한 북한은 2005년 이후 각종 조치를 통해 암시장을 억제하려 들었다. 하지만 그런 조치들은 대부분 실패했다.
화폐 개혁을 하여 주민들의 유동자산을 강제적으로 환수하면 시장이 위축된다. 이러면 국영상점을 다시 강화할 수 있으며, 계획경제를 유지하기 쉬워진 다.
가장 큰 목적은 인민들에게 돈을 회수하는 것이었다. 고난의 행군 이후 배급이 끊기고 사회주의 경제체제가 붕괴된 북한에서는 시장 경제가 발달하게 되면서 화폐가 매우 중요해지고 저축하면 돈을 돌려주지 않는 북한 은행에는 아무도 돈을 맡기지 않게 된다.
즉, 돈이 본래의 목적을 하지 못하고 경제활동에서 가장 중요한 선순환이 되지 못하면 나라와 당에는 돈이 없어지는데 인민들은 숨겨둔 돈이 많아지는 현상이 심화된다. 결국 정부가 화폐는 계속 발행하는데, 발행하는 족족 주민들의 장롱속으로 사라지면서 은행으로는 돌아오지 않고, 정부는 계속 찍어낼 수 밖에 없는 악순환이 만들어진다.
물론 지하경제의 통제되지 않는 돈을 회수하기 위한 화폐개혁 자체는 그다지 이상하진 않다. 문제는 그 조건과 방식이 매우 기괴했다는 점이다.
일반적인 한국인, 혹은 그 외 국가 주민들에게는 이러한 설명이 쉽게 이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장마당 거래가 활성화되면 국가도 경제가 살아나서 좋아야 할 것 아닌가? 문제는 북한이 1972년 헌법 개정을 통해 '''세금을 영구히 폐지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사회주의권 내에서도 가장 빡센 수준의 계획경제 시스템을 운영한 나라로, 모든 물자의 생산과 유통을 중앙정부가 철저히 장악한 상황에서는 필요한 각종 물자를 다이렉트로 받아 쓰면 되지, 굳이 세금이라는 형식으로 국가 재정을 충당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환경에서 국영 경제 시스템이 붕괴되고 장마당으로 대표되는 민간 암시장 경제가 발흥하면서 정부의 재정은 그야말로 구멍뚫린 방죽 물마냥 줄줄 새어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북한 당국은 세금을 통하여 장마당을 제도권으로 편입시키는 것이 아니라 '''장마당의 돈 그 자체를 강제 몰수'''하는 방식을 택해버렸다.

3.3. 인플레이션 해소


인플레이션은 공급(실물경제)에 비해 통화량(시장의 유동성)이 커서 화폐 가치가 하락하는 것을 뜻한다. 공급 측면에서 보자면, '고난의 행군' 시기에 북한의 계획경제는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다. 원자재 부족과 생산시설 노후, 거기에 덮친 천재지변은 실물 생산을 완전히 마비시켰다. 이런 공급의 부족은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유발했다.
통화량 측면에서 보자면, 일반적인 국가는 물가 상승시 금리를 인상해 통화량을 조절한다. 하지만 위에 서술하였듯 '''북한의 은행은 인출이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은 은행을 절대 이용하지 않는다.''' 그도 아니라면 중앙은행이 공개시장조작으로 국채를 매입해서 돈을 풀거나 매각해서 돈을 거두지만 북한의 경우는… 결국 북한은 은행을 통해 통화량을 줄일 수 없었다. 게다가 북한은 경제학 이론을 완전히 무시한 채 필요할 때마다 화폐를 찍어냈다. 북한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계획경제 시절의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도 이렇게 막장으로 통화정책을 펼치지는 않았다.
2004년의 가격은 kg당 구권 800 북한 원대였다.(1위안(元)당 220원) 2009년 11월의 쌀 가격은 kg당 구권 2200 북한 원(1위안당 600원)이다. 당시 북한 주민의 월급이 구권 2,000~3,000 북한 원인 점을 생각해보면 인플레이션이 얼마나 심각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4. 결과


"화폐개혁 이후, 10만원이 하루아침에 천원짜리로 변하고 사람들은 당장 내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해했다. 소식이 빠른 무역업자들이나 당간부, 고위층들은 이미 달러위안으로 교환했으나, 많은 조선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던 상인들이나 일반인들은 완전히 몰락했다. 화폐개혁 이후 압록강두만강에는 구권 지폐들이 떠다녔다. 사람들은 지폐를 모두 강에 버리고 그 강물에 빠져 자살했다."[5]

대대적인 저항이 일어났다. 상점들이 문을 닫고 시장에서 상품이 없어졌다. 평양시 당 책임비서 김만길이 주민들 앞에서 사과하고 모든 상업 활동을 재개해 달라고 호소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주민들의 반발에 김정일은 크게 놀랐다. 북한 지도자의 한마디에 벌벌 기던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저항할 줄은 내다보지 못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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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영호, <3층 서기실의 암호>

이 사태는 "보이지 않는 손(수요와 공급의 법칙)"과 "보이는 정부의 주먹(계획경제체제와 화폐개혁)"간의 대결을 잘 보여주었다.[6] 그 결과는 당연히도 보이지 않는 손의 승리. 보이지 않는 손도 가만히 보이지 않게 내버려두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지만, 북한이 주도한 정부의 주먹은 애초에 물자가 부족한 북한의 현실상 적용되기 부적절한 조치였고 거기에 북한도 주먹구구식의 행정오류를 저질러댔으니 처음부터 승패가 정해진 대결이었다.
이 대결에 애꿎은 북한 주민들만 희생되며 정부에 대한 불만도가 점점 높아져만 가자 북한도 위기의식을 느끼고 외화 사용이나 시장 개설을 허용하는 등의 소극적인 조치를 취하고 있다. 어차피 북한이라는 나라가 늘 그렇듯 경제 안정이 목적이 아니라 '''정치적 통제가 목적'''인지라 제대로 된 경제학자의 조언을 받았을 리는 없고 '''그냥 되나마나''' 화폐개혁을 감행했기 때문에 발생하는 결과일 뿐이다. 이런 결과는 북한이라는 나라의 특성상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김정일은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과를 졸업[7]했으며 따라서 이런 어이없는 사태를 실수로 저질렀을 가능성보다는 아예 처음부터 '''인민에게 채찍을 들이대는 게 목표'''였을 가능성이 높다.

5. 초(超) 인플레이션


2009년 11월 당시의 쌀값은 kg당 구권 2,200원 가량이었다. 따라서 신권 20원 정도에서 쌀값이 형성되는 것이 정상이다. 하지만 2009년 12월 중순에는 50원, 2010년 1월 초에는 150원, 1월 중순에는 300원, 1월 말에는 600원 수준까지 쌀값이 폭등하여, 800원까지 찍기도 한다. 결과적으로 2달만에 물가가 최소 30배 이상 급등하였다.
가장 큰 원인은 만성적인 공급 부족이다. 1월 들어 위안화를 비롯한 모든 외환을 사용한 거래를 사실상 금지시켰는데, 시장에서 거래되는 상품 중 70% 가량이 중국산이다. 자본, 원자재, 에너지, 기술 등이 만성적으로 부족한 것은 물론이고, 각종 생산요소들이 제2경제(군대), 당 사업(로동당)에 우선적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내각에서는 사실상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좀 개혁을 하려고 들면 "자본주의 물이 들었다"고 숙청을 하기도 하고.
또 과도한 통화량도 큰 문제가 된다. 상술한 이유로 북한 주민들은 절대 은행을 이용하지 않으며, 장롱에 돈을 넣어 두고 꺼내서 쓴다. 또한 얘네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니 주민들의 거래행위가 인정되지 않으며, 따라서 상행위에 대해서 세금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계획경제 체제에 따라 무언가를 생산할 경우 중앙으로 생산품의 현물이 들어갈 뿐. 결국 화폐는 민간에서 돌고 중앙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돈을 더 찍어내면 통화량은 늘어나고, 그 돈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따라서 만성적으로 재정은 부족하고, 통화량은 계속해서 늘어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여기서 종이에 돈을 인쇄해서 찍는데 왜 그런 돈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고 재정부족이 발생하는 지 의문을 가질 수 있는데, 본질적으로 현대의 화폐도 국가가 법적으로 통용을 강제했을 뿐, 초기의 지폐처럼 국가의 재정을 담보로 한 유가증권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형태만 조금 달라졌지 과거에 금이나 은으로 금화나 은화를 만들어서 화폐를 발행하던 것과 비슷한 것이다. 그러므로 화폐가 발행한 정부로 지속적으로 환수되지 않으면 예전에 금화, 은화를 사용할 때는 금과 은이 부족하니 동 따위를 엄청 섞은 악화가 등장하던 것이고, 현대식 화폐는 신용도를 잃어버리니 말 그대로 지전이 되는 것이다. 차라리 동을 많이 섞은 은화는 동전 취급이라도 받지만, 현대의 지폐는 그냥 종이조각이 된다.
문제는 이렇게 되면 해당국가에 돈을 빌려준 기업이나 국가가 빚을 갚으라고 할 때 '''신용도가 높은 유로화미국 달러등의 타국 화폐나 귀금속으로 갚을 것'''을 종용하게 되는데, 이미 자국 화폐가 휴지조각이 된 상황에서는 더 이상 귀금속이나 타국 화폐로의 교환이 불가능하기에 파산하고 마는 것이다. 즉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국가의 재정이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각국은 지폐를 무한정에 가깝게 인쇄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국가의 재정과 가급적 균형을 맞추고, 과도한 지폐발행을 삼가는 것이다.
이런 과도한 통화량에는 '김대장 하사금'도 한 몫 했다. 불만이 높아지자 북한은 노동자 임금과 노인 연금을 종전과 동일하게 유지(결과적으로 보면 100배 상승)했으며, 농민들에게 가구당 신권 14,000원 가량을 나눠주었다. 이는 몇십년치 연봉에 해당하는 거액을 받는 것처럼 보였지만, 처음 지급받은 일부 지역에서 재빨리 돈을 현물로 바꾼 소수의 사람들만 이득을 봤을 뿐, 순식간에 물가가 몇 백 배 이상 올랐으니 대부분의 김대장 하사금을 받은 가정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또한 가격상한제[8]도 문제다. 주류경제학에서는 가격상한제가 실패한 정책임을 지적하고 있다. 균형가격은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의해 사회적 후생이 최대가 되는 점에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가격상한제가 실시되면 공급자들은 균형가격 이하의 가격에서 상품을 판매하려 하지 않으니 거래량은 급격히 감소하며, 반대로 암시장에서의 가격은 급등하게 된다.[9]
12월 9일 당시 쌀의 시장 가격은 kg당 50원경에서 형성되고 있었으나 북한은 kg당 16원 이하로 판매할 것을 강제했다. 문제는 어느 누가 미쳤다고 50원짜리를 16원에 팔려고 하겠는가. 34원씩 손해보느니 그냥 안 팔고 자기가 먹어버리는 게 낫지.[10] 결국 장사꾼들은 쌀 판매를 중단했고 그 결과 시장에서 쌀이 없어져 쌀의 가치가 폭등해버리는 역효과가 나타났다.[11] 만성적인 식량 부족에 시달리는 북한에서 쌀의 거래량이 감소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한다. 결국 별다른 천재지변이 없는 상황에서도 아사자가 속출하는 사태가 벌어졌다.[12]
2010년 3월 시점에서 쌀값이 kg당 1,000원대로 올랐다고 한다. 화폐개혁 이전 수준을 회복할 가능성이 높다는 소문도 있다. 결국 화폐개혁을 실행한지 불과 1년여만에 이전수준인 2200원대로 되돌아왔고 그후로도 하이퍼인플레이션의 수순을 계속 밟아가며 2013년 1월에는 화폐개혁 이전의 자그마치 세 배에 달하는 6700원을 넘보는 상황에 이르렀다.[13]
결국 화폐개혁은 안 하느니만 못한 꼴이 된 셈이며 '''실패가 확정되었다.'''

5.1. 달러화(Dollarization)


화폐개혁을 하면서 구화폐 교환량을 가구당 얼마로 제한하는 바람에 은행에 돈을 맡기지 않고 가지고 있었던 주민들이 엄청난 손해를 보았고, 자살하는 사람마저 있었다고 한다.[14] 잦은 화폐개혁으로 인해서 이러한 일들이 반복되다보니 북한의 화폐는 가치가 더더욱 바닥으로 떨어졌고, 달러, 위안화, 엔 등의 외화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중에서도 유통이 가장 쉬운 위안화와 기준통화인 달러가 시장을 잠식했고, 북한의 통화는 휴지조각 취급을 받는게 현실이다. 그래서 북한 정부는 외화 사용을 공식적으로 금지했으나, 실제로는 "국돈"의 가치가 상실되고 외화에 대한 의존도가 급증했다. 이는 캄보디아 리엘의 달러화와 같은 현상이다.
이는 앞서 말한 과도한 지폐발행에 따른 당연한 결과로서, 사실상 북한의 화폐는 휴지가 되고 위안화가 그 자리를 대체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제 중국의 통화 가치가 엄연히 다른 나라인 북한의 통화 가치가 된 셈.[15]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중국의 경제 상황이 악화되어 위안화 가치가 폭락하면 북한도 그에 따라 폭락할 수 밖에 없는 구조가 되므로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하지만 다른 피해가 너무 커서 오히려 이 사항이 작아보인다는 아이러니가 발생했다. [16] 민간 경제의 입장에서 보면 신용을 잃는 행위를 남발하는 정부의 화폐를 사용하는 것보다 외화를 사용하는 것이 더 낫다는 점이 웃지 못할 일이다. 자국 화폐가 이미 물가조절, 환율조절 기능을 상실해버리고 정부의 금리 조절 능력은 처음부터 없는 상황이라면 굳이 정부 정책에 의해 움직이는 자국 화폐를 이용할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는 피해라기보다는 경제의 안정이라고 봐야 할 지경이다.

5.2. 정권에 대한 신뢰도 약화


화폐개혁은 시장을 중심으로 주민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왔다. 북한 인민보안성의 모든 인력이 주민 통제에 나섰고, 국가안전보위부와 보위사령부, 모든 조선인민군 부대에 비상대기령이 발령됐다. 국경 등에서는 각종 막장 사태도 계속되고 있는 모양. 보안원(경찰)들에게 시비를 거는 등 민심이 흉흉하며, 보안원을 쏘아 죽인 사건조차 일어났다.
신의주에서는 "집집마다 실신 상태에 빠진 주민들의 통곡소리도 그치지 않고, 부부간 싸움이 나는 가정들도 많다." "담당 보안원들과 보위지도원들이 싸움을 하거나 소란스러운 집들마다 찾아다니며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사람들이 응대조차도 하지 않는다." 돈을 마대자루에 담아 쓰레기로 버리거나, 강이나 하천 등에 뿌려버리거나, 심지어는 '''불에 태워버리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돈에 누가 그려져 있는지 생각해보자.'''
가장 중요한 문제는 화폐교환 이전까지만 해도 주로 시장 상인 계층에 국한되어 있던 정권에 대한 반감이 이제 일반 임금노동자 등 사회 하부 계층에게까지 확산되었다는 것이다. 당장은 시장 상인들이 몰락하고 자신들의 임금이 껑충 뛰어올라 좋아했는데, 이건 뭐 며칠 지났을 뿐인데 물가가 미친 듯이 올라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특히나 북한 정부는 화폐교환을 실시하면서 주민들에게 "이제 정부에서 상품을 대량으로 풀 테니까 돈을 쓰지 말고 가지고 있으라"고 선전해서 어그로를 끌었다.
그러나 결국엔 교환 초기에 싼 물가로 물건을 구입한 사람들만 이득을 보았고, 정부를 믿고 끝까지 돈을 쥐고 있던 사람들은 말 그대로 눈 뜨고 코 베인 꼴이 되었다. 물론 전자의 사람들은 대부분 시장에서 혹은 시장을 둘러싸고 돈 좀 만지던, 소위 "머리가 잘 돌아가는" 사람들이었다. '''결론적으로 화폐교환은 그나마 유지되던 빈부격차를 안드로메다 수준으로 벌려놓았고,''' 이제는 북한 하부 계층 주민들조차 정부의 선전이나 방침을 믿지 않는 상황에 직면했다.[17]
북한 권력층도 위기를 느꼈는지 박남기 재정경제부장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워 해임한 다음 총살했다. 박남기를 처형한 뒤에는「'''혁명대오에 잠입한 대지주의 아들'''로서 계획적으로 국가경제를 파탄으로 끌고갔다.」고 발표했다. 한 탈북자는 북한 내부 강연에서 '''화폐개혁으로 인민경제가 20년 후퇴했다'''며 시인했다고 증언했다. 물론 그 죄는 어디까지나 "죄인 박남기의 처형으로 끝난 것"이다.
북한은 외화벌이를 위해서 러시아 벌목장에 인력수출을 하고 있는데, 이들도 북한경제파탄으로 도망치고 있다. 이들이 일하면서 받는 봉급은 명목상으로는 외화지만 실제로는 이것을 북한 정부에서 가져가고 북한 돈으로 바꿔주는 식이었는데, 북한 돈의 가치가 빠르게 하락하면서 몇년 일해봐야 귀국하고 보면 껌값 밖에 남지 않게 된 것. 어찌나 많이 도망치는지 북한 당국도 딱히 대응책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한다. 도망친 사람들은 불법취업으로 막일을 하는데, 러시아 쪽이 그들을 평가하길 인건비가 싸고 성실하며 러시아어도 꽤 해서[18] 인기 만점이라고 한다.#

5.3. 장마당의 활성화


북한 당국에선 이 때의 화폐개혁으로 손을 워낙 데이다보니 결국 2005년부터 지속되었던 시장 통제 강화 움직임은 완전히 사그라들었고 거기에다가 대외적인 어려움도 겹쳐 결국 박봉주를 복귀시키고 협동농장의 분조를 줄이는 등 시장통제를 거의 포기하고 시장을 이용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바꾸면서 장마당도 다시 활성화되어가고 농업생산량과 중산층들도 다시 늘어나면서 어느 정도 상황이 개선되어가고 있다. 물론 이런 효과는 주로 도시지역[19]에서나 누리고 있고 정부재정과 정책은 부정부패 문제와 북한 체제의 문제점에 따른 주먹구구식 예산 편성 등으로 개판인지라 여전히 빈부격차가 확대되어가고 있는 건 여전하다. 한편으로 장마당이 활성화되면서 북한 청소년들 사이에 아니메 시청이 암암리에 돌고 있다는 연구결과도 있었다.[20]

5.4. 기타


평화자동차 박상권 사장은 여러차례 인터뷰를 통해 "평양 주민은 화폐개혁 잘했다고 여긴다"면서 오히려 "화폐개혁이 북 경제발전을 촉진했다고 하지만, 이 사람은 '''평양의 모습'''만 보았고, 사업의 안전상 '''북한 당국의 입맛에 맞춰 말할 수밖에 없으므로''' 걸러 들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평양과 다른 지역(특히 국경지역 등)은 상황이 완전 다르기 때문. 실제 북에서 상위 5%의 특권층이 거주하는 평양과 여타 지방은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어쩌면 그 역시 북한의 실상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북사업을 하는 입장에서 만약 정치적으로 민감한 발언을 했다가 북한으로부터 어떤 불이익을 당할 지 알 수 없기에 어쩔 수 없이 저렇게 북한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일부에서는 이 조치를 단순한 시장 탄압 조치로 해석하는 것은 부당하며 베트남에서 개혁개방 초기 나타났던 화폐개혁과 비슷한 목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인플레이션의 해소와 정부 재정의 확충은 경제발전을 위해 필수적인 조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화폐개혁 직후인 2009년 12월에 북한이 잇달아 부동산관리법, 물자소비기준법, 종합설비수입법 등 경제 관련 법령의 확충과 정비에 나선 것이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주장들은 베트남의 화폐개혁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지 못한 결과였다.
베트남은 도이머이 정책 발표 직전인 1985년 가격·임금·통화개혁을 실시하였다. 당초 개혁파가 추진하고자 했던 것은 배급제 폐지와 가격체계 개혁을 중심으로 하는 가격·임금 개혁이지 통화개혁이 아니었다. 1980년대 체제 내에서의 개혁운동인 신경제정책으로 농산물 등의 생산량은 늘었지만 배급제는 계속 유지되면서 정부는 계속해서 막대한 수매보조비를 지출해야 했고 시장은 시장대로 정부의 강제수매로 인해 물량이 부족하여 인플레이션이 발생하는 이중고가 지속되었기 때문이다.[21]
그런데 여기에 10:1의 화폐개혁이 더해진 것은 주로 보수파가 공무원이나 국영기업 노동자 등 급여생활자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기 위해 추가한 조치였다. 그 결과 시행 후 수개월 동안은 절하된 화폐가치로 급여생활자들의 생활이 개선되는 효과가 있었지만, 반대로 정부수매가조차 10:1로 낮아지면서 생산자들은 정부 수매를 거부하는 상황에 직면했다. 결국 바로 다음해인 1986년 연간 물가상승률이 '''600%'''를 찍으면서 도로아미타불이 되어버렸다. 전면 개혁·개방을 반대하던 보수파들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개혁파를 견제하기 위해 취한 통화개혁으로 인해 당내에서 주도권을 잃고 도이머이(개혁개방정책)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화폐교환은 대대적인 화폐가치절하를 골자로 한다는데서 당연히 베트남의 화폐개혁과 궤를 같이 했다. 그런데 위에서 밝혔듯이 그나마 농업생산량이 지속적으로 늘어나던 베트남에서조차 생산자들이 정부수매를 거부하면서 화폐개혁 직후의 베트남은 극심한 재인플레이션을 겪어야 했다. 공산품은 물론 주식작물까지도 전적으로 수입에 의존해야 하는 북한에서, 아무리 민간자금을 흡수했다고 해도 국가가 이 모든 소비재를 적시에 공급해 물가를 안정시킨다는 것은 실로 상상조차 하기 힘든 거창한 목표였다. 그렇다고 대대적인 가격개혁을 실시한 것도 아니었다. 일단 '''베트남이 경제개혁의 선행조치로 화폐개혁을 했다는 말 자체가 틀렸다.'''[22]
장성택이 숙청된 후 재판 판결문에서 다시 언급되었다. 원문은 "2009년 만고역적 박남기놈을 부추겨 수천억원의 우리 돈을 람발하면서 엄청난 경제적 혼란이 일어나게 하고 민심을 어지럽히도록 배후조종한 장본인도 바로 장성택이다." 해당 내용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어도 최소한 북한에서도 화폐개혁을 "엄청난 경제적 혼란", 그러니까 완전히 실패한 것으로 판단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여담이지만 저 말의 진짜 정체를 파악하자면 '''김정일이 싼 똥을 장성택의 입으로 청소한다'''에 불과하다. 다른 것도 다 마찬가지이지만 북한에서 선전하는 내용은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절대 안 된다.

6. 만약에 화폐개혁을 제대로 실행했다면?


2000년대에 북한 국내의 노동자들은 자연인 1명당 100만 원을 초과한 현금을 보유했다, 그러므로 북한인들의 현금과 수표 및 예금과 대출에 대하여 4주 동안 그냥 평등하게 [ 1,000 : 1 ]로 교환하고, 구권에 대하여 자연인 1명당 100만 원까지 교환을 보장하면서 신권에 대하여 [ 1원 = 1,000전 ]으로 단위를 설정했으면 2009년의 화폐개혁을 순조롭게 완료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7. 이후


당황한 김정일은 장마당과 외화 사용을 다시 허용하는 한편, 김영일(1944) 총리에게 평양 인민반장들에게 사죄하게 한 후 6월에 그에게 책임을 지워 해임하였으며 국가계획위원장이며 당 계획경제부장인 박남기를 희생양으로 삼아 3월에 그를 공개총살해버렸다. 김정일의 시장경제 붕괴 전략은 실패한다. 이후 김정은이 집권한 후에는 장마당을 옥죄고 통제하는 정책이 불가능함을 인정하고 대신 주민들을 달래고 세수를 걷기 위해 장마당을 제도권의 일부로 편입하게 된다.
[1] 사실 인출 가능액을 '''한동안''' 제한하는 것은 일시적 조치까지 생각한다면 개발도상국에서 꽤 있는 일이다. 당장 한국에서도 1953년과 1962년 화폐개혁때 은행 예금의 인출을 제한했다. 그러나 북한은 단순 인출제한을 하는 것이 아니다. 주민이 맡긴 돈이 어느 정도 모이면 '''혁명에 필요한 자금이 모자라니 국가에 헌납하라'''며 예금한 돈을 몰수하고 항의하면 반동분자로 몰아 수용소로 보내니 돈을 뺏기기 싫은 주민들은 은행에 맡기지 않고 집에 모아두는 걸 선호했다.[2] 다만 한국의 1953년 화폐개혁은 전시였고 1962년 화폐개혁은 불과 1주일만에 인출제한이 풀렸다.[3] 당시의 100만 원은 암시장 환율로 1000 USA 달러와 비슷한 가치였다.[4] 비록 특권층 거주지역인 평양에 한정해서라지만 이는 북한에 조선로동당 1당독재 체제가 들어선 이래 정권의 대리인이 인민들 앞에서 공식 사과한 사상 초유의 일이다.[5] 그저 '숫자가 낮아졌으니 나쁘다!'라는 식으로 읽힐 소지가 있어서 해설하자면, 순전히 액면가만 변하고 가치가 변하지 않는 건 문제가 없다. 문제는 은행이 안 그래도 돈을 회수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권을 찍어낸 결과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이 발생하여 화폐의 실질 가치가 기존보다도 매우 낮아지고, 그 결과 구권, 신권 막론하고 화폐 자체가 모조리 쓰레기가 되어버린 것이다.[6] 사실 소련에 비추어 봐도 이번 화폐개혁은 앞뒤가 전혀 맞지가 않는다. 사실 소련의 계획경제 모델은 만성적인 소비재 부족과 혁신 부재 현상에 시달리긴 했지만, 최소한 70년 이상 1억이 넘는 규모의 경제를 그럭저럭 굴려왔다. 그 과정에서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경제학, 경제 운영 노하우를 쌓아왔다. 독립채산제와 인센티브 같이 부분적인 시장경제 요소의 도입도 있었고. 그러나 북한의 화폐개혁은 최소한도의 논리나 모델도 없이 동네 구멍가게식 주먹구구 행정이었다.[7] 다만 김정일이 작성한 졸업논문을 보면 이 작자가 정말 경제학을 전공한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민망한 수준의 논문이다.[8] 정부가 균형가격이 너무 높은 수준에서 형성된다고 판단할 때, 일정한 가격 이하에서 상품이 거래되도록 강제하는 것.[9] 부작용을 걱정하지 않고 시장 원리로써 해결하고자 한다면 수입을 통해서 공급곡선의 우향이동을 유도하여 균형가격 자체를 낮추는 방법이 있을 것이고, 그 외에는 신기술 도입, 인적자원 개발 등을 통해 생산능력을 향상시키는 방법이 있다. 북한의 빈약한 생산능력으로는 대규모 교역을 할 수 있을 리도 없고, 북한에 신기술을 주고자 하는 국가도 있을 리 없으며 주체사상 교육으로 정신없는 학교에서 인적자원 개발이 제대로 이루어 질 리가 없다. 그도 아니라면 수요를 억제시켜 수요곡선을 좌향이동시켜야 하는데 '''이것이 바로 불황이다.'''[10] 혹은 조선시대처럼 쌀 그 자체를 화폐로 사용해 버리는 방법도 있다. 이러면 물물교환이 되므로 북한 원화 기준 가격 규제를 피할 수 있다.[11] 역사적으로 볼 때 사실 이 일은 처음이 아니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도 그랬으나, 결과는 같았다. 그에 앞서 네로 역시 화폐개혁을 단행한 적이 있으나, 이는 단순히 화폐 가치를 조정한 것이었으며 공적인 가격상한제 도입은 디오클레티아누스 때가 최초이다.[12] 단, 대부분의 국가에서 주식이 되는 1차 생산 농산품(주로 쌀이나 밀, 기본 채소 등)의 경우는 가격상승을 억제하는 정책을 쓴다. 이들은 수요가 거의 일정한데 반해(안 먹고 죽을 순 없으니) 공급은 당해 날씨나 환경에 따라 산출량이 크게 다르기에 물가가 널뛰기를 하기 때문. 공급이 남아도는 풍년에는 중앙에서 대신 사주고, 공급이 모자라는 흉년에는 농업보조금 형태로 갚아주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북한에선 그딴 거 없이 그냥 정부수매라는 이름의 '''공출'''(…)을 해버리고, 이로 인한 농촌의 생산 의욕 감퇴 또한 북한 식량난의 중요한 원인 중 하나다.[13] 대한민국의 쌀 소매가격이 약 1kg에 2000원(한화) 정도.[14] 북한에서 자살은 구체적인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체제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행위'로 취급되기 때문에 사망한 이의 명예는 말할 것도 없고 유가족도 탄압으로 고생하게 된다. 요즘은 예전만큼 신경 쓰지는 않는다고도 하나, 화폐개혁을 단행할 당시만 해도 심각한 문제로 취급하던 게 사실이다.[15] 과거에 인플레이션으로 경제가 막장이 된 제3세계 국가가 아예 자국 통화를 포기하고 미국 달러를 공용 통화로 인정해서 경제를 안정시킨 사례도 존재한다. 어차피 자국 통화는 아무도 안쓰고, 다들 달러로만 거래하니까… 먼 과거도 아니다. 가장 가깝게는 그 유명한 짐바브웨의 초인플레이션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자국의 화폐를 포기하고 달러 및 유로화를 통용하기로 하고 현재도 지속되고 있다.[16] 중국은 심각하긴 커녕 미국을 따라잡으려고 안간힘을 쓰고있다. 특히 군사력으로는 2021년 초 항모 4번함 건조 기초 작업을 시작했다.[17] 최소 수십만명이 굶어죽은 고난의 행군 때는 원인을 외부로 돌려 김정일의 권력을 더 굳건히 다질 수 있었지만 화폐개혁은 정권의 자체 오류임이 너무도 분명하기에 그럴 수 없었고, 위와 같은 일까지 겹치면서 고난의 행군으로도 돌리지 못했던 정권에 대한 신뢰가 완전히 무너졌다.[18] 소련이 망하기 전까지 북한에서는 영어(영국식 영어)와 러시아어를 동시에 제1외국어로 지정했을 정도로 러시아어를 중시했다. 소련 해체 이후 영어 교육을 더욱 강화하였지만 여전히 러시아어가 친숙한 인구가 많다. 특히 소련 해체 이전에 학교 교육을 받았던 이들.[19] 국경지역이라도 자강도 같은 곳은 통제가 심해 시장 경제의 발전이 뜸하고, 내륙의 황해도 같은 곳도 '서비차'라는 운송수단으로 물류 유통이 가능했다.#[20] 황당하기 이를 데 없지만 실제로 발표된 연구결과다. 딱 화폐개혁이 벌어졌던 2009년 코엑스에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발표된 내용이다. 영상 소스는 주로 일본 내 조총련에 친족이 있는 상인들을 통해 입수된다고 한다.[21] 베트남에서 쌀의 정부공급가와 시장가격은 10배 수준이었다. 이 차이는 1989년에 정부공급가를 폐지하고 시장가격으로 단일화하면서 비로소 해소될 수 있었다.[22] 이런 오류가 나타난 원인은 해당 전문가들이 경제적인 면을 자세하게 파악하기 힘든 정치학자들에게 해석을 요구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당장 한국 북한학계의 인적 구성부터가 정치학자들이 주류를 차지하고 경제학, 사회학자들이 태부족인 것이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