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성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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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조선로동당 행정부장 겸 정치국원
국방위원회 부위원장
장성택
張成澤 | Jang Song-thaek'''

'''출생'''
1946년 1월 22일[1]
북조선인민위원회 함경북도 청진시 신암동
'''사망'''
2013년 12월 12일(향년 67세)
북한 평양직할시
'''국적'''
[image] 북한
'''학력'''
[image] 김일성종합대학 (학사)
[image] 모스크바 대학교 (학사)
'''계급'''
[image] 대장
'''직업'''
군인, 관료, 정치가
'''주요경력'''
최고인민회의 8~12기 대의원(1990~2013)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2007~2013)
국방위원회 부위원장(2010~2012)
조선로동당 정치국 위원(2012~2013)
국가체육지도위원장(2012~2013)
'''주요서훈'''
[image] 로력영웅(1989)
[image] 김일성훈장(1992)
[image] 김정일훈장(2012)
'''정당'''
(1967~2013)
1. 개요
2. 일생
2.2. 김씨 왕조의 부마가 되다
2.3. 첫 번째 숙청
2.4. 김정일의 최측근
2.5. 두 번째 숙청
2.6. 김정은 승계 전후
2.7. 실각
2.8. 마지막 숙청
2.9. 처형
3. 분석 - 왜 숙청되었는가?
3.1. 이유에 대한 논란
3.2. 김정은 체제와의 연관성
3.3. 김여정 연관설
3.4. 군부 과격파의 득세
3.5. 박근혜와의 연관설
3.6. 라종일 교수의 주장
4. 장성택 생존설
5. 평가
6. 기타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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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건성건성 박수'''를 치면서 오만불손하게 행동하여 우리 군대와 인민의 치솟는 분노를 자아냈다.

- 장성택 처형 직후 조선중앙TV에서(최정훈) -

김정일의 여동생인 김경희의 남편으로, 김정일의 매제다. 즉, 김일성의 사위이자 '''김정은의 고모부'''이기도 한 인물이다. 게다가 친형인 장성우와 장성길은 조선인민군 간부였으며 둘 다 지병으로 사망했다. 자녀로는 무남독녀인 장금송이 있었는데[2] 2006년 8월에 신변 비관으로 프랑스 파리에서 수면제를 과다복용해 스스로 생을 마감한 걸로 알려져있다.
김정일 시대에는 굴곡이 있긴 했지만 명실상부한 북한의 권력 2인자로 군림해 왔던 실세 중의 실세였으며 한때는 김정일의 뒤를 이어 북한의 새로운 최고 권력자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한 몸에 받기까지 했던 사람이었다. 김정일이 죽은 뒤에는 김정은과 더불어 북한의 투탑이 되거나, 아니면 덩샤오핑처럼 김정은을 얼굴마담으로 앉혀 놓고 본인이 막후에서 실권을 휘두르는 최고 실권자가 될 거라는 예상이 많았을 정도였다. 그러나 2013년 12월경 석연치 않은 이유로 숙청, 이후 곧바로 처형당했다.
직함으로는 국방위 부위원장,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 겸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이었으며 인민군 대장을 겸하기도 했다.
북한의 대표적인 친중파 인사로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도 했다. #

2. '''일생'''



2.1. 청년


북조선인민위원회 시대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역 # 출신으로 장성택의 부친은 일제강점기에 국내 공산주의자들이 주도한 함북 길주 명천 농민쟁의에 참가했었다고 하며 그렇게 부유한 집안은 아니었던 정도로 알려져 있다. 다만 일설에는 함경남도 문천군(현 강원도 천내군) 출신이란 떡밥도 있으나 이는 정치국 위원 주상성의 지역이다. 주상성 역시 김정일의 신임을 받았으나 2011년 미움을 받아 전격 좌천, 해임되었다.#
김일성종합대학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1969년에는 모스크바에서 유학하는 등 엘리트 코스를 밟았다. 아버지가 국내에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체포된 경력이 있던 탓에 성분은 나름대로 괜찮아 김일성대에 입학할 수 있었다. 장성택이 대학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국내에서 항일투쟁을 한 후손들의 성분은 나름대로 알아줬다고 한다. 1968년 갑산파 숙청 이후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어졌지만.

2.2. 김씨 왕조의 부마가 되다


젊은 시절 당시 기준으로 준수한 키에 호감형 외모였던 장성택은 유머감각도 있으면서 노래도 잘하고 아코디언도 능숙하게 연주했다고 한다. 김정일의 전속요리사였던 후지모토 겐지를 비롯해 최은희, 신상옥 부부도 장성택을 모두 '장신의 미남' 이라고 묘사했다.
김일성의 딸 김경희와는 1964년 입학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동급생으로 만났다.[3] 여기서는 둘이 같은 반이었고 장성택은 김경희의 앞자리를 배정받았다. 김경희는 장성택을 처음 보고 반했다고 전해지며 그에게 끈질기게 구애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시작된 인연으로 둘은 사귀게 되었고 이 사실을 들은 김일성은 처음엔 대단히 불쾌하게 생각하여 김경희를 불러 다그치기도 하고 타이르기도 했으나 김경희는 요지부동이었다. 이에 김일성은 김일성종합대학 총장 황장엽에게 둘을 떼어놓으라고 지시했으나 김경희가 총장실에 직접 쳐들어가서 "총장 선생이 뭔데 남의 연애사에 간섭이시오?" 하고 고함을 친 것은 유명한 이야기.
결국 김일성은 김영주를 시켜서 장성택이 대학교 3학년이었을 때 '놀기 좋아한다' 는 이유로 김일성종합대학에서 원산경제대학으로 강제로 전학시키기도 했다.[4] 그런데 이때 김경희는 '''김일성의''' 차(…)를 끌고 원산과 평양을 왕복하면서 장성택의 뒷바라지를 해주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김경희가 처음 원산경제대를 방문했을 때는 교직원들이 '''수령님의 차'''가 뜬금없이 오는 것을 보고 "어이쿠, 현지지도하러 오셨구나!" 면서 혼비백산했다 카더라. 이렇게 김경희는 험준하기로 유명한 마식령 고개를 매번 넘어가서 장성택의 빨래까지 해주고 가곤 했다. 김정일과 김일성의 설득에도 독한 김경희가 조금도 뜻을 굽히지 않자, 오빠 김정일이 먼저 "저러다가 차 사고 나서 애 다치면 어떡하냐. 낮은 신분은 높여주면 그만이다" 라고 아버지를 설득하여 결국 둘의 연애는 인정된다. 장성택은 이때부터 평양시당 지도원, 당중앙위원회 지도원, 당 부과장, 당 과장을 거쳤다.

2.3. 첫 번째 숙청


이렇게 김일성은 사윗감인 장성택을 몹시 미워했으나 장성택을 김경희의 끈질긴 부탁과 김정일의 중재로 다시 복귀시켰고 그는 김정일의 측근이 됐다. 대신 그동안 사상교육으로 고생 좀 했다고 한다. 말이 교육이지 실제로는 가혹한 육체 노동+갈굼으로 점철된 공개 비판으로 사람 돌아버리게 만드는 처벌이라고 한다. 소설 1984를 생각해보자. 김일성이 장성택을 싫어했던 이유 중 하나가 장성택의 부친이 공산주의자로 소작쟁의를 주도하긴 했어도 자신과 연고가 없는 함경도 토착 공산주의자, 즉 자신의 잠재적인 정적이었기 때문이다.[5] 혈통을 제일 중시하는 계급제 사회 북한에서 김일성 정적의 아들이 부마가 된다는 것 자체가 김일성에겐 껄끄러웠을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함경도 토착공산주의자라지만 공신관 관계가 없는 미천한 신분이라 김일성은 늘 불만스럽게 여겼다.
다만 고위직에 있었던 탈북자 강명도 교수에 의하면 김일성은 그렇게까지 장성택을 싫어하지 않았으나 오히려 김정일이 장성택을 더 싫어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김정일은 김경희를 무척이나 아꼈기 때문에[6] 김경희가 장성택의 아내가 된 것이 못마땅했다는 것과 장성택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애 그를 더욱 미워했다는 주장도 있다.
김경희는 장성택의 누이 장계순과 함께 1969년에 소련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돌아와서 1972년에 장성택과 결혼하고 무남독녀 장금송을 출산한다. 장금송은 29세이던 2006년 8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유학 생활 중에 자살했다. '장금송이 살아있었다면 조카에게 처형당하는 비참한 상황은 면치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장금송이 있었더라도 크게 상관은 없었을 가능성이 큰 게 장금송은 장성택 부부의 친딸이 아니라 입양아기 때문이다.
가까이에서 그들을 지켜본 강명도에 의하면 부부 중 누구에게 문제가 있는지는 몰라도 장성택 김경희 사이에는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부부 관계는 꽤나 좋았다고 전해지나 아이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둘의 사이가 점점 벌어졌다고 한다. 이에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택한 방법이 김정일의 첫째 아들인 김정남을 키우는 것 이었다. 그러나 여러 노력들에도 둘의 관계를 돌리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둘의 사이는 더욱 벌어지게 된다. 강명도는 방송에 나와 김경희가 자기 집에 와서 막 우는 장면을 종종 목격했으며, 김경희가 엄청나게 술을 마신 후 강명도의 어머니에게 상담을 받았다고 이야기하며, 강명도가 어머니에게 "김경희가 왜 저러냐"며 자초지종을 물어보니 장성택이 바람을 피워서 김경희가 힘들어하는 것 같다는 말을 들었다고 증언했다.
훗날 탈북하여 우리나라로 망명했다가 북한 공작원에게 암살당한 김정일의 처조카 이한영의 회고에 의하면 김정일이 측근들과 비밀 연회를 열었듯 장성택도 자기 측근들을 불러놓고 연회를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김정일의 귀에 들어갔고 김정일은 장성택을 불러 '네가 뭔데 내 흉내를 내느냐. 이 땅에서 세도를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다'고 몹시 화를 냈고 2년간 강선제강소의 작업반장으로 쫓아내 버렸다.
그러던 어느 날, 이한영의 이모이자 김정남의 생모였던 성혜림이 김경희에게 "장성택 없이 고생이 많다"면서 위로를 건넸고 김경희는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죠"라고 말했지만 성혜림은 그게 본심이 아니라 여겨 김정일을 설득해 장성택을 데려오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정일이 고집을 꺾지 않자 독단적으로 장성택을 평양으로 불러 올렸다.
사상 교육을 받고 돌아온 장성택은 몰골이 말이 아니었고 어찌나 구르고 굴렀는지 후지모토 겐지는 그의 맨다리를 볼 때마다 쇳물이 튀어 입은 화상 자국을 몇 군데나 보았다고 증언했으며 이한영도 장성택이 작업반장으로 일하다가 불에 뎄다는 말을 들었다고 책에 써놨다.
김정일은 장성택을 보고 그냥 성혜림에게 "당신 참 극성이구려"라며 한 마디 쏘아 붙이기만 하고 화를 내거나 하진 않았다고. 그리고 장성택에게 한 마디 없이 식사를 하다가 장성택에게 술 한 잔을 따라주며 다시는 이런 일이 없게 하겠다는 다짐을 받고 용서를 해줬다고 한다.
하지만 돌아온 뒤에도 아내 김경희와의 관계는 개선되지 않고, 김경희는 알코올 의존증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김경희가 자신의 개인 음악 교사였던 바이올리니스트 김성호와 맞바람을 피우자 장성택이 심화조 사건 때 그 바이올리니스트를 반동 혐의를 씌워 죽였으며 그 후로 부부 사이가 완전히 벌어졌다는 주장도 있다.

2.4. 김정일의 최측근


이후 쾌속 승진하였다. 1982년 10월 복귀하여 조선로동당 청소년사업부 부부장, 1985년 7월 청년사업부 제1부부장을 맡았으며 1986년 11월 최고인민회의 제8기 대의원, 1988년 12월에는 청소년 사업부 부장을 맡았다. 1989년 7월에는 '''조선로동당 청년 및 3대혁명 소조부 부장'''을 맡았다. 이것이 그의 공식 직함이 된다. 1990년 4월 제9기 대의원으로 재선하였으며 1992년 당 중앙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1998년 9월과 2003년 9월에 다시 제10기, 11기 대의원으로 재선하였다.
복귀 이후에는 마약밀수를 진두 지휘하고 3대혁명 소조운동을 추진하는 등 김정일의 최측근으로 권세를 부렸다. 그의 권세를 엿볼 수 있는 일화로 역시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인데 아무도 장성택을 '장 동지' 나 '부장 동지' 라고 부르지 않고 깍듯이 '장 1부장님' 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2002년에는 남북경제실무접촉회담 때 북한 경제시찰단의 일원으로 서울을 몇 차례 방문하기도 했다. 장성택은 삼성전자 및 한국의 여러 공장들을 둘러보고 갔다. 당시 "자본주의 문화를 맛보자"면서 밤마다 가라오케(노래방, 룸살롱) 등을 즐겼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시 기준으로 남한을 방문한 북한의 최고위 인사였다. 이때 북한경제시찰단의 명목상 단장은 박남기[7] 국가계획위원장이었지만 실권자는 장성택이었다고 전해진다. 참고로 이 기록은 2014년 10월 인천 아시안게임 폐막식을 맞아 방남한 황병서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이, 2018년 2월 평창올림픽 개막식에 참가한 김영남이, 이후 2018년 4월 27일 휴전선 이남 땅을 직접 밟은 김정은이 각각 갱신했다.

2.5. 두 번째 숙청


그러다가 2003년 10월부터 북한 언론의 동정 보도가 끊겼고 2004년 초에는 '권력욕에 의한 분파행위' 를 의심받아 조선로 중앙위원회 조직지도부장 및 수도건설부 1부부장에서 해임당하는 등 상당히 부침이 심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2006년 1월 29일 조선중앙방송 보도에서 당 중앙위원회가 개최한 음력설 연회에 참석한 인사들을 언급할 때 소개되어 조선로동당 근로단체·수도건설부 제1부부장. 혹은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으로 복권되었음이 밝혀졌다. 2004~2006년 동안의 공백은 아직도 수수께끼인데 기존의 실각설 외에 두 번이나 사상 교육을 받은 탓에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아 아내 김경희와 함께 강원도로 요양을 간 것이 실각으로 와전되었다는 설도 있다.
당시 실각설로는 김경희와 이혼한 후 사고사했다는 설도 있었다. 반대로 김경희 사망 후 실각설도 있으나 모두 헛소문이 되었다. 다만 당시 김경희와는 사이가 좋지 않은 듯하며 별거 중이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다만 이 잠적을 해명해 줄 만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2005년에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북한에 가서 김정일에게 장성택의 안부를 물었는데 "남쪽에 가서 폭탄주도 배우고 해서 '''아파서 쉬게 했다'''" 라고 말하며 '''웃었다'''고 한다.
'흑금성' 박채서 씨에 의하면 김정일에게 다음 세대는 집단지도 체제를 도입하자고 건의했다가 가택연금 됐다고 한다.

2.6. 김정은 승계 전후


2007년에는 10월(혹은 12월)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행정부장으로 승진해 다시 일선에 나섰다. 당 행정부장이 국가안전보위부인민보안부, 보안성, 검찰을 담당하는 직위인 것을 감안하면 사실상의 서열 2위 실권자였던 셈이다. 복권 후에는 단순히 행정부장이나 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이라는 직함으로만 소개되었고 이후에도 그다지 존재감이 강하다고 볼 수는 없던 인물로 여겨졌다. 2009년 4월 최고인민의회 대의원에 재선(5선) 되었고 북한 국방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김정일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김정은으로 승계가 진행되었고 후견인 격인 장성택의 지위는 점차 높아졌다. 2010년 6월에 행정부장에 더해 서열 2위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되었음이 발표되었고 그 해 9월 당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 당 중앙위원회 위원,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김정일의 3남 김정은의 후계구도를 주도하고 있다는 견해가 그때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이전까지 장성택은 김정남의 생모였던 성혜림의 도움으로 복권되었기 때문에 김정남 파였다는 것이 정설이었던 터라 이와 같은 부위원장 임명 소식은 북한 전문가들에게 꽤 혼란을 안겨주었다.
2011년 12월 김정일이 사망함에 따라 영구차를 함께 호위했고 김정은의 최측근으로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일각에서는 본인의 권력욕과 아직 막강하지 못한 김정은의 측근 세력 등으로 볼 때 김정은을 꼭두각시로 내세우고 자신이 권한 대행으로 정치일선에 나서거나 극단적인 경우에는 '''김정은을 내쫓고 자신이 그 자리에 앉을 수도 있다'''는 분석도 있었다.
다만 장성택 역시 나이가 많고 건강이 그리 좋지 않으며 이전에 두 차례 숙청당했을 때 자신의 세력을 거의 잃어버렸다는 주장도 있기 때문에 정권을 잡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주장도 있었다.
또한 정치적 라이벌로 평가받고 있는 또 다른 국방위원회 부위원장인 오극렬의 존재도 변수로 작용하는 것 아니냐는 관측이 있었다. 하지만 오극렬 역시 장성택과 마찬가지로 정치위원 제도의 폐지를 건의했다가 오히려 김일성의 노여움을 사 실각하는 등 경력에 오점을 남긴 바 있고 나이도 여든 살을 넘겼기에 오늘내일하는 군부 바지사장일 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실제로 김정일 사후 발표된 국가장의위원회 명단에 이름만 올리고 장례식 때는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아 숙청설이 나돌다가 2012년 1월 1일에 은하수관현악단의 신년음악회 보도에서야 이름이 언급되는 등 여러 모로 다른 군부 실세들과 비교하면 안습이라 건강이나 권위 모두 예전만큼 고려될 수 없게 되었다.
2011년 12월 25일에 김정은이 김정일의 시신에 참배했을 때도 다른 측근들과 함께 동행했는데 뜬금없이 대장 군복을 입고 나와 총참모장인 리영호 옆에 서있는 모습이 나오면서 장성택 실세설에 힘을 실어주었다. 그동안 그가 대장직에 올랐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었기 때문에 장성택이 대장 군복 차림으로 등장한 것은 놀라울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는 대장 군복 차림으로 등장하기 바로 하루 전에 방송된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나온 한 북한 문제 전문가는 '장성택은 대장 칭호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군부에는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을 것' 이라고 발언했을 정도다.
28일에 금수산태양궁전에서 있었던 영결식에서도 김정은의 바로 뒤에서 영구차 행렬을 호위하는 등 계속 존재감을 과시했고 2012년 2월 15일에 4.25문화회관에서 개최된 김정일 생일 70중앙보고대회에서도 각각 대장과 상장 계급을 받은 당 비서 박도춘과 당 기계공업부 부장 주규창 등 다른 정계 인사들과 함께 재차 대장 군복 차림으로 참석했다. 장성택의 대장 진급은 정계뿐 아니라 군부에서도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올랐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어서 앞으로 김정은을 보좌할 핵심 측근으로 확실히 자리를 잡은 것이었다.
2012년 4월 11일 당대표자회에서는 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친족들과 자신의 계파에 속하는 인물들도 대부분 요직을 차지했는데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았다.
김경희(당 비서), 최룡해(당정치국 상임위원 겸 인민군 총 정치국장(대장) 겸 당군사위원회 부위원장, 다음달 차수가 됨), 김원홍(전 조선인민군 총정치국 조직부국장. 국가안전보위부장(남한의 국가정보원장과 비슷한 위치) 겸 정치국 위원. 대장), 리명수(인민보안부장(남한의 경찰청장과 비슷한 위치). 정치국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대장)).
북한의 핵심 고위층 인사들 중에도 정치국이나 중앙군사위원회에서 상임위원이나 위원은커녕 후보위원 자리에서 맴도는 인물들이 쌔고 쌨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번 당대표자회를 통해 장성택이 당정군에서 확실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여겨졌다.
2012년 7월 가장 큰 라이벌이라 볼 수 있는 조선인민군 총참모장 리영호가 모든 공직에서 전격 해임되었는데 김정은 혹은 장성택이 선군정치로 지나치게 힘이 커진 군부를 제어하기 위해 야전 사령관 출신이 아닌 인사들로 정권을 이끌고 나가겠다는 의지가 보여진 것이 아닌가 하는 분석이 나왔다. 리영호의 후임으로는 장성택 라인과 우호적인 관계인 것으로 보이는 신임 차수인 현영철이 임명되었다. 김영춘 인민무력부장은 당 부장으로 이동해 은퇴 수순을 밟게 되었다. 우동측과 김정각 등 김정일 시대의 군부 인사들도 리영호의 해임 이후 은퇴하거나 모습을 드러내지 않게 되었다.
8월에는 경제특구 유치를 위해 중국을 방문했는데 유치 전략이 성공적이었는지 조선중앙통신에서 광복절에 즈음해 황금평-위화도, 라선 지구 공동개발을 위한 제3차 '조·중공동지도위원회'의 협상 결과를 보도했다. 북한 장성택 "경제특구 7곳으로 확대" 장성택은 이 공동 개발 협상 외에 중국 정부에 100억 달러 규모의 차관도 요청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11월에는 중앙위원회 정치국 확대회의의 결정으로 국가체육지도위원회가 결성되자 위원장으로 임명되는 등 2012년의 장성택은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막후의 실력자로 영향력을 행사했다. 2012년 12월 차수에서 대장으로 강등되었던 최룡해가 2013년 2월 다시 차수로 재진급한 것도 장성택의 힘이 작용했다고 추측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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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이렇게 김정은이 있는데도 삐딱하게 앉기까지 했다. '자세가 삐딱해서 북한의 실권자로 추측된다'는 대한민국 국방부의 발표가 있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 외에도 북한식 표현대로라면 '최고존엄'이 있는 자리에서 호주머니에 손을 넣거나 김정일 참배에서 경례한 손을 먼저 내리거나 하는 행동 등으로 김정은을 의식하지 않는 듯이 보이는 행동을 하기도 했다.
장성택은 2013년 4월 김경희에게 전화해 "개성공단은 폐쇄하면 안 된다. '''정은이'''를 좀 말려라" 라고 한 것이 도청을 당해 김정은 귀에 들어갔다는 얘기도 있다. 관련기사가 한 건 있으나 확인된 내용은 아니다.
'''그런데…'''

2.7. 실각


2013년 2월 이후로 장성택이 북한 내부의 동정 발표에서 사라지고 있다. 김정은 체제가 안정되면서 장성택의 영향력이 줄어들고 있거나 군부 내부의 강경론자한테 밀렸다는 설, 가택 연금설, 아니면 건강이 좋지 않은 부인 김경희를 돌보기 위해 잠시 중앙정계를 떠났다는 설 등이 난립했다.
그러다가 2013년 4월 1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때 나타났는데 최룡해 옆자리에 앉아 건재함을 과시하였다. 이에 따라 2월부터 3월까지 장성택이 보이지 않았던 건 본인이나 부인 김경희의 건강 문제인 것으로 추정되었다. 일부 언론 기사에서 "장성택이 되면 개방해서 더 잘 살 텐데" 같은 북한 주민의 여론을 전하기도 했다.
5월에 국가의 채무를 갚기 위해 라선경제무역지대의 토지를 50년간 외국(중국)에 임대하는 것을 주도한 것이 (사망 이후에 확실히) 드러났다.
'''2013년 7월 사진'''
군복을 입은 장성택과 김정은. 당시만 해도 계속 김정은의 조력자로 남을 줄 알았는데… 이때만 해도 몇 달 후 겪을 자신의 운명을 전혀 몰랐을 듯.
2013년 10월 말만 해도 라선특별시를 시찰하고 "나선은 완전히 썩어빠진 자본주의의 온상이 돼 버렸다. 봉쇄를 더욱 철저히 하라" 라는 말을 해서 개혁과 통제 사이에서 가닥을 잡을 실세로 여겨졌다. 11월 6일 안토니오 이노키의 방북 때도 국가체육지도위원장의 입지로 모습이 비치기도 했다. 그러나…
2013년 12월 3일, 국정원은 장성택이 실각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밝혔다. 11월 중순 장성택의 핵심 측근 두 명이 공개처형 당했으며 김정남과 이메일 왕래, 전화 통화까지 하는 일본의 언론인 고미 요지 씨는 이들이 처형당할 때 북한 당국에서 '''장성택을 공개처형장으로 끌고 가서 측근들이 죽는 것을 지켜보게 만들었다고 했다'''. 또 이로 인해 장성택이 실각한 것으로 보인다는 국가정보원발표가 있었다. 공개처형의 당사자는 장성택의 오른팔인 행정부 제1부부장 리용하와 왼팔인 행정부 부부장 장수길이며 반당(反黨) 혐의로 처형되었다고 알려졌다. 리용하 제1부부장은 국내 배급 일을 했고 장수길 부부장은 승리무역 사장으로 해외무역을 담당했다. 다만 장성택의 측근이기도 하지만 정확히는 김경희 쪽 측근이라 장성택이 이때는 안심했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아마도 최룡해 총정치국장과의 파워 게임에서 밀린 것으로 추정되었다.
실각직전 부인이자 고모인 김경희가 실각만큼은 막아달라고 김정은에게 부탁했으나 그대로 강행했다는 보고가 있었다.[8] 반대로 김경희가 앞장서서 장성택을 쳐냈다는 분석도 있었다(주성하 기자의 분석). 한편 장성택 본인은 소재가 불분명했는데 11월 중순(정청래) 혹은 하순(조원진)에 측근들과 함께 처형되었다는 보고도 있었다. 12월 1일자 로동신문에서 "김정은 유일 영도체계를 철저히 세우며 세상 끝까지 김정은과 운명을 함께 할 것" 을 촉구하는 기사를 내보낸 것도 이와 관련된 것으로 국정원은 추정했다.
그러나 12월 4일, 류길재 통일부 장관은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보고에서 '장성택과 김경희의 신변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고 보고 함으로써 그가 처형을 당하거나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것은 아닌 걸로 추정되었다. 하지만 이것은 숙청이나 실각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신변 안전만 확인한 것이다.
북한 내에서는 비교적 온건파인 장성택의[9] 실각으로 북한 정세는 한 치 앞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게다가 최고 원로라서 오랜 세월 입지를 다져온 인물이 철저하게 숙청될 만큼 아직도 권력 암투가 극심하고 김정은 독재 체제가 불안정하다는 사실이 이번 사건으로 드러났다.
장성택의 입지는 최룡해가 수행(!)하는 모습이 비쳤던 내각 총리인 박봉주[10] 로동당 정치국 위원이 차지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해석에 따르면 라선 시찰 당시의 장성택의 발언은 박봉주에 대한 견제 발언으로 여겨진다. 당시 장성택과 비슷한 시기 박봉주 역시 시찰을 했는데 박봉주와의 서열 관계가 정해지기 어렵기 때문에 각자 시찰에 나섰다는 것이다. 오른팔이었던 리용하는 김정일 사망 당시의 장의의원 명단에서는 박봉주를 앞섰으나 결국 숙청되었다. 이 해석에 따르면 북한의 개방 정책은 지속될 것으로 여겨진다. 물론 박봉주가 실권을 가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반면 박봉주 역시 장성택의 최측근이며 함께 숙청될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었다. 이 시각에 따르면 김정은의 사실상 친정과 함께 최룡해가 최실권자가 되며 북한의 개방정책은 일순간에 대규모로 뒤집힐 것으로 보인다.
장성택 입장에서는 키워줬더니 뒤통수 맞은 격이 된다. 결국 이 해석들은 박봉주 총리가 숙청 이후인 12월 14일 주석단에 등장하여 살아남고 최룡해가 김정은과 함께 숙청 이후 첫 방송 등장한 3인 가운데 한 명이 되면서 반반씩 맞는 셈이 되었다.
한편 이 사건을 통해 '장성택이 '실각'을 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권력을 많이 가지고 있지 않았다' 라는 주장도 일각에서 제기되었다. 애초에 핵심조직이 아닌 비선조직이었다는 것. 일종의 명예직이었던 체육지도위원장으로서 이노키를 만난 것이 오히려 실각의 계기가 되었다는 평가도 있었다. 그러나 적어도 중국과의 친분이 강하며 사실상의 서열 2위였던 인물의 숙청 자체가 이례적인 일임은 분명하다. 한편 국정원의 보고와 달리 정치범수용소에 가둬져 있다는 추정이나 실각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었다.
여하간 장성택이라는 인물은 김정은 권력 승계 초기 '''김정은은 허수아비에 불과하고 장성택과 고모인 김경희가 후견인 역할을 할 것이다'''라는 전망이 있었을 정도로 북한 지도부 내에서 영향력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이런 인물이 2인자 자리에서 쫓겨났다는 것은 북한 내부의 권력 싸움이 심한 상황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김정은의 정치 파워가 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독재자에게 강력한 2인자란 언제든지 자신의 자리를 넘볼 수 있는 존재이다. 설령 그것이 친인척이라 해도 말이다. 권력 앞에서는 눈물 없다는 것이 이미 역사에서 수없이 증명되지 않았는가? 그렇기 때문에 장성택은 김정은이 손을 쓰기 전에 쿠데타를 일으키든지 스스로 물러났어야 했다는 분석도 있다.
이런 상황에서 최룡해가 장성택과의 권력 싸움에서 승리하고 결국 김정은의 자리마저 넘볼 것이라고 예측했던 어느 중국 역술인의 한자사주가 새삼 관심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최룡해라고 다를 것도 없다. 김정은은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김정일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은 인물'''이며 북한이라는 나라 구조 자체가 수령과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가 엄청난 나라이기 때문에 최룡해라고 해도 언제든지 실각할 위험성이 있다.

2.8. 마지막 숙청


2013년 12월 5일, 세종연구소에 따르면 장성택 본인은 육체적 처벌은 받지 않은 상태이며 가택연금 조치되어 계속 집에서만 지낸다는 기사가 떴다.
12월 6일, 언론 보도에 의하면 장성택의 최측근 중 한 명이 중국으로 도피해 망명을 신청했다고 한다. 이 측근은 장성택의 자금을 관리한 인물이며 중국은 한국으로의 망명은 불허하고 있고 미국 측에서 미국 망명을 주도하려 한다는 것이다. 다른 보도에서는 이 측근이 한국 또는 제3국으로의 망명을 요청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통일부와 국정원은 아는 바가 없다고 부인한 상황.
12월 7일에는 북한에서 '''재'''방송된 선전용 기록영화에서 '''장성택을 고의로 삭제시킨''' 정황이 발견되어 실각설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다. 이오시프 스탈린 문서에 나오듯 공산권 특유의 '인민의 에어브러시질' 과 비슷한 일이 실행된 것. 특히 김일성의 후처 김성애가 영상에서 삭제된 이후 다시는 복권되지 못했다는 점을 미루어볼 때 장성택 역시 앞으로의 복귀는 불가능해진 셈. 또한 기록영화뿐만 아니라 출판물들에서도 조만간 장성택과 관련된 모든 기록이 삭제될 것으로 분석되었다.[11]
12월 9일, 조선중앙통신이 장성택의 해임을 공식 발표하였다. 죄목은 '''반당·반혁명·종파행위'''. 당일 오후, 조선중앙TV는 12월 8일 열렸던 조선로동당 정치국 확대회의에서 장성택 해임안이 채택된 직후 장성택이 김정은 앞에서 인민보안원 2명에게 체포되어 끌려나가는 사진을 보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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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택은 앞에서는 당과 수령을 받드는 척 하고 뒤에 돌아앉아서는 동상이몽, 양봉음위(陽奉陰僞[12])하는 종파적 행위를 일삼았다" 라는 게 죄목이라고 한다. 또한 "장성택은 당이 제시한 내각중심제, 내각책임제원칙을 위반하면서 나라의 경제사업과 인민생활향상에 막대한 지장을 주었다" 라는 대목이 있으며 그리고 "국가재정관리체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나라의 귀중한 자원[13]을 헐값으로 팔아버리는 매국행위를 함으로써 주체과 주체비료, 주체비날론공업을 발전시킨 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과 어버이 장군님의 유훈을 관철할 수 없게 하였다" 라고 주장했다.
또 2009년 박남기의 주도로 이루어진 북한의 화폐개혁에 대한 실책도 모두 장성택이 떠안게 되었다. 판결문에는 "2009년 만고역적 박남기놈을 부추겨 수천억 원의 우리 돈을 람발하면서 엄청난 경제적혼란이 일어나게 하고 민심을 어지럽히도록 배후조종한 장본인도 바로 장성택이다."고 하여 사실상 죽은 박남기와 장성택에게 전가시켰다.
자세한 것은 로동당 보도 전문을 통해 확인할 것.
라브렌티 베리야가 당한 것처럼 장성택이 눈치채고 반격하지 못하게 공개회의 석상에서 기습적으로 체포한 것으로 보이지만 거꾸로 말하면 장성택은 이때까지 무사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렇게 되면 국정원이 주장했다는 11월 처형설은 사실이 아니게 되며 신변만은 안전하다는 통일부의 말이 사실이 된다. 심지어 미국의 정보관계자는 "국정원이 '장성택 실각'을 발표한 3일 이후 전 세계는 그것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고 북한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리고 5일 후 장성택을 전격 체포했다. '''국정원이 북한에 빌미를 준 측면이 있다'''" 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는 북한이 국정원 발표만 갖고 멀쩡한 장성택을 '홧김에' 숙청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데 오히려 북한 입장에서는 장성택과 그의 측근들이 건재한 모습을 공개하여 국정원을 국내외적으로 망신시키는 편이 더 효과적이라는 반론도 가능하다. 1986년의 김일성 사망 오보 사건이 대표적인 사례. 그리고 밑에 보면 알겠지만 김정은은 그 이전부터 이미 장성택을 내칠 생각이 있었다고 보는 게 더 명확할 것이다. 또한 저 기사에선 그 미국 정보 관계자가 누구인지 안 나와있다.
혹은 장성택이 이미 실각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일종의 합의적 쇼, 최소한의 암묵적 인지가 있었던 체포 장면이라는 시각도 있다. 그 근거로는 그동안 장성택은 김정은, 최룡해 등과 함께 단상의 주석단에 항상 자리가 배정되었으므로 정말 모르고 있다가 기습적으로 체포당한 것이라면 이날도 주석단에 앉아있어야 했을 것이라는 것이다. 다른 정치국원들과 함께, 그것도 맨 앞줄이 아닌 자리에 앉아있는 것 자체가 '''이미 체포된 상황에서 언론에 내보내기 위해 체포 장면을 재연한 것'''이라는 주장. 여하간 북한의 이러한 "외신의 가설에 대한 반사적 대응(확인)" 은 확실히 유례 없이 빠르며 공개적이었다. 자유북한방송에서는 "인물들 시선·잘린 어깨 등이 어색하다" 는 사진조작설이 나왔으나 통일부는 다시 일축했다.# 이 주장대로라면 장성택이 12월 9일 이전에 체포되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북한에서 고위인사로써 체포 장면이 보도된 사례는 1970년 이후로 유일하며 이로써 장성택의 안전까지 의심스러운 상황에 이르렀다. 북한 당국에서 공식적으로 발표한 반당 종파 사건은 1950년대 8월 종파사건 이후로 쓰인 적이 없는 엄중한 죄목이다. 확대회의에서는 주로 장성택에 대한 비판이 주를 이뤘으며 장성택과 가까운 관계인 박봉주 내각 총리조차 울면서 장성택을 비판했다고 알려졌다.
사실 북한은 정권이 바뀔 때마다 '''누군가는 숙청당했다'''.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정권이 교체될 때에도 한국전쟁 당시의 행적을 문제삼아 서관히를 비롯한 수백 명의 관료들이 간첩으로 몰려 사형당했다. 이번에 김정일이 죽고 김정은으로 정권이 바뀌자 타겟은 장성택이 되었다는 분석.
노컷뉴스의 단독보도에 의하면 이번 장성택의 실각에는 먼저 처형당했다고 알려진 리룡하, 장수길 두 사람을 비롯한 일부 장성택 측근들의 과잉충성이 원인이라 하며 이후 국가안전보위부와 당 중앙위원회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11월 30일 삼지연 시찰 때 이른바 '백두산대책회의' 를 열고 장성택의 처리 문제를 논의하였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이번 장성택 실각은 군부와의 갈등에 기인했다기보다는 김정은으로의 유일지도체제 확립에 걸림돌이었기 때문에 실현된 것으로 풀이된다.
자유북한방송에 따르면 장성택은 이미 12월 5일 처형되었다는 주장이 있었다. 다만 리용하 등도 함께 처형되었다는 주장이라 신빙성은 적다. 뒤에 보듯 북한의 공식 기록상과는 일치하지 않는다.
한편 장성택이 김정남을 김정은 대신 옹립하려는 쿠데타 모의를 하다 걸려 먼저 당했다는 도 있다. 헤럴드일보의 '대북소식통' 역시 장성택의 실각 이유가 김정남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12월 10일 저녁, SBS의 단독보도로 숙청된 북한 장성택의 핵심 측근이 북한의 핵개발 관련 핵심 자료를 빼돌려 중국으로 탈출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정부당국이 신병을 확보하고 있지만 미국, 중국이 관심을 보이고 있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주장이 나왔다. 이 장성택의 측근은 중국의 한국공관에서 심문을 받고 북한의 핵 기밀 등을 털어놓았다고 한다. 12월 17일에 김관진 국방부장관이 "2014년 1월부터 3월 초 사이에 북한의 도발 가능성이 높다" 라고 밝힌 것은 이 측근이 털어놓은 기밀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는 것.# 이로 미루어보면 북한의 4차 핵실험 기도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한 구체적 계획이 이 사람을 통해 남한으로 흘러갔을 개연성도 있어보인다.
12월 19일 세계일보 단독 보도에 따르면 장성택의 숙청을 전후해 북한 로동당과 군부 인사, 그들의 가족 등 70여 명이 중국으로 탈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가운데 일부는 국내 정보당국과 접촉, 남한으로의 망명을 저울질하며 중국 내 안가 등에서 은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정부 소식통은 "최근 장성택 처형을 전후해 김정은 정권의 숙청 대상에 오를 것을 우려한 장성택의 측근은 물론 김정은 체제의 '공포정치'에 겁먹은 일부 인사들까지 중국으로 탈출하고 있다" 면서 "현재 정보당국이 파악한 인원만도 70여 명에 이른다" 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정보당국이 파악한 70여 명은 대부분 북한 로동당과 군부 인사, 외교관들로 일반 주민은 제외된 숫자"라면서 "유럽 지역 국가에서 북한 대사를 지낸 고위층 인사와 북한의 도발 징후를 담은 기밀 문서를 정보당국에 넘긴 인사도 포함돼 있다"고 전했다. 북한 정보에 밝은 군 소식통은 "탈출한 북한 측 인사 가운데는 북한 로열 패밀리의 비자금 내역에 정통한 인물과 남파간첩 명단 및 핵무기 관련 자료를 갖고 국정원과 협상 중인 거물급도 존재하는 것으로 안다"면서 "이들은 대부분 한국 망명을 원하고 있다"고 전했다. 또 다른 소식통은 "장성택 측근 중 망명을 한다면 장성택의 돈을 관리하던 자금줄일 가능성이 높다" 면서 "장성택 처형 근거로 부패 문제가 거론된 이상 장성택 밑에서 돈과 관련된 일을 했던 인사는 살아남기 어렵다"고 말했다.#

2.9. 처형


12월 13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이 12일 국가안전보위부 특별군사재판에서 '''사형''' 판결 후 '''그 즉시 집행'''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로서 장성택 개인은 사라졌지만 장성택 일파에 대한 숙청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그야말로 '''피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현실이다.
2014년 1월 26일자 연합뉴스의 보도에 의하면 장성택의 누나인 장계순을 포함한 일가인 장용철 전 말레이시아 대사와 전용진 전 쿠바 대사와 그들의 아들인 20대 중반의 태령, 태웅을 포함한 장성택 일가에 대한 전격적인 처형 소식이 보도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장성택 일가에 대한 사형은 그야말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정말 무자비하게 집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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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위부원들에게 이끌려 재판장에 끌려나오는 장성택의 사진. 한때 북한 정권의 실세였는지 의심케 할 정도로 양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사병에 의해 목덜미가 붙잡힌 처참한 모습이다.
장성택은 김정일 사후 대장 계급을 받아 군인 신분인데 그래서 재판은 속전속결로 끝낼 수 있는 군사재판[14]으로 실시되었으며 선고 후 바로 집행하여 공포심을 극대화했다. 민간인 신분이라면 북한의 법제상 3심까지 어찌어찌 갈 수도 있지만 애초에 거기까지 간다 해도 형량 감형이라고 해봤자 무기징역 뿐인데 그래봤자 무기징역으로 선심 쓰는 척하며 정치범수용소에 처박아놓고 서서히 피를 쥐어짜서 죽일 뿐이다. 직접적인 방법이냐 간접적인 방법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 '''사형에 처하는 것은 다를 게 없다'''. 더욱이 북한전제군주제 이기 때문에 어차피 김정은은 장성택이 민간인 신분이었다고 해도 즉결처분했을 것이다. [15]
사진을 보면 말랐던 과거 모습과 달리 '''왼쪽 눈두덩이가 부어오르고 이 든 흔적이 있고 에도 구타 흔적''' 같은 것이 있다. 거기다가 자세도 영 엉거주춤하고 측면만을 보여주고 있다. '''고문'''을 받지 않았느냐는 추측이 있다.
아래는 월간중앙 - 중앙시사매거진에 올라온 글 중 일부이다.

장성택의 최후는 처참했을 뿐만 아니라 측근들이 눈앞에서 참혹하게 사라지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라종일 한양대 국제학부 석좌교수에 따르면 김정은은 장성택의 최측근인 리룡하 행정부 제1 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 체포 명령을 내렸다. 두 사람은 10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장성택 관련 혐의를 모두 토해냈다. 보고서를 접한 김정은은 반혁명 분자들을 장성택 면전에서 총살하라고 명한다. 라 교수는 증언을 토대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오전 10시경 군용차 한 대가 연병장 무대 옆에 와서 섰다. 그곳에서 온몸이 결박된 리룡하와 장수길이 나왔다. 국가안전보위부 특별 재판관이 판결문을 읽었다.‘개인적 간부(장성택을 뜻함)를 맹종맹동하며 반당, 반혁명, 종파행위를 한 전 행정부 제1 부부장 리룡하와 장수길에게 사형을 언도하며 사형은 즉시 집행한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두 사람을 겨누고 있던 기관총이 불을 뿜었다. 두 사람의 처형에 사용된 무기는 4신 '''고사기관총(대공포)'''이었다. 북한의 처형 무기로 최근에 자주 보도되는 4신 기관총은 구경 14.5㎜ 소련제 ZSU 방공용 고사 기관총을 복사한 것이다. 보통은 중요한 시설에 대항공용으로 비치해 놓는데 이즈음 이 무기를 사형 집행용으로 쓴다.

개인화기나 소화기로 총살이 가능함에도 파괴력이 큰 무기를 사용하는 것은 보는 이로 하여금 공포감을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총살형에 자주 노출되면 죽음에 둔감해진다. 총살의 강도를 높여야 공개 처형의 효과도 비례해서 커진다. “두 사람의 사형수는 시신을 알아볼 수 없이 찢겨 나갔다. 그리고는 이미 찟겨져 남은 잔해는 화염방사기로 불태워 없어졌다. 가깝게 지내던 측근 두 명이 그렇게 잔인하게 살해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장성택은 앉은 채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출처

태영호 공사도 조선일보 기고문에서 장성택 측근을 처형한 것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

“장수길과 리룡하를 총살하던 날, 북한 고위급은 아연실색했다. 이날 당과 군부의 중간 간부들은 평양 교외 강건 군관학교 사격훈련장에 모였다. 고위급을 총살하는 처형장이었다. 간부들은 대단히 놀랐다. 사격장에는 평소 총살할 때 사용하던 자동보총(소총) AK-47 대신 처음 보는 4신 고사 기관총 8정이 설치돼 있었다. 정면에는 흰 천이 둘려 있었고 그 뒤에 누군가가 있는 듯 보였다. 잠시 후 버스가 도착해 중앙당 비서, 부장, 부부장들이 내렸다. 뜻밖에도 장성택은 다른 버스에서 내렸다. 중앙당 비서 등 고위 간부를 태운 버스에 타야 할 장성택이 일반 직원 버스에서 내리는 모습을 보고 다들 의아해했다. 이미 이때 장성택의 운명이 결정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윽고 연단에서‘반당반혁분자’장수길과 리룡하의 죄행이 낭독되었고 총살이 선고됐다. 흰 천이 벗겨졌다. 장수길과 리룡하가 말뚝에 묶여 있었다. 8정의 4신 고사 기관총이 두 명을 향해 불을 뿜었고 고위 간부들은 얼이 나갔다. 며칠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을 정도였다고 한다.”


1년만에 베일 벗는 장성택 처형의 비밀 채널A 쾌도난마 756회
이후 구체적으로 어떻게 사형이 집행되었지는 불명이지만 '''기관총, 기관포 또는 고사포로 사살하고 화염방사기로 시체를 불태우는 방식'''일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알려져 있다.[16][17]
보도된 바로는 실제로 북에서 장성택의 공개처형 모습을 보던 사람 중 한 사람이 증언하기를 무려 총탄을 '''90발'''이나 쏘았다고 한다. 또한 폭행과 고문의 영향탓인지 사형식 거행시점부터 이미 의식이 끊어진 듯한 모양새로 추정된다는 의견도 있다. 이 모습이 얼마나 참혹했던지 결국 그 자리에서 직접 공개처형을 보던 인민들 중 한 명이 기절하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북한군 연당 1인 교탄소비량이 2발이라고 하니, 사수는 45년치(…) 훈련을 장성택에게 한 것이다.
한편 한반도 사정에 밝지 않은 몇몇 서양 언론에서는 장성택이 사냥개 수십여 마리에게 물어뜯기는 식으로 처형당했다고 잘못 보도하기도 했다. 영국주재 북한대사였던 '''태영호'''[18]는 장성택은 총살당했다고 반박했다. [19]
과거 닉슨 행정부의 워터게이트 사건을 보도한 언론인 밥 우드워드가 트럼프를 인터뷰한 내용을 바탕으로 쓴 "격노(Rage)"에 따르면, 김정은은 장성택을 '''참수'''한 후 북 고위 간부들이 이용하는 건물 계단에 전시했다고 한다. 참수된 머리는 시신의 가슴 위에 얹어 두었다고. 일종의 경고 효과를 노린 듯한데, 그 잔인성이 연산군 못지않다. 트럼프는 자신이 김정은과 이런 얘기조차 나눌 정도로 친밀하다는 걸 나타내려고 이 얘길 전한 것으로 보인다. #
보다시피 기본적인 사형방식조차 이야기가 다양하고 시체를 전시했다는, 소각과는 모순되는 증언들이 소개되어 있는데, 북한의 정보를 얻을 방법이 제한적이고 내부 정보통들도 이를 이용해 일부러 자극적으로 과장해서 알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적당히 걸러들을 필요가 있다는 소리. 결국 진실은 북한이 붕괴되어야 알게 될 가능성이나마 생길 것이다.

3. 분석 - 왜 숙청되었는가?


장성택 사형 판결에 대한 조선중앙통신의 보도 전문을 보면 역시 숙청의 결정적인 원인은 김정은에게 반역을 꾀한 것이라고 추정되고 있다. 보도 전문의 전반부는 장황하게 장성택의 비리혐의를 나열하고 있지만 사실 북한에선 부정부패 사건이야 너무 흔해서 이런 식으로 일벌백계할 리 없고 단순히 김정은의 권한 확대를 위해서는 가택 연금이나 수용소행 등의 다른 방법도 많은데 이렇게 공개적으로 공포심을 조장하는 것은 무엇인가 심각한 일이 있었다는 방증이 된다.
조선중앙통신의 보도 전문을 보면 장성택이 당정군의 인맥으로 무엇인가 꾀한 것 같은데 이것이 쿠데타 음모이거나 꼭 그렇지 않더라도 김정은을 밀어내고 수양대군처럼 등극하려는 것으로 비쳤고 이에 장성택을 전광석화처럼 체포 후 거의 즉결 처분에 가까운 운명을 맞은 것으로 보인다.
아래는 보도 전문 중 일부 인용. 숙청에 대한 독재 국가 언론의 보도 내용이 늘 그렇듯이 답정너에 가깝지만 무언가 심상찮은 일이 있었음은 부정하기 어려워 보인다.

놈은 정변의 수단과 방법에 대하여 《인맥관계에 있는 군대간부들을 리용하거나 측근들을 내몰아 수하에 장악된 무력으로 하려고 하였다. 최근에 임명된 군대간부들은 잘 몰라도 이전시기 임명된 군대간부들과는 면목이 있다. 그리고 '''앞으로 인민들과 군인들의 생활이 더 악화되면 군대도 정변에 동조할수 있지 않겠는가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내가 있던 부서의 리룡하, 장수길을 비롯한 심복들은 얼마든지 나를 따를것이라고 보았으며 정변에 인민보안기관을 담당한 사람도 나의 측근으로 리용해보려고 하였다. 이밖에 몇명도 내가 리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고 꺼리낌없이 뇌까리였다.

장성택놈은 정변을 일으킬 시점과 정변 이후에는 어떻게 하려고 하였는가에 대하여 《정변시기는 딱히 정한것이 없었다. 그러나 '''일정한 시기에 가서 경제가 완전히 주저앉고 국가가 붕괴직전에 이르면''' 내가 있던 부서와 모든 경제기관들을 내각에 집중시키고 '''내가 총리를 하려고 하였다'''. 내가 총리가 된 다음에는 지금까지 여러가지 명목으로 확보한 막대한 자금으로 '''일정하게 생활문제를 풀어주면''' 인민들과 군대는 '''나의 만세를 부를것이며''' 정변은 순조롭게 성사될것으로 타산하였다.》고 토설하였다.

장성택은 비렬한 방법으로 권력을 탈취한 후 외부세계에 《개혁가》로 인식된 제놈의 추악한 몰골을 리용하여 짧은 기간에 《신정권》이 외국의 《인정》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어리석게 망상하였다.


위의 발표문대로라면 장성택은 구체적인 거사 계획은 없었지만 경제난이 심화되고 김정은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 당정군 내 자신의 인맥을 동원해 김정은을 몰아내고 집권을 하려는 어렴풋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집권 후에는 대대적인 개혁개방과 경제 상황 개선을 통해 민심을 얻고 국제 사회의 지지 획득을 꾀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한 마디로 덩샤오핑이 광범위한 인맥으로 당정군을 장악하여 마오쩌둥이 지명한 후계자이자 문화대혁명 노선을 이어가려던 풋내기 화궈펑을 몰아내고 대권을 장악해 중국을 개혁개방을 이끈 것을 따라하려고 한 것 같다. 그러나 중국은 마오쩌둥 집권 시기 문화대혁명으로 미쳐돌아가긴 했으나 그래도 최소한의 합리성은 남아있었지만 북한은 이미 정통성이 혈연으로 결정되는 왕조국가가 되어버렸던 것을 계산에 넣지 않았던 것 같다.[20]
하지만 명심해야 할 것은, 박헌영을 처형할 때도 뜬금없는 미제 스파이라는 죄목을 덮어씌운 게 북한이라는 점을 생각했을 때 장성택이 진짜로 저런 계획을 기획했는지 여부는 통일이 되기 전엔 알기 힘들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아래는 그가 김정은 세습에 마뜩잖아했다고 주장하는 조선중앙통신 보도의 내용. 어째 태종원경왕후 외척인 민씨들을 숙청할 때의 죄상과 비슷한 느낌이 든다. 그때도 민씨들이 남들 기뻐할 때 슬퍼하고 슬퍼할 때 기뻐했다는 죄목이 적용되었다.

놈은 자기의 교묘한 책동이 통할수 없게 되고 력사적인 조선로동당 제3차 대표자회에서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장병들, 인민들의 총의에 따라 경애하는 김정은동지를 조선로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높이 모시였다는 결정이 선포되여 온 장내가 열광적인 환호로 끓어번질 때'''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서서 건성건성 박수를 치면서 오만불손하게 행동하여''' 우리 군대와 인민의 치솟는 분노를 자아냈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장성택은 충성을 다하지 않아 처형 당했다고 한다.

자유아시아 방송에서는 식량과 자원에 대한 권한을 쥔 장성택과 군부의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아 무력 충돌이 벌어질 정도였다고 한다. 둔전병을 운용할 정도로 북한군은 식량 사정이 시궁창이라서 예전부터 어업권을 되찾기를 원했고 수산부업기지에 150명을 동원해 공격했으나 수비측인 장성택의 군대가 공격하는 측의 3분의 1 정도밖에 안되는 숫자에도 불구하고 '''더 잘 먹어서''' 체격도 좋아 큰 피해 없이 격퇴를 하자 군부와 김정은이 위협을 느껴 숙청했다고 한다.

국가재정관리체계를 혼란에 빠뜨리고 나라의 귀중한 자원을 헐값으로 팔아버리는 매국행위를 함으로써 주체과 주체비료,주체비날론공업을 발전시키는 데 대한 위대한 수령님과 어버이 장군님의 유훈을 관철할 수 없게 하였다.

이 언급은 주로 북한이 중국에 수출하는 석탄 혹은 대규모 개발을 추진하던 철광석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여러 분석에 따르면 장성택은 중국에 지하자원을 수출하여 외화를 확보하려 했으며 이 이권을 노리고 군부와의 다툼이 일어났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언뜻 보면 이 주장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애초에 "헐값으로 팔아버리는 매국행위"라는 것이 어이가 없는 것이 북한은 경제 제제를 심각하게 당해서 석탄을 수출할 곳이 중국밖에 없는데 북한은 외화가 필요해서 몸이 달았고 중국도 석탄 자원은 여유로운 상황이므로 '''제 값(국제 시세)을 받을 수 없는 것이 당연하다.''' 즉, 장성택은 북한의 외교, 통상 상황이 최악이라 어쩔 수 없이 헐값에 팔 수밖에 없었는데 반대파에서는 국제 시세를 조사해오곤 "장성택이 판 값과 '''시세와 이렇게나 차이가 난다. 헐값으로 판 거다'''"[21] 라는 누명을 덮어씌웠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석탄과 철, 비료, 비날론 언급이 함께 나오는 것은 석탄을 이용하여 발전을 하거나 원료로 사용[22]하여 생산량을 올릴 수 있었는데 장성택이 수출해서 외화로 바꾸는 바람에 석탄 재고가 줄어서 그렇게 못하게 되었다는 주장으로 보인다. 이는 상식을 아는 사람에게는 '''어처구니가 없는 주장'''인데 북한의 생산 시설은 기계가 낙후되고 기술이 부족하여 석탄을 철, 비료, 비날론 생산에 투입해봤자 그 효율이 떨어지고 품질도 좋지 않다는 것이 문제다. 특히 석탄을 코크스 대용으로 쓰는 철은 품질이 나쁘고 비날론은 품질이 안 좋은 섬유라 그냥 쓰레기를 비싼 원료와 전력을 들여서 만드는 꼴이니 말할 것도 없다. 애초에 북한의 철도 환경을 보면 석탄을 캐봤자 공장으로 일일이 운송하는 것도 어려울 지경으로 산업 환경이 최악이다. 이런 상황이면 차라리 석탄을 바로 중국에 팔아버리고 그 외화로 "중국산" 철, 비료, 섬유를 구입하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을 내세우는 놈들에게는 꼬투리 잡할 거리였을 것이 분명하다. 즉, 판결문에서 이 언급은 장성택이 그나마 중국을 들락날락거리면서 석탄 수출길을 터서 외화를 좀 벌어왔는데 그 반대파 측에서 '''말도 안 되는 꼬투리를 잡고 누명을 씌워서 죽였다'''고 자기 자신들이 자백하는 꼴이다.
하지만 북한의 외교적 고립을 이용해 지하자원을 국제시세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헐값에 사들이려던 중국에 장성택이 동조해 거래 성사 뒷주머니를 챙기려 했다는 설도 가능성이 있는 부분이다. 실제 장성택은 북한내 친중파의 대표격이었고 대중 무역을 김정일 시절부터 직접 챙기고 있었으며 역시 친중파인 김정남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서 핵 완성과 함께 중국 의존에서 벗어나 독자 노선을 강력히 밀어부치던 김정은의 입장에서는 자신보다 경험이 풍부하고 복잡한 인맥을 짜놓은데다 후계 문제까지 간섭할 수 있는 장성택이 눈엣 가시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상거래"와 횡령이 아무리 마음에 안 드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들 그게 어떻게 '''사람을 죽일 이유'''가 되겠는가?
물론 이 부분에도 반박은 있는 것이, '북한의 석탄은 헐값이다'='장성택의 석탄 거래는 정상적인 것이었으나 김정은이 그것을 꼬투리로 잡은 것이다'라는 등식이 성립한다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의 석탄이 국제시세에 비해 헐값이더라도, 장성택이 '''그 이하의 가격으로 석탄을 몰래 팔아치우고 그 차액을 자기가 빼돌려서 배를 불렸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애초에 썩은 사회에서 주요 재화를 높으신 분들이 몰래 빼돌려 헐값에 팔아치우고 그 이익을 챙겨먹는 것은 아주 흔한 패턴이며, 장성택 역시 썩어빠진 고위관리가 분명하기에 저런 짓을 실제로 저지르지 않았으리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즉 진짜로 말이 안되는 것은 자기들도 실컷 인민들 등골 빼쳐먹고 실컷 더러운 짓 했으면서 장성택에게만 죄를 묻는 북한의 태도지, 장성택이 저 문제에서 정말 아무 잘못없는데 누명을 썼다는 결론은 너무 성급한 것이다.
여담으로 일본에서는 국회의원 안토니오 이노키가 방북하여 장성택을 만난 지 얼마 안 되어 숙청이 터져서 곤혹스러운 반응이라고 한다. 여담으로 이노키는 방북하기 전에 "납치 피해자 문제는 내가 해결한다. 나는 장성택과 친교가 있고 대화를 나누고 있다. 북한에 파이프가 있는 건 나 정도다"라고 장담했다고 하는데...

3.1. 이유에 대한 논란


  • 반역설: 북한이 주장한 대로 장성택이 김정은에 대해서 일종의 반역을 실제로 시도하고 있었다는 주장. 이 경우 김정남이 연관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김정철은 이미 여러 차례 무능력자임을[23] 입증했고 김정은의 자식들은 전부 딸인 데다 어리기까지 했으니[24] 김정은을 숙청할 경우 그 자리에 앉힐 수 있는 사람은 같은 백두혈통인 김정남밖에 없었다. 참고로 김정남은 몇년 뒤 암살당했다.
  • 사전작업설: 이 설은 김정남이 사망한 이후 대두되는 설이다. 김정은은 김정남이 자신의 정권을 위협하든 안하든의 여부를 떠나서 자신과 어머니가 다른 사람이라는 점이 계속 성가셨다. [25] 김정은의 형 중에는 김정철도 있었지만 이미 동생에게 복속된 상태인 데다가 부모 모두가 동일인물인 친형인지라 어느 정도 신뢰가 갔지만 김정남은 이복형제라서 그게 아니었다. 게다가 김정철은 김정은이 항상 데리고 다니기 때문에 신경이 안쓰이지만 김정남은 해외를 떠돌기 때문에 항상 신경쓰였다. 게다가 김정남이 돈이 많아서 용병을 고용할 여지도 있었기에 김정은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불안했다. 김정은은 어떻게든 김정남을 죽여야겠는데 장성택이 가로막아 못죽이고 있었다. 실제로도 김정남을 살해하려 시도했다가 실패했을 때 김정은은 중국 정부로부터 엄중경고를 먹었다. 또한 장성택은 김정남에게 700만 달러를 생활비로 쓰라고 송금해주기도 하는 등 김정남의 후견인 노릇을 했다. 그러니 장성택이 살아있는 한 김정남을 어떻게 하지 못하겠다고 판단해 김정남 살해에 대한 사전작업 차원에서 장성택을 먼저 죽이고 그렇게 해서 김정남을 죽이는 데에 걸림돌이 되는 요소들을 계속 제거해나갔고 결국 김정남을 살해하는 데 성공했다. 참고로 이 과정에서 다소 쪽팔리는 진풍경이 벌어졌는데 형이 동생한테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한 마디로 김정남을 죽이려고 장성택을 죽였다는 것이다.

  • 무고설: 장성택은 전혀 반역을 할 뜻이 없었고 단지 김정은의 포악함과 주변의 모함 때문에 숙청되었을 뿐 실제로는 무고하다는 주장. 만약 장성택이 모함을 당해 죽었다면 장성택을 모함한 건 최룡해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 예정설: 장성택은 지나치게 막대한 부와 강대한 권력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죽음은 그 자신의 행동과는 무관하게 김정일 때부터 이미 예정되어 있었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북한 정권은 능력 있는 사람에게 권력을 몰아줬다가 나중에 제거하고 회수하기를 반복하곤 했다. 사실 장성택의 숙청에 대하여 '고모부까지 죽인 패륜'이라 충공깽하다는 반응이 많기는 한데 사실 혈통이 정통성의 담보가 되는 왕조국가에 있어서 왕의 친족은 최대의 경계대상이라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장성택이 김씨는 아니지만 왕의 직계가 단절되었을 때 여계 계승이 일어나는 경우는 역사적으로 드물지 않았고 이 때문에 권력을 가진 외척이나 이성(異姓) 친척은 언제나 경계 대상이었다. 물론 장성택과 김경희 사이에서 태어난 자식인 장금송이 장성택보다 먼저 사망했기에 혈통적으로 왕조 창시자의 계승을 주장할 수 없고 한국의 왕조사 전통에서 이성족의 여계 계승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다는 한계는 있으나 부부로써 김경희의 정통성을 공유할 수 있는 장성택에게 일정한 왕위계승권의 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즉, 북한이 왕조국가라는 것을 명확히 이해했다면 오히려 있을 법한 일이라고 생각할 만하다는 것.
  • 중국 음모설: 장성택이 중국과 연계하여 음모를 꾸미고 있었거나 중국과 관련이 깊은 장성택의 움직임을 김정은이 껄끄럽게 보았다는 설이다. 실제 장성택은 막나가는 김정은 정권에 대해 불만이 상당히 많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에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 반역 및 김정남 연결설: 장성택이 김정남과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 죽음의 결정적인 원인이라는 주장. 반역설과 연관하면 새로운 정권의 지도자로서 김정남을 옹립할 계획을 하고 있었다는 가설이 제시된다. 게다가 장성택이 김정남에게 700만 달러를 송금한 사실도 드러났다.#
  • 최룡해와의 반목설: 사실 장성택의 사형을 주도한 것은 김정은이 아니라 최룡해라는 의견도 있다. 최룡해는 북한 정권의 2인자가 되기 위한 야심을 품고 있으며 김정은의 친인척인 장성택은 그러한 최룡해의 출세에 걸림돌이 될 것이 자명하여 최룡해가 김정은을 꼬드겨서 장성택을 사형에 처했다는 설이다. 이 설은 2015년 7월 탈북에 성공한 북한의 한 고위인사의 증언으로 부정 되었다. 이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최룡해와 장성택은 호형호제 하는 사이 였기 때문에 최룡해가 장성택의 제거에 관여하거나 찬성할 리가 절대로 없었고, 오히려 이후 최룡해는 김정은에게 사소한 트집을 잡혀 처형될 뻔 하였다가 겨우 살아 남았다고 한다.
  • 국정원공작설: <신동아> 2014년 11월호 기사를 통해 제기된 의견. 박근혜 정부의 초대 국정원장 남재준이 북한 지도부를 분열 및 이간시키고 혼란에 빠뜨려 흡수통일을 앞당긴다는 구상 아래 2인자인 장성택의 비리를 여러 경로를 통해 북한에 전달한 결과 장성택이 숙청되었다는 것이 주요 내용. 하지만 장성택의 숙청 이후 북한이 이전보다 탄도미사일 시험발사 회수를 늘리고 서해와 휴전선 인근에서 병력의 활동 및 대응 수위를 상향시키는 등 오히려 군사적 긴장 조성을 강화시키는 추세로 나타났다. 만약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국정원은 북한 내에서 그나마 김정은의 폭주를 견제할 수 있었던 거물이 제거되어 북한에 의한 한반도 불안정성의 위험을 높이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즉, 국정원은 북한 수뇌부의 역학관계도 모르고 주요 인물들의 성향조차도 프로파일링 못하는, 흔한 대북전문가보다도 못한 무능집단이라는 얘기가 되어버린다.
  • 리설주관련설 : MBN에서 제기한 것. 기사. 장성택이 처조카며느리 리설주와 바람이 나서 분노한 김정은한테 죽었다는 것. MC가 계속 이 설을 거론하면서 이야기를 그쪽으로 유도하려고 하자 당시 패널로 참석한 전 통일부 관련 인물인 현 대학교수가 그냥 듣고만 있다 결국 아니다 싶었는지 "북한 관련 문제를 다루는 자리에서 이야기를 하려면 통일 이후에 있을 일도 생각하고 장성택 실각이라는 이 사안에 어울리는 더 진지한 내용을 다뤄야지, MBN의 품위를 생각해야 할 거 아니냐" 고 지적을 했다. 그러자 MC는 움찔하면서 이후로도 계속 리설주를 언급해보려다 결국 그만뒀는데 문제는 다음날 같은 프로에서 그 MC 말고도 방송국측 패널이 두 명 더 나왔는데 전날 하던 리설주, 장성택 내연설만 똑같이 반복하고 있었다. 요즘 종편간 경쟁이 치열해지자 시청률을 노리고 어떻게든 말초적인 내용을 넣으면서 남북 관계를 흥미위주로만 다루는 황색언론적 행동이다. 무엇보다도, 장성택의 숙청은 북한 내부의 권력 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온 중대한 정치적 사건인데, 이런 사건을 정치적 차원이 아닌 개인적 감정의 수준에서 분석하려는 태도는 몹시 우스꽝스럽고 무의미하다고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애초에 리설주 관련설 자체가 MBN을 비롯한 언론사에서 하도 떠들어대서 유명해 진 주장이지만, '장성택 숙청 전후 리설주가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사다리타기 당첨설이나 이발소 관련설, 술자리 게임설 등의 농담과 다를 것도 없는 별 무가치한 분석이다.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남한에서 관련 삐라를 뿌린적이 있는데, 그것이 역으로 타고 남한측 첩보에 들었던 것이라고 추측했다. 자기 거짓말에 자기가 속은 셈(…).
  • 기쁨조 관련설: 장성택이 기쁨조 여성들을 건드리는 여성편력을 저질러 처형되었다는 설이다. 후지모토 겐지가 주장했다. 인터뷰 기사. 리설주 관련설과는 선을 그었지만 역시 딱히 근거는 없다. 하지만 탈북자 태영호는 자기 책에서 장성택이 기쁨조로 뽑힌 젊은 여성들을 자기가 데려가 가학적 성행위를 하고, 죽으면 화장해버리는 짓을 하다가 들통나 처형되었다고 주장했다.#
  • 김경희 관련설: 이전에는 농담으로 받아들여졌지만 숙청설 후 김경희 건강 악화설이 어떤 형태로든[26] 사실임이 확실시 되고 있고 직접 장성택의 숙청에 어떤 식으로든 관여했음도 밝혀지고 있어 농담이 아니게 되었다. 주된 분석은 건강이 악화된 김경희가 직접 김정은이 장성택을 치워버리도록 도와준 것 아니냐는 분석. 장성택은 김일성, 김정일 둘 다에게 구박받은 천덕꾸러기 기질이 있을 뿐 아니라 개방에도 비교적 적극적인 태도, 주색잡기도 좋아하는(...) 면모를 보이고 있기 때문에 김경희가 별다른 조치 없이 사망할 경우 김정은으로서는 고모부라 함부로 처리할 수도 없고 그냥 두자니 걸리적거리는 존재가 되버린다. 다른 한편으로는 김경희의 치매가 심하게 악화되어 사람을 못 알아볼 지경이라 (장성택을 밀어내려는 세력이 부추김과 동시에) 김정은이 마음 놓고 장성택을 숙청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 : 실제로 탈북 기자 주성하는 링크 속 김정은의 뚱한 표정과 헝클어진 머리는 그냥 숙취때문일 거라고 간단명료히 분석한 바 있다.#
  • [27][28]

3.2. 김정은 체제와의 연관성


어떤 이유에서인진 몰라도 장성택을 이렇게 속전속결로 보내버린 것은 분명히 어떠한 목적 달성이 필요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 정부는 논평에서 북한이 장성택의 속전속결식 처형을 통해 '극단적 잔학성(extreme brutality)' 의 민낯을 보여줬다고 비판했다. 결국 공포가 김씨 왕조 체제를 지탱하는 기제임을 만천하에 확인시킨 것이다.
장성택의 충격적인 처형은 김정은 1인 지배 체제를 확고히 하려는 의도로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김정은 체제의 취약성을 방증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백두 혈통에 대한 도전은 추호도 용납되지 않는다' 는 '''확실한 본보기를 보여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김정은 유일 영도 체제가 아직은 불안정한 상태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북한이 공개한 판결문에서도 장성택이 내각 총리에 오른 뒤 군대를 동원해 정변을 일으켜 최고 권력을 탈취하려는 음모를 꾸몄고 본인도 이를 시인했다고 밝혔다. 이는 김정은 체제에 불만을 가진 세력이 당과 군, 내각에 걸쳐 광범위하게 존재하고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위기 상황을 자인한 꼴이 됐다. 판결문에 따르면 장성택은 "나라의 경제 실태와 인민 생활이 파국적으로 번지는데도 현 정권이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못한다는 불만을 군대와 인민이 품게 하려고 시도했다" 고 자백했다. 또 "경제가 완전히 주저앉고 국가가 붕괴 직전에 이르면 내가 있던 부서와 모든 경제기관들을 내각에 집중시키고 내가 총리를 하려고 했다" 고 진술했다. 김정은 체제의 실질적 2인자이며 북한의 핵심 경제 관료였던 장성택조차 북한 체제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품었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부분이다.
장성택이 체포될 때만 해도 김정일도 극형까지는 내리지 않았던지라[29] '설마 지 애비도 안한 고모부를 처형하겠느냐?' 라는 반응[30]이 대다수였으며 정치적으로 실각하는 수준에서 끝날 것이라는 관측이 많았지만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이런 반응은 북한에서도 마찬가지인지 되려 숙청에 대해 불만을 가진 인사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혹 떼려다 혹 붙인 격' 이라며 조롱하거나 패륜이라며 욕하는 사람들이 대다수라고 한다. 그리고 김정은은 자멸질을 지금도 하고 있다.
"3층 서기실의 암호"라는 책에는 김정은은 어린 시절부터 고모부에게 뿌리 깊은 원한을 품고 있었던 것 같다고 추측했다. 김정은의 생모 고용희는 정철·정은 형제 중의 하나가 후계자가 되지 않으면 결국 온 가족이 숙청당한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김일성 생전에 자신의 아이들을 인사시키고 인정을 받고 싶어 했다. 그런데 이것을 가로막은 사람이 바로 김경희와 장성택이었다. 실제로 김정일 생전에 김경희와 장성택이 고용희의 존재를 상당히 부담스러워했다는 말이 북한 내부에서 상당히 퍼져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고용희의 남겨진 사진에는 김일성과 같이 찍은 사진이 하나도 없으며 김정은 또한 할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한 장도 없는 손자 신세가 된 것에 분노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사실 김일성과 찍은 사진 한 장만 있었다면 스스로 ‘백두혈통’이라고 백 번 외치는 것보다 훨씬 효과적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 김정은은 아마도 아이 때부터 장성택을 미워했으며 장성택 부부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을 것이라 태영호는 추측했다.
한편 다른 시각에 의하면 김정은은 국가의 모든 돈을 핵과 미사일 개발에 쏟아붓고 싶어했지만 북한의 경제적 이권 대부분은 장성택이 쥐고 있었다. 그러나 장성택은 김정은의 생각과는 달리 돈을 핵과 미사일 개발에 쓰는 것에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래서 김정은이 장성택을 무자비하게 처형한 이유 중의 하나는 장성택이 핵과 미사일에 돈을 투자하는 것에 부정적이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3.3. 김여정 연관설


김여정은 장성택이 살아있을 때보다 장성택이 사망한 이후에 운신의 폭이 몰라볼 정도로 넓어졌다. 장성택이 살아있을 적에는 김정은을 항상 고모인 김경희가 수행했는데 이 때 김여정은 기둥 뒤에 숨어서 김정은을 몰래 엿보는 신세였다. 하지만 장성택이 사망하자 김경희는 알아서 은퇴했으며 그 자리에 김여정이 들어와서 김여정이 김경희 대신 김정은을 최측근으로서 보좌하고 있다.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김정은은 자기 여동생의 길을 터주기 위해서 고모부를 사형에 처한 것이 된다. 고모부 자체는 문제가 아니지만 고모라는 커다란 장벽으로 인해 여동생의 운신의 폭이 좁은 상태라서 여동생의 운신의 폭을 넓혀주기 위해 고모가 은퇴해야 하는데 고모가 은퇴하지 않아서 고모부를 없애서 고모 바로 옆에다가 총알을 발사해 고모가 공포에 질려 알아서 은퇴하도록 유도하기 위해 고모부를 숙청했다는 의견도 있다.

3.4. 군부 과격파의 득세


청와대는 장성택 처형 후 북한의 권력 구도의 변화와 강경파 득세에 따른 도발 위협 가능성 등 국가 안보에 미칠 영향 등에 대해서 13일 집중 논의하였다. 청와대 관계자는 "장성택 일당 제거는 곧 북한 권력 구도의 교체를 의미하는 것" 이라면서 "장성택을 대신할 새로운 세력이 누구인지에도 주목하고 있다" 고 밝혔다.
상대적으로 유연한 전략가였던 장성택의 실각으로 북한의 권력 지형은 군부 내 강경파가 득세할 것이라는 게 중론이며 북한은 장성택 숙청을 계기로 김정은 제1위원장은 강경파를 중심으로 '1인 체제' 를 더욱 공고히 할 것으로 예상된다. 청와대는 북한 군부 내 강경파의 득세가 국가 안보와 남북관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서도 예의 주시하고 있다.#
한편 토마스 셰퍼 북한 주재 독일 대사는 장성택이 숙청당한 것은 김정은 조선로동당 제1비서가 북한 군부 내 강경파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라고 평가했으며 강경파의 압력에 밀려 장성택의 숙청을 결정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장성택 숙청으로 김정은의 1인 지배 체제가 강화된 것도 아니라고 분석했다.[31]

3.5. 박근혜와의 연관설


박근혜 편지 사태에서 김정은에게 편지를 전달 한 인물로 장성택이 지목 되면서 장성택 처형의 원인 중 하나로 박근혜, 김정남과의 비밀접촉이 떠올랐다. 기사에 따르면 박근혜-김정남-장성택-김정일로 이어지는 불법 비선 대북접촉라인이 있었으며, 이를 통해 박근혜가 불법 대북접촉, 북한 고무 및 찬양 등 국보법을 위반했다는 정황을 잡은 건데[32], 김정은이 뒤늦게나마 이 라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면 한국과 불법내통한 장성택이 살아남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장성택이 김정은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었음을 감안하면, 김정은 입장에서는 당시까지도 장성택이 박근혜나, 더 넓게는 대한민국, 김정남과 내통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을 가능성도 있기 때문. 2017년 2월 14일 김정남이 암살 당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박근혜 유럽코리아재단 대북 비선은 김정남이었다

3.6. 라종일 교수의 주장


라종일 교수는 자신의 저서 '장성택의 길'에서 자신은 거의 20년 동안 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 후계구도에 관한 정보를 추적, 수집했고, 그 과정에서 북한의 내부 사정에 정통한 중국과 일본, 한국의 전문가 40여 명의 증언을 확보했다고 '장성택의 길'에 서술했다. 그러면서 이들은 공적 사적 인프라를 통해 북한 군부의 기밀을 접할 수 있는 인물들로 북한 내 궁중암투의 비하인드 스토리와 자료를 얻었다고 말하며 장성택의 처형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장성택은 자신이 생각하는 개혁에 유리한 환경을 만들고자 국가 안전보위부, 군부와 같은 권력기관을 견제하는 한편으로 로동당 개혁 성향의 인사들을 포진시켰다. 또 권력 행사와 유지에 필수적인 자금을 확보하는 방편으로 외화벌이 사업에 관여했지만 이 과정에서 군부 등과 갈등을 빚으면서 끝내 김정은의 심기를 건드리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13년 후반기 김정은이 서해안 군부대를 시찰할 때 같이 동행했던 군의 수뇌부들은 군이 자금난으로 매우 어렵다고 말하며 그 원인은 서해의 외화벌이 양식장을 당의 행정부가 관할하기 때문이라고 보고했다. 이런 보고를 접한 김정은은 그 시설을 군에게 돌려주도록 지시를 했지만 잘 이행되지 않았다. 장성택이 이 지시를 바로 이행하지 않고 시간을 끌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은 측근이 체포되는 것으로 끝났지만 김정일 시대에 조성된 기존의 비자금을 39호실로부터 당 행정부 산하의 54국으로 모아 행정부가 관리하는 승리무역회사의 연유사업소에 지원되도록 했던 것이 처형의 시발점이 되었다.
2013년 어느 날 회계장부를 들여다보던 김정은은 금액이 너무 작다고 여겨 서기실 부부장을 불러 “어째서 비용이 이렇게 빈약한가? 선대에서는 어떻게 관리했었는가?”라며 경위를 추궁했다. 그러자 서기실에서는 “장군님은 39호실에 자금을 모아 장군님의 혁명사업에 쓰게 하셨는데, 지금은 당 행정부에서 자금을 관리하고 마음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잡지 않으면 안 됩니다.”라고 말했는데 이는 안 그래도 장성택에 불만이 있었던 김정은의 심경에 불을 붙였다.
당시 김정은은 상세한 내막을 알 수 있는 상황은 아니였지만 장성택에 이미 언짢은 감정을 가진 김정은은 모든 자금을 다시 39호실로 돌려놓으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지시를 받고 현장에 도착한 병력들이 승리무역회사 연유사업소로 진입하려다 무장 경비원의 제지를 받아 김정은의 지시가 통하지가 않는 상황이 벌어졌다.

“들어가려면 1호동지의 승인을 받아 오라.”

“1호동지란 누구인가?”

“장 부장 동지다. 그분의 지시를 받고 와야 들어갈 수 있다.”

당시 상황에 대한 이 보고를 받은 김정은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당장 호위사령부에 무력을 동원해서 현장을 진압하고 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중무장한 호위사령부 병력이 사업소를 점령하고 이 사실을 보고했다.
거기에 더해 김정은은 조직지도부의 조연준 제1부부장에게 연락해 장성택을 검열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행정부와 오랫동안 반목해오던 조직지도부는 기다렸다는 듯이 장성택 제거 작업에 착수했다.. 유일영도체제에 걸림돌이 되는 요인을 제거하는 것을 존재 이유로 하는 조직지도부는 장성택의 비리와 월권, 종파행위 등 각종 비위 사실이 기록된 보고서를 작성했고, 여기에는 국가안전보위부도 참여했다.
이후 장성택은 몰락 수순을 밟게 되었으며 리룡하 행정부 제1 부부장과 장수길 부부장이 체포되어 자신의 눈 앞에서 처형당하는 장면을 목격한 뒤 '''온갖 고문을 받은 뒤 끔찍하게 처형'''되었다는 것이다.#

4. 장성택 생존설


'''"북한의 여자 친구와 고모부를 처형했다고 말했으나 지난번 방북했을 때 (장성택이) 내 바로 뒤에 있었다."'''

- 데니스 로드먼

데니스 로드먼이 지난 2014년 1월 방북했을 때 장성택을 봤다고 주장했다. 일부에서는 모란봉악단단장 현송월도 사형당했다는 설이 거의 확실시되었으나, 건재한 것이 확인되었으므로 장성택도 살아있을 가능성이 있지 않냐는 주장이 있으나, 장성택은 현송월과 달리 대놓고 북한 정부가 범죄자로 낙인찍고 숙청했다고 발표했는지라 설사 장성택이 죽지 않았더라도 외국 방문객이 장성택을 봤을 가능성은 별로 없다. 따라서 로드먼의 주장은 별로 신빙성이 없다. 비슷하게 생긴 다른 사람을 장성택으로 잘못 봤다는 것이 그나마 설득력 있는 가능성이다.
물론, 장성택이 죽을 죄를 지었더라도 김정은의 고모부라는 위치의 특성상 김정은이 장성택을 공식적으로는 '반역을 도모하여 처형된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실제로는 목숨만 붙여 어딘가에 유폐시켜놨을 가능성을 아주 배제할 수는 없다. 애초에 장성택을 처형하는 장면을 찍은 영상이나, 또는 그의 시신을 찍은 사진은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장성택에 대한 존재감만큼은 완전 인멸된 상태에서 단순히 방문객인 데니스 로드맨이, 살아 있다면 북한 최악의 정치범이 되었을 장성택을 만났다는 주장 자체는 믿기 어렵다 할 것이다.
태영호 전 북한 주영국공사는 2013년 평양에 잠시 돌아간 적이 있을 때 평양에서는 장성택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으며 자택에 감금되어 있는 상태라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고 말했다. 또한 장성택 라인의 핵심 간부 11명은 모두 공개처형되고 그 밑의 중간간부들과 당원들 및 그 가족들 수천명이 평양으로부터 추방되었다는 건 확인 가능하지만, 정작 장성택 본인이 처형되는 건 북한에서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고 한다. 다만 태영호 공사도 장성택이 현 시점에서 죽은 것은 확실하며 다만 그 사망시점이 처형보도가 난 2013년이 아니라 장성택 숙청작업이 완료된 2016년일 것이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5. 평가


1958년 8월 종파사건으로 연안파, 소련파, 남로당파 등이 모두 숙청되고, 1967년 갑산파 숙청과 도서정리사업[33]으로 모든 반대세력이 사라지고 김일성 유일영도체계, 즉 '김씨 왕조'가 확립된 이후에 (오극렬 정도를 제외하면) 나름대로 독자 세력을 가지고 행보가 주목되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남한을 직접 방문한 김정일의 가장 최측근이기도 했고 중국이나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이해와 개방 지향성도 높은 편인 인물로 여겨졌다. 그래서 김정은 시대에 '2인자'로서 더욱 주목을 받았던 인물이지만 결국 북한 역사상 박헌영8월 종파사건 이래 최대의[34] 숙청을 당하는 파란만장하고 비극적인 삶으로 끝나게 되었다.
다만 3대를 보좌하면서 구축한 인맥이 너무 방대해 이들을 모두 숙청해버리면 권력 공백 사태가 벌어질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주석에서 언급한 것처럼 장성택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인물들 중에서도 여전히 멀쩡하게 활동하는 것으로 확인되는 인물들이 몇 있다. 2013년 12월 17일 김정일 사망 2주기 추도행사에 장성택계로 분류되던 로두철 내각 부총리, 김양건 당 비서, 문경덕 평양시 당 책임비서 등이 참석했다.
카리스마나 사람을 끄는 능력은 있었는지 김일성의 외동딸 김경희가 학창시절 쫓아다녔고 이후에도 여러 사람들이 주위에 모였다. 이렇게 주위의 사람이 모여서 두터운 인맥을 당정에 구축하였지만 이는 김부자의 경계를 사서 두 번이나 분파행위로 실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어쨌든 김일성-김정일 시대에는 그나마 고개를 숙이고 있었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지만 처조카인 김정은이 집권하자 방심하다가 결국 비극적인 종말을 맞은 것 같다.
2000년대 남한에서 그를 직접 만나본 이들에게 인품은 의외로 권위적이고 흐트러짐 없이 진중하며 강성이라는 평가를 받았다.[35] 그러나 북한에서 유일하게 수동적이지 않고 '큰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능력 있는 관료라는 평가도 함께 받았다. #
13년 동안 김정일의 요리사로 일했던 일본인 후지모토 겐지의 저서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에 의하면, 김정일포커를 치던 후지모토가 그날 딴 돈을 전부 잃자 자신도 모르게 욕설을 뇌까린 적이 있었는데, 장성택이 옆에서 그 '칙쇼' 란 욕을 듣고는 다음날 아침 자신에게 "후지모토는 돈을 잃어서 무의식중에 그랬겠지만 장군님이 들으면 무사하지 못하니 다음부터 그런 일 없도록 하라"고 주의 주는 선에서 그치자 '장성택이 도량 있는 인물이구나' 하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김정일의 가정교사였던 탈북자 김현식 교수는 "지도력과 추진력은 누구도 가히 따라올 수 없었고 인간적인 의리와 인간애는 참 두텁고 따뜻했다", "한 번 만나기만 하면 강렬한 자석과 같이 관계가 끊이지 않고 계속 다져지는 것이 그가 지니고 있는 독특한 힘이었다" 라며 '몸에 배어있는 강한 지도력과 풍부한 인간성, 민족과 나라를 위한 희생정신' 을 극찬했다. # 다만 그의 회고록은 김씨 일가에게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물론 장성택은 김씨 왕조의 부마로서 덕을 누구보다 많이 보았던 사람이고 그 체제를 비판하거나 바꾸려던(드러나는) 시도는 전혀 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장성택의 독특한 위상은 흥미롭게 보아야 할 지점이지만 그것을 추앙하거나 지나치게 안타깝게 여길 필요는 없다는 시각도 많다. 그저 김씨왕조가 자기 팔을 잘라낸 것일 뿐.[36] 실제로 2013년까지 그나마 김정은 체제가(상대적으로) 멀쩡하게 돌아간 이유가 장성택이 적당히 제동을 걸었기 때문인데, 그가 총살된 뒤, 김정은은 본격적으로 제4차 핵실험, 제5차 핵실험, 무수단미사일 발사 등을 지속적으로 도발을 강행하며 미쳐 돌아가기 시작한다.
북한의 정권 중심부에서 필연적이라 할 수 있지만 장성택이 상당한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1차 숙청 때의 행각이나 남한 방문 때의 행각을 보면 대단히 방탕하고 향락적인 인물로 추측되기도 한다. 사형 판결문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장성택은 2009년부터 온갖 추잡하고 더러운 사진자료들을 심복졸개들에게 류포시켜 자본주의 날라리풍이 우리 내부에 들어오도록 선도하였으며 가는 곳마다에서 돈을 망탕 뿌리면서 부화방탕한 생활을 일삼았다.... (중략) ..2009년 만고역적 박남기놈을 부추겨 수천억원의 우리 돈을 람발하면서 엄청난 경제적혼란이 일어나게 하고 민심을 어지럽히도록 배후조종한 장본인도 바로 장성택이다.

박남기놈을 부추겨 어쩌구 부분은 2009년 처참한 실패로 끝난 화폐개혁 이야기다. 당시 북한 정권은 심각한 민심이반에 당황해서 화폐개혁의 모든 책임을 박남기 재정경제부장한테 뒤집어 씌어서 처형하였는데, 이젠 화폐개혁 조차도 장성택의 배후조종으로 모는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북한의 화폐개혁 항목 참조.
삼국지조홍과 유사한데 조카한테 숙청당한 공통점이 있다. 차이점이라고는 조비는 조홍을 목숨만이라도 붙여놓았지만 김정은은 장성택을 끝내 죽여버렸다는 것이다. 서로간의 관계 역시 김정은과 조비는 둘 다 조카이긴 한데 장성택은 고모부, 조홍은 작은 아버지라는 차이 정도는 있다. 그리고 숙청 사유 역시 동일하다.

6. 기타


  • 당연한 얘기지만 장성택이 한창 잘나가고 있을 무렵부터 장성택이 이런 최후를 맞이할 것을 눈치챈 장성택 파벌의 측근들은 장성택이 살아있을 때 탈북했다. 그 인원은 70여 명이다.
  • 김정은이 고모부인 장성택을 숙청했기 때문에 김정은의 친 여동생 김여정의 남편이 될 사람은 김정은의 아들이나 딸에게 숙청당할 것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 대한민국이 88 올림픽을 통해 국제적 위상을 높여가고 있을 때 장성택은 연수차 북한에 장기간 머물고 있던 중국 공안 부문 고위층 출신 인사와 가까이 지냈다. 이 인사가 연수를 마치고 귀국할 때 공항까지 환송 나온 장성택은 이 인사가 비행기에 탑승하려던 순간 소곤소곤 귓속말로 주변에 들리지 않을 낮은 음성으로 "우리 두 나라가 헤어지게 되더라도 최소한 적은 되지 않도록 노력합시다."라 말했다. 중국 공안 부문 고위층 인사는 이때는 한중 수교가 공식적으로 거론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북한 내부의 누군가가 이런 생각을 더구나 수령의 사위되는 사람이 그런 말을 입에 올렸다는 점에서 놀랐다고 한다. 장성택은 이때 이미 중국이 남한과 외교관계를 맺으라는 것을 내다보고 있었고 어쩌면 사태가 북·중 간에 단교까지 갈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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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외부 세계와 수시로 접촉했기 때문에 북한에 갇혀 지내는 사람들과 달리 세상과 북한을 보는 눈이 달랐고 북한 내부 현실에 괴로워했다는 증언도 있다. 해외 출장길에서 종종 장성택의 본심이 여과없이 드러나는 적이 있었다고 하며, 특히 만취 상태에서 그런 일이 잦았다고 한다. 한번은 공관에서 마련한 만찬에 참석해 술을 많이 마셔, 그를 호텔 객실까지 데려간 북한 외교관은 그의 말을 듣고 기겁하며 놀랐다고 한다. 거의 인사불성 상태에서 장성택은 눈을 뜨고는 "동무, 큰일났어. 술을 마시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어. 조국은 지금 말이 아니네. 사람들이 수만 명씩 굶어 죽어가고 있네. 그야말로 진짜 고난의 행군이네. 조국에서 굶어 죽어가는 당원들, 간부들, 인민들을 생각하면 잠이 아니 오네. 술이라도 마셔야지. 굶어 죽는 사람들 불쌍해서 어떻게 하면 좋은가. 우리도 중국처럼 개혁 개방을 하면 얼마나 좋겠는가. 위에서 한번만 결심을 하면 될 일인데, 왜 그렇게 할 수 없는가?”란 말을 했다는 것. 출처: 장성택의 길 177쪽
  • 김정은김정일의 후계자가 될 것이라는 예측을 내놓은 유일한 사람이었던 일본인 요리사 후지모토 겐지는 자신의 저서 '북한의 후계자, 왜 김정은인가?'에서 장성택과 관련된 몇 가지 일화를 적어두었다. 후지모토 겐지의 회고에 따르면 장성택은 수영을 할 때 함께 수영하는 사람들의 팬티를 벗기는 장난을 즐겼는데, 자신에게도 그런 장난을 치려다가 실패했다고 한다. 그러자 장성택은 "후지모토는 눈치가 빠르군."이라 말했다고.
그리고 김정일과는 일하는 스타일이 달랐다고 한다. 김정일은 빠른 일처리를 선호했다고 하는데, 장성택은 차근차근 진행시키는 스타일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현안을 논의하다가 김정일이 욱해서 장성택에게 재떨이를 집어던지는 경우도 있었으며 그때마다 장성택은 바짝 엎드리며 김정일을 달랬다 한다.
  • 탈북 외교관 태영호가 월간조선 2018년 7월호에 장성택 처형 관련 비화를 기고했다.
  • 2018년 7월 장성택의 최측근이었던 문경덕이 평북도당 위원장으로 복권됐다.

7. 관련 문서





[1] 1946년 2월 6일이라는 설도 있다.[2] 일설에 따르면 장성택-김경희 부부의 친딸은 아니라고 한다. 입양한 딸이었다는 설이 가장 유력.[3] 김일성대학은 일반 대학과 다르게 학부가 결정되면 수업은 선택이 아니라 강제적으로 부여받고 한국고등학교처럼 반이랑 좌석도 지정된다.[4] 이 인연 등으로 장성택이 원산을 아껴 경제특구로 키우고 싶어했다는 주장이 있었다. 원산은 김정은도 아끼는 도시다.[5] 또한 함경도 출신의 오기섭이라는 자가 김일성과 삐딱선을 탓다고 한다. 그래서 김일성은 함경도 출신들을 경계했다.[6] 혹자들은 김정일이 김경희에게서 자신의 어머니를 투영해 보았다는 주장을 할 정도.[7] 여담으로 박남기는 후에 로동당 계획재정부장을 역임했으나 2009년에 실시되었던 통화정책 실패의 책임을 지고 2010년 3월에 공개처형되었다. 그리고 3년 뒤 장성택도 같은 죄목을 지고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8] 민주당 정보위 정청래 간사의 의견, 새누리당 조원진 간사는 부정함.[9] 다만 국민의 정부 시절 대북밀사로 장성택을 포함한 북한 지도부와 많이 접해본 박지원 민주당 의원은 오히려 반대로 평가했다. 개혁, 개방에 유화적이지만 체제 유지를 위해선 무슨 짓이던 할 수 있는 아주 강경한 인물이라는 것이다.[10] 경제관료 출신으로 2004년 당시 경제개혁정책(7.1 경제개선조치)을 진두지휘했던 인물. 2006년경 몰락하여 2007년 숙청(지방 좌천)되었으나 3년 4개월 만인 2010년 8월 로동당의 제1부부장으로 복귀했다.[11] 북한 김일성종합대학 출신인 주성하 기자에 따르면 북한 같은 사실상의 왕조 사회에서 이런 식의 기록말살형은 '''옛날로 치면 멸문지화를 당할 반역자급의 처벌 수위'''라고 한다. 사실 북한만 그런 것도 아니고 소련을 비롯한 여러 사회주의 국가에선 다 그랬다. 일가, 측근과 끌려가 총살당한 악질 반역자들이나 당하는 수준.[12] 앞에선 받드나 뒤에서는 음모를 꾸밈.[13] 이 언급은 주로 북한이 중국에 수출하는 석탄을 말하는 것으로 추정된다.[14] 남한과 마찬가지로 북한 형법에서도 군인, 인민보안원(경찰), 군부대에서 일하는 민간인(군무원)이 범죄를 저지르면 군사재판으로 넘어가도록 규정되어 있다.[15] 군인이든 민간인이든 즉결처분을 당하게 되면 어떻게 죽든 고통스럽게 죽긴 마찬가지이고 총살을 하나 패서 죽이나 그 차이 뿐이지 북한이라는 나라에서 편하게 죽을 수 있는 방법조차 없다. 다만 박격포로 사형을 집행하다는 설은 의문의 여지가 많다. 이건 공개 방식의 기관총 총살과는 달리 처참한 광경을 대중에 공개함으로써 공포를 일으키는 전시효과를 노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라크 후세인 정권하에서는 폭발물로 사형 집행을 해도 군중에게 보여주기 위해 사형수의 가슴에 소형 폭발물을 붙이고 작은 언덕 너머에서 폭발시킨 뒤 구경꾼들을 접근시켜 그 시신을 관람하게 했는데 박격포 처형은 안전거리 확보 및 화력으로 인해 구경이 어렵다. 당연히 고통을 덜어주려고 포격으로 처형했을 리도 만무하다. 게다가 공개처형은 공포를 얻는 전시효과 말고도 중요인물을 어디 빼돌리고 시체만 놔뒀다는 소문을 원천봉쇄하려는 의도도 있기 때문에 박격포 처형은 공개처형으로써는 너무나 비효율적이다. 다만 이라크처럼 폭발물로 처형한 사실이 와전되어 박격포 처형이 됐을 가능성은 있다.[16] 북한에서는 사형을 집행했다고만 말했고 처형 방법에 대해서는 이제까지 밝힌 바 없다.[17] 또한 북한군의 14.5mm 4신 기관총(총알 하나가 보드마카 크기이다)으로 처형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런 중기관총으로 사람을 수십 발 갈기면 사람은 그대로 으깨진다. 그러니까 사람 형체도 남아있지 않는 살덩어리+피투성이만 남는다. 이를 치우는 방법은 그냥 화염방사기로 소각하는 게 제일 간편하고 위생적(?)이다. 참관인에게 겁을 줄 뿐만 아니라 시신이 남을 경우 추종세력에게 상징물이 될 수 있다는 이유도 있다. 미국이 빈 라덴 사살 후 시신을 콘크리트 관에 넣어 바다 한가운데에 버린 것과 마찬가지.[18] 오늘날(2020) '''국민의힘 국회의원'''맞다.[19] 박헌영이 처형되었을 때에도 이런 이야기가 나돌았으니 나름대로 역사 깊은 루머.[20] 국민의 정부 시절 국가정보원 제1차장,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을 지낸 라종일 교수에 따르면, 장성택이 김정일 사후 위험을 감지하지 못한 채 지나친 안전감을 지녔기에 숙청되었다고 보았다. 그는 장성택을 ''''체제의 특권을 누리고도 그 중심에 온전히 빠져들어갈 수 없는 경계인''''으로 규정하였던바, 스스로가 사실상의 신정(神政) 집단 북한에서 일종의 '''데릴사위'''였음을 잘 인지했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21] 이런 일은 북한과의 경제 협력에서는 흔히 일어난다. 값을 이미 합의해놓고 갑자기 시세가 어떻다면서 웃돈을 더 받으려 하는 용팔이나 하는 양아치 짓. 애초에 자기들이 시세 대로 받을 처지가 아니라는 걸 모른다.[22] 북에서는 코크스 대용으로 쓴다.[23] 혹은 김씨왕조 권좌에 관심이 없음을[24] 다만, 최근에 김정은의 딸인 김주애한테 오빠 한 명과 성별이 알려지지 않은 동생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25] 취소선이지만 김정남은 형이라서 죽었다. 동생이었으면 일단 정통성도 떨어지거니와 굽실거리기만 잘하면 적어도 목숨 보존 정도는 할 수 있었다. 김정일의 동생인 김평일이 그 예다.[26] 치매, 중풍, 뇌종양 수술 등 병명은 여러 가지가 나오고 있지만 와상생활 중인 것은 거의 분명한 듯. 자세한 것은 김경희 항목 참고.[27] 창이 뜨면 주소창에 엔터 한번 더 쳐주자.[28] 그런데 장성택 처형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조선일보에서 김정은의 헤어스타일 보도를 했다.[29] 외려 김정일조차도 장성택을 숙청, 처벌할 때 죽이지는 않았다.[30]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친인척이 아니라 '''자신의 직계존속'''까지도 죽인 사례는 많다. 당장 당나라만 보더라도 태종 이세민은 자기 형 이건성과 아우 이원길 그리고 조카들을(이건성과 이원길의 자식들) 모두 죽였다. 조선 또한 왕자의 난 등 권력을 위해서라면 부모, 형제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권력 기반 안정을 위해서 친인척, 직계 가족을 처형하거나 귀양 보낸 사례는 역사에서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다. 물론 앞의 것들은 끽해봐야 중세니 이것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북한의 정치 제도가 얼마나 막장인지 알 수 있지만.[31] 이는 김정은이 공포 정치를 통해 본인의 입지를 단단히 하기 위해 장성택을 제거했다는 분석과 명백히 대비된다.[32] 박근혜가 국보법 위반 소지가 다분한 행위를 한 것은 팩트이며, 통일부 등 국가기관의 협조 없이 박근혜가 ''''어떻게''' 사적으로 불법접촉을 할 수 있었나'에 대한 의문을 푸는 정황이 발견되었다는 것이다.[33] 사실상 북한판 문화대혁명이다.[34] 박헌영은 최종적으로 종파사건과 함께 처형되었으니 같은 사건이라 볼 수도 있다. 황장엽의 탈북 때 당한 인구가 수천 명이지만 장성택 시대에 함께 걸려 숙청될 인구는 '''수만 명'''으로 추정된다. 그나마도 대부분이 당원들일 것이니 거의 북한 엘리트의 몇 분지 일이 타격을 받는 일이 된다. 반면 박 내각 총리 등의 생존으로 보아 '''시범타'''나 확실한 측근들을 빼고는 의외로 상당수는 살려둘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실제로 지금 군부 인물 가운데 장성택 측근으로 분류되었다가 도리어 숙청에 적극 가담한 것으로 드러나는 인물들이 꽤 있기 때문이다.[35] 이는 그가 당시 김정일에게 숙청을 당한 적이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김정은 승계 이후의 그의 유독 삐딱했던 자세들은 결국 그의 실각을 부르는 원인이 되었다는 평가가 많다.[36] 주성하 기자는 북한에서 일어난 대숙청인 심화조 사건에 깊게 개입한 장성택이 처형된 것을 자업자득이라고 싸늘하게 촌평했다. 본인이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였으니 본인도 같은 꼴이 되는 것도 당연하다는 것이다. 또한 장성택 같은 인물까지 죽였으니 새로 권력을 잡은 최룡해 일파가 김정은에게 진심으로 충성할지도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자기들도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