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희(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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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북한의 정치인. 북한의 1대 지도자인 김일성의 장녀, 2대 지도자인 김정일의 여동생. 또 3대 지도자인 김정은의 고모이자 장성택의 부인이다. 러시아식 이름은 타티아나였지만, 김정일이 유라 이르세노비치 김[1] 에서 김정일로 고쳤듯이 그녀도 타티아나 이르세노브나 김에서 김경희로 고쳤다. 김성애가 김일성과 결혼한 후 김정일이 마지못해 김성애와 화해하려고 시도한 것과는 달리 김경희는 단 한 번도 김성애와 화해를 시도하지 않았는데 1972년, 김일성의 환갑 잔치에서 김일성에게 문안을 올린 다음에는 김정숙을 찾으면서 통곡함으로 김성애에게 면전에서 엿을 날려버린 일이 있었다. 이때 같이 동석한 빨치산들이 "정숙아! 정숙아!"하고 울부짖는 등 잔치판이 울음바다로 변했고 김경희도 이렇게 김성애 라인을 '곁가지'로 만드는 데 일조했다.
조선로동당의 경공업부 부장 겸 중앙위원회 위원, 조선인민군 대장을 지냈다. 김정일의 유일한 동복 형제로서 신임을 받았다. 김일성 사망 직후 김정일은 "김경희는 곧 나고, 그녀의 말은 곧 나의 말이고, 그녀의 지시는 곧 나의 지시다"고 말했다. 김정일 사후에도 한동안 김정은의 고모이자 유일한 혈족이자 후견인으로서 북한의 실세로 군림했다. 김정은 집권 초기에 김경희와 김정은이 서로 웃으며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몇번 포착되기도 했다. 당시엔 조카와의 관계가 원만했던 모양이다.
90년대의 분석에 따르면 김정일의 특각에 갈 때마다 김정남을 데리고 가는 등 김정남을 총애했다고 한다. 이 때문인지 일본 NHK에서 제작한 북한사 다큐멘터리에서는 김정일의 건강 악화 이후 열린 가족회의에서 김정은의 후계자 자리 확정을 반대했다고 한다. 이유는 "저런 어린애에게 나라를 맡긴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고 하며, 김정은은 당시 밥 먹다가 숟가락을 집어던지고 밖으로 뛰쳐나갔다고 한다. 하지만 다른 대안도 없었던 만큼 김정은의 승계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건강이 별로 좋지 않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다.
2. 장성택과의 관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같은 과 같은 반으로[2] 재학 중이던 장성택에게 반해서, 아버지 김일성에게 그와의 결혼을 추진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하지만 김일성은 장성택의 출신 성분이 낮은 것과 장성택의 아버지가 자신이 싫어하던 함경도 공산주의자라는 점 때문에 이를 허락하지 않았고, 당시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인 황장엽에게 둘을 떨어뜨려 놓으라고 지시했다.
하지만 김경희는 황장엽을 직접 찾아가서 "총장 선생이 뭔데 남의 연애사에 간섭이시오?"라며 대놓고 항의할 정도의 열성을 보였다. 결국 김일성은 김대 안에서는 도무지 둘을 떨어뜨려 놓을 수가 없다고 판단해서 동생 김영주를 시켜 장성택을 원산경제대학으로 전학시키는 꼼수까지 부렸다. 하지만 김경희는 '''자기 아버지 차를 탈취해서''' 원산까지 장성택을 찾아다니며 원거리 연애에 돌입했고[3] 빨래까지 해주는 등 일편단심으로 나갔다.
결국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오빠 김정일이 원산까지 오고가다가 사고라도 나면 어쩌냐, 낮은 성분은 높여주면 그만이다라는 논리로 장성택과 김경희의 사이를 인정해주자고 김일성을 설득하여, 둘은 1972년 결혼하여 딸 장금송을 얻었다.
1980년대, 선전부장 겸 당 조직지도부장으로 권력 승계 절차를 본격적으로 준비하던 김정일은 김경희를 위해서 평양시 보통강구역의 경흥음식점거리와 경흥상점거리의 독점적 운영권을 김경희에게 맡김으로 본격적으로 김경희를 중용하기 시작했다. 이 경력을 시작으로 김경희는 김정일 시대 김씨 정권의 자금줄 관리책을 맡게 되는데 1994년 김일성이 사망한 후에는 최고 알짜배기 수입원인 희토류, 고급수산물, 귀금속 거래를 모두 독점하게 되었다. 경공업 육성을 꾀하던 김일성은 김경희를 노동당 경공업부장에 임명하여 이를 감독하게 하였고 노동당 경제담당 비서인 유능한 테크노크라트 박남기를 보좌관으로 붙여주었지만, 김경희는 자신에게 아첨하지 않는 박남기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경공업 정책의 실패를 그에게 뒤집어씌워 숙청해버렸다.
이러한 성격이 결혼생활에서도 드러났는지, 결혼 전에 장성택에게 지극정성이었던 것과는 달리,[4] 정작 결혼한 후에는 자신이 김일성의 딸이자 김정일의 친누이라는 위세를 부리며 장성택에게 매우 거만하고 거칠게 행동했다고 한다.
그래서 부부 사이가 틀어지게 되었는데 특히 90년대부터 그 정도가 극심해져서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도 남편인 장성택에게 야, 너라고 부르는 등 망신을 자주 주었다고 한다. 그런가 하면 알코올 중독이 되어 주사까지 부리며 남편에게 폭언을 퍼붓고 물건을 던지는 등 행패를 부렸는데, 장성택은 아무런 반항을 하지 못했다고.
날이 갈수록 김경희의 알코올 중독 증세는 심해져서 후지모토 겐지의 증언에 따르면 양주를 포도주처럼 마구 들이켰으며 급기야 술로 만족을 못해 마약까지 하는 등 날이 갈수록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덕분에 김경희는 비교적 젊은 나이부터 온 얼굴에 검버섯이 피는 등 건강 상태가 악화되었고 김정일이 사망할 때 즈음 돼서는 김정은의 비자금을 관리한다는 중책을 맡고 있음에도 골골거리면서 거의 영향력을 발휘하지도 못했다.
그런데 김경희의 이런 막장행보에 대해서, 장성택이 김정일을 흉내내어 기쁨조 파티를 벌이는 등 여성 편력을 벌인 걸 김경희가 알게 되어서 남편에게 정나미가 떨어져 버려 그렇다는 이야기도 있다.[5] 나중에 김경희는 남편이 자꾸만 여자들과 놀아나는 것에 열받은 나머지 북한의 유명한 바이올리니스트 김성호와 맞바람을 피우기에 이른다. 김성호는 김경희의 개인 음악교사였으며,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우승까지 할 정도로 실력파였다. 이에 꼭지가 돈 장성택이 심화조 사건 때 김성호를 반동으로 몰아 총살형을 선고해버렸다. 김경희가 오빠 김정일을 찾아가 난리를 쳐서 총살 명령을 철회했지만, 타이밍을 못 맞춰서 이미 총살이 집행된 후였다고 한다.[6] 그 사건으로 남편과는 완전히 틀어져 아예 별거했다고 한다.
아내와 별거하게 되면서 장성택의 여성편력은 더욱 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2006년에는 고명딸인 장금송이 사랑하는 남자와의 사이를 인정해주지 않는 부모 때문에 유학 중이던 프랑스 파리에서 수면제를 과다 복용해 스스로 생을 마감하면서, 부부를 엮던 최후의 끈도 사라져버렸다.
장성택의 숙청 부분에서 알 수 있듯, 상당히 고생했는데 김경희가 찾아오지도 않아서 관계가 완전히 파탄났다는 말도 있다.
3. 장성택 사후
3.1. 2013년
김경희가 장성택의 숙청을 막아달라고 했다는 주장도 있고 반면에 김경희가 장성택 숙청에 앞장섰다는 주장도 있어 앞으로가 주목된다. 김경희가 장성택의 죽음에 관여했건 아니건 김경희 본인은 여전히 건재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일각에서는 김경희가 중증 치매를 앓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장성택의 숙청이 빠르게 이루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장성택이 처형된 며칠 뒤 친오빠 김정일의 기일에 열린 중앙추도대회에 참석하지 않아 건강 이상설에 무게를 실어주고 있다. 그 외에 장성택 처형에 분노해서 참석하지 않았다는 설이나 북한 지도부에서 참석을 막았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다만 백두혈통이라 불리는 김씨 일가의 중요성을 감안하면 최악의 경우에도 죽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견이 대다수. 저 북쪽 왕조는 공산주의를 자칭하는 것을 생각한다면 어이가 없을 정도로 혈통을 따지는데 김경희는 첩의 소생이 아닌 김일성의 정실부인 김정숙에게서 태어난 적녀이기 때문에 재일교포 고영희에게서 태어난 굳이 따지자면 서자인[7] 김정은이 순수한 백두혈통인 김경희마저 건드리면 백두혈통이고 뭐고 다 끝이기 때문. 백두혈통을 부정해 버리면 김정은이 3대 권력 세습을 해야 될 정당성이 없어져 버리는 상황이 된다. 즉, 김정은으로서는 김경희를 숙청하는 것은 굳이 번거로운 방법으로 자살하는 셈.
4달 동안 공개활동을 하지 않아 사망설이 대두되고 있는데 한국 정보기관에서는 한때 김경희가 진짜로 죽었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정부 일각에서는 이미 사망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확실히 알 수는 없으며 치료를 위해 외국에 있거나 장성택 처형으로 자숙하고 있을 가능성도 높다고 본다.
다른 주장에 의하면 장성택 처형 당시에는 워낙에 술과 마약으로 몸이 병든 상태였기에 장성택 처형을 막지 못했다고 한다. 장성택이 처형된 지 며칠 후 김정은은 측근 몇명을 대동하고 고모 김경희의 집을 방문했다. 문병을 할 겸 그리고 그 동안 일어난 일을 보고하기 위한 것이었다. 형식적인 행동이지만 곁가지가 아닌 친고모에게 이런 절차를 밟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김경희는 김정은이 인사를 하기도 전에 앉아 있던 의자 밑에서 권총을 꺼내어 김정은을 겨누었고 이에 놀란 김정은은 몸을 피했고, 측근들이 달려들어 앞을 막고 총을 빼앗았다. 이에 김경희는 별로 저항하거나 반발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입을 떼지도 않았으나, 단지 희미하게 웃었다고 한다.[8]
3.2. 2014년
- 2014년 1월에 파악된 김경희의 근황에 의하면 희귀병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다고 한다. 안 그래도 유전적 요인으로 인해 김씨 가문의 구성원들은 심근경색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상황인데 김경희는 알아주는 주당이었다. 이 때문에 잦은 음주로 인하여 건강을 망치고 발이 휘어지는 병까지 걸렸다고. 현재 김경희는 폴란드에 체류 중이라고 한다. 기사.
- 2014년 4월 16일 방송된 북한 기록영화/대민선전물 중에서 김경희가 노출된 부분이 삭제되고 편집됨으로써 장성택의 처우와 관련하여 정치적 영향력을 잃었다는 분석이 힘을 얻었으나, 4월 30일 방송된 기록영화에 김경희 모습이 다시 등장했다.
- 5월 19일 기록영화에도 등장했다.
- 10월 12일 기록영화에도 등장했다.
- 심장병 때문에 미국의 의료진이 방북했다고 한다. 기사
- NK지식연대는 김경희가 음독자살 했다고 주장했다. 기사
- 강명도 교수는 김경희가 뇌졸중으로 사망했다고 주장했다.
3.3. 2015년 이후 신변 이상설
2016년 1월에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직도 상실했다는 뉴스가 나왔다. 2014년 3월 선거에서 선출된 김경희는 동명이인이었다고.
2016년 2월 뉴스에 따르면 생존이 확인되긴 했는데, 건강악화 정도가 위중해서 얼마안가 자연사할 가능성이 크다고. 한편 최근 CNN 인터뷰에서도 제기된 피살설 등의 진위 여부는 아직도 파악되지 않았다.
2017년 8월 29일 국가정보원의 국회 보고에 따르면, 생존이 확인되었으며 평양 근교에 은둔하면서 신병 치료에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3.4. 2020년
2020년 1월 26일 북한 관영 매체의 보도에 의하면, 1월 25일 김정은과 함께 '설 명절 맞이 기념 음악 공연'을 관람했다고 하며, 공연 관람 사진을 공개했다. # 2013년 이후 공개 매체에 첫 등장한 것이다. 사진 상 아주 건강하다고 볼 순 없지만, 일단 바깥 활동이 가능할 정도로 건강이 양호한 상태로 보인다. 최룡해, 현송월, 김여정 등 김정은의 최측근 인사들과 동석한 점, 그리고 김경희가 공식 석상에 등장하기 전부터 김정은이 '혁명 1세대'인 황순희의 장례를 직접 조문하고 시국에 대한 정면 돌파를 강조하는 모습 등을 보인 것을 볼 때 이른바 '백두혈통'의 결집을 과시하며 북한의 내부 결속을 꾀한 것으로 추정한다.
이로 인해 고위 탈북자발 신변 이상설은 모두 낭설이라는 것.
4. 대중매체에서
- 1982년작 KBS1 반공드라마 《지금 평양에선》에서 배우 허진이 연기했는데, 1998년작 KBS2 드라마 《진달래꽃 필때까지》에서도 같은 배역을 맡았다.
- 1984년작 KBS1 6.25 연속기획 《함정》에서 배우 허옥숙이 연기했다.
5. 기타
- 실제로 알콜중독자라는 증언이 새터민들에게서 제기되었으며 자유북한방송에 따르면 중증 치매에 걸려있다고 한다.
- 장성택과의 사이에서 외동딸 금송(75, 76년생으로 추정)이 있었는데 2006년에 수면제로 자살했다고 한다. 모 탈북자는 탈북자 매체인 데일리NK 기고문에서 장금송은 혼외자녀이며 타살당했다고 주장했다. 기고문 입양한 딸이라는 설도 있다.
- 1975년경에 교통사고로 자궁을 적출해냈기 때문에 불임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1] 유라는 유리의 애칭이다.[2] 북한의 대학은 남한의 초중고교처럼 반으로 나뉘고 지정좌석제다.[3] 이때 김일성의 차를 본 원산경제대학 관계자들이 김일성이 불시에 시찰나온 줄 알고 혼비백산해서 뛰어나왔다가 뜻 밖에도 차에서 김경희가 내리는 걸 보고 또 다시 놀랐다는 일화가 있다.[4] 후지모토 겐지의 회고에 따르면 김경희는 술자리 사석에서도 남편의 이름을 부르며 그가 북한 권력 2인자로 승승장구 할 때마다 축하 건배를 들고 자랑스러워 했다고 한다.[5] 여담으로 이 문제로 친오빠 김정일과도 심하게 다투었다고 한다. 장성택이 바람을 피우며 롤모델로 삼은 게 바로 오빠인 김정일이었다는 이유로.[6] 출처 동아일보.[7] 고용희는 김정일의 자식을 셋이나 낳고 13년간 집안의 밥상을 책임지는 등 사실상 본처나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김정숙처럼 정식으로 혼인한 관계는 아니였기 때문에 김정은이 혈통상으론 김경희보단 아래다.[8] 출처 장성택의 길 268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