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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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4년 5월, 경기도경찰부 형사과에서 촬영된 사진.
朴文圭
1906년 ~ 1971년
1. 개요
2. 생애
3.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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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농경제학자, 정치인. 본관은 밀양(密陽).

2. 생애


박문규는 1906년 경상북도 경산군 압량면 조영동(현 경산시 조영동)[1]에서 대지주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독선생으로부터 한학을 수학했고 경산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0년 대구고등보통학교에 입학, 졸업하고 1925년 경성제국대학 예과 2기에 입학하였으며, 1927년 법문학부 법학과에 진학하여 졸업했다. 재학 중 법학과 동기생인 최용달, 리강국과 함께 사회주의 이념 서클인 경제연구회를 조직하여 활동하였고[2] 당시 재정학 교수였던 일본인 사회주의자 미야케 시카노스케(三宅鹿之助)로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점차 수용했다.
1930년 3월 대학을 졸업한 후, 모교인 경성제국대학에 남아 법문학부 경제연구실 조수 겸 법문학부 부설 만몽문화연구회 촉탁으로 근무하면서 마르크스주의 경제학 및 조선 농경제학을 계속 연구하는 한편, 물밑에서는 사회주의 운동을 해왔다. 이 때문에 1931년, 경성트로이카 이재유가 주도한 경성제국대학 반제운동 사건에 연루되어 1934년 5월 22일 경기도경찰부에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 혐의로 검거되어 고초를 겪기도 했다.#
일제가 패망하기 직전에는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친우인 최용달, 리강국과 함께 참여했다. 8.15 광복 후에는 직업 정치가로 변모하여 건준, 인공의 중앙인민위원-재정부장대리를 역임했다. 남로당에서 활동하다, 공산주의 활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자 48년 8월 월북했다. 월북 후 북한 초대 농림상으로 발탁되었고, 그후로도 각종 고위직을 역임했다.
대학 동기생 최용달, 리강국과 달리 천수를 누렸다는 게 흥미롭다. 박문규, 최용달, 리강국은 대학 입학 후 해방전후까지 사회주의 운동가의 길을 함께 걸었다. 그리고 월북 후에는 북한으로 넘어가 북한 국가 체제의 기틀을 수립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최용달은 법학자로 북한의 인민민주주의 헌법의 초안을 기초하였고 이른바 '민주기지론'을 이론적으로 정립했다. 한국판 마타 하리, 김수임사건으로 유명한 리강국은 연안파, 소련파, 갑산파, 만주파가 공존하고 있던 초기 북한 정계에서 남로당의 중추로 활약했다. 그리고 박문규는 일제강점기 시기 사회주의 이론에 따라 조선의 농업경제를 연구하고, 해방후에는 자신의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북한 농업구조의 재편을 주도했다.
여담이지만, 이들 셋 중 최용달, 리강국은 남로당계 숙청에서 살아남지 못하고, 끝내 목숨을 잃었다. 반면 박문규는 같은 남로당계라는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숙청 기간에 농림부상으로 강등되었을뿐 살아남았고, 이후에도 여러 요직들을 두루 거치며 정치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서기장으로 재직하던 1971년에 사망했다.

3. 관련 문서



[1] 밀양 박씨 집성촌이다.[2] 박문규, 최용달, 리강국, 이들 세 사람은 대학 동기로 만나 인생 반 생애를 사회주의 운동가로서 함께 보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