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산파

 

1. 개요
2. 상세
3. 갑산파의 특징
4. 갑산파의 몰락
5. 인물



1. 개요


북한에 존재했던 정파. 김일성에 의해 숙청되었고 이후 북한에서 김일성 신격화와 독재가 성립되기에 이른다.

2. 상세


갑산파의 명칭은 지명에서 따온 것으로, 보천보 전투가 일어났던 함경남도 갑산군의 명칭에서 비롯된 것이다. 갑산파는 광의의 개념으로 보면 김일성과 함께 빨치산 활동을 했던 세력들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갑산파의 리더인 박금철의 경우 1930년대에 김일성과 함께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해 활동했고 보천보 전투에서도 참여한 걸로 알려져있다. 그러나 이후 박금철은 1938년 혜산에서 일본에 체포된 후 광복까지 옥살이를 했기 때문에 김일성과의 연계가 끊어진 상황이었다.
대체로 이들은 김일성과 동조하는 흐름이었으나 김일성의 직계 세력이라 할 수 있는 만주파(혹은 만주빨치산파)와는 미묘하게 달랐기 때문에 일종의 방계세력으로 보면 된다. 넒은 의미에서 이들까지도 만주파로 분류하는 경우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부분에서 차이를 보인다. 좁게 보면 김일성과 함께 만주, 연해주에서 활동한 빨치산 직계들이 만주파라면 조국광복회[1]의 갑산 지부에서 활동했던 자들이 갑산파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듯. 대체로 이들은 함경도 갑산 출신으로 대다수가 갑산공작위원회라는 단체 출신들이라 갑산파라 칭해졌다.
현재 북한의 통일관에 이들이 막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들은 그들이 독립군의 일부였듯이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에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러다가 해방이 되고 마르크스주의, 레닌주의에 바탕을 둔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하는[2] 소련군이 38선 이북에 진주하자 그들은 소련을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하는 반제국주의의 수장이자 약소 민족을 보호해주는 좋은 나라로 인식하였고, 반대로 미국을 한국을 침략한 새로운 제국주의자로 보고 미국을 몰아내고자 하였다. 독립군이었던 이들이 무장투쟁을 시도한 건 당연한 결과였고 결국 반미 사상과 소련에 대한 찬양, 그리고 무장투쟁 방법론이 합쳐져 한국전쟁적화통일 시도를 낳는 단초가 되었다.[3]

3. 갑산파의 특징


8월 종파사건으로 김일성은 소련파와 연안파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으나 아직 김일성의 독재가 공고해진 것은 아니었다. 갑산파는 8월 종파사건에서는 김일성의 편을 들긴 했으나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것에는 동의하지 않는 흐름이 역력했다.
특히 이들은 한국의 전통 사상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통해 북한 사회를 이끌려는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갑산파가 중심적으로 관심을 가진 전통 사상가는 바로 다산 정약용으로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중점적으로 연구했다.
이런 결과는 김일성과의 마찰로 나타났다[4]. 김일성은 중공업 중시 정책을 추구하면서 군비 확장에 골몰했고 빨리 남한을 적화해 통일시키겠다는 조바심을 드러냈다. 그러나 갑산파의 중심인물인 김도만과 박금철, 리효순 등은 이런 김일성의 정책에 반기를 들었다. 김도만은 과도한 국방비 지출을[5] 줄이고 인민 생활 향상에 힘 써야 한다는 주장을 폈으며 공장 및 관리소에서 지배인(책임자)의 권한을 높이고 당일꾼의 간섭을 줄여서 사실상 경제 정책은 경제 전문가에게 맡기라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이는 사실상 김일성에 대한 정면 도전이나 마찬가지였다.

4. 갑산파의 몰락


때마침 중국에서 문화대혁명이 벌어졌고 김일성은 문화대혁명 노선에 동조하지 않아 마오쩌둥에게 수정주의자로 몰리게 되었다. 그러자 김일성은 "'''조선은 소련과도 중국과도 다르다'''"라는 소위 북한만의 독자노선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바로 주체사상의 기초가 시작된 셈이었다.
김일성은 이런 관점하에서 조선로동당의 조직개편을 단행해 비서국을 신설했고 조직지도비서와 조직비서가 중요 요직으로 부상했다. 김일성은 이 중요 요직을 자신의 동생인 김영주에게 맡겼고 이는 갑산파의 반발을 불러왔다.
갑산파는 이에 맞서 김일성의 뒤를 이을 인물로 박금철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김도만은 아예 대놓고 박금철 찬양 영화를 만들기까지 했는데 이는 김일성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갑산파는 주민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해서 소비재 생산과 경공업 투자를 늘릴 것을 요구하면서 김일성의 이른바 "국방·경제 병진노선"에 반발했다. 중국, 1967년 김일성 갑산파 숙청때 불쾌감
결국 김일성은 갑산파 제거를 결심하고 로동당 4기 제15차 전원회의에서 박금철과 리효순 등을 ''''반동적인 봉건주의 사상을 당간부들에게 퍼뜨렸다''''라는 죄목으로 숙청하기에 이른다. 소위 갑산파가 봉건주의, 수정주의, 부르주아 사상을 퍼뜨렸다는 것이다. 결국 박금철, 리효순, 고혁, 김도만 등의 갑산파는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가 사라졌고 갑산파와 조금이라도 연관된 자들은 모조리 썰려나가서 지방의 중견간부직 3분의 2가 공석이었다고 할 정도로 엄청난 규모의 숙청이 단행되었다.
이를 계기로 북한에서는 도서정리사업을 명목으로 심지어 마르크스주의까지도 금지되는 상황에 처했고 김일성을 신격화하는 체제는 공고해졌다. 사실상 오늘날 퇴행적인 북한 사회를 만든 것이다. 게다가 이 때의 경험으로 인해 김일성의 저 유명한 "함경도인들은 간부로 등용하지 말라"는 지시가 나온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갑산파가 연구했던 목민심서를 비롯한 정약용의 저서들은 북한에선 금서가 되었고 한동안 연구 자체가 이뤄지지 않았다가 1980년대 이후에야 조금씩 연구를 재개하였다.

5. 인물


  • 박금철
  • 리효순
  • 김도만
  • 허석선

[1] 북한에서 주장하는 만주와 국내에 분포해있던 통일전선체.[2] 실제로는 사적 소유만 철폐되었을 뿐 생산력이 부족하고 노동자 민주주의가 뿌리내리지 못한 이행기 사회이지만[3] 이상우,'북한 40년: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특성과 변천',을유문화사,1990,pp526-528[4] 목민심서는 관리들이 권력욕에 탐닉하거나 집착하는 것을 경고하고있다. 김일성과는 상극인 셈.[5] 국민총생산(GNP) 기준 시절, 일본 재계에는 '''"국방비가 GNP의 6%를 넘어가면 그 나라 살림이 거덜나는건 시간문제"'''라는 격언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산권 국가들은 국민총생산(GNP)의 10% 이상을 국방비에 투자하는게 다반사였다. 참고로 냉전 시대 미국은 줄곧 GNP의 6~6.5% 정도를 국방비로 지출했으며, 이스라엘도 최근까지 6%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경제가 파탄나지 않는 수준에서 쓸 수 있는 최대치라고 보면 될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