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문용
1. 보성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문용
박문용은 1882년 1월 15일 전라남도 보성군 겸백면 사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겸백면장을 맡고 있던 1913년 12월 8일 면내 공금 보관금 327원 6전을 가지고 상하이로 망명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될 수 있도록 재정 지원을 해줬고 1919년 7월에 안창호와 함께 조국의 독립방략과 임시정부의 운영 방향 등을 논의했다. 또한 1919년 4월 18일에는 천진에서 동지들과 함께 불변단(不變團)을 조직했고 8월 15일 임원 개선 시에는 부단장 겸 의사부장의 직책을 맡았다. 한편 10월 31일에는 상하이에서 박은식 등 민족대표들과 함께 선언서와 공약을 발표해 한민족도 정부 있는 국민임을 세계에 선언하여 전 민족의 협력을 촉구했다.
이후 그는 임시정부의 국내 특파원으로 임명되어 전라도 지역의 책임자로서 귀국했다. 1919년 말 서울에서 한우석(韓禹錫)을 만난 뒤 1920년 2월 말 한우석과 함께 상하이로 돌아와서 임시정부 간부들과 회견해 서울을 중심으로 한 조선독립군사령부(朝鮮獨立軍司令部)를 조직하도록 협의한 뒤 권총을 지원받고 3월 7일에 귀국했다. 이후 그는 한우석 등 여러 명과 협의하여 모병, 모금을 목적으로 한 조선독립군사령부 결사대를 조직했다. 이때 그는 행동대원을 맡았고, 권총을 휴대한 채 전라남도 광주 본촌면에서 군자금 모집을 계획했지만 일제 경찰의 경계가 심해 뜻대로 진행하지 못했다.
1920년 8월 미국 상원의원단이 서울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조선 총독 및 정무총감 등 일제 수뇌부를 제거할 암살단을 조직하고 계획을 준비했다. 그러나 한우석이 검거된 후 모든 사실을 자백하면서 경찰에게 발각되고 말았고, 그 역시 체포되었다. 이후 그는 1921년 11월 15일 경성지방법원에서 강도살인예비 및 제령 제7호 위반, 총포 화약류 취체령 위반, 사기 혐의로 징역 7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1928년경 출소한 그는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1929년 7월 20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0년 박문용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2009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
2. 강계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문용
박문용은 평안북도 강계군 출신으로 알려졌지만 출생년도는 알 수 없다. 그는 박장호, 조맹선 등이 조직한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에 가담해 총무로 활동했다. 그러던 1919년 8월 31일, 집안현 주재 일경 40여 명이 중국 군병 20여 명과 함께 집안현 온화보에 사는 농민과 산포수 400명을 포위 수색하던 중 그와 동지들의 위치가 발각되었다. 이에 일본군과 중국군이 민가 13호를 전소시켰고, 그는 대한독립단 임원인 한병기, 독립운동가 박운석, 70세 노인 4명과 함께 강변 나무숲에서 피살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95년 박문용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3. 재령군 출신 독립운동가, 박문용
박문용은 1900년 6월 29일 황해도 재령군에서 태어났고, 일찍이 신천군 신천읍에 이주해 읍내 장터에서 상업을 했다. 그러던 1919년 3월 27일 신천읍 장날에 기독교인 김영호(金永昊)·이용규(李容圭)·이창화(李昌華)·홍종준(洪鍾俊) 등이 주도한 독립만세시위가 벌어지고 경찰에 의해 75명이 연행되자, 그는 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그는 고종환, 양제선(梁濟善), 양재원(梁在元) 등과 함께 4월 3일부터 만세운동을 일으킬 것을 결의하고 태극기를 그리며 준비했다. 이윽고 4월 6일 장날이 되자, 그는 동지들과 함께 장꾼들에게 태극기를 나눠주고 독립만세를 고창하다가 헌병대에 의해 구속되었다. 이 일로 재판에 회부된 그는 1919년 6월 10일 평양복심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지역 1년 6개월을 선고받고 항소했지만 7월 19일 고등법원에서 기각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신천군에서 조용히 지내다 1929년 7월 5일에 사망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2013년 박문용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