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춘석
[image]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이다. 1930년에 경성 의주로(서소문)에서 조선고무공장 사장 박영근의 아들로 태어나 4세 때 풍금을 능숙하게 다루며 음악에 재미를 붙여왔다. 경기중 4학년(고교 1년) 때 길옥윤과 베니 김 등의 제의로 명동 '황금클럽' 무대에 서면서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고교 졸업 직후 1949년에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입학했지만 1년만에 중퇴하고 신흥대학(現 경희대학교) 영문과로 편입하여 졸업했다.
그는 1954년에 '백호'라는 필명으로 1954년 '황혼의 엘레지(노래 백일희)'를 처음으로 작곡하며 KBS 경음악단장도 맡았고, 1955년 오아시스레코드 전속작곡가가 되어 1956년 발표한 '비 내리는 호남선'이 히트하면서 주목받아 스타가 되기 시작했다. 1957년 영화 <진리의 밤>을 시초로 영화음악 작곡에도 손을 뻗었다.
1964년 지구레코드로 이적한 후 이미자와 콤비를 이루면서 작풍을 트로트로 급선회했고 그동안 그는 이미자와 함께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 '흑산도 아가씨' '황혼의 블루스' '그리움은 가슴마다' '삼백리 한려수도'를 비롯해, 30주년 기념음반 타이틀곡인 '노래는 나의 인생'까지 무려 500여 곡을 통해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1967년 3월, '박춘석 가요창작 999곡째 발표'라는 이색 타이틀 공연을 가졌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박춘석 창작가요 2000곡 기념공연' 무대를 국도극장에서 열었다. 이때부터 '박춘석 사단'으로 불리는 패티김, 남진, 나훈아, 문주란, 정훈희, 하춘화와 히트곡 행진을 이어갔다.
거기에 '가슴 아프게'(남진), '초우'(패티김), '타인들'(문주란), '마포종점'(은방울자매), '별은 멀어도'(정훈희), '마음이 고와야지'(남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곽순옥), '물레방아 도는데'(나훈아), '가시나무새'(패티김)까지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심지어 영화/연극음악까지 큰 업적을 남겼으며 '진리의 밤'(57년, 김한일 감독), '사랑이 가기 전에(59년, 정창화 감독)', '슬픔은 강물처럼(60, 전창화)', '임자 없는 나룻배(62, 엄심호)'등을 비롯해 뇌졸중으로 쓰러진 94년까지 쉴 새 없이 1백여 편의 영화음악에 몰두해왔다. 1978년 12월, 일본 콜롬비아의 의뢰를 받아 명가수 미소라 히바리에게 '風酒場(かぜさかば)'라는 곡을 써주기도 했다. 1981년 길옥윤, 송재리와 함께 '태양음향'을 세워 1983년에 회장으로 재직했고, 1988년에는 독자 음반제작사 '거성레코드'를 세웠다. 그 외에도 1987년부터 3년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장을 지냈다.
그는 '음악과 결혼했다'라고 믿을 정도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그는 40년간 국내 대중가요 개인 최다인 2천 700여 곡을 작곡했고,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개인 최다인 1천152곡이 등록되어 있다. 2001년에는 영국 그로브음악대사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불행했다. 1994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 이후로는 각종 활동을 중단하고 동생인 박금석씨에 의해 간호를 받아오다가 투병 16년 째이던 2010년 3월 14일에 타계했다.
1. 기본 정보
2. 소개
대한민국의 대중음악 작곡가이자 피아노 연주자이다. 1930년에 경성 의주로(서소문)에서 조선고무공장 사장 박영근의 아들로 태어나 4세 때 풍금을 능숙하게 다루며 음악에 재미를 붙여왔다. 경기중 4학년(고교 1년) 때 길옥윤과 베니 김 등의 제의로 명동 '황금클럽' 무대에 서면서 피아니스트로 활동을 시작한 그는 고교 졸업 직후 1949년에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입학했지만 1년만에 중퇴하고 신흥대학(現 경희대학교) 영문과로 편입하여 졸업했다.
그는 1954년에 '백호'라는 필명으로 1954년 '황혼의 엘레지(노래 백일희)'를 처음으로 작곡하며 KBS 경음악단장도 맡았고, 1955년 오아시스레코드 전속작곡가가 되어 1956년 발표한 '비 내리는 호남선'이 히트하면서 주목받아 스타가 되기 시작했다. 1957년 영화 <진리의 밤>을 시초로 영화음악 작곡에도 손을 뻗었다.
1964년 지구레코드로 이적한 후 이미자와 콤비를 이루면서 작풍을 트로트로 급선회했고 그동안 그는 이미자와 함께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 '흑산도 아가씨' '황혼의 블루스' '그리움은 가슴마다' '삼백리 한려수도'를 비롯해, 30주년 기념음반 타이틀곡인 '노래는 나의 인생'까지 무려 500여 곡을 통해 환상의 호흡을 자랑했다.
1967년 3월, '박춘석 가요창작 999곡째 발표'라는 이색 타이틀 공연을 가졌고,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박춘석 창작가요 2000곡 기념공연' 무대를 국도극장에서 열었다. 이때부터 '박춘석 사단'으로 불리는 패티김, 남진, 나훈아, 문주란, 정훈희, 하춘화와 히트곡 행진을 이어갔다.
거기에 '가슴 아프게'(남진), '초우'(패티김), '타인들'(문주란), '마포종점'(은방울자매), '별은 멀어도'(정훈희), '마음이 고와야지'(남진), '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곽순옥), '물레방아 도는데'(나훈아), '가시나무새'(패티김)까지 한국인의 정서에 맞는 수많은 히트곡을 발표했다. 심지어 영화/연극음악까지 큰 업적을 남겼으며 '진리의 밤'(57년, 김한일 감독), '사랑이 가기 전에(59년, 정창화 감독)', '슬픔은 강물처럼(60, 전창화)', '임자 없는 나룻배(62, 엄심호)'등을 비롯해 뇌졸중으로 쓰러진 94년까지 쉴 새 없이 1백여 편의 영화음악에 몰두해왔다. 1978년 12월, 일본 콜롬비아의 의뢰를 받아 명가수 미소라 히바리에게 '風酒場(かぜさかば)'라는 곡을 써주기도 했다. 1981년 길옥윤, 송재리와 함께 '태양음향'을 세워 1983년에 회장으로 재직했고, 1988년에는 독자 음반제작사 '거성레코드'를 세웠다. 그 외에도 1987년부터 3년간 한국음악저작권협회 회장을 지냈다.
그는 '음악과 결혼했다'라고 믿을 정도로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그는 40년간 국내 대중가요 개인 최다인 2천 700여 곡을 작곡했고, 현재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개인 최다인 1천152곡이 등록되어 있다. 2001년에는 영국 그로브음악대사전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말년은 불행했다. 1994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것. 이후로는 각종 활동을 중단하고 동생인 박금석씨에 의해 간호를 받아오다가 투병 16년 째이던 2010년 3월 14일에 타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