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옥윤

 

'''이름'''
길옥윤(吉屋 潤)[1]
'''본명'''
최치정(崔致禎)
'''생몰년도'''
1927년 2월 22일 ~ 1995년 3월 17일 (향년 68세)
'''출생지'''
평안북도 영변군
'''학력'''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전문부 치의학과[2]
'''가족'''
배우자 패티김(1966 ~ 1973)[3], 그 외 가족사항[4]
'''데뷔'''
1962년 현인 <내 사랑아>
'''본관'''
전주 최씨
'''종교'''
유교(성리학) → 개신교(침례회) → 천주교(세례명: 요셉)
1. 개요
2. 생애
3. 여담
4. 대표곡
5.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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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작사가, 작곡가, 색소폰 연주가다.

2. 생애


1927년 2월 22일 평안북도 영변 출생.
평양 종로국민학교 졸업.
평양고등보통학교 졸업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입학.
1949년 서울대학교 치과대학 전문부 졸업.[5]
1950년 초 동경으로 건너가 오자와[小澤秀夫]에게서 재즈 음악과 색소폰연주법을 배웠다.
1952년 일본에서 주일미군캠프촌을 순회하는 악단을 조직, 본격적인 재즈맨이 되었다. 이 때 일본 문인들의 이름을 본따서 요시야 쥰[吉屋潤](길옥윤)으로 행세했다.
1960년 동경 스윙 오케스트라 악단을 인솔하고 서울에 귀국
1962년에 「내 사랑아」라는 곡을 발표하였다.
1966년 다시 서울에 왔을 때 「서울의 찬가」를 동아방송을 통해 발표
그 해 연말 미국에서 돌아온 인기가수 패티김(金惠子)과 결혼, 신혼여행을 겸해 베트남을 위시하여 동남아와 유럽 등지로 순회공연 길에 올랐다.
1967년 홍콩에서 「빛과 그림자」를 발표.
1969년 첫딸 정아 출산. 정아가 만 20세가 되어 성인이 된다는 뜻으로 「1990년」이라는 곡을 발표하여 사랑의 선물.
1971년 뉴욕에서 「이별」이라는 곡을 만들었으며
1973년 이혼
1974년 동경(TBC TV 주체) 국제가요제에 참가하여 「사랑은 영원히」라는 곡으로 패티김이 입상(金賞).
1976년 오랜만에 「당신은 모르실거야」라는 곡으로 신인가수 혜은이 발굴.
1977년 MBC TV 주최 서울가요제에서 「당신만을 사랑해」로 그랑프리를 획득
1977년 11월에는 한국을 대표하여 동경 야마하 재단 주최 세계가요제에 참가.
1978년 이 콤비는 제1회 뉴질랜드, 태평양가요제에 출전하여 금상
1981년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관악기연주자의 교합상태에 관한 연구」로 석사학위.
1979년 12월 이화여대 출신인 전연란(全蓮蘭)과 혼인.
1981년 가요작가 박춘석(朴椿石)과 함께 태양음악주식회사 창설 기념으로 「길옥윤 전집」(LP 2매)을 출반했고,
1983년 서울예술전문대학 실용음악과 주임교수로 취임
1984년 2월 한국음악저작권협회회장(10대 회장).
1985년 88올림픽 공식 주제가로 「아침의 나라에서」(김연자 노래)가 당선되었다.
1989년 신사동에 ‘창고(倉庫)’라는 야간업소를 운영하였는데 부채가 늘어나자 1992년 업소를 동경 아카사카[赤阪]으로 옮겼다. 동경에서 「애수(哀愁)의 색스폰」이라는 그의 히트곡 연주곡집을 CD로 출반했다.
1994년 4월 척추 수술을 받았고, 같은 해 6월 SBS TV에서 그의 마지막 콘서트가 방송되었다.
1994년 10월 부산 동래시민병원에 입원했을 때 「부산찬가」·「2002년」 등을 작곡.
1995년 2월 김수환(金壽煥) 추기경으로부터 영세를 받았다. 투병 중에도 눈을 감는 마지막 순간까지 300여 곡을 악보에 기록하였다.
[image]
말년의 모습
1995년 3월 17일, 폐암과 척추암으로 투병하다가 세상을 떠났다.
1995년 3월 21일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에서 연예협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고, 운구 때 패티김이 「서울의 찬가」를 눈물로 불렀다. 문화훈장 보관장을 추훈받았다.
1995년 10월 23일 세종로 공원에 「서울의 찬가」 노래비를 서울시에서 건립하였다.

3. 여담


  • 그 후 2020년 7월 13일 KBS 가요무대에서 길옥윤의 작품을 주제로 방송되었다. #

4. 대표곡


가수
제목
패티김
서울의 찬가
4월이 가면
그대 없이는 못 살아
빛과 그림자
사랑이라는 두 글자
사랑이여 다시 한 번
혜은이
당신은 모르실 거야
당신만을 사랑해
감수광
제3한강교
새벽비
장혜리
오늘 밤에 만나요
이시스터즈
별들에게 물어봐
세샘트리오
나성에 가면
쟈니리
내일은 해가 뜬다
김연자
아침의 나라에서
시가 및 국가
마셜 제도
마셜 제도여 영원하라[6]
광주광역시
광주시민의 노래
대전광역시
대전의 찬가

5. 저서


  • 영원히 당신만을 - 신원문화사. 1980.
  • 알기 쉬운 경음악 편곡집(번역) - 마쓰다 마사시 저. 세광음악출판사. 1988.
  • 길옥윤 참회록: 이제는 색소폰을 불 수 없다 - 조선일보사 출판국. 1995.

[1] 한국 성씨에 길(吉)씨가 있다 보니, 성이 길이고 이름이 옥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일본 예명인 吉屋 潤(요시야 준)을 한국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2] 경성제국대학과 여러 구제전문학교를 통합하여 설립된 서울대 초기에는 전문학교 과정을 '전문부'로 구분하였다.[3] 패티김과의 사이에서 얻은 첫째 딸(최정아)은 패티김이 양육하였고, 길옥윤은 재혼한 부인 전연란과의 사이에서 둘째 딸(최안리)을 얻었다.[4] 누나나 남동생이 몇 명이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으나, 친동생(남자)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그 친동생은 배우 정한용과도 인연이 있어서 TV는 사랑을 싣고에서 찾았는데, 이름은 최치갑이고, 형인 길옥윤처럼 서울대학교 치과대학교를 나와서 부산광역시에서 개인 치과의사를 하였다. 나이는 1943년 생으로 길옥윤보다도 훨씬 어리고, 정한용의 집에서 1960년대 초중반에 하숙(정한용의 모친이 장사 수완이 뛰어나서 일반인들 대부분이 가난하던 당시에도 부유하게 살았다.)을 했고, 국민학생이던 정한용에게 공부도 가르쳐주었다고 한다. 사실 형을 닮아 음악적 재능도 뛰어났다고 하는데, 길옥윤에게 형님처럼 음악인이 되고 싶다고 하자, "내가 전공을 못 살렸는데, 너까지 못 살리면 어떡하느냐. 너라도 의료인이 되라"고 설득해서 마음을 고쳐먹고, 치과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아마 친동생 중에 그 정도 큰 나이 차이인 동생이 있다면 그 나이 사이에 다른 친동생들이 있었을 확률이 크다.[5] 인터넷 상의 여러 자료에는 경성치과의학전문학교 출신으로 나오는데 이는 그가 입학해서 다니던 시절을 기준으로 기술한 것이며, 그가 졸업을 하던 1949년에는 이미 서울대학교 치과대학으로 통합이 완료된 후라서 공식적으로 서울대학교를 졸업한 것이 맞다.[6] 마셜 제도의 '''국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