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자

 


'''이미자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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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요대상 대상'''[11]
최희준
김상희
(1967년)

배호
'''이미자'''
돌아가는 삼각지
'''섬마을 선생님
(1968년)'''

남진
이미자
(1969년)
배호
이미자
(1968년)

남진
'''이미자'''
가슴 아프게
'''여자의 일생
(1969년)'''

최희준
이미자
(1970년)
남진
이미자
(1969년)

최희준, '''이미자
(1970년)'''

남진
김상희
(1971년)

'''가요대상 대상'''
최희준
'''하숙생'''
(1966년)

'''이미자
엘레지의 여왕
(1967년)'''

'''이미자
여자의 일생
(1968년)'''
펄 시스터즈
'''님아'''
(1969년)

'''이미자
그리움은 가슴마다
(1970년)'''

남진
'''마음이 고와야지'''
(1971년)



<colbgcolor=#283593><colcolor=#FFFFFF> '''이미자
李美子
'''
'''출생'''
1941년 10월 30일 (82세)
경기도 경성부 용산면 한남정
'''국적'''

'''본관'''
전주 이씨
'''신체'''
160cm, 48kg, A형
'''가족'''
아버지 이점성, 어머니 유상례, 2남 4녀 중 장녀
'''배우자'''
김창수
'''자녀'''
딸 정재은, 아들
'''종교'''
가톨릭(세례명: 체칠리아)
'''데뷔'''
1959년 〈열아홉 순정〉
1. 개요
2. 가수 활동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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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가수
1960년대~1970년대 초반 가요계의 여제로 불렸으며, '엘레지[1] 의 여왕'[2]이라는 별명이 유명하다.

'''[Mnet Legend 100 - ICON : Legend 이미자]'''

1960년대 중반, 애절한 음색으로 서민들의 삶과 애환을 노래한 영원한 엘레지의 아이콘.

국내 최초로 음반판매량 10만장을 돌파하며 신드롬적 히트를 기록한 국민가요 '동백아가씨'.

한국 가요 사상 최다 음반, 최다 취입곡을 기록한 대중가요의 살아있는 전설.


2. 가수 활동


대표곡으로 『동백아가씨』, 『섬마을 선생님』 ,『여자의 일생』, 『내 삶의 이유 있음을』, 『열아홉 순정』 등이 있다. 한국 가요계에서 각각 성별에 따라 절대적인 레전드라 하면 남자가수는 조용필을 꼽는다면 여자가수는 이미자를 꼽는다.[3] 조용필이 락부터 트로트까지 사실상 모든 장르에 손을 댔다면, 이미자는 '''트로트, 그 중에서도 특히 엘레지(Elegy, 애가)의 끝판왕이라고 볼 수 있다.''' 1959년 데뷔해서 대략 70년대 중후반까지 전성기였고, 80년대 조용필의 등장으로 밀려난 듯한 모습이 있었으나 여전히 대단한 위상을 누렸고 70~80년대 데뷔한 많은 여가수들이 지금은 은퇴 혹은 활동을 안하고 있으나 62년째 한국 트로트 가수 사상 최장기간 활동 중이다.
이미자의 노래는 일본 엔카 스타일의 곡 분위기와 창법으로 인해 왜색 논란이 있었다.[4] 그 때문에 『동백아가씨』는 한때 금지곡으로 지정 당하기도 했다. 당시 이미자의 히트곡들이 5음 음계 중심, 7·5조 가사의 폭스트롯이라 엔카와 음악적 문법이 똑같다. 왜색이기는 하나, 사실 60년대 당시 장년층 이상에게는 젊은 시절을 생각하게 하는 묘한 향수로 어필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워낙 유명한 원로가수이지만 고령층에 안티팬이 상당한 편이다. 아래 후술되겠지만, 첫남편과 이혼한 뒤 친딸을 외면하고 산 이야기나 후배 여가수 죽이기 등 나쁜 일화가 많아서 평이 상당히 안 좋다.[5] 동시에 이미자 관련 뉴스나 유투브 댓글을 보면 나이 지긋한 분들의 악플이 꽤 많다(..) 이런 이유로 이미자 보다 패티김을 좋아하는 어르신들도 있으나 히트곡과 대중적 인기로는 이미자가 패티김을 훨씬 압도한다.[6] 또한 1000만장의 음반 판매 기록에 있어서도, 같은 트로트 가수인 후배 김용임 활동 이전의 전성기 시절인 1970년대 후반에 달성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7][8]
이미자 이미지의 원천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여성상이다. 전쟁의 상처를 서서히 회복해가던 전후, 사람들은 일자리를 찾아 도시로 몰려들었고, 화려하고 도회적이고 서구적인 이미지의 가수들 역시 큰 인기를 끌었다. 패티 김으로 대표되는 그 여가수들 가운데서 이미자는 고향의 여동생이나 누나를 연상시켰다. 그녀와 대비되는 패티 김은 서구풍의 가곡이나 스탠더드 팝 같은 우아한 곡들을 불렀고, 이와 대비되게 서구적으로 편곡한 민요조의 노래를 부르는 이른바 신민요 가수들도 있었지만 이미자는 사실 대중들에게 훨씬 친숙한 일본풍 엘레지로 대중들의 마음을 달래왔다.
총 2000곡이 넘는 노래들을 불렀다. 그 당시 '이미자가 싫어하는 여가수는 왕따를 당했다'는 얘기도 있었을 정도로 60년대 그녀는 대중음악의 아이콘이였고 그당시 한국전쟁 이후 민족의 한을 달래주던 여가수였다.
첫 번째 결혼에서 태어난 딸 가수 정재은을 친딸로 대우하지 않고 냉대했다. 정재은은 2살 때 부모가 이혼한 이후 친어머니 이미자를 단 3번 만났다고 했는데, 가정사가 복잡하다고만 할 뿐 정확한 단절의 이유는 밝히지 않았다. 90년대 후반 펴낸 자서전에서 이미자는 딸아이를 지금껏 보지 않는 것에 대해 정확한 언급을 피했으며, 이혼 후 아이를 보지 않았던 것은 전남편과 계속 얽히기 싫었기 때문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 일화는 일견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여성상에 모순되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합치되는 듯한 면도 있다.관련기사 아이러니하게 이미자 자신도 어린 시절 생모와 헤어진 트라우마가 있었다고 한다. 여담으로 전남편은 콘트라베이스 연주자이며 현 남편은 한국방송공사 PD출신.
2011년 12월 25일 MBC 창사 50주년 콘서트 <이미자와 친구들>에도 헤드라이너로 참석했는데, 이 콘서트는 코이카(한국국제협력단) 단원을 격려하기 위한 자선콘서트이다. 특히 그녀는 출연료를 세네갈에서 심장병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기부해 수술에 보탰다고. 이 콘서트에서 그녀는 직접 아이유에게 마이크를 건넸고, 아이유는 그녀의 데뷔곡 '열아홉 순정'을 불렀다.
2019년 5월 2일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28일 MBN과의 인터뷰에서는 은퇴는 아니라고 한다. 실제로도 새해들어 2020년 2월에도 스케줄이 잡힌걸로 보아 정말 은퇴가 아닌 듯하다.
또한 2020년 10월 추석을 맞아 TV조선이 실시한 2020 트롯 어워즈에서 대상을 거머쥐었다.

3. 여담


  •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별명에 걸맞게 전형적인 트로트 가수로 자리매김 했지만, 사실 데뷔 자체는 '열아홉 순정'이라는 제목의, 스윙 재즈 빅밴드 편성의 미국식 스탠다드 팝 스타일이 농후한 곡이었다. 50년대 당시는 주한미군 부대를 중심으로 미국의 대중음악 문화가 직도입 되던 시기였고 대중 가수들 또한 미군 클럽을 중심으로 공연 활동을 해야했는데, 이미자도 당연히 이런 영향을 받았던 것. 그러나 이미자는 60년대의 동백아가씨의 엄청난 히트 이후에는 트로트 가수로 완전히 정착한다. 반면 동시대에 데뷔했던 패티김은 아예 그 후에도 꾸준히 스탠더드 팝 성향의 곡으로 활동했다.

  • 이미자 사후에 성대 구조를 연구하기 위해 일본에서 이미 개런티를 지불했다는 '사후 성대 기증설'이 떠돌아다녔는데 당연히 사실무근이다.[9]
  • 2017년 10월 1일 KBS 전국 노래자랑 서울특별시 서초구 편에 본선 심사위원 겸 피날레 초대가수로 등장했다. 평소 전국 노래자랑은 물론이고 가요무대에도 자주 출연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하지만, 이미자 본인이 30년 가까이 서초구 반포동에 거주한 서초구민이었기에 출연료를 단 한 푼도 받지 않고 재능기부 차원에서 출연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이 날은 특별히 10분 더 방송을 했었다. 마침 촬영 당시 서초구에서 서리풀 페스티벌이라는 지역 축제가 열렸는데 그것의 일환으로 전국노래자랑의 촬영이 있어서 가능했던 일이었다. 당초 2016년에도 행사에 참여하고 싶었는데 스케쥴 때문에 불발돼서 아쉬웠다고 한다.
  • 하지만 가수로서의 명성과 영향력과는 별개로 사람을 대하는 태도나 인품은 매우 좋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무대가 끝난 후 사인을 요청하는 팬을 무시하고 차에 타버린 일화가 유명할 정도로 상당히 이중적인 이미지가 강한 가수로 알려졌다. 특히 친딸이었던 정재은에게도 굉장히 차갑고 매정하게 대했다고 하는데 딸 정재은이 이혼을 겪은 후 공항에서 이미자를 우연히 마주쳤을 때 이미자는 "잘 살지 그랬니... 사람들 눈이 있으니 어서 가거라"는 말만 하고 자리를 피했다고 한다. 물론 딸의 결혼식에도 이미자는 참석하지 않았다.
  • 트로트 이미지 때문에 무수히 많은 히트곡에도 불구하고 저평가를 상당히 많이 당했다. 일례로 1989년 가수 생활 30년 기념을 위해 세종문화회관에 대관신청을 했으나, "이미자의 노래는 '고무신짝' 들이 많이 들어와 질서가 없어지고 문화를 해친다" 며 대관 자체를 거부당하기도 하였다. 다른 건 몰라도 자신의 노래를 좋아하는 팬들을 '고무신짝' 이라고 비하하는 소리를 직접 들으니 마음이 많이 아팠다고. 이후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고건시장의[10] 도움으로 대관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시골 할아버지, 할머니들만 득실 댈 것이라던 세종문화회관 측의 예상과 달리 당시 정재계를 비롯한 고위층 인물들이 관람하러 왔고, 특히 4개 야당 총재들이 부부동반으로 직접 공연을 관람하러 오는 등 공연은 성황리를 이뤘다고 한다. 이 후 이미자가 트로트 가수로서 처음 세종문화회관의 관문을 넘으면서 남진이나 심수봉 같은 후배 가수들 역시 공연을 할 수 있게 되었다.
  • 로미나의 커버 영상을 접한 이미자가 그녀를 직접 수제자로 받아들였고, 콘서트 때마다 초청하여 함께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1] '슬픈 노래' 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 'elegy' 이다. 자주 쓰이는 단어가 아니어서인지, 몇몇 음반에서는 '''엘리제의 여왕''' 이라는 오기도 보인다. 이 엘리제(Elise)와 혼동하지 말기를. [2] 같은 제목의 영화로도 제작되어 1967년에 개봉하였다. 한형모 감독, 최남현, 남정임, 박노식 주연으로 국내 최고의 여가수 이미자의 반생기를 그린 전기영화. 참고로, 나미가 어릴 적에 이 영화에서 이미자의 아역으로 나왔었다고 한다. 영화에 쓰인 박춘석의 곡이 히트하면서 얻은 별명이다.[3] 1999년 11월, 월간조선에서 대한민국의 작곡가 1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20세기 최고의 대중가수로 조용필과 이미자를 뽑았다. 설문조사 이전부터 조용필과 이미자 두 사람이 1, 2위를 차지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인데 과연 누가 1위겠느냐 하는 추세였고, 결국 67명의 추천을 받은 조용필이 20세기 최고의 가수로, 이미자는 58명 추천으로 2위로 뽑혔다.[4] 이 전 문서에서는, 이 시기가 한국형 트롯트가 완성되기 이전이라고 서술되어 있지만, 이미자의 활동시기보다 훨씬 이전에 한국형 트롯트는 완성되어 있었다. 1930년대 이난영, 남인수 등을 시작으로 해방 이후 현인 등이 대표적인 트롯트 가수이다. 1967년부터 활동을 시작한 남진, 나훈아 역시 정통 트롯트의 계보를 이었다. 이미자는 트롯트 가수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그녀만의 특색이 강해서, 다소 정통트롯트라고 보기에는 다소 애매한 면도 있다.[5] 이 점은, 최고가수이면서도 안티팬이 거의 없는 조용필과 비교되는 부분이기도 하다.[6] 이미자의 안티팬 중에는 패티김의 열혈팬도 상당수 있다. 활동시기는 비슷하지만 음악의 성향이 완전히 다른 두 가수여서 팬들이 상대가수의 음악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다.[7] 김용임의 1000만 장 판매는 기록자체는 사실이지만, 그 대부분이 고속도로 휴게소를 통해서 판매되었다는 점을 본다면, 이미자와 비교할 대상은 아니다. 심지어 비슷한 성격의 다른 가수들에 비해서도 최고는 아니다. 예를 들어, 신웅, 김란영 등의 가수는 3000만 장 이상의 판매기록을 가지고 있다.[8] 주현미는 대표곡으로 비내리는 영동교(1985), 신사동 그사람(1988), 짝사랑(1989) 등을 꼽지만, 가장 많이 팔린 앨범은 1984년 가수공식 데뷔 이전에 취입한 메들리 음반 "쌍쌍파티" 이다. 하지만 주현미 본인도, 그녀의 팬들도 쌍쌍파티를 주현미의 대표앨범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9] "사후 성대 기증설"은 사실 순화된 표현. 속설로 돌아다니는 말은 이런 식이다. "이미자가 일본에 자기 목을 팔았는데, 그래서 이미자가 죽으면 시체를 어떻게 해서..."[10] 이후 노무현 정권 수립 이후 국무총리로 재임하였으며,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에는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