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터 나우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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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3]
1.1. 선수 생활
1.1.1. 클럽
나우슈는 1923년 SV 아마추어 빈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다. 데뷔 시즌에 소속팀 아마추어 빈은 오스트리아 1부 리그에서 우승했지만[4] 나우슈는 놀랍게도 다음 해인 1925년, 경쟁팀인 비너 AC로 이적했다.
1929년, 나우슈는 비너 AC의 생활을 정리하고 친정팀 FK 아우스트리아 빈에 복귀했다. 그는 마티아스 신델라와 호흡을 맞추며 팀의 요구에 따라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는 올라운더#s-3.2에 가까운 선수였으며 1930년대 아우스트리아 빈의 소금같은 선수였다.
나우슈는 리그에서 단 한 번밖에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지만 미트로파 컵에서는 소속팀의 2차례의 우승을 이끌었다.
1.1.2. 국가대표
나우슈는 1929년에 대표팀에 데뷔하여 다소 늦은 데뷔전을 치렀다. 1931년부터 시작된 분더팀의 전설에서 나우슈는 많은 경기에 참가했고 주장으로 팀을 이끌었다.
나우슈는 불가리아와의 월드컵 지역 예선에 참가해 오스트리아의 6대1의 대승을 이끌었다. 하지만 나우슈는 이탈리아 월드컵을 앞두고 입은 부상 때문에 아예 엔트리에조차 포함되지 못했고 오스트리아는 4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나우슈는 오스트리아 국가대표 선수로 9년 동안 총 38경기에 참가했다.
1.2. 감독 생활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인해 오스트리아의 축구 선수들에겐 나쁜 쪽으로 큰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특히 유대인 선수들은 아예 리그 출전을 금지당하기도 했으며 나우슈도 이 시기에 선수 은퇴를 선언했다.그러나 나치당에서 나우슈의 유대인 아내까지 떼어놓을 것을 강요하자 나우슈는 11월에 가족들과 함께 스위스에 갔다.
스위스의 많은 클럽들이 나우슈에게 감독 제의를 한 가운데 나우슈의 최종 선택은 영 펠로우스 취리히였고 영 펠로우스 취리히에서 1948년까지 감독직을 맡았다.
그러다 당시 오스트리아 축구 협회장 요제프 게뢰에 의해 1948년에 오스트리아 대표팀 감독에 취임하게 되었고, 1954년 월드컵에서 오스트리아를 3위에 올려놓아 지금까지도 오스트리아 대표팀 역사상 최고의 월드컵 성적을 거둔 감독으로 남아 있다.
월드컵을 끝으로 대표팀 감독 자리에서 물러난 나우슈는 친정팀 FK 아우스트리아 빈에서 1시즌 동안 감독직을 수행했다. 1957년 나우슈는 갑작스러운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두었다.
2. 플레이 스타일 & 평가
거의 모든 포지션을 소화 가능한 다재다능형 선수. 신체적 조건이 좋고 전술 이해도도 높았다. 하지만 후대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처럼 월드컵에 단 1분도 출전하지 못해 개인과 대표팀 모두 더 큰 성공과 명예를 놓치게 되었다.
나우슈는 2001년 오스트리아의 역대 베스트 11에서 명예 주장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3. 수상
3.1. 클럽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우승 1회: 1923-24(SV 아마추어 빈)
- ÖFB-컵 우승 5회: 1923-24, 1924-25, 1932-33, 1934-35, 1935-36(FK 아우스트리아 빈)
- 미트로파 컵 우승 2회: 1933, 1936(FK 아우스트리아 빈)
- 오스트리아 1부 리그 준우승 1회: 1936-37(FK 아우스트리아 빈)
- ÖFB-컵 준우승 1회: 1927-28(비너 AC), 1929-30, 1930-31(이상 FK 아우스트리아 빈)
- 미트로파 컵 준우승 1회: 1931(비너 AC)
3.2. 국가대표
- 중유럽 컵 우승 1회: 1931-32
- 중유럽 컵 준우승 1회: 1933-35
3.3. 감독
[1] 이 시대에는 등번호가 존재하지 않았다.[2] 출처: 위키피디아, 11v11[3] 출처: 위키피디아, 11v11[4] 그리고 이것이 나우슈의 첫 리그 우승이자 마지막 리그 우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