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감독직 및 기타 직책 '''
'''둘러보기 틀 모음'''
'''대표팀'''




'''클럽'''
'''발렌시아'''}}}
{{{-2 27대, 35대
'''레알 마드리드 CF'''}}}
{{{-2 31대, 36대
'''발렌시아'''}}}
{{{-2 43대



'''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수상 이력 '''
'''둘러보기 틀 모음'''
'''개인 수상'''
1957 · 1959



'''베스트팀'''
1960 · 1961 · 1962 · 1963 · 1964


<color=#373a3c> '''1956 Ballond'or'''
수상
스탠리 매튜스
2위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3위
레몽 코파

''' 스페인의 前 축구인 '''
''' 이름 '''
'''알프레도 디스테파노'''[1]
'''Alfredo Di Stéfano'''
''' 출생 '''
1926년 7월 4일 /
{{{-1
아르헨티나 부에노스 아이레스}}}
''' 사망 '''
2014년 7월 7일 (향년 88세)
''' 국적 '''
아르헨티나 [image] | 스페인 [image] |
콜롬비아 [image] (복수국적)
''' 신체 '''
178cm
''' 직업 '''
축구선수 (공격수[2] / 은퇴)
축구감독
''' 소속 '''
''' 선수 '''
CA 리버 플레이트 (1943~1949)
CA 우라칸 (1946~1947 / 임대)
CD 로스 미요나리오스 (1949~1953)
'''레알 마드리드 CF (1953~1964)'''
RCD 에스파뇰 (1964~1966)
''' 감독 '''
엘체 CF (1967~1968)
CA 보카 주니어스 (1969~1970)
발렌시아 CF (1970~1974)
스포르팅 CP (1974)
라요 바예카노 (1975~1976)
CD 카스테욘 (1976~1977)
발렌시아 CF (1979~1980)
CA 리버 플레이트 (1981~1982)
레알 마드리드 CF (1982~1984)
CA 보카 주니어스 (1985)
발렌시아 CF (1986~1988)
레알 마드리드 CF (1990~1991)
''' 국가대표 '''
6경기 6골 (아르헨티나 / 1947)
4경기 (콜롬비아 / 1949~1952)
31경기 23골 (스페인 / 1957~1961)
'''정보 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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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2남 1녀 중 첫째,[28] 슬하 6자녀
'''별명'''
금빛 화살 (Saeta Rubia)

1. 개요
2. 축구인 경력
2.1. 남미 시절
2.2. 디 스테파노 사태
2.4. 지도자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평가
5. 기록
5.1. 대회 기록
5.2. 개인 수상
6. 디 스테파노에 대한 말, 말, 말
7. 어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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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스페인 국적[3]의 前 축구 선수 출신 감독이자 레알 마드리드 CF 명예 회장. 레알 마드리드의 1950~60년대를 상징하는 선수로 꼽힌다.
50년대 중반 레알 마드리드 CF에 입단하여 60년대 중반까지 활약하며 유러피언컵 5연패를 비롯해 수많은 트로피를 들어올리며 당대의 레알 마드리드 CF로 하여금 "저승사자 군단"이라는 칭호를 얻게 만든 전설적인 축구선수이다.
2014년 7월 7일 베르나베우 인근 거리를 걷던 도중 심장마비로 쓰러져 병원으로 이송돼 치료를 받았으나 결국 사망했다.

2. 축구인 경력



2.1. 남미 시절


모국 아르헨티나의 명문 구단 CA 리버 플레이트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 약 10여년을 남미 리그에서만 커리어를 쌓았다. 그가 남미에서 쌓은 스탯을 보면 리버 플레이트에서 65경기 49골, CA 우라칸에서 25경기 10골, 로스 미요나리오스에서 102경기 88골이다. 이 정도면 충분히 괴수급이지 않을까 싶지만... 본편은 아직 시작하지도 않았다. 남미 대륙 내 활약을 눈여겨본 스페인에서 그에게 러브 콜을 날리기에 이른다.

2.2. 디 스테파노 사태


결과부터 말해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레알 마드리드의 흰 유니폼을 입고 전설적인 커리어를 쌓았다. 그런데 그 비하인드 스토리를 살펴보면…
우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남미 시절 계약에 대해서 먼저 언급해 둘 필요가 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리버 플레이트에 소속된 선수였다.[4] 하지만 이 시기 아르헨티나는 경제적 혼란에 직면했고, 선수들의 주급도 지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도 예외는 아니었고, 주급을 지급하지 못하는 리버 플레이트를 탈퇴했다.
그때 디 스테파노를 영입한 것이 한참 경제 성장과 군사 정권의 지지와 함께 선수를 끌어모으고 있던 콜롬비아 리그의 CD 로스 미요나리오스였다. 단, 계약이 완전히 깨진 것도 아니고 로스 미요나리오스 이적 과정에서 이적료가 지불된 것도 아니기 때문에 리버 플레이트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 대한 적어도 상당 부분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로스 미요나리오스 이적 과정을 '''임대'''라고 표현하기도 하지만, 둘 모두에게 확실한 권리가 주어진 것이기 때문에 사실상 이중 계약이고, 좋게 말하면 양쪽 모두 부분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로스 미요나리오스에서 맹활약을 했고, 심지어 콜롬비아 축구 협회의 요청으로 콜롬비아의 국적을 취득해 콜롬비아 국가 대표로까지 발탁되었다. 하지만, 콜롬비아 축구 협회는 FIFA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였고, 공식적인 A매치에서 뛸 수도 없었다.
그런데 콜롬비아 리그는 급하게 형성된 것인 만큼 급격하게 몰락했다. 1950년대 초반 콜롬비아경제는 완전히 무너졌고, 로스 미요나리오스도 유럽 순회를 하면서 돈 벌이를 하러 다녀야 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로서도 콜롬비아를 떠날 필요가 있었다. 그때 로스 미요나리오스가 앵벌이를 다닌 곳이 스페인이었고,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활약은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모두의 눈에 들어왔다. 당시 스페인의 상황은 라슬로 쿠발라라는 슈퍼 스타를 등에 업은 바르셀로나가 독주하는 상황이었고, 이런 상황에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까지 바르셀로나에 영입되면 독주 체제가 굳어질 수 있다는 인식이 양쪽 모두에게 있었다.
이때 바르셀로나는 남미 상황에 정통했던 변호사이자 민족주의자였던 카탈루냐인 라몬 트리아스 파르가스를 리버 플레이트에 파견하여 이적 협상을 완료하는 데 성공했다. 문제는 로스 미요나리오스와 바르셀로나의 협상이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라몬 트리아스 파르가스의 주장에 따르면 이 협상이 깨진 것은 바르셀로나의 내부 문제에 의한 것이었다. 역시 콜롬비아에 파견되었던 바르셀로나의 이사 주젭 사미티에르[5]는 당시 콜롬비아에 있던 카탈루냐 인이자 로스 미요나리오스의 라이벌 구단 '산타 페'의 임원이었던 후안 부스케츠 바로의 도움을 얻었는데, 바로는 협상을 진행하는 것보다 방해하는 데 더 관심을 두고 있는 것 같았다는 것이다. 후안 부스케츠는 로스 미요나리오스와의 협상을 거의 하지 않았고, 로스 미요나리오스에게는 통보도 없이 디 스테파노를 스페인으로 데려와 버렸다. 이 사건은 당연히 로스 미요나리오스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결국 로스 미요나리오스와 바르셀로나 사이의 협상은 거의 진행되지 못했다.
[image]
바르셀로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
여하튼 바르셀로나는 리버 플레이트와 담판을 지었고, 일단 유럽으로 떠나고 싶었던 디 스테파노는 무작정 스페인으로 날아왔다. 문제는 바르셀로나와 계약을 한 리버 플레이트 역시 모든 책임을 뒤집어 쓰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로스 미요나리오스의 허락을 받으면 허용함''''이라는 조항을 달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협상을 허락한 FIFA 역시 바르셀로나가 로스 미요나리오스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는 것은 모르고 허락을 한 것이다. 로스 미요나리오스는 이런 상황 전개에서 당연히 반발하였다.
결국 바르셀로나와 로스 미요나리오스 사이의 협상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협상의 방해물이 등장했으니 바로 바르셀로나 회장인 엔리크 마르티 카레토였다. 카레토는 디 스테파노 이적에 필요한 자금에 제약을 걸기 시작했다. 파르가스에 의하면 이 협상 과정에서 카레토 회장이 미요나리오스에 지불할 의사가 있었던 돈은 1만 달러에 불과했다. 이 돈은 바르셀로나의 보드진이 허용한 2만 달러의 절반이었으며, 로스 미요나리오스가 요구한 이적료 4만 달러에는 턱없이 부족한 돈이었다. 게다가 디 스테파노가 개인적으로 지고 있던 빚 5천 달러도 있었다.[6] 파르가스는 이 차이를 1만 달러와 옵션(친선 경기 개최 수익금 등)으로 줄이는 데 성공했지만, 카레토는 1만 달러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면서 카레토를 비판했다. 그래서 이 과정에서 외부 압박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도 있으나 확실하진 않다. 한편 그러는 사이에 레알 마드리드는 로스 미요나리오스와 협상을 해서 이적 동의를 받아내었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이중 계약이 된 것이다.'''
이제 공은 스페인 축구 협회로 넘어갔다. 당시 축구 협회였던 스페인 축구 연합과 정부의 국민 스포츠 당은 일단 더 이상의 외국인 협상을 전면 금지시켰다. 이 상황에서 바르셀로나가 로스 미요나리오스와, 레알 마드리드가 리버 플레이트와 협상을 하게 된다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완벽한 이중 계약이 되고, 그 이후 전개는 누구도 해결 못하게 되기 때문이다. 또한, 그와 동시에 디 스테파노와 바르셀로나 사이에 이루어진 개인 계약을 무효로 처리했다. 바르셀로나와 디 스테파노의 계약을 인정한다는 것은 디 스테파노가 리버 플레이트 소속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이고, 그건 복잡하게 꼬여 있는 계약을 결론 내린다는 것이었는데 국민 스포츠 당과 스페인 축구 연합이 모두 이걸 거부한 것이다. 이러면 디 스테파노 영입을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모두 못하게 되는 것인데, 당연히 두 팀 모두 반발하고 나섰다.
이제 다시 상황은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 스페인 축구 협회와 정부의 국민 스포츠 당, 리버 플레이트와 로스 미요나리오스, 그리고 FIFA와 콜롬비아 축구 협회가 뒤엉킨 어처구니없이 복잡한 상황으로 흘러갔다. 더구나 갑자기 잘만 뛰던 디 스테파노가 복잡한 상황에 자기도 당황했는지 좀 애매한 플레이를 보여주기 시작했다. 나중에는 레알 마드리드와 비밀 협정을 맺고 태업을 한 것이 아니냐는 의심을 사게 되지만, 이 시기의 바르셀로나 팬들 사이에서는 디 스테파노를 자신들의 슈퍼 스타 쿠발라와 비교를 하면서 굳이 살 필요가 있겠느냐는 불평 불만이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이 상황에서 국제적 판단이 2개 나왔는데 리버 플레이트가 소속된 아르헨티나 축구 협회가 바르셀로나가 정당한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승인한 사건과, 그제서야 바르셀로나가 로스 미요나리오스의 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된 FIFA가 '''이전의 결정을 파기하고 모든 책임을 스페인 축구 협회로 떠넘긴 것'''이다.
이렇게 꼬인 상황이 6개월이나 지속되면서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는 협정을 맺었는데, 그 협정이 뭐냐 하면, ''''디 스테파노를 유벤투스로 이적시킨다는 것이었다.''''
이에 다시 화들짝 놀란 것이 국민 스포츠 당과 스페인 축구 협회였다. 앞의 전개를 생각해보자. 당시 디 스테파노는 아르헨티나에서 맹활약을 해서 국가 대표로 활동하다가, 로스 미요나리오스에서 활동하면서 콜롬비아 국적을 따고 콜롬비아 국가 대표로 활동한 세계 최고의 선수이다. 당시는 이런 식의 국적 이동과 대표 팀 출장이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월드컵에 좋은 선수는 안 내보내려고 난리를 치는 경우도 있었는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뛰던 시절의 아르헨티나가 이 짓을 했다. 그러고도 소용이 없어서 결국 콜롬비아로 이동했지만. 따라서 디 스테파노가 유벤투스 선수가 된다면, 스페인 입장에서는 굴러 들어온 국가 대표 스트라이커를 이탈리아에 넘겨주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결론을 내린 것이 전대미문의 판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4년 동안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소유권을 공유하고, 각각 1년씩 번갈아 가면서 뛴다'''는 것이었다.
이 협정에 반발한 것은 FC 바르셀로나, 그 중에서도 바르셀로나의 팬들이었다. 바르셀로나 팬들은 이 협정을 프랑코 정부의 모략으로 보았고, 이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모독으로 인식했다. 또한 디 스테파노의 활약 역시 기대에 미치는 수준이 아니었다. 결국 협상에 대한 불만이 폭발하였고, 바르셀로나는 돈을 받고 디 스테파노에 대한 권한을 레알 마드리드에 넘겨주었으며 카레토 회장을 포함한 임원들은 전원 사임했다. 카레토 회장이 디 스테파노를 마드리드에 보내고 사임했는지, 카레토 회장이 사임을 빙자한 파면이 된 다음에 결성된 임시 이사회가 디 스테파노를 마드리드에 이적시킨 것인지에 대해서는 언급하는 매체마다 다르다. 여튼 거의 동시인 것은 확실하다. 이후 레알 마드리드는 로스 미요나리오스, 바르셀로나에 이어서 리버 플레이트에도 이적료를 지불하면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 대한 이적 소동은 겨우 마무리된다.
본문에 적힌 과정도, 파르가스의 주장, 관련된 매체, 각 언어별 위키피디아, 소개되는 책자마다 조금씩 다 다르고, 도대체 중앙 스포츠 당과 스페인 축구 협회의 압박이 어느 단계에서 어떻게 미쳤는가에 대해서도 논란이 많다. 극렬 카탈루냐 민족주의자인 파르가스는 협상 단계에서 바르셀로나 회장과 이사까지 방해만 했고 전 과정에서 압박이 있었던 것 아니냐는 주장까지 하고 있지만 당사자의 주장이라서 좀 애매하다. 주장을 보면 '난 완벽하게 협상을 다 했는데 주변에서 방해만 해서 실패했다'는 전개이고, '악의 근원은 프랑코 정부'라는 식이다. 극렬 바르셀로나 팬들 중에서는 이 주장을 긍정하는 이들이 꽤 많지만 아무리 봐도 자기 실드 냄새가 강하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부족하다. 한편 바르셀로나와는 거리가 먼 측, 혹은 대놓고 레알 마드리드를 지지하는 쪽에서는 '바르셀로나 팬들이 이적 초기 디 스테파노의 활약이 기대에 못 미쳐서 디 스테파노를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이후 디 스테파노 사태가 FC 바르셀로나에 대한 프랑코 정부의 훼방의 증거로 꼽히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쟁점화된 것도 있으니, 논란이 끊이지 않을 수밖에 없다.
참조해보기 좋은 글

2.3. 레알 마드리드 CF


[image]
한바탕 난리를 친 끝에 메렝게스의 흰 유니폼만을 입는 것이 확정된 디 스테파노는...
적응기 따위는 가볍게 무시한 채 29골을 몰아치며 '''데뷔 시즌 피치치'''[7]를 가져감과 동시에 바르셀로나의 3연패를 저지하고 트로피를 마드리드로 가져오는 데 성공한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영입한 해에 '칸타브리아의 광풍' 프란시스코 헨토를 영입한 레알 마드리드는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의 주도 아래 차곡차곡 스타 플레이어를 더해 주기 시작, 이른바 '저승사자 군단'을 결집시킨다. 1956년에는 '나폴레옹' 레몽 코파를 영입했고, 1957년에는 우루과이 역대 최고의 센터백 호세 산타마리아가 들어왔으며, 결정타로 1958년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파트너로 '폭주하는 소령' 페렌츠 푸스카스를 영입했다. 이들은 죄다 당대 최고로 꼽히던 전설적인 선수들이다. 단적으로 레프트 윙 프란시스코 헨토는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였을 정도로 스페인에서 제일 가는 드리블러였고, 레몽 코파는 1958년 발롱 도르를 챙겨 갔다.
이렇게 되자 스페인 땅에 레알 마드리드를, 아니 디 스테파노와 푸스카스라는 악마의 조합을 막을 수 있는 팀은 없었다.[8] 그 두 명을 최전방에 내세운 마드리드는 '''라리가 우승 8회'''(1954, 55, 57, 61, 62, 63, 64)를 거두었고, 디 스테파노는 그 와중에 '''피치치 5회'''(1954, 56, 57, 58, 59), '''발롱도르 2회'''(1957, 1959)를 달성했다.[9] 라리가 MVP 4회는 그저 부록일 뿐이다.
그렇게 1964년까지 마드리드의 모든 영광을 함께 하다 선수 생활의 황혼기가 찾아오자 RCD 에스파뇰로 이적한다. 그리고 말년 중 말년에도 47경기 11골이라는 준수한 활약을 보여준 후, 그 영광스러웠던 선수 생활의 마침표를 찍었다. 참고로 하필이면 바르셀로나의 지역 라이벌인 에스파뇰로 이적해서 바르셀로나에 안 좋은 감정이 있었다는 추측이 있다. 하지만 에스파뇰에서 라 리가 초기의 라이벌이자 아주 잠깐 팀 동료이기도 했던 라슬로 쿠발라와 재회했다. 그래서 이 부분이나, 애초에 에스파뇰 창단을 FC 바르셀로나 쪽 인사들이 카탈루냐 축구 협회의 지원 형태로 후원한 것과 관련해서,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의 라이벌 구도가 카탈루냐와 카스티야의 민족적 대립 문제라는 이야기가 현대에 와서 과장된 것 아니냐는 이야기가 계속 나온다.

2.4. 지도자 경력


1964년 레알 마드리드를 떠나 RCD 에스파뇰에서 두시즌 간 활약 이후 선수생활에서 은퇴한다. 스테파노는 은퇴 이후 여러 팀의 감독을 맡았다. 그는 모국 아르헨티나의 리버 플레이트, 보카 주니어스를 리그우승에 성공시켰고 70년-71 시즌 발렌시아 감독으로 리그 우승을 이끌었으며 79-80 시즌에 발렌시아로 다시 돌아와 위너스컵을 들어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전성기를 보냈던 레알 마드리드의 감독으로 부임한 후 82-83 시즌에 리그와 코파델레이, UEFA컵, 잠깐 존속했던 리그컵까지 전부 2위로 준우승 쿼트러블로 마쳤고, 결국 다음시즌 도중 성적부진으로 레알 감독직에서 경질되었다. 1991년을 마지막으로 감독에서 은퇴한다.

3. 플레이 스타일




'''완전무결.''' 디 스테파노를 정리하는 한 단어이다. 디 스테파노는 강력하고 빠르고 기술적이고 다재다능한 선수였고 체력, 전술적 다양성, 창의성, 시야 등을 지녀 경기장 모든 곳에서 경기 할 수 있었다.
신체 밸런스는 경이로웠고, 몸놀림은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경기 90분 간 내내, 선수 생활 20년 간 내내 무한하고 역동적인 에너지를 뿜어냈다. 금빛 화살이라는 별명답게 유려하고 빠르게 공을 다루는 데 능숙했다. 그러면서도 공격이든, 중원이든, 수비진이든 전 경기장에 관여하고, 또 모든 포지션을 최고 수준으로 플레이할 수 있는 선수였다. 그는 공격하고 수비하고 패스하고 전투하듯 플레이했다. 그리고 그것을 20년간 지속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선수였다.
축구 황제 펠레에우제비우, 마라도나 등에게서 역대 최고라고 인정받는 선수이기도 하다.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근대 축구를 정립한 선수라는 평가를 받는데, 그가 현대 토탈 풋볼의 키워드 중 하나인 포지션 파괴를 1950년대에 보여줬던 선구자이기 때문이다. 디 스테파노가 있는 팀은 포지션 당 2명의 선수가 있는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포지션에 얽매이지 않고 그라운드 전체를 커버하며 뛰어다니는 선수였다. 이런 범용성 때문에 '''완전함'''이라는 단어가 상징처럼 따라다닌다. 따라서 주 포지션을 하나로 단정짓기가 곤란한데, 당대 축구의 특성상 그에게도 공격수가 최고의 포지션이긴 했으나 미드필더로서도 매우 많은 경기를 소화했기 때문이다.[10][11]
잉글랜드의 전설 보비 찰튼유러피언 컵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상대했을 때 벤치에서 처음 목격한 디 스테파노에 대해 '''골키퍼에게서 볼을 받고, 풀백에게 지시를 내리고, 경기장의 모든 곳을 지켜보며 영향력을 미쳤다'''는 감상을 남긴 바 있고, 카테나치오의 창시자이자 당시 FC 바르셀로나 감독을 역임한 엘레니오 에레라도 "디 스테파노는 최고의 공격수이자, 최고의 미드필더이자, 최고의 수비수이다."라고 했다. 또한 미겔 무뇨스 당시 레알 마드리드 감독은 "디 스테파노를 한 팀에 두는 순간, 당신은 12명을 데리고 경기하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라는 말로 그의 재능을 칭찬했다. 그리고 공식 경기에선 보여주지 않았지만, 골키퍼도 가능했다는 이야기까지 있다.[12] 공수 가리지 않고 경기장 전체를 뛰어다니다가도 골을 폭풍처럼 몰아쳐 저 스탯을 쌓았다고 볼 수 있다.[13]

4. 평가


[image][14]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를 뽑을 때 펠레, 디에고 마라도나, 요한 크루이프, 프란츠 베켄바워와 함께 5명으로 평가받았으며 이들을 순서대로 나열하여 '''펠마크베디'''라는 표현이 국내 축구 팬덤에서 유명하다.[15]
흔히 디 스테파노는 레알 마드리드 CF에서의 경력만으로 기억되지만 그는 그 이전에도 이미 세계 최고의 선수였는데, 페렌츠 푸스카스와 더불어 역대 최초의 월드 스타라고 할만하다. 요컨대 무려 20년 가까이 세계 축구계의 정점에 있던 선수로, 요즘으로 치면 99/00~01/02 시즌 즈음에 데뷔해서 지금까지도 메날두와 동급의 활약을 보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을 정도. 또한, 서른을 넘기고 발롱도르를 두 번이나 접수한 선수는 지금까지도 디 스테파노와 호날두뿐이며 초대 시상식이 열린 1956년에도 3표 차로 2위에 올랐는데 이때의 수상자는 41세의 이미 전성기가 지난 스탠리 매튜스로 공헌과 업적을 기리기 위해 그에게 초대 수상이 돌아갔을 뿐 실질적으로 이 시즌의 유럽 최고의 선수는 디 스테파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펠레의 등장 이전까지 디 스테파노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었으며, 펠레 이후 디에고 마라도나의 등장 이전까지 펠레에 이은 '''역대 2위'''를 마크하고 있었다.(펠레와 디 스테파노가 함께 현역을 뛰던 당시 즉, 펠레의 선수 생활 초기에는 펠레가 아닌 디 스테파노가 최고의 선수라고 평가 받은 시기도 존재했다.) 당장 1990년대의 축구 관련 서적만 봐도 디 스테파노의 평가는 '''펠레, 마라도나와 함께 TOP 3'''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남미와 유럽 리그를 모두 경험하였고 평정하였지만 월드컵 경력이 없는 디 스테파노, 브라질 리그와 월드컵만 보면 최고라고 할 수 있지만 유럽 리그 경험이 없는 펠레, 남미에서도 유럽에서도 월드컵에서도 활약했지만 각각을 상대와 비교해보면 어딘가 다소 부족한 마라도나의 구도가 짜여졌기 때문이다.[16] 또한 1970, 1981년도 기자단 역대 베스트 11에서 크루이프는 디 스테파노에게 밀렸으며, 1989년 슈퍼 발롱도르 투표에서도 디 스테파노는 크루이프와 베켄바워, 미셸 플라티니를 모두 제치고 수상함으로서 '''유럽 역사상 최고의 선수임을 공인'''받았다.[17]
다만 다른 선수들에 비하여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낮은 편인데, 일단 가장 앞 세대 선수라 경기력에 대한 자료 및 실제 경기를 본 사람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로는 월드컵에서의 활약인데, '''대회에서 못한 것이 아니라 출전 자체를 하지 못했다.''' 심지어 그 이유도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한 월드컵 취소, 조국의 본선 진출 실패, 국적 문제, 부상 등등 버라이어티했으며 운이 지독하게 나빴다고 할 수 있다. 때문에 디 스테파노에 대한 평가는 시기가 지나면 지날수록 떨어지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02년 FIFA 선정 20세기 최고의 축구 선수 순위에서 위 4명과 플라티니에 이어 6위에 랭크되었으며 2017년 부트발, 포포투 선정 역대 탑 100 플레이어에서 부트발에서는 역대 5위, 포포투에서는 역대 6위로 평가하였다.[18] 리스트를 보면 월드컵에서 활약했던 선수들이 100명 중 대부분을 차지하고, 월드컵 활약이 미미했던 선수는 있어도 '''경력 자체가 없는''' 선수는 한 손으로 꼽아도 될 정도이다. 그 중에서도 디 스테파노는 그 월드컵 경력 자체가 없는 선수로서 전체 6위라는 최상위의 평가를 받은 것. 발롱도르만 4번 연속으로 수상, 트레블만 2번에 월드컵 골든볼까지 수상한 리오넬 메시조차도 월드컵을 우승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평가에서 발목을 잡히는 마당에, 고작 A매치 30경기에 월드컵 0경기인 국가대표 경력을 가지고 이 정도 평가를 받으려면 어지간한 실력으로는 어림도 없다. 클럽에서의 엄청난 커리어를 비롯해서 보여준 퍼포먼스가 다른 선수들과 급을 달리 하기 때문에 이러한 평가를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월드컵 활약이 전무하다는 한계가 있었으나 그 한계를 가진 선수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보여준 선수'''라고 할 수 있다.

4.1. 유러피언컵의 제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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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1955년, 드디어 '''유럽 대륙의 최강자를 가리자'''는 취지의 유러피언 컵, 즉 현재의 유러피언컵이 시작된다. 축구 팬들은 스페인 무대를 먹어치워 버린 레알 마드리드가, 디 스테파노가 유럽 전역에서 얼마나 통할지 기대 반 걱정 반의 시선을 보냈고... '''그 유명한 유러피언컵 5연패로 귀결되었다'''[20]
그 중심에는 당연히 디 스테파노와 페렌츠 푸스카스가 있었고, 디 스테파노는 59/60 유러피언컵 결승전에서 아인트라흐트 프랑크푸르트를 상대 해트트릭을 비롯해 5년간 결승전에서만 5경기 7골 및 5년 연속 골, 득점왕 2회 수상 등 미친 활약을 보여주었으니 그에게 발롱도르 2회 정도는 오히려 부족한 헌사였다.[21] 유로피언 컵 통산 득점은 58경기 49골로, 라울 곤살레스가 깨기 전까지는 수십 년 동안 역대 최다 골 기록이었으며 경기당 0.84골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그 메시나 호날두보다도 높은 수치이다. # 여담으로 1960년 4월 21일에 열린 유러피언 컵 준결승전에서는 '''레알 마드리드의 유럽 대회 100호 골'''을 득점했는데, 상대는 아이러니하게도 FC 바르셀로나였다.
또한 당시 유러피언 컵과 현재 UEFA 챔피언스 리그가 지금의 위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대회가 정립되는 초창기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라는 슈퍼 스타의 미친 활약도 주요했다는 것 역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기에 그를 '''현대 클럽 축구의 아버지'''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4.2. 레알 마드리드 그 자체


그가 마드리드에서만 쌓은 커리어만 봐도 라 리가 우승 8회, 코파 델 레이 우승 1회, 챔피언스 리그 우승 5회, 피치치 5회, 라 리가 MVP 4회, 챔피언스 리그 득점왕 2회, 발롱 도르 2회 등이다.
특히나 마드리드에서 기록한 스탯을 보자. 라 리가에서만 '''282경기 227골'''을 넣었으며, 이런 저런 대회를 다 합치면 총합 '''307골'''이다. 이 307골은 2009년 말 라울 곤살레스가 경신하기 전까지 50여 년을 내려온 '''레알 마드리드 역대 최다 골 기록'''이었다. 전설이 전설을 계승한 것이다. 그를 빼놓고는 절대 레알 마드리드를 논할 수 없는 것이다.
현역 시절 엘 클라시코에서만 18경기 18골을 때려 넣으며 그야말로 '''FC 바르셀로나 킬러'''로 군림하였다. 앞서서 디 스테파노가 레알 마드리드와 협상을 맺고 태업한 것 아니냐는 말이 나온 이유가, 레알 마드리드 소속으로 확정된 이후, 특히 그 직후의 엘 클라시코에서부터 폭발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걸출한 공격수들이 레알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를 거쳐갔음에도, 엘 클라시코 18골 기록은 오랜 시간 동안 깨지기는커녕 추격조차 허용하지 않았던 독보적인 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근 반 세기가 되어서야 그가 올랐던 반열에 오른 라이벌 팀 선수에 의해 깨졌다. 그 이전에는 라울만이 어느 정도 근접했었다.
상술했듯 말년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명예 회장직을 맡았으며 그 영향력은 죽은 적이 없었다. 2010/11 시즌 끝자락에 라이벌 바르셀로나에게 떡실신당한 것으로 구단 내 분위기가 흉흉해지자 ''''쟤들이 더 낫네 이 한심한 것들아''''라는 식의 일갈로 구단 프런트 및 선수단 모두를 데꿀멍시켰다. 심지어 말빨이라면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무리뉴 감독조차...
다만 요한 크루이프프란츠 베켄바워같은 이후의 천재들이 역시 각각 FC 바르셀로나FC 바이에른 뮌헨이라는 팀에서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며, 클럽의 위기 때마다 평정을 유지하려고 하는 반면에 마드리드에서 그 역할을 해야 할 디 스테파노 옹은 되려 마드리드 팬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인물이라... 너무 팬들의 입장에서만 프론트 및 선수진을 대하다 보니, 무리뉴 감독 및 선수들과의 대립이 눈에 띄었던 편이다. 이런 점은 라이벌 바르셀로나의 요한 크루이프 역시 마찬가지인데, 크루이프의 이야기는 편견이건 고집이건 간에 자기 나름의 전술적 이유가 있기 때문에 조금 다르다.
자기가 몸 담았던 팀에 대한 끊임없는 애정은 좋지만, 과거의 향수에 취해 현재의 모습을 자신이 활동하던 시기에 빗대어 끊임없이 깎아내리기만 하던 모습은 팬으로서나 제3자로서나 그다지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닌지라, 이 점에 대해서 적지 않은 논의가 있었다.[22]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레알 마드리드에서 정말 미친 기록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상징성 때문에 역대 레전드 순위를 논하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 이은 2위로 평가된다.[23]

4.3. 월드컵 불운


'''나에게 두 명의 최고의 선수는 알프레도와 펠레다. 알프레도는 펠레보다는 한 걸음 정도 아래다. 월드컵에서 플레이하는 행운을 누리지 못했기 때문에.'''

쥐스트 퐁텐

쥐스트 퐁텐도 언급했지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월드컵에 단 한 번도 출장한 적이 없다. 그래서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가 누구냐고 하면 펠레 혹은 디에고 마라도나를 말하지만, 월드컵에서 뛴 적이 없는 선수 중에서 가장 위대한 선수가 누구냐고 하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이름이 빠진 적이 없다. 그리고 이 문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 대한 평가를 상당히 갉아먹은 이유가 되었다. 펠레가 유럽에서 뛴 적이 없다는 이유로 마라도나 지지자들에게 까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문제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실력이 부족해서 못 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대개 위대한 선수가 불운으로 월드컵을 못 나갔다고 하면 허약한 축구 국가대표팀 소속인 경우가 대부분인데,[24]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소속되었던 국가는 '''아르헨티나와 스페인'''이고, 양쪽 모두 상급이거나 혹은 최상급 전력이었다. 본인의 실력 역시 그런 팀에서 주전으로 뛰기에 문제가 없었고, 적응기 따위 없는 건 국가 대표로서도 마찬가지여서 스페인 소속으로 치른 데뷔전에선 해트트릭을 기록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왜 못 나갔느냐 하면...
일단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프로 입단한 것은 1943년이었다.
  • 1946년 월드컵: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열리지도 못했다.
  • 1950년 브라질 월드컵: 아르헨티나가 불참했다. 1938년 월드컵 개최권 분쟁에 더해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분쟁이 극에 달했던 시절이었다.
  • 1954년 스위스 월드컵: 당시에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아르헨티나콜롬비아의 이중국적이었고, 이 직전까지는 어느 국적을 가지고 있든 출장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25] 그런데 하필이면 이때부터 규정이 꼬이기 시작했고, FIFA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어느 국적으로든 월드컵에 출장하는 것을 막아버렸다.
  • 1958년 스웨덴 월드컵: 이때에는 1957년에 스페인 국적을 취득한 상황이어서 스페인 국적으로 참여하려고 했다. 디 스테파노는 전성기를 맞아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을 쓰고 있었고, 이 시기 스페인은 디 스테파노, 프란시스코 헨토, 바르셀로나의 레전드인 쿠발라 등 최상의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스페인은 예선에서 귀신 같이 탈락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 1962년 칠레 월드컵: 이때에도 스페인 대표 팀의 전력은 최상이었고, 당시 나이 36세였던 디 스테파노는 마지막 불꽃을 태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페렌츠 푸스카스도 국가 대표팀에 속해서 '이번에는 정말...'이라는 생각뿐인 상황이었다. 지역 예선도 무난하게 통과해서 이젠 정말 본선 경기에서 뛰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디 스테파노는 월드컵 본선 개막전 직전에 치른 경기에서 부상당한다. 결국 디 스테파노는 본선 경기에서 단 1분도 뛰지 못했다.

5. 기록



5.1. 대회 기록


  • CD 로스 미요나리오스 (1949~1953)
    • 콜롬비아 챔피언십: 1949, 1951, 1952, 1953
    • 코파 콜롬비아: 1953
    • 코파 보다스 데 오로 델 레알 마드리드: 1952

5.2. 개인 수상


  • 발롱도르: 1957, 1959
  • 발롱도르 드림팀 2군: 2020
  • 슈퍼 발롱도르: 1989
  • FIFA 100: 2004
  • 유러피언컵 득점왕: 1957-58, 1961-62
  • 라리가 득점왕: 1953-54, 1955-56, 1956-57, 1957-58, 1958-59
  • 프리메라 디비시온 득점왕: 1947
  • 카테고리아 프리메라 A 득점왕: 1951, 1952
  • UEFA 주빌리 어워드[26]: 2003
  • 스페인 올해의 운동 선수: 1957, 1959, 1960, 1964
  • 레알 마드리드 명예의 전당: 1964
  • 마르카 레알 마드리드 역대 베스트 XI: 2012, 2017
  • 마르카 레알 마드리드 UCL 베스트 XI: 2018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0, 1961, 1962, 1963, 1964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FIFA 20세기 월드팀: 1998
  • FIFA 20세기 남아메리카팀: 1998
  • FIFA 공로 훈장: 1994
  • 골든풋: 2004
  • IFFHS 레전드: 2016

6. 디 스테파노에 대한 말, 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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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구장은 그의 발 아래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어느 날, 그의 발은 더욱 커졌다.'''

- 에두아르도 갈레아노[27]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축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였어. 심지어 펠레보다도 훨씬 더 위대했지. 그는 가장 위험한 공격수인 동시에, 최고의 플레이메이커이자 미드필더였고, 훌륭한 수비수였지.'''

- 엘레니오 에레라(FC 인테르나치오날레 밀라노의 전설적인 감독, 카테나치오의 아버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팀에 있으면 22명이 뛰는 것과 같다.'''

- 미겔 무뇨스(레알 마드리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감독)

'''그는 스피드, 힘, 체력, 폭발력.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팀에 뛰어난 볼 컨트롤로 도움을 주었고, 수많은 골을 넣었다. 유럽의 왕이 있다면, 그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다.'''

- 브라이언 그랜빌(축구 작가)

'''그는 훌륭한 선수고, 다른 사람들은 그의 모든 것을 볼 수 없었어요. 그는 게임을 아는 사람이었고, 큰 선수들 사이에 있는 나를 항상 도와줬어요. 그는 최고입니다.'''

- 페렌츠 푸스카스

'''그가 없었다면 레알 마드리드가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하기도 어렵네요.'''

- 프란시스코 헨토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이 나에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후계자라는 말을 했을 때, 나는 기쁘면서도 걱정되었습니다. 그는 내가 본 가장 위대한 선수거든요.'''

- 루이스 델 솔

'''이 성공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공이 큽니다. 그는 우리의 마음 속에 남아 있을 겁니다. 그가 우리에게 보여준 것은 아무리 감사해도 부족합니다.'''

- 로렌소 산스(레알 마드리드의 전 회장)

'''이 사람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 그는 골키퍼로부터 공을 가져가고, 풀백들에게 임무를 지시하고, 필드 위 어디에서든 공을 받았다. 그토록 완전무결한 선수는 보지 못했다. 그는 마치 경기장 중앙에 그만의 사령부를 만들고 경기하는 것 같았다. 그는 절묘할 만큼 강했고, 그러한 자질들의 조합에 넋을 빼앗길 정도였다.'''

- 보비 찰튼

'''다른 플레이어들은 그냥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따르면 되었다. 그러면 게임이 쉽게 풀렸다.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다.'''

- 케어 라네지(<World Soccer>의 저널리스트)

'''힘, 그리고 가장 효과적인 패스. 시야도 넓었고, 슈팅은 물론, 컨트롤까지 완벽했어. 박스 투 박스 플레이도 좋았지. 그가 공격수로서 게임을 지배하는 능력은 혁명이었다.'''

- 마이크 랭글리(축구 저널리스트)

'''그는 틀림없이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이다. 90분 내내 뛰었고, 펠레보다 천재였다. 그의 몸과 머리가 게임을 이끌었다.'''

- 그라함 하트(<Guiness Football>의 에디터)

'''그는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야. 게임의 중심에 있었고, 골 넣는데 시간도 얼마 걸리지 않았지. 중요한 수비마저 담당했고, 어디서나 그의 엄청난 능력이 빛났어.'''

- 폴 가드너(축구 작가)

'''어떤 한 사람이 팀을 만들 수는 없다. 하지만, 그는 가능했다.'''

- 링컨 도서관

'''그라운드의 모든 곳을 담당할수 있었던 그의 능력은, 다른 훌륭한 선수들의 본보기가 되었다.'''

- 리차드 헨쇼

'''많고 많은 좋은 선수가 있었지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그 중에서도 최고였다. 골 넣는 능력뿐만 아니라, 전체적으로도. 그는 그라운드 곳곳에 있는 중앙 공격수였다.'''

- 스티브 텅

'''호나우두는 현재 아주 잘하고 있다. 하지만 그가 펠레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의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수 년이 필요하다.'''

- 요한 크루이프

'''저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를 이야기할 때마다 자부심을 느낍니다. 개인적인 생각이긴 하지만 펠레가 만약 유럽에 진출했다면 아마도 실패했을 겁니다. 반면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유럽과 남미 무대를 가리지 않고 뛰어난 활약을 펼쳤죠. 제가 펠레보다 뛰어난 선수였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펠레보다 뛰어났다는 것은 주저 없이 말할 수 있습니다.'''

- 디에고 마라도나

'''사람들은 축구 역사상 최고의 선수로 나, 혹은 디에고 마라도나를 논하지만, 저에게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가 최고의 선수입니다. 디에고 마라도나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처럼 오른발이나 머리를 써서 득점하지 못했습니다. 디에고 마라도나는 중요한 골을 손으로 넣었죠. '''

- 펠레

'''축구 역사상 가장 완전한 선수다.'''

- 에우제비우

'''그는 공격하고 수비하고 패스하고 전투하듯 플레이했다. 그리고 그것을 20년간 지속했다. 그는 모든 것을 가진 선수였다. 그는 최고 중의 최고다.'''

- 미셸 플라티니

'''진정으로 위대했던 축구 선수. 신체 밸런스는 경이로웠고, 몸놀림은 아름답고 우아했다. 나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내게 그는 그야말로 우상이었다.'''

- 알렉스 퍼거슨

'''레알 마드리드의 위대함은 선수들에게 있다. 그리고 그 중 최고는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다.'''

- 에밀리오 부트라게뇨


7. 어록


'''축구의 위대함은 피치 위의 선수들에게 있는 게 아니다. 이 자그마한 축구공에 담겨 있다.'''

'''골이 없는 축구 경기는 햇빛이 없는 오후와도 같다.'''

'''우리는 모두 축구 선수이고, 똑같은 11개 포지션에서 완벽한 플레이를 할 수 있어야 한다.'''

'''축구공은 저에게 명성을 주었고, 부를 주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내 오랜 친구여. 나는 이 축구공 때문에 가족이 있어요. 축구공은 제 아들입니다.'''

[1] 영어를 제외한 로망어게르만어권 인명의 전치사나 관사는, 발음의 변화를 반영하지 않은 채 뒤 요소와 붙여 적는다.[2] 주 포지션은 인사이드 포워드. 이례적인 수준의 올라운더이기도 했다.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의 틀을 깰 정도로 포지션의 개념을 개고 온 경기장을 누볐다. 중앙 공격수부터 하프백까지 모두 뛸 수 있는 만능 선수였다.[3] 아르헨티나콜롬비아까지 총 3중 국적이다.[4] CA 우라칸에서 뛴 것은 임대[5] 이 사람도 아주 골 때린다. 원래 바르셀로나의 스타 플레이어였다가 레알 마드리드로 직접 이적해서 역시 선수로 뛰었다. 은퇴한 다음에는 바르셀로나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레알 마드리드에서 이사로 지내기도 했고, 결국은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와서 활동하다가 죽었다. 덕분에 별명이 '''왕복 비행기'''였다.[6] 바르셀로나는 이 빚 5천 달러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서도 디 스테파노를 영입했다. 디 스테파노는 자기는 빚이 없다고 주장해서 이 빚 문제도 복잡하게 만들었다.[7] 라리가 득점왕 타이틀[8] 여담이고 풍문이지만 당시 푸스카스와는 서로들 콧대가 하늘을 찔러서 서로에게 절대 패스 안 하고 드리블 돌파해서 골을 넣곤 했다고 한다. 베이브 루스루 게릭의 관계와 비슷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둘의 경우는 루스가 마마보이 라는 등 대인배 게릭에게 시비나 투정을 부린것이며 경기장에서 이들은 역사상 최고의 듀오였다. 푸스카스와 스테파노 또한 그런 풍문이 있을 뿐이지 정말 서로에게 악감정을 품고 경기에 나쁜 영향을 주었다면 레알 마드리드는 당대 최고의 팀으로 군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참고로 아르센 벵거는 이 둘은 서로 말을 섞거나 인사도 나누지 않았지만 경기장에선 아무도 그 사실을 몰랐다며, 불화가 있던 투레와 갈라스를 같이 중앙수비수로 세우길 주저하지 않겠다고 말한바도 있었다.[9] 발롱도르는 1956년부터 제정되었는데, 첫 수상자는 47점을 획득한 40세 노장 스탠리 매튜스였고, 디 스테파노는 44점으로 2위를 획득했다. 그래서 첫 수상이라서 공로상 어드밴티지로 스탠리 매튜스가 획득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여담으로 1958년에는 팀 동료 레몽 코파가 획득했고, 1960년에는 바르셀로나의 루이스 수아레스가 발롱도르를 챙겨갔다.[10] 공격형 미드필더는 물론 중앙 미드필더까지도 많이 담당했다.[11] 특히 조국 아르헨티나에서 그를 미드필더로 분류하는 경우가 많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로 활약하던 때에 거의 미드필더로 출전했기 때문이다.[12] 디 스테파노의 동료가 그는 골키퍼만 제외하고 모든 포지션을 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는데 이에 디 스테파노가 웃으면서 아르헨티나에 있던 시절 골키퍼를 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13] 직접 플레이 영상을 보면 피지컬은 더 작지만 더 에너제틱하고 골 결정력이 뛰어난 지네딘 지단같은 스타일이다. 다만 지단은 수비가 부족해서 팀에서 더블 볼란치를 배치해줬지만 디 스테파노는 혼자서도 공수 양면에서 맹활약하는 모습을 매 경기마다 보여준다.[14] 2013년 월드 사커에서 선정한 역대 베스트 11[15] 메시와 호날두는 아직 현역이라 위치가 불분명하다.[16] 이 때 크루이프나 베켄바워 혹은 플라티니는 언급도 없었다.[17] 참고로 당시 펠레와 마라도나는 선수 시절 발롱도르 자격이 없었기 때문에 별도로 명예상을 받았다.[18] 현역 선수들을 제외하면 디 스테파노 위에 있는 선수들은 펠레, 마라도나, 크루이프 세 명뿐이다. 비록 평가가 내려왔지만 아직까지는 은퇴한 선수들 중에서 이 셋 바로 다음으로 평가받은 것.[19] 유러피언컵 트로피들와 함께 찍은 사진인데, 현 빅 이어와는 디자인이 많이 다르고 유로컵 트로피와 많이 닮았다. 위 사진은 오리지널 빅 이어로 1965/66 시즌까지 쓰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유명한 디자인의 빅 이어는 셀틱 FC가 처음으로 획득하였다.[20] 1956~1960[21] 펠레와 마라도나 이야기가 이전에 적혀 있었는데, 펠레와 마라도나는 비유럽권 선수 제한 때문에 발롱도르의 후보도 될 수 없었다. 이후에 비유럽권 선수 제한이 풀리면서, 예전 선수들에게 명예 상 개념으로 발롱도르를 수여했는데 이 수상자가 펠레와 마라도나, 그리고 황당하게도 이미 수상 경력이 있는 디 스테파노였다. 또한 1989년에 프랑스풋볼에서 슈퍼 발롱도르를 제정해서 투표를 했는데 크루이프와 플라티니를 제치고 디 스테파노가 이 상을 수상한다. 마라도나와 펠레는 각각 1996년, 2013년에 발롱도르 명예상을 수상한다.[22] 그러나 그가 바르셀로나만 만나면 박살을 내던 것도 사실이었고, 레알 마드리드 팬이던, 타 팀 팬이던 어떠한 관점에서 보아도 그 경기에서 바르셀로나가 압도적이었던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팀 레전드로써의 태도가 비판을 좀 받았을 뿐 해당 발언에 대해서는 아무도 제대로 반박을 할 수 없었다.[23] 특히나 레알 마드리드 팬들은 비스페인 출신 선수에게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은데, 이에 불만을 가진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내가 대체 여기서 뭘 더 해야 되냐"라며 울분을 토한 적 있다. 둘 다 이해가 가는 게,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는 지금의 레알 마드리드를 만든 역사 그 자체고,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는 438경기 450골 120도움이라는 미친 기록을 세웠다.[24] 발롱도르까지 받았음에도 라이베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의 한계로 번번이 예선 탈락의 고배를 마셨던 조지 웨아, 웨일스 축구 국가대표팀라이언 긱스가레스 베일이 대표적이다.[25] 당시 디 스테파노는 콜롬비아 국적으로 콜롬비아 국가 대표 팀 경기에 4경기를 출장했으나 애초에 콜롬비아 리그가 FIFA에 제대로 가입도 되어 있지 않는 등의 사정이어서 아르헨티나 대표팀으로 월드컵에 참여할 생각이었다고 한다.[26] UEFA 창설 50주년 기념으로 유럽 각국마다 1954년~2003년 동안 활약한 최고의 선수들을 뽑은 상[27] 갈레아노는 우루과이의 아기들은 '''고오오오오오오올'''이라 외치며 태어난다라는 말로도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