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교도의 난

 

白蓮敎徒-亂
청나라 가경제 때에 일어난 대반란(1796 ~ 1805)이다. '삼대의 봄'[1]을 끝으로 성세가 끝났음을 암시한 첫 사건.
백련교 신도들이 중심이 되어 일으킨 난이라 하여 백련교도의 난이라 한다.
반란의 주요무대는 후베이 성(湖北)·쓰촨 성(四川)·산시 성(陜西)의 3성(省)이 접경을 이룬 크고 넓은 산악 지대였다. 이 지대는 청초 이래 화난·광둥 등 인구가 조밀한 지방으로부터의 이주자가 많고, 일시적으로는 옥수수를 비롯한 잡곡 생산과 목재·광산업이 성황을 이루었다.

그러나 후일 청조의 행정·재정 지배가 시행되고, 시비(施肥) 기술의 미발달에 따른 토지 생산력의 고갈도 현저해졌으므로 궁핍화된 민중 사이에 불온한 움직임이 뚜렷해졌다.

이러한 배경에서 백련교가 빈농과 반부랑자적(半浮浪者的) 노동자 사이에 퍼져 1796년 후베이 서북부의 봉기를 발단으로 하여 각지에서 반권력(反權力) 폭동을 일으켰다. 이 반란은 통일적인 조직, 목표, 지도자가 결여되어 있었으나, 교묘한 게릴라전으로 청조를 곤경에 몰아넣었다. 당시 청조는 묘족 반란이 일어나 팔기군을 보내 진압중이어서 초기에 백련교도의 난을 진압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후에 진압을 시도했지만 이미 세력은 커져있었고 고전하게 된다. 게다가 막대한 은을 소모하면서 주둔지가 있는 곳의 물가는 폭등했다.
결국 청은 주민들을 소개하고 성을 쌓아 그곳으로 수용하여 반군과 주민들을 분리시킨 끝에 겨우 진압하게 된다. 더군다나, 반란 진압의 공로자는 청조의 타락한 정규군[2]이 아니고 오히려 지방의 유력가들이 소집한 의용병인 ‘향용(鄕勇)’이었다. 결국 청조는 반란 진압에 막대한 전비(戰費)[3]와 10년이라는 세월을 소비하고 심각한 재정 위기가 초래되었다.
이들의 분파인 천리교 신도들은 아예 가경제를 암살하기 위해 자금성에 침투했다가 황태자였던 도광제와 전투 끝에 물러나기도 했다. 이를 계유지변이라 한다.

[1] 강희제 - 옹정제 - 건륭제 시기. 청나라의 최전성기를 이르는 말이다.[2] 이 시기에 오면 팔기군과 녹영으로 대표되는 청의 관군은 전투력이 크게 떨어져 무용지물에 가깝게 되었다.[3] 건륭제의 총애를 받던 허션이 횡령하고 착복한 액수도 꽤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