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리교
1. 개요
19세기 중반 나라현에서 지역유지의 아내 나카야마 미키(中山みき, 1798-1887)[2] 가 창시한 일본의 신종교(新宗敎).[3] 우리나라에서도 드물게 길거리를 지나가다 천리교인이 박자목(拍子木)이라는 짧은 나무 막대기 두 개를 서로 맞부딪쳐 딱딱 소리를 내거나 손춤을 추면서 포교하는 광경을 볼 수 있다.
천리왕(天理王)을 생명과 환생을 주관하는 유일신으로, 나카야마 미키를 교조이자 (격은 좀 낮아도) 천리왕과 함께 신자들을 보살피는 신적 존재로 받든다. 또한 미키가 살았던 집 터, 오늘날 일본 나라현 텐리시(天理市)에 있는 천리교 본부 자리를 터전, 일본어로는 지바(地場)[4] 라고 부르며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텐리시란 지명도 여기에 천리교(텐리쿄) 본부가 있다는 뜻으로 붙었다.
일본에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교파신토로 법적 공인을 얻었지만, 패전 이후로는 신토와 관계없는 별개의 종교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지금도 '''의례나 교리 등에서 신토적 요소가 두드러지며, 불교의 영향도 일부 보인다.''' 천리교 초기단계에서는 불교적 요소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주장이 있고, 19세기 일본 농촌사회에 맞춰진 종교라는 평가도 있다. 19세기 말 - 20세기 초에 걸쳐서 일본에서는 미신적인 종교, 혹은 불교의 적대자로 상당한 어그로를 끌면서 유명해졌으나, 지금은 일본에서도 대다수 보통 사람들은 천리교를 잘 모른다.
구한말에 일본인 포교사들이 조선으로 들어와 천리교를 포교하였다. 그리하여 일본 종교 중에서는 보기 드물게 현대 한국에도 미약하나마 명맥을 잇는다. 1960-70년대까지는 언론에서도 나름대로 주목할 정도로 교세가 확장되었으나, 정부가 억압하고 다른 국민들도 반일감정 때문에 흰눈으로 보는 관계로 교세가 축소되고 분열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2. 일본/한국 천리교의 현황
좁은 의미에서 천리교는 일본 나라현 텐리시 미시마정(三島町) 터전에 교회본부를 둔 '종교법인 천리교'를 가리킨다. 당연하게도 텐리시에서는 천리교도의 비율이 매우 높은데, 사람마다 말이 좀 다르지만 최소한 인구의 반은 될 것이라고 하니 사실상 종교도시이다. 매년 천리교단은 텐리시에 15억 5천만 엔 상당의 막대한 금액을 기부하며, 일본의 사회운동단체에서는 천리교단과 텐리시가 유착되었다는 의혹을 제기한다. 통계에 따르면 일본에서 신자 수는 120만 명 남짓이라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 이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천리교 고위간부들은 나라현 고액납세자 명단에 단골로 들어간다.
넓은 의미에서 천리교라고 할 수 있는 단체들도 존재한다. 이들은 종교법인 천리교가 교조 미키의 가르침을 무시하고 왜곡했다고 주장하며 거부한 단체들이다. 이들 단체들 중 대부분은 천리교라는 이름을 교명으로 사용하지 않는다. 2001년에 독립한 천리교 토요후미 교회(天理教豊文教会)란 단체가 천리교란 이름을 대놓고 사용하자 종교법인 천리교 측이 소송을 걸었으나 오히려 패소하였다. 법정에서 종교법인 천리교 측은 '천리교'라는 단어가 '''천리교 본부의 상표'''이며 독점적인 것이라고 주장했지만, 2004년 일본 법원은 "천리교라는 호칭은 나카야마 미키의 가르침을 따르는 종교단체를 가리키는 것이다." 하면서 종교법인 천리교 측 요구를 기각하였다. 종교법인 천리교에서 갈라진 종교단체들은 많지만 교세가 미미하여 별 영향력이 없다.
종교법인 천리교의 교주는 신바시라(眞柱)라고 부른다. 교조 미키의 외손자 나카야마 신노스케가 초대 신바시라가 된 이래로 그 자손들이 대대로 직위를 세습한다. 2018년 시점에서 4대 신바시라가 재임 중이다. 천리교단이 상징으로 쓰는 가몬도 원래는 나카야마 가문이 사용하는 집안 상징이었다.
일제시대 식민지 조선에서 천리교가 일본 신종교 중에서는 가장 교세가 컸다. 혈의 누를 쓴 친일문학가 이인직(1862-1916)이 천리교 신자였고 장례식도 천리교식으로 치렀지만, 한국 천리교에서는 쉬쉬하는 이야기.
대한민국의 천리교는 양분되었다. 원래는 <대한천리교>만 있었으나, 대한천리교의 토착화 정책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1980년대에 <천리교 한국교단>이란 이름으로 분열되었다. 대한천리교는 일본의 종교법인 천리교와 관계를 단절하고 복장이나 의례 등에서도 가급적 왜색을 배제하는 방향을 취했다. 천리교 한국교단은 일본 천리교 본부와 관계를 유지하며 왜색을 여전히 유지한다.
이름도 한자어고 개량 한옥 건물을 사용하는 경우가 흔하여 모르는 사람들은 자생적인 소수종교로 착각하기 쉽지만, 어디까지나 일본 신토를 기본으로 한다. 한국 천리교의 신자가 몇 명인지는 신뢰할 만한 통계가 없다. 두 교단의 자체주장에 따라 합산하면 약 20만 명이지만, 통계청의 종교인구통계를 감안하여 따지면 절대로 20만 명이 될 수 없고, 아마도 3만 명 이하일 가능성이 크다.
3. 일러두기
1. 아래의 설명은 모두 텐리시에 본부를 둔 '종교법인 천리교'를 기준으로 한다.
2. 천리교 본부에서는 1956년에 고본 천리교 교조전(稿本 天理敎敎祖傳)이라는 이름으로[5] 미키의 공식적인 전기를 발표했다. 아래에 있는 미키의 생애는 기본적으로 이 서적의 내용을 요약하여 서술하되, 이 내용에 반대하는 주장이 있을 경우 함께 소개하였다. 이하에서는 약칭하여 ‘고본 교조전’이라 한다.
3. 날짜는 음력이라고 명시하지 않는 한, 전부 양력으로 표기한다. 음력 날짜를 쓸 경우에는 당시 일본에서 사용한 칸세이력(寛政暦)ㆍ텐포력(天保暦)을 따랐다. 일본의 음력 날짜는 동시기 조선에서 사용한 시헌력(時憲曆) 날짜와 다를 수 있다.
4. 나이 표기는 만나이라고 명시하지 않는 한, 전부 세는나이로 쓴다.
5. 고유명사 음역은 국립국어원 일본어 표기법을 따르되, 어두에 カ행ㆍタ행이 오는 경우에도 거센소리로 표기하였다. (단, 도쿄나 다다미 등 우리나라 대중들에게도 잘 알려진 낱말은 이 원칙에 어긋나더라도 알려진 대로 썼다.) 필요에 따라 최대한 일본어 발음에 가깝게 음역해야 한다면 최영애-김용옥 표기법을 따랐다.
6. 지명에 사(寺)ㆍ촌(村)ㆍ국(国) 등 한자가 붙으면 그 부분만 한국식 한자음으로 붙여 썼다(예: 善福寺 → 젠푸쿠사). 고유명사라 하더라도 한자 표기를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어 의미가 잘 전달된다면 음역하지 않았다.
7. 우리나라와 일본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나 변화를 병기하여, 미키의 생애나 천리교의 조직 정비와 함께 역사의 흐름을 가늠할 수 있도록 하였다.
4. 천리교의 기원과 발전
교단의 공식적인 입장에 따르면, 천리교는 1838년 (음)10월 26일, 일본 나라현에서 나카야마 미키라는 41세 아주머니가 신들림 현상을 겪어 남편이 아내를 신령의 사당으로 바치면서 시작하였다.
4.1. 신들림 이전의 삶
천리교 교조 나카야마 미키(中山みき)는 1798년 (음)4월 18일[6] , 야마토국(大和国) 야마베군(山辺郡) 산마이덴촌(三昧田村)[7] 에서 마에가와 한시치마사노부(前川 半七正信)의 장녀로 태어났다. 마에가와 집안은 영주로부터 칼을 차고 성씨를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받기도 한, 평민들 중에서는 잘 나가는 곳이었다.
아버지 한시치마사노부는 당시 평민들 중에서는 드물게 글을 어느 정도 아는 사람이었고, 미키를 서당에 보내 역시 글을 깨치도록 하였다. 당시에 여자가 글을 배우도록 함은 드물었다. 종종 비교되는 인물인 오모토 교조 데구치 나오(1837-1918)만 하더라도 까막눈이었다.
미키 본인의 회고에 의하면, 이 시기에 미키는 여자에게 주어진 일은 야무지게 잘 하지만 사람들과 얼굴 맞대며 놀기는 좋아하지 않는 조용한 소녀였다고 한다. 미키네 집안은 일본 불교종파인 정토종을 대대로 믿었다. 미키는 남달리 신심이 깊어 어린 나이에도 염불을 빨리 외워 따라 하고 비구니로 출가하기를 원하였다.
1800년, 조선에서 순조가 즉위했다.
1810년(13세), 마침 나카야마 집안에 시집 간 고모 키누(きぬ)가 아들 젠베에의 배필로 미키를 원하였으므로, 친정 부모들은 미키를 이해(1810)에 인근 마을 쇼야시키촌(庄屋敷村)에 사는 나카야마 젠베에(中山善兵衛 1788-1853)와 혼인시켰다. 키누가 미키의 고모이므로 그 아들 젠베에는 미키의 고종사촌이다. [8] 처음 부모가 미키에게 혼인 이야기를 꺼내니, 미키는 "저는 비구니로 살고 싶습니다." 하고 거절하여 부모가 놀랐다고 한다. 하지만 부모가 설득하므로 결국 미키는 어른들에게 시집 간 이후에도 집안일이 끝난 뒤 염불을 할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청하고 혼인하였다.[9] 당시 일본의 풍속에 따라 식만 올리고 정식 부부생활은 1812년(15세) 무렵에 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사실여부는 알 수 없다.
미키는 시집 간 이후로 매우 열심히 일하여 결혼한 지 3년 만인 1813년(16세)에 시어머니에게서 주부로서의 경제권을 넘겨받았을 정도로 일찍 인정을 받았다. 이토록 일찍 경제권을 넘겨받음은 이례적이라고 한다.
1811년, 조선에서 홍경래의 난이 일어났다.
1816년(19세), 미키는 첫 아이를 낳았으나 이름을 붙이기도 전에 아기가 사망하였다. 아이가 죽은 뒤 집 근처에 있는 정토종 사찰 젠푸쿠사(善福寺)[10] 에서 장례식을 치르고, 영혼에게 포수동자(泡水童子)라는 계명(戒名)을 주었다.[11] 동자(童子)라는 호칭 때문에 죽은 아이가 남자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본 교조전에는 포수동자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미키는 포수동자를 잃은 뒤 더욱 종교에 의탁하고 싶었는지 바로 그해(1816년)에 젠푸쿠사에서 오중상전(五重相伝)이라는 법회가 열리자[12] 여기에 참석하였다. 당시 오중상전에 참석한 사람은 전부 19명이었는데 미키가 가장 젋었다. 미키는 법회에서 연예승안지보선정니(蓮誉勝岸智宝禅定尼)라는 계명을 받았다.[13]
정토종에서 오중상전은 아무나 받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것이지만, 그 무렵에는 그 의미가 많이 퇴색하여 꽤나 설렁하게 행했다고 한다. 미키는 정말로 진지한 마음으로 임했지만 꽤 실망했던 듯, 이후로는 여기에 참석한 일을 별로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 대신 인근에서 활동하는 저명한 슈겐자 나카노 이치베에(中野市兵衛 1792-1870)를 만나 49일간 진언종의 가르침을 받는 등, 점차 정토종보다는 진언종에 더 가까워진 듯하다. 슈겐자는 크게 천태종 계열 본산파(本山派)와 진언종 계열 당산파(当山派)로 나뉘는데, 나카노는 당산파 사찰 우치야마에이큐사(内山永久寺)에 몸담은 사람이었다.
나카야마 집안은 대대로 쇼야시키촌의 촌장을 세습하고 쌀 100섬을 거두는 부유한 유지였으나, 미키의 시집살이는 별로 행복하지 않았다. 시가가 대대로 마을 유지라 일이 많고 고된데 남편은 가정에 그리 충실하지 않았다고 한다. 미키가 포수동자를 잃고 오중상전에 참석한 그 해(1816) 남편이 카노라는 하녀와 사통하였다. 그런데 카노가 본부인의 자리를 탐내어 미키가 먹을 찌개에 독을 탔다. 미키가 먹고 심한 복통에 시달리며 병석에 눕긴 했으나 큰 탈 없이 회복하였다. 사실이 드러난 뒤 미키가 관대하게 넘어간 덕분에 카노는 별다른 해코지를 받지 않고 나카야마 집안을 떠났다.
1817년, 닌코 천황이 즉위했다.
1821년(24세)에 미키는 비로소 제대로 성장한 첫 아이를 낳았다. 장남 나카야마 슈지(秀司)였다. 전해에 사망한 시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장남의 이름을 젠에몬(善右衛門)이라고 하였지만, 훗날 장남이 ‘슈지’라고 개명하였다.[14]
1828년(31세), 이웃집 여자가 가난한 데다가 젖도 나오지 않아 그 집 아기가 굶어 죽게 되자, 미키가 아기를 받아 대신 젖을 물려주었는데 그만 그 아기가 천연두에 감염되었다. 미키는 '내가 맡아서 키워주다가 아기가 죽는다면 큰일이다.' 하고 생각해서, (오늘날의) 미시마 신사를 비롯하여 토다이사(東大寺)나 진언종 개조 쿠카이(空海) 대사를 모신 사당에 찾아가 백일간 치성을 드리며 '제 아들 하나를 남기고 딸 둘의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만약 그것으로 부족하다면 제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하면서 치성을 올렸다고 한다.[15] 다행스럽게도 맡아 키우던 아기는 병이 나았을 뿐만 아니라 마마 흔적도 없었다고 한다.
1830년(33세)에 차녀가, 1835년(38세)에 4녀가 유아사망하였다.[16]
1837년(40세), 도쿠가와 이에요시가 막부의 12대 쇼군이 되었다. 텐포 대기근 때문에 오시오의 난을 포함하여 봉기가 여럿 일어났다.
이해 음력 12월 미키는 막내딸 코칸을 낳았는데, 천리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미키가 1828년에 옆집 아기가 죽을 위기에 처하자 '딸 둘의 목숨을 바치겠다.'고 치성했기 때문에 딸들 중 2명이 죽어야 했다. 그러나 이는 너무 잔인하므로 천리왕은 차녀가 죽어 4녀로 환생하도록 하고, 4녀가 죽어 막내딸 코칸으로 태어나게 했다. 즉 육신으로는 두 명이 죽고 한 명이 살았으나, 영혼으로는 단지 한 명이 고생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코칸은 미키의 추종자들에게 '''젊은 신(若い神)'''이라고 불릴 정도로 위상이 컸다.
미키는 코칸을 낳은 뒤로 건강이 부쩍 나빠졌다. _몸이 흔들리는 것처럼 느낄 때가 있고 두드러지게 기억력이 감퇴했으며 종종 기절하였다._ 게다가 코칸이 태어나기 약 두 달 전, 장남 슈지는 어머니를 따라 보리밭에 일하러 나갔는데 갑자기 왼쪽 다리에 통증을 느꼈는데, 그 후로 계속 다리가 아파서 제대로 일할 수가 없었다. 슈지의 병이 낫지 않자 슈겐자 나카노 이치베에를 불러 치병의례를 행하였으나, 그 순간만 차도가 있을 뿐 시간이 지나면 다시 돌아왔으므로 몇 번이고 의례를 거듭했다. 그뿐 아니라 미키는 허리가 아파오고 남편 젠베에는 갑자기 눈이 침침해졌다. 대기근이 들어 식량은 줄어들고, 봉기가 일어났다는 소문이 들리고, 가세는 예전만 못하고, 아기들도 죽고, 부부와 장남이 몽땅 병에 걸렸으니 정말로 암울하게 느꼈을 것이다.
나카노와 나카야마 집안은 우환을 없애려면 특별히 큰 의례를 거행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4.2. 신들림 이후의 삶
1838년(41세), 미키는 처음으로 신들림 증상을 보였는데, 기록에 따라 구체적인 정황이 다르다. 고본 교조전은 미키가 신내림 받을 때의 정황을 아래와 같이 서술했다.
천리교단은 남편이 미키를 신령에게 바친 사건을 천리교의 시작으로 여겨 1838년을 원년(1년)으로 하는 릿쿄(입교立敎)라는 연호를 사용한다. 2018년은 입교 191년.
천리교단의 다른 초기 기록은 미키가 첫 신들림 증상을 보이던 날을 고본 교조전과 다르게 설명한다. _교단의 공식적인 전기가 상당히 첨삭, 혹은 윤색되었을 가능성이 높다._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에 있는 '입교의 날' 항목을 참조.
아무튼 신내림을 받은 이후, 미키는 대략 3년간 집안일에서 일절 손을 떼고 다만 창고에 들어가 기도하거나 하다가 밤이 되면 자기 방으로 돌아와 잤다. 이렇게 창고에 들어가 있을 때에도 신들림 증상을 겪었다고 한다.
1842년(45세), 미키에게 가난해지라는 계시가 내렸다고 한다. 그 후 미키는 신령님이 원하신다고 주장하며 안채를 허물게 하고 가재도구를 빈민에게 팔았으며 전답을 정리하였다. 당연히 집안사람들은 맹렬히 반대하였으나 미키는 단식하며 뜻을 관철하였다. 조상 대대로 유지한 재산이 이렇게 없어지는 꼴을 남편 젠베에는 견디기 힘들었다. 젠베에는 잠자는 미키에게 칼을 들이대고 깨워서 "사람들에겐 놀림받고 친척들에겐 얼굴을 들 수 없다. 귀신이라면 당장 나가고 광인이라면 정신을 차려라." 하고 협박했다. 미키가 뭐하는 짓이냐고 묻자 남편은 정말 무섭다고 대답하였다. 시가(媤家) 친척들은 모여서 미키를 채찍질하거나 연기를 피워 숨을 못 쉬게 괴롭혀서 악령이 빠져나가게 하려고 하기도 했다. 미키가 밖으로 나가니 마을 아이들이 "여우 귀신 들린 할머니다." 하면서 놀렸다는 기록도 있다. 미키의 말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미키를 잡귀에 홀린 미친 사람으로 본 것이다. 1855년(58세)에는 3정보(9천 평) 남아있는 땅까지 팔아 집만 남았다고 한다.
1846년, 코메이 천황이 즉위했다.
1849년, 조선에서 철종이 즉위했다.
1852년(55세), 3녀 하루가 카지모토 소지로(梶本惣治郎)와 혼인하였다.
1853년(56세), 남편 젠베에가 향년 66세 나이로 사망했다. 젠베에가 사망한 뒤, 당시 17세였던 막내딸 코칸이 신령의 명을 받아 슬픔을 참고 오사카까지 가서 "나무천리왕님."이라는 기도문을 외우며 카미나나가시(神名流し)[28] 를 하며 포교했다고 한다.
이해에 도쿠가와 이에사다가 막부의 13대 쇼군이 되었지만, 미국 해군 제독 페리가 군함을 이끌고 요코하마로 내항하여 큰 파장을 일으켰다.
1854년(57세), 미키의 3녀 하루가 첫 임신을 하였다. 하루는 해산하러 친정으로 찾아왔다. 미키는 딸이 순산하도록 간단한 주술적인 행위를 하였는데, 임신한 배에 숨을 3번 불고 3번 쓰다듬어 주는 것이었다. 출산하던 날, 지진이 일어나 산실의 벽이 무너질 지경이었는데도 하루는 별 탈 없이 첫 아들을 낳았다.[30]
같은 마을에 있던 임신한 부인이 이를 지켜보고는 자기에게도 똑같이 해달라고 부탁하였다. 미키는 알겠다고 답하고 주술을 해주면서 이 외의 다른 주술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이 부인은 그 외에도 일본 전통의 이런저런 금기를 지켰다. 부인은 출산한 뒤 열이 나서 한 달쯤 병석에 누웠다. 병석에서 일어난 뒤 부인이 따지고 들자, 미키는 "의심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고 답했다. 그 부인이 또다시 임신하여 미키의 말만 믿고 따르자 이번에는 별 탈 없이 해산했다고 한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지자 미키에게 부인들이 순산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는 소문이 돌았다. 먼저 임신한 부인들이 찾아오고, 점차 다른 병에 걸린 사람들도 찾아오고, 한명 두명 추종자가 생기고 미키의 종교적 주장도 신앙으로 받아들이면서 종교집단으로 발전하였다. '''천리교 역사에서 질병치유는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천리교단은 미키가 처음 신들린 1838년을 천리교가 창시된 해로 간주하지만, 천리교의 진정한 시작은 미키 주변으로 병자들이 모이기 시작한 1854년 이후라고 해야 합당할 것이다. 이때부터 미키는 비로소 '귀신 들려 미친 할머니'에서 '한 종교의 교조'가 될 수 있었다. 추종자들은 미키를 흔히 '살아있는 신령님(生神樣)'이라고 불렀다. 추종자들이 코칸을 '젊은 신(若い神)'이라고 부름도 미키의 호칭에 대응한 것.
물론 미키를 찾아온 모든 환자가 전부 미키의 추종자가 되지는 않았다. 미키를 찾아온 환자들 중 대부분은 다시 찾아오지 않았다. 미키의 손으로 병이 나은 사람들 중 일부가 한명 두명 추종자가 되다가, 어느 순간부터 신자들이 부쩍 늘어났다.
1858년, 도쿠가와 이에모치가 막부의 14대 쇼군이 되었다. 미키는 이해에 환갑(61세)이 되었다.
1859년, 요코하마가 개항장으로 지정되었다. 가난한 어촌 마을에 불과하던 요코하마는 이후 서구문물이 들어오는 거대도시로 발전하였다.
1860년, 최제우가 동학을 개창했다.
1861년, 김정호가 대동여지도를 펴냈다.
1863-4년 무렵부터 미키를 따르는 추종자들의 숫자가 늘어났다.
1863년(66세), 조선에서 고종이 즉위했다.
이다 이와지로(飯田岩治郎)라는 6살 소년이 양부모의 손에 이끌려 미키를 찾아왔다. 이다는 처음에는 복통을 앓다가 이게 심해지자 목숨까지 위험해져서 미키의 소식을 듣고 왔다. 미키가 이다의 배를 어루만지자 병이 나았다고 한다. 이때 이다는 미키에게 이른바 '물 수훈'이라는 것을 받았는데, 근처에 있는 우물물을 마시면 병이 낫는다는 것이었다. 이다의 이야기는 미키의 추종자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이다는 미키 사후 '물 집터 사건'의 중심인물이 되었다.
1864년(67세), 최제우가 사형을 받았다.
(훗날 초대 혼세키가 된) 목수 이부리 이조가 미키를 찾아왔다. 이부리 이조는 아내가 아이를 낳은 뒤 건강이 나빠지자 미키를 찾아왔다가 열렬한 추종자가 되었다. 아내가 낫자 이부리는 미키에게 보답하고자, 미키의 허락을 얻고 다른 추종자들과 의논하여 조그만 건물을 지어 11월 25일에 상량식을 올렸다. 이날은 미키가 신령의 집으로 바쳐진 (음)10월 26일이라, 이를 겸하여 크게 축하했다. 이부리 이조가 세운 이 건물을 근행장소라고 부르는데, 오늘날 감로대 자리의 서쪽 언저리에 있었다. 근행장소 윗방에는 고헤이를 신체(神體)로 하여 모시고, 미키는 같은 방 서쪽 단 위에 앉아 동쪽을 바라보며 사람들을 맞이하였다고 한다. 이부리 이조가 만든 이 건물이 신전의 원형이다. 미키와 가족들은 옆에 있는 다다미 6장짜리 방에 머물렀다.
추종자가 많아지자 슬슬 기성종교, 관청을 상대로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다.
근행장소 상량식 때 야마나카 추시치(山中忠七)[32] 는 다른 참석자들에게 내일 자기 집으로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다고 하였다. 이튿날(11월 26일) 슈지와 이부리 이조 등 12명이 야마나카네 집으로 가기 전 미키에게 인사를 올렸더니, 미키는 "신사 앞을 지날 때 예배를 보아라." 하였다. 그네들이 오야마토 신사(大和神社) 앞을 지날 적에 미키가 한 말을 떠올리고는 지고 가던 북 등을 내려놓고 연주하며 "나무천리왕님." 하고 기도문을 낭송하며 예배를 보았다. 신사에 있던 신관들이 이 광경을 보고 뛰쳐나와 악기를 빼앗고 예배를 중단시켰다.
마침 오야마토 신사에 있던 신직통솔관 모리야 치쿠젠노카미(守屋筑前守)는 사건을 목격하고 "유서 깊은 신사에서 범속한 악기를 연주하며 듣도 보도 못한 신의 이름을 읊조리다니 매우 괘씸하다." 하며 일행을 3일간 가두어두었다. 이 소식이 알려져서 쇼야시키촌과 인근 마을에서 촌장 대리로 사람을 보내어 사죄하자, 모리야는 다시는 이러한 짓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도록 하고 풀어주었다. 일행이 구금된 동안 사람들이 백방으로 뛰어다닌다고 돈도 상당히 썼다. 코칸이 이런 광경을 보고 "차라리 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중얼거렸더니 미키가 코칸을 꾸짖었다.
불교 사찰도 천리교도들을 거부하였다. 부처님의 가피력을 입지 않아도 극락왕생하지 않고 인간으로 환생할 수 있다는 교리는 당시 일본인들의 사후세계와 장례를 담당하는 불교에 대한 도전이었다. 또한 미키는 천리교를 믿으면 신령님의 도움으로 병이 나으므로 의사가 따로 필요없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신사의 신관들은 물론 지역 사찰의 승려들, 의사들과도 척을 지고 공권력으로부터도 어그로를 끌었다. 미키의 추종자들은 열정에 넘쳐서 공권력, 혹은 종교계만이 아니라 천리교를 믿지 않는 다른 주민들과도 상당히 충돌한 듯하다. 꼭 정치적인 이유만이 아니더라도 천리교가 탄압받음은 필연이었다.
1865년(68세), 미키에게 눈병을 치유받은 적이 있는 이마이 스케조(今井助造)[33] 라는 사람이 자기가 사는 하리가벳쇼촌(針ヶ別所村)[34] 이 본(本)이고, 미키가 사는 쇼야시키촌은 하리가벳쇼의 영험이 드러난 말(末)에 불과하다고 주장하였다.
미키는 이 일에 분노하여 한 달간 금식한 뒤, 노구를 이끌고 이부리 이조와 야마나카 추시치를 데리고 하리가벳쇼촌까지 찾아가 스케조네 집에 모신 고헤이를 없애도록 하였다. 교조전에 따르면 스케조는 결국 미키에게 사과했다고 한다. 하지만 스케조가 바로 그해에 천륜왕교회(天輪王敎会)라는 천리계 종교를 세워 분파했으므로, 스케조가 결코 미키에게 승복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이 사건은 미키의 종교적 권위에 대한 최초의 내부적 도전이었고, 천리교 역사에는 최초의 이단으로 기록되었다.
1866년(69세), 조선에서 제너럴 셔먼호 사건이 일어났다.
이해에는 미키에게도 많은 일들이 있었다. 미키가 이때부터 신악가를 쓰기 시작했고, 3녀 하루가 (훗날 1대 신바시라가 되는) 3남 신노스케를 낳았다. 이해 가을에 코이즈미촌(小泉村)에 있는 후도원(不動院)[35] 이라는 사찰의 슈겐자들이 미키네 집으로 몰려와 미키와 설전을 벌이다가 북을 찢는 등 행패를 부리고 갔다. 이들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야마나카 추시치 집에도 찾아가 폭행한 뒤 [36] 대관소에 가서 미키 무리를 고발하였다. 미키의 추종자들과 기성종교/관청간 관계가 매우 험악했음을 알 수 있다. 게다가 슈겐자들의 행적을 보면, 미키의 추종자들은 종교와 관련해서는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 듯하다. 이런 일을 겪은 뒤 슈지는 정식 종교단체로 승인받아야겠다고 생각했다.
1867년(70세), 메이지 천황이 즉위하고,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막부의 마지막(15대) 쇼군이 되었다.
정부의 탄압을 피하고자 미키의 장남 나카야마 슈지가 중심이 되어 교토에 있는 요시다(吉田) 가문[37] 에 청원하여 포교허가를 받은 덕분에 잠시 탄압을 피할 수 있었다. 이때 슈지가 요시다 가문에 청원하면서 제출한 문서에 모시는 신의 이름을 전륜왕명신(轉輪王明神)이라고 했음이 특기할 사항이다.
이해 말, 대정봉환으로 막부가 막을 내렸다.
이듬해(1868)에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었다. 일본 정부가 신토계를 관할하는 요시다 가문의 권리를 폐지하자, 천리교단이 받은 허가도 자동적으로 무효가 되어 다시 탄압이 시작되었다. 메이지 정부는 신불분리령을 내려 일본에서 신토와 불교가 습합된 것을 정책적으로 분리하려고 했다.
메이지 정부는 천리교가 국가신토와 어긋난다 하여 상당히 껄끄럽게 여겼다. 천리교에서 정립한 천리왕이란 신은 고사기와 일본서기로 대표되는 기기신화, 혹은 제도권 신토는 물론이고 심지어 기존의 일본 민속에도 존재하지 않는 신이었다.[38] 또한 천리교가 내세우는 종교적 질병치유 역시 일본의 근대화 정책과 어긋나므로 지식인 계층은 천리교를 좋지 않게 여겼다. 메이지 정부는 미키와 가족들을 유치장에 가두거나, 압수수색을 하거나, 신자들이 많이 모이면 해산시키며 활동을 억압하였다.
이해 말, 메이지 천황이 교토에서 도쿄로 거처를 옮겼다. 법률적인 논란이 있긴 하지만 통상적으로는 수도를 천도하였다고 간주한다.
1869년(72세)부터 미키는 (후일 천리교의 경전이 되는) 친필을 쓰기 시작했다.
1870년, 메이지 정부는 대교선포(大教宣布) 조서를 발표했다. 여기서 메이지 천황은 신토를 보호하고 국가의 대계로 삼겠다고 밝혔다. 이 조서 발표로 국가신토가 일본의 국교가 된 것으로 본다. 일본 각지에서 불상이 파괴되고 승려들이 환속하거나 신사의 신관이 되었다. 이 일은 종교적으로, 그리고 문화적으로 일본 민중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정부는 국가신토를 각지에 잘 보급하고자, 각지의 유력한 신사를 골라 민중을 계몽(?)하도록 하였다. 미키가 살던 곳 근처에서는 (과거에 신사 앞에서 예배를 보다가 신자들이 구류되기도 했던) 오야마토 신사가 국가신토를 보급하는 곳이 되었다.
1871년, 메이지 정부는 폐번치현을 단행함으로써 기존의 번을 폐지하고 중앙집권적으로 나라의 체계를 바꾸었다. 조선에서 신미양요가 일어났다.
1872년(75세), 카지모토(梶本) 집안에 시집 간 3녀 하루가 42세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
1873년(76세), 미키는 이부리 이조에게 나무로 감로대의 모형을 만들라고 지시하였다. 높이가 대략 6자쯤 되었는데, 만든 뒤 창고에 보관하였다.
1874년(77세) (음)10월 중 어느 날[39] , 미키는 신자 두 사람을 오야마토 신사로 보내 "이곳에서 모시는 신은 어떤 분이십니까?" 하고 묻도록 하여 또다시 어그로를 끌었다. 신자들은 오야마토 신사에 가서 미키가 지시한 대로 신관들에게 질문하였다. 신관들이 고사기ㆍ일본서기에도 기록된 대신(大神)이시라고 대답하자, 신자들은 그분이 어떤 수호를 하시냐고 물었다. 신관들은 이들이 미키의 추종자라고 눈치채고 "그런 헛소리를 하는 자는 쇼야시키촌의 할멈(미키)일 것이다. 너희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무엇이냐?" 하고 되물었다. 신자들은 미키가 쓴 친필을 보여주면서 천리왕이야말로 온갖 수호를 해주시는 분이라고 큰소리를 쳤다.
이 일은 확실히 어그로를 끌었다. 두 사람이 돌아오자 오야마토 신사의 신관이 인력거를 타고 미키를 찾아왔으나 슈지가 이들을 돌려보냈다. 이튿날 이소노카미 신궁(石上神宮)[40] 신관 5명이 미키를 찾아와 설전을 벌였다.
동년 12월 23일에 나라현청이 엔쇼사(圓照寺)[41] 로 미키를 소환하여 처음으로 신문하였다. (소환날짜가 음력으로는 11월 15일이므로, 미키가 오야마토 신사에 신자들을 보내 어그로를 끌고 그 다음 달이다.)
나라현청이 하필 사찰로 소환한 이유는 미키에게 악귀가 들렸다면 엔쇼사의 영험으로 눌러버리기 위해서였다. 관청은 25일에 신앙을 금지하고 물품을 압류하였다. 26일부터 미키는 죽는 날까지 버선을 포함하여 모조리 붉은 옷만 입었다. 미키는 붉은색 옷에 신이 있다고 말했는데, 자신을 신의 현신으로 드러내려는 의도였던 듯하다. 미키가 입던 붉은 옷자락을 잘라 증거부라고 부르며 추종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관습도 이때 시작했다. 이후 미키는 죽는 날까지 십수 차례 소환받아 신문받거나 진술서를 쓰거나 유치장에 수감된다.
엔쇼사에 지체 높은 여인이 문적(주지)으로 있다보니, 야마무라 어전(山村御殿)이라고 높여 부르기도 한다. 산기슭에 있는 높으신 분의 거처라는 뜻. 일본식 발음으로는 '야마무라 고텐'인데, 한국 천리교인들은 이를 귀에 들리는 대로 써서 '야마무라 고뗑' 혹은 '야마무라 고뎅'이라고 할 때가 많다.
1875년(78세) 6월 29일, 미키가 신탁을 받았다. 미키는 신탁에 따라 집터 안을 깨끗이 청소한 뒤, 뜰을 거닐다가 마치 발이 땅에 붙은 듯 움직일 수 없는 지점을 찾아 표시하였다. 다른 사람들을 불러 시험해보니 역시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하였다고 한다. 미키는 그 곳이 천리왕이 인류를 창조한 자리라고 말하고, 거기에 감로대(甘露台)[42] 라는, 생김새가 육각형 아령과 비슷하고 높이가 2.5 m쯤 되는 구조물을 돌로 만들라고 명령했다. 감로대를 만들던 중 석공이 도망가서 작업을 중단했다. 고본 교조전은 석공이 도망갔다고 설명할 뿐 이유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다른 설명에 따르면 경찰이 석공을 붙잡아 때리면서 이런 일에 협조하지 말라고 협박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년 9월 24일, 나라현청이 미키와 장남 슈지에게 소환장을 보내었다. 그때 슈지가 병석에 누워 나갈 수 없었으므로, 이튿날 미키는 슈지의 대리자와 함께 출두하여 신문을 받았다. 그러나 27일에 막내딸 코칸이 향년 39세(만 37세)로 사망했다. 이 소식을 접하고 경찰은 미키에게 사흘간 시간을 주어 잠시 집으로 돌려보냈다. 미키는 죽은 딸의 손을 잡고 슬퍼하였다. 만약 코칸이 일찍 죽지 않았다면, 미키 사후에 이부리 이조가 아니라 코칸이 혼세키가 되어 천리교의 영적인 부분을 이끌었으리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친필에 그런 의사가 어렴풋이 드러난다나. 취조 결과, 미키는 벌금을 물었다.
1876년(79세), 조선과 일본이 강화도 조약을 맺었다.
이해에 미키는 훗날 2대 혼세키가 된 우에다 나라이토(당시 14세)를 만나 3일 만에 병이 낫게 해주었다고 한다. 이후 우에다 집안은 천리교 신앙을 깊이 받아들였다.
슈지는 집 근처에 목욕탕과 여관을 개설했다. 미키를 찾아온 사람들은 쇼야시키촌에 있는 친척, 혹은 아는 사람 집에 숙박했다. 방문객들이 많아지자 더 이상 동네 주민들이 숙박을 시켜주기 힘들어서 원성이 커졌다. 슈지가 목욕탕과 여관을 만듦은 동네 주민들에게도 좋고, 찾아온 사람들에게도 좋고, 나카야마 집안에도 돈이 되어 좋았다.
1877년, 사이고 다카모리가 중심이 되어 세이난 전쟁이 일어났다.
1879년(82세)부터 신을 가리키는 호칭을 바꾸겠다는 친필이 나왔다. 원래 미키가 친필에서 쓰키히(月日)란 말을 사용했는데, 이는 일본 민간신앙에서 천신(天神)을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하지만 앞으로는 더 이상 쓰키히란 말을 쓰지 않고 어버이신이라는 말을 사용하겠다고 하였다. 이해에 우에다 나라이토를 집터에 머무는 사람으로 받아들였다.
1880년(83세), 슈지가 주도하여 일본 진언종 산하에 전륜왕강사(転輪王 講社)[43] 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미키의 추종자들은 신토에 기울어졌던 슈지가 불교로 돌아온다고 좋아했으나[44] , 막상 미키는 정부의 허가를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매우 강경하게 반대하며 슈지에게 화를 냈다고 한다.
이듬해 1881년(84세), 슈지가 환갑 나이로 사망하였다. 만으로는 59세였다. 슈지가 사망하자 전륜왕강사를 유지할 동력이 사라져서 흐지부지되었다.
1882년(85세), 일본에서 콜레라가 유행하고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났다.
이해 5월 12일, 경찰이 찾아와 만들다 만 감로대를 비롯하여 나카야마 집안의 물건들을 압수하였다. 미키는 이 일에 대하여 매우 분노하여, 친필에서 "어버이 신의 마음을 무시한 이상, 어버이 신의 어떤 보복이 있을지 모른다." 하고 적었다. 교인들은 감로대가 있던 자리에 돌을 쌓아 표시했다. 신자들은 이 돌에도 영험이 있다고 생각해서 다른 돌을 놓고 대신 원래 있던 돌을 가져가서 아픈 부위에 문지르곤 했다고 한다.
이해(1882) 초대 신바시라 나카야마 신노스케가 나카야마 집안의 호주가 되었다. 천리교단은 이때부터 신노스케가 신바시라로 취임했다고 간주한다.
이해 10월 20일(음력 9월 9일 중양절)[45] 밤에 아비코(我孫子) 사건이 일어났다. 안 그래도 좋지 않았던 천리교의 이미지가 더욱 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즈미국(和泉国) 센보쿠군(泉北群) 토요나카촌(豊中村) 아비코(我孫子)[46] 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아비코 사건이라 부른다.
쓰지카와 이와마쓰(辻川岩松 당시 21세)[47] 는 1881년에 병에 걸렸다가 천리교 신자의 도움으로 병이 나은 뒤 열렬한 신자가 되었고, 지인인 시부타 토요지로(渋田豊次郎 당시 18세)에게도 천리교 신앙을 전파하였다. 두 사람은 미키를 만나 고헤이를 받았다. 쓰지카와는 고헤이를 지극정성으로 모셨지만, 시부타는 부담스럽게 여겨 자기가 받은 고헤이를 목욕탕에서 불태웠다. 쓰지카와가 환자를 위해 고헤이 앞에서 기도하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돌아 명성이 높아졌다.
82년에 콜레라가 일본에 유행하여 시부타도 감염되었다. (음) 9월 9일 중양절 밤, 시부타는 쓰지카와를 불러 도와달라고 청하였다. 쓰지카와는 "네가 감히 신이 계신 고헤이를 불태웠기 때문에 벌을 받아, 콜레라 균이 몸 속에 들어간 것이다." 하였다. 시부타는 자기 몸 속에 뭔가가 있어서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몸에 혹이 나게 한다면서 잘라달라고 부탁하였다. 쓰지카와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천리왕에게 기도하며 혹을 잘랐으나, 시부타는 오히려 죽고 말았다.
이 사건이 오사카 매일신문 등 언론에 보도되자 천리교의 이미지는 더 나빠졌다. 신자들도 이 소식을 접하고 혼란스러웠던 듯 미키에게 질문하여 대답을 받기도 하였다. 무관심보다는 악평이 낫다고, 언론의 관심이 집중된 틈을 타 천리교는 존재감을 드러내고자 하였다. 사건의 당사자인 쓰지카와는 살인혐의로 기소되었으나 최종적으로는 무죄판결을 받았다.
1884년,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1886년(89세) 2월 18일, 미키가 아흔을 바라보는 노구에 이치노모토 경찰분소에 끌려가 3월 1일까지 12일간 유치장 신세를 졌다. 마지막 경찰서행이었다.
미키는 유치장 안에서도 신들림 증세를 보였다. 유치장에서 어느날인가 미키가 문뜩 "마디 마디에 새싹이 돋는다." 하는 말을 툭 내뱉었다. 순사가 이 말을 듣고 버럭 소리를 지르자 친척 꼬마아이가 "할머니, 할머니." 하고 부르면서 미키를 말리려고 하였다. 하지만 미키는 "나는 할머니가 아니라 하늘의 장군이다." 하고 대답했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당당해서 보던 사람들이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고 한다.
이해 5월, 천리교단이 신도본국(神道本局)[48] 산하에 들어가 국가적 공인을 얻을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신노스케가 이에 대하여 미키에게 의견을 물었으나, 미키는 여지껏 고난을 받고도 견뎌왔는데 왜 이제 와서 포기하겠느냐고 답하며 단호하게 거부하였다.
1887년[49] 1월 4일부터 미키의 건강이 급격히 나빠졌다. 신자들은 미키가 쾌유하기를 바라며 1월 18일부터 2월 17일까지 매일 밤 찬물로 목욕재계하고 근행을 올렸다. 그 전까지 사람들이 모여 근행을 하려고 하면 경찰들이 달려와 강제로 해산시키곤 하였으나, 미키가 오늘내일하기 때문인지 경찰들은 신자들이 많이 모였는데도 그냥 내두었다.
동년 2월 18일(음력 1월 26일) 금요일 오후 2시, 나카야마 미키가 거처에서 사망했다. 향년 만 88세, 세는나이로는 90세, 미키가 처음 신들린 지 만 48년 2개월, 이치노모토 분소 유치장에서 풀려난 지 만 11개월째였다.[50]
아직 교단이 법적 공인을 얻지 못하였으므로 신관 모리야 히데오(守屋秀雄)[51] 를 재주(斎主)로 삼아 6일장으로 신토식 장례식을 치른 뒤 (미키가 오중상전을 받은) 젠푸쿠사에 있는 나카야마 집안 묘지에 안장하였다. 이때 미키에게 올린 시호는 '마미치이야히로코토시리메노미코토(真道弥広言知女命)'[52] 이다.
사후 5년 뒤인 1892년, 터전 뒷산인 토요다산(豊田山)에 묘지를 만들고 여기로 이장하였다. 이후 토요다산 묘지는 천리교인들이 묻히는 종교묘역이 되었다. 비석에도 미키의 시호를 새기고 제문에서도 이를 사용하였으나, 일본 패전 이후 이른바 '복원' 이후로는 이를 사용하지 않는다.
천리교 본부는 미키가 사망한 오후 2시를 기려 매일 오후 2시마다 사이렌을 울린다. 또한 1887년을 1년으로 헤아려 10년째 되는 해마다 교조(敎祖) XX년제(年祭)라고 칭하며 성대하게 행사를 치르는데, 2016년에 교조 130년제가 있었다. [53]
미키는 원래 사람이 천리왕에게 받은 수명이 115세라고 주장했기 때문에, 신자들은 너무나도 당연하게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키는 115세를 모두 채우고 사망하리라 생각하였다. 따라서 미키가 90세에 숨을 거두자 신자들은 매우 동요했다. 이부리 이조는 초대 혼세키가 되어 ''''미키가 신자들을 돌보고자 정해진 수명에서 25년 일찍 숨을 거두었고, 지금도 신자들을 돌본다.''''는 신탁을 받았다. 이후 이부리 이조는 살아있는 동안 천리교단의 영적인 부분을 이끌었다.
역사적인 관점으로 보면 '''이부리 이조는 미키가 기대보다 일찍 죽어 신자들이 받은 충격을 최소화하고, 신바시라가 교주가 되는 징검다리 역할을 하였다.''' 이부리 이조가 인격적으로 문제가 없고 야망은 없으되 인망은 높은 사람이었음도 천리교단의 입장에서는 행운이었다.
천리교는 미키가 죽은 뒤에도 환생하지 않고 그 혼령이 여전히 터전(천리교 본부 자리)의 교조전(敎祖殿) 건물에 머문다고 믿는다. 미키의 죽음을 '''은신(隱身)'''이라고 표현하는데, 눈에 보이는 육신을 숨겼다는 뜻이다. 교단은 지금까지도 교조전에 조석으로 식사를 올리고 냉온방을 하며 옷을 지어 바치는 등 미키가 여전히 살아있는 듯이 대한다.
4.3. 미키 사후 천리교단의 변화
1880년대 후반부터 천리교가 당시 일본 사회에서 주목받는 신종교로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그러나 폐해도 적지 않아서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런 야유가 돌았다.
이 말은 천리교 신악가 제1절인 "악한 것을 제거하고 도와주소서, 천리왕님이시여."(悪しきを払うて助けたまえ天理王命)[54] 하는 구절을 바꾼 것이다. 한국어 번역으로는 얼른 느껴지지 않지만, 일본어로 읽으면 신악가 1절이 '''"아시키오 하로오테 타스케 타마에, 텐리오노미코토."'''인데, 비아냥거리며 패러디한 문구는 '''"야시키오 하로오테 타우리 타마에, 텐빈보노미코토."'''라서 매우 흡사하다. 비아냥거린 문구의 첫 음절이 '아'가 아니라 '야'인 것에 주의.'''집터를 제거하고 논을 팔아주소서, 하늘의 가난뱅이님이시여.'''
(屋敷を払うて田売り賜え天貧乏命)
신악가 제1절은 천리교도들이 근행이나 월차제를 할 적에 자주 외우는 구절이다. 이를 슬쩍 바꾸어 '집이며 땅이며 다 팔아치워, 돈은 천리교에 바치고 집안은 쪽박을 찬다.'는 뜻으로 던진 야유인데, 100년이 넘은 지금도 일본의 천리교 안티들이 천리교를 비꼬고자 자주 인용한다.
1888년, 교조 1년제를 거행하였으나 경찰이 찾아와서 참석자들의 이름을 적고, 나카야마 집안 식구들을 제외한 사람들을 모두 내쫓았다. 같은 해에 천리교는 신도본국(神道本局)에 등록되었다. 신도본국은 신토 관계자들이 모여 만든 기관인데, 반쯤은 정부 산하나 마찬가지였다. 천리교는 신도본국에 소속됨으로써 국가의 통제를 받는 신토 계열 종교단체로 법적 지위를 얻었다. 그 대신 본부를 도쿄로 옮겼으나, 이듬해에 다시 텐리시로 되돌아왔다.
1889년, 대일본제국 헌법이 발표되었다.
1891년, 교조 5년제를 거행하였다. 이때는 경찰이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질서통제에 협조했다고 한다.
1892년, 토요다산(豊田山) 묘지로 미키의 무덤을 이장하였다.
1892년 말 - 93년 초, 부산에 처음으로 천리교 전도사가 들어가 조선에서 첫 포교를 시작하였다.
1894년, 조선에서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청일전쟁이 발발, 95년에 끝났다.
1896년, 교조 10년제를 거행하였다. 이후로 천리교단은 서기로 XXX6년이 되는 해마다 교조 XX년제를 거행한다.
이해 4월 6일, 내무대신 요시카와 아키마사(芳川顕正)의 이름으로 내무부 비밀훈령이 경찰에 내려왔다. 그 내용은 대략 아래와 같다.
하지만 천리교에서는 이런 훈령이 내려온 진짜 이유가 청일전쟁 당시 전시협력에 시큰둥해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좀 더 적극적인 친정부 정책을 취하기로 하였다. 아침/저녁 근행에서 신악가의 가사를 바꾸고, 감로대 근행을 규제하며, 신토식으로 신단에 신경(神鏡 신령한 거울)을 안치하며 신앙대상의 호칭을 천리대신(天理大神)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향후 또다시 전쟁이 벌어질 경우 이에 적극 협조하기로 하였다.요즘 천리교 신자들이 남녀혼음 등 풍속이 흐트러지고, 신령한 물과 부적을 주고 미신을 퍼트리며 의학을 무시하고 함부로 기부하는 등 폐해가 확산된다. 경찰은 한층 더 엄격히 시찰하여 비행을 적발하는 즉시 처분하고, 기부금에 대해서는 보고하라.
이해 12월, 천리교 신자 수가 313만 7천 명으로 집계되었다.
1897년, 미키에게 복통을 치유받았던 이다 이와지로(飯田岩治郎 1858-1907)가 물 집터 사건(水屋敷事件)을 일으켰다.
이다 이와지로는 미키에게 병을 치유받고 물 수훈을 받은 이후 신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사실 처음 복통을 치유받은 이후로도 몇 번 몸이 더 아팠는데 그때마다 미키를 찾아와 다시 치유받았다고 한다. 미키가 사망한 다음날 찍은 사진에도 이다가 있고, 교회회의를 이다 집에서 하는 등 중요한 인물이었다. 1892년에 헤이안(平安) 지교회 초대회장으로 부임했다. 미키에게 받은 물 수훈은 천리교인들에게 유명해서, 다른 계통 신자들도 근처까지 오면 이다에게 들러 물을 받아가곤 했다. 1894년에 처음으로 신들림을 겪었고, 96년에는 꿈에 미키가 나타났다고 하며 친필(오후데사키)를 썼다. 97년부터 이다는 자신이 받은 '물 수훈'이 사람이 아니라 자기가 사는 집에 내린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다 이와지로의 말에 따르면 미키의 쇼야시키촌은 불 집터이고 자기가 있는 곳은 물 집터라고 하였다. 이다가 쓰는 친필 역시 혼세키 이부리 이조의 '지도말씀'과 서로 충돌하였다. 고참 신자들 중에서도 이다를 편드는 사람들이 제법 있어 천리교는 내분을 겪었다. 이다는 미키가 자기 목숨을 50세까지 늘려주었다고 하면서 50세가 되는 1907년에 죽음을 준비하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1899년부터 천리교는 국가가 관리하는 신도본국의 산하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교파신토로 자립하자고 계획하였다. 국가의 호의를 받기 위해서 더욱 친정부적인 방침으로 기울었다.
1902년, 영일동맹이 채결, 1923년에 효력을 상실하였다.
1903년에 메이지 교전(敎典)을 발간하였다. 천리교의 초기경전인데, 메이지 시절에 발간했다고 메이지 교전이라고 부른다. 교전은 천리교의 교리해설서에 가까운데, 여기서 천황가의 조상을 신으로 묘사함으로써 국가신토에 영합했다. 교단은 총력을 기울여 신도본국으로부터 독립하자고 방침을 세웠다.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났다. 천리교 본부에서는 "천리교는 천황과 천황의 선조들을 신이라고 믿는데, 교조님(미키)이 신이라고 가르치는 불량교사들이 있다." 하면서 천리교인 약 1400명을 파면했다. 미키와 오랜 인연이 있고, 또 미키에게 칭찬받은 적도 있는 유명한 사람인 이즈미다 토키치(泉田藤吉)[56] , 만다 만키치(萬田萬吉)도 포함되었다. 천리교는 신자들에게 '빚을 내어서라도 전시국채를 구입하라.'고 요구했다. 그래서 신자들은 국채 250만 엔어치를 구입하였고, 초대 신바시라 신노스케는 러일전쟁이 끝난 이후 훈6등 훈장을 받았다.
1906년, 천리교는 교조 20년제를 지냈다. 이때 읽은 제문(축문)에서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 있었다.
천리교가 자기네 교리의 독자성을 고수하기를 포기하고 역사를 왜곡하며 완전히 국가신토에 영합했음을 알 수 있다.천황은 살아있는 신이시며 교조님은 천황님의 자손입니다. 의사나 승려 등이 공격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경찰이 교조님을 체포하였지만, 교조님은 필사적으로 "천황은 살아있는 신이십니다." 하고 가르쳐주셨습니다....
1907년, 이부리 이조가 사망했다. 혼세키 직은 우에다 나라이토가 계승하였지만, 나라이토는 이부리 이조와 같은 권위를 얻지 못하고 어둠 속으로 묻혔다. 천리교단은 이부리 이조 이후로 혼세키는 없다고 주장한다. 교단의 영적인 부분을 담당한 혼세키가 사라지자 교단에 반발하여 갈라진 분파가 더욱 늘어났다. 이 무렵부터 천리교인들 사이에는 신탁이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이 퍼졌다. 천리교 내부에서 말하던 신탁이 이루어지지 않자 점차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아졌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1908년 일본 정부는 천리교를 합법적이고 독립적인 교파신도로 인정해주었으나, 그 대신 천리교의 교리와 의례ㆍ행정에 깊이 관여했다. (혹은 천리교 쪽에서 정부의 눈치를 보며 알아서 기었다.) 포교사들이 나대지 못하게 억제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통제하였다. 일본 내부에서 천리교가 통제받자 포교사들은 자기 열정만 믿고 무작정 조선으로 포교하겠다고 나가기도 하였다.
합법적인 교파신도로 인정받은 뒤에도 일본 국민들 사이에서 인식이 아주 좋지 않아, '천리교 같은 미신적 종교는 교파신토로 인정해주면 안 된다.'는 청원이 빗발쳤다.
나카야마 미키는 어느 날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뜬금없이 '75년이 지나면'이라고 하니 언제를 말하는지 이론이 있을 수 있지만 1912년을 가리킬 확률이 높다. 미키가 자기가 말처럼 115세를 살았다면 1912년에 사망했을 터이고, 미키가 신내림받은 해를 1년으로 삼아 헤아리면 75년째가 1912년이다. 천리교 포교사들은 이 말을 믿고 전도에 박차를 가했다.75년이 지나면 일본 전체가 천리교에 귀의할 것이며, 그 뒤로는 세계로 퍼져나가 천리왕을 전도할 것이다.
(七十五年たてば、日本あらあらすます。それから先は、世界隅から隅まで天理王命の神名を流す)
1910년, 한일병탄이 이루어졌다. 천리교단이 의례를 양력으로 거행하기로 하였다.
1912년, 다이쇼 천황이 즉위하였다. 미키가 정말로 115세를 살았다면 이해에 사망했을 것이다.
1916년, 교조 30년제가 있었지만 신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여기서 천리교인들이 많이 실망했기 때문에 '신탁은 더 이상 없다.'는 생각이 더욱 힘을 얻었다.
1921년, 제1차 오모토 사건이 일어났다. 일본 정부는 오모토 교단이 힘을 기울여 교토부 아야베시에 짓던 장생전(長生殿)을 파괴하였다.
1926년, 쇼와 천황이 즉위하였다.
1935년, 2차 오모토 사건이 일어났다. 특히 2차 오모토 사건이 매우 강경하였다. 일본 경찰은 오모토 교단이 총기를 감춰두고 있으리라 생각하여 거의 반란세력을 진압하는 수준으로 본부를 수색하고, 데구치 오니사부로 등 교단의 교위 인사들을 연행하였다. 공권력은 법률을 반쯤 무시하고 오모토 교단을 탄압하여, 한때 교인수가 자칭 백만에 달했던 오모토가 거의 붕괴할 지경에 처했고 연행된 간부들 중 사망자가 발생했으며, 고문 때문에 데구치 나오히(오모토 3대 교주)의 남편 히데마루는 정신병에 걸렸다.
오모토의 개조 데구치 나오는 평생 가난하게 살면서 가족들을 먹여 살리느라 고생한 할머니였다. 그래서 나오가 신들림하여 쓴 경전 오모토신유(大本神喩)[59] 에는 곳곳에서 이 세상(일본)을 짐승의 나라, 어둠의 세계라고 비난하며 한바탕 뒤엎어야 한다는 생각이 드러난다. 일본 정부는 오모토신유의 이런 점을 두고 ‘천황 폐하께서 다스리시는 일본은 비난하다니, 천황 폐하를 비난하는 것’이라면서 교단을 거의 붕괴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당시의 일본 신종교 여러 교단은 오모토가 어떻게 쳐맞는지 실시간으로 목격하고 매우 '얌전히' 일본 정부ㆍ군부의 군국주의 정책에 순응하였다. 이 점에 대해서 천리교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게다가 미키가 쓴 친필과 신악가에도 일본 정부에게 책이 잡힐 만한 아래와 같은 구절이 있었다.
오모토가 핍박받았듯이 천리교도 이 구절 때문에 핍박받을 가능성이 있다 하여 교단은 이 부분을 부랴부랴 감추고, 근행이나 월차제 때에도 전혀 낭송하지 않았다.온시대 모든세계 인간들을 살펴보아도
신의뜻 아는자는 바이없도다
천리교 한국교단이 사용하는 신악가 번역문에서 인용함.
원래부터 천리교는 일본 정부의 정책에 잘 순응했지만, 오모토가 어떻게 되는지 보고서는 더욱 말을 잘 들었다. 러일전쟁, 태평양 전쟁에도 팔굉일우(八紘一宇)를 위해 헌신하라고 신자들을 독려했다. 현대의 천리교는 이 시기를 두고 흔히 응법(応法)의 길이라고 표현한다.[60]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야 비로소 천리교는 국가의 통제에서 벗어났다.
일본이 패전한 1945년, 2대 신바시라 나카야마 쇼젠이 주도하여 '국가의 통제를 받던 시기에 변형된 의례ㆍ교리 등을 미키 시절로 되돌리는 작업을 하겠다.'고 선언했는데 이를 '복원(復元)'이라고 부른다. 그 작업의 일환으로 먼저 메이지 교전을 폐지하였다. 쇼젠은 메이지 교전을 ‘외부인의 눈을 의식해서 만든 것’이라고 설명하고, 이제는 ‘겉과 속의 차이가 없는 교전을 만들 것’이라고 하였다. 새 교전은 1949년에 발간되었다.
하지만 천리교 내부에서도 아직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다는 비판하고, 황도신토에 물들어 천리교 본연의 가르침이 왜곡되었다고 주장하며 많은 단체들이 독립해 나오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복원의 일환으로 천리교단은 석제 감로대가 있던 자리에 목제 감로대를 만들어 설치하였다. 패전 이전까지는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나무 감로대도 제대로 세울 수 없었다.
1956년, 천리교단은 고본 천리교 교조전(稿本 天理敎敎祖傳)을 출간하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책은 완성본이 아니지만, 출간한 지 60년이 넘어가는데도 아직도 완성판이 나오질 않는다. 이 또한 일본의 천리교 안티들이 비웃는 부분.
복원과 관련하여 야시마 히데오(八島英雄 1929-2014)라는 사람이 천리교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야시마 히데오는 1959년에 텐리대학을 졸업하고 1967-68년에는 수양과에서 고존 교조전을 가르치는 강사로 일하였다. 또한 2대 신바시라 쇼젠이 복원을 주도할 당시 이를 도왔다. 1969년, 일본 천리교에서 발행하는 천리시보(天理時報)에서 차별기사가 실려 큰 문제가 생겼다. 천리시보에서는 당시에 '천리건강장수법'이라는 글을 연재하였다. 당시 천리교 교전에는 "날 때부터 온전한 몸을 받지 못한 사람은 전생에 마음에 티끌이 끼어 이를 없애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는 구절이 있었다고 한다. 구체적으로 이 구절을 인용하며 어떻게 서술했는지는 몰라도 부락민들은 이 기사가 자신들을 차별하는 내용이라고 판단, 천리교단에 극렬하게 항의했다. 부락민으로 태어남은 전생에 마음 티끌을 제대로 없애지 못한 탓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61] 사건이 커지자 천리교단은 문제 기사가 실린 천리시보를 회수하고, 표통령이 교제되고, 부락민들에게 사절단을 보내는 등 난리도 아니었다.
야시마는 차별기사 문제로 시끄러운 가운데 표통령으로부터 교조의 평등사상을 알려달라는 부탁을 받고 <나의 교리공부>(私の教理勉強)라는 글을 연재했다. 이 글은 반응이 좋았지만, 당시 천리교 교회본부의 교리해석을 곳곳에서 비판하였기에 갈등이 생겼다. 그 뒤에도 야시마가 쓴 책 문제로 "우익이 무섭지 않아?" 하는 협박을 받기도 하였다.
야시마는 1974년 도쿄에 있는 천리교 혼쓰마하라 분교회(天理教本嬬原分教会)의 회장으로 취임하고, 79년에 이치노모토 분서 사적보존회(櫟本分署跡保存会)[62] 를 발족하여 대표가 되었다. 야시마는 교리해석ㆍ의례복원ㆍ역사고증의 문제로 천리교 본부와 지속적으로 충돌하였다. 1985년에 대한천리교가 감로대를 예배대상으로 삼기로 하고 천리교 본부에 통보하자, 천리교단은 그 책임을 야시마에게 물어 1986년에 혼쓰마하라 분교회장 직위를 박탈하였다.[63] 이 일로 야시마는 천리교 본부와 독립하여 법정 공방을 벌였다. 야시마의 주장을 뭉뚱그려 야시마 교학(八島敎學)이라고 부른다.
야시마의 아버지는 한때 도쿄부 스미다구(墨田区)에 있는 혼아즈마(本吾嬬) 분교회의 교회장이었다. 그 인연으로 야시마는 이 교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혼아즈마(ほんあづま)에 자기 주장을 실을 수 있었다. 그 때문에 야시마 히데오를 '혼아즈마의 야시마'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국 천리교에서는 귀에 들리는 대로 '홍아즈마'라고 쓴다. [64] 일본의 종교법인 천리교는 야시마 히데오를 이단으로 간주하고, 신자들에게도 접촉하거나 서적을 읽지 말라고 요구한다.
야시마 히데오와 천리교단이 법정공방을 벌일 적에, 천리교 본부의 일부 인사가 법정에서 "천리교는 야시마를 이단이라고 보지 않는다." 하고 증언하기도 하였다. 물론 똑같은 법정에서 이단이라고 주장한 사람도 있으므로, 교단 내부에서도 야시마를 어떻게 보아야 할지 혼란이 있었던 모양이다. 물론 지금은 야시마는 이단이라는 결론으로 정리되었다.
대한천리교가 토착화 작업을 하면서 이치노모토 분서 사적보존회의 자료를 많이 참고하였고, 2001년에 독립한 천리교 토요후미 교회 역시 감로대 근행하는 법을 야시마에게서 배웠다. '''대한천리교 교단도 복원 문제나 야시마 교학에 직접적으로 영향받아, 토착화를 시도하는 이론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대한천리교에서 신각 대신 감로대를 사용함도 야시마 교학을 근거로 하였다.
세계대전 이후, 천리교단은 정말로 종교의 자유를 얻었지만 현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조금씩 교세가 위축되는 중이다. 아래 '교회조직' 항목 참조.
4.4. 입교의 날
나카야마 미키의 생애는 천리교 신자들에겐 '''고본 교조전'''을 통해 널리 알려졌다. 하지만 고본 교조전이 미키의 삶을 사실대로 서술했는지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고본 교조전에 따르면, 상술한 바와 같이 집안에 우환이 뒤따르자 슈겐자를 불러 1838년 음력 10월 24일부터 의례를 거행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24일, 미키가 무녀 대신 신대를 붙잡고 기도하다가 스스로를 진실의 신이라 주장하는 신격이 내려와 26일 오전 8시까지 음식도 먹지 않고 버티므로, 어쩔 수 없이 젠베에가 미키를 신령의 사당으로 삼겠다는 것에 동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교단의 다른 초기기록에는 이야기가 상당히 다르다. 미키가 1881년에 나라 경찰서에 제출했던 수속서(手續書)에 따르면 그 때의 장면은 이러하다.
고본 교조전이 묘사하는 바와 사실관계가 다르다. 이에 따르면 미키는 24일 밤에 신내림 증상을 보여 기억을 잃었고, 그래서 25일에 미키가 정신을 차렸을 때에는 이미 가족들이 미키에게 들린 잡령을 내쫓는다고 주술행위를 하고 있었다. 또한 25일 밤에 미키에게 신령들이 다가와 자기를 소개하며 미키에게 말을 걸었다.24일 밤에 가슴이 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튿날 25일 아침에 눈을 뜨니, 머리맡에 작을 칼을 든 사람이 있었고, 또다른 사람은 신대를 가지고 있었다. 집안 사람들은 미키가 마치 여우나 너구리의 영이 들린 것으로 생각하고 이런저런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날 밤 하늘 위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큰 바위에 눌린 듯한 느낌이 나고 이상한 목소리로 이상한 것이 다가와 "나는 쿠니노토코타치(国之常立命)[65]
이다."라고 하였다. 그 뒤에도 몸은 가볍게 되지 않고 신령들이 바꾸어가며 들어와 차례대로 열 분이 왔다.이 열 분 신령님을 전륜왕(轉輪王)이라고 한다.
1885년에 미키가 한 말을 받아 적었다고 하는 신빙략기(神憑略記)에서는 상황묘사가 또 다르다.
신빙략기 내용은 수속서보다는 고본 교조전에 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차이가 있다. '''특히 훗날 교단에서 유일신의 이름으로 정립한 천리왕이라는 신명이 여기서는 그저 집터를 신격화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하므로 주목할 만하다.'''내(미키) 나이 41살 되던 해 10월 24일에 처음 스스로 신대를 잡고 기원을 했다. 3일 동안 밤낮으로 꿈과 같이 지내는데, 무슨 소리카 크게 나더니 코신신(荒振神)께서 내려오셨다. 여쭈어보니 나의 신은 하늘의 장군님이라고 하셨다. 이번에는 이 사람의 몸을 신령의 사당으로 삼고 싶다. 나는 '구니노토코타치'라고 하는 신이다. 다음에 또 오겠다고 하시며 올라가셨다.
잠시 있으니 또 말씀이 내렸다. 정말 무서운 기세인데 삼가 여쭈어보니 오모타리(面足命)이라고 하셨다. 내 모습을 보이면 무서운 신이다. 머리가 열둘 있는 뱀의 형상이라고 하셨다. 이제 이 집터와 어버이, 자식을 모두 신령의 사당으로 삼기 위해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하셨다.
너무나 무서워서 코신신 님, 물러가주십시오 하였더니 크게 노하여, 이 집터와 어버이 자식을 받는다면 삼천세계를 도와주겠으나, 그렇지 않는다면 이 집은 대가 끊어질 것이라고 하셨다. 이 말을 듣고 어쩔 수 없다고 남편 젠베에도 바치겠노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인간에게는 신의 이름을 주지 않기 때문에, 이 집터의 지명에 천리왕(天理王命 텐리오노미코토)이라는 이름을 주겠다. 이 집터에서 최초의 인간세계를 시작한 인연이 있어 하늘에서 내려왔다. 미키의 마음이 천리에 맞기 때문에 텐리오라는 이름을 부여했다. 원래 미키의 영혼은 어버이 이자나미의 혼령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신빙략기나 수속서에서 얼른 드러나지 않지만, 이른바 미키에게 신령들이 한 말은 전부 미키가 트랜스 상태에 빠진 채 미키의 입으로 나온 말일 가능성이 크다.
교조전과 수속서, 신빙략기가 하는 말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천리교에서 말하는 입교(立敎)의 날, 천리교식 표현으로는 '이 길의 으뜸하루'라고 부르는 그 날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하기는 어렵다. 교조전의 기록을 그냥 믿기에는 수속서나 신빙략기의 내용이 매우 걸린다.
다만 1838년 (음)10월 24일을 전후하여 어떤 일이 있어서 의례를 행하기로 했다는 점, 그 즈음에 미키가 육체적/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에 처했다는 점, 그리고 미키에게 신령 10위가 차례대로 나타나 말을 걸었고, 결국 남편이 26일에 미키를 신령의 사당으로 인정했다는 점까지는 믿을 수 있을 것이다.
미키가 신내림을 처음 겪기 전에 사람의 일을 자꾸 잊어버리는 건망증 증세가 나타났고, 때때로 기절하는 등의 증상을 보였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학자 임태홍은 <<다중인격의 측면에서 본 나카야마 미키의 신비체험>>(2004, 종교연구 37)이라는 논문에서 미키의 신내림 체험이 다중인격의 증상일 가능성을 검토하기도 하였다.
(이 항목에서 수속서와 신빙략기의 내용 번역은 임태홍이 논문에 올려놓은 번역을 요약하여 2차 인용하였다.)
5. 교단의 지도자
5.1. 신바시라
천리교단은 교주라는 낱말을 사용하지는 않으나, 신바시라가 천리교의 교주이며 교단 전체를 대표한다. 내부적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교단 내규에 따르면 '교조의 혈통을 잇는 사람들 중 천리교 본부 회의에서 인가한 사람'이 승계한다. 원래 신바시라(真柱)라는 말은 목탑을 받치는 중심기둥[66] 을 가리키는데, 이 단어를 '교단을 받치는 기둥, 중요한 인물'이란 뜻으로 비유하여 사용한 것이다. 한국인 신자들은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어 진주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규정하기로는 신바시라는 교조의 혈통을 잇는 사람들 중 고른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자손들 중에서도 초대 신바시라 신노스케 혈통의 장남이 대대로 세습하였다. 신노스케가 미키의 외손자인데 미키의 손녀인 타마에와 결혼하였으니, 미키의 자손들 중 신노스케의 자손이 가장 혈연적으로 가까움은 분명하다. 일본의 신종교단체들은 창교주의 후손이 교주직을 세습하는 경우가 흔한데, 천리교도 그러하다. 나카야마 집안의 가몬을 천리교의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 그리고 나카야마 집안의 남자가 대대로 신바시라를 세습하는 것은 천리교 내부에서 나카야마 집안의 위상이 어떠한지 보여준다.
혼세키가 있던 시절까지만 하더라도 천리교는 영적인 부분은 혼세키가, 행정적인 부분은 신바시라가 맡는 양대 지도체제였지만, 혼세키가 없는 지금은 신바시라가 양쪽을 다 맡는다. 신바시라가 신자들에게는 정말로 신(천리왕)이 그 안에 머무는 사람으로 숭배받지만, 교단 내적으로는 실권이 없다는 말들이 일본 웹사이트에 돌아다닌다. 실권은 신바시라 밑에 있는 고위간부들이 쥐었다고 한다.
나카야마 집안의 장남들은 대대로 이름에 젠(善)이라는 글자를 사용하는 관습이 있다. 예외는 훗날 개명했거나, 혹은 양자로 들어온 경우뿐이다. 미키의 장남 슈지도 초명은 젠에몬이었다. 그래서 역대 신바시라들도 외손자가 양자로 들어온 1대 신노스케, 조카가 양자로 들어온 (5대가 될) 다이스케를 제외하면 전부 이름에 젠(善)이라는 글자가 들어간다.
일제시대 무렵에는 신바시라라는 호칭은 내부적으로만 사용하고, 대외적으로는 칸쇼(管長/관장)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우리말 관장(館長)과 착각하기 쉽지만 한자가 다르다. 일본어 사전에 의하면 1872년에 일본 정부가 신토나 불교계 종교 지도자를 뜻하는 의미로 만든 낱말이라고 한다.
생몰란의 날짜는 양력.
향년은 만 나이
5.2. 혼세키
혼세키(本席)는 교조 나카야마 미키 사후로 미키의 대리인으로서 천리왕이 내리는 계시를 받는 인물을 가리키지만, 실제로는 이부리 이조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한다. 한국인 신자들은 한자를 한국식으로 읽어 본석이라고 부른다. 천리교는 이부리 이조 이후로 더 이상 천리왕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생몰란 날짜 표기는 양력
향년은 만 나이
6. 경전
천리교의 경전은 나카야마 미키가 직접 쓴 친필(親筆)과 신악가(神楽歌), 그리고 신자들이 미키와 이부리 이조가 계시를 받아 구두(口頭)로 가르친 내용을 모아서 정리한 '지도말씀'이 있다.
친필을 일본에서는 오후데사키(御筆先)라고 부른다. 오후데사키란 원래 붓 끝, 혹은 서예 솜씨를 가리키는 말이지만 천리교에서는 의미를 다르게 사용했다. 미키가 친필을 1869년부터 와카로 썼는데 총 1710여 수이다. 미키 본인의 말을 빌리면, 친필의 와카를 쓰는 동안 신이 들려 자기도 모르게 글을 쓰되, 자기가 깨어나 와카를 읽고는 뜻을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신령에게 물어봐서 내용을 보충하기도 했다고 한다. 미키는 친필을 한자 없이 히라가나로 썼는데, 천리교는 모든 사람이 쉽게 오후데사키를 읽을 수 있게 하려고 그렇게 썼다고 말한다. 미키가 쓴 원본이 현존한다.
한 가지 재미난 점은 오모토의 교조 데구치 나오도 1893년부터 신들림하여 글을 썼는데 이를 똑같이 '오후데사키'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게다가 데구치 나오 역시 오직 히라가나로만 글을 썼다. 차이점은 나오는 자기 의식을 잃지 않고 다만 손이 멋대로 움직여 썼다는 점, 그리고 와카가 아니라 산문 형식으로 썼다는 점이다. 오모토의 성사인 오니사부로는 이런 공통점을 의식하여 자기 스스로 두 사람을 비교, 분석하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종교학계에서도 천리교와 오모토는 이러한 공통점 때문에 꽤 많이 비교한다.
신악가는 일본에서는 미카구라우타(神楽歌)[71] 라고 부르는데, 미키가 1866년부터 의례 중에 부를 노래의 가사를 적은 것이다. 천리교도에게는 노래이자 기도문이다. 미키가 쓴 원본은 훗날 경찰에게 압수되어 망실되었으며, 현전하는 신악가 본문은 교단이 복원한 것이다. 종교법인 천리교와 갈라진 단체들은 신악가의 복원된 구절 일부에 이의를 제기하기도 한다.
신악가에는 미키의 종교적 관심사가 주로 어디에 있었는지 상당히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신악가의 전체 분량은 많지 않으나, 그중 여러 번 질병을 낫게 하겠다는 구절이 있다. 천리교에서 질병치유를 중시함은 미키 때부터 나타난 경향이다. 신악가는 질병이 생기는 근본이 마음이라고 노래하는데, 미키는 근대의학을 거부하였다. 근대 일본에서 나이든 사람들이 근대의학을 거부함은 흔한 일이었던 듯, 오모토 개조 데구치 나오도 근대의학을 거부하고 아이들에게 예방접종을 맞히지 않으려 했다고 한다.
신악가에는 질병치유 말고도, 천리교의 영험으로 풍년이 되리란 구절도 들어간다. 미키 본인이 농촌사회 지역유지의 주부였으니 어찌 보면 지극히 당연한 관심사일 것이다. 그 외에도 인근 사람들이 무시하지만 참고 견디라는 구절도 은근히 보이는데, 미키 시절의 핍박이 반영된 구절일 것이다. 의외로 있을 듯한데 없는 구절이 아기 낳음에 관한 것이다. 미키가 본인이 주변에서 유명해지는 계기가 된 것이 순산하게 해주는 힘이 있다는 소문이고, 당시 일본 사회에서 아들 낳기가 중요한 문제인데도 의외로 신악가에는 이에 대한 구절이 없다.
친필과 신악가는 교조 미키가 쓰던 야마토(오늘날 나라현 지방) 방언으로 쓰였기 때문에, 일본의 천리교 안티들은 "천리왕님이 야마토 출신이신가 보지. ㅋ" 하며 비웃는다.
지도말씀을 일본에서는 오사시즈(御指図)라고 부르는데, 미키와 이부리 이조가 다른 신자들에게 받은 질문에 답한 내용, 혹은 신탁을 받아 가르친 내용을 정리한 모음집이다. 친필이나 신악가와는 달리 미키(혹은 이부리 이조)가 아니라 신자들이 정리한 것이다.
7. 교리
천리교는 천리왕을 유일신으로 모시되, 나카야마 미키를 그보다 격이 낮은 신적 대상으로 모신다. 천리왕을 어버이신, 미키를 어버이님이라고 부르면서 신자들을 자식이라고 말하며, 종교적 가족제를 매우 강조한다.
천리교에서 말하는 인간이 창조될 무렵의 이야기는 '으뜸인 리(理)'라고 부르는데 아래와 같다.
'으뜸인 리'를 과거에는 니해고기(泥海古記 진흙바다의 옛 기록)라고 불렀다 한다. 아래에서 이야기할 야시마 히데오는 '으뜸인 리'가 교조 미키 본연의 가르침이 아니라 국가신토를 강요받던 시대에 만들어진 거짓 교리라고 주장하였다.
천리교단은 흰 뱀(이자나미)의 영혼이 교조 나카야마 미키로, 인어(이자나기)의 영혼이 미키의 남편 나카야마 젠베에로 태어났다고 설명한다. 한국 천리교는 흰 뱀-이자나미를 여자추형묘상의 리(女子雛型苗床의 理), 인어-이자나기를 남자추형종자의 리(男子雛型種子의 理)[77] 라고 (천리교의 교학적 용어를 사용하여) 매우 어렵게 표현하지만, 일본 천리교도들은 그냥 이자나미ㆍ이자나기라고 간단하게 말한다.
천리교는 위 이야기에 나오는, 인류 창조시에 협력한 물고기들에게 각각 신토에서 말하는 신들의 이름을 사용한다. 해와 달, 이자나기와 이자나미, 그리고 범고래부터 복어까지 여섯 어류들까지 전부 10위 신들의 이름으로 표현하며, 특히 고사기에서 말하는 태초에 나온 신세7대(神世七代)에 속한 신들의 이름 중 일곱 개가 포함됐다.
천리교단은 으뜸인 리에서 신령 10위가 인류창조에 관여한 것을 십전의 수호(十全の守護)라고 부른다. 유일신 천리왕이 인간을 수호하는 열 가지 섭리를 각각 신토 신들의 이름을 빌려 설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일본인들에게도 그 역할이 쉽게 이해되는 신명이 아니므로 종교학자들은 천리교가 아직 천리왕 유일신 교리를 확립하기 이전, 다신교 시절의 흔적으로 본다. 특히 북쪽에 서는 쿠니노토코타치는 오모토에서도 중요하게 여기는 신명이다.
천리교 본부 신전에서만 행하는 감로대 근행(신악근행)에서도 십전의 수호를 의례적으로 표현하는데, 이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한국의 천리교에서는 십전의 수호에서 일본 신들의 이름과 연결되는 부분을 전혀 이야기하지 않고 그저 'XXXX의 리(理)'라고 교학적 용어로만 이야기한다. 신들의 이름이 너무 노골적으로 일본식이라 이를 피하려는 것일 가능성이 높다.)
천리교는 천리왕(天理王), 일본어로는 텐리오노미코토(天理王命)라고 부르는 신이 사람들이 즐겁게 사는 광경을 보고 싶어서 오늘날 일본 나라현 텐리시 천리교 본부의 감로대가 있는 자리에서 인류를 창조했다고 믿으며, 천리왕을 어버이신님(오야가미사마)이라고 부른다. 천리교는 천리왕을 죄와 벌을 주는 신이 아니라, 즐거운 삶을 누리도록 보살펴 주는 신이라고 가르친다. 그래서 질병이나 재난 없이 즐겁게 사는 것이 바로 신이 의도한 이상세계의 실현이며, “천국이나 극락은 죽어서가 아니라 이 세상에 있다.”라고 믿는다.
사람에게 병이 생기는 것은 천리왕에게 노여움을 샀기 때문이라고 본다. 병을 치유하는 수훈이 있지만, 먼저 자기 삶을 뉘우치고 돌아볼 것을 요구한다. 환생을 이야기 하기 때문에 이승에 덕을 쌓지 못한 사람은 후생에서 뭔가 안 좋은 상황에 처한다고 믿는다.
천리왕이 정해준 인간의 수명 또한 원래는 115세이며, 인간의 혼은 죽어서 저승으로 가지도 소멸하지도 아니하고 다시 환생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모든 사람이 죽자마자 바로 태어나지는 않고 사람에 따라 환생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이 다르다고 하며, 살아서 덕을 쌓은 사람은 행복한 인간으로 환생하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은 불행한 인간으로, 혹은 아예 짐승으로 태어난다고 믿는다. 올바르지 못한 마음씨를 티끌이라고 부르며, 덕을 쌓고 수양함으로써 마음의 티끌을 없애야 비로소 천리왕의 진정한 도움을 얻을 수 있다고 말한다.
미키가 1887년에 90세에 사망했음이 그래서 문제가 되었다. 물론 90세도 충분히 장수한 것이다. 하지만 천리왕이 정한 인간의 본디 수명이 115세라고 가르쳤는데, '신령의 집'인 미키조차도 115세를 채우지 못했다면 과연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추종자들은 미키가 115세까지 살리라 당연히 믿었으므로 미키가 죽자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이부리 이조가 신탁을 말하기를 '''미키가 신자들을 돌보고자 일부러 수명을 25년 줄여 은신(사망)했다'''고 한 것이다.
사람이 태어날 때에는 천리왕에게 육신을 받고, 죽을 때에는 천리왕에게 육신을 돌려준다고 믿는다. 따라서 천리교의 교리에 따르면, 인간의 몸은 천리왕의 입장에서는 대물(貸物: 빌려준 물건)이며, 인간의 입장에서는 차물(借物: 빌려 쓰는 물건)이다. 그래서 죽음을 기존의 육신을 반납하고 새로운 환생을 준비하는 것이라고 여겨, '처음부터 다시 한다'라는 뜻인 데나오시(出直し)라고 부른다.[82]
천리교는 교조 나카야마 미키가 살던 집터, 오늘날 나라현 텐리시 천리교 본부 신전(神殿)이 있는 자리를 '지바'(地場)라고 부르며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 상술했듯 미키가 처음 신들렸을 때에도 "이 집 터에 인연이 있어 내려왔다." 하였다. 천리왕이 바로 그 자리에서 인류를 창조했다고 믿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아래 '터전과 감로대' 항목을 볼 것.
나카야마 미키를 일본 천리교 신자들은 교조(敎祖)라고 쓰고 ‘오야사마’(어버이님)라고 부른다. 천리교의 설명에 따르면 만물을 창조한 어버이神 천리왕이 미키의 몸에 머물렀기 때문에 어버이님이고, 천리왕의 가르침으로 신자들을 보살폈고 지금도 보살피기 때문에 어버이님이며, 천리왕이 인류를 창조할 적에 미키의 영혼을 인류의 여성성, 모성의 모델(이자나미)로 삼았기 때문에 어버이님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다만 일본어로는 '오야가미사마'(어버이신님)와 '오야사마'(어버이님)가 소리로 꽤 구분이 되지만, 우리말로는 별로 구분이 안 되어서 그런지 한국인 신자들은 미키를 '교조님'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키가 신들림을 겪은 뒤 말한 종교적인 주장들은 당시 일본 풍습대로 다신교적이었던 듯하다. 이 시기 미키의 기록을 보면 천리왕 이외에도 당시 일본 민속이나 불교, 신토에서 말하는 여러 다른 신들을 언급하며, 천리왕이란 명칭도 '토지에 붙인 신명'이라고 하는 등 지금의 천리교 측 설명과는 차이가 있다. 하지만 점차 천리왕이 유일한 신격이고 (미키가 언급했던) 다른 신들은 단지 천리왕을 가리키는 다른 호칭, 혹은 비유일 뿐이라고 해석하여, 천리왕 유일신교로 바뀌었다.
미키는 메이지 시기의 근대화를 나쁘게 생각했을 뿐만 아니라 反외세 감정이 있었다. 미키가 신들림하여 쓴 친필에서 미키는 "가라가 지금까지 일본을 멋대로 다루었다."라든가 "지금까지는 가라가 훌륭하다고 했지만 앞으로는 꺾일 뿐이야."라든가 하고 말하였다. 일본어로 가라는 본디 가야를 가리키는 말이었으나, 나중에는 중국 당나라, (일본 입장에서) 서양을 포함하여 외국을 가리키는 말로 변했다. 요컨데 미키는 "지금까지는 외국인들이 일본을 쥐락펴락 했다." 하고 말한 것이다. 미키가 생각한 세상 사람들은 일본인들이었다. 위로는 천황부터 아래로는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형제라고 하였으나, 대상은 일본인들만이었다. 당시 기준으로는 나름대로 혁명적이지만 그 한계 또한 명확했다.
콜레라가 돌 때에도 미키는 "세상은 그것을 콜레라라고 부르지만, 실은 신의 노여움."이라면서, 근대적인 의학에 거리를 두었다. 외래문화ㆍ외래지식을 거부하고 (미키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순수한 일본문화를 그리워하며, 천리왕이 이런 상황을 바꿀 것이라고 하였다. 다만 현대의 천리교단은 가라라는 말을 외국으로 해석하지 않고, '천리교의 가르침이 전해지지 않은 곳'이라고 우회적으로 해석한다.
7.1. 천리교 신명(神名)의 변화
지금은 천리교에서 받드는 신의 이름이 천리왕(天理王命)으로 고정됐지만 초기 교단에서는 여러가지 표기가 있었다.
天輪王命, 天龍王命, 天輪王明神, 転輪王命, 天倫王命, 天理大神, 天理王命
한자 표기를 어떻게 하든, 그리고 신명의 뒤에 붙이는 존칭어(命, 神 등)를 무시하고 신명의 발음만으로 말한다면 텐린오 / 텐리오로 좁혀진다. 예외적인 호칭으로 천룡왕(天龍王 텐류오)라는 사례가 있긴 하지만 무시할 수 있다.
신빙략기에서 천리왕을 나카야마 저택의 집터에 붙인 이름이라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듯, 처음부터 천리교의 신명이 천리왕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천리교 외부의 학자들은 천리교의 초기 신명이 전륜왕(転輪王 텐린오)였다고 주장한다. 수속서에서 미키에게 모습을 드러난 신령 10위를 전륜왕이라고 한다는 서술이 있다.
그뿐 아니라 1865년 이마이 스케조가 미키와 대립한 뒤 갈려져서 천륜왕교회(天輪王敎会)라는 종교를 세웠다. 1867년에는 이마이 스케조의 동생이 전륜왕교회(転輪王敎会)를 세웠다. 1880년에는 슈지가 전륜왕강사(転輪王講社)를 세웠는데, 미키 추종자들이 슈지가 불교로 돌아왔다고 좋아했다고 하니, 추종자들의 종교적 성향이 신토보다는 불교에 더 가까웠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아마 미키가 내세운 본래의 신명이 전륜왕, 일본식 발음으로 '''텐린오'''였으리라 본다.
만약 미키가 전륜왕을 의도했다면, 미키의 종교적 의도를 약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전륜왕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미키가 슈겐자 나카노 이치베에(中野市兵衛 1792-1870)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카노는 본디 슈겐자 중에서도 진언종 계열로, 미키에게 49일간 진언종의 가르침을 전하기도 하였다. 미키는 본디 정토종 신자였지만 나카노 때문에 진언종의 영향도 받았다.
전륜성왕수행경을 보면, 전륜성왕이 다스릴 때에는 백성들이 몇만 살까지, 아무런 고통도 없이 즐겁게 산다고 한다. 또한 전륜성왕은 미륵신앙과 연계되어, 전륜왕이 통치할 시기에 미륵이 나타난다고 한다. 혹은 아예 미륵이 직접 전륜성왕이 되어 나온다는 경전도 있다. 미키가 자기가 사는 시대를 말세의 혼란기라고 여겼다면[83] 전륜왕의 힘을 빌어 전쟁, 대기근으로 고통받는 민중들을 구하여 즐겁게 살 수 있기를 바랐다는 뜻이 된다.
혹은 미륵이나 이상적인 통치자로서의 전륜성왕이 아니라, 아미타불의 별칭인 전륜왕일 수도 있다. 아미타불이 부처가 되기 전에 한 서원들 중에 "내 불국토에 태어난 사람에게는 어떠한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하는 것이 있는데, 미키가 종교적 주장을 하면서 강조한 '즐거운 생활'과 흡사하다.
미키가 초기에 불교적 용어인 전륜왕을 신명으로 사용했다면, 천리교단의 초기 기도문은 '나무천리왕님'이 아니라 '나무전륜왕님'이 된다. 불교적 용어인 전륜왕에 나무(귀의한다)라는 말을 붙임은 자연스럽다.
야시마 히데오는 자기 어린 시절에는 천리왕이 열 분 신령님이라고 하더니, 패전 이후로는 갑자기 한 분이라고 말을 바꾸더라고 이야기하였다.
천리교단은 이러한 외부 학자들의 주장을 잘 알지만, 이러한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고, 처음부터 천리왕을 신명으로 사용하였다고 설명한다. 다만 천리교 초기 역사에서 발음이 비슷한 신명이 여럿 사용되었다는 사실은 교단도 인정한다.
7.2. 터전과 감로대
천리교 내부적으로는 터전, 집터, 본고장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많은 신자들이 3 단어를 서로 혼용하여 사용하지만 엄밀히는 구별된다.
터전은 천리교 교회본부 부지에 있는, 감로대가 안치된 신전(神殿)을 가리킨다. (신전 안에서도 감로대가 있는 자리를 진좌[眞座]라고 부르는데, 패전 이후 1934년에 2대 신바시라 쇼젠이 처음으로 사용한 낱말이다.) 한국인 신자들도 종종 터전을 일본어 표현을 그대로 받아들여 지바라고 부르곤 한다. 집터란 말은 원래는 나카야마 저택 부지를 가리켰지만 지금은 교회본부 부지를 뜻하며, 본고장이란 말은 집터와 그 바깥에 있는 천리교 제반시설이 있는 지역까지 가리킨다.
범위로 따지면 본고장 > 집터 > 터전.
천리교의 따르면 터전이야말로 인류의 고향이므로, 터전으로 귀참(순례)하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텐리시의 천리교 신자들은 터전귀참하러 오는 신자들에게 "어서 오십시오."가 아니라 "어서 돌아오십시오."라고 인삿말을 건넨다고 한다. 신자들 사이에서는 "터전/집터에 떨어진 귤 껍질만 주워먹어도 병이 낫는다." 하는 말이 있다고 한다.
1875년, 미키는 나카야마 저택의 정원 한 자리를 지적하며, 그곳이 천리왕이 인류를 창조한 정확한 자리라고 말하고, 거기에 돌로 (1873년에 이부리에게 만들라고 했던 모형대로) 감로대(甘露台)라는 육각형 아령 비슷하게 생긴, 높이 2.5 m짜리 13단 구조물을 세우라고 추종자들에게 명령하였다. 하지만 석공은 도망하고 공권력이 탄압하여 1933년까지는 만들지 못하였다.
1933년에 오늘날 위치에 교조전을 세우고, 감로대 자리 북쪽에 북예배장을 세웠다. 34년에 감로대가 들어설 자리를 다듬고 나무로 감로대를 만들어 그 자리에 세웠다. 나카야마 미키는 돌로 감로대를 만들라고 하였는데, 당시의 신바시라 쇼젠은 그런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미키가 명령한 모양과 크기에 따라 감로대를 세우되 나무로 만들도록 하였다. 또한 남예배장도 이때 함께 만들었다.
1981, 84년에 서예배장과 동예배장을 각각 만들어, 지금의 신전 형태를 완성하였다. 신전은 동서남북 예배장을 통털어 다다미 3157장이며, 건물의 재질은 내화재 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편백나무이다. 법적으로 예배장의 토지소유권은 종교법인 천리교에 있지만, 감로대 자리의 소유권은 나카야마 집안에 있다고 한다.
신전과 교조전, 그리고 조령전은 회랑으로 연결되어 밖으로 나가지 않고도 오갈 수 있다. 신자들이 이 곳의 회랑을 청소하는 모습은 천리교 제작 동영상에서 흔히 나온다.
감로대를 중앙에 두고 ㅜ 자 형태로 신전(神殿)이 정남향으로 서 있다. 신전 내부는 동서남북으로 예배장을 두어 구획을 나누었다. 천리교단은 감로대 자리를 중심으로 한 변이 17 m, 깊이가 2 m쯤 되는 네모난 공간을 만들어 건물의 기반이 되는 대지 위에 감로대를 직접 세우고, 바닥에는 바닷가에서 가져온 조약돌을 깔았다. 또한 감로대로 드나들 수 있도록 사방에 계단을 두었다. 감로대가 지면 바로 위에 서 있으므로, 신전에 들어가도 가까이 다가가서 아래를 내려다보아야만 감로대를 제대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함부로 감로대에 접촉하지 못하도록 경계를 설정하고 장애물을 두어, (관련된 일을 하는 사람을 제외하고) 천리교인이라도 넘지 못하게 한다. 또한 근처에 경비원을 두어 수상한 사람이 가까이 다가가면 제지한다고 한다.[84]
천리교단이 감로대 사진촬영을 막기 때문에 사진이 없다. 다만 감로대를 사람이 보고 그린 스케치가 있어 소개한다.
미키가 신자들에게 명령한 대로라면 감로대를 돌로 만들고, 맨 위에 그릇을 하나 올려두어야 한다. 그러면 하늘에서 천리왕이 감로(甘露)[85] 를 내려주는데, 이 감로를 마시는(먹는?) 모든 사람은 115세까지 무병장수한다고 한다.
감로를 받기 위해서는 감로대가 하늘과 통해야 한다. 아래 사진상으로는 잘 안 보이지만, 감로대 위쪽으로 지붕에 한 평 넓이로 네모난 구멍이 뚫려 하늘과 통하며, 비가 내리면 감로대는 빗방울을 맞는다. 처음에는 지붕 위 구멍에 창을 달아 비가 오면 닫는 방안도 고려했으나 결국 지금처럼 하기로 결정하였다.
미키가 신자들에게 말한 바를 따른다면 감로대를 돌로 만들고 위에 그릇을 올려놓아야 한다. 하지만 2대 신바시라 쇼젠은 미키의 가르침대로라면 그리해야 하는 줄 알면서도, 미키가 말한 감로대의 형상과 크기는 그대로 따르되 나무로 감로대를 만들도록 하였다. 천리교에서는 지금 있는 감로대를 진짜가 아니라 '''모형'''으로 간주한다. 비가 내리면 감로대가 빗물을 맞기 때문에 대략 십여 년에 한 번씩 새 것으로 바꾼다.[86][87] 현 천리교단은 '''인류의 마음이 맑게 깨이는 날''' 돌로 감로대를 만들고 위에 그릇을 놓아 천리왕이 내리는 감로를 받으리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렇다면 왜 미키가 생전에 돌로 감로대를 만들라고 요구했는지 설명이 되지 않는다.
천리교단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외인들에게는 현 천리교단이 미키의 말을 무시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를 두고 일본의 천리교 안티들은 "쟤네들은 심지어 자기네 교조의 말도 대놓고 무시한다." 하고 천리교단을 비아냥거리곤 한다.
천리교 교리에 따르면 신전이야말로 인류 탄생의 땅이자 인류의 고향이며 세상의 중심이다. 또한 감로대는 지상과 천상을 연결하는 기둥이라는 의미가 있다. 신전 자리의 중심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치가 신전에 있다. 감로대를 중심으로 동서남북으로 예배장이 있는데, 따로 정문이 없고 각 예배장에 뚫린 문을 모두 정문으로 간주한다. 정말로 감로대가 있는 자리가 세상의 중심이라면, 특정방향이 정면이 될 수가 없다. 물론 부지 내 건물들이 기본적으로 남향하고, 신전 역시 부지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도로선상에 있으며, 신전과 교조전이 남북으로 나란히 있기 때문에 실제로는 남예배장 쪽이 정면으로 기능한다.
고본 교조전에 따르면 어느 날 미키가 말하기를 사방 8정(町)이 모두 집터(나카야마 저택 부지)라고 말했다 한다. 여기서 정(町)은 길이 360척을 뜻한다. 계산하면 1정이 약 109 m이고, 8정은 약 872.7 m이다. 사방이 8정이라면 한 변이 8정인 정사각형 부지가 되어 면적이 약 23만 4백 평, 76.16 헥타르로 여의도 택지면적의 4분의 1에 해당한다.
2대 신바시라 쇼젠은 1955년, 미키가 했다는 말을 실현하기로 작정하였다. 감로대를 중심으로 하여 한 변이 8정짜리 정사각형 모양으로 천리교 교회본부를 확대하기로 하고, 부지 경계선을 따라 건물을 회랑처럼 만들어 부지를 둘러버린다는 무지막지한 청사진을 만들었다. 계획을 시작한 지 60년이 넘었지만 아직 절반도 만들지 못하였다. 천리교의 교세가 점차 하강세이기 때문에 건물 건축속도는 앞으로 더욱 늦어질 듯하므로 천리교단도 예상완공년도를 감히 말하지 못하는 상황.
천리교에서는 부지를 둘러쌀 건물군을 오야사토야카타(おやさとやかた), 흔히들 줄여서 '오야사토'라고 부른다. 오야사토(親里)는 한국 천리교에서 '본고장'이라고 번역한 단어이며, 오야사토야카타란 '본고장 저택' 혹은 '본고장 숙소'라는 뜻이다. 오야사토야카타의 남동쪽 일부를 천리대학으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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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도 설명했듯, 교조 미키는 1887년에 향년 만 88세, 세는나이 90세로 거처에서 사망하였다. 미키 사후에 이부리 이조가 받은 신탁에 따라 신자들은 미키의 본디 수명이 115세였지만, 신자들을 더 잘 보살펴주려고 일부러 수명을 25년 줄여 90세에 '''물질세계에서 자기 몸을 숨겼다'''고 믿는다. 또한 터전 신전 뒤쪽(북쪽)에 있는 교조전(敎祖殿)에서 그 혼령이 지금도 머물고 생활하며, 신자들을 돌본다고 여긴다.[88] 천리교에서는 이것을 교조존명(敎祖存命)의 리(理)라고 표현한다.
교단에서는 매일 교조전에 식사를 올리고 미키가 목욕할 수 있도록 목욕물을 데우며, 계절에 맞추어 붉은 옷을 지어올리고, 더우면 냉방을, 추우면 온방을 한다고 한다. 그뿐 아니라 미키의 혼령을 시중드는 사람들을 두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혼령을 모시고 교조전 주변을 산책하기도 한다.[89] 보통은 혼령이 머문다고 믿어도 이렇게까지 하지는 않으므로 이례적인 사례이다.
이를 두고 미키가 115세가 되기 전에 죽어 신자들이 동요하자, 이부리 이조의 입을 빌어 '미키가 일부러 수명을 줄여 사망했고, 지금도 그 영혼이 터에 존재한다.'고 주장하며 살아있을 때와 똑같이 행동함으로써 더 이상 동요하지 않도록 조처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8. 의례와 행사
의례(儀禮)란 관점에서 천리교는 입교의례가 없다는 점이 특이하다. 그리스도교는 세례가, 불교는 수계가, 이슬람교는 샤하다 낭송이 입교의례이며, 우리나라의 천도교나 대종교 등에도 제사 형식으로 저마다 입교의례가 있다. 보통은 체계적으로 조직화된 종교라면 간단하든 복잡하든 나름대로 입교의례가 있는 법인데, 천리교는 이러한 입교의례가 없다. 그 대신 아래에서 설명할 수양과를 수료한 사람을 정회원(?), 별석 강좌를 수료한 사람을 상급회원(?)으로 받아들인다. 한국 천리교에서는 천리교 본부의 수양과 대신 강습소란 이름으로, 수양과와 같은 과정으로 수업을 진행한다고 한다.
천리교 교회에서 신을 모시는 신단은 형식을 제대로 갖추었다면 단을 셋으로 나눈다. 신단을 바라보아서 가운데에는 천리왕을, 오른쪽에는 교조 나카야마 미키를, 왼쪽에는 해당교회 소속으로 죽은 신자들의 (아직 환생하지 않은) 혼을 집단적인 조령(祖靈)으로 모신다. 왼쪽 신단은 조상을 집단적인 조령으로 모시는 일본 풍습이 직접적인 유래일 것이다. 다만 장소가 좁을 경우에는 천리왕을 모시는 신단만 갖추기도 한다. 천리교 지역교회의 신단은 터전 방향을 향해야 한다고 한다. 터전의 천리교 본부에서는 신전ㆍ교조전ㆍ조령전을 별개의 건물로 분리했다.
사실 천리교 교리대로라면 조령을 반드시 모셔야 할 필요는 없다. 시간차이가 있을 뿐 언젠가 천리왕에게 다시 육신을 받아 환생할 테니까. 그래서 천리교에서는 조령을 모신 단에 대해서는 그 혼령을 모신다고 설명하지 않고 ‘죽은 이의 덕을 기린다.’고 설명한다. 그렇게 환생 여부와 관계없이 계속 조령을 모시는 이유를 설명하지만, 문제는 의례적으로는 마치 실제로 혼령이 그 안에 깃든 듯이 한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가정마다 자기네 조상을 모시던 풍습을 천리교 안에 받아들이면서도 교리와 어긋나지 않게 하려다 보니, 의례와 설명 사이에서 엇갈림이 생겼다.
천리교 교회본부에서는 조령전이 교조전 서쪽에 조그마하게 있다. 신전이나 교조전과 비교하면 크기도 작고 위치도 구석이다. 조령 모시기의 위상을 보여주는 대목. 필요하기는 하고 받들기는 하지만 크게 중요하지는 않다는 것이다.
각 신단에 모신 신각 앞에는 거울이 있다. 거울 뒤쪽, 신각의 안에도 별도로 모시는 것이 있는데, 천리왕의 신각에는 오후다(일본식 부적) 비슷한 것이, 미키의 신각에는 고헤이가, 조령의 신각에는 영새부(靈璽簿)[90] , 혹은 영새(靈璽)[91] 가 있다고 한다. 천리교 본부로부터 '교회의 리'를 받지 못한 경우에는 천리왕의 신각 안에 아무것도 없다고 한다.
이렇게 경배의 대상이 되는 것을 천리교에서는 목표(目標)라고 부른다.[92] 예전에 천리교에서 사용하던 목표는 봉수천리왕명수호(奉修天理王命守護)라는 문구를 종이 위에 쓴 것이었으나, 1896년에 정부가 개입하여 지금처럼 바뀌었다고 한다.
천리교는 일본에서 시작한 종교라, 신단이 있는 공간이 일본 사찰의 법당처럼 내진(內陣)과 외진(外陣)으로 나뉜다. 내진과 외진의 사이에는 야트막한 목책으로 공간을 구별하며, 근행 등 예배를 볼 적에 교복을 입은 사람은 신단과 가까운 내진에 들어가 예배를 보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외진에 앉아 예배를 본다. 다만 천리교 내부적으로는 내진이니 외진이니 하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내진을 결계(結界)라고 부르는 듯하다.
포교소처럼 작은 곳에서는 굳이 내진과 외진을 물리적으로 구별하지는 않지만, 교복을 입은 사람이 앞줄에 서는 것은 마찬가지.
의례로는 매일 아침저녁으로 행하는 근행(懃行), 매월 1번 행하는 월차제(月次祭), 병든 사람들을 치유하기 위해 하는 수훈 등이 있다.
중요한 종교축일로는 원단제(1월 1일), 춘계대제(1월 중), 추계대제(10월 중)가 있다. 춘계대제는 미키가 은신(사망)함을, 추계대제는 미키에게 첫 신내림이 내려 남편이 미키를 신령에게 바침을 기념한다. 원단제에 부속된 절회(1월 5-7일)라는 축제도 있는데, 원단제 때 신단에 떡을 바치고, 절회 때 모여 이 떡을 먹는다.
4월 18일에는 교회본부와 산마이덴 분교회에서 ‘교조 탄생제’를 치른다. 원래는 교회본부만 하겠지만, 산마이덴 분교회 경내에 미키가 태어난 생가가 있으므로 이곳은 예외적으로 교조 탄생제를 거행한다. (한국의 대한천리교 교단은 천리교 본부와 갈라졌으므로 본부의 방침과 상관없이 교조 탄생제를 거행한다.)
천리교의 가장 기본적인 예배를 '근행'이라고 부른다.[93] 신단 양옆에 있는 인원들이 미키가 지정한 악기를 연주하며 정해진 음률로 노래를 부르면, 신단 앞에서 지정된 인원이 미키가 제정한 '손춤'을 추는 부분이 있어 특징적이다. 천리교 측 해설에 따르면 손춤에는 하나하나 나름대로의 상징적 의미가 있는데, 미키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동작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한다. 기모노를 입은 여자도 할 수 있을 정도로 동작이 절제되어. 뒤돌거나 앞뒤좌우로 한 걸음씩 디디거나 하면서 손을 움직인다. 근행은 아침과 저녁으로 해가 뜨고 지는 시간에 맞추어 적당히 조절하기 때문에, 계절에 따라 거행하는 시간이 다르다.
근행 중 사용할 악기에 대해서도 미키가 악기의 종류와 음률, 그리고 남자는 어떤 악기를 연주하고 여자는 어떤 악기를 연주해야 할지 일일이 정하였다. 미키는 악기를 모두 9가지로 정하였는데, 사람의 사지ㆍ눈ㆍ코ㆍ입ㆍ귀ㆍ성기까지 헤아려 9가지라고 한다.
미키를 따르는 사람들은 미키의 가르침에 따라, 미키가 사망하기 전까지 나름대로 천리왕에게 예배하긴 하였으나 그 형식이 완성되지는 않았다. 미키는 의례를 계속 손보았으므로 최종판(?)을 확립하지 못하였다. 감로대 또한 미키가 사망하는 순간까지 만들지조차 못하였다. 미키는 신자들에게 자기가 만든 근행을 연습하여 익히라고 신자들에게 요구했으나 잘 진척되지 않았다. 사망할 무렵에야 초대 신바시라 신노스케가 주도하여 그럭저럭 해보았을 뿐이었다. 근행 의례의 최종판을 미키의 감독 아래 충분히 익힐 만큼 해보지 못했다는 점, 일본 정부가 천리교에 개입하여 의례를 손보고 신악가 원문을 압수했다는 점 때문에, 패전 이후 천리교단이 복원을 하려고 할 때에도 복원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비판이 나왔다.
매달 한 번은 근행과 별개로 월차제[94] 더 크게 예배를 올린다. 1월/10월 월차제는 춘계/추계 대제라고 부르며 성대하게 거행한다.
천리교 본부는 월차제를 매월 26일에 거행한다. 미키가 살아있던 시절부터 미키는 매달 26일마다 월차제를 하였는데, 천리교가 입교(立敎)된 날이 1838년 (음)10월 26일이기 때문이다. 월차제에 입교 기념제의 의미가 있음을 알 수 있다. [95] 당연히 원래는 음력 26일에 거행하였다.
1910년부터 종교법인 천리교에서는 음력 대신 양력으로 종교적 축일을 기리기로 하였다. 그런데 음력 날짜를 양력으로 환산하지 않고 날짜를 그대로 옮겨왔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원래는 월차제를 음력으로 매월 26일에 행하였으나, 이후로는 양력 26일에 한다. 또한 미키가 1798년 (음)4월 18일에 태어났는데, 이것도 양력 4월 18일에 기념한다. 1월ㆍ4월ㆍ10월에 대제를 거행하는 것도 미키가 (음력으로) 1월에 사망했고, 4월에 태어났으며, 10월에 첫 신들림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걸 양력으로도 1월ㆍ4월ㆍ10월에 하는 것.
지역 교회에서는 월차제나 대제를 행하는 날짜를 교회 설립허가를 받은 날(교회의 리를 받은 날)로 정하는 것이 원칙이다. 예를 들어 3월 3일에 허가를 받았다면, 매월 3일에 월차제를 하고, 대제도 1월 3일, 10월 3일에 하는 식. 지역교회에서는 4월 교조탄생제는 따로 하지 않고, 그 달의 월차제에 좀 더 의미를 부여하는 정도이다. 월차제 날짜는 하급교회와 상급교회의 날짜를 서로 피하여 정하는데, 상급교회로 갈수록 본부 쪽 날짜인 26일과 가까워지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한국 천리교에서는 현실에 맞추어 월차제 하는 날을 '매달 X번째 X요일'이라는 식으로 정하는 곳도 있지만, 일본 천리교에서는 그런 곳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일본의 천리교 안티들이 "현대사회에 적응할 생각이 없는 것 같다." 하면서 까는 형편이다.
'수훈'을 일본어로는 오사즈케(おさづけ)라고 부른다. 미키 생전에는 미키가, 미키 사후로는 이부리 이조가, 이조 사후에는 (우에다 나라이토와 타마에를 거쳐) 신바시라가 수훈의 권한(리)을 신자들에게 나누어주기 때문에 사즈케루(授ける: 하사하다)란 말에서 따와 오사즈케라고 부른다고 한다. 신악가 1절을 세 번 부르면서 손춤을 추고 환부를 만지기를 세 번 반복한다. 일본 천리교 본부의 터전에 가서 특별한 강의를 9번 들어야 하는데, 이 강의는 정해진 대본이 있어서 누가 하든 내용은 토씨까지 전부 똑같다고 한다. 강의 자체가 종교의례가 된 것이다. 수훈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받은 사람을 (천리교의) 유용한 인재라는 뜻에서 용재(用材)라고 부른다. 인재라는 뜻에서 다른 필요한 자질이나 능력이 있는 사람도 용재라고 부르지만, 좁은 의미로는 수훈을 할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부리 이조가 살아있을 때까지만 해도 병을 낫게 하는 수훈 말고도 다른 수훈, 가령 밭의 수확을 좋게 하는 수훈 등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지금은 병을 낫게 하는 수훈의 자격만 일반 신자들에게 허락한다. 용재가 다른 사람에게 수훈을 해주는 것을 흔히 '수훈을 전한다'라고 표현한다.
그 외에 히노키신(ひのきしん)이라는 용어가 있다. 일본에서도 보통은 히라가나로 ひのきしん이라고 쓰지만, 한자를 섞어 쓸 경우에는 日の寄進이라고 쓴다. 이것은 따로 정해진 종교적 의례는 아니지만 종교적 행동이라고 할 수는 있다. 원래 키신寄進이라는 것이 일본어에서 '사찰이나 신사에 물건이나 돈 등을 공양함'을 가리키는데, 히노키신은 이것을 천리교적으로 받아들여 '천리왕이 기뻐할 만한 모든 행위'를 히노키신이라고 부른다. 천리교인이 봉사활동을 해도 히노키신이라나. 한국인 천리교 신자들도 이 말은 일본어 표현을 그대로 쓰지만, 귀에 들리는 대로 히노키싱 혹은 히노끼싱이라고 쓴다.
히노키신은 일본 농촌사회에서 행하던 품앗이 전통을 종교적으로 바꾼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그래서 일제시대에 천리교 포교사들이 식민지 조선의 농촌으로 포교하러 왔을 때 농민들의 품앗이, 두레를 보고 "히노키신과 다를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일본의 천리교 안티들은 대체로 히노키신을 '''천리교단이 무급으로 신자들의 노동력을 착취하는 방법'''으로 간주한다.
텐리시에 있는 터전, 천리교 본부에서만 할 수 있는 의례가 몇 가지 있다. 임신 6개월 이상된 임산부가 터전에 왔을 경우 순산의 수훈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위에서 이야기한 수훈을 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하는 강의도 터전에만 있고, '신악근행'이라는 것도 있다. 터전에 있는 감로대 앞에서 사람들이 손춤을 추고 신악탈을 쓰고 행하는 근행이라 신악근행, 또는 감로대 근행이라고 부른다. 이것은 오직 천리교 본부에서만 할 뿐 일반 천리교회에서는 행할 수 없다.
하지만 일본 천리교 본부의 해석에 반대하여 갈라진 단체들, 가령 대한천리교나 천리교 토요후미 교회, 이치노모토 분서 사적보존회 등에서는 독자적으로 감로대를 만들어 일반교회에서도 신악근행을 한다.
유튜브에 올라온, 어떤 종교단체에서 거행하는 신악근행
'증거부'라고 해서 터전에 찾아온 신자가 신청할 경우에 주는, 천리교식 오마모리(일본 부적)가 있다. 신자가 터전에 온 증거라 하여 '증거부'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한번 발급하면 어떤 경우에도 재발급해주지 않는다고 한다. 증거부에는 붉은색 옷감이 들어있는데, 교조전에 바쳤던 붉은 옷을 자른 것이라고 한다. 천리교에서는 미키가 비록 눈에 보이지는 않아도 여전히 교조전에서 먹고 목욕하고 옷을 입으며 생활한다고 믿으므로, 증거부의 옷 조각은 (실제로는 아무도 입은 적이 없어도) 미키가 입은 그 옷에서 잘라낸 유물이 되는 것이다.
종교법인 천리교는 신단에 거울을 모시는데, 신토에서 말하는 신체(神體)에 해당한다. 한국 천리교에서는 '신앙의 목표'라고 표현한다.
천리교 신자들이 참가하는, 수양과(修養科)라는 교리심층교육이 있다. 비단 천리교 신자만이 아니라 천리교에 관심 있는 만 17세 이상인 사람이면 누구나 들어올 수 있다고 한다. 터전 교회본부 건물에서 '''3개월간 숙식하며''' 공부한다. 수양과에 있는 사람이 원한다면, 3개월간 별석을 함께 참가하여 용재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3개월간 숙식하다 보니 상당히 돈이 많이 드는데, 2016년 시점에서 천리교 공식 홈페이지에 따르면 약 8만 5천 엔이 든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그 이상인 듯하다. 천리교 신자가 아니어도 참석할 수 있긴 하지만, 세상에 천리교 신자가 될 생각도 없으면서 누가 8만 5천 엔 이상을 들여 3개월간이나 숙식하는 수양과에 들어오려고 할까? 현실적으로는 천리교 신자, 혹은 예비 천리교 신자만 들어오라고 하는 셈이다. 일본에서는 천리교 신자가 아니어도 천리교 집안에 시집오는 예비 며느리에게 수양과에 다녀오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그나마 현대에 짧아져서 3개월이고, 과거에는 6개월이었다고 한다.
일본에는 천리교 신자가 사장인, 혹은 천리교 계열인 회사에서 사원들에게 강제로 수양과에 자비로 다녀오게 한다는 말이 있다.
8.1. 의상
천리교는 일본에서 핫피(法被)[96] 라고 부르는 의상을 입어 자기가 천리교인임을 드러낸다. 원래 핫피는 에도 시대 일본에서 무가 저택의 하인이나 가게의 점원 등이 노동복으로 편하게 입던 것이며, 지금도 일본의 오래된 가게에서 종업원 제복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일본 텐리시에는 일상복으로 천리교 핫피를 입은 사람들이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흔하디 흔하다.
천리교에서는 핫피를 검은색으로 통일하고, 옷깃에는 소속을, 등에는 한자로 天理敎(천리교)라고 하얀색 해서체 붓글씨로 적는데, 외국 사정에 맞추어 로마자로 쓴 것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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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외에 교복(敎服)이라고, 근행이나 월차제 등을 할 때 예복으로 입는 의상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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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천리교에서는 나카야마 집안의 가몬이 새겨진 검은색 기모노를 입기도 한다. 여자용 의상은 검은색 토메소데(쿠로토메소데)를 본으로 삼았는지 (이 문서 최상단에 있는) 나카야마 집안의 가몬을 양 어깨, 양 소매의 팔꿈치, 목 뒤에 하나씩 모두 5개를 새겼다. 위 사진에서도 여자용 의상의 양 어깨에 문양이 보인다. 대놓고 기모노다 보니, 한국에서는 왜색을 유지하는 천리교 한국교단마저도 이것만은 차마 입지 못한다.
한국에서 대한천리교는 왜색을 배격하느라 핫피와 교복을 모두 사용하지 않고, 다만 검은색 한복을 대신 입는 경우가 있다. 천리교 한국교단은 여전히 핫피와 교복을 사용하긴 하지만, 핫피가 너무 노골적으로 왜색 느낌이 나서 그런지, 일본 천리교에서처럼 자주 입지는 않는다. 원래는 자기 소속명이 목깃에 인쇄된 핫피를 입어야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최상급교회명이 적힌 핫피를 입는 사람들도 있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천리교 한국교단 교인들이 핫피나 교복을 입으면 왜색이 지나쳐서 민원이 들어온다는 이유로 관공서에서 자제해달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9. 언어 습관
어느 종교에나 자기네만의 고유한 종교용어나 언어습관이 있는 법이지만, 여기서는 천리교에서 유독 남달리 사용하는 용어에 대해 설명한다.
- 리(理)
천리교에서 유독 반복되는 낱말이 리(理)라는 한자이다. 천리교에서 리라는 말은 교리라는 상식적인 뜻도 있지만, 권한이나 자격, 해야 할 도리, 혹은 상식이나 개념(....)이라는 뜻으로 통하는 등 굉장히 폭 넓게 쓰인다.
몰상식한 행동을 할 때 "리를 모른다." 하거나, 자격이 박탈됨을 "리가 끊겼다." 하고, 반대로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음을 "리를 받았다."라고 말한다. 어떤 예배소가 정식교회로 허가받을 때에도 "교회의 리를 받았다." 한다. 그 외에도 교회장과 신도를 리의 부모 / 리의 자식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천리교의 종교적 행동이 천리왕의 이치에 따라 한다는 생각에서 이런 표현이 나온 듯하다.
- 이 길(この道)
천리교에서 천리교를 가리켜 쓰는 말이다. 영어권 천리교에서는 this way라고 번역하여 사용한다.
- 으뜸하루(元一日)
영어로는 day of origin이라고 번역한다. 원래 의미는 나카야마 미키가 신내림받은 그 날을 뜻하지만, 의미를 확장하여 어떤 사람이 천리교를 처음 받아들인 날이라는 뜻으로도 사용한다. 천리교를 여러 대에 걸쳐 믿은 집안이라면 자기 선조가 처음 천리교를 받아들인 날을 뜻한다. 나카야마 미키에게 신령이 내린 날을 '''이 길(천리교)의 으뜸하루'''라고 부르기도 한다.
- 마디(節)
천리교에서는 난관, 고난, 역경을 가리키는 의미로 흔히 '마디'란 말을 사용한다. 일본어로는 후시(節)라고 말하는데, 미키가 생전에 자주 말했던 "마디에서 싹이 튼다."라는 비유에서 나온 표현이다.
- 신상(身上) / 사정(事情)
신상의 1차적인 의미는 우리말 신상(身上)과 같다. 일본어에서도 신상이란 말을 비슷한 뜻으로 사용한다. 보통 일본어에서는 신상(身上)을 '신쇼'라고 하지만 일본 천리교는 '미조'라고 읽는다.
천리교에서는 신상이라는 말을 이런 사전적인 의미에서 벗어나, 어떤 사람의 안 좋은 상황, 특히 질병으로 안 좋은 상황이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병이 생기는 것을 '가르침을 받는다.'고 표현하는데, 천리왕이 어떤 사람을 경책하고자 병을 내린다는 생각이 반영되었다. 하필 질병이라고 하는 데서도 특히 천리왕이 질병이나 치유와 연관된 신격으로 인식됨을 알 수 있다. 영어권 천리교에서는 대놓고 health disorder라고 번역하는 판이다.
"홍길동이 신상 가르침을 받았어."
"홍길동이 신상 문제가 있어."
(홍길동이가 몸이 아파)
천리왕이 누군가에게 가르침을 내리고자 몸을 아프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나오는 표현이다. 비슷하게 사정(事情)[97] 이라는 말도 쓰이는데, 엄밀하게 따지면 신상은 육체적 문제, 사정은 정신적 문제라고 한다. 하지만 실제 신자들 사이에선 대충 쓰이는 듯?
- 수호
문자 그대로 지켜준다는 뜻인 수호(守護)지만, 천리교에서는 천리왕이 내려준 영험(靈驗), 혹은 은총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영어권 천리교에서 수호를 Providence(섭리)라고 번역하기도 하는 데서도 이런 면이 드러난다. 천리왕이 지켜주셔서(수호해주셔서) 어떤 영험을 받았다는 뜻이다. 천리교에서는 모든 사물이 어떤 식으로든 나름대로 천리왕의 수호를 받는다고 설명한다.
"신상에 가르침을 받아서 기원을 올렸더니 수호를 받았다."
(몸이 아파서 기도를 했더니 몸이 나았다.)
- 구제
救濟, 즉 사전적인 의미대로 원래는 고난에 처한 사람을 도와준단 뜻이지만, 천리교 신자들 사이에서는 흔히 천리왕이 내리는 영험으로 누군가의 어려움을 해소함을 가리킨다. 천리교 신지가 누군가를 구제했다고 말한다면 십중팔구 (수훈으로) 병을 낫게 해주었다는 소리이다.
일본 천리교는 오타스케(おたすけ)라는 말을 쓰지만, 여기에서도 구제(救濟)와 같은 의미라고 설명한다.
- 출직
사망을 가리키는 용어. 위 항목에서도 설명했듯, 원래는 처음부터 다시 한다는 뜻인 일본어 데나오시(出直し)란 말에서 한자만 한국식 한자음으로 읽은 것이다. 천리교에서는 사람이 죽으면 천리왕의 힘으로 다시 환생한다고 믿으므로, '삶을 다시 시작한다.'는 뜻으로 죽음을 데나오시라고 부른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출직(出直)이라고 하면 숙직을 마치고 나온다는 뜻이라 매우 심각한 오역이다.
10. 교회 조직
텐리시에 있는 천리교 본부를 머리로 하여 그 밑에 대교회, 분교회, 지교회, 포교소가 있다. 텐리시 천리교 본부로부터 교회의 리(理)를 받지 못하면, 아무리 규모가 커도 원칙적으로는 포교소로 간주한다.
천리교의 교회조직은 매우 비효율적이다.
예를 들어 A교회 사람이 B포교소, 혹은 B교회를 세우는데 성공하면 A교회는 B교회/포교소의 상급교회가 된다. 서울의 A교회 사람이 부산에 가서 B교회를 세웠다면, 서울에 있는 A교회가 부산에 있는 B 교회의 상급교회가 되며, B교회는 A교회의 행사 등을 적극 지원해야 한다. B교회 같은 하급교회가 많이 생기면 A교회는 분교회나 대교회로 승격한다.
천리교에서는 이렇게 인맥으로 이어지는 교회간 구분을 계통이라고 부른다. 각 계통은 최상급교회(대교회)의 이름을 따서 부른다. 다단계 판매 같은 조직구성으로, 지역이 아니라 인맥을 기준으로 조직을 나누어 매우 비효율적이다.
산하에 얼마나 많은 하급교회/포교소가 있느냐에 따라 격의 상하관계가 달라지므로, 만약 하급교회나 포교소 숫자가 줄어든다면, 대교회가 분교회로, 분교회가 지교회로 격하되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일을 막고자 더 이상 정상적으로 운영할 수 없을 정도로 축소된 하급교회가 있어도 사정교회(事情教会)라는 이름으로 억지로 존속시킨다. (정상적으로 운영하지 못하는) 사정이 있는 교회라는 뜻이다.[98] 한번 허락받은 정식 교회는 없애지 않음이 천리교의 원칙이라 매우 불합리하다.
일본 천리교는 1940년대 무렵 교세가 정점을 찍었다. 1938년 자료에는 신자수가 456만 명이라고 했을 정도지만, 그 뒤로 점차 감소세에 있다. 1970년대쯤 활발한 전도운동을 하여 교세가 2백만 명을 넘긴 적도 있지만, 이것도 잠시뿐이고 다시 신자수가 줄어, 2013년 일본 문화청이 발행한 종교연람에서는 천리교 신자수를 121만 명으로 서술하였다. 적어도 통계상으로는 70년대에 2백만 명을 넘겼다고 하니, 40년만에 거의 반토막이 난 셈. 하지만 여기에도 허수가 있고 실제로 천리교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의 숫자는 50만~100만 사이라고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천리교의 교세가 줄어들었음을 단적으로 확인 가능한 부분이 별석 과정을 수료하여 용재가 된 사람의 숫자이다. 1966년에 새로 용재가 된 사람이 37,681명이었는데 2014년에는 5274명으로, 66년의 14%에 불과하다.
신자 수가 이토록 줄어든 데 반해서 한번 설립한 교회는 억지로 사정교회로라도 유지하기 때문에 거의 줄어들지 않았다. 교회를 유지하고자 신자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부담이 더욱 커진 것이다.
'''이러한 조직구성이 얼마나 비효율적일지 새삼 설명이 필요할까?'''
부모가 A 교회 소속이라면, 자식도 당연히 그 인맥이므로 A 교회 소속이 된다. 그리고 다른 곳에 있는 B 교회에는 계통이 다르기 때문에 소속될 수 없다. 간단하게 예배를 드리는 정도는 가능하지만 그 이상은 안 된다. 한번 A 교회 소속이 되면 끝까지 A 교회 소속이어야 하며, 계통이나 소속을 바꾸지 못한다. 그래서 먼 곳으로 이사를 간 신자들도 가까이에 있는 다른 천리교회에 가지 못하고 반드시 원 소속 교회로 가서 의례에 참석해야 한다. 그래서 고향을 떠나 먼 곳에서 직장을 잡은 젊은 신자들이 천리교에 점차 거리를 두는 이유가 되었다.
과거에야 사람들이 대부분 고향 가까운 곳에서 평생을 보냈고 말이나 가마를 탈 수 있는 사람도 드물었으므로, 이렇게 인맥을 중심으로 조직을 관리해도 별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현대 산업사회가 되자 문제가 된 것이다. 천리교 내부에도 인맥에 따라 조직을 구성하니 문제가 있다는 소리가 나오지만 실제 조직을 바꿀 만큼의 반향은 없는 듯하다.
계통으로 이어지는 상하관계가 매우 엄격하여 천리교를 폐쇄적인 종교조직으로 만든다는 비판이 있다. 그뿐 아니라 교회장도 세습하기 때문에 더더욱 폐쇄적이라고 한다. 일본 천리교는 물론이고 한국교단에서도 교회장 세습 문제로 신자들이 두 패로 갈려 싸우고 법정 공방까지 한 사례가 있다.
1986년에 있었던 교조 100년제[99] 를 준비하는 동안, 최대한 신자들을 많이 터전으로 오게 하려고 하급 교회장들에게 압박을 가하다가, 이런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하급 교회장들이 자살하는 사건도 여러 건 있었다고 한다. 상급교회에서 하급교회로 이어지는 상명하복식의 계통이 문제를 일으킨 것이다.
월차제 날짜도 하급교회는 상급교회의 날짜를 피해서 지정함이 원칙, 혹은 불문율이다. 상급교회에서 하급교회가 월차제를 하는 날에 때때로 순시를 나오는데, 하급교회에서는 이때 상급교회에 돈을 보낸다고 한다. 일본의 천리교 안티들이 천리교에 반대하게 된 이유로 흔히 말하는 것이 바로 헌금 문제.
사실 여부를 확인하긴 어렵지만 2ch 등에 있는 천리교 관련 스레를 보면, 하급교회가 상급교회에 매달 상납금을 보내기 때문에 상급교회는 부유하지만 하급교회는 빈곤하다는 비아냥이 있다. 일본 인터넷상에서는 천리교도 창가학회처럼 신자들을 착취하는 컬트 단체라고 비난하는 여론이 있다.
이런 스레를 찾아보면 일본 천리교회에서 근행을 하느라 북을 치고 악기를 연주하는 게 시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지만, 항의를 해도 고칠 생각을 안 한다는 불평도 꽤 나온다. 따로 건물을 짓거나, 혹은 적당한 건물을 구입할 만한 재력이 없는 소규모 천리교회에서 일반 저택에 자리잡고 의례를 거행하기 때문에 그런 것 같다. 병을 낫게 하는 수훈을 받게 할 때에도 돈을 받는데, 암환자 입장에서는 그 액수도 무시 못한다는 글 등도 일본 인터넷에서 나온다.
그 외에도 교단의 실권은 신바시라가 아니라 그 밑의 간부들이 쥐고 있다는 말도 있는데, 이것은 일본의 천리교 안티만이 아니라 천리교 신자 일부에서도 하는 말인 듯하다. 위에서 이야기한 천리교 토요후미 교회에서도 신바시라의 말을 간부들이 따라주지 않아서 그네들의 뜻대로 왜곡되었기 때문에 자신들이 부득이하게 독립했다고 설명한다.
11. 사건사고
원래는 천리교 본부 교조전에서 동쪽으로 60 m쯤 떨어진 곳에 미시마(三島) 신사가 있었다. 그 일대 미시마정, 쇼야시키촌을 지키는 신사인데, 미키 생전에는 이치모리(櫟森) 신사라고 불렀다. 고본 교조전에 따르면 미키가 이 신사에서 처음 신내림을 받았으므로 천리교 입장에서도 성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신사가 나카야마 저택과 코앞에 있었기 때문에, 나카야마 저택이 천리교 본부가 되어 부지가 확대되자 신사가 그 안에 들어가버렸다.
1988년, 천리교 본부 건물을 신축하겠다고 미시마 신사 이전을 강행하자 신사의 신자들이 반발하였다. 비록 이전비용은 천리교단이 전부 부담했지만 신사 신자들 입장에서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빼낸다고 여겨, 이면에서는 상당한 갈등이 있었다. 현재에는 원래 자리에서 서북서 쪽으로 630 m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았다.
'터전과 감로대' 항목에서 이야기한 대로, 천리교단은 "사방 8정이 집터."라는 미키의 말을 실현하고자 23만 4백 평 부지 경계를 건물로 둘러버리려고 한다. 그런데 미시마 신사의 새 위치를 지도에서 찾아보면, 천리교단이 확대할 부지 바로 옆에 있다.
그 외에도 미시마 신사의 옛 터 앞에는 카가미가 연못(鏡ヶ池)이 있었는데, 미키가 힘들어서 자살하려고 몇 번이고 연못까지 왔다가 그만 두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교조전에서 동쪽으로 30 m 떨어진 곳에, 한 변이 10 m쯤 되는 정사각형 꼴을 한 연못이었는데, 천리교단이 1999년에 매워버리고 그 자리에 잔디를 심었다. 천리교 신자들 사이에서도 이 연못을 메워버린 일에 대해서는 상당한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미시마 신사 이전, 카가미가 연못 매립은 일본의 천리교 안티들이 종종 까내리는 소재이다.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1986년에 있었던 교조 100년제를 준비하면서 상급교회장들이 압박하는 탓에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하급교회장들이 자살하는 사례들이 있었다.
1993년 1월 20일(수) 천리대학교 조선학과 1학년으로 재학 중이던 재일교포(한국적) 학생이 같은 대학의 1학년 일본인 학생 11명에게 8시간에 걸쳐 집단폭행을 당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피해자는 전치 2주 진단을 받았다고 한다.
폭행당한 이유는 어처구니 없게도 '''건방지게 한국식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이었다. 천리대학은 사건을 보고받고도 이를 은폐하여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때는 5월 상순, 상세사항이 언론에 알려진 때는 6월이 거의 다 되어서였다. 단순한 집단폭행을 넘어 민족차별 문제까지 겹쳐 사건이 심각했다. 전조교 오사카(全朝教大阪) 등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천리교단에 항의하는 공동투쟁회의가 구성되는 등 파장이 확대되자 5월 30일자로 천리시보에 하타바야시 키요쓰구(畑林清次) 표통령이 사과문을 올리고, 그 후로 천리대학교 학장이 사임하기에 이른다.
한국에서 유학 간 학생이었다면 한국에도 알려져 한국언론에도 크게 알려져야 했겠지만, 재일교포였기 때문인지 한국에서는 거의 보도되지 않았다. 1994년 11월 13일자 한겨레 신문에 단신으로 보도되었을 뿐이다. 한겨레 보도에서는 피해자가 조총련계 동포라고 했지만, 전조교 오사카의 당시 회장이 2001년에 쓴 글#에서는 한국 국적이라고 설명하였다.[100]
한겨레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당시 천리대에서는 본 사건만이 아니라 재일교포를 상대로 한 폭력이 여러 건 있었지만, 이에 동조하지 않는 일본인들도 따돌림받을까 봐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고 한다.
2000년 6월 26일, 천리교 교회 본부 신전에서 월차제를 하는 중 웬 청년이 감로대에 달려들어, 신자들 눈 앞에서 나무 감로대가 쓰러지고 신자들은 난리가 나는 사고가 있었다. 사고를 일으킨 사람은 효고현 이쿠노(生野) 대교회 계통 신자였다고 하는데 왜 감로대를 넘어트렸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천리교단은 새로 감로대를 설치하였다.
2000년대 중반, 나라현 텐리시에 있는 에키 크로사이언스(液クロサイエンス)[101] 라는 작은 회사에서 신입사원들에게 강제로 천리교 수양과에 자비로 참가시키고, 참가하지 않으면 회사에서 짜른다고 한다는 인터넷 호소문이 올라온 적이 있다. 사실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 외에도 천리교 신자가 사장인 회사에서 이런 식으로 강제로 수양과에 참석하게 한다는 비난도 일본 인터넷상에 있다.
참고로 수양과에 들어가면 3개월간 그곳에서 숙식하면서 교리를 공부하고, 비용은 보통 8만 엔 이상이라고 한다. 이걸 강제로, 그것도 자기 돈으로 하라고 하면...
2012년 4월, 서울 용산경찰서는 신자들에게 금품을 취하고 돈을 빼돌린 혐의로 종교인 40대 문모씨(여)를 구속했다고 밝혔다.# 2008년에 피해자 A씨에게 아들이 귀신이 들렸으니 영제기도를 드려야 살 수 있다고 말하여 2500만 원을 받아 빼돌리는 등, 7명에게서 9억 원을 받아 가로챘다고 한다. 기사에서 교파명은 밝히지 않았으나, 경찰이 밝히기를 피해자들이 일본에서 온 신흥종교를 깊이 믿는 신자들이라고 했고, '영제'란 말이 천리교에서 조령을 모시는 단에 바치는 위령제를 말하기 때문에 천리교인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2017년 7월 26일 오후 6시 20분, 교회 본부에서 웬 청년이 감로대에 달려들어 무너트렸다고 한다. 2000년에 있었던 사고가 또 발생한 것. 천리교 신자들 사이에서 떠도는 말에 따르면 해당인물에게 정신병 증세가 있었다고 하여, 이 소식을 접하고 천리교인들이 동요했다.
12. 한국의 천리교 역사
창가학회와 함께 일본이 기원인 (신흥)종교단체 중 대한민국에 제대로 정착한 몇 안되는 사례이다.
조선 천리교는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기 대략 1년쯤 전인 1892년 말, 혹은 93년 초에 사토미 지타로(里見治太郞)가 부산으로 밀항하여 포교활동을 하면서 시작했다. 사토미는 종교적 열정에 휩싸여 심지어 가족들에게도 조선으로 간다고 알리지 않고 밀입국하여 포교활동을 하였다. 가족들은 사토미가 부산에서 보낸 편지를 받은 뒤에야 행방을 알았다. 93년 10월에는 양자인 사토미 한지로(里見半治郎)까지 양부 곁으로 와서 포교활동을 도왔다. 사토미 부자는 몇 차례 조선과 일본을 오가면서 포교활동을 계속하여 부산에서 조선인 신자 2백 명 정도를 조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어를 할 줄 몰라 포교활동에 한계가 보이자 조선어를 배우기로 하였고, 사토미가 소속된 고치(高知) 분교회도 이를 지원하였다. 사토미 부자의 조선포교활동이 천리교 잡지를 통해 일본 천리교에 알려지자, 다른 포교사들도 조선어 한 마디도 제대로 할 줄 모르면서 무작정 조선으로 건너왔다. 그러나 사토미 부자가 만든 천리교 신자집단은 1894년에 청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통제가 심해지자 와해되었다.
1901년, 사와무라(澤村)라는 일본인 포교사가 마산 사람 김선장(金善長)에게 교리를 전파하였는데, 김선장은 이후 조선에서 천리교 신자로 계속 활동하고 나중에는 첫 조선인 교회장[102] 이 되었기 때문에 김선장을 실질적인 첫 번째 조선인 신자로 간주한다. 이후 1917년 서울역 앞 동자동(東子洞)에 천리교 포교관리소가 세워지면서 포교활동이 활발해졌다.
일제시대에 '''조선총독부는 조선으로 일본의 신흥종교들이 전파됨을 꺼렸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이런 신종교계 포교사들이 대부분 조선으로 밀항하여 들어온 사람이라는 점, 포교사들이 준비도 갖추지 않고 무작정 들어와 입에 풀칠하기도 바빴다는 점, 그리고 '''근대화된 일본에서 이런 미신적 종교들이 일어났음을 조선인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던 점''' 등을 이유로 꼽을 수 있다. 총독부는 미개화된 조선을 근대화된 일본이 보살펴준다는 입장이었으므로, '미신적인 종교가 일본에서 일어났음을' 보여주는 상황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비록 천리교가 1908년에 일본에서 합법적인 교파신도로 인정받았지만, 일본 내에서도 미신적 종교, 불교의 적대자, 하층민들이나 믿는 천박한 종교라는 인식이 대중적이었고 '천리교 따위 미신적 종교의' 합법화 인정을 취소하라는 청원 또한 빗발치는 상황이었다.
천리교뿐만이 아니라 다른 일본계 신종교 포교사들도 그렇지만, 별다른 준비 없이 대개 종교적 열정만으로 조선으로 밀항하여 들어온 포교사들은 떠돌이 행상 등을 하며 어렵게 입에 풀칠하였다. 이들은 또한 자기가 믿는 종교를 조선말로 사람들에게 설파할 만한 어학 실력도 없었기 때문에, 병든 사람을 종교의 힘으로 치료하는 정도로 조선인들의 이목을 끌어야 했다. 일본어를 할 줄 아는 조선인 신자를 얻어야 비로소 제대로 포교를 할 수 있었다. 일본에서도 그랬지만, 조선에서도 천리교 포교에서 질병치유가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다른 일본계 신종교와 비교해서 '''천리교의 조선 포교실적은 매우 월등했다.''' 통계에 따르면 1924년에 천리교 신자가 된 조선인은 8천2백 명으로 집계됐는데, 조선인 신자수 2위인 금광교가 고작 530명임을 고려하면 일본계 신종교를 믿는 조선인 신자는 사실상 전부 천리교인이라고 해도 되는 수준이다. 1923년에 조선인 천리교 신자 최정현은 이에 대하여 "천리교의 의례나 병을 고치는 의식이 조선의 구습(무속)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하고 주장하였다. 천리교를 접한 일제시대 조선 민중들이 '''천리교 포교사를 '일본에서 온 무당' 비슷하게''' 인식했을 가능성도 있다. 실제로 김선장만 하더라도 천리교로 개종했을 때 가족들이 "일본 무당이 되었다." 하면서 매우 비난했고, 사람들은 조선인 천리교 신자들을 가리켜 '''왜무당'''이라 불렀다고 한다.
사실 일본계 신종교 중에서는 조선에서 가장 월등했던 천리교조차도 객관적으로 사정이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일제시대 천리교 측 기록을 보면, 조선 사람들은 병이 들어 고생하다가 천리교 포교사들의 도움이나 혹은 영검으로 병이 나을지라도 신단에 찾아와서 감사할지언정 내지인(일본인)들처럼 천리교에 입교하는 일은 없다고 한탄하는 내용도 있다. 조선 내 일본인 천리교 포교사들은 대개 일본 안에서도 무식한 축에 속했다. 또한 조선인 천리교 신자들 중에서도 "일본이 뿌리고 다른 곳은 가지라는 말을 받아들일 수 없다." 하거나, 천리교 본부가 조선에 세운 강습소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 등, '''신앙으로서는 천리교를 받아들일지라도 다른 부분으로는 일본을 기꺼워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똑같은 외래종교여도, 이미 1921년에 조선인 장로교/감리교 신자수만 24만 명으로 집계됐음과 비교하면, 조선인 천리교인 숫자 8천 명이 어떻게 느껴졌을지는 뻔한 일이다. 일본종교라는 거부감, 조선어도 제대로 할 줄 모르는 포교사 등에 대한 문제가 겹쳤을 것이다. 일본 천리교 본부에서는 이런 문제를 타파하고자 포교사들의 질적 수준을 높이려고 조선어학과를 개설하는 등 의욕적으로 나섰지만.... 일본이 핵을 맞고 항복해버렸다. 조선에 살던 일본인들이 일본으로 돌아가면서 조선인 천리교 신자들은 낙동강 오리알이 되었다. 참고로 대한천리교에서 발행한 자료를 보면 광복 직후 조선인 천리교 신자 수는 약 2만 명이라고 한다. [103]
일제시대에 일본계 종교 중에서는 천리교가 조선에서 가장 왕성했던 만큼, 광복 이후에는 민중의 혐오도 거셌다. 천리교에 대하여 한국인들뿐만이 아니라 당시 미군정 당국자들도 매우 안 좋게 생각하였다. 미군정은 적산재산이라는 이유로 조선 천리교 소유건물 등 거의 모든 천리교의 재산을 압류하고, 그중 40여 개 부동산을 기독교계에 불하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군정, 그리고 정부 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기독교계에 적극적으로 특혜를 주었다. 오늘날 영락교회 자리도 원래는 천리교 소유 부동산이었으나 적산재산 조치로 인해서 불하받은 것이다. 일부 천리교 신자들이 이런 조치에 항의하였으나, ‘민족반역자’라고 하면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104] 미군정이 조선 천리교 해체명령을 내리자, 천리교인들은 조선의 천리교란 뜻에서 조천교(朝天敎)라고 이름을 바꿔 명맥을 유지하였고, 미군정은 국가신토적인 요소를 없앤다는 조건 아래 겨우 승인하였다. 민중들도 천리교인들을 친일종교라고 생각한 만큼 이런 조치에는 아무 불만이 없었다. 천리교단의 자료를 보면 이 시기에 많은 신자들은 생명의 위협까지 느껴 천리교를 버렸다고 설명한다.
미군정 통치기가 끝나고 1948년에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대중의 인식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천리교는 왜색종교라는 이유로 국민정서상 상당한 반감을 샀다. 그뿐 아니라 병을 치유한다고 나서다가 사람이 죽는 사례가 드문드문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예를 들어 1957년 7월 31일에 마산에 있는 대한천리교 하마산교회 교회장이 4살짜리 남자아이의 목병을 고친다고 목구멍에 손가락을 넣어 장시간 편도선을 만졌다가 치사한 혐의로 수사당국에 끌려갔다는 기사가 있다.(1957년 8월 4일자 경향신문 3쪽)
천리교는 정부가 수립된 1948년, 천경수양원(天鏡修養院)이라는 이름으로 개칭하고 교단을 정비했다. 이미 왜색종교라고 이름이 났기 때문에 일부러 천리교란 말을 피하여 천경수양원이라고 했다고 한다.[105] 천경수양원장은 이순자(李順子)라는 사람이었으나, 6.25 전쟁 때 북한군에게 납북되어 이후 행적을 알 수 없다. 1952년 대한천리교 연합회, 54년에 대한천리교 본원으로 개칭하다가 결국 최종적으로는 재단법인 대한천리교단이 되었다.
<대한천리교>라는 이름으로 모였어도 내부적으로는 서로 생각하는 바가 매우 달랐다. 결국 55년에 세 파로 나뉘었다.
이해(1955)에 천리교 포교사 최재한(崔宰漢 1908-1983)[106][107] 이 밀항선을 타고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 열정적인 포교활동을 하였다. 그 결과 한국 천리교 내에서도 최재한을 따르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상당한 영향력이 생겼다. 위에서 언급한 3파 이외에도 최재한파가 있었다고 말하는 신자도 있을 정도이다.
1956년, 대한천리교 본원은 대한천리교 진흥대제전을 거행하였는데, 식순에 애국가 제창, 국군장병 위령제, 대한민국 만세 삼창, 대통령 만세 삼창이 들어 있었다. 아마 자신들이 반민족적 종교가 아님을 보여주기 위한 몸부림이었을 것이다. 그뿐 아니라 한복을 입고 전통 아악으로 의례를 진행하는 등 왜색을 지우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내부에서도 이런 변경에 대한 반발이 극심하여 결국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정부는 58년에 천리교를 유사종교단체로 규정하여 교단이 법적 지위를 상실하였다.
1960년대 들어 한일국교정상화 논의가 나오기 시작하였다.
1961년, 일본 천리교 해외전도포교부에서는 한국전도청을 설치하여 대한천리교를 천리교 한국교구로 끌어넣으려는 시도를 하였다. 일제시대에 조선포교관리소 소장이었던 이와타 초자부로(岩田長三郎)[108] 를 파견하여 한국전도청 설치를 타진하였다.
이해에 박정희가 5.16을 일으켰다.
1963년, 대한천리교 본원이 다시 종교단체로 등록, 문공부 인가를 취득하였으나 교리실천회와 연합회는 그러지 못하였다. 결국 교단이 다시 통합되었으나 내부적 갈등은 여전히 상존하였다. 재단운영과 재산문제로 서로 비방하고 고소하여 엄청난 갈등이 생긴다. 최재한이 대한천리교의 2대 교통으로 취임하였지만, 전도청이나 연합회 사람들, 그리고 일본 천리교 본부 사이에 끼어 이리 채이고 저리 채이다가 결국 나중에는 제적당하는 등 정상적인 교단 운영이 불가능한 상황에 처하여 혼란스러웠다. 최재한도 이러는 와중에 상당히 내적 갈등이 심했던 듯하다.[109]
이해 12월, 국가재건최고회의는 의료보험법을 제정하였다. 의료보험은 천리교의 교세확장을 억제한 요소일 수 있다.
1964년부터 언론에서 천리교를 주목하고 신문기사를 쓰기 시작했음이 눈에 띈다. 박정희 정권은 64년부터 본격적으로 한일회담과 협정을 추진하였다. 이 소식이 언론을 통해 전해져 여론이 들끓자, 당시 한국에 들어온 창가학회와 천리교가 덩달아 주목을 받았다. 64년 2월 12일자 동아일보에서는 경남 진해시를 중심으로 천리교가 영남 일대로 퍼지고 있다고 우려하는 어조로 기사를 썼다. 동년 3월 20일자 동아일보 사설에서는 (한일협정 타결을 위한) 한일회담에 앞서 우리의 정신과 자세를 확인해야 한다면서, 일본 종교인 창가학회나 천리교가 교세를 확장하는 것을 우리 자세에 문제가 있다는 예시로 들었다. 언론보도에 따르면 이 무렵 천리교는 신도수가 약 15만 명이었다.
1965년 6월 22일에 한일협정이 조인되자 국민들 사이에서 반일감정이 다시 들끓었고, 천리교는 이러한 국민감정을 감당해야 했다. 65년 8월 5일자 경향신문 보도를 보면, 양찬우 당시 내무부 장관이 "헌법상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지만, 우리 헌법이 3.1 정신에 입각하므로 민족정기를 침해하는 종교단체를 경찰력으로 단속하겠다. 위헙행위와 사기행위에 대해서는 형법을 적용하겠다." 말했다고 보도하였다. (당시 신문기사에서는 특히 천리교와 창가학회를 예로 드는데, 그 중에서도 창가학회가 교세를 확장하면서 정치적인 방법을 사용하므로 천리교보다 더 위험하다고 서술했다.)
같은 해 8월 11일에는 몇몇 대학생들이 당시 서울 성동구에 있는 대한천리교 본부에 들어가 "민족정기를 잃지 말라." 하는 경고문을 붙이다가 신자들에게 들켜 도망가고, 광복절 새벽에는 역시 같은 인물이 친구들과 함께 대한천리교 본부에 들어가 태극기로 얼굴을 가리고 신단을 파괴했다가 그 중 한 명이 경찰에 연행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동년 8월 17일, 문교부는 천리교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신앙대상인 천리왕의 개념과 정의, 천리교의 의례와 복장 등을 민족정신에 걸맞게 개정할 것, 일본 천리교와 모든 관계를 단절하고[110] 일본으로 순례하지 말 것, 미신적 포교 행위[111] 를 금할 것을 요구하고,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유사종교단체로 규정하겠다고 통첩하였다.
결국 9월에 당시 교통 최재한의 이름으로 각 교회에 '시정사항'을 보내어 정부의 요구대로 의복, 의례 등을 고치라고 전달하고, 10월에는 일본 천리교 본부의 신바시라 나카야마 쇼젠에게 ‘대한천리교는 독립적이고 자주적인 교회‘라는 내용으로 서한을 보내었다. 하지만 아직 상황은 끝나지 않았다.
1966년 2월 12일, 경찰이 대한천리교 2대 교통 최재한 등 간부 6명은 입건하고, 대한천리교 본부 재무국장은 사문서를 위조하고 공금을 횡령한 혐의로 긴급체포하였다.[112] 최재한 교통은 경찰 소환에 불응하다가 22일에 성동구 인창동의 어느 길거리에서 검거되었다.
이 시기 신문기사를 보면, 대한천리교 본부만이 아니라 지방 교회에서도 신자들이 올린 돈을 주먹구구로 관리했기 때문에 67년에는 교회장이 공금을 횡령하다가 적발되기도 하는 등[113] 많은 파란이 있었다. 정부가 천리교를 유심히 지켜보는 와중에 이런 비리까지 털린 것이다.
경찰은 일본의 종교법인 천리교로부터 한국 천리교로 (불법적인 루트를 통해) 자금이 전달된다는 의혹이 있어서 이쪽으로도 수사를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나온 신문기사에서는 '경찰은 앞서 천리교에 관하여 조사하였으나 무위에 그쳤다.'고 보도하는 것으로 보아, 혐의 입증에 실패한 듯하다.
동년 동월 17일자 조선일보에서는 '파고드는 천리교의 촉수'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보도하였다. 해당기사는 "(천리교가) 한국 사회의 커다란 정치적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일본 문화 침투의 첨병적 존재……천리교를 믿으면 만병을 통치할 수 있다는 허무맹랑한 말로 꾀었다." 하고 서술하고, 양찬우 내무부장관이 천리교를 '민심을 현혹하고 민족주의 주체성을 해치는 유사종교단체'로 단정하여 철저한 단속을 다짐했지만, 경찰은 교리면으로는 손도 못 대고 간부들만 범법행위로 잡아들였다고 전했다.
동년 4월 8일에는 대한천리교 충무교회 신도 250여 명이 "일본 종교에 우리는 속았다.", "민족정신 되살려 천리교 믿지 말라." 하는 전단을 뿌리고 집단탈퇴하기도 하였다. 탈퇴신도들은 "천리교를 믿으면 병이 낫는다는 말에 속아 천리교를 믿었다. (천리교가) 민족 정체성을 잃게 하는 왜색이 짙은 종교임을 알았기 때문에 탈퇴한다." 하고 말했다. (경향신문 1966년 4월 9일자 7쪽)
이러한 언론보도를 통해 60년대 한국 사회가 천리교를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또렷이 알 수 있다. 대한천리교 홈페이지에서는 1960년대 중반의 이런 동향에 대해서는 말을 삼가고, 다만 64년에 1차 자체정비, 65년에 2차 자체정비를 했다고만 설명한다. 이 시기 신문기사에서 '천리교를 믿으면 병이 낫는다고 혹세무민한다'는 내용이 반복적으로 나오므로 미루어보건대, 이때에도 천리교 포교에서 질병치유는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중요한 요소였던 모양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병을 치유한다는 수훈을 전면에 내세워서 포교했을 것이다.'''
대한천리교는 이처럼 왜색종교, 일본의 앞잡이라고 지탄받음이 한스러웠는지 토착화에 힘을 기울였다. 1984년에 조선일보 기사를 계기로 다시 천리교가 국민적 반일감정과 맞닥트리고 문화공보부도 천리교에 자료를 요구하자, 85년에 아예 신토 냄새가 풀풀 나는 신각(神閣)을 철거하고 감로대를 목표(예배대상)로 삼으라고 산하 교회에 지시하였다.
원래 일본 신토에서 신체(神體), 즉 신의 상징물(혹은 신성이 깃든 물건)로 금속 거울을 모시는 경우가 흔한데, 천리교에서는 신각이라 하여 마치 건물처럼 생긴 목조 구조물(신각)에 거울을 설치하고 이를 신앙물로 삼는다. 하지만 대한천리교에서는 왜색을 없애고자 신각을 파괴하고 대신 육각형 기둥처럼 생긴 목조 감로대(甘露台)[114] 를 그 자리에 안치하고, 감로대를 모신 단 또한 한옥풍으로 다듬었다.
야시마 히데오가 이치노모토 분서 사적보존회를 이끌면서 발표한 자료들이 대한천리교가 이러한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교리적 근거를 제공하였다.
이러한 조치에 반발하여 1986년 6월, 대한천리교 부산/경남교구의 일부 신자들이 <한국 천리교 연합회>라는 이름으로 이탈을 선언하면서 양분되었다. <한국 천리교 연합회>는 지금은 <천리교 한국교단>이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천리교 한국교단은 61년에 설치된 한국 전도청 산하에 들어갔다. 토착화를 추구한 대한천리교는 (과거에 정부와 사회가 요구한 대로) 일본 천리교와 관계를 끊었지만, 천리교 한국 교단에서는 일본 천리교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자금 지원도 받는다고 한다.
많은 교회들이 한국 교단에 가세하여, 대한천리교는 교세가 더욱 줄어들었다. 안 그래도 한국에서 천리교가 소수 종교인데, 대한천리교가 더 이상 천리교를 대표하는 단체가 되지 못할 정도이다. 한국교단이 일본에서 자금지원을 받는데 반하여, 대한천리교는 그런 것이 없으므로 더 불리하다.
60년대에는 언론에서 경계할 정도로 교세가 커지던 천리교는 7-80년대를 거치면서 교세가 쪼그라들어, 지금은 정말 존재감을 잃어버렸다.
12.1. 국내 현황
한국에서 천리교는 <대한천리교>와 <천리교 한국교단>으로 양분되었다. 대한천리교 신자와 천리교 한국교단 신자 사이에서는 감로대/신각, 더 넓게는 토착화 문제가 그야말로 불꽃 튀도록 대립하는 주제이다.
상술하였듯 역사는 대한천리교가 더 오래되었으나, 사회적 압박을 피해 왜색을 탈피하려고 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생겨 1986년에 천리교 한국교단이 갈라졌다. 대한천리교는 일본 천리교 본부와 관계를 단절하였으나 한국교단은 일본 천리교의 한국 지부로 계통을 유지한다. 대한천리교는 천리교 한국교단을 황도신토와 영합한 일본 천리교에 종속되려는 줏대도 없는 놈들로 간주하고, 천리교 한국교단은 대한천리교를 교단의 원칙을 무시하고 자주라는 이름으로 이단적 행위를 정당화하려는 놈들로 간주한다.
교단이 분열하면서 산하교회의 소속을 두고 싸움이 벌어지기도 했다. 초대 교회장 최재한[115] 이 1959년에 세운 원남성(元南星)교회가 그런 경우이다. 초대교회장이 사망한 뒤 대한천리교와 천리교 한국교단이 각각 교회장을 임명하여 충돌하였다. 결국 양 교단이 저마다 원남성교회를 별개의 장소에 세우는 것으로 된 듯? 천리교 한국교단 측 원남성교회는 2001년에 전도청에 토지를 기부하여, 2002년에 전도청이 서울에서 현재의 위치(경남 김해시)로 이전했다. 한국교단 원남성교회 역시 전도청에게 토지를 넘긴 뒤 김해시 화목동으로 이전하였다. 둘 다 김해로 온 탓에 김해시민들은 꽤 자주 보게 되는데 서상동 사거리에서 천리교인들이 박자목을 두드리면서 포교 활동 하는 모습을 가끔 볼 수 있다.
2010년대에 들어서 천리교 한국교단 동래교회의 교회장 자리를 두고 분란이 일어났다. 한국교단의 교통이 동래교회장을 파면하고 다른 사람을 교회장으로 임명하자 원래 교회장과 새 교회장간 싸움이 붙었다. 두 사람이 부산지방법원에 각각 소송하여 상반된 판결을 받아내자 언론에도 보도가 되었다. 새 교회장은 법정에서 한국교단의 임명장을 근거로 삼아 자기가 정당한 교회장이라 주장하였고, 부산지법은 이를 인정하였다.
그런데 원래 교회장 역시 부산지법의 다른 재판부에 소송을 제기하여, '''천리교 한국교단의 교통이 교회장 임면권을 갖는다는 교헌은, 일본 천리교에 예속됐다는 비판을 피하고자 실제로 적용하지는 않을 생각으로 만든 것이므로''' 천리교 본부가 아닌 한국교단이 교회장을 파면할 수 없다고 판결을 받은 것이다. 같은 법원에서 서로 상반된 판결이 나오자 언론에도 보도되었고, 결국 두 사람 다 항소하기로 하였다. 연합뉴스 보도기사
일본 천리교와 분명하게 선을 그은 대한천리교와 달리, 천리교 한국교단은 일본 천리교와의 관계에서 매우 어중간한 입장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는 사건이기도 하다. 또한 한국교단에서도 일본 천리교에 예속되었다는 비판을 의식했음을 알 수 있다.
대한천리교 본부는 경기도 의정부시 호원동 망월사역 근처에,[116] 천리교 한국교단의 본부 격인 한국 전도청은 경상남도 김해시 생림면에 있다.
두 교단을 합쳐 한국 천리교인이 대략 30만 명 남짓이라고 설명하는 자료도 있긴 한데 믿기는 어렵다. 문화공보부에서 1974년에 발행한 『종교법인 단체 일람표』에 따르면, 당시 대한천리교(교단 분열 이전)의 신자 수가 36만 8천 명이라고 하는데[117] 1974년 당시 한국총인구수 3470만 명 대비 1%에 불과하다. 나이든 천리교인들이 '신도 수가 그때와 비교하면 바닥을 쳤다.'고 이야기하므로, 신자 수가 그때보다 줄면 줄었지 절대로 늘진 않았다.
신뢰할 만한 통계자료는 없지만, 2000년대에 발표된 몇몇 논문들에서는 2004년을 기준으로 대한천리교 3만 명, 천리교 한국교단 15만 5천 명이라고 서술한다.[118] . 2004년 총인구수 4810만 명 대비 0.38%라는 안습한 수치.
그런데 2005년에 통계청이 인구주택총조사를 하면서 종교인구를 집계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불교, 개신교 등 8개 종교[119] 를 제외한 기타종교인 수가 16만 3085명이다. 천리교는 당연히 기타종교로 들어가는데, 당연히 천리교인이 아무리 많아도 16만 명을 넘을 수 없다. 대한천리교/천리교 한국교단이 이야기하는 신자 수에 거품이 심함을 알 수 있다. 통계에서 별도로 항목을 잡지 않았을 정도로 교세가 미약함을 감안하면, 3만 명 이하일 가능성도 상당히 있다.[120]
'''천리교인들 사이에서는 실제 신자 수가 4천 명쯤이 아니냐는 비관적인 추측도 나오는 듯하다.''' 게다가 젊은 신자들이 안 들어오기 때문에 신자들 중에서는 60을 넘어 70대인 사람이 흔하다고 한다.[121]
심지어 2015년에 천리교 한국교단에서 천리교 포교의 집 연수생을 모집하면서 낸 광고에는 '''꺼져가는 이 길(천리교)의 생명을 두 어깨에 짊어진다'''고 표현했을 정도로 미래가 보이지 않는다. 신자가 적을 뿐만 아니라 새로 들어오는 신자도 없다는 내부적 위기감이 드러난 말이다.
천리교의 그 얼마 안 되는 신자들은 서울이 아니라 오히려 경상도에 많다. 초기 천리교 포교사들이 경상도에서 많이 활동했던 역사의 흔적인 듯하다. 전도청이 김해시로 내려간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특히 경상남도 창원시(정확히는 옛 진해시)는 한국 천리교에 있어서는 고향이라고 해도 되는 곳이라고 한다. 위에서도 언급한 바, 1960년대에도 진해시를 중심으로 영남 지방에 천리교가 퍼진다는 기사가 보도되었다.
그 외에 제주도에도 천리교 신자가 나름대로 있었다. 제주도에는 일본에서 종교를 믿게 된 재일동포 신자들이 고향으로 돌아와 포교하면서 일본종교가 퍼진 경우가 많은데 천리교도 그러하다. 1945년에 재일동포 신자가 제주도로 돌아와 교회를 세우면서 병을 낫게 한다는 소문이 돌아 6-70년대에 교세가 활발했으나 80년대 이후로 수그러들었다.
신자 수는 천리교 한국교단이 더 많지만, 언론에 보도되는 횟수는 대한천리교가 훨씬 많다. 자주교단을 표방하고, 본부가 서울에서 가까운 덕분인 듯하다. 인터넷상에서는 대한천리교 홈페이지와 몇몇 카페가 활발한데 반해서, 천리교 한국교단은 소속 신자들의 블로그나 사이트가 상대적으로 활발한 편이다. 반대로 한국교단의 홈페이지는 정말 간신히 구색만 갖춘 정도라, 홈페이지만 보면 양 교단의 교세가 서로 뒤바뀐 줄 알 지경이다.
대한천리교는 왜색을 없애려고 했기 때문에 왜색이 풀풀 나는 핫피나 교복을 입지 않지만, 천리교 한국교단은 핫피도, 교복도 흔하게 입는다. 기모노를 차마 입지 못하는 대신 교복을 입기 때문에, 일본 천리교회보다 교복을 입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관공서에서 천리교 한국교단에 "민원이 많이 들어오므로 왜색 복장을 자제해주시길 바랍니다." 하는 공문을 보내곤 했다고 한다. 2천년대 들어서 과거보다 반일감정도 약해지고 일본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보자는 생각이 확산된 덕분에, 과거보다는 천리교에 대한 인식도 부드러워질까....했는데, 아예 존재감을 잃어버렸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는 어른들이나 "그런 종교도 있었지." 하는 수준. 다만 상대적으로 영남에 천리교인이 집중됐기 때문에 여기서는 다른 지역보다 조금 더 알려졌다.
한국 천리교는 반일감정 + 마이너한 종교라는 불리한 점 때문에 일본 천리교와 분위기가 다르게 형성된 듯하다. 한국에서 천리교인들은 천리교의 내부 분위기를 '상당히 자유롭다'고 평가하는데, 일본에서 천리교를 뛰쳐나온 사람들이 올린 글을 보면, 부모가 천리교를 강요하여 자신을 세뇌하려 했다고 분노하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 젊은 신자들은 가족들이 천리교를 믿기 때문에 자연히 믿게 된 경우가 대부분이며, 성장하면서 학교 등에서 다른 사람들을 통해 천리교에 대한 인식을 접하고 상당히 큰 종교적 회의를 겪는다. 그나마 이런 젊은이들이 천리교 밖으로 나가지 않게 잡아주는 것은 비슷한 젊은이들이 모인 청년회, 그리고 일본 천리교 본부가 있는 터전으로 순례하는 체험 정도에 불과하다.[122] 모태신앙이 아닌 신자들의 입교동기도 질병치유가 가장 많아, 젊은 사람들의 다른 종교적 욕구를 잘 충족하지 못한다. 비슷하게 일본에서 온 외래종교 창가학회와 비교해도 이 점이 드러나는데, 창가학회의 젊은 층들은 입교동기에서 질병치유는 비중이 적다.
못 살던 시절에는 인맥을 통해 질병치유를 내세우며 하는 포교방법이 정부와 언론이 경계할 정도로 잘 통했지만, 이제 한국도 꽤 잘 살기 때문에 사람들의 종교적 욕구도 변해서 과거의 방법이 잘 통하지 않는다. 똑같이 일본종교라고 탄압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창가학회는 사정이 천리교와 비교할 수 없이 좋다.
12.2. 의료보험과 천리교 교세
보통 천리교가 한국에서 세를 잃어버린 이유로 1차적으로는 국가적 탄압을 든다. 60년대 중반에 명백히 국가의 공권력으로 교단이 억압받고 탄압받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똑같이 일본종교라고 탄압받은 창가학회는 멀쩡히 살아남았음을 설명할 수가 없다.
천리교는 창교 당시부터 지금까지 줄곧 병을 치유하는 종교적 영험으로 신자를 끌어모았다. 이것은 교조 나카야마 미키 본인이 질병으로 아이들을 잃고, 또 본인도 아팠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일제시대 조선인 신자들도 일본 무당이라는 악담을 받으면서도 질병이 나았기 때문에 천리교에 입교한 사례가 많았다.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새로운 신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종교적 동력/매력이 이것밖에 없었다.
한국에서도 과거의 극심한 반일감정 속에서도 단지 병이 나을 수 있단 말을 믿고 천리교에 입교한 사람들이 많았다. 이 무렵에는 한국의 병원들이 수준이 낮았을 뿐만 아니라, 전국민 의료보험이 없어서 서민들이 병원에 가기가 더욱 부담스러웠기 때문에, 그 대안으로서 종교적 치유가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힘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63년에 의료보험법이 제정되고, 이후 자영업자 등을 시작으로 부분적 의료보험을 확대하다가 89년에는 전국민 의료보험 실시를 달성하였다. 천리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감수하고 병을 치유하겠다고 천리교에 입교해야 할 필요성이 낮아진 것이다. 병원에서도 치료하기 힘든/치료비를 감당하기 힘든 암 같은 난치병이 아니고서는 종교적 치유에 의탁해야 할 동력이 사라졌다.
또한 이런 난치병을 앓는 환자가 종교적 치유에 의탁한다고 해도 주변에서 보기 힘든 천리교도에게 찾아가기보다는 더 흔한 사찰이나 교회 등을 찾아가게 되므로, 천리교 입장에서는 더욱 악순환에 놓였다.
13. 매체에서
일본 애니메이션 신만이 아는 세계에 나오는 아유카와 텐리의 이름이 킨테츠의 이 텐리역, 다시 말해 천리교에서 유래했다.[123]
아베 야로(安倍夜郎)의 만화 ≪날 때부터 서툴렀다(生まれたときから下手くそ)≫(2016)에서 주인공 마코토의 할머니가 천리교 신자이다. 국내에도 2016년 5월 미우 출판사에서 번역 출판하였다.
사실 이 역보다 46년이나 앞서서 종교명을 딴 역명의 원조가 있기는 하다. 콘코역 문서 참조.
14. 기타
- 이 종교의 본산이 위치한 나라현 텐리시의 이름은 이 종교단체에서 유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