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기군
八旗軍(팔기군) ・ 八旗制(팔기제) | ᠵᠠᡴᡡᠨ ᡤᡡᠰᠠ(자쿤 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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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양황기, 양람기, 양백기, 양홍기, 정람기, 정황기, 정홍기, 정백기
'''팔기군(八旗軍)''' 또는 '''자쿤 구사(jakūn gūsa)'''는 청나라의 군사 편제로, 유목민이었던 만주족의 특성상 그 제도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에 '''팔기제(八旗制)'''라고도 한다. 고려대학교에서 청사(淸史)를 연구하는 이훈 교수는 팔기제가 더욱 정확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팔기는 군사적 기능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정치 각 분야에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팔기군이라는 용어는 팔기제의 군사적 기능만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만주어 '자쿤 구사'에서 '자쿤'은 숫자 '8'을, '구사'는 '깃발'을 뜻했다. 즉, '팔기'이다. 숫자 8은 청나라의 중앙군이었던 8개의 집단을 지칭하였으며, 이들을 깃발의 색깔로 구분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정착되었다. 깃발은 남색, 황색, 백색, 홍색 4가지 색을 가지며, 깃발 전체가 단색인 정람기, 정황기, 정백기, 정홍기와 깃발에 홍색 테를 두른[1] 양람기, 양황기, 양백기, 양홍기 총 8개 기가 있어 팔기라고 했다. 모든 구분은 깃발로 이루어졌고 깃발이 곧 부대가 되었다[2] .
만주어로는 정은 구루(Gulu), 양은 쿠부허(Kubuhe)라고 했고 황백홍남의 4색은 각각 솨얀(Suwayan), 샹얀(Šanggiyan), 풀갼(Fulgiyan), 라문(Lamun)이라 했으며, 기(旗)는 구사(Gūsa)라고 불렀다. 즉 정황기는 구루 솨얀 구사(Gulu Suwayan Gūsa), 양백기는 쿠부허 샹얀 구사(Kubuhe Šanggiyan Gūsa)가 된다.
청나라가 중국 대륙 전체의 지배권을 획득한 이후에는 팔기 제도가 사회 계층 집단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기를 반드시 군단으로만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전시에는 기 단위로 부대가 편성되었지만 실제 각 기에 속하는 기인들은 훨씬 넓은 외연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홍타이지 치세부터는 만주족으로 구성된 오리지널 팔기 외에도 몽골인들로 구성한 팔기몽고[3] 가 더해졌고, 홍타이지 말년에는 그간 '우전 초오하', 한역하자면 중화기를 다루는 '중군'으로 불리며 한족들이 주로 담당했던 포병대와 수군을 팔기한군으로 증편, 입관 이후 순치 연간에 팔기마다의 배속이 완료되었다. 다만 세간의 오개념과 달리 팔기만주, 팔기몽고, 팔기한군이 제각기 8기씩 편성되어 모두 24기로 이뤄졌던 것은 아니고, 8개의 깃발마다 보통 황족 내지는 만주인인 기주의 휘하에서 만, 몽, 한 서열로 모두 배속되어 군단별로 움직였다.
팔기군은 청나라의 시조인 건주부 여진족의 칸인 누르하치가 17세기 초에 설립하였다고 전하며[4] 청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후 청나라 제도의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이 때 팔기군 중에서 상위 3개 깃발군 즉 정황기, 양황기, 정백기[5] 는 황제의 직속부대이고 나머지 5개의 깃발군[6] 은 여러 제후들의 관할이었다. 각 군단에 대한 지휘권을 누가 장악하느냐는 청나라 권력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7] , 최종적으로 청나라가 중국 대륙의 지배권을 확보한 이후인 옹정제 시기 팔기는 황제 아래에 모두 직속되었다.
팔기군은 1601년 누르하치가 여진족 각 부족의 부대를 깃발로 구분하는 군단으로 재편한 것에서 출발한다. 이후로 만주족이 내몽골 고원으로 진출하면서 바요트 등의 내몽골 거주 할하 부족들인 내할하 부족들, 투메드, 차하르, 오르도스부 등 내몽골 출신의 몽골인 부족들도 이 시스템에 편입되었고, 이후로 요동을 함락하면서 한족도 이 제도로 편입하였다. 이 때 만주족으로 구성된 원조 팔기를 팔기만주, 그리고 몽골인은 팔기몽고, 한족은 팔기한군이라 칭했다.
청나라가 중국 대륙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다지기 전까지 팔기군은 상당히 개방적인 조직이었다.[8] 위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만주인이 아니라도 팔기에 적극적으로 편입시켰다. 사르후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 원정군 포로들 또한 팔기의 일부로 편제되기도 했다.[9] 심지어 강희제 시절에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코사크 병사들 중 일부가 양황기에 편입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 유명한 나선정벌이 이때 일이다.
입관 이후, 남명과의 싸움이나 삼번의 난 당시 한족 군대와의 싸움에서도 투항병이나 베이징 인근 거주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팔기군 안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준가르를 갈아엎으며 외몽골, 칭하이성, 티베트, 신장 위구르 자치구, 쓰촨성 서부 등 서부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튀르크계 부족들이나 티베트인, 오이라트인 등도 새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삼번의 난까지 종결되고 중원에 대한 청나라의 독점적인 지배권이 확립되자, 팔기군은 새로운 인원의 유입이 차단되었으며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는데 지배 집단으로서 기능했다. 여기에는 팔기 안에 포함된 팔기몽고[10] , 팔기한군 등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같은 한족이라도 팔기한군과 일반 한족은 전혀 다른 신분이었다.
팔기만주가 팔기군 안에서도 서열은 확고했고 팔기몽고가 그 다음, 그리고 팔기한군 순으로 서열이 정해졌다. 전체 인원은 입관 당시 1644년을 기준으로 팔기만주가 40~45%가량을 차지하고 팔기몽고 22%, 나머지가 팔기한군이었다.[11]
이후에 팔기군 인구가 늘어나면서 팔기한군은 건륭제 치세에 대거 출기 조치되었는데, 초기 입관 당시 화포나 수군을 담당하며 전투력에서 상당한 도움이 되었던 팔기한군이 몽골이나 만주 출신에 비해 한족 생활에 물들었기 때문에 18세기부터 "원래 한족이었으니 쟤네는 어쩔 수 없다" 식으로 한족으로 강등되었다. 사실, 팔기한군 당사자들도 기적에 들면 오로지 군바리고 만주인이나 몽골인에 비해서 대우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몰래 장사를 하다가 적발되는 등 기적에 미련이 없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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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팔기(駐防八旗)의 분포도(•)
청은 기존의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활용하여 주방팔기를 배치했다.
이러한 지배집단으로서의 팔기군이 소멸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중국 대륙에 대한 지배력을 구석구석 침투시키기 위해 청나라는 팔기군을 각지에 파견-주둔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일반 한족 피지배층과는 완전히 분리시켜 생활하도록 하였다.
당시 팔기군은 수도인 베이징 내성에 거주하는 금려팔기(禁旅八旗)와 각 지역 요충지에 주둔하는 주방팔기로 구분되었다. 청나라는 베이징 내성의 한족을 모두 몰아낸 다음 오직 금려팔기만이 베이징 내성에 거주할 수 있게 했으며 한족과 섞이는 것을 금지했다. 각지의 주방팔기들 역시 지방에 주둔하면서도 주둔지역에서 주방팔기의 거주지를 성벽을 이용해 철저히 격리하였다. 이는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팔기가 인구상으로 훨씬 많은 일반 한족들에게 흡수되지 않게 하는 장치가 되었다. 각지에 파견되어있던 주방팔기는 한족으로 이루어진 군대인 녹영과 함께 청나라의 주요한 군사력으로 기능했다.
엄밀히 말하면 팔기 자체가 만주족에 대한 일종의 군사-행정체계이자 예비군 동원 체제이자 만주족의 정체성이었다. 모든 만주족을 팔기에 소속시킴은 물론 일부 몽골인들과 한족 또한 팔기에 소속시켜서 만주족으로써의 정체성을 갖는 경우가 생겼다. 이들은 각지의 대도시에 존재했던 특수 행정구역이자 전용 주거지역인 '팔기주방'에서만 거주할 수 있었고 함부로 한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거주할 수 없었으며 만주인은 자유롭게 한인 여자를 취할 수 있었지만 한인은 만주인 여자를 취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들의 원래 본거지인 만주에서조차도 한인 지역에 거주할 수 없었다. 이는 만주족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한족으로의 동화를 방지하는 동시에 만주족만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피지배층인 한족과의 충돌과 한족에 대한 착취를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주방팔기는 각 지방의 치안유지 역시 맡았으며 반청복명 운동 등 불순한 운동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삼번의 난 진압도 푸젠성, 광동성의 주방팔기 몫이었으며 대만 원정 때도 푸젠과 저장 지방의 한군팔기들이 대거 참여해 결국 정씨 왕국을 3대만에 간판 내리도록 하였다. 이후 광동 주방팔기는 팔기한군의 대거 방출로 전력이 약화된 가운데 1841년 영국과 치른 아편전쟁에서 참패, 결국 홍콩을 영국에 넘겨주게 되었고 이후 태평천국의 난이나 의화단 등도 진압 못 하고 빌빌거려 결국 증국번, 이홍장 등이 모은 상승군으로 진압해야 했다.
사실 만주족의 주축이 된 건주여진은 수렵과 농경을 겸한 민족으로 순수 유목 기마민족과는 좀 달랐다. 그래서 사냥을 다닐 때 각 깃발 별로 제대를 편성하던 습관이 팔기의 원조가 된 것이다. 물론 여진족이라고 아주 유목민이 아니었던 건 아니며 북만주와 연해주의 야인여진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기마민족의 성격을 띄었는데 이 지역들은 건주부의 영역인 남만주가 농사가 가능하고 숲이 대부분인 것과 달리 척박하기 짝이 없어서이다. 원래 퉁구스 자체가 돼지와 순록을 방목하던 사람들이었으며 남하하면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건주부는 일찍이 한반도와 가까워 한반도를 통해 문명화된 지 오래였다.
그러나 청나라 후기로 가면서 팔기군은 차츰 청나라 정부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 그 자체로 전락했다.[13] 팔기군은 군사조직인 동시에 이민족에 의한 정복 왕조인 청나라의 중국 통치의 기반이 되는 지배집단이었기 때문에 결코 폐지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팔기군의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직업군인[14] 이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팔기군에게는 국가가 녹봉을 지급하였는데 팔기군의 전력이 심각하게 떨어져서 실질적으로 군사적 역할을 전혀 수행할 수 없는 상황[15][16] 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녹봉을 지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한족과의 동화를 막기 위해서 다른 직업을 가지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문제가 더더욱 심각했다.
이처럼 청나라 군사력의 중핵이었던 팔기군은 청나라 말기에는 진짜로 유명무실한 오합지졸로 전락해 아편전쟁/태평천국 운동/청일전쟁/청불전쟁에서 팔기군은 도움은 커녕 백성들을 약탈했다가 역으로 발리기 일쑤였다. 아편전쟁 때의 경우도 몽골족인 승격림심이 이끄는 팔기몽고군이 영국+프랑스 연합군을 상대로 분전했으나 패배했다. 청불전쟁 때 역시 베트남 북부에서 일어난 육상전투에서 실질적으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전력으로 남았던 팔기몽고는 근대화된 프랑스군의 기관총 사격에 갈려나갔으며 청일전쟁 때는 평양성 근처에 주둔한 팔기몽고 부대도 약탈을 벌여 조선인의 원망을 샀으며 약탈에 정신이 팔려있다가 일본군에게 포격을 당해 썰려나가기 일쑤였다. 결국, 이 모든 땜빵은 한족으로 구성된 의용군인 상승군이 맡아야했다.[17] 이때, 후난 성의 선비인 증국번과 그 제자 이홍장은 의용군을 모집하여 태평천국을 토벌하였고, 이후로 이홍장이 실권을 잡자, 이 의용군을 기반으로 청나라의 신식 군대인 북양군이 만들어진다.
그래도 유명무실하게 팔기군은 존재했다고 하지만, 이미 19세기 말의 청나라의 주력은 북양군이었다. 그리고 이 북양군의 지휘관들이 나중에 중국 군벌의 시조가 되며, 쑨원과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소속 국부군에게 흡수당하거나 패배한다.
결국 1912년에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서고 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으며,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가 자금성을 떠났던 1924년까지 존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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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 양황기, 양람기, 양백기, 양홍기, 정람기, 정황기, 정홍기, 정백기
1. 개요
'''팔기군(八旗軍)''' 또는 '''자쿤 구사(jakūn gūsa)'''는 청나라의 군사 편제로, 유목민이었던 만주족의 특성상 그 제도가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것으로까지 확대되었기 때문에 '''팔기제(八旗制)'''라고도 한다. 고려대학교에서 청사(淸史)를 연구하는 이훈 교수는 팔기제가 더욱 정확한 표현이라고 주장한다. 팔기는 군사적 기능 뿐만 아니라 경제, 사회, 정치 각 분야에서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였는데, 팔기군이라는 용어는 팔기제의 군사적 기능만을 강조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만주어 '자쿤 구사'에서 '자쿤'은 숫자 '8'을, '구사'는 '깃발'을 뜻했다. 즉, '팔기'이다. 숫자 8은 청나라의 중앙군이었던 8개의 집단을 지칭하였으며, 이들을 깃발의 색깔로 구분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명칭이 정착되었다. 깃발은 남색, 황색, 백색, 홍색 4가지 색을 가지며, 깃발 전체가 단색인 정람기, 정황기, 정백기, 정홍기와 깃발에 홍색 테를 두른[1] 양람기, 양황기, 양백기, 양홍기 총 8개 기가 있어 팔기라고 했다. 모든 구분은 깃발로 이루어졌고 깃발이 곧 부대가 되었다[2] .
만주어로는 정은 구루(Gulu), 양은 쿠부허(Kubuhe)라고 했고 황백홍남의 4색은 각각 솨얀(Suwayan), 샹얀(Šanggiyan), 풀갼(Fulgiyan), 라문(Lamun)이라 했으며, 기(旗)는 구사(Gūsa)라고 불렀다. 즉 정황기는 구루 솨얀 구사(Gulu Suwayan Gūsa), 양백기는 쿠부허 샹얀 구사(Kubuhe Šanggiyan Gūsa)가 된다.
청나라가 중국 대륙 전체의 지배권을 획득한 이후에는 팔기 제도가 사회 계층 집단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기를 반드시 군단으로만은 볼 수 없게 되었다. 전시에는 기 단위로 부대가 편성되었지만 실제 각 기에 속하는 기인들은 훨씬 넓은 외연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홍타이지 치세부터는 만주족으로 구성된 오리지널 팔기 외에도 몽골인들로 구성한 팔기몽고[3] 가 더해졌고, 홍타이지 말년에는 그간 '우전 초오하', 한역하자면 중화기를 다루는 '중군'으로 불리며 한족들이 주로 담당했던 포병대와 수군을 팔기한군으로 증편, 입관 이후 순치 연간에 팔기마다의 배속이 완료되었다. 다만 세간의 오개념과 달리 팔기만주, 팔기몽고, 팔기한군이 제각기 8기씩 편성되어 모두 24기로 이뤄졌던 것은 아니고, 8개의 깃발마다 보통 황족 내지는 만주인인 기주의 휘하에서 만, 몽, 한 서열로 모두 배속되어 군단별로 움직였다.
2. 역사
팔기군은 청나라의 시조인 건주부 여진족의 칸인 누르하치가 17세기 초에 설립하였다고 전하며[4] 청나라가 중원을 통일한 후 청나라 제도의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이 때 팔기군 중에서 상위 3개 깃발군 즉 정황기, 양황기, 정백기[5] 는 황제의 직속부대이고 나머지 5개의 깃발군[6] 은 여러 제후들의 관할이었다. 각 군단에 대한 지휘권을 누가 장악하느냐는 청나라 권력 관계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7] , 최종적으로 청나라가 중국 대륙의 지배권을 확보한 이후인 옹정제 시기 팔기는 황제 아래에 모두 직속되었다.
팔기군은 1601년 누르하치가 여진족 각 부족의 부대를 깃발로 구분하는 군단으로 재편한 것에서 출발한다. 이후로 만주족이 내몽골 고원으로 진출하면서 바요트 등의 내몽골 거주 할하 부족들인 내할하 부족들, 투메드, 차하르, 오르도스부 등 내몽골 출신의 몽골인 부족들도 이 시스템에 편입되었고, 이후로 요동을 함락하면서 한족도 이 제도로 편입하였다. 이 때 만주족으로 구성된 원조 팔기를 팔기만주, 그리고 몽골인은 팔기몽고, 한족은 팔기한군이라 칭했다.
청나라가 중국 대륙 전체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다지기 전까지 팔기군은 상당히 개방적인 조직이었다.[8] 위에서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만주인이 아니라도 팔기에 적극적으로 편입시켰다. 사르후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조선 원정군 포로들 또한 팔기의 일부로 편제되기도 했다.[9] 심지어 강희제 시절에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코사크 병사들 중 일부가 양황기에 편입되었다는 기록도 있다. 그 유명한 나선정벌이 이때 일이다.
입관 이후, 남명과의 싸움이나 삼번의 난 당시 한족 군대와의 싸움에서도 투항병이나 베이징 인근 거주 농민들을 적극적으로 팔기군 안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준가르를 갈아엎으며 외몽골, 칭하이성, 티베트, 신장 위구르 자치구, 쓰촨성 서부 등 서부 지방으로 진출하면서 튀르크계 부족들이나 티베트인, 오이라트인 등도 새 구성원으로 받아들였다.
삼번의 난까지 종결되고 중원에 대한 청나라의 독점적인 지배권이 확립되자, 팔기군은 새로운 인원의 유입이 차단되었으며 청나라가 중원을 지배하는데 지배 집단으로서 기능했다. 여기에는 팔기 안에 포함된 팔기몽고[10] , 팔기한군 등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같은 한족이라도 팔기한군과 일반 한족은 전혀 다른 신분이었다.
팔기만주가 팔기군 안에서도 서열은 확고했고 팔기몽고가 그 다음, 그리고 팔기한군 순으로 서열이 정해졌다. 전체 인원은 입관 당시 1644년을 기준으로 팔기만주가 40~45%가량을 차지하고 팔기몽고 22%, 나머지가 팔기한군이었다.[11]
이후에 팔기군 인구가 늘어나면서 팔기한군은 건륭제 치세에 대거 출기 조치되었는데, 초기 입관 당시 화포나 수군을 담당하며 전투력에서 상당한 도움이 되었던 팔기한군이 몽골이나 만주 출신에 비해 한족 생활에 물들었기 때문에 18세기부터 "원래 한족이었으니 쟤네는 어쩔 수 없다" 식으로 한족으로 강등되었다. 사실, 팔기한군 당사자들도 기적에 들면 오로지 군바리고 만주인이나 몽골인에 비해서 대우도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몰래 장사를 하다가 적발되는 등 기적에 미련이 없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12]
[image]
주방팔기(駐防八旗)의 분포도(•)
청은 기존의 만리장성을 기준으로 활용하여 주방팔기를 배치했다.
이러한 지배집단으로서의 팔기군이 소멸하지 않게 하는 동시에 중국 대륙에 대한 지배력을 구석구석 침투시키기 위해 청나라는 팔기군을 각지에 파견-주둔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일반 한족 피지배층과는 완전히 분리시켜 생활하도록 하였다.
당시 팔기군은 수도인 베이징 내성에 거주하는 금려팔기(禁旅八旗)와 각 지역 요충지에 주둔하는 주방팔기로 구분되었다. 청나라는 베이징 내성의 한족을 모두 몰아낸 다음 오직 금려팔기만이 베이징 내성에 거주할 수 있게 했으며 한족과 섞이는 것을 금지했다. 각지의 주방팔기들 역시 지방에 주둔하면서도 주둔지역에서 주방팔기의 거주지를 성벽을 이용해 철저히 격리하였다. 이는 청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팔기가 인구상으로 훨씬 많은 일반 한족들에게 흡수되지 않게 하는 장치가 되었다. 각지에 파견되어있던 주방팔기는 한족으로 이루어진 군대인 녹영과 함께 청나라의 주요한 군사력으로 기능했다.
엄밀히 말하면 팔기 자체가 만주족에 대한 일종의 군사-행정체계이자 예비군 동원 체제이자 만주족의 정체성이었다. 모든 만주족을 팔기에 소속시킴은 물론 일부 몽골인들과 한족 또한 팔기에 소속시켜서 만주족으로써의 정체성을 갖는 경우가 생겼다. 이들은 각지의 대도시에 존재했던 특수 행정구역이자 전용 주거지역인 '팔기주방'에서만 거주할 수 있었고 함부로 한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거주할 수 없었으며 만주인은 자유롭게 한인 여자를 취할 수 있었지만 한인은 만주인 여자를 취할 수 없었다. 심지어 이들의 원래 본거지인 만주에서조차도 한인 지역에 거주할 수 없었다. 이는 만주족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한족으로의 동화를 방지하는 동시에 만주족만의 군사력을 유지하고 피지배층인 한족과의 충돌과 한족에 대한 착취를 방지하려는 목적이었다.
주방팔기는 각 지방의 치안유지 역시 맡았으며 반청복명 운동 등 불순한 운동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역할도 수행했다. 삼번의 난 진압도 푸젠성, 광동성의 주방팔기 몫이었으며 대만 원정 때도 푸젠과 저장 지방의 한군팔기들이 대거 참여해 결국 정씨 왕국을 3대만에 간판 내리도록 하였다. 이후 광동 주방팔기는 팔기한군의 대거 방출로 전력이 약화된 가운데 1841년 영국과 치른 아편전쟁에서 참패, 결국 홍콩을 영국에 넘겨주게 되었고 이후 태평천국의 난이나 의화단 등도 진압 못 하고 빌빌거려 결국 증국번, 이홍장 등이 모은 상승군으로 진압해야 했다.
사실 만주족의 주축이 된 건주여진은 수렵과 농경을 겸한 민족으로 순수 유목 기마민족과는 좀 달랐다. 그래서 사냥을 다닐 때 각 깃발 별로 제대를 편성하던 습관이 팔기의 원조가 된 것이다. 물론 여진족이라고 아주 유목민이 아니었던 건 아니며 북만주와 연해주의 야인여진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기마민족의 성격을 띄었는데 이 지역들은 건주부의 영역인 남만주가 농사가 가능하고 숲이 대부분인 것과 달리 척박하기 짝이 없어서이다. 원래 퉁구스 자체가 돼지와 순록을 방목하던 사람들이었으며 남하하면서 농사도 짓고 장사도 하게 된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건주부는 일찍이 한반도와 가까워 한반도를 통해 문명화된 지 오래였다.
2.1. 쇠퇴
그러나 청나라 후기로 가면서 팔기군은 차츰 청나라 정부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애물단지 그 자체로 전락했다.[13] 팔기군은 군사조직인 동시에 이민족에 의한 정복 왕조인 청나라의 중국 통치의 기반이 되는 지배집단이었기 때문에 결코 폐지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팔기군의 구성원은 기본적으로 직업군인[14] 이었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팔기군에게는 국가가 녹봉을 지급하였는데 팔기군의 전력이 심각하게 떨어져서 실질적으로 군사적 역할을 전혀 수행할 수 없는 상황[15][16] 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배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 계속해서 녹봉을 지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더구나 한족과의 동화를 막기 위해서 다른 직업을 가지지 못하게 했기 때문에 문제가 더더욱 심각했다.
이처럼 청나라 군사력의 중핵이었던 팔기군은 청나라 말기에는 진짜로 유명무실한 오합지졸로 전락해 아편전쟁/태평천국 운동/청일전쟁/청불전쟁에서 팔기군은 도움은 커녕 백성들을 약탈했다가 역으로 발리기 일쑤였다. 아편전쟁 때의 경우도 몽골족인 승격림심이 이끄는 팔기몽고군이 영국+프랑스 연합군을 상대로 분전했으나 패배했다. 청불전쟁 때 역시 베트남 북부에서 일어난 육상전투에서 실질적으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전력으로 남았던 팔기몽고는 근대화된 프랑스군의 기관총 사격에 갈려나갔으며 청일전쟁 때는 평양성 근처에 주둔한 팔기몽고 부대도 약탈을 벌여 조선인의 원망을 샀으며 약탈에 정신이 팔려있다가 일본군에게 포격을 당해 썰려나가기 일쑤였다. 결국, 이 모든 땜빵은 한족으로 구성된 의용군인 상승군이 맡아야했다.[17] 이때, 후난 성의 선비인 증국번과 그 제자 이홍장은 의용군을 모집하여 태평천국을 토벌하였고, 이후로 이홍장이 실권을 잡자, 이 의용군을 기반으로 청나라의 신식 군대인 북양군이 만들어진다.
그래도 유명무실하게 팔기군은 존재했다고 하지만, 이미 19세기 말의 청나라의 주력은 북양군이었다. 그리고 이 북양군의 지휘관들이 나중에 중국 군벌의 시조가 되며, 쑨원과 장제스의 중국 국민당 소속 국부군에게 흡수당하거나 패배한다.
결국 1912년에 청나라가 신해혁명으로 멸망하고 중화민국이 들어서고 나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 정도로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으며, 마지막 황제인 선통제가 자금성을 떠났던 1924년까지 존속하였다.
[1] 홍색 기는 백색 테.[2] 여담이지만 이처럼 색깔로 부족이나 집단을 구별하는 것은 유라시아 북방 유목민들에게 상당히 흔히 보이는 특징 중 하나다. 한국사에서는 통일신라의 9서당이 유사한데 부대별로 여기서는 깃발이 아닌 옷깃의 색깔로 부대의 계통(고구려 직계/보덕국계/말갈계 등)을 구분했다. 예를 들어 신라의 말갈인 부대 흑금서당(黑衿誓幢)은 옷깃의 색깔이 흑적(黑赤)색 옷깃이었다.[3] 초기에는 바요트 등 일부 할하 부족들이나 투메드, 차하르, 오르도스 등 내몽골 부족들이 주축이었고 이후로 준가르 원정 과정에서 외몽골의 할하와 오이라트가 추가된다.[4] 원래 청나라는 누르하치와 슈르하치 형제가 거의 공동으로 통치하던 체제에서 시작된 나라였다. 이후 슈르하치를 제거한 누르하치는 동생의 부락을 반으로 나눠서 조카 아민에게 반만 세습시켜 주고, 자신의 몫을 2남 다이샨, 5남 망울타이, 8남 홍타이지에게 분할 세습하니, 이들이 4버일러들이다. 홍타이지가 자신의 권한을 강화시키면서 사촌 아민과 형제 망울타이를 제거하였는데, 아민이 가진 세력을 다시 반으로 나눠서 반은 자신이 통제하고, 남은 것을 아민의 동생 지르갈랑에게 세습시켜 주었다. 이에 홍타이지 사후 팔기회의에서 나온 구도인 두 황기는 홍타이지가 거느리고, 두 홍기는 다이샨이(다이샨이 두 홍기의 기주를 담당하는 것은 불가능하기에 다이샨과 그의 아들이 기주가 되었다.), 두 백기는 아이신기오로 도르곤과 도도 형제가, 정람기는 장남인 호오거, 양람기는 지르갈랑이 통솔하는 형태가 되었다.[5] 통틀어 상삼팔기(上三八旗)라고 칭한다. 앞서 이야기했듯 아민 제거 이후로 정람기가 황제의 직속이였으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이 섭정이 되면서 정백기와 위치가 바뀌었다. 이들은 모두 황제 직속이기는 했으나, 아무래도 황색이라는 상징성이 있다보니 상삼기 중에서는 정백기가 '상대적으로' 낮은 대우를 받았다. 옹정 연간에 명나라 황실의 후예들을 연은후로 봉하면서 황제 직속 상삼기로 편입시켜 신분을 보장할 때도 명나라 황족을 정황기나 양황기에 올릴 수는 없다고 정백기 한군으로 편입시킨 것이 그 예. [6] 통틀어 하오팔기(下五八旗)라고 칭한다. 이 하오기 중 정람기는 본래 상삼기에 속했지만 순치 연간에 정람기주 호오거의 옥사로 인해 지위가 격하되며 정백기가 황부섭정왕 도르곤의 지휘를 받는 상삼기로 승격되며 자리를 바꿔야 했다. 이후 이 정백기는 도르곤의 추탈 후에 황제 직속으로 편성.[7] 다만 단순히 황제로서 황기 둘을 다 자기가 가져야겠다며 색깔론(?)을 주장하여 군단의 구성원은 그대로 냅두고 색깔만 바꾼 경우도 있었다. 홍타이지 시절 도르곤 삼형제가 앞서 누르하치한테 물려받았던 양황기 대신 홍타이지가 배정받아 관리하던 정백기를 배정받던 일이 그러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사람 빼고 깃발만 바뀐 격이었다. 물론 이 정백기도 훗날 도르곤 추탈 이후 황제 직속으로 편입되기는 한다.[8] <팔기 만주 씨족통보>에는 ‘팔기’에 속한 1266개의 성씨가 수록돼 있는데, 그 다수는 만주족·몽골인·한족이지만, 조선의 성씨도 43개나 포함돼 있다고 서술되었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586901.html#csidx253f2712e38f9a88283d897d728454c [9] 베트남 하노이 부근의 응옥호이(玉回) 마을에는 낌(金)씨 성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이 청나라 군대를 따라 왔던 조선인들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다. 베트남 혁명 시기에 족보가 다 사라져 확인할 길은 없지만, 18세기 말 레 왕조를 무너뜨린 떠이썬 출신 삼형제의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해 파견된 20만 팔기군에 포함됐던 이른바 '조선팔기'의 병사 중 일부가 포로로 잡혀 정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출처: 최병욱 <동남아시아사>) 그 외에도 청 황제의 비빈들의 목록을 보면 조선의 성씨+기야(佳)를 붙인 여성들이 종종 보이는데, 이들 중 일부는 팔기만주의 솔호 니루 출신 여성들이였다. 이들 가문에서는 예부상서 김상명 같은 네임드도 있었고, 이들은 정기적으로 중국에 드나드는 조선 사신들과 교류하며 혈연정치로 서로 편의를 봐주기도 했다. [10] 나중에 만주 팔기의 군마 부족이 심각해질 때, 팔기몽고 기병대가 실질적인 청나라의 주력 기병부대가 되었다.[11] 마크 C. 엘리엇 <만주족의 청제국>[12] 사실, 팔기들은 여러가지 혜택과 대우을 동시에 가지고 있었는데, 대다수의 팔기한군들은 만주인이나 몽골인에 비해서 대우가 나빴기에 강등되는 것이 가족생계에 유리했지만, 팔기한군 중에서도 황제 및 만주왕공들과 관계를 구축하면서 고위직에 오르기도 하였다. 대표적으로 옹정제 초년 준가르 정벌군 총수였던 연갱요 같은 사람도 팔기한군 출신이며, 가경제의 어머니 워이기야씨 같이 딸들이 궁녀로 선발되어서 궁에 갔다가 황제의 총애를 받는다면 그야말로 신분역전이 가능하다. 다만, 강희제의 외가인 퉁기야씨와 가경제의 외가인 워이기야씨 등은 출신은 한족이었지만 황제의 모후로써 기적이 상삼기 만주인으로 신분이 바뀌어서 공식적으로는 만주인으로 대접받았다.[13] 청나라가 안정되면서 팔기군은 원래의 임무를 잊어버리고 향락에 빠져들었다. 사실 안정되기 전 삼번의 난 때만 하더라도 초반 반란의 진압에 어려움을 겪었으며 중기 이후 백련교도의 난 진압 당시에 만주 및 몽골 팔기군의 무능과 나태가 어찌나 극심하였던지, 사천총독인 포이모 러보오(費莫 勒保)는 그 스스로도 만주족이었음에도 만주/몽골 팔기군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하며 조정에 보고했다. "만주족과 몽골인 군대는 규율을 우습게 여기고, 교만하고 나태하며 또한 고생에 익숙지 않으니, 한족 군대인 녹영(綠營)에게 경시당할 뿐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미 옹정제 시기에 준가르 정벌 때부터 녹영은 청의 주력군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그리고 건륭제 말년의 백련교도의 난 때나 태평천국 운동 당시에는 녹영마저도 상당부분 무력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때부터는 관군보다는 한족 향신계급이 만든 의병인 '향용'이 만들어지고, 이 향용이 군벌이 되면서 중화민국 시절부터 중화인민공화국 직전까지 중국 역사를 주도한다.[14] 더 정확히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예비군의 성격이 강해짐.[15] 백련교 반란군과 태평천국 반란군을 진압하지를 못해 지역에서 모집한 향용 자원병들을 서양 군사교관이 훈련시켜 군대로 발족한 상승군이나 상첩군으로 진압해야만 했다. 또한, 팔기군은 기병이어야 하는데 군마 부족이 심각해진 나머지 팔기몽고를 제외한 다른 팔기군은 보병 전력으로 싸워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청나라 당시, 만주족이 기름지고 따뜻한 중원으로 이주한 것과 달리, 몽골족은 만주족 남성과 결혼한 몽골족 여성들을 제외하면 거의 척박하고 추운 오르도스나 후룬부이르 등 내몽골 초원지대에서만 살다시피 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덕분에 청나라 치하의 몽골족은 강력한 기병력을 만주족보다 더욱 오랫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그 몽골족도 만주족만큼은 아니지만 점차 전투력이 퇴보하면서 결국 아편전쟁과 청일전쟁에서 청군이 허무하게 패하는 결과를 야기했다는 게 함정. 애초에 몽골족도 청이 안정되자, 오랜 평화에 젖어 자꾸만 베이징 등으로 내려오고 한족과 동화되기 일쑤였으며 그나마 유목민스러운 문화를 아직 많이 갖고 있던 외몽골 왕공들의 경우도 오랜 평화에 젖어있었다.[16] 반면 일본 에도 시대 말기 군대의 중핵인 사무라이/아시가루는 단지 비교 대상이 최신무기로 떡칠된 미국, 프랑스, 영국 같은 서구 열강의 군대라서 상대적으로 약해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일본과는 반대로 청나라는 소수의 만주족이 다수의 한족을 지배하는 체제였기 때문에, 한족의 군사력 강화를 통제하기 위해서 한족이 병법을 논하는 것을 금지하다 보니 결과적으로 한족의 군사력까지 퇴보시켰으며, 그 와중에 지배민족인 만주족 스스로도 심하게 나태해지고 부패하게 되면서 군사력이 퇴보하였으며, 청나라 말기의 군사적 흑역사를 만들어냈다. 반면에 에도 막부는 청나라와는 달리, 야마토 민족의 단일민족국가였기 때문에 소수의 지배민족이 다수의 피지배민족을 통제한다는 개념이 없었으며, 그에 따라서 군사력 강화에 있어서는 청나라보다 훨씬 자유로웠다. 이후로 서구식 군제개혁을 단행하면서 일본군의 근간을 착실히 쌓아갔다. 물론 사무라이들 역시 무력이 퇴보하여 제대로 검을 다룰 줄도 모르는 문관형 사무라이들이 수두룩했으나 아시가루들은 이에 조금 자유로웠다. [17] 아편전쟁이야 상대가 세계 최강 영국군이니 그렇다 치더라도, 태평천국은 자국의 반란군 무리인데도 이들과 전면전 상태에 돌입하면 달아나기 바빴다는 말이 나올 만큼 형편없었다. 심지어는 태평천국군과의 교전을 두려워하며 일부러 천천히 추격하거나 진군로를 수정해서 빙 돌아갈 정도로 시간을 끌며 전투를 피하는 등, 한심하고 덜떨어진 모습도 보였다. 이들이 너무 무능한 데다가 남방 한족의 조총 및 서양식 화포부대인 녹영도 질이 형편없을 정도로 떨어졌기 때문에 태평천국군의 진압은 서구 열강들의 원조군과 향촌 민병집단인 단련(團練)에 많은 부분을 의존하게 된다. 이러다 보니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멸망할 때도 혁명군에 제대로 맞서 싸운 쪽은 대부분 북양군벌 세력들이었고 팔기군은 거의 국민당 혁명군에게 일방적으로 학살당하다시피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양군벌이 혁명군에 투항하는 바람에 청나라는 혁명군에 맞서 싸울 제대로 된 군대를 완전히 잃어버리고 허무하게 멸망하여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