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시성(섬서성)

 



[image] 중화인민공화국
陕西省(Shǎnxī Shěng
(陝西省)[1]
산시성 | Shaanxi Province

[image]

성정부 소재지
시안시 신청구 제팡로 280
(西安市 新城区 解放路 280)
지역
시베이
면적
205,800km²
하위 행정구역
10지급시(1부성급시) 4현급시 73현 6자치현 30구
인구
3,762만명
인구밀도
182.7명/km²
시간대
UTC+8
한국과 시차
1시간
서기
후허핑(胡和平)
성장
류궈중(刘国中)
HDI
0.750 (2017)
GRDP
$3,630억 1820만 (2019)
1인당 GRDP
$9,661 (2019)
행정구역 약칭
陕 | 秦
ISO 3166-2
CN-SN
홈페이지
1. 개요
2. 지리
3. 역사
4. 출신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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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산시성(陝西省 / 陕西省, 섬서성)은 중국의 중앙에 위치한 성급 행정구역이다. 약칭은 (秦).[2] 당(唐)이 될 듯도 싶은데 당은 아니다. 바로 그 유명한 관중(關中)이 이 지역을 일컫던 말이다. 산서성의 의미는 허난성 산현(섬현, 陝)의 서쪽(西)에 있다는 뜻이다. 인구는 37,327,378명, 면적은 205,800 km2이다.[3] 성도는 시안시. 민족은 한족99.5%로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나 닝샤 후이족 자치구와 접하고 있어서인지 후이족도 0.4%는 있다.
로마자 언어권에서는 산시성(산서성)과 구분하기 위해 Shaanxi라고 한다.

2. 지리


황하 및 황하 최대의 지류 위수가 이곳을 지나며 동쪽은 친진대협곡, 남쪽에는 친링산맥이 북중국과 남중국을 가른다. 북부는 황토고원, 중부는 관중 평원, 남부는 한중 지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체적으로 관중을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분지 지형이고 서쪽 한중은 약간 따로 노는 좀 더 작은 분지다. 관중을 낙양허난성과 가까워 세트로 묶어서 보기도 하지만 고대부터 괜히 둘을 나눴던 게 아닌 게 두 지역의 지형은 행정구역 경계 근처를 기준으로 지형과 분위기가 상당히 다른 편이다. 산시는 황하 상류 황토고원 지형이 발달한 편.
관중 분지를 제외하면 대체로 산지가 많은 편으로, 특히 시안과 한중 사이에 있는 친링 산맥의 경우 최고봉인 타이바이산(太白山)의 고도가 무려 3,750m까지 올라간다. 기후의 경우 북부 황토 고원은 내몽골처럼 매우 춥고 건조한 편이며, 남쪽은 보다 따뜻하고 강수량이 많다. 중간에 위치한 시안의 1월 평균기온은 0.3℃, 7월 평균기온은 27.0℃이며 연강수량은 561mm로 많지는 않은 편.

3. 역사


신석기 시대부터 이 지역은 채색토기가 특징인 양사오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다.
고대에는 황하가 지나는 풍요로운 땅으로서 흔히 관중, 관서라 일컬어졌으며 지금의 간쑤성 지역과 합쳐 옹양주라고 불리기도 했다.
들어오고 나가는 길이 한정적인 분지 지형으로 동쪽은 함곡관만 틀어막으면 다 해결되니 수비가 쉬우면서도 탁 트여있는 동쪽 중원에서 자기들끼리 싸우면 힘을 비축하다 역으로 찌르기는 쉽고 북적서융으로부터 말(동물)을 얻기도 쉬워서 고대부터 중국사의 중요한 지역이었고 은나라, 주나라, 진나라, 한나라, 수나라, 당나라 등 시안은 1300년 가까이 중국의 수도였다.
거기에 로마에서 출발해 이 곳까지 와서 서양동양을 연결하는 실크로드의 결절점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나라 중기 이후로 오랜 농업으로 지력이 쇠퇴하고 기후 변화가 도래하였으며, 서쪽의 토번, 위구르, 북쪽의 거란등 주변의 수많은 이민족들의 침략이 잦아서 오대십국시대에 섬서성 일대는 몰락한다. 이미 동부 해안지역[4]으로 중국사의 주도권이 넘어간 것. 안습. 이후 중국사의 중심은 알다시피 내몽골에서 도래한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중국을 통일하면서 베이징으로 옮겨가고 이것은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로 이어지고 장안 일대는 자연히 버려졌다.
그러나 위수 분지 이북은 여전히 말을 기르기 좋은 곳이었으며 이곳을 잃은 송나라거란, 여진, 몽골, 서하 등을 상대할 기병 양성에 큰 어려움을 겪어 북방 방비가 어려워졌다.

1556년 1월 23일 산시성의 화산에서 파멸적인 지진이 일어나 83만 명이 죽는 참사가 있었다. 거기에 명나라 말엽에는 잦은 흉작으로 이 지방 민심이 불안해졌으며 이 지역의 농민이었던 이자성이 이자성의 난이 일으켜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청나라 붕괴 이후 군벌 펑위샹의 영지가 되었으나 1930년 중원대전에서 펑위샹의 세력이 공중분해되면서 제 때 장제스에게 줄을 선 양후청이 산시성 주석으로 임명되어 양후청의 영지가 되었지만 1933년 장제스가 권력을 강화하면서 양후청은 산시성 주임에서 해임되었다.
1935년 제5차 초공작전에 쫓겨온 마오쩌둥대장정 끝에 이곳의 홍군에 합류하여 옌안 소비에트 시대를 열었고 1935년 시안에 서북 초비 총사령부가 설치되어 제6차 초공작전이 준비되었으나 1936년 서북 초비 부사령관 장쉐량과 서안 수정공서 주임 양후청이 독전을 위해 방문한 장제스를 감금하는 서안 사건을 일으켰다. 이후 휴전에 따라서 국공합작으로 공산당의 숨통이 트여 국민당은 기존처럼 남방 일대를 중심으로 잡고 공산당은 옌안에서 세력을 확장했다.
중일전쟁 이후 국공내전이 발발하자 중국 국민당 국부군후쭝난연안을 점령하면서 잠시 국민당의 영역에 들어왔으나 중국 공산당 홍군의 반격으로 다시 잃었고, 현재는 중화인민공화국의 통치 하에 있다.

4. 출신인물


도읍을 이곳에 둔 진나라, 전한과 당나라의 군주들은 바로 이곳 출신이다.
  • 전근대
    • [5]
    • 이자성
    • 안진경
  • 현대
출생은 베이징이지만 본적이 이곳이다. 시진핑 스스로 섬서성을 고향이라고 생각한다. 아버지 시중쉰이 이곳의 토착 공산주의자였고, 이곳에 공산주의 해방구를 열었는데, 남방으로부터 대장정해온 마오쩌둥이 이곳에 오면서 이곳이 혁명근거지가 되자 일약 공산당 지도부의 간부가 된다. 이곳에 시중쉰의 묘지가 있다.

[1] 서로 비슷하게 생긴 陜(합, 人이 2개)과 陝(섬, 入이 2개)은 둘 다 간화자로 陕이다. 그래서 실제로도 가끔 '합서성'으로 오기되는 경우가 나온다. 무협지 등에서는 陜(합)을 으로 읽어서 협서성으로도 나온다.[2] 진시황이 아이콘(?)인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다. 헌데 보통 헛갈리는 산서성 역시 약칭이 진(晉)이다(...). 중국어로는 둘의 발음이 구분된다.[3] 면적 크기를 가늠하기 위한 간단한 예. 한반도의 면적이 220,847km2다.[4] 황해 연안의 톈진, 항저우나 근처의 베이징, 난징 같은 곳[5] 진시황은 허베이성 한단시 출생이다. 당시 아버지 장양왕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었기 때문. 거기서 태어나서 13살 때 진나라로 돌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