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족

 




1. 개요
2. 유래
3. 언어
4. 거주지
5. 문화
6. 베트남, 라오스에 살고 있는 묘족
7. 치우 신앙
8. 창작물에서
9. 출신 인물
10. 기타


1. 개요


苗族
Miao, Miautso.
중국 남부와 베트남, 라오스, 태국 등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중국어로는 먀오족이라 한다. 인구는 약 730만 명으로 중국 내에서 한족, 좡족, 만주족, 회족에 이어 다섯 번째로 수가 많다. 중국에서는 대부분 구이저우성에 산다.

2. 유래


원래 남(南)이라고 불렸다. 남은 그들이 뫼마루에 묻었다가 제사에 꺼내서 쓰던 큰 쇠북을 본뜬 글자인데 이들을 뜻하게 되고 나아가 이들이 상나라의 남쪽에 있어서 남쪽이란 뜻을 가지게 되었다. 고고학적인 연구결과에 의하면 묘족은 양쯔강 중류에서 농사를 지으며 부족국가를 이뤘으며 중원지역까지 진출하며 세를 넓혔지만 황하에 한족의 전신 격에 해당되는[1] 화하족이 강성해짐에 따라 강남으로 밀려났으며 치우천황 신화도 이를 반영한 것이다. 그러나 일방적으로 밀리기만 한 것은 아니라서, 초나라의 주도세력이 되어서 주나라에 맞서 을 칭하고 전국시대 들어서도 전국칠웅가운데서도 3번째 안에 드는 국력을 자랑할 정도로 강성했다. 그러나 초나라가 중원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문화적으로도 중원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기 시작하여 중국문명권에 편입되었고 진시황의 중국 통일 이후에 문자통일조치로 인해 중원과 문자가 같아졌으며, 진나라 이후에 다시 중국을 통일한 유방도 초나라 출신[2]이고 한나라의 이름도 초나라의 핵심 지역인 한수에서 따온데다가 한나라를 건국하는데 공헌한 사람 가운데서 한신등 초나라 사람들이 많았다. 일부 한화된 묘족입장에서는 굳이 한나라를 적대시할 이유는 없었고[3] 초한쟁패기와 한나라, 삼국시대, 서진, 남북조시대를 거치면서 남하한 한족들과의 혼혈이 이루어지면서 자연히 대다수의 묘족들이 한족에 동화되었다. 그리고 동화되지 않은 이들이 현대 묘족의 조상이 된다. 초나라의 후예를 자처한 국가는 있었지만 이들 국가도 한족의 정체성을 가졌다. 태평천국운동 당시 많은 묘족들이태평천국군에 합류하였다.
베트남, 라오스 등지에 거주하는 묘족의 일파는 스스로 또는 몽족으로 부르고 있다. 이들은 베트남 주류민족에 의해 베트남 전쟁 때 미국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터전에서 쫓겨나 난민이 되어 미국이나 태국 등지로 흘러 들어갔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나 보트피플 문서 참고.

3. 언어


언어는 몽몐(Hmong-mien)어족 몽어파(Hmonginc) 몽어군에 속하는 몽어(묘어)로, 고유 문자는 없고 20세기 중엽부터 라틴 문자로 표기한다. 하지만 한족 주변의 다른 이민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 언어의 음이나 뜻을 한자를 빌려 표기한 역사가 길다. 때때로 고유의 문자를 만드는 일파가 나오기도 했으나 묘족 전체로 퍼지지도 못했을뿐더러 현재에는 묘족의 전설과 한족의 기록으로 그런 문자가 존재했었다는 것만 알 수 있지 제대로 된 유물이나 유적이 남아있지 않다. 한창 초나라가 존속될 시기에는 고유 문자를 썼지만[4] 진시황이 문자를 통일하면서 한자로 대체되었고, 한자를 대체할 또 다른 문자가 보급되기에는 한자의 영향력이 막강했던지라 한자를 빌려서 썼다.

4. 거주지


주 거주지역은 구이저우, 허난, 윈난, 광시, 사천, 하이난 등 성(자치구)에 분포됐는데 그중 첸둥난먀오족둥족자치주는 묘족의 가장 큰 집거구이다. 묘령산맥과 무릉산맥에 많이 산다. 베트남, 라오스 등 동남아 지역에서도 일부가 거주하며, 이들은 흐몽족 또는 족이라 불린다. 미얀마 역사에 등장하는 몬족과는 전혀 다른 민족이니 주의할 것.
주로 이웃한 야오족, 로로족과 함께 화전을 일구었으며, 보다 선진적인 농경 기술을 지닌 한족들이 밀림을 개간하고 남하하면서 거주 영역이 계속 축소되었다.
중국 서남부 구이저우성 인근에 아파트 20층 높이의 동굴이 자리하고 있으며, 축구장 3~4개 크기의 동굴안에는 마을이있고,마을 안에는 18가구, 73명의 묘족이 살고있다.묘족 포스트
베트남 전쟁 이후로 베트남과 라오스 등지에 살던 난민들이 태국과 미국으로 대거 망명했다.

5. 문화


일본에서 쓰던 검인 노다치에서 비롯된 묘도라는 이름의 전통 칼과 검술이 있으며 현재도 묘도법이 내려저 오고있다.
이들의 문화는 외국에서도 유명하며 특히 공예미술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

6. 베트남, 라오스에 살고 있는 묘족


중국 남부와 국경을 마주하고 있는 베트남과 라오스에도 묘족 (苗族, 먀오족)들이 100만 명 정도 살고 있다. 베트남에 사는 먀오족들은 베트남 전쟁에도 개입했다. 현지 지형에 익숙한 먀오족들은 미군과 협력해 공산 베트콩(월맹군)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미군 포로들을 구출하는 역할을 했다. 라오스 왕국과 공산반군 사이에 벌어진 라오스 내전 때도 먀오족들은 라오스 왕국을 지원하는 미군의 비밀용병으로 활약했다.
베트남 전쟁과 라오스 내전에서 미군이 패배하여 인도차이나(베트남·라오스·캄보디아) 반도가 공산화되자 미군을 도와 싸운 먀오족은 졸지에 정치 난민 신세가 됐다. 결국 이들은 베트남과 라오스를 떠나 미국으로 대량 이주를 감행했다. 이러한 먀오족들의 대량 이주는 먀오족이 전세계로 퍼지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현재 미국에는 30만명의 먀오족이 살고 있다.

7. 치우 신앙


치우를 민족 시조로 섬기는 이들이며 고유의 전승이 잘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신뢰할만한 정사 기록이 없는 시대에 대해서는 신화와 전설을 짜맞춰보면 한족이 중원에 들어올 당시부터 있던 종족이며, 한족과의 경쟁으로 계속 서남쪽으로 밀려났고, 한민족의 조상이 중국 동북부로 유입된 것은 묘족이 이동한지 한참 뒤인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한족에 떠밀려 남하한것을 곱게 포장한듯한 신화(#)도 있지만, 이와 별개로 전해내려오는 묘족이나 한족의 전승으로 미뤄보면 한족이 묘족을 밀어내는 과정에서 수번의 대학살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갑골문에서도 남南과 싸우거나 인신공양에 쓴 기록이 나온다.그것뿐만이 아니더라도 춘추전국시대때 중원 국가들이 초나라를 오랑캐 취급한 덕택에 중원 국가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으니 꼭 대학살건만 아니더라도 이를 갈만한 일은 많다.
현대에 한국이나 중국에서는 도철과도 연관짓고 있으며 묘족들도 받아들이는 분위기.
최근에는 역으로 몽족(묘족의 일파) 가운데에서도 환빠들의 대표적인 주장들(치우 한민족 조상신설, 동이 사상)에 영향을 받은 듯 한국인과 자신들이 같은 동이에서 갈라져나와 같은 조상(치우)을 섬기는 형제라고 동질감을 느끼는 경우(...)도 확인되고 있다. 댓글 참조

8. 창작물에서


치우천왕기(소설)에서는 미아우족이란 이름으로 등장한다. 비중은 높은 편.
소오강호 영화판 및 그 후속작인 동방불패에서 엄청나게 왜곡된 모습으로 나온 것으로도 익숙할 것이다. 역사적으로는 일월신교의 모델이 됐을 백련교가 묘족에게 전파된 적도 없다. 이야기를 좀 더 극적으로 만들고 묘족의 화려한 의상과 장신구를 많이 사용하기 위한 각색. 소오강호 원작 소설에서는 남봉황만 묘족이고, 오독교의 교주로 나온다. 같은 김용의 소설인 벽혈검녹정기의 등장인물인 하철수도 묘족이자 오독교의 교주.
중국 드라마 <우성룡: 천하제일청백리>에 묘족과 그들이 사는 광서성이 주요 무대로 등장한다. 주인공 우성룡이 관직에 임용되고 처음으로 부임한 곳이 변방인 광서성의 변방 중의 변방인 나성이라는 곳으로, 이 곳은 오가는 길도 지옥길이 따로 없는 지경이고 현지 사정도 도적들에게 현령이 살해당하는 모르도르급의 생지옥이라 중앙 관리들이 가장 기피하는 임지였고 묘족들도 중앙에서 온 관료들을 불신하는데, 중국에서도 제법 추운 산서성 출신인 주인공 파티가 임지에 오는데만도 온갖 생사를 넘나들며 기껏 광서 순무한테 받은 관인, 관복, 관모까지 도적들에게 털린채 맨몸으로 와서도 버려진 관아를 정돈하며 열일하는 모습에 점점 마음을 열기 시작한다.

9. 출신 인물



10. 기타


시진핑후난성의 묘족 마을인 스바둥(十八洞)촌을 시찰하러간 일화가 당신을 어찌 부를지 모르겠다라는 시진핑 찬양가로 만들어졌다. 단체로 묘족 복장을 입고 나와 노래부르고 춤추는것이 압권
토속주술로 고독이 있다고 알려져 있으나, 낯선 이민족 문화에 대한 두려움과 소설 등의 과장된 묘사로 인하여 생성된 문화적 편견이라고 여기는 주장도 있어서 실제로 어떤지는 연구가 많이 필요한 부분이다. 특히 현대에 와서 묘족들도 현대문명과 상당히 접촉하였음에도 계속 이쪽으로 엮이는 경우가 있어서 불쾌하게 생각한다는듯.
[1] 물론 한족 자체는 한나라대 들어와서야 그 정체성이 확립되었기는 했다. 춘추전국시대때에는 같은 주나라 휘하에 있었다는 공통된 정체성이 있었기는 했지만 한 편으로는 각 지역별로 별개의 정체성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2] 정확히 말하면 초나라의 최북단이자 원래는 다른 나라들이 있었으나 초나라가 정복한 지역이다.[3] 후한 말에는 한나라에 반기를 든 묘족들이 많았다. 민족적인 반감이라고 하기는 좀 그렇지만[4] 사실 이것도 한자에서 분화된 것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