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래인

 

1. 개요
2. 상세
3. 역사


1. 개요


渡来人(도래인, Dorai-jin)
도래인은 물을 건너온 사람이라는 뜻인데, 역사적인 의미로는 기원전부터 근세까지 한반도에서 이주한 집단을 가리키는 말이다. 다만 일본 학계에서는 중국 대륙 남부 등지에서도 이주했다는 주장을 하기도 하는데, 고고학적·인류유전학적으로 도래인은 고대 한국인이라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세키네 히데유키 교수는 일본 제국 시절 유리할 때는 일선동조(日鮮同祖)론을 내세우고, "일본인은 조선을 조상의 나라로 생각했고,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였다."라고 주장했던 학자(도쿄제국대 인류학 주임교수 도리이 류조, 1919년)도 있었던 일본 학계가 패전 후 제국주의와 군국주의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특별한 민족론'을 내세우려 한반도와의 관계를 억지로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했다.[1]

"일본인의 기원이 고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부정·왜곡하는 일본 학계의 의식이 한일 계통 연구의 발전을 가로막고 있습니다."

"한국과의 관계를 회피하고 한반도와 다른 정체성을 가져야 한다는 왜곡된 인식이 패전 후 계통 연구에 큰 장애물이 됐다"

"1970년대 이후 학자들이 일본인 기원 모델을 내놓았지만 그들조차 도래인(渡來人)의 위상을 가능하면 과소평가하고 단순히 한반도 문화가 일본 열도에 전파된 것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컸다"

세키네 교수는 "일부 학자는 도래인이 시베리아·만주에서 한반도를 뛰어넘어 일본 열도로 이주했거나 멀리 중국 남부에서 바다를 건너왔다고 해석한다"고 말했다. 왜곡된 형태로나마 한국인과의 직접적 관계를 회피하려고 고안된 고육지책이라는 것이 세키네 교수의 분석이다.

"인류유전학적으로도 도래인은 분명 '고대 한국인'이 맞다"며 "일본 학계가 한일 간에 명백한 문화적 연속성이 있음을 인식하면서도 적어도 혈연관계만큼은 인정하면 안 된다는 신념이 작용하는 것 같다"

"여전히 일본 학계 연구자들이 왜곡된 잠재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몇몇 뜻있는 학자들은 학계의 냉대에도 꿋꿋하게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며 "과거 짧은 시간 패러다임 전환이 이뤄졌듯이 머지않아 한일 계통 연구에 획기적 전기가 찾아오리라 기대한다"

---

세키네 히데유키 가천대 동양어문학과 교수, 2016년


2. 상세


도래인 계통의 야요이인은 현대 일본인의 혈통 비율 중에서 87~96.7%를 차지한다고 한다.[2]
주의해야 할 점이 있는데, 종종 일본인에 관한 생물학적인 연구를 할 때, 일본 내에 존재하는 오키나와인, 아이누인, 본토 일본인(야마토 민족)을 각각 비슷한 숫자로 표본을 수집하여 연구 결과를 낼 때도 있다. 이렇게 되면 1억 2천만 명이 넘는 일본 인구 중 오키나와인과 아이누인은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유전 형질 비중(조몬인 계통)이 심하게 과대평가된다. 과학계에서 이런 식으로 표본을 편향되게 수집하여 의도적으로 원하는 결과를 유도하는 행태가 아예 없는 게 아니므로 주의해야 한다. 의도한 부분은 아니었겠지만 암내 유전자 비율을 조사할 때도 유사한 경우가 있었다.
도래인의 이주 규모에 대해선 갑론을박이 있지만, 대체로 이들이 가져온 벼농사 등의 농업 기술과 청동기와 철기 등의 금속 제련 기술, 그리고 기타 문물로 인해 조몬인도 덩달아 폭발적으로 인구가 증가했다는 게 현 일본 학계의 주류 시각이다. 조몬 시대 일본 열도의 인구가 약 10만여 명으로 추정되는데, 도래인의 이주로 인해 조몬인의 생활도 매우 풍족해졌다고 한다.

3. 역사


도래인은 농사 기술과 청동기, 철기를 일본 열도에 전파하였으며, 완전히 자리 잡은 뒤로는 한반도에 있는 국가들과의 교류를 통해 한자유교, 불교, 건축기술 등도 도입했다.
도래인들의 주요 이주 시기는 대략 4단계로 구별된다.
1단계는 기원전에 한반도에서 이주한 집단이 조몬인 세력을 밀어내고 정착했다. 이때 일본 열도에 농법과 금속 제련 기술이 전수되었고 이를 계기로 석기시대조몬시대에서 청동기·철기 시대인 야요이 시대로 넘어갔다. 이때의 도래인 계통 집단을 야요이인이라고 하고, 이들은 현대 일본인의 직계 조상이 되었다. 다만 아직 통일된 왕권은 나타나지 않았고, 기원후 3세기까지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가야, 신라, 백제에서 이민 혹은 왕래 형태로 추가적으로 도래인이 이주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2단계는 4~5세기로 고분 시대이다. 당시 왜국은 소국의 왕들을 비롯해 호족들이 영역의 경제 및 문화 발전과 정치지배력을 강화하던 시기였기에 도래인의 선진 문물이 요구되었다. 일본 천황가를 받들며 일본성씨를 추증받은 신라의 하타 씨족과 백제 아야 씨족이 일본으로 도래하여 선진 문물을 전파하였다.
3단계에는 5~6세기 긴키 일대에 고대국가가 형성되었던 시기다. 케이타이 덴노를 시작으로 하는 일본 왕조가 이 때 성립되었는데 통일된 왕권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많은 도래인들을 받아들였고 그 과정에서 백제와 신라의 일부 귀족 씨족이 일본으로 건너갔고 반대로 일본 호족인 모노노베 씨족의 일부가 백제에 정착하는 등 인적인 교류가 활발했다. 다수의 백제계 도래인들은 오사카와 나라 일대에 정착하였다. 6세기에는 백제 일변도의 외교에서 벗어나 신라, 고구려와도 본격적인 교류를 이루게 되는데 5세기에 건너간 신라계 도래인은 이즈모국 지방을 중심으로 서북 일대에 자리잡았다.
4단계는 7세기 말 삼국통일전쟁으로 백제고구려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면서 많은 귀족들과 유민들이 망명하였다. 백제 귀족은 오미에 주로 정착했고 고구려 귀족들은 무사시에 정착했다. 야마토 조정이 668년 신라와 국교를 회복하면서 신라에서도 다시 이주하였다.
815년 헤이안 시대 초기에 편찬된 신찬성씨록에 따르면 당시 교토, 나라, 오사카 등 긴키 일대의 1182개 씨족 중 30% 가량이 도래인의 정체성을 유지한 채 남아있었다. 고분 시대까지의 도래인은 야마토 정권을 형성하는 과정에서 융화되어 야마토인이 되었지만, 이후에 유입된 기술자들과 권력자들은 조상의 정체성을 많이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헤이안 시대가 형성될 때까지 세력을 유지했다.
이런 도래인의 활발한 역사는 헤이안 시대신라구의 일본 침입, 일본의 고립주의 등이 겹쳐져 신라인(한반도인)의 이주가 금지되면서 막을 내리게 된다. 이후 에도 시대임진왜란으로 일본에 건너간 포로들이 형성한 마을로 일시적인 재현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1] #[2] 조몬인 혈통 비율 3.3% 3.3% (2020) 8% ~ 9.8% (2019) 9% ~ 13% (2019) (연구 모델을 조몬인과 야요이인을 염두하고 설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