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충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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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마무시노즈시(玉虫厨子)
옥충주자(玉蟲廚子)
The Tamamushi Shrine
1. 개요
2. 제작국과 제작자에 관한 논란
3. 회화 부분


1. 개요


일본 호류지 대보장원에 안치된 유물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7세기에 제작된 듯하다. 원래 스이코 덴노가 소우했다가 호류지에 보관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불상을 담는 불상궤로, 높이 226.6 cm이다. 옥충주자란 이름은 가구에 비단벌레의 껍질을 박아 장식했기 때문에 붙었는데, 비단벌레를 1500마리 이상 사용해 만든 사치품이다. 일본에서는 다마무시노즈시, 한국에서는 흔히 옥충주자라고 부르지만 '비단벌레불상궤'라고 하기도 한다. 참고로 같은 '옥충주자'라고 해도 일본과 한국의 사용 한자가 차이가 있다.
하지만 이 유물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거의 사라진 동북아시아의 고대 건축의 모습을 세부적인 면까지 파악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단서이며, 당시의 회화나 조각양식까지 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란 점이다. 특히 제작된 수법 역시 세밀하고 자료로써의 가치가 높다. 일본의 국보 공예품 제34호. 지금은 색이 퇴락하여 검게 보이지만, 원래는 금과 채색 등을 이용하여 화려하게 장식했다. 이를 재현한 레플리카도 존재한다.
특히 한국과 일본의 학계는 옥충주자의 제작자와 제작국, 제작시기를 놓고 수많은 논문을 발표했지만, 딱히 정설은 없다.

2. 제작국과 제작자에 관한 논란


흔히 백제와 일본의 많은 교류가 있었다는 정황, 특히 호류지가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백제에서 영향을 받은 유물로 보기도 하지만 확실한 근거가 없다.
유물의 재료가 한국에서 자생하지 않은 히노끼라는 점에서 일본에서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히노끼를 수입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1] 간혹 한국이나 중국에서 제작해 보냈다는 식의 주장도 있다. 일본인이 일본에서 제작했다는 주장도 있지만, 당시 아스카 시대의 일본의 높지 않은 공예 수준을 고려하였을 때 (일본의)외국에서 온 인력(도래인)들이 제작했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도래인의 경우 어느 나라의 도래인이냐가 문제인데, 일본에서 백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호류지시텐노지에서 발견할 수 있는 모습과 옥충주자의 건물 부분에서 공통적인 요소들을 발견할 수 있어 백제계 도래인이 제작했다고 보기도 하지만, 백제를 비롯한 삼국시대와 심지어는 중국의 동시대 건축물이 하나도 현존하지 않고, 호류지나 시텐노지의 경우 백제 양식과 동일하다는 확증이 없어 확실한 답이 될 수 없다.
이외에도 불궤 부분의 금속 천불 조형이나 회화에서 백제풍(예를 들면 호류지 몽전의 구세관음상처럼 길게 늘여진 옷과 인물의 수법)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백제의 회화는 거의 남아있지 않고, 그 수법이나 조형이 고구려와 유사하단 점에서 고구려인이 제작했다고 주장하는 경우도 많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문화 역시 남북조시대 중국의 영향을 받았고, 당시 중국 문화와의 공통점을 들어 양나라를 비롯한 남조의 인력이 제작했다고 보기도 한다.
비단벌레 공예의 경우 과거에는 비단벌레가 일본에만 서식한다고 알려졌었지만, 신라황남대총 비단벌레 장식 금동 말안장 뒷가리개와 같은 유물에서도 같은 수법이 발견되었고, 이후 한국에서도 비단벌레가 발견되면서 비단벌레만 가지고 나라를 특정할 수는 없게 되었다.
이외에도 각 지역의 양식이 혼재되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는 점을 들어 일본에서 각 나라의 도래인들이 합작했다는 주장이나 삼국의 인력이 통합된 통일신라에서 제작했다는 주장 등도 있다.

3. 회화 부분


옥충주자에는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2]를 묘사한 본생도(本生圖)가 있다. 한국에는 본생도를 그린 유물이 없지만 인도에서는 매우 많이 발견되고, 중국에서도 5~6세기에 그린 유물이 둔황 석굴에서 발견된다.
옥충주자의 본생도는 두 장면이 그려져 있는데, 스스로 배고픈 호랑이를 위해서 벼랑에서 몸을 던져 호랑이 밥이 되어준다는 내용 등이다.

[1] 실제로 무령왕릉의 관은 일본산 금송과 삼나무로 이루어졌다는 것이 확인되었다.[2] 본생담(本生譚)이라고도 하고 산스크리트어로 자타카(Jataka)라고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