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이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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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배경
레부니온 전투 이후 족멸의 위기에 빠졌던 페체네그 족은 동로마 제국령 유럽과 왈라키아를 떠나 키예프 대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의 영역에서 은거했다. 페체네그족은 키예프의 벌판에서 동로마 제국에 대한 복수의 칼날을 갈며 세력을 키웠다. 동로마 제국을 견제하려던 블라디미르 대공은 묵인하는 식으로 페체네그 족을 지원하며 이 상황을 동로마에게서 숨기고 관망하였다. 그러는 동안 제국은 페체네그족을 포함한 북방의 위기가 줄어들었다고 판단하고 호기에 맞추어 잃어버린 동방 영토를 되찾기 위해 전념했다.
요안니스 2세의 치세에 들어 요안니스 악수흐가 이끄는 동로마군 주력이 유럽 영토에서 아나톨리아 반도로 이동해 라오디키아에서 룸 술탄국을 격파하고 있는 동안, 페체네그족은 복수의 때를 노리고 무방비한 제국령 발칸 반도를 공격했다. 수만명의 대군이 왈라키아, 발칸 산맥을 넘어 콘스탄티노플이 지척인 수도권 트라키아까지 진격해 왔다.
2. 진행
당시 제위에 있던 요안니스 2세는 1120년부터 룸 술탄국에 대한 영토수복전쟁을 진행중이었다. 주력군 대부분이 제국군 총사령관 요안니스 악수흐와 함께 아나톨리아를 선무하고 있는 가운데, 황제 본인은 누나 안나 콤니니가 일으킨 반정 이후 뒤숭숭한 민심을 정리하기 위해 소수의 병력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에 남아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도가 지척인 트라키아로 페체네그 대군이 육박한 것이다.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를 방위하고 주력군이 복귀할 시간을 벌기 위해 황제는 480명의 바랑인 친위대를 포함한 3,000여명의 근위대와 5,000여명의 트라키아 지방군을 소집해 페체네그족의 공세로를 따라 이동했다. 두 군대가 마주하게 된 곳은 트라키아의 베로이아 시였다. 그러나 전력차는 확연했다. 페체네그는 다섯배에 이르는 3~4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내려온 상태였고, 여차하면 콘스탄티노플을 공성할 기세였다. 아나톨리아에 있는 주력군이 도착하려면 아직 시간이 걸리는 상황이었고, 공성이 시작되면 제국 여론의 핵심인 수도 시민들이 동요할 것은 당연한 상황이었다. 황제는 콘스탄티노플의 테오도시우스 삼중 성벽에 의지하지 않고 그가 가진 병력으로 도박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2.1. 돈으로 시간을 벌다
황제는 페체네그인들이 원하는 것을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그들이 쳐들어온 명목상의 이유는 아버지 알렉시오스 1세가 11만명의 페체네그인들을 도륙했던 레부니온 전투에 대한 복수였지만, 실제로 페체네그인들이 원하는 것은 풍요로운 로마의 땅에서 정착하거나 상거래를 할 수 있는 교역권, 통행권, 정주권을 얻어내고 싶어한 것이었다.
이를 간파해낸 요안니스 2세는 베로이아에 진영을 구축하자 마자, 페체네그인으로 구성된 바르다리오타이를 이끌고 페체네그의 대족장과 담판을 지으러 갔다. 황제는 그가 페체네그 군대의 강성함에 감탄했으며, 그들이 도나우 강을 넘을 수 있는 통행증과 엄청난 보화를 선물하겠다고 하였다.[1]
황제가 가져온 엄청난 보화의 '''일부'''를 보자 대족장은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황제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페체네그를 지원했던 키예프의 블라디미르 대공의 눈치도 보아야 했기에, 대족장은 황제를 융숭히 대접하고 기다려주기를 청했다. 황제는 흔쾌히 돌아가 기다리겠다고 하였고, 페체네그 족장들은 제안에 대해 토론하기 시작했다.
황제가 돌아가고 토론이 한창일 때, 갑자기 화살이 페체네그 군영으로 빗발치듯 쏟아졌다.
2.2. 구원군의 도착
악수흐의 군대는 정확하게 페체네그족이 혼란한 틈을 타 공격을 실시했다. 제국의 주력군이 때마침 마르마라 해를 건너 아나톨리아에서 베로이아로 도착한 것이다. 동로마 궁병들은 포진한 페체네그 궁기병들을 일제사격하여 기동하지 못하게 한군데로 몰아붙였고, 악수흐는 그대로 카타프락토이들과 함께 코너에 몰린 궁기병들에게로 돌진했다.
동로마군이 첫 우위를 차지하고 중장기병들은 페체네그족의 전열을 박살냈지만, 페체네그군은 침착하게 대처했다. 궁기병들은 자신들의 짐마차를 뭉쳐 요새를 형성하고 아직 가지고 있는 수적 우위를 이용하여 짐마차 요새에서 뛰쳐나와 스웜 전술을 활용했다. 이 시점에서 전투는 난전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황제가 후방에서 화살을 맞아 작은 부상을 입을 지경이었으며, 페체네그족 기병대는 빙빙 돌며 화살을 날리다 화살이 떨어지면 짐마차 요새로 돌아가 재보급 받기를 반복했다. 조금씩 전세가 페체네그쪽으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황제와 악수흐는 요새가 건재한 이상 전황을 바꾸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다. 황제는 장군들과 바랑인 친위대를 이끌고 친히 짐마차 요새로 돌격했다. 바랑인들은 두터운 갑옷으로 화살을 퉁겨내며 요새로 육박했다. 그들은 요새에 근접하자 짐마차를 양손 도끼로 박살내어 길을 터냈다. 그들은 포위 섬멸 당할 지경에 이르렀다. 요새가 제압당하자 페체네그 기병들은 마지막 대규모 돌격을 감행했다.
3. 페체네그족의 소멸
전투의 마지막은 치열했다. 총사령관인 악수흐까지 부상당할 지경이였다. 하지만 화살과 보급품을 태운 짐마차 요새가 붕괴되어 장기인 스웜 전술이 봉쇄된 페체네그군이 이길 확률은 적었다. 바랑인 근위대는 트레이드 마크인 양손 도끼로 적들을 격멸했고, 수천명의 페체네그족이 포로가 되어 끌려갔다. 페체네그군 1만명 이상이 전사했고, 페체네그의 대족장과 11명의 족장들이 사로잡혔다. 그들이 황제에게 받았던 모든 재화는 물론, 지금까지 페체네그 군대가 수집한 수많은 전리품이 황제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황제가 가지게 된 전리품 중 가장 값진 것은 역시 페체네그족 그 자체였다. 만지케르트 전투 이후 계속해서 야전군을 불리려던 콤니노스 왕조에게 수천명의 포로는 좋은 병력 공급원이었다. 포로들은 좋은 대접을 받으며 대부분 황제의 근위대나 중앙군에 편입되었으며,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재건 중인 소아시아 정착 사업을 위해 이주되었다.
황제는 휘하 장병들의 승리를 치하했고, 베로이아에는 거대한 승전 기념비와 기념문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황제의 개선식에 수십만명의 콘스탄티노플 시민들이 환호했다.
그에 비해, 900년대부터 200여년간 우크라이나 지방의 스텝 지역을 주름잡던 페체네그족은 이 전투를 끝으로 거의 멸족하고 말았다. 그들은 전쟁이나 원정에 가족들을 모두 데리고 다니는 습성이 있었고, 패배는 곧 부족 전체의 멸망과 같았다. 물론 수십만명 이상의 페체네그족이 이미 동로마 제국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고, 복속되지 않은 소수의 잔당들도 헝가리, 동로마 제국, 키예프 대공국의 국경 지대에서 유목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전자는 훗날 완전히 로마화되었으며 남은 이들은 역사에 남을 정도로 큰 족적을 남기기에는 이제 역량이 부족해져 있었던 상태였다. 결국 동로마 제국에 복속되지 않은 페체네그인들은 13세기가 끝나기 전에 쿠만·헝가리인과 완전히 섞여 자취를 감추었다. 그리고 페체네그인이 사라진 왈라키아, 우크라이나 남부 일대의 평원에는 쿠만인이 이주해 오게 되었다.
[1] 고대 로마로부터 도나우 강은 로마의 국경을 상징했다. 도나우강을 넘을 수 있다는 것은 동로마 제국으로 넘어올 수 있는 권한을 준다는 은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