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랑인 친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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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6년과 1230년의 친위대를 복원한 그림. 출처
1. 개요
2. 역사
2.1. 활약
3. 서브컬처에서의 등장
4. 여담


1. 개요


그들은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며 가족처럼 보호했으며, 거룩한 믿음은 대를 거듭하여 전해져 내려왔다. 이 충성스러운 자들은 순수함을 유지했으며 배신의 사소한 징후마저도 그대로 넘기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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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콤니니

바랑인 친위대(영어명: Varangian Guards)는 동로마 제국의 근위대를 이르는 명칭이다. 국내에는 본 문서의 제목인 바랑인 친위대 말고도 바랑기아 가드, 바랑기안 가드, 바랑기아 친위대/근위대 등의 표현이 혼용된다. 이름에 들어가는 "바랑기안"은 스칸디나비아계의 민족을 뜻하는 말로, 9~10세기에 남하해서 우크라이나 남부 지방에 정착한 바이킹의 일파이다. 어원은 고대 노르드어로 맹세를 뜻하는 '바르'(vár)[1]에서 유래했다고 본다. 이들은 주로 장사, 노략질 등 그들의 본가와 거의 비슷한 생업을 가졌는데, 그 중 일부는 북유럽식 전투 방식을 살려 인접국인 동로마 제국용병으로 건너갔다.

2. 역사


사실 바랑인들 전에도 동로마로 본가인 바이킹들이 건너가서 용병 일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용병으로 굴리기 시작한 건 바실리오스 2세 때로 아나톨리아의 귀족들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켜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마저 함락될 지경에 이르자, 키예프 공국의 수장인 블라디미르 1세[2]에게 도움을 요청, 바랑인 병사 약 6천 명을 지원받아 아비도스 전투(989)에서 승리를 거두고 반란를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3] 바실리오스 2세는 툭하면 반란이나 일으키는 귀족들보다 이들이 훨씬 충성스럽다는 것을 깨달아 북유럽인 모집 공고를 하면서, 본격적인 용병 활동이 개시된다. 얼마나 대단한 규모였는지, 스웨덴에선 이 용병들의 유산을 처리하는 특별법이 생길 정도였다.
기록에 남은 첫 바랑인 친위병도 이 시기를 전후해서 등장한다. 그의 이름은 볼리 볼라슨인데, 그의 동료들을 이끌고 1006년에 덴마크를 경유하여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고 한다. 그가 금의환향할 때에는 말그대로 황제가 내려준 황금 장식의 자줏빛 옷을 입고 돌아왔는데, 그가 기록된 사가에는 외국의 무구들(즉 동로마식 무구)에 대한 묘사가 나온다. 그와 그의 동료들 외에도 '친구 누구누구를 오랫동안 못봤는데 마지막으로 들은 얘기로는 미클라가르드(콘스탄티노플의 북유럽식 표기, 중세 노르드어로 '대도시')에서 거기 여자랑 결혼하고, 거기 한테 충성하면서 아예 말뚝박고 산다더라...' 같은 설로 나오는 바이킹 사가들도 있다.
중세 아이슬란드의 서사시 락스디엘리 사가의 주인공 볼라의 아들 볼리도 미클라가르드의 황제가 하사한 비단 옷 위에 금실이 수놓아진 자줏빛 망토를 걸친 화려한 모습으로 금의환향 했다고 전해진다[4]. 이렇게 동로마 양식의 교회 건축과 프레스코화, 채색 성경 필사본은 저 멀리 아이슬란드까지 북유럽 전역으로 전파되었던 것이다. 동로마 제국에 상인, 순례자, 근위대로 다녀온 것을 기념하는 룬 문자 비석들이 세워지고 바랑기안 영웅들의 무용담을 전하는 아이슬란드와 스칸디나비아의 노르드어 사가와 역사서들도 집필되었다.
  • 6세기 무렵 동로마 제국으로 비단 직조법이 전파된 이후 비단(견직물)은 동로마 제국 정부의 철저한 통제를 받는 전매품으로 다뤄졌고, 반면 중세 전기~중기 동방세계에 비해 경제=산업적, 문화적, 학문-기술적 수준이 뒤떨어졌던 서유럽에는 비단 직조법이 전파되지 않은 상태였다[5]. 게다가 이 천을 자주색(보라색)으로 물들이는 염료인 티리언 퍼플의 생산법 역시 동로마 제국 정부가 절대 외부로 유출되지 못하도록 통제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때문에 당시(10~11세기) 티리언 퍼플로 물들인 최상급 자줏빛 비단은 그 가격 자체도 같은 무게의 금값에 맞먹는다고 할 정도로 엄청났지만, 서유럽, 특히 용맹하지만 부유하지는 못했던 북유럽인들의 관점에서 이러한 옷은 단순히 돈이 있다고 살 수 있는 것이 아닌 아주 특별하고 귀한 물건이었던 것[6]. 그리고 동로마 제국은 황제와 제국 정부의 권위를 과시하기 위한 선물로 이 귀한 자줏빛 비단을 애용하였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 황제의 친위대로 복무한 사람'이 자줏빛 비단 망토를 걸치고 돌아왔다는 것은 '성실하게 복무하여 혁혁한 공훈을 세웠기에 황제에게 특별한 선물을 하사받았다.'는 뜻이다. 즉 물건 자체의 가치도 대단하지만 상무#s-3적이고 의외로 법(특히 상호간의 계약)에 대한 존중을 중시하던 북유럽인(대표적으로 바이킹)의 사고방식에서 '먼 땅에 가서 용맹을 떨치고 공훈을 세워 그 보상으로 더없이 귀한 선물을 받아 돌아왔다.'는 것은 말 그대로 끝내주게 성공한 사나이의 증거였던 것이다.
바랑기안 근위대는 제국 곳곳에 흔적을 남겼다. 성 소피아 대성당의 2층 대리석 난간에도 처음에는 정체불명으로 여긴 문양이 있었는데, 기나긴 성찬예배의 지루함을 견디다 못해 새긴 듯한 '''여기 왔다 감'''이라는 뜻으로 적은 룬 문자 낙서로 밝혀졌다.[7], 아테네의 피레우스 항에 세워져 있던 사자 대리석상 (지금은 베네치아에 있음)에도 룬 문자가 새겨졌다. 근위대 병사들은 복무를 마치면 동로마의 금화와 무기, 그리고 비단옷을 가지고 말 그대로 금의환향했다.[8]
11~12세기가 되자 바이킹 본토인 스웨덴, 노르웨이에서도 바이킹의 노략질이 줄어들었고, 제국에 몰려드는 입대자들도 바이킹보다는 그저 북구에서 온 전문적 전사집단으로 바뀌어간다. 스칸디나비아, 스웨덴 등에서도 꾸준히 모집은 이루어졌지만,[9] 이 시기에는 헤이스팅스 전투 이후 노르만족에게 정복당한 영국에서 허스칼로 활동했던 앵글로 색슨족 출신이나, 노르만족이 지배하는 이탈리아에서 온 인물 등 다양한 북구인들이 친위대로 입대했다. 당시 잉글랜드에서 온 친위대원들을 로마인들은 바랑인보다는 '''앵글로바랑기''' 혹은 '''켈트인 친위대'''[10]라고 불렀다. 1204년 4차 십자군 때 마지막까지 황궁을 지키며 방위하다 궤멸당했던 친위대는 테오도로스 1세 시절에 재건되었고, 최소한 1259년까지는 존속했다.[11] 후에 1400년대까지 '바랑인'이라는 단어가 동로마의 역사에 등장하지만, 이것이 선대의 친위대와 같은 집단인지, 아니면 서유럽, 특히 영국에서 온 용병 집단인지는 확실하지 않다.
이들은 동로마 제국의 황제와 충성 서약을 맺었는데 이는 북유럽 바이킹들의 허스칼 맹세와 비슷한 것이었다. 그러나 허스칼들이 그의 주군과 생사를 같이 한 것과 다르게 친위대의 충성 서약은 황제 개인보다는 제위 자체에 있었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한 예로 니키포로스 2세요안니스 1세에게 암살을 당했을 당시, 바랑인 친위대는 전임 황제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마지막까지 싸웠지만, 결국 찬탈자가 니키포로스 2세를 죽이자 그들은 바로 그 자리에서 방금까지 싸우고 있던 적인 요안니스 1세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로마노스 4세알프 아르슬란에게 포로로 잡혀 있는 동안 부제인 요안니스 두카스의 명령을 받고 그를 실각시키기도 했다. 콤니노스 왕조 당시, 아들 요안니스를 내치고 딸 안나 콤니니에게 제위를 물려주고 싶었던 황후 이리니 두케나가 바랑인 친위대를 시켜 요안니스가 입궁하지 못하도록 저지했지만, 황제의 인장을 찬 요안니스의 모습을 보고 바로 충성을 바쳤다는 설화도 있다. 이들은 정변이 잦은 제국에서 개인보단 제위 자체에 자신들의 충성심을 바친 듯하다.
어쨌든 이들은 높은 충성심으로 명성이 높았다. 혼란한 시기였고 반란이 매우 많았던 동로마 제국에서 그만큼 강하고 크며 결속력이 높은 집단이 대규모 반란을 한 번도 일으키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었고, 황제들의 마음을 동하게 만들었다.[12] 이들은 전원 보병으로 구성되었고 주로 도끼와 방패로 무장했는데, 안나 콤니니의 기록을 따르면 쇠사슬로 된 체인메일을 이용해서 중갑을 착용했다고 한다. 그리고 미하일 프셀로스에 따르면 이들은 도끼뿐만 아니라 롱소드와 롬파이아[13]로도 무장했다고 한다.

2.1. 활약


사실 이들이 이름을 날린 대규모 '전투'는 얼마 없다. 그럴 만한 것이 황제의 친위대인데, 이들이 참전할 정도로 큰 회전이 쉽게 안 터졌기 때문.[14] 바실리오스 2세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둬 내전을 종식시킨 계기가 된 아비도스 전투나 요안니스 2세가 페체네그족을 격파한 베로이아 전투 정도[15]. 하지만 참전한 전투마다 상당히 강한 인상을 주었는데, 칸나이 전투[16]에서도 바실리오스 보이오안니스와 바랑인 친위대를 파견하여 노르만 기사대를 격파했다. 이들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목숨 걸고 싸워서 튀르크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주었으며 4차 십자군 때도 용맹하게 저항했다고 한다.
이들이 치른 전투 중 가장 유명한 전투는 아이러니하게도 바랑인 친위대가 패인을 제공한 디라키움 전투다. 이 전투에 투입된 바랑인 친위대는 윌리엄 1세가 이끈 노르만인의 잉글랜드 정복 과정에서 숙청을 피해 살아남은 앵글로색슨 전사들로 구성되었다고 전한다. 이들은 로베르 기스카르가 이끌던 노르만 기사들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격퇴했지만, 복수심에 너무 불탄 나머지 전열을 무너트리고 달아나는 노르만 기사들을 추격했다. 그러나 너무 깊숙히 추격한 나머지 노르만인들의 반격을 받아 밀리게 되었고 결국 그들은 근처 성당에 들어가 저항한다. 그러자 로베르 기스카르는 성당에 불을 질러 이들을 불태워 죽였다. 정예 전력에 큰 피해를 입은 알렉시오스 1세는 로베르의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패퇴하고 만다.
이들의 전투 스타일을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남아있는 자료들을 보면, 자신들의 고향인 북유럽과 잉글랜드에서와 같이 엘리트 보병으로써 전투에 임했을 확률이 높다. 많은 역사가들이 흔히 '''펠레키포로이 바르바로이(pelekyphoroi barbaroi)''', 즉 '도끼를 진 야만인'이라고 묘사했던 만큼 배틀액스아밍 소드로 무장했을 것이다. 그러나 황실 근위대라는 특징상 마상에 올라서 전투를 했다는 기록도 흔하게 등장한다. 상기한 베로이아 전투에서도 처음에는 기병들과 돌격했다가, 황제가 하마 전투를 지시하자 내려서 전진했다는 묘사가 나오고, 훗날 4차 십자군 당시에도 말을 타고 성벽 위를 돌아댕겼다는 라틴인들의 기록이 있다. 아마도 기동을 위해 말을 타다가 전투 시엔 하마하는 경우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 서브컬처에서의 등장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포가튼의 바리 미션에서 바이킹족으로 등장한다.[17] 항목 참조.
미디블2: 토탈 워에서 등장하는데 능력치는 개사기급이다. 그러나 양손무기를 쓰는데 특유의 모션 때문인지 효율성은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러던 것이 킹덤즈 크루세이드에서는 양손무기가 버프를 받으며 크루세이즈 최강 보병의 위치를 차지했다.
미디블 토탈 워와 비슷한 시대배경을 다루는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도 등장한다. 용병단으로 등장하며, 다른 용병단과는 달리 동로마 황제의 봉신이기 때문에 동로마 황제만이 동원할 수 있고, 다른 용병단과 달리 '고용'이 아닌 '동원'이기에 고용비용 및 유지비용도 저렴하여 동로마 플레이에서는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 토탈워 시리즈처럼 각 유닛마다 고유 스펙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병종 구성이 중보병 중심이라 성능도 상당히 좋은 편으로, 그리스 문화권의 고유 상비군인 카타프락토이(중기병+궁기병)을 양익에 배치하고 중앙에 바랑인 친위대를 배치하여 중앙이 버텨주는 사이 양익이 적을 포위섬멸하는 모범적인 망치와 모루 전술 사용은 동로마 플레이의 정석 중의 정석...이었다. 그러나 패치마다 너프에 너프를 거듭하면서 초기와 같은 비범한 제국의 위용은 더이상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영지가 개발될 수록 징집병의 수가 늘어나는 것처럼, 용병단 역시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규모가 성장하도록 설정되어 있는데 이 성장률마저 다른 용병단보다 낮다. 역사적 라이벌인 이슬람의 맘루크[18]에 비교하면 규모가 영 작아서 좀 아쉽다. 물론, 아직 동로마가 제국의 위용을 잃지 않은 중세 초중반 배경일 때에는 국력으로 극복하면 상관없지만.
또한, 캐릭터 개개인 단위의 이벤트가 충실한 게임답게 플레이어들을 즐겁게 해 줄만한 깨알같은 이벤트도 많이 준비되어 있다. 동로마 황제로 플레이 할 때 공주를 제때 결혼시키지 않으면 친위병과 눈이 맞아서 결혼시켜 달라는 이벤트가 종종 발생하여 위신에 약간의 타격을 입지만 결혼을 허락할지, 아니면 내 딸을 넘본 야만인 촌뜨기 친위병 놈의 목을 쳐서 딸의 방 창문에서 잘 보이는 곳에 걸어둘지 선택할 수 있다. 또한, 북구(분화 이전의 노르드문화, 또는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 문화) 영주로 플레이 할 경우 자식들이 바랑기안 가드에 입대하고 싶어하는 이벤트가 몹시 자주 발생한다. 허락해 주면 위신을 얻고, 못 가게 잡으면 위신을 잃는다. 이렇게 바랑기안 가드에 입대한 인원들은(당대 최고의 대도시 중 하나였던 콘스탄티노플에서 넓은 세상 물을 먹은 덕분인지) 외교력 +2에 무력 +1 효과를 주고 같은 트레잇을 단 인물들끼리 관계 보너스를 받는 '바랑기안 가드' 트레잇을 얻게 된다. 이게 북유럽에서 유행하는 무슨 유학 코스라도 된 것인지, 워낙 입대자가 많아 노르웨이 왕, 스웨덴 왕, 덴마크 왕이 사이 좋게 바랑기안 전우회 소속(...)인 경우도 드물지 않게 보인다. 종종 이슬람 제국과 혈전을 벌이는 동로마군의 일익을 초상화에 금테 두른 북구 왕국의 국왕께서 지휘하는 경우도 있을 정도[19].
또 이 외에도 바랑기안 가드 이벤트 체인에도 깨알같은 이벤트가 많은데...
  • 바랑인 친위대에 입대했던 아들이 몇년 뒤 돌아오면서 '공훈을 세운 자에게 너그러운' 그리스의 왕(=동로마 제국 황제)에게 받은 막대한 금화를 롱쉽 한가득 실어서 아버지에게 가져다주거나[20]
  • 이상한 갑옷과 창을 든 전사가 내 호위병들을 단숨에 제치고 들어와 날 껴안길래 잘 들여다보니 전쟁터에서 어떻게 단련했는지 흉터[21]도 생기고 무력이 무려 +4 된 용사가 된 아들이었다거나
  • 여러 번의 전투에 참전하면서 미클라가르드(콘스탄티노플)와 세르클란드(이슬람 땅)에서 자주 쓰이는 전략전술을 배워와 뛰어난 전략가가 되는 등.
이런 훈훈한 이벤트도 있는 반면, 골치아픈 이벤트도 많이 있는데...
  • 세르클란드 땅에서 전사하여 영영 돌아오지 못하는 몸이 되거나
  • 동로마의 정쟁에 휘말려 눈이 뽑히고 거세당한 채 돌아온다거나[22]
  • 그리스 여자랑 결혼해서 현지에 정착하겠다고 편지를 보낸다거나
  • PTSD에 빠져서 악몽에 시달리는 폐인이 되어 돌아오거나
  • 아버지의 종교와 문화를 버리고 그리스의 문화와 종교를 받아들인채 돌아오거나
  • 몸 성히 돌아오긴 했는데 영문모를 그리스식 사랑에 대해 얘기하고 다니는 괴짜가 된다거나[23] 등.
물론 적당히 복무하다 돌아온다거나, 동로마 여자랑 결혼해서 데리고 오는 등의 적당한 결과도 있어서, 일이 꼬여서 입대한 아들들이 죄다 골치아픈 이벤트에 휘말려 적당한 계승자가 없어지지만 않는 한 상당히 재미있다.

4. 여담


바이킹의 기록에 따르면, 바랑인 친위대 중에서 하랄 하르드라다라는 자는 황제의 사무실에서 직접 봉급을 받고, 황제 미하일 5세를 죽이고, 공주를 유괴했다고 한다. 이 사람은 나중에 노르웨이의 왕이 되었다. 어디선가 들어봤다 싶은 역덕이라면, 헤이스팅스 전투 직전 스탬퍼드 브리지 전투에서 해럴드 2세에게 패해 죽은 그 사람 맞다. 다만 이 일화는 동시기 동로마의 사서들과 교차검증되지 않는다. 동로마 사서들끼리조차 하랄 하르드라다가 쫓겨났다는 것만 일치할 뿐, 그 이유에 대해서는 일치하지 않는다. 한마디로 뻥카일 가능성이 꽤 높다.
1차 십자군의 곁가지가 통채로 친위대에 입대한 경우도 있었다. 노르웨이의 시구르드 1세가 이끄는 6천 명의 십자군은 1107년 노르웨이를 출발해 예루살렘 왕국에서 활약한 뒤 육로를 타고 노르웨이로 돌아가려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여기에서 황제 알렉시오스 1세는 이들을 극진히 대접했고, 이에 반한 많은 병사들이 바랑인 친위대에 입대하려고 했다. 시구르드 역시 이를 흔쾌히 수용하였다. 시구르드는 황제가 제공한 보석을 여비로 해서 육로로 노르웨이에 돌아갔는데, 십자군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았음에도 그와 함께 돌아온 병사들은 백 명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여정 도중의 손실을 제한다고 해도 수천여의 모집이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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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로마의 역사가 요안니스 스킬리체스(Johannes Skylitzes)의 책 '역사'에도 바랑인 친위대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한 친위대원이 트라키아인 여성을 겁탈하려고 했는데, 여성이 저항하다가 그 친위대원의 창을 빼앗아 죽인 일이 있었다. 정당방위였던데가, 바이킹들은 명예를 중시했기 떄문인지 '''명예 없는 행동을 한 친위대원의 소지품을 동료들이 모아서 그 여성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비잔티움 제국/군대의 복원도들에서 볼 수 있듯 동로마군의 병사들은 가슴 부분에 가죽으로 된 하네스를 착용해서 호버크의 중량을 분산시키고 흘러내리지 않도록 했는데, 이 하네스를 일명 '''바랑인의 브라(Varangian Bra)라고 불렀다 한다'''(...) 물론 브래지어는 원래 속옷이 아니라 팔/가슴 보호구를 뜻하는 의미였지만, 생김새도 브래지어 같이 보이다보니 간혹 역덕들 사이에서 웃음거리로 쓰이기도 한다. 더 웃긴 점은 '''이 하네스는 바이킹들이 아닌 페르시아 쪽에서 전해졌다'''. 이미 이전 기록이나 프레스코에서도 동로마 병사들은 이 하네스를 흔히 이용했는데 바랑기안들이 차고 다니는게 유명해지면서 이름이 붙은 모양.

[1] 참고로 영어로 '우리'를 뜻하는 'Our'와 같은 어원이다.[2] 이 자도 바이킹 출신이었다.[3] 이때 제국이 외국에 절대 넘겨선 안 될 3가지로 콘스탄티노스 7세가 규정한 내용 중에 있는 포로피니예니타(황실의 공주)를 넘겼다. 하지만 이 딜(?)로 키예프 공국을 필두로 루스 공국들이 정교회로 개종하고 그 인연으로 동로마 멸망 직전까지 동로마와 루스 공국들은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4] 당시 기준으로 금실과 자줏빛 염료는 평범한 천에 사용하기에는 지나치게 값진 물건이었으므로, 망토의 소재는 당연히 비단이었을 것이다. 문자 그대로 금의환향인 셈.[5] 서유럽의 사회문화적 발전상이 동방세계를 따라잡기 시작한 기점은 대략 길드와 상공업이 발달하기 시작한 중세 후기 무렵이다.[6] 북유럽보다는 좀 더 부유했던 프랑스나 신성로마제국의 귀족들도 황제나 왕, 교황의 사절로 콘스탄티노플에 방문하게 되면 '비단을 사는 것' 을 가장 큰 즐거움으로 여겼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특히 전매품인 자줏빛 비단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사적인 거래로 살 수 없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꼭 사고 싶어했고, 황제가 전매품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여 자줏빛 비단을 가지고 나갈 수 없게 되자 방금 전까지 친동롬파, 또는 지동롬파였던 사람이 비단을 사갈 수 없게 되었다는 아쉬움 때문에 순식간에 극단적인 반동롬파로 전향하여 동로마에 대한 폭언과 분노가 가득 담긴 기록을 남긴 일화까지 있을 정도.[7] 바론 바이킹들의 Norse Futhark 룬문자로 적힌 글귀인데 9세기쯤에 새긴 듯하다. 뜻은 Halfdan carved these runes 혹은 Halfdan was here으로 해석되는데 즉, 'Halfdan이 쓰고 감 혹은 왔다 감'이라 적힌 낙서였다.[8] 출처 - 비잔티움 : 어느 중세 제국의 경이로운 이야기.[9] 1015년부터 1130년까지 바랑인 친위대에 입대한 사람의 룬 비석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후에는 북구 지방에서도 룬 비석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문서로 남아있거나 동로마의 기록으로 전해진다.[10] 이는 고대 로마인들이 잉글랜드에 살던 브리타니아인, 앵글로 색슨인들을 뭉뚱그려 '켈트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11] 모레아 연대기에서 1259년까지 언급이 된다. 다만 이것이 4차 십자군 이전까지의 그 바랑기안 근위대 모병의 부활이라기 보다는 각 요충지에 파견되었던 소수의 바랑기안 분견대 들을 다시 중앙에 결집시키는 방향으로 재건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듯 하다.[12] 이 부분은 당시 동로마 제국 내에서 외국인인 바랑인 친위대가 가졌던 입지에서 이해해야 한다. 당대 기준으로 고도화된 정치 시스템을 갖추었던 동로마 제국에서는 그만큼 내부의 정치적 알력도 강할 수밖에 없었고, 내국인이라면 각자의 연고에 따라 이런 정치적 파벌들과 다양한 관계를 가지기 쉬울 수밖에 없었던 것. 그에 비해, 멀리서 온 외국인인 바랑인 친위대는 고용주인 황제 이외의 다른 인물과는 별다른 연고가 없기에 정치적 갈등에 끼어들 여지도 그만큼 적었던 것이다. 이러한 특징은 동로마 제국의 숙적인 이슬람 제국들이 노예병(굴람이나 맘루크)에게 군사력의 중추를 맡겼다는 점에서도 비슷하게 드러난다.[13] 트라키아 지방에 전해지는 낫 형태의 검인 팔크스(Falx)를 개량한 무기.[14] 물론 수백 정도의 소수 바랑기안을 황제가 직접 장군들에게 파견해 싸우게 하거나 분견대를 성에 주둔시켰다거나 하는 얘기들이 흔한 걸 보면 그냥 장식은 절대 아니었다.[15] 짐마차를 방패삼아 활과 화살을 보관해두며 스웜 전술을 구사하며 격렬하게 저항하는 페체네그족들을 바랑인 친위대 480명이 요안니스 2세와 돌격해 두꺼운 사슬갑옷으로 페체네그족의 화살을 튕겨내며 양손도끼로 짐마차를 부수고 페체네그족들을 도륙내어 페체네그족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16] 천 년도 더 전인 한니발 바르카로마군을 격파한 전투와는 다르다.[17] 위의 이미지를 보면 바이킹 특수 유닛 버서커와 맞아떨어진다.[18] 게임상으로는 이집트 왕작위를 가진 인물- 보통은 술탄 - 의 봉신 용병단이다.[19] 바랑기안 가드 복무 중에 아버지가 죽을 경우 입대 중인 아들이 왕국으로 돌아와 즉위하게 되는데, 시스템상 이 귀환 시간에 딜레이가 없다. 즉, 아버지가 죽으면 바로 아들이 왕위를 계승한다. 그런데 이 아들이 군대를 지휘하여 전투를 치루고 있는 중 이었을 경우,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지휘관이 바뀌지 않기 때문에 전투가 끝날 때까지는 전투를 지휘하게 되는 것. 사실은 일종의 버그에 가깝다.[20] 가난한 북구 영주 기준에선 정말 큰 돈이다. 그나마 왕급 작위면 모를까, 구석 백작 같은 경우는 몇십년이 걸려도 모으기 힘든 막대한 액수인 경우도 있다.[21] 얼핏 보면 나쁜 트레잇같지만, 실은 매달 위신 보너스를 주는 좋은 트레잇이다. 특히 위신으로 건물을 올릴수 있는 부족정에선 정말 중요하다.[22] 비잔틴 제국으로 플레이할 경우 바랑인 친위대원 중 한 명이 하필 공주랑 눈이 맞아서 연인이 되는 이벤트가 있다. 이 때 비잔틴 황제에게 주어지는 선택지 중에 그 친위대원의 눈을 뽑고 거세해버리는 선택지가 있다. 그래서 그 이벤트와 연관된 이벤트 아니냐고 추측하는 경우도 있다.[23] 출산율 -15%, 봉신관계도 -5, 같은 트레잇끼리 관계도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