콤니노스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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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로마 제국과 트레비존드 제국의 왕조.
이사키오스 1세가 스타트를 끊고 알렉시오스 1세부터 본격적으로 대를 잇기 시작하여 1057년~1059년, 1081년~1185년간 제위를 차지하였다. 바실리오스 2세 이후 지속된 제국의 몰락을 멈추어 100여년간의 중흥[2] 을 다시금 가져왔으며, 특히 경제적인 면에서는 역대 최고의 번영을 누렸다.
이 시기의 제국은 '콤니노스 체제'라 할 수 있는 족벌주의적 인척집단[3] 이 정치 권력을 독점한 시기로, 몰락해가는 제국을 전체적으로 개혁하기 위해 관료 시스템은 물론 시장제도, 군사제도, 행정제도 등이 모조리 변화하였고 중앙과 지방 간의 상호관계가 본격적으로 변화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황혼기를 막지 못한 왕조이기도하다. 제위를 찬탈당한 후 망명 정권인 트라페준타 제국을 세우기도 하였다.
2. 역사
2.1. 가문의 기원
11세기 동로마 제국의 가장 저명한 역사가인 미하일 프셀로스에 의하면 콤니노스 가문은 트라키아의 콤므[6] 라는 고을에 기원을 둔 귀족 가문으로 완전한 그리스계 가문으로 추정된다.[7] 대개 시조로 보는 인물은 바실리오스 2세의 신하였던 마누일 에로티코스 콤니노스이다. 바실리오스 2세는 치세 초반을 포카스, 스클리로스 등의 반기를 든 군벌들을 진압하는 데 쏟아부었고, 내부의 상황이 정리되자 불가리아 제국, 파티마 왕조 등 제국의 고토를 차지하고 있는 적들을 공격하고자였다. 그런 황제가 가만히 생각해보니 영지에 묶여서 외침을 막아내고 고급 장교를 육성할 군사 귀족 또한 많이 사라져서 제국의 국방력이 약화될 것이 염려되었다.
그리하여 새로이 지방의 군사 귀족을 육성하면서도 반란의 위험을 가능한 줄이기 위해 으레 군주들이 그렇듯 황제와 가깝고 충성스러운 인물을 택하게 되었고, 이에 선택받은 인물들[8] 중 하나가 훗날 위대한 황제들의 시조가 되는 마누일 에로티코스 콤니노스이다. 이렇게 마누일은 소아시아 북부의 파플라고니아에 위치한 카스타몬, 또는 카스트라 콤니니[9] 라고 알려진 도시 근처의 영지를 하사받아 가문을 개창하였다.
2.2. 첫 황제를 배출하다
마누일 에로티코스 콤니노스는 자식으로 이사키오스, 요안니스와 딸 한 명을 두고 사망하였다(1020년). 자식들이 아직 성년이 되지 않은 어린 나이였기에 마누일은 자신의 사후에도 이들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이들을 당시 황제 바실리오스 2세에게 위탁했다. 바실리오스 2세는 충직한 신하의 자식들을 황궁에서 교육시켰다.
바실리오스 2세의 의향에 따라 군사귀족으로 성장한 마누일의 장남 이사키오스는 장년에 들어서 큰 전환기를 맞게된다. 마케도니아 왕조의 마지막 지배자이던 쎄오도라가 죽고 양자로 들인 '노인' 미하일 6세가 새로이 황제가 되었는데(1056년), 그는 지방 군사귀족을 억누르는 경향을 보였다.[10] 문제는 군축에 반발하여 저항할 군사귀족들을 억누를 혈통적인 정통성이 없어서 황권이 취약하다는 것이었다. 결국 황제에게 반발한 군사귀족들[11] 의 반란에 가담한 이사키오스는 반군의 황제로 추대되었고 자신의 영지였던 파플라고니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향해 진군하였다. 미하일 6세는 진압군을 파견하였으나, 이사키오스는 그가 동원한 동부 타그마와 관구군이 심각한 타격을 입을 정도의 혈전 끝에 진압군을 격파하였다.
미하일 6세는 궁지에 몰렸고, 본래 황제와 사이가 나쁘던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미하일 케룰라리오스[12] 가 개입하여 황제는 폐위 되었다. 활짝 열린 수도의 성문을 지나친 이사키오스는 시민들의 환대를 받으며 콤니노스 가문 최초의 황제 - 이사키오스 1세로 즉위하였다(1057년).
그러나 가문 첫 황제의 재위는 짧았다. 자신이 황제의 등극에 개입했던 총대주교는 교회세력을 등에 업고 정치에 개입하려하였고, 재정복구를 위해 교회재산을 보태라며 총대주교와 마찰을 겪은 황제는 사임을 요구하는 등의 갈등 끝에 총대주교를 추방시켜버렸다. 결국 교회의 지지와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의 인기를 상실한 황제는 대(對) 페체네그 원정에 나서는 등의 행보를 보였으나 얼마 안가 사냥에서 부상을 입게 되어 결국 황위 양도를 결정한다. 처음에는 동생이자 알렉시오스 1세의 부친인 스콜라이 연대장(Domestic of the Schools) 요안니스 콤니노스에게 황위를 제의했으나 요안니스가 거부하자[13] 친 두카스파 관료인 미하일 프실로스의 권유로 콘스탄티노스 10세에게 제위를 물려주게 되었다(1059년).[14]
2.3. 제국의 위기는 가문의 기회
제위는 의외로 빨리 되돌아왔다. 이사키오스 1세의 후임이던 두카스 왕조의 황제들이 실패를 거듭했기 때문이었다. 콘스탄티노스 10세는 콘스탄티노스 9세가 병합하였지만 군축과 동시에 동화정책 및 사민정책이 맞물려 자위능력이 거세된 제국령 아르메니아와 900년대 중반 이후 한 번도 외세의 침략을 받지 않은 제국의 근간인 아나톨리아를 셀주크 제국이 점령하고 침탈하는 와중에도 전략적인 오판으로 별 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콘스탄티노스 10세가 말년에 와병하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사망하고 아나톨리아 동부의 거점 도시인 케사리아(Kaisareia)가 함락되자 위기의식을 느낀 제국인들의 추대로 전임 황제의 황후와 결혼하여 뒤를 이은 군인황제 로마노스 4세는 제국방위에 진력하여 얼마간 성공하는 듯 하였으나 무리하게 일으킨 원정에서 안드로니코스 두카스의 배반 끝에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대패, 제국의 중앙 야전군을 날려버리고 아르메니아를 셀주크 제국에 넘겨버리게 된다. 그리고 대망의 하이라이트인 미하일 7세는 20대의 젊은 나이에 제위에 올라 채 서른도 못 되었던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실패를 거듭하여 경제혼란, 반란, 영토상실, 정치혼란 등을 겪은 끝에 군사령관들의 반란을 맞아 폐위되었다.
이런 대혼란의 와중에 제국 서부와 동부에서 각각 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와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이 중 아나톨리아콘 테마 사령관이던 보타니아티스가 먼저 수도로 접근하여 두카스 가문의 도움으로 입성, 니키포로스 3세로서 제위를 차지하고 콤니노스 가문과 알렉시오스 콤니노스의 도움을 받아 브리엔니오스를 물리쳤다. 그러나 노령의 찬탈자는 당면한 문제해결에서 큰 성과를 보이지 못했으며, 미모의 젊은 전 황후[15] 를 취하고 포르피로옌니토스였던 황자를 후계에서 내치는 등의 행위를 벌여 점점 인기를 잃어갔다.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사람들은 무능한 노황제보다는 그의 밑에서 반란을 진압하고 외침을 막는 등 두각을 드러내던 콤니노스 가문의 형제 -이사키오스 1세의 조카- 들에게 눈을 돌리게 되었다.
2.4. 두 번째 황제, 진정한 황실로
배출한 황제들이 실패를 거듭하였으나 여전히 강성했던 두카스 가문은 니키포로스 3세가 내쳤던 미하일 7세의 아들인 어린 콘스탄티노스 두카스[16] 를 통해 가문의 차기 제위를 보장해 줄 사람으로 사위 알렉시오스 콤니노스를 택하였다. 결국 콤니노스-두카스의 연합 쿠데타로 니키포로스 3세가 퇴위하였고, 우여곡절 끝에 두카스 가의 여식이던 이리니 두케나를 알렉시오스와 함께 제위에 올림으로서 알렉시오스 1세가 즉위하였다(1081년). 알렉시오스는 효율적인 선택과 집중을 통해 외침[17] 과 경제문제 등의 과업을 해결하고 일족의 인물들을 요직에 배치하는 족벌주의를 실시하여 정치적인 혼란을 줄여나갔다. 그리고 가문 최초의 포르피로옌니티인 안나 콤니니를 시작으로 자식들을 유력자와 맺어주고 세 번째 자식이자 황자인 요안니스 2세가 태어나자 공동황제로 삼아 후계자로 점찍어 헝가리의 공주와 약혼시켰다. 후계의 왕조들의 선조이자 대를 잇는 황조의 성립이었다.
이후 알렉시오스는 실지 수복을 위해 교황 우르바노 2세에게 원군을 요청했는데, 이는 어디선가 잘못 굴러가기 시작하여 십자군 원정이라는 거대한 눈덩이가 되어 돌아왔다. 그는 당황하였으나 영리하게 이를 이용하여 소아시아의 해안가와 서부 일대를 회복하는데 성공하였고 여력을 소모된 국력을 회복하는데 사용할 수 있었다. 장기적인 배려는 부족하였으나 급한 불은 끈 알렉시오스는 치세 후기를 내부 안정에 쏟아부었다. 말년에 주변이 안정되자 아나톨리아로 진군, 필로밀리온 전투에서 승리 하여 룸 술탄국을 밀어 붙였으나, 건강이 악화되어 장녀 안나의 희망과는 달리 그대로 요안니스 2세를 후계자로 지목하고 1118년 사망하였다.
2.5. 중흥과 황혼의 이면을 가진 황조
뒤를 이은 요안니스 2세는 재위 초기 모후(이리니 두케나)-누이(안나)-매형(니키포로스 브리엔니오스)이 얽힌 쿠데타에 직면했으나 이를 진압하고 아버지가 물려준 안정된 내부 상황과 재건된 군대를 바탕으로 실지수복에 나서기 시작했다. 베네치아에 통상압박에 굴복하기도 했으나 페체네그를 베로이아 전투에서, 헝가리-세르비아를 하람 전투에서 격파하였고 아나톨리아 동부의 투르크계 토후국인 다니슈멘드와의 여러 전투 끝에 개선식을 열 정도의 대승을 거두는 등 군사행동들을 대체로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후 노르만인과 투르크인들이 각각 내부 분열되는 등 여러가지 운도 따라주어 소아시아 북중부(주로 파플라고니아, 강그라 인근)와 남부 일대를 회복하고 일시적으로 안티오크를ㅡ 회복하기도 하였다.[18] 그러나 시리아에서 사이자르 공방전의 실패 이후 안티오크의 레몽이 배반하는 등 말년에 위기가 닥쳤고 이를 제압하기 위해 원정하던 중 사냥에서 입은 부상으로 앓아누워 진중에서 막내인 마누일을 후계자로 지목하고 사망하였다(1143년).
잠재적 경쟁자인 형과 삼촌을 견제하며 제위에 오른 마누일 1세는 위협적인 제2차 십자군 원정을 무사히 넘기자 사방으로 원정에 나섰다. 엄청난 돈을 쏟아 부은 남이탈리아 원정은 결국 실패하였으나 동방에서는 염원하던 안티오크를 다시 수복하기도 하였고, 예루살렘 왕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으며 발칸에서는 시르미온 전투를 통해 헝가리를 굴복시키고 크로아티아 지방까지 수복하였다. 선대에 굴욕을 맛보게했던 베네치아까지 격퇴한 마누일은 치세의 절정을 누렸으나, 말년은 고난을 겪었다. 서유럽에서 레반트에 이르기까지 마누일이 이룩한 외교적 균형은 여전히 안정적이었지만, 군비의 압박과 부정부패 등이 표면화 되었고 반서구 여론이 싹텄다. 1176년 미리오케팔론 전투에서 패배한뒤 히엘리온-리모키르 전투로 뒷수습을 하면서 노력하던 마지막 로마의 대제인 마누일대제는 얼마 못가 그의 제국처럼 건강이 악화되어 죽었다(1180년). 마누일 자신에게 과도하게 의존하는 제국을 어린 아들에게 남긴채로.
2.6. 제위를 찬탈당하는 중입니다
어린 황제 알렉시오스 2세는 어렸기에 어머니이자 마누일 1세의 두번째 아내인 안티오키아의 마리아가 섭정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방인인 그녀와 섭정단을 맘에 들지 않아했던 제국 시민들은 점점 황후를 지지하지 않게 되었고, 쿠데타가 일어나자 결국 친척 안드로니코스 1세가 틈을 파고들어 마누일의 가계(家系)를 모조리 죽이고 찬탈하게 되었다. 민심에 편승하여 마누일 1세가 힘들여 구축한 외교 관계를 파탄 내고 부정부패를 척결하는 등의 쇼를 통해 지지를 확보한 신임 황제는 곧 능력에 맞지 않는 공포정치를 펼쳤으며, 그로 인해 인기를 상실하여 스스로가 초래한 외침과 반란에 시달리다 폭동으로 인해 폐위, 살해당했다. 그렇게 콤니노스 혈통의 마지막 로마 황제는 죽었다(1185년).
2.7. 트레비존드 제국
로마 제국의 제위는 잃었지만 콤니노스 왕조는 대를 이어나갔다. 안드로니코스 1세의 손자인 알렉시오스와 다비드는 동쪽으로 도망가 어머니의 친정[19] 인 조지아 왕국에 의탁했고, 제4차 십자군 원정 전후의 혼란을 틈타 소아시아 동북부의 해안을 기반으로 하여 바다 너머의 크림 반도 일대까지 세력을 확장, 스스로 대(大) 콤니노스라는 의미의 '메가스 콤니노스'로 칭하며 트레비존드 제국으로 독립하였다.
이후 니케아 제국, 이피로스 공국 처럼 제국 재건을 위해 경쟁하였으나 소아시아 서부에서 니케아 제국에게 패배하였고 투르크에게 소아시아 북부의 거점이던 시노피마저 빼앗기자 주변 나라에 하루하루 공물을 바치는 소국으로 전락하였다. 결국 니케아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을 수복하고 제국을 재건하자 명분마저 잃어버리게 되었고 콜키스해의 무역 거점으로 연명하다 1461년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당하여 콤니노스 왕조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나마 경제적으로는 부유했으며, 1453년에 멸망한 비잔티움 제국보다 좀 더 늦게 멸망했다.
3. 경제
1081년 알렉시오스 1세가 제위에 올랐을 때, 제국의 경제는 파탄 상태였다. 과거 막대한 부담을 지우던 군비는 많이 축소되었지만, 영토 상실과 맞물린 결과 군대 자체와 그 기반이 동시에 붕괴해 버린 상태였다. 수요를 따라잡지 못한 화폐의 급격한 가치 절하는 실지로 인한 시장 붕괴와 맞물려 통화 체제 역시 박살내 버렸다. 그나마 전대 황제들이 재정 압박을 견디다 못해 연금 지불을 멈춘 것은 좋았으나, 동시에 제국 정부에 대한 신뢰와 권위마저 추락시킨 상황이었다.
알렉시오스는 선대 황제들과 마찬가지로 재정적인 여유가 없었으므로, 차라리 초강수를 두는 선택을 택했다. 아예 재정 부담을 덜기위한 화폐의 가치 절하를 멈추지 않고, 예산 확충을 위해 세율을 올리는 정책을 밀어붙인 것이다. 당연히 이러한 정책은 범국가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나, 가용 예산이 늘어나고 군대가 재건되기 시작하면서 외적들을 격퇴해내자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급한 위기들이 마무리 되자 1092년에는 화폐 개혁이 진행되었다. 동시에 제국의 기존 물적, 인적 요충지이던 아나톨리아에서 몰려온 피난민들이 유럽지역에 정착하여 생산 활동을 시작하였고 경제는 다시금 회복되기 시작하였다. 12세기로 들어서면 큰 자연 재해가 없는 환경이 제국에 도래하면서 전체적인 생산량을 증대시켜 시장 경제가 활성화 되었고, 좀더 자유시장적인 분위기에 알맞는 -전보다 작은 정부라 볼 수 있는- 콤니노스 체제가 시작되면서 제국의 경제는 호황을 맞게 된다.
12세기 중반을 넘어서 재건 된 군대가 테마 제도를 버리고 프로니아 체제를 택하면서 용병을 보다 많이 고용하고 중앙 상비군을 증대 시키게되자, 군역을 담당하던 인력 비율이 줄어들게 되고 더욱 경제 활동에 종사하는 인구가 늘게 되었다. 동시에 앞서 언급한 여러 요인으로 인해 도시의 인구가 크게 증가하여 제국 제2의 도시인 테살로니키는 십수만에 달하는 도시로 성장하였고 니케아, 모넴바시아 등의 지방 도시들도 수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게 되었으며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반백 만 명에 달하는 대도시가 되었다.
이 시기의 제국 경제는 절정에 달하여 당대 사람들이 과거 전성기를 뛰어넘었음을 -물론 단순 비교는 힘들지만- 자부할 정도가 되었고, 그 유명한 '수도에서 일일 관세로 금화[20] 2만닢을 거둬 들였다'는 기록이 등장할 정도가 되었다. 관치 경제가 아닌 자유 시장 경제 체제에서 '관세'로 말이다. 이러한 막강한 경제력은 마누일 1세 시기 적극적인 대외 활동에 큰 보탬이 되어 주었다.
그러나 1180년 마누일 사후를 전후하여 상황이 바뀌기 시작하였다. 마누일은 재위 내내 호탕한 -다르게 표현하면 방만한- 지출을 자주 저질렀고,[21] 이는 재위 중후반까지는 큰 문제를 노출시키진 않았다. 튼튼한 경제가 유지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족벌 체제의 특성상 부정부패가 늘어가기 시작하였으며 정부가 고용한 많은 외국 관리들 또한 이에 한몫을 하기 시작했다. 부를 축적하여 힘을 기른 상인들은 제국 정부에 큰 소리를 치게 되었으나, 이들을 제어할 관료 집단은 이미 축소된데다 자리를 채우고있던 무능하고 부패한 콤니노스 집단은 돈줄을 쥔 상인들을 통제하지 못했다.[22] 정부의 착취가 심해지고 통제력이 약화되자 지방이 공공연히 '제국 전역에서 생산 된 재화를 바다가 강물 받아들이듯 흡수해대면서 뭐가 더 부족하냔거냐?'라는 불만을 토로할 정도가 되어 버렸고, 이러한 움직임은 마누일 재위 동안은 수면 아래에 있었으나 그의 사후 앙겔로스 왕조가 등장하면서 제국 전역에 번지게 된다.
이러한 식으로 진행 된 정치 혼란과 반란은 전체적인 경제력에 나쁜 영향을 미쳤고, 제4차 십자군 원정으로 인해 제국이 공중 분해되자 제국의 경제력은 12세기의 전성기를 그리워하며 하강 곡선만을 그리게 된다.
4. 통치 체제
5. 후손들
11세기 중반부터 유행한 귀족 가문 간의 혼인과 알렉시오스 1세 이후 실시된 족벌주의 정책 덕분에 콤니노스 왕조 이후의 로마 황제들은 거의 알렉시오스 1세의 후손들이다. 앙겔로스 왕조의 이사키오스 2세, 알렉시오스 3세 형제들은 알렉시오스 1세의 외증손자[23] 이며, 라스카리스 왕조의 개창자인 테오도로스 1세는 알렉시오스 3세의 사위이다.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개창자인 미하일 8세의 어머니는 알렉시오스 3세의 손녀이며[24] , 아내는 요안니스 3세의 조카 손녀[25] 였다.
그 외에도 직계, 방계를 가리지 않고 혼인 외교를 한 결과 후손들은 수없이 많아지게 되었다.
6. 크루세이더 킹즈 2에서
이사키오스 1세를 제외한 로마 제국의 콤니노스 황제들은 어린 시절의 알렉시오스 1세부터 전부 플레이가 가능하며, 트레비존드 제국의 황제들도 제한적이지만 가능하다. 특출난 것은 역시 알렉시오스 1세로, 성인이 된 알렉시오스는 능력치가 워낙 좋아서 제국의 상황이 외적으로는 영 아니올시다 같아도 사기적인 제국의 장점을 살리며 로마 제국을 복원할 수 있다. 그가 주인공인 알렉시아드 시나리오가 마케도니아 왕조의 바실리오스 1세가 주요인물인 올드 갓 시나리오와 함께 사랑받는 이유이다.
7. 관련 문서
안나 콤니니
알렉시아드
두카스 왕조
앙겔로스 왕조
라스카리스 왕조
팔레올로고스 왕조
트레비존드 제국
[1] 라틴어로는 콤네누스(Comnenus).[2] 영어 위키백과: Komnenian Restoration(콤니노스 중흥)[3] 콤니노스 가문과 통혼을 한 인척들이나 콤니노스 황제들과 사적으로 깊은 유대를 맺고 있던 이들은 이 시기 새로운 권력 집단으로 부상하였다. 앙겔로스 가문, 에브포르비노스 가문, 바타치스 가문, 팔레올로고스 가문, 라스카리스 가문, 칸타쿠지노스 가문 등 후기 동로마 역사에서 매우 빈번하게 등장하는 가문들은 대개 11세기 초중반부터 기록에 남긴 했으나 콤니노스 가문의 황금기에 권력의 중심으로 올라선 이들이다. 반면 마케도니아 왕조 시절 막강한 아나톨리아 군벌로서 오랫동안 제국 정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스클리로스 가문, 아르이로스 가문, 쿠르쿠아스 가문, 부르치스 가문 등은 콤니노스 가문과 뚜렷한 접점을 만들지 못한 결과 역사 기록에서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4] 사냥 도중에 날아온 화살에 맞아 패혈증으로 인해 사망[5]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 살해당한 뒤 보스포루스 해협에 던져짐[6] Komme, 14세기의 다른 기록에 의하면 '콤니노스의 영지'라는 다른 이름도 가지고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7] 블라흐계 가문이라는 소수의견도 있지만 주류 학설은 그리스계 가문이다.[8] 바실리오스 2세의 내전과 원정에 관여하여 성장한 가문으로 콤니노스, 디오예니스, 달라시노스, 보타니아티스 등이 있지만 이 중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콤니노스와 달라시노스는 알렉시오스 1세 등극 당시 혼인 동맹을 맺은 두카스와 함께 후기 로마 황제들의 선조가 되었다.[9] Kastra Komneni, 라틴어로 콤니노스의 요새라는 뜻으로 현재 터키의 카스타모뉘(Kastamonü)이다. 이 영향인지 후대에 알렉시오스 1세와 요안니스 2세의 파플라고니아 원정의 주 목표가 카스트라 콤니니의 탈환이었다.[10] 지역 방위와 군사력을 책임지는 지방 군사귀족이 뭐가 잘못이냐는 의문이 들법하지만, 중앙에서 멀리 떨어져서 공격하기 까다로운 군벌들은 황제의 권위에 도전하는 등 골치를 썩혔다. 거기에 당시 제국은 11세기 중반 사방의 외적과 전쟁을 치르면서 성장한 군대로 인해 엄청난 군비로 신음하고있는 상황이었던지라... 애초에 콤니노스 가문도 지방 군사귀족으로 시작하여 반란을 일으켜 제위를 먹었다.[11] 후에 황제가 되는 콘스탄티노스 두카스와 니키포로스 보타니아티스, 명장 카타칼로노스 케카프메노스, 로마노스 스클리로스, 미하일 부르치스, 로마노스 3세 아르이로스의 아들들.[12] 동서 대분열의 그 사람이며, 콘스탄티노스 10세의 친척이다.[13] 아내이자 알렉시오스 1세의 모후인 안나 달라시니(Anna Dalassene)는 남편에게 황제가 되라고 부추겼었고, 이것이 좌절된 이후 아들들을 제위에 올리기 위해 대단히 고생했다.[14] 쿠데타로 제위를 차지했음에도 평화롭게 정권을 이양한 점은 특이할만하다. 그러나 제위 찬탈이라는 위험한 선례를 남겨 이후 제국 정부의 약화와 맞물려 1070년대의 쿠데타 잔치를 불러오게 된다.[15] 알라니아의 마리아. 조지아 왕국의 왕녀로, 미하일 7세와 니키포로스 3세의 황후이다. 지모를 겸비한 것으로 유명하였으며, 2살 연하의 알렉시오스 1세를 정부로 두고있다는 소문이 있기도 했다. 다만 이러한 식의 '미망인 황후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다' 따위의 소문은 굉장히 흔했다.[16] 미하일 7세와 알라니아의 마리아 사이의 아들. 알렉시오스의 장녀인 안나 콤니니가 태어나자 약혼하였으나, 1094년 사망[17] 서방의 노르만, 북방의 페체네그, 동방의 투르크라는 엽기적인 3면 전선이었다(...)[18] 지금이야 듣보잡 도시처럼 느껴지지 펜타르키라고 해서 5대 총 대주교중 하나인 말하자면 성지중 하나이다.[19] 형제의 아버지인 마누일은 조지아의 왕녀인 루수단과 결혼하였는데,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도망친 루수단이 두아들과 함께 고국에 의탁했을 때는 언니인 타마르가 여왕으로 있었다.[20] 당시 제국 최고 액화인 히피르피론(Hyperpyron)[21] 이탈리아 재정복을 위해서 안코나 등 아드리아 해변 동해안 및, 남이탈리아에 자금 지원을 상당히 크게 했다.[22] 이러한 상인 집단은 여론을 주도하게 되었고 이들은 경쟁 상대인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같은 서방의 상인 세력을 적대하였기에 반서방 감정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 과정 중의 1182년의 라틴인 대학살(Massacre of the Latins)도 빼놓을 수 없고. 동시에 특권없이 이러한 적대감에 노출 된 서방 상인들이 제국을 공격하는 1204년의 사태를 만드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베네치아는 상인들의 국가니까.[23] 딸 세오도라 콤니니의 아들의 아들[24] 딸 이리니 앙겔리나의 딸의 아들[25] 형 이사키오스 두카스 바타치스의 아들의 딸